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담 장군의 역사적 새로운 조명과 재평가를 바라며

고 윤병한 교장의 발자취를 따라서 정담 장군 추모 사업 진행
기사입력 2026.01.22 1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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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우규.jpg

울진정담장군숭모회 회장 임우규

 

고 윤병한 교장은 살아생전에 울진군 출신 정담 장군에 대해 역사적 새로운 조명과 재평가가 이루어지길 간절히 바랐습니다. 

 

1991년 5월 윤 교장이 노태우 대통령께 올린 탄원서 내용 중에 『정담 장군이 1592년 7월 7일과 8일(당시 음력) 임진년에 김제 군수를 재임 중 김제에서 전주로 가는 길목인 웅치고개에서 일본은 당시 조선국에서 제일 큰 인적 손실을 보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당시 조선 7도가 왜군에 의해 모두 함락되었고, 전라도 전주 도성까지 왔으나 1,000여 명의 군사로 10배가 넘는 왜군과 싸워 웅치전에서 많은 인적 피해를 보고 전의를 상실한 상태에서 돌아가면서 웅치고개에 쓰러진 조선 병사들을 여러 곳에 모아 흙을 덮어 주고 갔다고 합니다. 실상은 상공자요 특등 공신인 정담 장군만이 버젓한 사당하나 없고, 온 국민이 정담의 행적을 모르고 있으니 이 어찌 통탄한 일이 아닙니까. 바라옵건대 노 대통령께서는 특명으로 정담 장군의 충열을 초중고등학교 교과서에 실리도록 지시하여 주시옵고 아산 현충사에 비견되는 충열사를 건립, 장군의 넋을 위로해 주시기 간절히 바라옵니다.』라고 적혀 있습니다.

 

고 윤병한 교장선생님 탄원서 내용처럼 지역 어르신들이 못다 한 일을 오늘 우리 후예들이 해야 함은 당연지사로 현재 정담 장군 충열사 건립을 위해 『울진정담장군숭모회』를 만들어 추모 사업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추모사업회에서는 뜻있는 분들의 참여를 위해 회원 모집을 하고 있으며, 고 윤병한 교장의 3남 두환(구. 명길)님께서 향토사 연구 3집(정담 장군 관련)을 발간하여 무료 배포하고 있습니다.

 

다음은 고 윤병한 교장이 노태우 대통령께 보낸 탄원서 전문 중 일부이다.


머리말

(이 책을 존경하는 노 대통령께서 꼭 읽어 주시옵기를 천만번 간절히 바라옵니다.)


슬프다! 역사의 왜곡이여! 나라에 큰 공이 있는 자가 공이 적은 자가 되고, 공이 적은 자가 큰 공이 있는 자가 되어 몇백 년이 지나도 이를 바로 잡지 못하고 있으니 이 어찌 통탄할 일이 아닌가?

 

임진왜란 때, 김제 웅치(金堤 熊峙)에서 불과 1,000명 미만의 약한 군사를 갖고, 금산에서 호남으로 침범하려는 10배가 넘는 대적을 맞아 임전무퇴 정신으로 용감히 싸우다 죽음으로써 호남(전라도)을 보전하고, 국가회복(國家恢復)의 근본적인 공을 세운 정담 장군이야말로 그 대표적인 예라 할 것이다.

 

사전에 갑옷(군복)에 이름 두 자 적어 놓고 “나는 이 싸움에서, 한 놈의 적을 더 죽이고 죽을지언정, 목숨을 아끼어 한 치 땅도 후퇴하지 않을 것이다. 너희들도 나와 같이 목숨 바쳐 싸울 자는 남고, 살기를 바라는 자는 물러가라”고 하신 그의 충분히 격(激)한 말에 감동한 장병들은 한 사람도 물러가는 자가 없었다.

 

이리하여 결전 태세를 갖춘 그는 진두에서 용감히 싸워 적의 정예부대를 거의 다 죽이고는 화살이 떨어지니 칼을 들고 싸우다가 죽었다.

이 싸움으로 말미암아 승승장구하던 적의 예기(銳氣)가 크게 꺾이어 호남을 침범하려던 당초의 야욕을 버리게 되었고 적조차 정담 장군의 충성심에 감동하여 그의 시체를 거두어 무덤을 만들고 나무 표목(標木)을 세워 ‘조선국의 충의로운 장수의 영혼을 조상한다.’(조 조선국 충간의담)고 써두고 물러갔다.

 

임진왜란 7년간에 전국 8도 중, 7도가 적의 수중에 들어가 쑥대밭이 되었으나 이 웅치 싸움으로 말미암아 호남 1도만은 보전되어 호남 곡창 지대에서 생산된 식량으로 이순신 장군의 군량미를 공급해 줄 수 있었고, 호남의 청년들을 수군(水軍:해군)에 징집하여 한산대첩 등 남해안의 제해권(制海權) 장악으로 빛나는 승리를 거둘 수 있게 했고, 웅치 싸움에서 전투 경험을 얻은 호남의 정병맹장(精兵猛將)들이 권율 장군의 휘하에 들어가 선봉이 되어 잘 싸웠기에 행주대첩이 이루어졌으며, 금산 싸움, 진주 싸움이 모두 다 호남이 보전되었기에 승리가 가능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권율 장군이 자신의 사위인 백사 이항복(白沙 李恒福)에게 정담 장군의 공을 높이 평가하고 “국가 회복의 근본적인 공을 세웠다.”고 말씀하셨고, 또 “나라에서나 온 국민이 나의 공이 가장 크다고 말하고 있으나, 사실은 정담 장군의 공이 가장 크고, 나의 공은 그 다음이다.”고 하셨으며, 백사 이항복은 그 사실을 자신의 문집인 백사집(白沙集) 8권 중 ‘논 전후 제장 공적 편(論戰後諸將功績編)’에 기록해 둔 것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난(難) 후에 논공행상(論功行賞) 때는 정담 장군이 일등공신이 되지 못하고, 삼등 공신으로 떨어졌으니 이 어찌 통탄할 일이 아닌가?

 

그것은 난 후에 록훈청(錄勳廳)에서 논공행상(論功行賞)할 때, 웅치 싸움은 전쟁 초기의 불과 이틀 간의 싸움에서 정담 장군이 전사해 버렸고,  조정(朝廷)이 멀리 의주(義州)에 있었는지라 자세한 사실을 알지도 못했고, 권율 장군이나 임진왜란 7년간 병조판서로 군권(軍權)을 장악한 백사 이항복은 정담 장군의 공을 잘 알고 있었으나 피수상 대상자라 녹훈청의 논공행상에 참여하지 않았으므로 아무도 그의 공을 입증해 주는 자가 없었다. 또 당시의 논공행상은 정치 세력과의 상관관계에 의해 오보나 허위 보고에 의해 올바르게 평가되지 않았던 탓도 있다.

 

정담 장군의 공이 그렇게 격하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이항복은 임금님(선조대왕)의 재가를 얻어 발표된 연후에야 그 사실을 알고(이때 백사는 우의정(右議政)으로 승진된 후다.) “나는 무엇하는 사람이냐? 나는 무엇하는 사람이냐?”(아자하야 아자하야)고 탄식하셨고(존제 이징일 찬 백사 이항복 기략 후기), 권율 장군은 자신이 정담 장군을 제쳐 놓고 일등 공신이 된 것을 “내가 참으로 부끄럽다. 내가 참으로 부끄럽다.”(아심괴 아심괴)하신 것이다. (참판 이헌경 찬 정담장군전)

 

백사는 이 사실을 자신의 일생일대(一生一代) 큰 실수로 생각하시고 정담 장군에 대해 미안한 생각을 버리지 못하여 이 왜곡된 역사적 사실을 후세 사람들에게 바로 알리기 위해 의도적으로 백사집 8책 ‘논 란후 제장고적편(論 亂後 諸將功績編)’에 기록해 두었는데, 그것도 병조판서 7년간을 역임한 자신의 말을 쓰지 않고, 객관적인 증거를 확보하기 위해 자신의 장인인 도원수(都元帥) 권율 장군의 말을 인용해 써서 만고의 증거가 되게 하셨다.

백사가 없는 사실을 거짓으로 장인인 권율 장군의 말을 인용해 썼겠으며 또 권율 장군이 겸사의 말씀으로 하신 것을 백사가 그 진실을 모르고 그렇게 썼겠는가?

아무튼 백사의 그 기록이 없었던들 400년이 지난 오늘날 그가 일등 공신 위의 특등 공신이라는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옛적 중국 당(唐)나라 안록산란(安祿山亂) 때 장순(張巡), 허원(許遠) 두 장수가 수양싸움에서 목숨 바쳐 잘 싸워 이김으로서 동경(東京: 당나라 서울)을 회복했건마는 그 공은 장순, 허원에게 돌아가지 않고 도원수인 곽자의(郭子儀)에게 돌아가 그 후 많은 선비가 그 표상의 부당함을 말해 왔는데 당나라 말기에 대문장가 한퇴지(韓退之: 당송팔대가의 하나)가 나와서 감동적인 문장으로 그 부당성을 통렬히 비판하여 온 나라에 알림으로써 나라에서 뒤늦게 이를 알고 쌍묘(雙廟)를 지어 두 장수의 넋을 위로해 주었다는 고사(故事)가 있다.

그러나 한문공(韓文供: 한퇴지)은 글을 잘하니 왜곡된 역사를 바로잡는 위력을 발휘했거니와 슬프다! 나는 글을 못 하니 어떻게 이 억울하고 원통한 사실을 온 나라에 알리어 바로 잡을 수 있을 것인가?

 

권율 장군, 이순신 장군, 신립 장군, 곽재우 장군, 정기룡 장군 등등 임란 당시, 수많은 장수들의 사당이 해방 후 새로 지어져 후세에 빛을 내고 있는데 상공자(上功者)요 특등 공신인 정담 장군 만이 버젓한 사당 하나 없고, 온 국민이 모르고 있으니 이 어찌 통탄할 일이 아닌가?

 

바라옵건대

노 대통령께서는 특명으로 정담 장군의 충렬을 초중고등학교 국정 교과서에 실리도록 지시해 주시고, 아울러 김제 웅치에 아산 현충사에 비견(比肩)되는 정담 장군의 ‘충렬사’를 지어 김제 출신 강운(姜運), 박형길(朴亨吉) 등 모든 지휘관과 그때 죽은 병사들을 다 같이 배향(配享)하여 그들의 넋을 위로해 주시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끝으로 이 글을 쓰는데 있어 한학자 창은 심상렬 옹(滄隱 沈相烈 翁)의 가르침에 힘입은 바 많았었고, 교정(校正)을 봐주신 국문학자 손용갑(孫鎔甲)씨와 협조해 주신 최진흥, 이호준, 남호열, 이거운 제씨에게 깊이깊이 감사의 뜻을 표하면서 ‘머리말’에 대한다.


1991. 윤병한


백사 이상공(항복) 기략

(논 난후 제장공적: 백사집 8책)


우리나라에 문헌(文獻)이 부족하여 비록 큰 사업을 했고 큰 시비(是非)가 있어도 이를 기록하지 않아 몇 세대(世代)가 지나가도 알지 못하고 알려고 해도 알 근거조차 없는 것이 있으니 내 이를 항상 한탄하는 바이다.

 

임진왜란 때 내가 임금님(선조대왕)을 모시고 평양에 이르러 병조판서를 배명받고 그로부터 7년간 여러 장수들의 공적과 죄과를 대략 다 아는 바이다.

그 뒤 임금님의 명령으로 남쪽지방(김제)에 가서 여러 가지 기록을 보고 지방 선비들의 공론하는 바를 들어서 더욱 명확히 알게 되었는데(정담 장군의 공을 알게 되었는데), 세상 사람들은 전혀 그 실상을 알지 못하고 사대부(士大夫)들의 말을 들어보면 왕왕 그말이 서로 모순되어 그 실상이 거꾸로 전달됨을 아는데, 지금도 이러하거늘 오랜 세월이 지나게 되면 나라에 공이 있는 자가 공이 적은 자가 되고, 공이 없는 자가 공이 있는 자가 되어 그 실상에 비해 하늘과 땅과 같이 차이가 생길 것이다.

 

일찍이 임금님께서 여러 장수들의 공(功)을 말씀하실 때, 바다에서는 이순신과 원균을, 육전에서는 권율을 가장 공이 크다 하셨으니 이는 영원히 바꿀 수 없는 정론(定論)이 되었다.

그러나 그 사이에는 여러 가지 곡절이 있어 공이 있으면서도 나타나지 않는 자도 있으니 어찌 바로 평가되었다고 할 수 있겠는가? (정담 장군을 두고 하시는 말씀임)

 

내 장인(丈人)이신 권율 장군께서 항상 나에게 말씀하시기를

“나라에서나 세상 사람들이 내가 주도한 행주싸움이 가장 공이 크다 하는데 공이 없는 것은 아니나 내가 일생을 군무에 종사해서 이제까지 이르게 된 데는 그동안 크고 작은 많은 전투에 참여하여 공을 쌓은 탓이지만 그 전공(戰功)으로 말하면 전라도 웅치싸움을 주도한 정담 장군의 공이 가장 크고, 행주싸움을 주도한 나의 공은 그다음인데도 나의 공이 가장 크다 하니 나는 그 이유를 모르겠다. (전라도 웅치지전 위최 행주차지 아종이행주사 유불가지자)

 

웅치싸움은 전쟁 초기에 훈련도 잘되지 않은 약한 군사를 갖고, 날카로운 적을 맞이해서 군심(軍心)이 흉흉하여 이를 믿고 대적해 싸울 수 없는 형편인데도 죽을힘을 다하여 혈전(血戰)함으로써 불과 천명 미만의 약한 군사로 10배가 넘는 한악한 대적을 상대로 잘 싸워 호남(전라도)을 보전(保全)하여 국토회복(國土恢復) 근본지지(根本之地)가 되게 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쉬운 일이겠는가?

 

이때는 임금님이 의주에 계셨는지라 서북쪽에 길이 막혀 알리지 못하였고 또 도감사(道監司)나 백성들이 다 달아나 어느 누가 나라에 알릴 자도 없었으니, 마치 보는 사람 없는 캄캄한 밤에 서로 싸운 것 같아서 그 공이 나타나지 못하였고, 행주싸움은 전쟁 초기의 웅치싸움과는 달리 적을 물리쳐야겠다는 민심이 다 내게 돌아와 온 국민의 협조가 많았고 또 웅치에서 싸우던 호남의 정병 맹장들이 다 내 수하(手下: 부하)로 들어와 사기가 충천하였고, 병졸도 수천명이고, 지리적으로도 웅치와는 달리 험준한 산성(山城)에 의지해서 싸웠으니, 적의 수가 비록 웅치 때보다 많았으나 예기(銳氣)가 이미 쇠(衰)하여 공을 세우기 쉬웠다.

 

뿐만 아니라 명나라 군사와 우리나라 팔도의 의병들이 모여와 마치 바둑판처럼 둘러싸서 싸우고, 또 서울의 백성들이 강화도에 피난 가 있는 자들이 이 싸움이 승리하기를 고대하고, 힘을 합해주니 내 공이 나타나기 쉬웠다.


- 울진군 향토사 연구회 -


울향사 : 제12호 1988. 9. 6

수   신 :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 귀하

제   목 : 정담 장군에 관한 문의


다음 사항을 문의하오니 회신해 주시옵기 앙망합니다.


1. 임진왜란 때 정담 장군이 웅치싸움에서 장렬하게 잘 싸워 호남(전라도)을 보전하는 큰 공을 세웠다는 사실과

2. 당시 도원수인 권율 장군께서 말씀하시기를 “육전에서 가장 공이 큰 자는 정담 장군이다.”라고 하신 기록이 백사 이항복이 쓰신 백사집에 있다하오니 사실인지 확인해 주시옵고

3. 그 어른이 경북 울진군 기성면 사동리 출신이시라 그 어른의 숭고하신 충절을 널리 알리고 기리는 사업으로서 울진에 ‘충렬사’를 건립고자 하오니 귀 위원회의 의견이 어떠하신지 회보해 주시옵기 앙망하옵니다.


울진군 향토사연구회장 윤병한


- 국사편찬위원회 -


통사 25530-375    503-9544     1988. 10. 5

수신 윤병한

제목 정담에 관한 회신


귀하가 문의한 정담 장군에 관한 본 위원회의 의견서를 별첨과 같이 송부합니다.


첨부: 의견서 1부. 끝.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


- 의견서 -


정담 장군이 임진왜란 때 중요한 전투의 하나인 웅치싸움을 주도하고 장렬히 전사하여 호남(전라도)을 보전하는 큰 공을 세운 사실이 조선 왕조실록 및 각종 자료에 의하여 분명히 확인되는 동시에 도원수인 권율 장군이 그의 사위인 백사 이항복에게 말씀하시길 “세상 사람들이 다 나를 임란 때 육전의 수공자로 알고 있으나 사실은 전라도 웅치 싸움을 주도한 정담 장군의 공이 가장 크고 행주싸움을 주도한 나의 공은 그다음이다”라고 하신 기록이 백사집에 있으므로 그의 지극한 충절을 널리 알리고 기리는 사업을 추진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사료됩니다.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 박영식

 

· 울진정담장군숭모회 회장 임우규

· 수석부회장 김연국

· 부회장 윤두환

· 사무총장 장헌원(010-2560-7539)

· 울진정담장군숭모회

  입회비 3만원 계좌 농협 351-1377-673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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