[장원섭 교수의 자투리 한국사] 경징이풀 1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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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징이풀(인천시 강화도 해변에 펼쳐진 나문재 밭. 해변을 붉게 수놓은 나문재는 병자호란 때 백성을 죽음으로 처넣은 한성판윤 김경징 이름을 따 ‘경징이풀’이라고도 불린다.
해마다 여름이 되면 강화도 곳곳에 넓게 펼쳐진 개펄은 불그스름하게 물들기 시작한다. 여름이 지나면서 피어나는 선홍색 꽃이 마치 캔버스에 선홍색 물감을 뿌려놓은 듯한 느낌이 드는 풀밭의 모습이다.
개펄 곳곳에서 자라는 풀밭이 만들어내는 한 폭의 수채화 같은 풍경. 바로 나문재 풀이 만들어낸 광경이다.
육지 사람들에게는 무척 생소한 풀이지만 이곳 강화도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다. 봄철이 되면 이 풀의 어린싹으로 나물을 무쳐 먹는다. 쌉싸름한 이 나물은 춘궁기 배고픈 시절 서민들의 입맛을 돋우는 백성의 반찬이었다.
남도 지방에서는 ‘함초나물’로 많이 알려진 이 풀을 강화도 사람들은 ‘경징이풀’이라고 부른다.
강화도 사람들의 한(恨)이 서린 이름 경징이풀. 그 이름에는 지난 역사 속에서 결코 지워질 수 없는 기막히고도 가슴 저린 사연이 숨어있다.
17세기 초 동아시아의 새로운 강자로 등장한 여진족 국가 후금(後金)이 명(明)나라를 몰아내고 중원을 차지하기 위해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후금은 명나라를 종주국으로 모시며 배후에 자리하고 있던 조선을 선제 정벌함으로써 장차 중원에서 벌어질 전쟁에서 후방을 안정시키려고 했다.
그리하여 일으킨 두 번의 전쟁. 첫 번째는 1627년(인조 5)에 일어난 정묘호란(丁卯胡亂)이며, 두 번째는 그 9년 만인 1636년(인조 14)에 일어난 병자호란(丙子胡亂)이었다.
두 차례의 호란(胡亂)을 겪으면서 조선 조정은 현실적으로는 신흥강국으로 부상하는 후금이 주도하는 새로운 동아시아 질서 속으로 편입되었지만, 이념적으로는 여전히 명나라를 종주국으로 모시는 ‘대명의리(對明義理)’를 강조하면서 일관된 외교 노선인 친명배금책(親明排金策)을 고수하고 있었다.
당시 누르하치를 이어 즉위한 후금의 홍타이지(皇太極)는 조선의 이러한 외교 노선에 상당한 불만을 품고 있었다.
그는 명나라 침공을 준비하면서 배후에 도사린 조선을 정벌할 명분을 찾기 위해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1627년(인조 5), 홍타이지는 3만 군사를 동원하여 조선을 침공했다. 후금은 기마병을 앞세워 파죽지세로 남하하였다. 그러나 당시 후금은 명나라와 대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군대를 조선에 오래 주둔시킬 수 없었다.
게다가 후금의 침공 소식을 접한 인조가 강화도로 피난하면서 조기에 조선 조정을 장악하는 데 실패한 데다가 조선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나면서 전쟁이 장기전이 될 기미가 있자 할 수 없이 강화를 제시하였다.
조선 조정에서는 화·전 양론이 분분하였지만 결국 후금의 제의를 받아들여 강화가 성립되었다.
강화 내용은 ‘형제지맹(兄弟之盟)’을 맺을 것, 후금군을 철수시킬 것, 양국 군대는 피차 압록강을 넘지 않을 것, 후금과 강화 후에도 조선은 명을 적대하지 않는다는 것 등이었다.
조선은 후금군이 조선에서 오래 머물 수 없다는 전략적 형세를 적절하게 활용하여 후금군을 바로 철수시켰고, 조선과 명나라와의 관계에 대한 후금의 간섭을 배제하는 데 성공하였다.
병자호란이 일어나기 약 8개월 전인 1636년 2월 26일(양력 4월 1일), 후금의 권력자 잉굴다이(우리나라에는 그의 이름을 음차하여 용골대(龍骨大)로 더 잘 알려져 있다.)와 마부대(馬夫大)가 홍타이지 사신의 자격으로 조선에 입국하여 창덕궁을 찾았다.
대외적인 명분은 인조의 비 인열왕후(仁烈王后) 국상 조문이었으나, 실제로는 홍타이지의 국서를 전달하기 위한 것이었다.
국서에는 후금이 국호를 청(淸)으로 고치고 칭제건원(稱帝建元)할 것이니 청 태종을 황제로 부르며 조선이 신하의 국가로 지위를 격하시키는 ‘군신지의(君臣之義)’를 강요한 것이었다.

병자호란과 정묘호란
칭제건원(稱帝建元)이란 군주를 황제로 칭하고 독자적인 연호를 세우는 행위를 말한다. 이는 국가의 독립성과 권위를 상징하는 것으로, 그동안 조선이 오랑캐로 여겨왔던 후금 국가의 지위가 조선이 종주국으로 여기는 명(明)과 동등한 위치에 오르게 되는 것을 의미했다.
당시 명나라를 종주국으로 받들고 후금을 만주족 오랑캐로 적대시해오던 조선이었기에 쇠락해가는 명나라와 동아시아 신흥강국으로 부상하는 후금 사이에서, 조선 조정의 일각에서는 외교적 실리를 놓고 이제는 유연하게 대응할 필요가 있다는 목소리가 조심스럽게 나오고 있었다.
후금 사절단의 방문 저의를 파악한 조정에서는 이들에 대한 처우를 어떻게 할 것인가를 놓고 갑론을박하느라 좀처럼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강경론자와 신중론자의 대립하는 상황이 마치 벌집을 쑤셔놓은 듯했다.
논란이 일자 인조는 국서를 받지 않고 창덕궁 금천교 옆에 천막을 쳐 청나라 사신들의 임시 거처로 정하고 그들을 그곳으로 안내했다. 그리고 중무장한 궁궐 수비대를 배치하여 그들이 일체 외부와 접촉하지 못하도록 감시하며 삼엄한 경계에 들어갔다.
이 같은 조선 정부의 조치와 푸대접을 예상하지 못했던 용골대와 마부대는 화가 나서 분을 삭이지 못했다.
그러나 그들이 예상하지 못했던 더 심각한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후금의 사신들이 왕후의 국상 조문을 핑계로 후금의 칭제건원을 통보하고 군신(君臣) 관계를 강요하기 위해 왔다는 소식이 저잣거리에 퍼지자, 각지의 유림에서 이들 사신단의 목을 치라는 상소가 계속 올라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조선 조정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게 돌아가자 용골대와 마부대는 긴장했다. 사신단의 정보병이 용골대에게 급히 피신하라고 보고하자, 일행은 도주할 기회를 살피기 시작했다.
때마침 예상치 못한 강풍에 천막이 날아가자, 이를 조정에서 보수하느라 어수선한 틈을 타서 용골대와 마부대는 민가에서 말을 빌려 타고 한양을 빠져나왔다.
이들은 말을 몰아 서둘러 본국으로 향했다. 결국 조선의 왕을 만나보지 못하고 본국으로 도주하게 되었다.
이들이 몰래 한양을 벗어나 본국으로 돌아가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조정에서도 긴장하기 시작했다. 이제 전쟁은 불가피한 상황일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엄습한 것이다.
3월 1일(양력 4월 6일), 조정에서는 급히 ‘오랑캐와 절교하니 국경 지역에서는 방어 태세를 갖추라.’라는 유서(諭書)를 내렸다.
거기에는 전쟁을 위해 의병을 모집하는 한편, 평안감사에게 후금과 절대로 화해해서는 안 된다는 척화(斥和)하라는 내용이 들어있었다.
그런데 이 문서를 가지고 대동강을 거쳐 평안도 의주로 가던 파발이 마침 만주로 급하게 돌아가고 있던 용골대 일행에게 도중에 붙잡히고 말았다. 이 바람에 조선 측의 척화 태도가 청에 누설되고 말았다.
전후 사정을 파악한 용골대는 쉬지 않고 말을 재촉하여 심양으로 돌아가 홍타이지에게 조선의 사정을 그대로 보고했다. 홍타이지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열하(熱河)로 간 조선의 사신들
4월 11일(양력 5월 15일), 누르하치의 뒤를 이어 후금의 군주로서 적당한 시기를 보고 있던 홍타이지(皇太極)가 마침내 국호를 청(淸)으로 바꾸고 황제에 즉위하면서 칭제건원(稱帝建元)을 선포했다.
심양(瀋陽)에서 열린 홍타이지의 황제 즉위식에 조선에서는 나덕헌(羅德憲)과 이확(李廓) 두 사람의 하급 관리를 사신으로 보냈다.
그 자리에 참석한 한족을 비롯하여 몽골, 만주족 등 모든 사신단이 머리를 조아리는데, 두 사람은 절하기를 거부했다. 만주족의 전통적인 배례 의식인 세 번 무릎 꿇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삼궤구고두(三跪九叩頭)의 예를 거부한 것이다.
화가 난 만주족 관리들이 두 사람을 집단 구타하고 목을 치려고 했다. 황제에 오른 홍타이지(청 태종)가 이들을 제지하며 말했다.
“하찮은 분노 때문에 사신을 죽이지 말라. 지난 정묘년(丁卯年)의 맹약을 어겼다는 구실을 조선에 줄 필요는 없다.”
청 태종은 인조가 생각한 대로 무지한 오랑캐가 아니라 중원을 다스릴만한 대인배였다. 그는 두 사람을 살려 보내면서 ‘두 사람의 행위가 형제국을 무시한 처사’라는 항의를 담은 국서를 들려 보냈다. 청 태종은 이들에게 도중에 국서를 절대로 뜯어보지 말라고 경고했다.
원래 국서를 받을 때는 내용을 살펴보고 글자 한 자라도 틀리면 수령을 거부해야 한다. 만약 그냥 들고 와 국서를 전달했을 때 저들이 문서를 확인하지 않은 것이 밝혀지면 낭패가 아닐 수 없었다.
두 사람은 고민 끝에 귀국하는 도중에 국서를 개봉했다.
국서에는 청나라는 황제의 나라로서 홍타이지 자신은 ‘대청황제(大淸皇帝)’라고 선언하였다. 그리고 조선을 ‘너희 나라(爾國)’라고 칭하면서 신하의 나라라고 격하시켰다. 두 사람은 들고 갔던 짐 속에 청 태종이 내린 국서를 넣어두고 그냥 돌아왔다. 시키는 대로 들고 왔다가는 바로 죽음이었기 때문이다.
인조를 알현한 두 사람은 청 태종의 국서를 언급하지 않았다. 다만 머리를 조아리고 절을 하지 않았다는 것만 강조했다.
그래도 인조는 두 사람에게 ‘왜 그 자리에서 자결하지 않았는가?’라고 하며 심하게 질책했다. 그러고는 변방으로 귀양을 보내버렸다. 일국의 군왕이 아니라 저잣거리의 시정잡배보다도 못한 조선의 왕 인조의 사람 됨됨이를 읽어낼 수 있는 대목이다.

김응남 호성공신교서 (金應南 扈聖功臣敎書, 보물 제1756호)
5월 26일(양력 6월 28일), 인조가 교서를 내렸다.
“우리의 국토가 수천 리인데 어찌 움츠리고만 있을 것인가?”
참으로 호기로운 선언이었다. 그러나 일국의 군왕으로서 나라의 전후 사정을 판단하고 있었다면 도저히 할 수 없는 말이었다.
6월 17일(양력 7월 19일)에 이르러 인조는 또 교서를 내렸다.
“우리는 명(明)의 동쪽 신하의 나라이다. 비록 명나라가 땅을 잃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결코 다른 마음을 품지 않을 것이리라.”
지금까지 명을 종주국으로 사대(事大)해오던 그 자세에서 달라지지 않겠다는 의지를 재천명한 것이다.
청나라가 아무리 압박을 해와도 만주족 오랑캐와는 어떤 교류도 배격하겠다는 의지를 내외에 알린 것이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려고 노력하지도 않는 한심한 조정에 무능한 군왕이었다.
조선의 움직임을 지켜보고 있던 청나라는 조선이 친명배금 정책을 철회할 의사가 없음을 확인하였다. 그해 10월(양력 11월), 청 태종이 내린 교서가 조선에 전해졌다.
“11월 25(양력 12월 21일)일까지 우리와 화친(和親)할 것인지 말 것인지를 결정하라. 아니면 군대를 내서 너희들을 정벌하리라. 나는 큰길을 통해 곧장 한양으로 향할 것인데, 겨우 산성 몇 개 따위로 어찌 나를 막을 수 있겠는가.
너희 나라가 믿는 것은 강화도라는 작은 섬이지만, 내가 너희의 팔도강산을 짓밟는다면, 어찌 작은 섬 하나로 나라를 유지할 수 있겠는가?
너희 나라 유신(儒臣)들이 붓을 든다 한들, 감히 우리를 물리칠 수 있겠는가?”
청 태종이 자신의 의도를 구체적으로 나열하며 경고했지만, 조선 조정에서는 여전히 오랑캐의 준동이라 치부하면서 무시하는 분위기가 유지되었다. 조선으로부터는 아무런 회신이 없었다.
황제의 교서를 든 사신은 조선 조정의 푸대접 속에 왕을 만나보지도 못하고 돌아왔고, 황제 즉위식에 참석한 조선의 사신은 배례(拜禮)조차 하지 않았다.
청 태종은 이 같은 조선의 태도를 더 이상 지켜볼 필요가 없다는 판단을 내렸다. 이 기회를 이용하여 명나라와의 전면전을 치르기 전에 조선을 확실히 굴복시켜 배후의 위협을 제거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하고 실행에 옮겼다.
1636년 12월 2일(양력 12월 28일), 청 태종은 청나라 군사 7만 명, 몽골군 3만 명, 한족 2만 명을 동원하여 총 12만 군사로 조선을 향해 친정(親征)을 나섰다.
청나라 기록에는 나중에 추가로 합류한 병력까지 합쳐 20만 명에 이른다고 하였다.
조선 침략의 표면적 이유는 물론 조선이 ‘군신지의(君臣之義)’를 거부했다는 이유를 내세웠지만, 그 이면에는 명을 공격하기에 앞서 명의 동맹국인 조선을 선제공격함으로써, 조선과 명나라 사이의 연결고리를 차단하겠다는 포석이 깔린 결정이었다.
청군이 조선을 침공하고자 할 때 첫 번째 고려해야 할 변수는 의주부윤 임경업(林慶業)이 주둔하고 있던 평안도 의주 백마산성이었다.
정묘호란 이후 조선은 청의 공격을 대비하여 북변 방어를 강화하였는데, 그 핵심 인물이었던 임경업은 병자호란이 일어나기까지 평양 중군, 검산산성(劒山山城, 평안도 선천 소재) 방어사, 정주목사, 청북방어사, 안변부사, 의주부윤, 의주진 병마첨절제사 등을 지내면서 북방의 변경에 머물고 있었다.
당시 임경업의 명성은 백성들에게도 믿음을 줄 만했다. 임경업의 존재는 청나라의 침공이 예상되는 상황에서도 인조에게는 믿는 구석이었다.
하지만, 정묘호란 당시 인조가 강화도로 파천하여 저항하는 것을 지켜본 경험이 있는 청 태종은 조선 조정이 다시 강화도로 들어갈 시간을 주지 않기 위한 전략을 채택하였다.
압록강을 건너자마자 기동력을 높여 조선군이 지키고 있던 산성을 우회하고, 한양으로 신속히 남하하여 인조와 조정이 강화도로 피난하는 길을 차단한다는 것이었다.
청군은 조선이 설치한 북방 변경의 주요 방어 거점을 그대로 통과해 한양도성을 직접 공략하는 전략을 세웠다.
12월 8일(양력 1637년 1월 3일), 청군의 선봉대 300명이 압록강 북쪽 구련성(九連城)에서 출병 준비를 마쳤다.
이 구련성의 위치는 오늘날 랴오닝성 단동시 진안(振安)구로 압록강 북쪽 20리(7.8km) 지점에 해당하는데, 평안북도 의주시와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마주 보고 있다.
마침내 이튿날 선봉대가 꽁꽁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너면서 병자호란의 막이 올랐다.
청나라 대군 주력부대가 압록강을 건너자 의주부윤(義州府尹) 임경업은 즉시 봉화(烽火)를 올리고 한양으로 적의 침공을 알리는 파발을 띄웠다. 그리고 서둘러 군사들을 이끌고 백마산성으로 들어가 방어 태세에 들어갔다.
임경업이 보낸 파발은 부지런히 한양으로 달렸다. 그러나 위급한 상황을 알리는 백마산성의 봉화(烽火)를 접한 다른 곳의 봉화는 더디기만 했다.
적의 침략을 예상하면서도 전혀 준비되어 있지 않았던 조선군은 신속한 정보 전달체계인 봉화가 제때 올라오지 않음으로써 신호 전달체계는 무용지물이 되고 말았다. 당연히 상황이 조정으로 제때 전달될 수 없었다.

압록강을 건너는 청나라 기병
청군 수뇌부는 소수의 병력으로 백마산성의 임경업 군대를 묶어놓고 침공 전에 수립했던 원래의 전략대로 성을 우회하여 한양으로 진격했다.
주력군보다 먼저 압록강을 건넌 300명의 선봉대는 이튿날부터 조선군의 주력이 지키고 있는 임경업의 백마산성을 우회하여 무서운 속도로 남하하기 시작하여 12월 11일(양력 1637년 1월 6일) 새벽에 안주성에 이르렀다. 무려 180km나 되는 거리를 이틀 만에 달려온 것이다.
이틀 뒤인 12월 13일(양력 1637년 1월 8일) 저녁에는 순안(順安)을 통과하더니 이튿날 아침에는 황해도 봉산에 이르렀다.
평안도 안주에서 황해도 개성까지 약 235km 구간을 진군하는 데 불과 사흘이 걸리지 않은 믿을 수 없는 속도였다.
청군의 하루 평균 진군 속도는 약 78km. 1차 세계대전 때 전격전(電擊戰)으로 유명한 독일의 롬멜 기갑부대가 프랑스를 공격할 때도 하루에 70km를 채 못 간 것과 비교해 보면, 청군의 진격 속도가 얼마나 빨랐는지 짐작할 수 있다.
선봉대의 뒤를 이어서 청나라 모든 부대가 시차를 두고 계속 압록강을 건너 조선으로 밀고 들어왔다.
청 태종이 이끄는 군대 본진 12만여 명이 압록강을 건너 남하하자 의주부윤(義州府尹) 임경업은 백마산성에서 청나라 군대의 진로를 차단하고 기세를 꺾어 놓을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인조를 잡는 게 목적이었던 청나라군은 진격 속도를 높이기 위해 기병(騎兵) 중심으로 군대를 편성하고 있었다.
그리고 임경업이 지키는 백마산성을 비롯하여 한양에 이르는 10여 개의 산성을 모두 우회해서 진격의 속도를 높였다. 그러므로 전쟁 초기에 임경업은 청군과 전투다운 전투를 할 수 없었다.
당시 평안도관찰사 홍명구(洪命耈)도 청군이 압록강을 건넜다는 소식을 접하고 병력을 끌어모은 다음, 평양성 북쪽에 있는 자모산성(慈母山城)에 들어가 방어진을 구축했으나, 청군이 이를 무시하고 그대로 통과하는 바람에 아무런 대처도 할 수 없었다.
홍명구는 그곳에서 청군이 한양도성을 점령하고 남한산성을 포위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홍명구는 혼비백산하여 군사 2,000여 명을 이끌고 급히 남한산성으로 가기 위해 김화 방면으로 향했다. 방어하는 조선군이 공격해오는 청군의 뒤를 쫓아가는 웃지 못할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홍명구는 강원도 김화에서 천혜의 요지인 백동에 진을 치고 청군을 기다리자는 평안도병마사 유림(柳琳)의 건의를 거부하고, 관군 2,000명과 합류한 의병 300명을 이끌고 평지인 탑동에 진을 친다.
그는 청군을 만나 분전하지만 순안현령(順安縣令) 허노(許輅), 조선군 1,000여 명과 함께 자신도 전사하고 말았다.
청군은 압록강을 건넌 지 불과 6일째인 12월 14일(양력 1637년 1월 9일) 개성에 이르렀다. 평안도 안주를 통과한 지 단 하루 만에 개성을 통과한 것이다. 그야말로 엄청난 진격 속도였다.
당시, 조선의 청나라 방어전략은 ‘청야견벽(淸野堅壁)’ 전략이었다. 즉, 평지에서 강한 청의 기병과 직접 맞부딪치는 것을 피하고, 청군의 예상 침공로 주변의 성(城)으로 군사를 집결하여 성문을 굳게 닫고 공성전을 통하여 전쟁을 장기전으로 이끄는 것이었다.
이 전략은 청나라가 긴박하게 대치하고 있는 명나라를 배후에 두고 조선에 들어와 장기전을 벌이기 어려울 것이라는 전략적 판단에 따른 것이었다.
또, 유사시에는 수군(水軍)이 약한 청군의 공세를 피하고자, 지난 정묘호란 때처럼 신속하게 강화도로 파천하여 항전을 이어간다는 계획도 포함되어 있었다.

수원 화성(華城) 봉화대
조선 조정은 봉화(烽火)를 통한 긴급 통신체계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바람에, 12월 13일(양력 1637년 1월 8일)에 의주부윤 임경업(林慶業)이 올린 장계(狀啓)가 도착함으로써, 비로소 청나라의 대군이 압록강을 건너 대대적인 침공을 감행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조선 조정이 처음으로 보고받은 임경업의 장계에는 ‘적이 압록강을 건너 안주(安州)에 이르렀다.’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청군 선발대가 백마산성을 우회하여 평양성을 지척에 두고 있는 순안(順安)을 통과하고 있을 때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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