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열들의 항일투쟁, 그 길을 걷다

기사입력 2026.04.09 1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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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일(10월 25일, 토) 인천공항(12:15) 출발→ 하얼빈 태평국제공항 도착(13:30)→ 하얼빈 정율성기념관, 조린공원(안중근의사 유묵비)→ 하얼빈 금곡호텔


제2일 : 2025년 10월 26일 오전(일), 하얼빈역 안중근기념관安重根义士纪念馆)→ 고속열차이동(오후)→ 이도백하역(19:40) 도착→ 이도왕조 온천호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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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광화문광장 건물 스크린에 3·1절, 왼쪽부터 김구, 안창호, 안중근, 유관순 열사 등의 대한독립만세! 옛 사진을 인공지능으로 학습시켜 살아있게 움직임을 복원한 영상을 공개하여 1919년 삼일 선언 분위기를 느끼게 했다.

 

나는 지금 서울 강남 코엑스(COEX)에서 정부가 주관한 107돌 3·1선언 기념식 KBS 중계방송을 보면서 이 글을 쓰고 있다. 

이날 이재명 대통령 연설을 들었다. 그 가운데 몇 구절은 다음과 같다.


『우리 정부는 북측의 체제를 존중하며, 일체의 적대 행위도, 어떠한 흡수통일 추구도 하지 않을 것”이다. (중략) 적대가 아니라 공존과 협력으로… 평화로운 한반도를 만드는 것이야말로 3·1혁명의 정신을 온전히 계승하는 길』이라고 강조했다.

『한일 양국이 과거를 직시하며 현재의 과제를 함께 풀고, 미래를 향해 함께 나아갈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이 대통령은 남북 관계에서 북측 체제를 인정하고 적대 행위·흡수통일(남한이 일방으로 북한을 흡수하는 식의 통합)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이는 남북 간 군사 긴장을 낮추고 공존과 협력을 통한 평화 구축을 강조한 발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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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7돌 3·1선언 기념식에서 연설하는 이 대통령. KBS 화면 캡쳐

 

파격의 역사 인식언어 

일본과 관계 언급에서는 삼일절의 역사의 뜻은 일제강점기 극복에 있는 만큼, 일본에 대한 언급은 민감하다. 이 대통령은 과거사 문제를 뚜렷이 말하지 않으면서도, 양국이 역사 아픔을 바로 보면서 앞으로 서로 협력해야 함을 강조했다고 볼 수 있다.


나는 이 연설을 들으면서 이재명 대통령이 쓴 낱말에 주목하고자 한다. 과거의 대통령들이 쓰던 북한을 북측으로, 삼일운동을 3·1 혁명이라고 했다. 이에 대한 나의 생각을 조금 덧붙여보고자 한다.

대한민국 헌법은 한반도 전체를 영토로 규정하므로 정부는 상대를 국가로 단정하지 않는 뜻에서 ‘북측’이라 부르기도 한다. 그러나 북한의 공식 국호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며 국제연합(UN)에도 이 이름으로 가입되어 있다. 따라서 국내 정치 문맥에서는 ‘북측’이 쓰일 수 있으나, 국제 관계나 법적 맥락에서는 공식 국호를 쓰는 것이 더 분명하다는 견해가 있다. 과거 대통령과 다르게 북한이라 하지 않고 북측이는 용어를 쓴 것은 파격적이다.


그리고 1919년 삼일운동은 전통적으로 독립을 외친 민족 운동으로 이해되어 왔다. 그러나 일부 학자들은 이를 국민 주권이 선언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으로 이어진 계기로 보아 ‘삼일혁명’이라고 한다. ‘운동’은 항일 독립의 성격을, ‘혁명’은 공화정 탄생과 주권 전환의 의미를 강조하는 차이가 있다고 보인다. 어쨌든 우리는 선열들의 3·1항일 투쟁 정신을 계승 발전시켜야 한다. 한편으로 최근 북측이 대한민국을 적대 국가로 지칭하면서 더욱 남북관계가 얼어붙고 있으나, 한반도를 평화지대로 만들어야 한다. 중동전쟁을 보면서 우리는 남북 간이 적대적 관계를 개선해 전쟁 없는 평화를 가져오는 한반도를 추구해야 할 것이다.


탕탕절?

다시 안중근 의사(이하 안중근)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안중근 의사 유묵이 게시한 곳을 지나자, 드디어 역사 현장인 이또를 저격한 곳을 전시관 안에 표시해 두었다. 이곳은 내가 가장 보고자 했던 곳이었다. 전시관 창문을 통해 볼 수 있는 실제 하얼빈역사 바닥에도 그 위치가 그려져 있었다. 삼각형이 안중근이 저격한 곳에는 네모가 이토히로부미가 있었던 곳이다. 안중근과 이토의 위치는 실제 6미터쯤 되는 곳이다. 네모 표시 안에는 마름모 모양이 작게 그려져 있는 것으로 보아 아마 안중근이 그날 발사한 권총 탄알 수를 나타내는 것 같았다. 실제 안중근은 8발을 장전하여 이토를 세 발 맞히고 다른 세 발은 이토 둘레에 있던 사람들이 총탄을 맞았다. 모두 7발을 쏘았는데 1발이 불발로 역사 바닥에 떨어졌고, 1발은 권총에 장전되어 발사되지 않은 것이다.

우리 일행과 관람객들은 그 위치에서 권총을 겨누는 자세를 취해 보기도 했다.


1909년 10월 26일은 안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날이다. 세상에서는 이를 두고 ‘탕탕절’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지난해 10월 하순, 하얼빈 역사 안에 있는 안중근기념관을 찾았을 때 누군가가 던진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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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얼빈역 안에 실제 저격 위치(세모(안중근)와 네모(이토)와 전시관에 그려진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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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얼빈역 안에 실제 저격 위치(세모(안중근)와 네모(이토)와 전시관에 그려진 위치


탕탕절?


알고 보니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가 서울 궁정동 안가에서 김재규의 권총에 쓰러진 날 또한 10월 26일이었다. 묘하게도, 우연처럼 겹쳐진 날짜다. 우리 근현대사의 물줄기를 크게 바꾸어 놓은 두 사건이 같은 날에 일어났다는 데서 사람들은 ‘탕탕’ 울린 권총 소리를 빗대어 그날을 풍자하고 있었다.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이 이토를 저격한 날.

1979년 10월 26일, 김재규가 박정희를 저격한 날.


서로 다른 시대, 서로 다른 자리에서 울린 총성은 한 시대의 권력을 끝내고 역사의 방향을 틀어놓았다. 세상 사람들은 이 겹쳐진 날짜를 통해 역사를 직시하면서도, 나름의 방식으로 해석하고 풍자해 왔다. 제국주의의 상징과 현대사의 독재 권력이 같은 날 총성으로 막을 내렸다는 사실은 뜻밖에도 묘한 상징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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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얼빈역 안중근 기념관 시계 바늘이 이토를 저격한 9시 30분을 가르키고 있다.

 

꼬레아 후라!

김훈은 그가 쓴 장편소설 『하얼빈』(문학동네, 2022, 165~167쪽)에서 저격 장면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이토는 객차에서 내렸다. 러시아 의장대가 이토에게 받들어 총으로 경례했다. 이토는 손을 흔들어 답했다. 이토는 플랫폼 끝 쪽의 외교단에게까지 걸어갔다가 러시아 의장대 쪽으로 되돌아 왔다. 코콥초프와 러시아 관리들이 뒤따랐다.

안중근은 러시아 병대 뒤쪽에서 이또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주악 소리가 커졌다. 소리가 커지면 총소리가 묻힐 터이므로 유리한 조건이고 러시아 의장대들의 부동자세도 불리한 조건이 아니라고 안중근 생각했다. 권총은 상의 안주머니에 들어 있었다. 이토는 더욱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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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안중근의 총, KBS 화면 캡처, 사진 속의 두 사람사이에 모자에 손을 올리고 있는 수염이 허연 사람이 이토다.

 

러시아 군인들 사이로 두 걸음 정도의 틈이 벌어지고 그 사이로 이토가 보였다. 키 큰 러시아인들의 틈에 키가 작고 턱수염이 허언 노인이 서 있었다.

저것이 이토로구나…… 저 작고 괴죄죄한 늙은이가…… 저 오종종한 것이……

안중근은 러시아 군인들 틈새로 조준선을 열었다. 이토의 주변에서 키 큰 러시아인들이 서성거려서 표적은 가려졌다. 러시아인과 일본인들 틈새로 이토가 보였다. 이토는 조준선 위에 올라와 있었다. 오른손 검지 손가락 둘째 마디가 방아쇠를 직후

방으로 당겼다. 손가락은 저절로 움직였다.

 

총의 반동을 손아귀로 제어하면서 다시 쏘고, 또 쏠 때, 안중근은 이토의 몸에 확실히 박히는 실탄의 추진력을 느꼈다. 가늠쇠 너머에서 비틀거리며 쓰러지는 이토의 모습이 꿈속처럼 보였다. 하얼빈역은 적막했다.

탄창에 네발이 남았을 때, 안중근은 적막에서 깨어났다.

……나는 이토를 본 적이 없다…… 저것이 이토가 아닐 수도 있다.……

 

안중근은 다시 조준했다. 안중근은 고요히 집중했다. 손바닥에 총의 반동이 가득찰 때 안중근은 총알이 총구를 떠난 것을 알았다. 이토 주변에 서 있던 일본인 세 명이 비틀거리며 쓰러졌다.

러시아 헌병들이 안중근을 덮쳤다. 안중근은 외쳤다.

-코레아 후라) 

안중근은 쓰러지면서 총을 떨어뜨렸다. 탄창 안에 쏘지 못한 한 발이 남아 있었다. 러시아 헌병들이 안중근의 몸을 무릎으로 눌렀다. 안중근은 하얼빈 철도 가에서 묶였다.


궁내성비서관과 시위侍衛들이 쓰러진 이토를 객차 안으로 옮겼다. 주치의가 이토의 외투를 벗기고 몸을 살폈다. 이토의 몸 안으로 들어온 총알은 탄도가 교란되어서 파행했다. 총알은 이토의 몸속을 휘저은 후 추진력이 다해서 흉곽 안에 박혀 있었다.

이토는 숨을 몰아쉬었다. 비서관이 범인은 조선인이고, 현장에서 체포되었다고 보고했다. 이토는 눈을 가늘게 뜨고 말했다.

-바보 같은 놈

이토는 곧 죽었다. 이토는 하얼빈역 철로 위에서 죽었다.(이하 생략)


필자는 소설을 읽으면서 다음과 같은 의문이 들었다.

1) 안중근이 쏜 권총은 어디서 구했을까? 2) 이토가 죽으면서 실제 마지막 남긴 말은 무엇이었을까? 3) 안중근과 하얼빈 거사를 했던 동지들은 그 후 어떻게 되었을까이다. 그래서 역사자료를 찾아보았다. 간략하게 소개한다.

 

안중근의 권총? 그는 몇 발을 쏘았나?

1909년 하얼빈역에서 일어난 안중근은 이토 저격 사건은 세계사적으로도 중요한 장면이다. 그는 당시 벨기에 FN사에서 제작한 브라우닝 M1900 반자동 권총을 쓴 것이다. 이 권총은 한 손으로도 빠르게 사격할 수 있는 자동권총으로, 독립운동가들이 주로 쓰는 모델이었고 한다.

안중근은 이 권총을 연해주 무기 상인을 통해 사들였거나, 동지에게서 제공받았을 가능성이 크다고 학계는 보고 있다. 그 가격은 약 15~25루블 선이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를 오늘날 단순 환산하면 약 200만~400만 원 상당의 값어치로 볼 수 있다.


몇 발을 쏘았나? 앞서 말한 바와 같이 그날 안중근의 권총에는 8발이 장전되어 있었다. 이토에게 3발을 쏘았고, 3발은 이토를 따라가던 3명이 맞았고, 1발은 불발로 땅에 떨어졌다고 한다. 발사하지 않은 1발은 권총에 남았다. 아마 안중근이 거듭 서너 발을 다시 쏜 것은 그가 최초 정조준한 사람이 이토가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으로 다시 다른 표적으로 정조준 3명을 더 쏘았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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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 : 조선일보 2009년 10월 26일


조선 침략의 설계자, 그가 마지막 남긴 말

“바보같은 놈”


김훈의 소설은 하얼빈에서 쓰러진 이토의 마지막 남긴 말로 표현되어 있다.


그 말은 기록이 아니라 상징이다. 피 흘리며 무너지는 순간에도 제국의 논리에서 벗어나지 못한 한 권력자의 내면을 압축한 언어다. 이토에게 저격자는 거대한 질서를 뒤흔들 존재가 아니라, 변방의 한 개인에 지나지 않았을지 모른다. 제국은 총탄 한 발로 쓰러지지 않는다고, 역사는 힘센 쪽의 것이라고 믿었을 것이다. 그 확신과 오만이 그 한마디에 서려 있다.

그러나 소설은 그 말을 역설로 뒤집는다. 멸시의 언어는 곧 역사 인식에 실패한 자의 독백이 된다. 제국은 타자의 결단을 이해하지 못했고, 스스로 세운 논리 안에서만 세상을 재단했다. 그 틀 밖에서 울린 방아쇠 소리는 오히려 제국의 심장을 겨누고 있었다.

그래서 “바보 같은 놈”이라는 말은 더 이상 저격자를 낮추는 욕설로 머물지 않는다. 오히려 시대의 흐름을 읽지 못한 권력자 자신에게 되돌아오는 메아리가 된다. 김훈은 그 짧은 한 문장으로, 힘의 언어와 역사의 언어가 끝내 같을 수 없음을 조용히 드러낸다.


사료가 전하는 마지막 말은 이렇다.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의 저격 직후 현장에 있던 일본 헌병과 철도 관계자들의 증언에는 비교적 건조한 문장들이 남아 있다. 기록에 따르면 이토는 쓰러지며 “나는 탄환에 많이 맞았다”고 말했고, 이어 “흉행자는 누구인가?”라고 물었다. 범인이 조선인이라는 보고를 듣고는 “모리도 당했는가?”라고 낮은 목소리로 되물었다고 한다. 여기서 ‘모리’는 함께 피격된 수행원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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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안중근의사 기념관(서울). 권총과 탄환 8발이 전시되어 있다.

 

최근 김태웅이 펴낸 『그들의 대한제국 1897~1910』은 황현 등 동시대 인물들의 일기와 기록을 토대로 당시 장면을 재구성한다. 이 연구 역시 이토의 발언을 위와 같은 범주에서 정리하며, 김훈이 소설 하얼빈에서 “바보 같은 놈”이라는 표현은 1차 사료에서 확인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결국, 역사 기록이 전하는 이토의 마지막 말은 짧고 건조하다. 반면 문학은 그 침묵과 공백 속에 제국의 심리를 채워 넣는다. 사실 언어와 상징 언어가 갈라지는 지점, 바로 그 틈에서 우리는 역사와 서사가 만나는 장면을 바라보게 된다. 김훈이 소설에서 표현한 『바보같은 놈』이라는 말은 그러한 뜻이 담겼다.


한편, 당시 이토 죽음을 둘러싼 조선 식민 권력층의 태도이다. 안중근의 총성이 멎은 뒤, 친일 매국노들은 일제 권력과 유착을 드러냈다.

이완용·윤덕영·유길준 등은 황제의 뜻이라 꾸며 급히 다롄으로 가 조문했다. 대한제국 왕실은 통감부를 찾아가 조의를 표했고, 이토에게 ‘문충공’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거액의 부의금과 유족 위로금도 지급되었다고 전한다.


한쪽에서는 침략자 원흉인 이토 쏜 조선 청년의 “코레아 우라(대한독립만세)”의 외침이 전 세계에 울렸고, 다른 한쪽에서는 향과 제문이 올랐다. 이토의 마지막 말이 무엇이었든, 역사는 죽은 자의 한마디보다, 살아있는 자들의 선택을 더 오래 기억한다.


“코레아 후라”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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