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원섭 교수의 자투리 한국사] 제6화(7회) 경징이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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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자호란 참상
강화부성을 점령한 청군들은 관청과 여염에 불을 지르고 반항하는 사람들을 도륙했다.
사로잡은 포로들을 배에 태워 육지로 보낸 뒤, 남한산성으로 몰고 가면서 대대적인 노략질을 감행했다.
이날의 참상을 기록한 사서에는 ‘시체는 쌓여 들판에 깔리고 피는 강물을 이루었다.’라거나, ‘부상을 입고 눈 위를 기어 다니다 죽거나, 울면서 이미 죽은 어미의 젖을 빨고 있는 아이가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라는 등의 이야기가 실려있다.
강도검찰사(江都檢察使)로 중책을 맡고 있던 김경징은 혼자 급히 달아나느라 강화부성 안에 있던 늙은 어미와 처자식을 모두 버리고 말았다.
혼자라도 살아야 한다는 절박감이 그를 압박했지만, 차마 인간으로서는 할 수 없는 일을 죄의식도 없이 망설이지 않고 저지른 것이다.
그의 행동은 인간으로서 도리(道理)를 저버린 시정잡배와 다를 바가 없었다.
당시 그의 외아들 김진표(金震標)는 갓 24세였다. 그는 강화부성이 함락될 위기에 처하자 어찌할 바를 모르고 이리저리 상황을 파악하느라 분주하게 뛰어다녔다.
바깥의 상황을 파악하려고 나갔던 노복이 급히 뛰어 들어와, 부친 김경징이 청군의 배가 갑곶나루에 상륙하여 강화도가 함락될 위기에 처하자 부하들을 독려하여 청군을 피해 다른 섬으로 달아났다는 소식을 전했다.
그는 너무 놀란 나머지 마루와 마당을 오르내리며 온몸을 사시나무 떨듯 안절부절못하였다.
그는 집안을 단속하며 하룻밤을 뜬눈으로 꼬박 새웠다.
이튿날, 날이 밝자 밤새 밖으로 상황을 정탐하러 나갔던 노비들이 하나둘 돌아왔다. 그는 마당으로 달려 나와 노비들이 밖에서 주워들은 소식을 들으며 다소 안도했다.
청군의 수장 도르곤의 항복 권유를 봉림대군이 받아들이면서 강화부성 안의 상황이 어느 정도 안정되어 가고 있다는 것이었다. 왕실이 나서서 불안에 떨고 있던 백성들을 다독거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건 분위기도 잠시였다. 오후가 되자 항복을 받은 지 하루 만에 도르곤은 청군의 주력부대를 이끌고 남한산성으로 가기 위해 갑곶에 배를 준비하라고 명령했다.
청군의 주력부대가 육지로 떠나자 섬에 잔류하는 청군들의 노략질이 시작되었다.
조선 백성을 상대로 불필요한 약탈이나 살육을 금지하라는 명령을 내렸던 도르곤이 떠난다는 소식에, 눈치를 보고 있던 청군들이 노략질에 나선 것이다.
가슴을 졸이며 우려하고 있었던 소식이 사실로 들려오자 김진표는 돌변했다. 그는 집안에서 함께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여인들을 모두 한 자리에 불러 모았다. 여인들이 머뭇거리자 그는 길길이 뛰었다.
그의 다급한 재촉에 집안사람들이 전부 마당으로 모여들었다. 그는 집안사람들을 향해 현재 강화부성과 외곽 지역에서 벌어지고 있는 청군의 노략질과 피해 상황을 설명했다.
그는 마루에 앉아 잔뜩 긴장한 채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그의 말을 듣고 있던 할머니(영의정 김류의 처)와 어머니(부친 김경징의 처), 그리고 자기 처를 마루에서 내려와 마당으로 늘어서게 했다.
그는 이제 곧 청군이 이곳까지 쳐들어올 것이라고 말했다. 만약 청군이 들이닥치면 집안사람들 모두 무사하지 못할 것이니 집안의 여인들에게 정절을 지키기 위해 자결하라고 요구했다. 사대부 가문의 명예를 더럽혀서는 안 된다는 이유였다.
그는 마루와 마당을 번갈아 오르내리며 안절부절못하면서 여인들을 향해 빨리 자결하라고 소리 질렀다. 그의 목소리는 심하게 떨렸다.
올가미. 국난이 있을 때마다 수많은 조선의 여인들은 정결을 지켜야 한다는 강요로 목숨을 버려야 했다.
『인조실록』에 따르면, 김경징의 아들 김진표(金震標)가 할머니와 어머니, 그리고 자기 처를 다그치고 협박하여 자결하도록 했던 당시 정황이 생생하게 실려있다.
그의 할머니(김경징의 모친) 진주 류씨(晋州柳氏)는 당시 남한산성에서 인조를 호종하고 있는 전쟁 총사령관의 중책을 맡고 있던 김류(金瑬)의 부인이었다.
김류는 당시 주화파의 한 사람으로서 인조가 청 태종에게 항복하고 삼전도에서 맹약을 맺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다.
그는 임진왜란 때 부산진에 상륙한 왜군이 경상도를 휩쓸고 파죽지세로 한양을 향해 진격해 오자, 왕명으로 충주 방어에 나섰다가 신립(申砬)의 종사관으로 출병하여 탄금대(彈琴臺)에서 끝까지 싸우다 전사한 김여물(金汝岉)의 아들이다.
실록에는 그가 탄금대 아래에서 용전분투했으나 왜적을 당하지 못해 강에 투신하여 순국하였다고 했다.
그러나 일본 측의 기록에는 그가 전세가 완전히 기울어 더 이상 버틸 수 없게 되자 왜군을 향해 “내가 김여물이다.”라고 소리친 뒤 적진을 향해 뛰어들어 장렬하게 전사했다고 하였다.
김진표의 모친(김경징의 아내) 고령 박씨(高靈朴氏)는 평소 남편에게 바른말을 많이 했다고 한다.
그러나 김경징은 부인이 그런 말을 할 때마다 “여자가 무엇을 안다고 남자가 하는 일에 끼어드느냐?”며 힐책하곤 했다.
김경징이 강도검찰사가 되어 강화도와 왕실을 지키는 막중한 책임을 맡았으나 매일 술을 퍼마시며 안일하게 시간을 보내자, 그녀는 “제발 정신 좀 차리시라.”라고 하면서 “나라가 부서지고 집이 망하면 여자라고 해서 어찌 피할 수 있으리오.”라고 하며 탄식했다고 한다.
못난 지아비와 자식에 견주어 보면, 참으로 올곧은 여인의 처신이라 할 것이다.
김진표는 동아줄을 들고 머뭇거리는 집안 여인들을 다그치며 이리저리 길길이 뛰었다.
주저하며 망설이던 그의 처가 마지못해 눈물을 흘리며 먼저 목을 맸다. 이어서 그의 어머니와 할머니도 따라서 목을 맸다.
뒤이어 집안의 모든 여인이 다투어 목을 맸다. 지켜보던 남자 하인들은 그의 닦달에 못 이겨 집안 여인들의 자결을 도왔다.
집안의 여인들이 모두 죽은 것을 확인한 김진표는 그 길로 간단한 짐을 챙기고 곧바로 젊은 하인들을 앞세워 섬을 빠져나와 육지로 도주했다. 자기 혼자 살아남은 것이다.
실로 그 아비에 그 자식이었다. 1637년 2월 19일(음력 1월 25일)의 일이다.
당시 양반 가문에서 ‘열녀(烈女)’라는 칭호는 큰 명예요 자랑이며 가문의 명성을 세상에 널리 알리는 크나큰 덕목이었다.
그러나 가문의 명예를 위해 여인들에게 목숨으로 정절을 지키도록 강요했던 양반들, 그들은 대체 그들이 목숨처럼 소중하다고 내세웠던 선비로서의 도덕적 가치를 제대로 실행했던 것일까? 그들이 추구했던 도덕적 가치는 과연 우리가 존중할만한 것이었을까?
김경징과 함께 강도(江都)를 버리고 달아난 강화유수 겸 주사대장 장신(張紳)의 며느리도 목을 맸다. 그러나 장신의 어머니는 며느리가 목을 매 자결한 것을 확인하고 급히 짐을 꾸렸다. 그녀는 혼자 강화도를 빠져나와 도성으로 이동하는 봉림대군 일행에 합류했다.
왕실 일행은 그녀가 주사대장 장신의 모친이라는 걸 확인하고 제지하지 않았다.
그녀는 육지로 이동하는 왕실 일행에 끼어들기는 했으나 함께 온 집안사람이 없었던 그녀를 챙기는 사람이 없었다. 그녀는 이동하는 며칠 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굶주렸다.
섬을 겨우 벗어나긴 했지만, 가마를 타지 못하고 도보로 뒤를 따르다가 마침내 탈진하여 쓰러지고 말았다.
주변에서 이를 지켜보던 내관이 봉림대군에게 달려갔다.
“장판서(判書)의 대부인이 쓰러졌습니다. 어찌하면 좋으리까?”
봉림대군이 하늘을 쳐다보며 혀를 찼다. 그는 가마에 내려 주위를 한번 둘러보고 말했다.
“아들이 어머니를 모시지 않았는데 난들 어떻게 하겠느냐? 어찌할 수 없는 일이로다.”
장신의 모친은 결국 추위와 굶주림에 지쳐 노상에서 숨을 거두고 말았다.
당시 상황이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그렇게 촌각을 다투는 상황도 아니었다. 비록 피난 행렬이라고는 하지만 먹을 것이 아주 없었던 것도 아닌 왕실의 일행이 아닌가.
훗날 왕의 자리에 올랐던 봉림대군(효종)의 처신이라고 보기에는 너무 어이없고 한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정선흥(鄭善興)의 아내 안동 권씨는 청군이 그녀를 보고 달려오자 황급히 왕족인 회은군(懷恩君) 이덕인(李德仁)에게 달려갔다.
“영감께서는 내 아버지와 절친하지 않소? 제 아버지 얼굴을 봐서라도 제발 나를 좀 살려주시오. 어찌 좀 해 주시오.”
그녀는 아무리 청군이라 하더라도 왕족 앞에서는 함부로 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녀의 간곡한 부탁에 회은군이 난감해하며 우물쭈물 대답했다.
“나더러 어떻게 하라는 말이냐? 내가 지금 당장 어쩌겠느냐?”
그러자 옆에서 이를 지켜보고 있던 남편 정선흥이 잠시 회은군의 반응을 확인하고는 눈을 부릅뜨고 아내를 꾸짖었다.
“지금 뭐 하는 거요? 차라리 빨리 죽는 게 낫소. 뭘 구차하게 목숨을 간청하고 있는가? 어서 자진(自盡)하시오.”
그는 아내를 크게 꾸짖으며 칼을 꺼내 건넸다. 그녀가 손을 뿌리치며 한걸음 물러서자, 강제로 그녀의 손에 칼을 쥐여 줬다.
그녀는 칼을 든 채 부들부들 떨면서 남편을 한참 쳐다보다 보았다. 잠시 망설이던 그녀는 소매로 눈물을 훔치고 방으로 들어갔다.
그제야 상황을 지켜보며 민망해 어쩔 줄 몰라 하던 회은군이 정신을 차렸다. 그는 “빨리 방에 들어가 보라.”며 정선흥의 등을 떠밀었다.
잠시 머뭇거리던 정선흥이 방에 들어가 보니 아내는 칼로 가슴을 찌르고 죽어 있었다.
이 모두가 이긍익이 쓴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에 실려있는 이야기다. 『연려실기술』에는 당시 강화섬에서 수모를 당하거나 목숨을 버린 여인들의 이야기가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다.
김경징과 함께 왕실 가족의 강화도 피난 업무를 수행했던 강도(江都) 부검찰사(副檢察使) 이민구(李敏求)의 아내는 청군들이 들이닥치자 몸을 숨겼다가 포로로 잡혀 끌려갔다.
그녀는 도중에 청군들이 겁탈하려고 하자 끝까지 저항하다가 결국 죽임을 당했다.
이지항(李之恒)의 처 평산 신씨도 청군의 겁탈을 피해 이를 악물고 끝까지 저항하다가 현장에서 살해되었다.
인조의 장인 한준겸(韓浚謙)의 집에서도 자진 행렬이 이어졌다. 그의 자녀를 포함하여 모두 열한 명의 여인들이 목을 매어 자결했다.
부검찰사 이민구의 형이자 병조판서 이성구(李聖求)의 처 안동 권씨도 자결했다. 이성구는 당시 남한산성에서 인조를 호종하고 있었다.
강화 유수부와 외규장각. 강화행성이 있었던 곳이다
진원부원군(晉原府院君) 유근(柳根)의 집에서는 12명, 서평부원군(西平府院君) 한준겸(韓俊謙)의 가족은 11명의 여인이 미처 피할 사이도 없이 청군에게 사로잡혔다.
한명욱(韓明勖), 정백창(鄭百昌), 여이징(呂爾徵), 신익융(申翊隆), 정선흥(鄭善興), 이경엄(李景嚴), 한여직(韓汝稷) 등 사대부가의 부인들도 집안을 들이닥친 청군들에 의해 모두 포로가 되었다.
그러나 사계 김장생(金長生)의 며느리들인 김집(金集)과 김반(金槃)의 부인들은 청군들이 들이닥치기 직전에 스스로 목을 매고 자결했다.
김상용과 함께 화약 더미를 쌓아 순절한 김반의 아들 김익겸(金益謙)의 부인은 만삭의 몸으로 배를 타고 강화도를 빠져나오는 도중에 배 위에서 아이를 낳았다.
이때 태어난 아이가 『사씨남정기(謝氏南征記)』, 『구운몽(九雲夢)』 등을 저술한 서포 김만
중(金萬重)이다. 그는 조선조 예학(禮學)의 대가인 김장생의 증손이며, 충렬공(忠烈公) 김익겸의 유복자였다.
금부도사 권순장(權順長)은 그의 두 아우 순열(順悅)·순경(順慶)과 함께 어머니를 모시고 강화도에 피난을 가서 강화부성을 사수하려고 했다. 그는 강화도 곳곳을 돌아다니며 얼마 되지 않는 병력으로 의병(義兵)을 모집하여 강화부성으로 들어왔다.
그는 청군들이 강화부성을 포위하여 공격하자 성이 함락되기 직전에 김상용과 함께 스스로 화약에 불을 질러 장렬하게 분신 자결하였다.
당시 김상용은 77세 그의 나이는 불과 31세였다. 또 자신과 같이 결사 항전을 맹세한 김익겸도 성이 함락되기 직전에 남문(南門)에서 분신하여 자결했는데 이때 그의 나이 불과 24세였다.
권순장의 세 아우 순열(順悅, 27세)과 순경(順慶, 22세)도 끝내 전사하였고, 집에서 집안사람들을 돌보고 있던 막내아우 순후(順厚, 18세)도 두 형이 순절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자결하고 말았다.
그의 아내 전주 이씨도 세 딸을 불러 부득이한 상황을 설명하고 세 딸에게 자결하라고 말했다. 그녀는 세 딸의 숨이 끊어진 것을 확인하고 스스로 목을 맸다. 그녀의 누이동생도 스스로 목을 맸다.
권순장은 사후 지평(持平)과 좌찬성(左贊成)에 증직(贈職)되었고 강화도의 충렬사(忠烈祠)에 제향 되었다.
권순장이 모집한 의병에 전 가족을 이끌고 가담한 민성(閔垶)은 권순장과 함께 강화부성으로 들어가 결사 항전을 외쳤다.
그러나 봉림대군이 항복을 결정하고 청군이 성안으로 들어올 때 김상용과 권순장이 자결하자, 그 역시 아내와 아이들을 먼저 죽이고 전 가족 13명과 함께 자결하고 말았다.
영의정 홍서봉(洪瑞鳳)의 아들로 강도 부검찰사 이민구의 종사관으로 수행하고 있던 홍명일(洪命一)의 처 이씨는 집안에서 자결을 선택하지 않았다. 이제 겨우 6세, 7세에 불과한 어린 두 아들 자의(子儀)와 자동(子同)을 살리기 위해서였다.
그녀는 어렵사리 배를 구해 타고 가족과 함께 새벽녘에 몰래 강화도를 벗어나 육지로 향했다. 그러나 곧 바다 한가운데에서 청군에게 발각되고 말았다.
청군의 배가 가까이 다가와 청군들이 배에 오르려고 하자, 시어머니 황 씨가 먼저 은장도를 꺼내 스스로 목을 찌르고 바다에 몸을 던졌다.
그녀는 두 아들을 바다에 던지고 자기도 조카 박세상(朴世相)의 아내 날씨와 서로 껴안고 바다에 뛰어들어 목숨을 버렸다.
부부가 함께 자결하기도 했다. 종묘사직을 따라 왕실과 함께 강화도로 들어온 돈녕부도정(敦寧府都正) 심현(沈俔)은 강화부성이 함락된 후 청군의 약탈과 노략질로 아수라장으로 바뀌자 부인을 불렀다.
그는 상황이 더 이상 걷잡을 수 없음을 탄식하고 부인과 함께 가묘(家廟)의 위패를 땅에 묻은 다음, 인조에게 국난의 비운을 통탄하는 유소(遺疏)를 남겼다.
그는 부인 여산 송씨를 바라보며 말했다.
“정(情)으로는 백 년을 함께 하고, 의리로는 한 번의 죽음을 함께 하는 것이라고 했소. 장차 나는 충신이 되고 그대는 충신의 부인이 되지 않으려오?”
부인이 대답했다.
“지아비는 나라를 위해 죽고 저는 절개를 위해 죽으니, 우리 두 사람이 몸을 깨끗이 하여 함께 돌아감은 저로서도 실로 달갑게 여기는 바입니다.”
마침내 부부는 서로 마주 보고 목을 맸다. 실로 장엄하면서도 가슴 아픈 광경이 아닐 수 없다.
“얼마 후, 과연 수십 기의 적이 배를 향해 날 듯 달려오는 것이었다. 배에 가득 찼던 사람들은 여기저기 흩어 도망가는데, 모두 바다에 빠져 죽을 생각이었으나 바다까지는 아직 백 보 남짓이나 남았다.
적병은 이미 돌진해 들어와 날쌔게 약탈을 자행하였다. 어제까지만 해도 다리까지 빠졌던 갯벌이 지금은 추위로 얼어붙었으니, 마치 하늘도 적을 도와주는 격이었다.
적이 쳐들어왔을 때 이젠 달아나 바다에 빠져 죽을 수 없을 것으로 판단하여, 제수와 아내는 목을 찔러 자결을 시도했다. 그 흐르는 피가 목을 덮고 얼굴을 가려 마치 희생에 쓸 소를 잡는 곳 같았다.
나도 그 칼로 세 번이나 찔렀으나, 죽지 못했다. 적이 배에 올라와서는 내가 아직 죽지 않은 것을 보고 다섯 발의 화살을 쏘아 나는 혼절하고 말았다. 첫발은 왼쪽 옆구리, 둘째 화살은 왼쪽 귀머리 위에 맞았다. 천운으로 살아남았지만, 그 고통은 가히 기록하기 어려울 정도이다.”
가사 문학의 거장으로도 유명한 송강(松江) 정철(鄭澈)의 손자였던 정양(鄭瀁)은 병자호란 당시 강화도에 피난하여 그곳에서 겪었던 경험담을 수록하여 『강도피화기사(江都被禍記事)』라는 제목을 붙였다.
위 내용은 그의 수기 가운데 1637년 2월 16일(음력 1월 22일)의 일을 기록한 내용의 하나이다.
그의 수기에 들어 있는 내용을 보면 차마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비극적인 일들이 수두룩하다.
적군에게 겁탈당할까 두려워 아내에게 자결을 강요하는 남편이 있는가 하면, 궁 안의 궁녀들까지 다투어 나무에 목을 매어 집단 자살하는 등 수많은 참상이 이어졌다.
그는 기적적으로 겨우 살아남았지만, 당시 강화도는 그가 남긴 표현대로 그야말로 생지옥 그 자체였다.
충렬사. 강화군 선원면 선행리에 있다.
이돈오(李惇五)의 아내 김씨도 장렬한 죽음을 맞았다. 당시 이돈오는 훈련도감(訓鍊都監) 낭청(郎廳)으로 군기(軍器)를 관리하고 있었는데, 청군이 몰려오자 그들과 맞서 싸우다가 현장에서 전사하고 말았다.
그의 아내는 집안 식구들과 함께 급히 마니산(摩尼山) 남쪽 기슭 골짜기에 비어있는 민가에 숨어들었다. 몇 안 되는 민가는 백성들이 도망가고 모두 비어있었다. 그러나 곧 골짜기를 샅샅이 수색하던 청군에게 들키고 말았다.
청군이 집안으로 몰려 들어오자, 그녀는 시어머니와 동서 등과 함께 청군이 보는 앞에서 자기 목을 찔렀다. 뒤이어 그녀의 시어머니와 동서들이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모두 은장도를 꺼내 스스로 목을 찔렀다.
여인들이 모두 선혈을 뿜으며 현장에서 쓰러져 즉사하고 그녀들의 목에서 흐른 피가 사방에 흩뿌려지자, 기겁하며 놀란 청군들이 그녀들을 버리고 갔다.
이호선이라는 선비의 아내는 청군을 피해 겨우 마니산 산속으로 들어가 작은 토굴 안으로 숨어들었지만, 골짜기를 수색하던 청군에게 들키고 말았다.
청군이 몰려와 도굴 입구에서 불을 피우는 바람에 연기가 굴 안에 꽉 차서 숨을 쉴 수 없을 지경이 되었다.
그러나 그녀는 토굴 안에서 나오지 않고 끝까지 버티다가 마침내 타 죽고 말았다.
유인립이라는 선비의 아내도 청군을 피해 마니산 골짜기로 몸을 숨겼다가 붙잡혔다. 청군이 그녀를 강제로 끌고 가려 했지만, 그녀는 온 힘을 다해 끝까지 저항하며 버텼다. 화가 난 청군이 그녀에게 총을 난사했다.
그녀는 온몸의 살이 다 뜯겨나가도록 총을 맞으며 버텼지만, 끝내 총탄을 피하지 않고 두 눈을 부릅뜨고 꼿꼿하게 선 채로 죽었다.
청군이 다가와 그녀의 몸을 잡으려 하자 그제야 스스로 넘어졌다.
어떤 선비의 아내는 계집종에게 이르기를, “청군이 죽은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게 여자라면 옷을 모두 벗긴 다음 능욕한다고 한다. 그러니 내가 죽거들랑 서둘러 화장해 달라.”라고 신신당부한 뒤 목을 매 죽었다고 전한다.
사대부 여인들만 자결로서 정절을 지킨 것이 아니었다. 신분이 낮은 사람들의 아내와 첩들도 스스로 목숨을 버리며 정절을 지켰다.
기록에 보면, 포로로 사로잡혔다가 겨우 도망쳐서 숲속에 숨어 있다가 청군에게 포위당해 사면초가의 처지에서 물에 빠져 죽거나 목을 매거나 절벽에서 몸을 던져 목숨을 버리기도 했다.
어렵사리 배를 구해 타고 육지로 건너다가 청군들이 배에 오르자 서로 껴안고 물에 빠져 죽은 사람도 부지기수였다.
청군들은 토굴에 숨어 있던 여인들을 나오게 하려고 밖에서 불을 질렀지만, 끝까지 버티며 나오지 않고 그대로 타 죽었다
병자호란을 소재로 쓴 작자 미상의 고전 한문 소설 『강도몽유록(江都夢遊錄)』에는 “강도(江都)의 참상은 더욱 심해 개울에 흐르는 것은 피요, 산에 쌓인 것은 백골이었다. 사방에 시체를 쪼아 먹는 까마귀만 있고, 장사(葬事)를 지내줄 사람은 없었다.”라고 썼다.
겨울철 연미정 앞바다 모습. 성엣장이 밀물에 밀려 떠다니고 있다
당시 갑곶나루 앞바다에는 적에게 욕을 보지 않으려고 바다에 뛰어든 여인들이 머리에 둘렀던 하얀 머릿수건이 마치 연못물에 떠 있는 낙엽처럼 둥둥 떠내려갔다고 전한다. 모두 이름 석 자도 남기지 못한 조선의 여인들이었다.
미처 탈출하지 못하거나 죽지도 못하고 청군에게 포로가 된 사람도 줄을 이었다.
청군은 젊고 고운 여인들을 사로잡느라 혈안이 되었다. 여인들은 화(禍)를 피해 필사적으로 몸을 숨겼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희생자가 발생했다.
그러나 여성들이 이렇게 자신과 가문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자결했던 것과는 달리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목숨을 구걸하며 스스로 오랑캐에게 항복하고 시종이 된 남자들도 있었다.
일반 백성들의 피해도 참혹했다. 전쟁이 일어난 직후, 청군이 쳐들어왔다는 소식을 접한 경기도 서해 연안 지역에 살고 있던 백성들은 반상(班常)을 막론하고 다투어 강화도로 건너가기 위해 몰려들었다.
오랜 역사적 교훈을 통해 백성들 사이에서는 국난이 일어날 때는 ‘강화섬으로 들어가야만 목숨을 부지할 수 있다.’라는 믿음이 퍼져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천혜의 요새로 안전할 줄 알았던 강화도에 마침내 청군이 상륙하고 강화부성마저 속수무책으로 청군에 의해 장악되자, 백성들은 다시 앞다투어 마니산(摩尼山) 등 깊은 산속으로 피신하여 숨어들었다.
그러나 청군은 계속 병력을 풀어 마니산 일대를 이 잡듯이 수색했고, 그 과정에서 수많은 백성이 피살되거나 포로가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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