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원섭 교수의 자투리 한국사] 경징이풀 4회

강화도 개펄에 펼쳐진 피맺힌 저주의 풀
기사입력 2025.12.24 1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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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모 쓴 여인〉 신윤복, 비단에 수묵담채, 28.2×19.1㎝,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그날 밤 인조는 다시 조정 대신들을 불렀다. 이 자리에서 영의정 김류 등 세 정승과 몇몇 관료들은 인조에게 동궁(東宮, 왕자)을 청나라에 인질로 보내고 홍타이지를 황제라 호칭하여 저들의 분노를 조금 누그러뜨리자고 건의했다. 

“아니 되옵니다. 전하.” 

예조판서 김상헌이 앞으로 나서며 고함을 질렀다. 

“맹세컨대, 저런 금수(禽獸) 같은 자들과 하늘을 함께 이고 살 수는 없는 일이 옵니다.”

“그렇습니다. 전하. 통촉하시옵소서.”

김상헌이 엎드려 소리를 높이자, 몇몇 대신들이 다투어 앞으로 나와 엎드리며 김상헌의 주장에 힘을 실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지켜보고 있던 이조판서 최명길이 앞으로 나서 인조 앞에 엎드렸다. 

“아니 되옵니다. 전하. 지금은 저 막강한 청나라 군대를 달래어 돌아가게 하는 것이 우선이 옵니다. 강화도로 피신한 대군과 가족들의 생사도 알 수 없고, 백성들은 저들의 말발굽을 피해 이리저리 떠돌고 있습니다. 지금은 종묘사직을 온전히 보존하는 것이 시급한 일이 옵니다. 그래야 후일을 도모할 수 있사옵니다. 통촉하시옵소서.” 

“그렇습니다. 전하. 이 엄중한 작금의 상황을 바로 보셔야 하옵니다. 통촉하시옵소서.”

이번에도 몇몇 대신들이 나와 최명길 옆에 엎드리며 머리를 조아렸다.

이렇게 하여 청군과의 결사 항전을 주장하는 강경파와 종묘사직을 위해 굴욕을 감수하고서라도 화친해야 한다는 주화파의 대치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좌우가 서로 삿대질하면서 서로 나라를 팔아먹는 매국노라고 고함을 질렀다. 

인조는 한숨을 쉬었다. 임시로 마련한 행궁은 좁아서 사람들이 왁자지껄하며 질러대는 고함으로 귀를 막아야 할 정도로 시끄러웠다. 위기 상황을 극복하기 위한 대책으로 청군이 물러나게 할 방안을 논의해야 한다는 주장은 시작도 하기 전에 완전히 결렬되고 말았다.


그 시각, 강도검찰사(江都檢察使)로 임명된 한성판윤 김경징이 이끄는 피난 대열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수십 리에 걸쳐 있었다. 

그는 강화도를 향하기 전에 집에 미리 사람을 보내 검찰사 임명 소식을 알리고 피난 준비를 시켰다. 피난 대열에 합류한 그의 어머니와 아내는 각각 덮개가 있는 가마를 타고 계집종에게는 전모(剪帽)를 씌우고 나타났다. 

전모는 종이로 넓게 만들어 얼굴을 가리거나 비가 올 때 쓰던 삿갓 모양으로 된 모자였다. 얼핏 보면 나들이하는 차림새여서 주변 사람들은 어리둥절하게 생각했다.

전통적인 모자와 비슷하게 머리에 닿는 원형 부분을 먼저 만들고, 대나무를 이용해서 우산살처럼 사방으로 뻗친 테를 만든다. 

그 위에 종이, 천, 대나무 등 가벼운 소재를 덧대어서 일종의 우산처럼 조립하여 완성하는데, 비를 막는 효과도 있어서 양반가에서 많이 만들어 사용하였다. 

 

김경징의 가솔(家率)들과 함께 옮기는 짐은 무려 50여 바리나 되었다. 이 엄청난 규모를 두고 사람들 사이에서는 경기도의 인부와 말이 거의 제 집안 식구와 짐을 옮기는 데에 모두 동원되었다는 말이 돌았을 정도였다. 

가는 도중에 한 계집종이 말의 발이 겹질리는 바람에 땅에 떨어지는 사건이 일어나자, 수행하는 배리(陪吏)를 부주의했다는 죄목으로 노상에서 곤장을 치게 하는 행패도 부렸다.

부사(副使) 이민구(李敏求)와 종사관 홍명일(洪命一)도 다를 바가 없었다. 이민구는 병조 판서 이성구(李聖求)의 아우였고, 홍명일은 좌의정 홍서봉(洪瑞鳳)의 아들이었다. 

이들 세 사람이 명을 받고 강화로 출발할 때 세 집의 짐만 무려 10리에 이를 정도였다. 게다가 그 집안 식구들의 행색이 너무 화사하므로 피란길에 뒤따르던 백성들이 모두 분하게 여겨 욕을 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고 하였다.

 

소현세자와 세자빈, 봉림대군을 비롯한 권문세도가의 피난 행렬 뒤에는 백성들이 따랐다. 

조정이 강화도로 피난한다는 소문은 이내 입소문을 타고 빠르게 저잣거리에 퍼져나갔다. 

통진(通津)을 지나 강화도에 가까워지면서 피난 대열에 합류한 백성들의 수는 급격하게 늘어났다. 강화도를 향한 피난 대열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수십 리에 걸쳐 있었다. 조정이 강화도로 피난한다는 소문을 들은 백성들이 급하게 짐을 꾸려 이고 지고 대열에 합류한 것이다. 

 

중간중간에 합류하면서 백성들이 전하는 소문도 흉흉하였다. 청나라 오랑캐 군사가 곧 강화도 일대를 도륙할 것이라는 소문이 돌고 있었다. 

피난 행렬이 점점 늘어나자, 군사들은 행렬을 통제하기가 점점 어려워졌다. 김경징은 군사들에게 백성들이 피난 대열에 합류하는 것을 막으라고 지시했다. 

지시받은 군사들이 백성들이 피난 대열에 끼어드는 것을 통제하려고 이리저리 뛰었다. 그러나 어찌 인위적으로 막을 수 있겠는가? 


원래 급하게 피난 행렬이 꾸려진 데다가 군사들의 수도 그다지 많지 않아서 막상 소문을 들은 백성들이 피난 대열에 합류하기 시작하자 그들까지 통제한다는 것은 사실상 어려운 일이었다. 

게다가 이들의 통제로 곳곳에서 화가 난 백성들로부터 항의받자, 이마저도 할 수 없는 상황이 되어 갔다. 백성들의 불만은 갈수록 높아져 갔다.

 

김경징이 인솔하는 행차는 한양을 떠난 지 사흘이 지나서야 비로소 강화도 앞에 도달했다. 강화해협이 그들의 발길을 막았다. 그들의 앞에는 거센 물살이 흐르는 바다가 있었다. 

원래 평소 같으면 양화진(楊花津)에서 배를 타고 한강 하류를 따라 김포까지 간 다음, 다시 규모가 좀 더 큰 배를 타고 갑곶나루 등지로 상륙해야 했는데, 당시 계절은 한겨울이라 한강이 얼어붙어 있어서 그런 일을 기대하기에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다. 

거무스름한 바닷물이 넘실대는 바다 너머로 손에 닿을 듯한 곳에 강화도가 눈에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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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난민 대열


지금은 다리가 놓여 아무 때고 강화도로 오갈 수 있지만, 그 당시에는 배를 타고 건너는 방법 외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피난민 행렬은 이곳에서 발을 멈춰야만 했다.

김포와 강화도 사이의 강화해협은 폭이 불과 600~800미터 정도밖에 되지 않지만, 물살이 워낙 거세어서 노련한 뱃사공의 실력으로도 건너기가 만만치 않은 곳으로 유명했다. 

더구나 바닷가는 질퍽한 갯벌이 펼쳐져 있어서 당시에는 배를 댈 수 있는 나루터도 갑곶나루 한군데밖에 없었다. 

 

사흘이나 걸려 겨우 해변에 도착한 피난 행렬은 바다를 앞에 두고 멈출 수밖에 없었다.

김경징이 강화도로 가는 길에 소문으로 들으니, 백성들이 모두 두려워하고 겁내고 있었다. 종묘를 강화도로 옮기라는 명을 받고 따라오던 예조판서 조익(趙翼)은 도중에 사라졌다. 

아들 진양(進陽)에게 강화로 모시게 했던 80세의 아버지가 도중에 실종되었다는 소식을 접하자 그는 아버지를 찾는다는 명분으로 대열에서 이탈한 것이다. 

그는 얼마 후 실종된 아버지를 찾아 안전한 곳으로 모셔놓고 다시 강화도로 들어왔으나 전쟁이 끝나고 그 일로 심하게 탄핵받아야 했다. 

 

김경징의 선발대에 이어 왕자와 빈궁을 모신 일행도 강화의 바닷가에 이르렀다. 이미 포구와 저잣거리, 피난민 사이에서는 오랑캐 군사가 곧 도착할 것이라는 헛소문이 돌면서 잔뜩 겁을 집어먹고 어수선한 분위기였다. 

갑곶나루에 도착한 김경징은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포구에 있어야 할 배가 보이지 않았다. 놀란 그는 황급히 군사들을 풀어 강화도로 건널 배를 확보하라고 지시했다. 

대군과 비빈 그리고 조정 대신들을 이끌고 강화도로 피난하여 종묘사직을 지키라는 명을 받은 직위에 있는 자가 사흘이나 걸려 갑곶나루에 도착하는 동안, 정작 중요한 이동 수단인 배를 확보하지 않은 것이다. 지휘관으로서 기본적인 자질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었다.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은 김경징을 불러 빨리 대책을 마련해 달라고 말했다. 김경징이 다소 불쾌한 표정을 지으며 심드렁하게 걱정하지 말라고 대답했다. 

그의 방자하기 이를 데가 없는 불손한 태도를 본 주변 사람들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의 태도를 지켜보던 왕자들과 비빈들도 어이가 없었지만, 워낙 상황이 급박한 터라 묵묵히 지켜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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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갑곶나루

 

한나절이 다 가도록 이리저리 뛰던 군졸들이 배를 수 척 끌고 왔다. 덕포진첨사(德浦鎭僉使) 조집이 배를 이끌고 나타난 것이다. 

덕포진(德浦鎭)은 경기도 통진부(通津府, 오늘날 김포시 대곶면 신안리)에 설치된 수군진(水軍鎭)이다. 덕포진이 한양에서 강화도로 가는 길목이어서 조선 선조 때 이곳에 수군진이 창설되었다. 

덕포진은 입지 조건이 전선(戰船)을 정박하기에 편리하여 유사시 방비에 유리하였으므로 강화도 인근 해역의 여러 수군진과 협력하여 한양을 방어하는 일을 담당하였다. 여기에는 수군 첨사가 배치되었다.

 

김경징은 덕포진첨사 조집이 배를 이끌고 나타나자 뛸 듯이 기뻐했다. 그는 만면에 기쁜 얼굴로 주변을 돌아보며 “이 사람이 타고 온 배는 필시 튼튼할 것이니, 우리 집안 식구를 태워 충분히 건넬 수 있겠구나.”라고 하였다.

김경징은 우선 군사들에게 나루터로 다른 사람들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출입을 막도록 지시했다. 그리고 재빨리 자기 가족과 노비 등 가솔(家率)들과 50여 바리나 되는 짐을 먼저 조집이 이끌고 온 배 2척에 나누어 태워 강화도로 보냈다. 나머지 1척에는 평소 자기와 가깝거나 친인척들을 태우고 자신이 직접 배를 지휘하여 강화도로 떠났다.

 

원래 덕포진첨사 조집이 몰고 온 배는 원래 왕실의 소현세자와 봉림대군, 왕자, 비빈 일행을 태우기 위한 배였다. 

그러나 육로를 통해 김포까지 피난민이 몰리고 강화도로 피난민과 물자를 실어 나를 배도 충분하지 않은 상황에서 김경징은 가장 좋은 배를 자기 가족과 재물을 실어 나르는 데에 사용해 버린 것이다. 

그는 강화도로 떠나기 직전, 수하 군졸들을 불러 빨리 다른 배를 빨리 찾아 대군과 비빈을 모셔 오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자신이 먼저 배를 타고 출발했다는 것을 비밀에 부치라고 입단속했다. 

 

한편, 피난 행렬은 갑곶나루에 비로소 배가 도착했다는 소식을 듣고 한꺼번에 몰려들었다. 

그러나 이미 김경징의 지시를 받은 군졸들은 몰려드는 사람들을 가까이 오지 못하도록 통제하고 있었다. 그 때문에 피난민들은 수십 리나 줄을 서서 기다려야만 했다.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을 비롯한 왕자들과 비빈들도 소식을 듣고 배를 타기 위해 포구에 도착하여 김경징을 찾았다. 

 

세자와 봉림대군 등이 이리저리 애타게 김경징을 찾았으나 그는 끝내 포구에 나타나지 않았다. 김경징이 이미 배를 타고 강화도로 떠난 사실을 미처 알지 못한 세자와 봉림대군을 비롯한 왕자들과 비빈들은 하염없이 그를 기다렸다. 

병자호란 당시 강화도 피난길의 정황을 기록한『강도일기(江都日記)』에는 당시 상황을 기록한 내용이 들어있다. 

 

이 일기는 당시 경기좌도수군판관(京畿左道水軍判官)이었던 어한명(魚漢明)이 남긴 기록인데, 세자와 봉림대군 등을 갑곶진(甲串津)에서 강화도까지 수행하는 동안 일어난 일을 보고 느낀 대로 쓴 일기이다. 

여기에 남겨진 강도검찰사 김경징의 행태는 지금까지 일반적으로 알려진 김경징의 이미지와 크게 다를 바가 없다.


“나(어한명 자신)는 곧장 그 사람을 따라가 그(김경징)를 만나 보았는데, 한참을 이야기했으나 나랏일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고, 하늘을 쳐다보고 휘파람을 부는가 하면 부채를 들고서 흔들며 말하기를, “무엇을 어찌하겠소, 무엇을 어찌하겠소?”라고만 할 뿐이었다. 

조금 후 덕포첨사(德浦僉使) 조집이 배를 타고 오자 그는 기쁜 얼굴로, “이 사람이 타고 온 배는 필시 튼튼할 것이니, 우리 가족을 태워 건넬 수 있겠구나.”라고 하였다.“


당시 어한명은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을 수행하여 강화도로 피난하면서 강화도에서 일어난 참상을 직접 체험했다. 그는 조정의 관료들과는 면식이 없었고, 특정 당파의 성향도 없는 중립적인 인물이었다. 

그러므로『강도일기』에 들어있는 김경징에 관한 서술은『병자록(丙子錄)』이나 조익(趙翼)이 쓴『병정기사(丙丁記事)』의 그것보다 훨씬 신빙성이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봉림대군은 훗날 효종으로 즉위한 후, 병자호란 때 강화도 피난 과정에서 보여준 어한명의 충성심을 떠올리면서 여러 차례 조정 대신들에게 그의 이름과 행적을 물었으나, 아무도 그가 누군지 대답하지 못했다. 

그 후 순조 때에 이르러서야 권상하(權尙夏)·김창협(金昌協)에 의해 그 이름과 업적이 밝혀졌고, 마침내 1816년(순조 16년)에 좌참찬에 추증되었다.


김경징이 그 가속(家屬)과 짐바리를 거느리고 먼저 건너가고, 두 대군도 마냥 기다리다가 황급히 배를 구해 겨우 바다를 건너 강화도에 이르렀다. 

강도검찰사로 임명받은 김경징을 믿고 있다가 그가 자신의 가속과 짐바리를 싣고 먼저 강화도로 떠났다는 소식을 들은 빈궁(嬪宮, 왕세자의 부인)은 망연자실하였다. 

거기다가 함께 기다리고 있던 두 대군도 배를 구해 먼저 강화도로 떠났다는 소식을 전해 듣자 그녀는 실망과 함께 슬픔을 넘어 분노로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녀는 체통도 잊어버린 채 “경징아. 경징아. 네 놈이 어찌 그럴 수 있느냐? 네 놈이 어찌 감히 그럴 수 있단 말이냐?”라고 크게 통곡하면서 울부짖었다. 그녀를 모시고 있던 궁녀들과 나인들도 눈물을 흘리며 어쩔 줄 몰라 하였다.

빈궁 일행을 모시고 수행하고 있던 동부승지 한흥일(韓興一)과 부사 이민구도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어쩔 줄 몰라 이리저리 뛰며 안절부절못했다. 

두 사람은 호위 군졸을 사방으로 풀어 배를 구하라고 지시했다. 한참을 이리저리 뛰며 백방으로 노력한 끝에 군졸들이 간신히 배 한 척을 구해오는 데 성공했다. 

두 사람은 빈궁 일행을 모시고 함께 건너가려고 하였으나, 밤이 이미 깊고 또 오랑캐가 곧 온다는 것이 헛소문이라 여기고 다음날을 기다리기로 하였다. 

 

한겨울이라 해가 짧았다. 해가 서쪽으로 넘어가 금방 사방이 어둑해졌다. 

그때까지도 왕실 귀빈들에게 저녁 식사를 책임지고 있는 통진 현감 채충원(蔡忠元)이 나타나지 않았다. 

묘사제조(廟社提調)로서 묘사를 받들고 소현세자와 빈궁(嬪宮)·봉림대군(鳳林大君)과 함께 40여 신주(神主)를 강화로 옮기는 중책을 부여받은 윤방(尹昉)이 달려와 한흥일괴 이민구에게 빨리 대책을 세우라고 재촉했다.

 

동부승지 한흥일(韓興一)은 속이 타들어 갔다. 급하게 통진 관아로 보낸 군졸들도 나타나지 않았다. 마냥 기다리다가는 꼼짝없이 빈궁 일행이 저녁을 굶게 될 상황인 것이다. 그는 직접 군졸들을 이끌고 민가를 돌면서 식량을 구했다.

피난을 가고 사람들이 없는 빈 집마다 배고픈 피난민들이 여기저기 우르르 달려들어 집집마다 식량을 찾아 뒤지고 있었다.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다. 

그는 군졸들을 시켜 백성들이 지닌 식량을 강제로 빼앗다시피 해서 겨우 쌀을 구해 돌아왔다.

 

빈궁 일행은 차가운 바람을 피하느라 들어선 민가에서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군졸들이 겨우겨우 불을 피우고 죽을 끓여서 빈궁 일행에게 바치니 다행히 허기를 면할 수 있었다.

한흥일(韓興一)은 어두운 하늘을 올려다보며 안도의 한숨을 몰아쉬었다. 실학의 선구자 한백겸(韓百謙)이 바로 그의 부친이다.


집안 식구들과 함께 강화도로 들어온 김경징은 자기 가족들이 강화성 내에 편안히 자리를 잡게 한 뒤에 주변을 정리했다. 그제야 그는 빈궁 일행이 아직도 건너오지 않았다는 보고를 받았다.

순간 그는 가슴이 철렁했다. 사실 그는 이미 갑곶나루에서 배를 타고 출발할 때 빈궁을 포함한 왕실 가족 몇 명을 태우지 않은 것을 알고 있었다. 

자기 가솔(家率)과 짐바리를 싣고 나니 더 이상 발을 디딜 틈도 없이 빼곡한 마당에 다른 사람을 돌아볼 생각을 아예 하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막상 강화도에 무사히 도착하고 보니 생각이 바뀌었다. 후일 자신의 처신을 추궁받지 않기 위해서라도 빈궁 일행을 모셔 와야 했다. 그는 허겁지겁 복장을 차려입고 군사들을 불러 호송 준비를 시켰다. 

그는 군사들을 이끌고 나루터로 나가 자신이 타고 왔던 배를 비롯하여 여러 척의 배를 이끌고 타고 다시 바다를 건넜다. 저녁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갑곶 포구에 도착한 그는 급하게 빈궁 일행을 찾았다. 

 

동부승지 한흥일이 김경징이 다시 배를 몰고 나타났다는 소식을 듣고 빈궁 일행을 모시고 부랴부랴 포구에 들어섰다. 

배에서 내린 김경징은 빈궁에게 다가가 그간의 일을 설명했다. 자신이 먼저 강화도로 들어간 것은 종묘사직을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라고 변명을 늘어놓았다. 

빈궁은 김경징에게 어찌하여 그런 짓을 할 수 있느냐고 따져 물었다. 그녀가 화를 내며 자신의 불경스러움을 추궁하며 따지자 김경징은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는 자신이 지금 전시 상황에서 주상전하로부터 위임받은 강도검찰사의 권한을 정당하게 판단하고 행사한 것이라고 우겼다. 그의 태도는 당당했다. 빈궁에게 갖추어야 할 예의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동부승지 한흥일이 상황을 수습하려고 끼어들었다. 빈궁을 포함한 일행은 화를 참지 못하고 두고 볼 것이라고 하면서 물러서지 않았다. 

김경징은 빈궁의 추궁에 코웃음을 쳤다. 그는 빈궁 일행을 못마땅한 표정으로 노려보다가 군사들을 이끌고 배에 올랐다. 오를 테면 오고 말라면 말라는 식이었다.

한흥일이 얼른 빈궁 일행을 배로 모셨다. 빈궁으로서는 당장 참을 수밖에 없었다. 비록 세자빈의 신분이라 하더라도 전시 상황에서 강도검찰사로 임명받은 그를 어떻게 해볼 방법은 없었다. 

 

그녀로서는 지금은 참을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그녀와 일행은 내심 이를 갈았다. 일행은 할 수 없이 김경징이 시키는 대로 나루에서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강화도에 이르렀다.

나루터에는 배를 타지 못하고 발을 동동 구르는 피난민들이 이 광경을 지켜보면서 아우성을 치고 있었다. 살려달라는 아우성으로 나루터는 아수라장을 방불케 했다. 그들로서는 어떻게 해서라도 가족들을 이끌고 바다를 건너는 것이 급선무였다. 

김경징을 따라온 군사들은 창칼을 앞세워 사납게 백성들을 제압했다. 원망하는 피난민들의 절규가 갑곶나루에 가득했다. 김경징은 애써 이들의 절규를 못 들은 척하고 빨리 배를 띄우라고 뱃사공들을 다그쳤다. 

수많은 피난민들이 꽁꽁 얼어붙은 나루터에서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한겨울의 추위는 매정하게 옷깃을 파고들었다. 그들에게 자비를 베풀 사람은 없었다. 

그렇게 해서 남겨진 수많은 피난민이 뒤따라 들이닥친 청군에 의해 피살되거나 포로가 되어 청나라로 끌려갔다.


당시의 상황은 기평군 유백증(俞伯曾)이 조정에 올린 상소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인조실록 1637년(인조 15년) 6월 21일 자(무오) 기사에 기재된 상소문에서, 유백증은 강도검찰사 김경징에 대해 다음과 같이 비판하고 있다.


“……(중략) 당초 강도(江都)로 들어갔을 때, (김경징이) 먼저 제 집안 가속(家屬)을 건너게 하고 묘사(廟社)와 빈궁(嬪宮)은 나루에 사흘 동안 머물러 두어 건너지 못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내관(內官) 김인(金仁)이 분을 못 이겨 목메어 통곡하고 빈궁도 통곡하였으니, 이 사람(김경징)은 전하(殿下)의 죄인일 뿐 아니라 실로 종사(宗社)의 죄인입니다. 

또 영기(令旗)로 제 친한 사람만 건너게 하고, 일반 백성(士民)들은 물에 빠지거나 (청군에) 사로잡히게 하였으니, 이 억울하고 분한 마음을 어찌 견딜 수 있겠습니까? (하략)……”


이를 통해 알 수 있듯이, 김경징은 강도검찰사로서 세자빈과 세손, 봉림대군 일행을 강화도로 모실 때 어이없는 짓을 저질렀다. 

그는 대군과 왕자, 비빈 등 왕실 일행을 사흘 동안이나 갑곶나루에 머물게 했다. 또, 자기는 배를 타고 강화도로 가면서 가속(家屬)과 자신과 친한 사람만 먼저 건너게 하면서 이들을 모른 체했다. 

 

마침내 빈궁을 통곡하게 했고 왕실의 체통을 땅에 떨어뜨렸다. 비록 사흘이나 지난 뒤에 왕실 일행을 건너게 했지만, 백성들이 따라 건너는 걸 또한 허용하지 않아 그를 따라 피난 온 백성들이 뒤따라 들이닥친 청군에게 헛되이 죽거나 사로잡히게 했다. 

모든 백성은 그의 처신을 원망했고 사족(士族)들 역시 김경징이 왕실에 큰 불경을 저질렀다며 성토했다.

 

강도검찰사로서 종묘사직 수호의 임무를 부여받은 자로써 왕실 가족을 잘 호위해서 안전하게 먼저 강화도로 건너간 후에 비로소 자기 식솔들을 건너게 해야 마땅한 일인데도 그는 먼저 해야 할 일과 나중 해야 할 일을 분간하지 못했다. 

상황이 너무 황급하여 미처 그렇게 할 겨를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변명할 수는 있겠지만, 중책을 맡은 관료로서뿐만 아니라 그의 사람됨을 보여주는 일면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고려를 쳐들어왔던 몽골도 이 바다 앞에서 더 이상 해볼 도리가 없어서 멈춰 섰었다. 정묘호란 때 후금(後金) 군도 이 바다를 건너지 못하고 땅을 쳤었다. 그들에게 강화도는 분통이 터지고 감질나는 섬이었다. 

 

당시 동아시아를 호령하며 지축을 흔들었던 막강한 군사력으로도 어찌해 볼 도리가 없었던 요새였던 강화도였다. 

빤히 건너다보이고 금방이라도 손에 잡힐듯한 곳인데도 쉽게 쳐들어갈 수 없었으니 얼마나 분통이 터졌을지는 능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오죽하면 몽골의 한 장수가 “병사들의 갑옷을 벗어 쌓아도 저 바다를 건널 수 있겠다.”라고 하면서 한탄했겠는가.

그런 천혜의 요새임에도 불구하고 왕으로부터 대군과 왕자, 빈궁을 비롯한 비빈들을 잘 이끌고 들어가 종묘사직을 지키라는 임무를 받은 자가 그런 터무니없는 행동으로 만백성으로부터 지탄받는 신세가 되었으니 참으로 어이없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사람을 알아보는 인조의 눈이 고작 이런 수준에 지나지 않았음을 잘 보여주는 사례가 아닐 수 없다.

 

남한산성을 포위한 청 태종은 마부대(馬夫大)로부터 성안의 상황에 대해 정보를 보고받았다. 마부대는 남한산성에는 1만여 명의 백성이 운집해 있지만 실제로 훈련받은 군사는 1천 명도 채 안 된다면서, 식량마저도 약 한 달 치 정도에 불과하다고 보고했다. 

청 태종은 미소를 지었다. 혹한기의 매서운 날씨는 청군에게도 유리한 건 아니었다. 그는 항복을 받는 게 중요했다. 그러나 마부대의 보고로는 조선이 그리 호락호락 쉽게 항복할 것 같지는 않다고 했으니 그 대안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바로 인질(人質)이었다. 

그렇다면 남한산성은 그대로 묶어놓고 강화도를 공략해서 왕자들과 비빈들을 잡아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조선의 항복을 받아내기 위해서는 왕자들을 인질로 잡는 것이 효율적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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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월 동강 뗏목


마부대는 강화도의 상황도 자세하게 보고했다. 그는 강화도를 방어하는 조선군의 수가 많지 않으므로 공략이 생각보다는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라는 판단이 섰다. 

청 태종은 강화해협을 건널 배를 만들라고 지시한다. 명령받은 마부대는 즉시 실행에 옮겼다. 그리고 섬과의 거리가 멀지 않으니 정상적인 배가 아니라도 좋다는 지시를 내렸다. 그저 군사들을 태워 대안에 상륙만 할 수 있기만 하면 된다는 생각이었다.

이리하여 강화도가 보이는 포구 근처에는 청군들이 모여들어 뗏목을 만들기 시작했다. 엄동설한에 배를 만들 재목을 구하기 어렵자 마부대는 병사들을 시켜 민가를 헐어 그 재목으로 배를 만들었다. 순식간에 포구에서 가까운 마을들이 폐허가 되다시피 했다.

청군의 판단대로 강화도의 조선군은 절대 부족했다. 원래 인조가 강화도로 이동할 때 어명을 받은 지방 군대가 합류하여 왕실 군대를 중심으로 주력군을 편성하려고 했었는데, 지금은 그 계획이 수포가 되고 말았다. 

 

김포와 강화도 사이 좁은 바다가 조류가 세다. 물살이 센 날은 요즈음처럼 엔진을 단 바지선도 쉽게 지나가지 못할 정도이다. 

그런 사정을 알게 된 김경징이 믿고 있는 군대는 바로 수군(水軍)이었다. 청군은 육지에서는 용맹스러운 천하무적의 군대이지만 물에서는 조선 수군의 상대가 안 된다고 생각한 것이다. 

김경징은 임진왜란 때 이순신이 큰 전공을 올리는 데 크게 이바지한 판옥선을 믿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 강화섬을 지키는 수군에게는 그마저도 몇 척이 없었다. 

그는 수군을 두 부대로 편성하여 하나는 북쪽의 연미정에, 다른 하나는 남쪽의 손돌목에 배치했다. 

 

그러나 지휘체계에 문제가 있었다. 당시 강화산성에 주둔한 조선군의 수는 채 몇백이 되지 않는 데다가, 강화도 수비 총대장인 강도검찰사 김경징과 강화유수(江華留守) 겸 주사대장(舟師大將) 장신(張紳)이 지휘권을 놓고 다투면서 반목하는 바람에 분열되어 있었다. 

두 대군과 왕자들이 있었지만, 그들은 왕족으로서의 대우받을 뿐이지 실권은 없었다. 봉림대군이 참전할 수는 있어도 지휘권이 없으니 그들을 통제할 수 없는 일이었다. 

대군과 왕자들은 두 사람의 힘겨루기를 보며 크게 낙담하고 있었다.

강화유수 장신은 게으르고 무능하여 믿을 수 없었다. 

 

특히, 김경징은 대군이나 대신들의 의사를 무시하면서 혼자서 강화도 안의 모든 일을 지휘하고 명령하였다. 더구나 강화도를 금성철벽(金城鐵壁)으로만 믿고 청군이 쉽게 건너오지는 못할 것으로 생각하여 대비에 소홀하였다. 

그는 사람됨이 평소 구차하게 민심을 기쁘게 하여 명예를 얻고자 하는 자였다. 그는 강화도는 하늘이 낸 요새이므로 근심할 것이 없다고 하면서 백성과 군사들을 모두 집에서 명령을 기다리게 하였다. 

진지를 구축하고 군영을 배치하기는커녕 얼마 되지 않은 무기조차도 나누어 주지 않았다. 곧 청군이 들이닥칠 텐데 그래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으면, 모두 다 겁쟁이들이라고 하면서 도무지 듣지 않았다. 

 

김경징은 강화도에 저장된 군량 창고를 먼저 점검했다. 생각보다 너무 적은 군량미를 보고 그는 즉시 김포와 통진에 보관되어 있던 곡식을 옮기라고 지시했다. 명분은 강화도로 들어온 왕실을 돌보고 피난민을 구제한다는 것이었다.

검찰사의 지시를 받은 군졸들은 다시 배를 띄워 김포와 통진으로 건너가 군량미를 실어 왔다. 포구 일대에서 강화도를 바라보며 한숨만 쉬던 피난민들이 군졸들이 군량미를 싣자, 양식을 나눠달라고 몰려들었다. 노약자들도 배를 움켜쥐며 엄동설한의 추위를 견디며 배를 얻어타려고 몰려들어 북새통을 이루었다.

김경징의 부하들은 창칼을 곧추세우고 이들을 향해 찌를 듯 위협하여 매몰차게 몰아냈다. 포구 일대에서는 검찰사 김경징을 원망하고 저주하는 곡소리가 하늘을 찔렀다. 

강화도로 멀어져가는 배를 보며 울부짖는 아우성이 얼마나 컸던지 건너편 강화섬에서도 들릴 정도였다. 그렇게 포구 주위에 버려진 사람들은 후에 청군에게 대부분 희생되고 말았다.

 

김경징은 배로 실어 온 군량미를 창고에 쌓아두는 대신 곧장 왕실 가족에게 일부 나누어 주고, 나머지 대부분은 자기 가족과 친지들을 중심으로 나누어 주었다. 

배급을 기다리던 피난민들에게는 한 줌의 쌀도 배급되지 않자, 모든 사람이 김경징의 처신을 원망하며 저주했다. 결국 김경징은 김포와 통진에 있던 나라의 곡식도 피란민 구제라는 명목으로 빼돌려서 자신의 주머니를 채웠다.

그는 매일 술을 마시며 시간 대부분을 취해 있었다. 심지어 강화도의 해안선인 갑곶과 연미정 이북 사이에 보초 하나 세워두지 않고, 청군의 동태를 감시하는 일도 하지 않았다.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을 비롯한 왕실과 원로 대신들까지 나서서 그의 처신을 걱정하며 좋은 말로 타일렀다. 

 

그들은 강화도의 수비 상태가 너무 허술하므로 마땅히 대책을 세워야 한다고 촉구했다. 그러나 그는 기고만장하여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이 강도검찰사의 지위에 있음을 내세워 왕실 대군과 신하들을 윽박지르기까지 했다.

청나라 군대가 강화도 근처까지 몰려온 상황에서도 김경징이 이토록 안일하게 행동한 데에는 자기 나름대로 믿는 구석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즉, 만주족은 기마민족이라 물에 익숙하지 않기 때문에 하늘을 날지 않는 한 절대로 바다를 건너 강화도로 건너오지 못할 것으로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같은 기마민족이라도 몽골족과 다르게 만주족은 이미 고려시대에도 해적 노릇을 한 기록이 줄줄이 나올 정도로 바다에 익숙한 편이었다.

게다가 병자호란이 일어나기 전에, 무려 280여 척이나 되는 배와 수만 명의 군사로 구성된 명나라 수군이 통째로 청나라로 투항한 사건이 있었다. 

이런 사실은 조선에서도 이미 알고 있었다. 그 수군이 청나라에 투항하는 걸 막으려는 명나라의 요청으로 조선 군대가 명나라 군대와 함께 그 수군을 추격하여 전투까지 벌였기 때문이다. 

 

청나라에 이미 수군이 생겼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청나라 군대가 절대로 바다를 건너지 못할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니 정말 황당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보다 못한 원로 대신 김상용(金尙容)이 나서서 꾸짖었다.

“지금 네 나이가 몇인데 어찌 이리도 철없이 구느냐? 네 아비인 김류도 임금을 따라 남한산성에 갔는데, 너는 걱정이 되지도 않느냐?”

김경징은 자기 아버지보다 연배인 그의 앞에서 공손한 자세는커녕 오히려 앉았다가 일어나면서 화를 벌컥 내며 소리를 빽 질렀다. 

“바다가 가로막고 있는데, 청군이 어떻게 건너오겠습니까? 설령 건너온다고 한들 내가 알 게 뭐요?! 어떻게 되건 나는 모르는 일이오.”

그는 잔뜩 화가 나서 책상 위에 놓아둔 군사 업무를 처리하는 관인(官印)을 바닥에 내던지면서 씩씩거렸다.

강화도에 피난하여 들어온 사림의 선비들까지도 분통이 터져 다투어 글을 지어 검찰사 김경징의 수하들에게 전하라고 보냈다. 그 글 가운데에는 “옥지(玉趾)가 성을 순찰하고 유신(儒臣)이 성을 지키니 와신상담해야지 지금은 술 마실 때가 아니다.”라고 경고하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그는 물론 그의 막하에 있던 부사 이민구 등은 오히려 부끄러운 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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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도 갑곶돈대


마침내 1637년 1월 21일 밤, 청군은 배 한 척을 띄워 갑곶진의 수비 상황을 염탐했다. 조선군으로부터 아무런 반응이 없자, 청군은 다음 날 아침에 40여 척의 배로 바다를 건너기 시작했다. 

결국, 강화도는 제대로 된 전투 준비 없이 청나라 군대의 공격을 받게 되었다. 

갑곶 해안 수비를 맡고 있던 김적이 급히 달려와 청군이 배를 타고 강화도로 건너오고 있다는 사실을 김경징에게 보고했다. 김경징은 김적을 붙잡아 오히려 화를 내며 길길이 뛰었다.

“이놈아. 물이 모두 얼었는데 어떻게 청군이 건너온단 말이냐? 여봐라. 당장 이놈을 끌어내 목을 쳐라. 유언비어를 퍼뜨려 민심을 어지럽히는 자는 용서할 수 없다.”

군사들이 우물쭈물하는 사이에 갑곶을 지키는 장수 하나가 또 뛰어들어 김적과 같은 내용을 보고했다. 청군이 바다를 건너 해안에 상륙했다는 것이었다. 

그제야 깜짝 놀란 김경징은 군사를 앞세워 갑곶으로 달려갔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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