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원섭 교수의 자투리 한국사] 경징이풀 3회

강화도 개펄에 펼쳐진 피맺힌 저주의 풀
기사입력 2025.12.24 1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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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징이풀(강화도 동막해수욕장 갯펄)

 

마부대는 앉자마자 최명길을 힐끗 보고는 찻잔을 탁자에 내리치듯이 화난 모습으로 내려놓았다. 그는 입가의 수염을 닦으면서 말했다. 목소리는 낮았지만, 그의 말에는 위엄이 실려 있었다. 

“그대가 정말 그 이유를 모른단 말인가?”

등불에 비친 그의 얼굴에 비아냥거림이 묻어나왔다. 순간 최명길은 움찔했으나 겉으로는 태연한 자세를 유지하려고 애쓰고 있었다. 마부대는 최명길을 보면서 조용히 말을 이었다. 

“조선은 여전히 명나라를 종주국으로 모시면서 우리 대청제국을 오랑캐로 적대시하는 정책을 고수하고 있소. 또, 우리 대청 황제 즉위식에 하급 관리를 보내는 무례한 짓을 했소. 거기다가 그들은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의 예를 거부하기까지 했소. 이런 행동들은 모두 우리 대청제국을 무시하는 처사가 아니고 무엇이오? 이러고도 그대는 설마 나라가 무사할 줄 아셨소?”

 

사실 죽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알고 목숨을 걸고 나선 일이지만, 마부대와 만난 자리에서 그는 긴장을 풀 수 없었다. 시간을 벌기는커녕 자칫했다가는 언제 목숨을 잃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최명길은 황급히 손을 휘저으며 말했다.

“아니요. 장군. 장군은 지금 오해하고 계시오.”

최명길은 둘러댈 만한 이유를 말하기가 참으로 곤혹스러웠지만, 무슨 수를 써서라도 대화를 오래 끌어야 했다. 

‘지금쯤 어가는 어디까지 갔을까? 한강을 빨리 건너야 할 텐데……. 저잣거리에서 백성들이 몰려나오면 어가가 빨리 움직일 수도 없을 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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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 서문(인조가 청에 항복하려고 나갈 때 이용했음)

 

대화를 이어가랴, 어가의 속도를 계산하랴, 최명길의 머리는 복잡해지고 있었다. 막사 주위에 병사들이 오가는 소리가 들려오는 걸 보면 아마도 날이 밝은 것 같았다. 간간이 바람이 불어 막사 천막 위의 깃발이 펄럭이는 소리도 들렸다.

‘이 정도 시간을 끌었으면 어느 정도 시간을 번 셈이다. 이제 이들의 속내를 알았으니 담판을 빨리 끊고 돌아가 청군의 동태를 전해야 한다. 어가를 신속하게 남한산성으로 들게 해야 하는데……’

“지금 내 말을 듣고 있는 거요?”

최명길이 다른 생각에 골똘하게 잠긴 듯한 모습을 보이자 마부대는 책상을 치며 화를 냈다. 최명길은 등골이 오싹해졌다.

“아니요. 아니요…… 그런 게 아니라…… 우리가 귀국의 입장을 충분히 헤아리지 못한 것 같소이다. 그러나 노여움을 좀 푸시고 돌아가셔서 황제 폐하께 우리 조선이 용서를 구한다고 좀 잘 말씀해……”

“그러면 뭐라도 내놓아야 할 것 아니오. 지금 빈손으로 와서 내게 애걸하는 거요?”

마부대가 화를 누그러뜨리지 못하고 씩씩거렸다. 최명길을 입안이 바싹 타들어 가는 걸 느꼈다. 그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하면…… 어찌하면…… 좋으리까?”

“최소한 조선 왕의 형제나 대신이라도 인질로 보내야 할 게 아니오……. 그래야 내가 돌아갈 명분이라도 생기는 거지…… 빈손으로 가면 되겠소?”

“아……아… 알겠소. 내 돌아가 당장 그리 전하리다. 그렇게 합시다. 그래야 할 것 같소.”

마부대는 눈을 가늘게 뜨고 최명길을 노려보다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담판은커녕 마부대로부터 일방적인 항의를 받고 일어서려니 마음이 영 불편했으나 그렇다고 해서 혼자서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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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 우익문(右翼門). 인조는 이 문으로 출성해 삼전도 들판에서 항복 의식을 치렀다.

 

마부대와 담판을 마치고 막사를 나온 최명길은 돌아가는 일도 그리 쉬운 일이 아님을 알았다. 마부대를 만나 담판을 짓겠다면서 자원하고 나설 때, 인조가 최명길을 경호하는 인력으로 붙여 준 20여 명 금군(禁軍)들마저도 이곳으로 오는 도중에 대부분 겁먹고 달아나 버린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최명길은 마부대에게 청군이 장악하고 있는 곳을 벗어날 때까지 신변 보호를 요청하고 그의 배려로 청군의 안내를 받아 무악재 일대를 벗어나 궁궐로 방향을 잡았다.

궁궐 가까이 오자 인조의 어가가 비로소 남한산성을 향해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최명길은 급히 궁궐로 들어가지 않고 한강 변을 거슬러 올라가면 강을 건널 배를 찾기 시작했다. 한시라도 빨리 인조를 만나 상황을 전달하고 마부대의 강화조건을 전달하는 것이 시급했기 때문이었다. 


이조판서 최명길이 홍제천에 진영을 꾸린 청군 막사에서 마부대와 입씨름하는 동안 인조를 태운 어가는 어렵사리 한강을 건넜다. 어가를 따르는 백성들은 얼어붙은 한강을 건너면서 깨진 얼음을 손으로 헤쳐가며 이를 악물고 버텼다. 

 

송파 들판의 바람은 살을 에는 듯이 차갑고 매서웠다. 백성들은 곳곳에 얼어 죽은 사람들을 붙잡고 통곡했다. 송파 백사장과 들판은 백성들의 곡소리와 한숨 소리로 덮였다. 

인조의 어가는 더디게 앞으로 나아갔다. 길이 미끄러울 뿐만 아니라 폭이 좁아서 어가가 맘 놓고 나아가기에도 어려울 정도였다. 인조는 뒤를 따르는 백성들의 처참한 모습을 보면서도 화를 내기도 하고 소리를 지르기도 하면서 쉬지 않고 길을 재촉했다. 그렇게 가마는 어렵사리 오후 늦게서야 칼바람을 뚫고 겨우 남한산성으로 들어갔다.

 

인조의 어가가 남한산성 행궁에 도착하여 짐을 풀었다. 임시로 만든 행궁이라 왕궁과는 달리 모든 게 불편했다. 인조는 줄곧 투덜대며 역정을 냈다. 내관들은 어찌할 줄 몰라 이리저리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사방이 어두워지고 있었다. 행궁에 불이 밝혀지면서 영의정 김류 등이 대신들을 이끌고 찾아와 그동안 수집된 청군의 동태를 인조에게 보고했다. 

“이판으로부터 들어온 소식은 없는가?”

 

최명길의 소식은 아직 들려오고 있지 않았다. 몰려든 대신(大臣) 모두가 꿀 먹은 벙어리처럼 눈치만 보고 있었다. 영의정 김류가 앞으로 나섰다.

“전하. 여기는 보시다시피 머물 곳이 못 되옵니다. 빨리 행색을 갖추어 강화도로 파천하시는 것이 마땅하옵니다.”

“아니 지금 막 도착했는데 또 어디로 가자는 거요? 강화도로 가는 길이 막혔다 하지 않소. 어떻게 가자는 거요? 어떻게……?”

“전하. 신이 알아본 바에 의하면, 관악산을 남쪽으로 우회하여 사강을 지나 강화도로 들어가는 길이 아직은 괜찮다고 하옵니다. 게다가 청나라 군대 본진은 아직 한양에 도달하지 못했습니다. 선발대 병력으로는 모든 길을 장악할 수는 없는 일이 옵니다.”

“그래도 지금, 이 밤에 또 어찌 움직인단 말이오?”

“전하. 만약 이곳에서 머물게 되면 청군이 이곳을 함락시키는 건 시간문제입니다. 지금이라도 청군이 예상하지 못하고 있을 때 움직여야 하옵니다. 오늘 밤을 도와 강화도로 들어가야 하옵니다. 신(臣)들이 이미 준비를 마쳤습니다.”

여러 대신이 영의정 김류의 의견에 동조하면서 강화도로 가자고 건의하자, 인조는 더 이상 답변하지 않았다.

 

인조와 대신들 사이에 지루한 입씨름이 계속되었다. 인조는 대신들 사이에 고성이 오가며 왈가왈부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이조판서 최명길이 생각났다.

“아…… 참…… 이판은 어떻게 됐소? 청군 진영으로 간 이판말이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인조가 단 아래로 내려오면서 좌우를 돌아보며 물었다. 그제야 이조판서 최명길을 떠올린 대신들은 좌우를 돌아보며 웅성거렸다.

“아직도 이판으로부터 소식이 없는 거요?”

 

잠시 후, 잠시 밖에 나갔다 돌아온 누군가가 영의정 김류에게 다가가 귓속말로 전했다. 김류가 앞으로 나오면서 말했다.

“전하. 아직 이판으로부터 소식은 없다고 하옵니다. 소식을 알아보라고 명을 내렸사오니 잠시 기다려 주시옵소서,”

“허허……. 이거……”

인조는 다시 단을 올라가 용상에 앉았다. 어수선하던 좌중은 다시 어가의 강화도행을 둘러싸고 갑론을박하기 시작했다. 

인조는 졸음을 이기지 못하고 비스듬하게 몸을 옆으로 기대어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연신 하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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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 행궁

 

새벽녘이 되어 대신들은 강화도로 이동하자는 영의정 김류파의 주장을 실행하기로 하였다. 남한산성이 천혜의 험지로 방어에 적합하지만, 사전 준비가 전혀 되어있지 않아 장기간 청군의 공격을 막아내기에는 부적합하다는 주장이 설득력이 있기 때문이었다.

사실 남한산성은 매우 험난한 요새였다. 성곽 누대에서 한양도성이 다 보이는 곳이다. 겨울철 얼어붙은 길은 청군의 기마대가 접근하기에는 어려운 곳이지만, 평소에 방어 준비가 제대로 되어있지 않아 백성과 함께 먹어야 할 양식과 말 먹이가 부족하였다. 

 

인조를 따라 남한산성으로 들어온 병력은 1만 2천~1만 8천 정도에 불과했고 군량이라고 해봐야 겨우 45일 치가 전부였다. 그에 비해 청군은 본대가 합류하면서 14만 명 정도의 대군이었다. 조선군으로서는 도저히 감당할 수준이 아니라는 것은 명백한 일이었다.

고민을 거듭하던 인조는 새벽이 되어 대신들의 의견을 좇아 강화도로 파천을 결정했다. 그리하여 다음 날 새벽 인조 일행의 강화도행이 시도되었다. 어가에 오르면서도 인조는 계속 이조판서 최명길의 행방을 찾고 있었다.

 

마침내 인조를 태운 어가가 남한산성 남문을 빠져나왔다. 그러나 눈이 내리고 난 지 불과 며칠이 지나지 않은 때여서 군데군데 눈이 쌓여 있었고 길이 몹시 미끄러웠다. 게다가 새벽이 되면서 기온이 급격히 내려가 길이 얼어붙고 미끄러워서 도저히 행군할 수 없었다. 

어렵사리 산성을 겨우 내려온 어가는 송파 들판을 빠져나와 가는골(오늘날 세곡동)에서 청계산 남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그러나 얼마를 전진하지 못하고 어가행렬은 쌓인 눈길에 길이 막히고 말았다. 추위를 견디지 못하던 인조는 강화도로 가는 것을 포기하고 도로 남한산성으로 어가를 돌리라고 지시했다. 

 

행궁으로 돌아오는 길도 만만치 않았다. 송파 들판에서 남한산성으로 오르는 길은 여간 험한 게 아니었다. 몰아치는 세찬 골바람이 불면서 동상에 걸리는 병사들이 늘어나고 먹을 것도 부족한 상태에서 낙오하는 사람도 많았다. 시간이 흐를수록 어가행렬에서 이탈하여 도망하는 자가 갈수록 늘어났다.

 

동이 틀 무렵에야 겨우 행궁으로 돌아온 인조는 화가 나서 길길이 뛰었다. 영의정 김류를 비롯하여 강화도행을 고집했던 대신들은 어쩔 줄 모르고 식은땀을 계속 흘렸다.

최명길이 행궁에 다시 나타난 것은 동이 트고 어둠이 걷힌 시각쯤이었다. 산성 수비대장으로부터 최명길이 무사히 돌아왔다는 보고를 받은 인조는 그제야 기운을 차리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전하. 신(臣) 이조판서 최명길, 임무를 마치고 무사히 돌아왔사옵니다.”

허겁지겁 인조 앞에 엎드린 최명길의 행색은 말이 아니었다. 그 험한 길을 어떻게 헤치고 이 자리에 나타났는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갓은 찢어지고 옷은 남루하기 그지없었고, 도포 자락은 군데군데 찢어져 너덜거렸다.

 

인조는 아래 바닥으로 내려와 최명길의 손을 잡고 반색했다.

“수고하셨소. 이판. 몸은 괜찮은 거요?”

최명길은 동작진에서 한강을 건너 한강 백사장을 걸어 송파 벌판을 지나 천신만고 끝에 겨우 남한산성에 이르렀다. 그러나 도착하자마자, 인조의 어가가 새벽 야음을 틈타 강화도로 가려다가 청계산 입구에서 눈길을 더 나아가지 못하고 발길을 돌렸다는 소리를 들었다. 

최명길은 어이없었다. 그는 인조 앞에 이르자 눈물부터 쏟았다.

“전하…… 이 얼마나 망극한 일이 옵니까?”

 

인조가 그의 팔을 잡고 일으켜 세우자 최명길은 하례하고 그동안의 일을 보고하기 시작했다. 그 사이에 그가 돌아왔다는 기별을 받은 조정 대신들이 하나둘 몰려들었다.

최명길은 무악재 아래 홍제원 청군 막사에서 청나라 선봉장 마부대와 마주 앉았던 이야기부터 청군의 요구사항을 말했다. 그는 마부대의 요구조건이 바로 왕의 동생과 대신을 인질로 원한다는 말을 전했다. 지난 정묘호란 때처럼 왕의 동생을 인질로 데리고 가겠다는 것이다.

 

사실, 정묘호란 때 후금(청나라의 전신)은 조선의 왕자 한 명을 볼모로 요구했었다. 인조는 급히 원창부령 이구(李玖)를 불러 그에게 왕제(王弟)인 원창군이라는 군호를 내렸다. 그리고 은수저, 은병, 은잔을 바리바리 싸주며 대신 볼모로 가라고 명했다. 

 

‘부령(副令)’은 조선시대 왕실 종친에게 주어진 종5품 관직이다. 한성부(漢城府)의 5부(五部)에서 행정을 맡아보면서, 각 방(坊)의 관령(管領)을 지휘하여 치안을 유지하고 정령(政令)의 전달을 맡아보는 우두머리로서 단지 이름만 있는 종실에게 내린 직함에 불과했다. 

두 달 뒤 인조는 ‘원창군 이구를 왕제라 칭하여 오랑캐에게 보냈다.’라며 ‘천지 부모 같으신 황제께서 애처롭게 여기시라.’라고 보고했다. (『인조실록』 1627년 4월 1일 조) 

원창군 이구는 심양으로 가서 왕의 동생 노릇을 톡톡히 해냈다. 그가 왕의 동생으로서 잘 처신했으므로 후금에서는 그의 가짜 신분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그는 가끔 조선에 돌아와 후금 정세를 보고하기도 했다.

 

그러나 사실은 그게 아니었다. 후금에서는 조선에 잠입해 있던 정보원을 통하여 그가 가짜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고, 오히려 그에게 역정보를 흘려 조선 조정의 동태를 파악하고 있었다. 조선은 이런 사실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인조는 대신들에게 즉시 논의할 것을 지시했다. 긴 논의 끝에 인조와 관료들이 내린 결론은 딱 10년 전 정묘호란 때 써먹었던 그 꼼수였다. 10년 전 가짜 동생으로 보내 그 대역을 잘 해냈던 원창군이 무탈하게 지냈으니, 이번에도 써먹자는 것이다. 인조는 먼 종친 가운데 적임자를 물색하라고 명을 내렸다.

 

그래서 추천된 자가 바로 능봉수(綾峯守) 이칭(李偁)과 형조판서 심집(沈諿)이었다. 인조는 정4품의 관직인 능봉수 이칭을 정1품 능봉군(綾峯君)으로 격상시켜 동생으로 삼고, 형조판서 심집을 대신으로 위장시켰다. 

 

다음날 순식간에 왕의 동생이 된 이칭은 역시 초고속으로 승진한 심집과 함께 산성을 내려가 청나라 진영으로 들어갔다. (『인조실록』 1636년 12월 15일이죠) 두 사람은 급조된 신분과 자격으로 종전 협상을 진행하기 위해 마부대와 마주 앉았다. 마부대의 선봉군은 이미 남한산성 아래에 이르러 송파 벌판에 진을 치고 있었다.

 

송파 벌판의 매서운 칼바람과 미끄러운 눈길을 따라 겨우 청군 진영에 도착하자마자 미처 숨도 고를 사이도 없이 마부대가 손가락으로 이칭을 가리키며 심집에게 물었다.

“저 사람은 진짜 왕제인가? 그대는 또 진짜인가?” (『인조실록』 1636년 12월 16일이죠). 

인조실록에는 심집이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고 기록돼 있다. 그러나 『병자록(丙子錄)』의 기록은 다르다.

‘심집이 느닷없이 말했다. “나는 평생 충(忠)과 신(信)을 말했다. 비록 오랑캐라도 속일 수 없다. 나는 대신이 아니며 능봉군은 종실 사람이지 왕제가 아니다.” 

놀란 능봉군이 말하였다. “아니다. 이 사람은 실제 대신이고, 나는 진짜 왕제가 맞다.” (『병자록(丙子錄)』)

그 자리에는 통역관으로 박난영(朴蘭英)과 박노가 있었다. 마부대는 박난영이라는 인물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1619년 1월 조선은 만주에서 발흥한 후금을 응징하기 위해 정예군 2만 명을 파병했다. 명나라 황제 요청이었다. 요동 파견부대(渡遼軍)가 압록강을 건너기 직전 광해군은 사령관 강홍립에게 전문을 보내 ‘싸우는 척만 하라.’라고 명을 내렸다. (『광해군일기』1619년 2월 3일이죠) 훗날 화를 대비해 적당히 싸우는 척만 하라는 뜻이었다. 

강홍립 부대는 작은 승전과 큰 패전 끝에 항복하고 포로가 되었고, 당시 포로 가운데 박난영(朴蘭英)이라는 사내도 있었다. 

 

그는 충청도 면천군수를 거쳐 무관직으로 자리를 옮기더니 1606년 함경도 함흥 감영 성곽 공사 때 그 성실함을 함경감사 이시발(李時發)로부터 인정받았다. 광해군은 그를 창성부사로 임명하였다. 그는 평안도 북단 압록강을 낀 군사지역 지휘관이 되었다.

1623년 서인 세력이 광해군을 몰아냈고, 4년 뒤 정묘호란이 터졌다. 후금은 생포한 강홍립과 박난영을 협상단에 끼워 넣었다. 두 나라는 형제의 맹약을 맺었고, 전쟁은 종료됐다. 

이듬해 비변사는 박난영을 일러 ‘적에게 포로가 되었으나 10년이 되도록 절개를 잊지 않았다,’라고 평가했다. (『인조실록』 1627년 2월 1일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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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숙공 박난영(朴蘭英) 묘소. 경기도 이천시 호법면 매곡1리 돈의곡

 

이후 박난영은 외교관이 되어 때로는 회답관(回答官)으로, 때로는 추신사(秋信使), 춘신사로 선위사(宣慰使)와 선유사로 후금과 조선으로 오가며 협상을 담당했다. 그는 유능한 외교관이었다.


마부대가 박난영에게 물었다. 

“누구 말이 맞는가?” 박난영이 대답했다.

“능봉의 말이 옳다.”

마부대의 끈질긴 대질 신문이 이어졌다. 심문이 길어지면서 조선의 꼼수가 하나하나 드러나기 시작했다. 

결국 마부대는 조선 조정이 지난 정묘호란 때 써먹었던 꼼수를 그대로 부리고 있다는 걸 알았다. 화가 머리끝까지 난 마부대는 동역관 박난영이 거짓말을 했다고 하여 그 자리에서 끌려 나가 참형을 당했다. 마부대는 화를 참지 못하고 그의 시신을 멀리 내다 버려 맹수들의 밥이 되도록 했다. 조선의 노련한 외교관 한 명이 그렇게 허무하게 목숨을 잃고 말았다. 

 

박난영의 시신은 인조가 항복하고도 두 달 넘도록 찾지 못했다. 그의 세 아들이 울부짖으며 산성 밑을 돌아다니다 4월 13일에 이르러 겨우 찾았다. 그러나 아들들은 부친의 유골을 수습할 방도가 없어서 울고만 있었다. 

사실을 보고 받은 인조는 세 아들에게 경비를 보조해주고 박난영에게 관직을 추증하라 명했다. (『승정원일기』 1637년 4월 18일 조)

세월이 흘러 1675년 숙종 때 박난영의 고향 경기도 이천시 호법면 매곡1리(돈의 곡(遯義谷))에 정려문(旌閭門)을 세웠다. 1876년 11월 고종은 그에게 ‘충숙(忠肅)’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마부대는 두려움에 떨고 있는 능봉군과 심집을 돌려보내면서 ‘왕제(王弟)가 아니라 왕자(王子)를 보내라.’라고 요구했다.

능봉군과 신집이 구사일생으로 돌아와 인조 앞에 무릎을 꿇었다. 두 사람은 청나라 군영에서 일어난 일을 사실대로 자세하게 보고했다. 

 

왕제라고 보냈지만, 가짜라는 것이 들통났을 뿐 아니라 유능한 통역관 박난영이 절개를 지키다가 목숨을 잃었다는 사실을 그대로 보고하자 인조와 대신들은 사태의 심각성을 인식했다. 게다가 이미 지난 정묘호란 당시 인조가 써먹었던 가짜 왕제 건을 청나라가 이미 알고 있었다는 사실도 드러난 것이다. 

인조는 망연자실하여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는 모골이 송연해져서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손바닥에서는 계속 땀이 흘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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