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 배(虛舟)

기사입력 2026.04.27 0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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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莊子)』 외편(外篇) 산목(山木)에 보면, ‘빈 배(虛舟)’ 이야기가 나온다.

춘추전국시대 시남의요(市南宜僚)라는 사람이 노(魯)나라 군주에게 충고하면서 남긴 말로, 나를 비우면 화날 일도 없고 상대에게 화낼 일도 없다는 이야기이다.


“배를 나란히 하고 황하를 건널 때, 만약 빈 배가 와서 자기 배에 부딪힌다면 비록 마음이 좁은 사람이라 해도 성을 내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그 배에 사람이 타고 있다면 배를 다른 곳으로 저어가라고 소리칠 것입니다.

한 번 소리쳐 듣지 못하면 두 번 소리칠 것이고, 그래도 듣지 못하면 세 번 소리치고는 반드시 욕을 하게 될 것입니다. 앞에서는 성내지 않다가 지금은 성내고 소리치는 것은 앞의 배는 빈 배였는데 지금은 사람이 타고 있기 때문이지요.

사람이 자신을 완전히 비우고 세상을 노닌다면, 과연 누가 그를 해칠 수 있겠습니까?”


장자는 이 비유를 통해 우리가 세상에서 겪는 갈등과 분노의 원인을 설명하고 있다.

이 일화에서 흥미로운 점은 배 안에 키를 잡은 사람이 있다고 생각하면, 우리는 일방적인 행동을 보인다는 것이다. 상대방의 배에 아무도 없으면 화를 내지 않듯이, 나 자신이 그 ‘빈 배’처럼 욕심이나 아집, 자존심을 비운 상태라면, 세상 그 무엇과 부딪힌다 해도 갈등을 겪지 않을 것이다.

 

문제는 ‘대상’이 아니라 ‘마음’이다. 이 불운의 원인이 순전히 운명의 장난이거나, 운이 나빠서라는 사실을 순순히 받아들이고 나면, 우리는 상황을 바로잡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그런데 가장 어려운 일은 그 배에 사람이 아무도 타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자세이다.

 

사람은 결국 자기가 그렇게 믿으므로 그쪽을 선택하게 된다. 그런데 이를 바꾸어 말하면, 사실은 그쪽을 선택했기 때문에 더욱 그렇게 믿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나를 비우면 갈등이 없다.

‘참새가 아무리 작아도 오장육부를 전부 갖추고 있듯이, 작은 것들이 모여 큰 것을 이룬다(雀小臟全, 積小成大)’라는 말이 있듯이, 모든 사물은 마음가짐에 따라 ‘작은 것을 크게 볼 수도 있고, 큰 것을 작게 볼 수도 있으므로(小中見大 大中見小)’, 내가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그 의미와 가치가 달라진다.

 

‘녹비왈자(鹿皮曰字)’라는 사자성어가 있다. 부드러운 사슴 가죽에 쓴 ‘가로 왈(曰)’ 자를 위아래로 잡아당기면 ‘날 일(日)’자가 된다는 말이다. 다시 말하면, ‘귀에 걸면 귀걸이요, 코에 걸면 코걸이(耳懸鈴鼻懸鈴)’가 된다는 뜻이다.

자신에게 의미와 가치를 부여해야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다. 이왕이면 다홍치마라고 그렇지 않아도 팍팍한 세상을 힘들게 살아가면서 긍정적인 방향으로 생각하는 것이 우리들을 심리적으로 더욱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 아닐까?

 

세상에 영원히 끝나지 않는 잔치는 없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다. 낮에 그렇게 하늘 높이 날아오르려고 애쓰던 새 떼도, 지금은 어둠 속에서 둥지를 찾아 조용히 쉬고 있지 않는가. 이제는 즐겨 부르던 노래도 그만 부르고 조용히 쉴 때다. 이 밤이 지나면 지난 일 모든 게 다 부질없는 일이다.

 

많은 사람이 장자(莊子)를 마음 가는 대로 살아가는 ‘유유자적(悠悠自適)’한 인물로 평가한다. 인생의 덧없음을 나비의 꿈에 비유한 ‘호접지몽(胡蝶之夢)’ 고사가 많이 알려진 탓이리라.

 

그러나 오히려 장자는 현명해지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며 ‘실력 있는 삶’을 살아간 현실적인 인물”이었다. 그의 ‘빈 배(虛舟)’ 이야기는 우리에게 자신을 비우고 목적에 얽매이지 않는 태도를 통해 진정한 자유와 행복을 찾으라는 가장 현실적인 가르침이다.

그의 메시지가 우리에게 깊은 통찰을 던지는 화두로서,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이유이다.

 

어느새 완연한 봄이다.

세상은 여전히 온통 욕심과 욕망을 앞세운 경쟁으로 소란스러워도, 꽁꽁 얼어붙었던 대지가 언제 그랬냐는 듯 차가운 땅속에서 새싹을 밀어 올린다. 대지는 세상의 변화를 그대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이럴 때, 한 번쯤은 발길을 항구로 돌려 정박해 있는 ‘빈 배’가 되어보는 건 어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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