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

정담 장군의 현충사업을 응원하며
기사입력 2026.04.27 0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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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ㆍ사진/ 오정석 예비역 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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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첫머리에 >


필자는 과거 군인으로서 38년간 군에서 복무했다. 군 생활 내내 개인적으로 전쟁사를 연구했던 필자는 전역 후에도 그 연구를 이어가고 싶었다. 그래서 집필할 조용한 곳을 물색하던 중, 우연히 알게 된 한 분이 산자수려한 울진을 소개하고 거처를 마련해 주었다. 그리하여 2014년부터 2024년까지 죽변면 화성리 꽃방마을에 거주하게 되었고, 그동안 1,000쪽에 달하는 ‘중동전쟁 전사(全史)’를 집필하여 출간하였다.

울진에서 거주하는 동안 필자는 많은 분들과 친교를 맺었는데, 그중에는 임진왜란 때 큰 활약을 한 정담 장군의 현충 사업을 추진하는 분들이 있었다. 그분들은 열악한 환경과 주변의 무관심 속에서도 열성적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사실 필자도 군인이었고, 전쟁사를 연구해 왔기 때문에 임진왜란의 전쟁과 전투에 관해 상당한 식견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필자도 정담 장군의 웅치전투에 관해서는 잘 알고 있었지만, 정담 장군이 울진 출신이었다는 것은 몰랐다.


여하튼 정담 장군 현충 사업을 추진하는 분들의 열정에 큰 감명을 받았지만 그분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주변의 관심이 부족한 것 같아 안타까웠다. 아마도 정담 장군이 전사한 웅치전투가 그 중요성에 비해 잘 알려지지 않은 것이 그 원인 중의 하나이지 않을까 생각된다. 그래서 많은 분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먼저 임진왜란 시 웅치전투를 포함한 전라도 방어전투를 포괄적으로 분석하고, 그다음 타 시(市), 군(郡)은 임진왜란 때 활약한 호국영웅들의 현충사업을 어떻게 추진해서 실행하고 있는지 기술해 보겠다.


임진왜란과 정담 장군


1. 개요


1592년(임진년) 4월 14일, 부산에 상륙한 왜군은 파죽지세로 진격하여 20일 만인 5월 4일, 한양을 점령했고 개전 2개월 만인 6월 14일에는 평양을 점령하였다.

 

개전 초기 왜군은 도성인 한양 점령을 최우선 목표로 삼고 북상했기 때문에 전라도는 왜군의 진격로에서 벗어나 있었다. 그러나 한양을 점령한 왜군은 선조가 파천하고 전쟁이 장기화될 조짐이 보이자, 임진강 일대에서 휴식 겸 차후 작전을 논의하였다. 그 결과 조선팔도를 각 장수들에게 분할·할당하여 이미 점령한 지역에서는 직접 조세를 걷으며 지배하도록 하는 한편, 아직 점령하지 못한 지역은 신속히 공격·점령하여 지배하도록 했다. 이리하여 주 진격로에서 벗어나 있던 전라도 또한 직접 공격 대상이 되었다.

 

당시 왜군의 전라도 침공은 육지와 해상의 2개 방향에서 시작되었다. 먼저 해상을 통한 침공은 경상 앞바다에서 이순신 장군에게 몇 차례 패배했기 때문에 전라도로의 진격이 돈좌(頓挫)된 상태였다. 그러나 육지에서는 달랐다. 전라도를 점령하라는 임무를 받은 왜군은 제6군 고바야가와(小早川)가 지휘하는 약 1만 6,000명이었다. 한성에서 남하한 왜군 제6군은 6월 22일 금산에 진출했고, 6월 23일에는 금산성을 수비하는 조선군을 격파하고 금산성을 점령하였다. 이로써 왜군은 전라도를 공격하기 위한 발판을 마련한 것이다. 당시 금산은 전라도에 속해 있었다. 이리하여 1592년 6월 22일부터 왜군이 금산성에서 철수한 9월 17일까지 약 3개월간 수차례에 걸쳐 왜군과 치열한 공방전이 전개되었는데, 일자별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6월 23일 : 금산성전투 (왜군이 점령)

·7월 7~8일 : 웅치전투 (정담 장군 전사)

  * 7월 8일 : 한산대첩 (이순신 장군의 조선 수군 대승) 정담 장군의 웅치전투와 이순신 장군의 한산대첩은 7월 8일 같은 날 벌어졌다.

·7월 10일 : 안덕원전투 (웅치 돌파 후 진격해 오던 왜군 격파)

·7월 10일 : 1차 금산성 공격 (고경명 의병부대 공격 실패)

·8월 17일 : 이치전투 (권율, 황진부대가 왜군 격퇴) 이치전투가 벌어진 날은 7월 8일, 7월 20일, 8월 17일의 세 가지 설이 있으나 여러 정황상 8월 17일이 가장 유력하다. 

·8월 18일 : 2차 금산성 공격 (조헌 의병부대, 영규 승병부대 공격 실패)

·9월 17일 : 금산성에 주둔했던 왜군이 경상도 성주 방면으로 퇴각


위와 같이 전라도 동북지역에서 다수의 전투가 연이어 벌어졌는데, 이 중에서 가장 치열하고 전라도 방어를 위한 결정적인 전투는 웅치전투이다. 웅치에서 처절한 혈전을 전개했기 때문에 비록 정담 장군이 전사하고 웅치가 돌파되었지만(웅치전투에서 패배했다는 평가는 적절하지 않다. 왜냐하면 전주성(전라도)을 방어하기 위한 일련의 전투 중 하나이기 때문에 돌파되었다는 평가가 타당하다.) 이 전투에서 전력이 약화된 왜군을 전주성 외곽의 안덕원에서 격파할 수 있었다. 따라서 왜군은 곡창지대인 전라도(호남) 점령이라는 작전 목적을 달성할 수 없었고, 그 반면 조선군은 왜군의 전라도 침공을 좌절시킴으로써 전쟁의 장기화에 대비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의병부대가 두 차례에 걸쳐 왜군의 전라도 침공 본거지인 금산성을 공격했지만 모두 실패하고 거의 전멸한 것은 가슴 아픈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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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라도 동북지역 일자별 전투장소

 

2. 전라도 방어전투 (공방전)


임진왜란 초기 전라도 방어전투의 핵심은 단연코 웅치전투이다. 따라서 웅치전투를 중심으로 관련된 여러 전투를 고찰해 보겠다.


가. 웅치전투 (7월 7 ~ 8일)


금산에서 전주로 들어가는 통로는 2개가 있는데, 그중 하나는 금산-진안-웅치(곰티재)-전주에 이르는 통로이고, 또 다른 하나는 금산-진산-이치(배티재)-전주에 이르는 통로이다. 그래서 왜군은 부대를 2개 제대로 나누어 각각 웅치와 이치를 넘어 전주에 진입하려고 했다. 이때 고바야가와(小早川)의 부장 안코쿠지(安國寺)가 이끄는 부대(군사적으로 분석·판단했을 때 최소 3,000명, 최대 5,000명 규모로 추정된다.)가 먼저 움직여 진안 방향으로 남하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전라감사 이광은 김제군수 정담(경상도 울진 출신의 무관으로 임진왜란전 함경도에서 신립 장군 부대의 돌격대장으로 활약한 바 있다.), 나주판관 이복남, 동복현감 황진과 그들이 이끄는 부대를 웅치로 보내 왜군을 막도록 했다. 그런데 7월 2일, 왜군이 용담에서 장수 방향으로 향하는 움직임을 보이자, 전라감사 이광은 웅치에 배치된 황진과 그의 부대를 남원으로 보내 장수에서 남원으로 넘어가는 고개를 지키게 하였다. 그리고 황진의 부대가 빠져나가 부족해진 병력 공백은 전(前) 전주만호 황박의 의병부대 200명으로 보충하였다.

 

이리하여 웅치의 조선군은 제1선(산 아래)에 황박부대, 제2선(산 중턱)에 이복남부대, 제3선(산 정상)에는 정담부대를 배치한 3선 방어진지를 구축하여 왜군의 공격에 대비하였다.(군사적으로 분석·판단했을 때, 이때 웅치에 배치된 조선군은 의병을 포함하여 약 1,000~1,200명 규모로 추정된다.) 각 부대가 독립적인 체제였지만 정담이 잠정적 통합지휘관 역할을 하는 방어지휘체계의 핵심 인물이었다. 그런데 7월 5일, 안코쿠지(安國寺)의 왜군부대가 장수 방면으로 가지 않고 용담에서 진안으로 이동해 웅치 방향으로 향하자 전라감사 이광은 남원으로 파견했던 황진부대에게 급히 웅치로 돌아와 방어에 합세하라고 긴급명령을 보냈다. 그러나 황진 부대는 웅치전투 전에 돌아오지 못했다.(만약 황진부대가 남원으로 파견 나가지 않고, 최초부터 웅치전투에 참여했으면 전투 결과가 달랐을지도 모른다.) 

 

7월 7일, 웅치 입구에 도착한 왜군은 조선군에 대한 탐색전을 벌인 후, 7월 8일 새벽부터 본격적인 공격을 개시하였다. 제일 먼저 제1선에 배치된 황박 의병부대가 왜군과 맞부딪쳐 치열한 전투를 전개했으나 끝내 돌파당했다. 조총의 일제사격 후 칼을 빼 들고 돌격해 오는 왜군의 새로운 전투 방법을 감당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어서 제2선의 이복남부대도 완강하게 저항했지만 이 역시 중과부적으로 돌파되고 말았다. 혈전은 정담부대가 방어하는 제3선에서 극에 달했다. 후퇴해 온 황박과 이복남의 잔존 병력까지 합세하여 처절하게 항전하자 왜군의 공격기세도 잠시 주춤했다.

 

새벽부터 시작된 전투는 저녁 무렵까지 5차례나 반복된 끝에 웅치의 제3선에서 간신히 왜군의 공격을 저지하기는 했지만 화살도 거의 다 소진됐고, 사상자도 많이 발생해 더 이상 지탱할 여력이 없었다. 이제 한 번 더 왜군이 공격해 온다면 방어선이 무너지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이때, 의병장 황박, 나주판관 이복남은 제3선 방어지휘관인 김제군수 정담에게 ‘더 이상 왜군의 공격을 감


당할 수 없으니 일시 후퇴하여 전력을 정비한 뒤 다시 왜군과 싸우자’고 권유했다. 그러나 정담은 ‘왜군을 한 명이라도 더 죽이고 죽을지언정 한 걸음이라도 후퇴하여 살고 싶지 않다’며 거절하였다. 이리하여 황박과 이복남의 잔여 병력은 안덕원으로 후퇴하였고, 정담부대만이 남아서 왜군과 맞서게 되었다.

 

새벽부터 저녁때까지 5차례나 공격을 계속했지만 웅치 정상을 돌파하지 못한 왜군도 큰 피해를 입어 더 이상의 공격을 주저하고 있었다. 그러나 조선군도 현격히 약화되고 화살마저 떨어진 것을 눈치챈 왜군은 마지막 6번째 공격을 개시했다. 웅치 정상에서 정담부대 수백 명은 밀려드는 왜군과 처절한 혈전을 벌였다. 그러나 끝까지 싸우다 중과부적으로 정담 이하 모든 병사들이 전사했다. 이렇게 웅치전투는 막을 내렸다.


나. 안덕원 전투 (7월 10일)


7월 8일 밤, 웅치에서 후퇴한 황박과 이복남의 잔존 부대는 안덕원 일대에 매복하여 왜군의 전주성 공격을 저지하려고 준비하였다. 한편, 웅치를 점령한 왜군은 7월 9일 날이 밝자 진격을 개시하여 전주성 외곽인 안덕원까지 진출했다. 그러나 웅치전투에서 왜군도 큰 피해를 입었기 때문에 불과 7~8㎞ 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전주성을 곧바로 공격할 수가 없었다. 더구나 안덕원 주변에 황박과 이복남의 잔존 부대가 매복해 있어 섣불리 움직이는 것도 곤란했다. 이때 남원으로 파견 나갔던 황진부대 300명이 전주로 복귀했다.

 

7월 10일 새벽, 황진이 이끄는 부대가 안덕원 일대의 왜군을 기습했다. 예상치 못한 조선군 부대의 공격을 받은 왜군은 당황하여 웅치 방향으로 도망가기 시작했다. 승기를 잡은 황진의 부대는 왜군을 추격했고, 황박부대와 이복남부대도 합세하여 소양평 너머로 왜군을 몰아냈다. 왜군은 그들이 피 흘려 점령했던 웅치를 넘어 진안으로 후퇴했고, 진안 일대에서 약탈을 자행하다가 7월 17일경, 용담을 거쳐 그들의 본대가 있는 금산으로 퇴각했다.

이로써 전주성은 지켜졌다. 결과적으로 정담이 웅치에서 끝까지 싸워 왜군에게 큰 피해를 입혔고, 그 때문에 전력이 약화된 왜군이 공격기세를 유지하지 못해 전주성을 공격해 보지도 못하고 퇴각한 것이니 전주성과 전라도(호남)는 정담과 그의 부하들이 피로 지켜낸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다. 제1차 금산성 공격 (7월 10일)


전라도(호남)를 지키기 위해 조선군이 수세적 방어태세만 취한 것은 아니었다. 비록 느슨한 형태였지만 각지의 의병부대와 합동작전을 전개하였다. 그 첫 번째가 고경명의 의병부대였다.

 

고바야가와(小早川)가 지휘하는 왜군이 6월 22일, 금산에 진출하자 조선군은 전라도를 방어하기 위해 각 요지에 병력을 배치하는 한편, 역으로 왜군의 본거지를 공격할 목적으로 고경명의 의병부대가 같은 날 전주를 출발하여 북쪽으로 전진했다. 그리하여 6월 27일에는 충청도 은진에 도착했고 7월 9일에는 금산 인근까지 진출하였다. 이곳에서 고경명 의병부대는 전라도 방어사 곽영의 관군부대와 합류해 합동으로 금산성을 공격하기로 합의했다.

 

7월 10일, 의병·관군 합동부대는 금산성을 포위한 후 공격을 개시했다. 그런데 왜군이 갑자기 성문을 열고 나와서 조선군을 공격했다. 의병과 관군을 분리시켜 각개격파하기 위한 적극적 공세행동이었다. 첫 번째 집중 공격의 대상은 허술해 보이는 관군이었다. 왜군의 맹렬한 돌격에 관군이 무너져 패주했다. 왜군은 공격 방향을 전환하여 의병부대를 덮쳤다. 처절한 전투 끝에 의병부대는 궤멸했고, 의병장 고경명도 전사했다. 이로써 왜군 제6군의 본거지인 금산성 탈환은 실패하고 말았다.


라. 이치전투 (8월 17일)


금산성의 왜군은 곽영의 관군부대와 고경명의 의병부대를 요격하여 승리를 거두었기 때문에 사기가 높아졌다. 그래서 전력을 재정비한 후 다시 전주성 공략에 나섰다. 이번에는 고바야가와(小早川)가 직접 부대를 이끌고 이치를 넘어 전주로 진출하려고 시도하였다.(공격에 투입된 왜군은 약 2,000명이었다.) 

왜군이 이치를 향해 움직이고 있다는 보고를 받은 전라감사 이광은 황급히 광주목사 권율의 부대와 동복현감 황진의 부대를 이치로 급파해 왜군을 막도록 했다.(이치에 배치된 조선군은 약 1,000명 정도였다.) 

 

8월 17일 해 뜰 무렵, 왜군의 선봉대 400명이 이치에 진입한 후 고개를 향해 접근해 왔다. 전방에 배치된 황진 부대가 왜적과 전투를 벌였다. 이때 황진이 활을 쏘며 분전하여 왜군을 격퇴했다. 왜군은 후속부대를 투입하여 재차 공격을 감행했고, 다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전투 도중 황진이 왜군의 조총에 맞아 쓰러졌다. 병사들은 동요됐고 방어선이 무너질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이때 권율이 칼을 빼 들고 독전하여 간신히 왜군을 저지하였다. 왜군은 또다시 후속부대를 투입하여 악착같이 공격해왔지만 조선군도 필사적이었고, 막판에 부상당했던 황진까지 다시 전투에 참여하자 왜군들은 돌파에 실패하고 패퇴하였다.

 

이날 아침부터 왜군은 3차례나 공격을 반복했지만 끝내 이치를 돌파하지 못하고 본거지인 금산성으로 퇴각하였다. 이로써 조선군은 이치에서 승리했고, 또다시 전라도(호남)를 지켜냈다.


마. 제2차 금산성 공격 (8월 18일)


금산성에 주둔한 왜군 제6군은 웅치와 이치를 통과해 전주성을 공략하려고 했으나 조선군의 완강한 저항 때문에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자 왜군은 금산 일대에서 약탈을 자행하며 또다시 전주를 공격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이러한 왜군의 기도에 쐐기를 박은 것이 조헌의 의병부대였다.

 

조헌은 충청도 옥천에서 의병을 일으킨 후 8월 1일, 왜군이 점령한 청주성을 공격해 탈환했다. 그러나 전공을 시기하는 관군의 방해가 심해 많은 의병들이 흩어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조헌은 남은 의병 700명과 영규대사의 승병 300명이 합동해 전라도를 공략하려는 왜군의 본거지인 금산성을 공격하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전력이 열세하기 때문에 광주목사 권율에게 8월 18일에 함께 힘을 합쳐 공격하자는 서신을 보냈다.

 

조헌의 의병부대와 영규대사의 승병부대는 8월 17일, 금산성 동쪽 4㎞ 밖까지 진출했다. 그런데 이때까지 권율의 부대도 답신도 도착하지 않았다. 그때 권율은 이치에 배치되어 있는 상태였고, 8월 17일 아침부터 왜군과 치열한 전투를 전개하고 있었다. 그래서 권율은 8월 18일, 금산에서 합동공격을 실시할 수 없으니 공격 일자를 연기하자는 답신을 보냈는데, 8월 18일 아침까지 조헌 진영에 도착하지 않았다. 그러자 조헌의 부하들은 공격일을 연기하자고 건의했는데 조헌은 금산성 공격에 대한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이리하여 금산성 전투가 개시되었다.

 

8월 18일, 조헌의 의병부대가 금산성을 공격하려고 하자 왜군이 먼저 선제적 공세행동을 실시하였다. 의병부대의 전력이 약한 것을 간파한 것이다. 성문을 열고 나온 왜군은 조헌 부대를 먼저 공격해 격멸하고, 이어서 영규대사의 승병부대를 공격해 격멸했다. 의병과 승병부대는 처절하게 싸웠으나 전멸하였고, 조헌과 영규대사도 전사했다. 그러나 의병·승병들의 처절한 항전이 결코 무의미한 것은 아니었다. 이미 여러 전투에서 왜군은 큰 피해를 입었고, 또한 죽음을 불사하고 항전하는 의병들의 기개에 충격을 받아 전라도 침공을 포기하게 된 것이다. 이로써 전라도(호남) 곡창지대는 지켜졌다.


< 타 시(市), 군(郡)의 현충사업 >


1. 중봉 조헌 선생 현충사업


가. 경기도 김포시


필자의 출생지(고향)는 경기도 김포로서 어린 시절을 그곳에서 보냈다. 그 후, 군인이 되어 전국 각지에서 근무하다가 고향에 갔을 때 현충사업을 추진하는 이ㅇㅇ 교수를 만나게 되었다. 그분은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왜군과 싸우다 전사한 중봉 조헌 선생의 출생지(고향)가 김포라는 사실을 말하면서, 고향 사람들이 자부심을 갖고 조헌 선생의 우국충정 정신을 이어받을 수 있도록 현충사업을 추진하고 있다는 말을 덧붙였다. 그런데 군민들의 호응과 지자체의 관심이 저조하다면서 근심 어린 표정을 지었다.

 

그 말을 듣고 필자는 깜짝 놀랐다. 당시 필자가 알고 있던 수준은 조헌 선생이 임진왜란 때 충북 옥천에서 의병을 일으켰고, 금산에서 왜군과 싸우다 전사했으며, 함께 전사한 700명의 의병을 매장한 ‘칠백의총’이 금산에 있다는 정도였다. 그리고 조헌 선생이 옥천에서 의병을 일으켰으니 당연히 조헌 선생의 고향이 옥천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분의 고향이 김포라니….

 

그때 필자는 고향 선배인 이ㅇㅇ 교수를 도와 현충사업에 참여하고 싶었으나 최전방에서 근무하고 있는 군인이었기에 응원을 보내는 정도의 기여밖에 할 수가 없었다. 물론 이ㅇㅇ 교수는 각계각층을 설득하고 홍보하면서 고독한 투쟁(현충사업추진)을 계속하였다. 그 후 세월이 한참 지난 다음 고향을 찾았을 때, 이ㅇㅇ 교수가 10여 년 동안 헌신적으로 추진해 온 현충사업의 성과를 눈으로 볼 수 있었다.

 

지금 김포시에는 조헌 선생이 출생하고 자란 마을에 ‘우저서원’이 있다. 그리고 현충사업에 의해 김포시가지 중심부 입구에 조헌 선생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또 김포시 중심도로는 조헌 선생의 호를 따서 ‘중봉로’라고 명명되었으며, 김포시립도서관도 ‘중봉도서관’으로 개칭하였고, 청소년수련원도 ‘중봉 청소년수련원’이라는 명칭을 붙였다. 이러한 외형적인 변화 외에 매년 ‘중봉문화제’를 개최하여 조헌 선생의 우국충정 정신을 함양하고 있다. 중봉문화제는 고유제, 취타대 행진, 지부상소, 서화전 등 각종 문화축제로 구성된다. 이 중에서 대표적인 프로그램은 지부상소(持斧上疏) 퍼포먼스로 조헌 선생의 정신을 재현하고 있다. ‘지부상소(持斧上疏)’란 도끼를 메고 한양에 올라가 왕에게 상소를 올리는 행동으로써 상소를 가납하지 않을 경우, 그 도끼로 자신의 목을 치라는 사생결단의 행동이다. 임진왜란 1년 전, 토요토미가 겐소를 사신으로 보내 명나라를 칠 테니 길을 빌려달라고 하자 조선 조정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이때 조헌이 옥천에서 도끼를 메고 상경해 지부상소로 일본 사신의 목을 벨 것을 청하며 대궐 문밖에서 3일간이나 기다렸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와 같은 김포시의 중봉 조헌 선생 현충사업과 그 결실은 이ㅇㅇ 교수가 앞장서서 10여 년에 걸쳐 추진해 온 노력의 결과이다. 그가 외로운 투쟁을 전개하다가 다행히 문화원장에 임명되었고, 그 때문에 그의 뜻이 좀 더 빨리 이루어질 수 있었다. 이 세상에 공짜로 이루어진 것은 없다.


나. 충북 옥천군


조헌 선생은 옥천과 인접한 보은현감을 지낸 적이 있다. 관직에서 물러난 후에는 옥천으로 내려와 ‘후율정사’라는 서실을 짓고 제자 양성과 학문을 닦는 데 전념하였다. 이런 연고가 있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옥천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그 후 청주성을 수복하는 전공을 세웠으나 금산에서 왜군과 싸우다 장렬히 전사했다.

 

조헌 선생이 전사하자 그의 제자들은 시신을 거두어 옥천에 묻었다. 그래서 조헌 선생의 묘소와 신도비는 옥천에 있으며, 묘소 아래 표충사에는 위패와 영정이 모셔져 있다. 이러한 연고로 옥천군에서는 조헌 선생의 우국충정 정신을 이어받기 위해 매년 10월 중순, 표충사에서 중봉 충렬제를 지낸다. 추모제향 후에는 중봉학술세미나를 비롯한 각종 문화행사를 개최한다. 이러한 행사는 옥천군과 옥천문화원이 주최하고, 중봉 조헌 선생 기념사업회와 옥천청년회의소가 주관하며, 충북도와 문화관광부가 후원하고 있다.

이처럼 위인들이나 호국영웅들의 연고가 조금이라도 있는 곳에서는 그 호국정신을 이어가고 함양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아끼지 않고 있다.


2. 정기룡 장군 현충사업


가. 경북 상주시


필자가 제2작전사령부 부사령관으로 재직할 때, 상주시로부터 정기룡 장군 탄신제 행사에 초청을 받았었다. 당시 필자는 정기룡 장군의 출생지는 경남 곤양(현 하동)인데, 왜 상주에서 지낼까 하고 의아하게 생각했었다. 그런 의구심은 탄신제에 참석하고 난 후 점차 풀렸다.

 

정기룡 장군은 1562년 5월 26일, 경남 하동에서 출생했다. 무과에 급제한 그는 임진왜란 초기, 별장(종8품 군관지위)으로 승진해 경상우도 방어사 조경의 휘하에서 전투에 참가했다. 1592년 4월 하순, 거창전투를 시작으로 여러 전투에서 공을 세우자 그의 능력을 높이 평가한 상주목사 김해의 요청에 의해 상주 판관이 되었다.

 

그는 부임하자마자 상주 용화동에서 왜군을 격파하고, 곧이어 11월에는 상주성을 탈환하였다. 이후 1594년에는 상주목사로 임명되어 그 지역을 안정화시켰다. 그 후, 정기룡 장군은 수많은 전투에서 공을 세웠고, 전쟁이 끝난 다음에는 승진을 거듭하다가 1622년, 경상우수사 겸 삼도수군통제사로 재직 중에 통영의 진중에서 생을 마감했다. 그의 유해는 모친과 약조했던 대로 상주에 있는 모친의 묘 아래에 안장되었다. 이러한 연고를 바탕으로 상주시는 정기룡 장군의 호국정신을 이어가기 위한 현충사업을 적극적으로 추진해 왔다. 특히 1978년부터 1980년까지 호국선현유적지 정화사업의 일환으로 정기룡 장군 묘소 주변의 넓은 부지(약 4,000평)를 매입하고, 사당, 전시관, 관리사무소 등을 신축 확장 정비하였다. 이리하여 정기룡 장군 묘소와 사당 일대는 역사의 산 교육장으로서 가치를 지니게 되었다.

 

대표적인 행사는 정기룡 장군 탄신제와 상주성 탈환전투 퍼포먼스이다. 탄신제는 매년 5월 26일 상주시장을 비롯한 각 기관 단체장, 기념사업회 관계자, 후손들, 관내 유림, 상주 출신 현역 및 예비역 장성 그리고 많은 시민들이 참석한 가운데 거행된다. 탄신제에 이어 서화전, 백일장, 궁도대회, 승마대회 등 다채로운 문화행사가 개최된다. 또한 매년 10월에는 임진왜란 당시 상주성을 탈환하는 장면을 재현하여 호국정신을 홍보·계승하고 있다. 2022년에는 경상감영공원에 ‘정기룡 장군 상주성 탈환 기념탑’을 제막했다. 이처럼 상주시는 정기룡 장군의 호국정신을 널리 알리기 위한 노력을 계속하고 있는데, 기념사업회의 헌신적 활동과 시민들의 적극적인 호응이 밑바탕이 되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나. 경남 하동군


정기룡 장군의 출생지 하동에서도 기념사업회 주관으로 매년 탄신숭모문화제를 개최하고 있다. 행사는 사당인 경충사에서 기관 단체장을 비롯한 각계 인사, 군인들이 참석한 가운데 헌다례, 숭모제례, 헌시 낭독 순으로 진행한다. 이어서 하동문화회관에서는 마당극 ‘정기룡’이 열리는 등 각종 문화행사가 다채롭게 펼쳐진다. 탄신숭모제와는 별도로 순국추모제도 개최하는데, 2022년에는 기념사업회 주관으로 ‘정기룡 장군 순국 400주년 추모행사’를 성대하게 거행하였다. 이것 또한 기관 단체장을 비롯한 각계 인사, 군민들이 참석한 가운데 순국 제례, 진검(眞劍) 봉헌, 분향 참배의 순으로 진행되었다. 그리고 이어서 정기룡 장군 업적 재조명의 학술대회도 개최하였다.

 

하동군민들의 정기룡 장군 현충사업에 대한 열기는 뜨겁다. 이미 정기룡 장군 생가와 사당이 있는 지역 대로는 ‘경충로’라고 명명하였다. 또 2020년에 정기룡 장군 동상건립모금추진회가 발족했는데, 군민들과 군내의 각종 기업, 단체들까지 적극 참여해 불과 몇 년 만에 동상을 건립하였다. 그리하여 남해안을 여행하는 사람들은 정기룡 장군 생가 입구 대로변에 우뚝 서 있는 황금색 빛깔의 정기룡 장군 동상을 볼 수 있다. 이뿐만 아니라 2022년에는 하동군 공무원이 490쪽 분량의 ‘매헌실기’ ‘매헌’은 정기룡 장군의 호.

 

정기룡 장군 일대기를 출간하였다. 또 지역 국회의원도 정기룡 장군 사당인 경충사 주변 일대를 역사의 산 교육장으로 꾸미겠다고 하여 적극적으로 나섰다. 이처럼 하동군과 정기룡 장군 기념사업회는 정기룡 장군의 호국정신을 계승할 수 있도록 숭모문화제를 포함한 각종 사업을 지속 추진하고 있다.


3. 정담 장군 현충사업


가. 전북 김제시, 완주군, 진안군


정담 장군의 현충사업은 그의 출생지인 경북 울진보다는 그가 전사할 때 재직했던 김제와 전투 및 전사했던 완주, 진안에서 더 활발하게 추진하고 있다. 정담 장군에 대한 추모제는 오래전부터 매년 실시하고 있다. 그러나 전북도 및 김제, 완주, 진안에서는 추모제에 국한하지 않고 더 포괄적인 현충사업을 추진해 큰 성과를 거두었다.

 

1976년, 전북도는 웅치 일대를 전적지로 설정(전북도 기념물 제25호)했고, 1979년에는 웅치전적비를 세웠다. 그런데 주민들이 적극 참여해 현충사업을 확대한 것은 2014년부터이다. 그해 완주군에서 웅치전투기념사업회가 발족했고, 2015년에는 ‘웅치전투의 눈물’이라는 책자를 발간하여 각 가정에 1권씩 배부하였다. 2016년에는 완주군 중심의 기념사업회를 더욱 확대한 전북도 차원의 웅치·이치전투 기념사업회를 발족시켜 다양한 현충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그중에서 가장 큰 성과는 웅치 전적지 성역화 사업으로서 2022년, 문화재청으로부터 웅치 전적지를 국가사적으로 지정받았는데, 그 면적이 약 7만 평에 달한다. 기념사업회는 이곳에 호남 임진왜란 전쟁기념관 건립을 문화재청과 지자체에 촉구했다. 이와 더불어 완주군 도의원이 전북도 의회에 웅치·이치전투 선양사업에 관한 조례를 발의했는데, 이는 전적지 국가사적 지정을 계기로 지자체 차원의 선양사업을 적극 추진하기 위한 것으로서, 전적지 발굴 및 조사와 보존, 희생자 추모 등 지원사업 추진의 근거를 담고 있다.

 

최근에는 웅치전투의 첫 번째 교전지인 진안군 덕봉마을에 웅치전투에서 순절한 사람들을 모시는 창렬사(彰烈祠)를 건립하여 호국영령들을 추모하고 있다. 또 2023년에는 웅치·이치전투 사적지가 국가사적으로 지정되기까지의 과정을 담은 ‘임진왜란 웅치·이치전투 발자취를 찾아서’를 발간해 적극적 참여를 홍보하고 있다. 이와 같은 현충사업 외에 더욱 체계적으로 매년 추모제를 거행하고 있으며, 학술세미나, 청소년들의 전적지 답사 등, 기념사업과 홍보, 교육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나. 경북 울진군


정담 장군 출생지인 울진에서도 ‘울진 정담 장군 숭모회’가 발족되어 충렬사 건립 등 여러 가지 현충사업을 추진 중에 있다. 군민들과 지자체의 관심과 참여가 요망된다.


< 마무리하면서 >


앞에서 각 지자체와 기념사업회는 호국영웅들의 현충사업을 어떻게 추진해 왔고, 그 정신을 어떻게 기리고 있는지 살펴보았다. 알려진 바와 같이 호국영웅들이 태어난 곳이나 재직했던 곳, 전투 장소나 전사한 곳을 가리지 않고 모든 곳에서 호국정신을 현양하고 또 정체성 확립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우국충정과 호국정신은 어느 한 곳의 전유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기까지 각 지역의 자발적 단체인 기념사업회는 고난의 행군을 계속하였고, 결국 만난을 극복해 오늘에 이르는 성과를 거두게 된 것이다.


지금 울진에서도 정담 장군의 현충사업을 추진하는 기념사업회가 발족하여 활동하고 있는 것은 무척 고무적인 일이다. 그런데 이 사업을 좀 더 원활하게 추진하기 위해서는 군민들이 적극적인 참여와 지자체의 지원이 바탕이 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 기념사업추진위원회 구성을 확대하고, 구체적인 사업계획을 작성하여 적극 홍보에 나서야 한다. 예를 들면 사당 건립은 어느 곳에 어떤 규모로, 부지 확보와 건축비는 어떻게? 또 동상을 건립한다면 어느 곳에, 비용은? 도로 명칭을 붙인다면 어느 도로를 어떤 명칭으로? 매년 추모제는 어디서 어떻게 하며, 문화제까지 포함한다면 무엇을 어떻게? 현충사업에 소요되는 비용은 어떻게 확보(모금, 기부금, 지자체 협조, 군내 기업들의 찬조, 기타)할 것인가 등 등이다.


부디 정담 장군의 현충사업이 몇몇 사람의 외로운 외침에 그치지 말고 많은 분들의 참여하에 성공적으로 추진되기를 기원합니다. 비록 시작은 미약할지라도 결과는 창대하리라는 말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울진정담장군숭모회 회원 모집


▲ 회장 임우규(010-9365-6800)

▲ 수석 부회장 김연국(010-3189-2824)

▲ 부회장 윤두환(010-3345-1358)

▲ 사무총장 장헌원(010-2560-7539)


※ 가입비 30,000원 (농협 351-1377-6734-23, 울진정담장군숭모회)

 

울진군민 제위께서는 울진정담장군숭모회에 많은 참여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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