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평생 구들장이, 기와장이, 미장이로 살아온 최용순씨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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겉으로는 제아무리 평범해 보여도 어떤 이의 삶이든 만만한 것이 있던가? 또 녹록한 삶도 있던가?
노인들을 만나 얘기를 나눌 때면 ‘내가 살아온 인생을 쓰면 책 열권으로도 모자란다’는 말들을 자주 듣게 된다.한때는 ‘어떤 한사람이 겪어온 인생이라는 것이 다 거기서 거기인데 무슨 유별난 삶이 있을까’ 하며 스스로 오만과 객기를 부린 적이 있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수년에 걸쳐 노인들을 만나고, 수십 차례의 인터뷰를 진행하면서 ‘어떤 사람의 인생이라도 거기서 거기다’ 하며 단정 지었던 생각이 얼마나 짧았었나를 느끼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어느덧 ‘연륜이 꽉 들어찬 한 사람의 삶은 책 열권이 아니라 백권으로도 부족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더불어 노인들의 인생은 개개인마다 한편의 거짓 없는 다큐멘터리 영화 같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그들 대부분은 지나온 세월이 고달픔과 애환으로 가득 차 있을지라도 그저 소리 없이 웃는다.
그럴 때 더욱 깊어지는 노인의 주름 속에는 한 사람이 몸으로 겪어온 과거가 고스란히 담겨 있고, 진실과 행복 또한 얼마쯤은 늘 담겨 있다.이 세상 모든 노인들이 다 지혜로운 것은 아니지만, 시간의 녹을 먹고 살아온 노인들이야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지혜로운 사람들임에는 틀림이 없다.
골 깊은 주름을 소유한 노인들은 젊은 시절이 늘 어리석고 충동적일 수밖에 없는 이유를, 세상은 끊임없이 거짓과 폭력과 슬픔이 반복될 수밖에 없는 이유를, 그리고 무엇보다 모든 것은 또 금세 사라질 수밖에 없는 이유를 알고 있을 것만 같다.나이가 들어 마침내 인생의 기본원리를 깨닫게 된 노인이 사회로부터, 또 신(神)으로부터 늘 강요당하는 은퇴.
결코 노인을 위한 나라가 아닌 이 땅에서, 어떤 것도 더 이상 선택할 여지가 없는 은퇴가 또한 슬플 뿐이다.그래도 언제나 변함없이 노인들은 시간과 시간 사이를 비껴 앉아서 하늘도 쳐다보고, 가끔씩 찾아드는 길손도 정겹게 웃으면서 맞아줄 따름이다.
“나이 아홉 살에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고, 10살이 된 이듬해에 기성면 삼산리의 어느 집으로 머슴살이를 들어갔지요”·····“4년이 지나니까 그동안 일한 세경으로 나락 스무말을 쳐 주었는데, 방아를 찧어 놓으니까 쌀 스무되가 안 나왔어요.”
얼핏 보기에는 거동조차 만만하지 않을 것 같은 최용순(96세)씨는 현재 살고 있는 근남면 노음3리 매림마을에서 태어났다.
나이 들어 귀가 어둡고 말이 어눌한 최용순씨와의 긴 인터뷰는 부인 박월출(76세)씨의 도움으로 이루어졌다.인생에서 그 누구보다도 모진 풍파를 오롯이 몸으로 겪으면서 살아온 그는 일흔살이 넘어서까지도 온갖 공사판에서 기와장이로, 구들장이로, 미장이로도 불리면서 그렇게 고단한 삶을 지탱해왔다.
“원래 저기 보이는 옆집에서 태어났어요. 아버지는 제가 아홉 살 되던 해에 돌아가셨고, 어머니가 힘들게 자식들을 키웠어요. 형제자매는 5남매인데 누님이 3명 있고, 그 다음에 저, 그리고 밑으로 남동생이 한명 있지요. 누님들도 남동생도 이제는 세상을 다 떠났고 저만 세상에 혼자 남아 있지요. 제일 큰 누님이 남수, 둘째 누님이 수남, 그리고 바로 위의 누님은 어릴 때 없어졌습니다. 그리고 저, 아래 남동생이 주순입니다.”
최용순씨가 태어난 1913년은 일제가 조선을 식민지로 지배한지 3년이 지난 무단통치기로써, 일제가 헌병경찰을 앞세워 강력하게 조선을 탄압하던 시절이었다.
아버지가 아홉 살에 세상을 떠나고 난 1년 뒤에 최씨는 기성면 어느 집으로 머슴살이를 들어가서 12년을 보낸다.“집안이 하도 찢어지게 가난해서 먹고 살기가 어렵다보니까 학교도 전혀 가보지 못했어요. 그때만 해도 울진읍내로 나가야 학교가 있었으니, 어린 애들이 걸어서 다닐 수도 없었고요. 제 나이 아홉 살에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고, 10살이 되던 이듬해에 기성면 삼산리의 어느 집으로 머슴살이를 들어갔습니다. 기성면 삼산리 첫 동네에 있던 황의경씨 댁으로 머슴을 들어갔는데, 그분이 황해월선생의 후손이었지요. 논밭전지도 많고, 아주 부자로 인근에서는 최고로 잘 살던 집이었어요. 그 좋던 살림살이도 세월이 지나면서 다 없어졌다는 얘기를 뒤에 들었지만요. 그 집에서 열두해를 있었습니다. 머슴살이었지만 한집에 오래 있다 보니까 나중에는 그 집 식구가 된 거나 마찬가지였어요. 주인이었던 황의경씨도 저를 아주 자식처럼 여겨주었지요. 어떤 사람이 머슴에게 글까지 가르쳐 주겠소? 일정시대인 그때는 동네마다 야학이 있었는데, 4~5년 동안 야학을 다녀서 어느 정도는 글씨를 쓰고 읽을 수 있게 되었지요.”
최씨는 열 살 되던 해에 기성면 삼산리로 머슴살이를 들어가서, 처음에는 주인집의 애들을 돌보는 일을 했었다고 전한다.
“삼산으로 머슴살이를 가서 처음에는 그 집 얼라(어린아이)들을 봐주는 일을 했습니다. 4년이 지나니까 그동안 일한 세경(월급)으로 나락 스무말을 쳐 주더라고요. 그 나락을 받아서 방아를 찧어 놓으니까 쌀 스무되가 안 나왔어요. 얼라 봐주는 일을 4년 하고 나니까 제 나이도 14살이 되었고, 주인도 이것저것 집안의 다른 일을 시키기 시작하더군요. 열살에 그 집으로 들어가서 22살에 결혼하고 난 다음에 근남면 매림마을로 돌아왔습니다.”결혼생활 15년 만에 부인과 사별·····“죽었을 때도 전쟁 통이다 보니까 절차를 갖추어서 행상을 메고 나가지도 못하고, 그냥 대로 만든 발에다 둘둘 말아서 나갔습니다. 그렇게 대발을 메고 집을 나서는데 동삼이라서 또 눈은 어찌나 많이 오던지... 집 가까운 곳으로 옮겨서 언 땅을 파고 묘를 썼지요.”
최용순씨는 기성면 삼산리 황의경씨 집에서 12년째 머슴살이를 하는 중에 성실하게 일하는 최씨를 눈여겨본 이웃사람의 중매로 결혼을 하게 된다.6.25전쟁 후 근남면에서 소방대 대원으로 근무할 당시. 이후 최용순씨는 속초까지 노무자로 끌려간다
젊은 시절 어느 여행지에서의 최용순씨(사진 중앙)“22살 되던 해에 이웃에 사는 사람이 소개했어요. 평해 다천에 살고 있던 전순이라는 여자였는데, 저보다 한살 아래였습니다. 결혼하고 나서 집으로 들어와 살면서 그 사이에 아들 셋과 딸 하나를 두었지요. 그런데 날 때부터 지병이 있었던지, 아니면 그 당시에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고생을 해서인지는 몰라도 6.25 전쟁 통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6.25 전쟁 때 인민군이 울진에 들어왔다가 후퇴해서 나갈 무렵에 세상을 등진 거니까 한 15년 같이 산 셈이네요. 죽었을 때도 전쟁 통이다 보니까 절차를 갖추어서 행상을 메고 나가지도 못하고, 그냥 대로 만든 발에다 둘둘 말아서 나갔습니다. 그렇게 대발을 메고 집을 나서는데 동삼이라서 또 눈은 어찌나 많이 오던지... 집 가까운 곳으로 옮겨서 언 땅을 파고 묘를 썼지요. 정식으로 장례절차는 갖추지 못했지만, 그래도 집에 빈소를 마련해두고 3년상을 치렀어요.”
기성면 삼산리에서 12년 동안 머슴살이를 하고 난 다음인 22살에 한살 아래의 부인을 맞아서 15년간을 살면서 4남매를 두었던 최씨는 6.25전쟁이 발발한 첫해인 1950년 나이 서른일곱에 첫 아내를 앞서 저 세상으로 떠나보낸다.
그러나 한 집안의 장남으로 아직까지 젊었던 최씨를 그냥 두고 보지 못한 가족과 친지들은 서둘러 두번째 결혼을 주선한다.
최씨의 두번째 결혼 얘기가 나오자, 부인 박월출씨가 옆에서 대신 거들어준다.
“제가 태어난 곳은 서면 옥방 꾸찐골이라는 곳입니다. 쌍전이지요. 제가 17살 되던 해에 어떻게 아는 사람끼리 서로 연결해서 근남 오른갈에 살던 시댁의 사촌 시누가 중매를 했어요. 중매를 왔는데 신랑이 될 사람이 누구냐고 물어보니까, 25살인데 총각이라고 하더라고요. 그리고 하는 말이 집이 도로가에 있어서 밤만 되면 지나다니는 자동차 불빛도 많이 보인다고 했어요. 옛날에는 산골마을에서 자동차 보기가 하도 힘드니까, 차가 자주 보인다고 하면 대단한 도시같이 생각되잖소? 나이 17살 되던 해 삼월 삼짇날에 옥방 꾸찐골을 떠나서 이곳 매림으로 가마를 타고 시집을 왔는데, 가마채가 동마루에 얹히니까 밖에서 ‘빈소가 있는데 어디로 들어가야 하노?’ 하면서 쑥덕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라고요. 어느 누군가는 ‘새색시가 시집을 왔는데 안방으로 들어가야지’ 그런 소리도 들리고요. 한쪽 방에는 빈소가 있으니까 그 방으로는 못 들어가고 안방으로 들어가니까 호호백발 할머니가 방 한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있는데, 쪼끄만한 얼라들이 여기도 누워 있고, 저기도 누워 있고 그랬어요. 그때만 해도 마을에서 결혼식이 있으면 물부주 한다고, 인근에 사는 사람들이 막걸리도 한동이 이고 오고, 감주도 한동이 이고 오고는 했지요. 물부주한다고 시댁으로 찾아온 사람들마다 얼라들을 보면서, ‘아이고, 야도 많이 컸고, 자도 이만치 컸네. 할매가 키운다고 애먹었네’ 뭐 그런 인사들을 하더라고요. 그래도 저는 그 의미도 모르고 ‘뭔가 이상하네’ 그런 생각만 했지, 정말 아무것도 몰랐어요.”
나이 서른일곱살에 스무살 연하의 두번째 부인 맞아·····최용순씨 부인, “17살 어린 나이에 신랑이 될 사람이 총각이고 나이도 스물다섯이라고 해서 시집을 왔더니, 나이도 스무살이나 더 많고 전처가 낳은 얼라들도 줄줄이 있디더. 이집으로 시집을 오고 난 다음에도 일년이나 더 있다가 영감의 전처 빈소가 밖으로 나갔니더.”과거의 어떤 특정한 일에 대한 기억력은 남성보다 여성이 훨씬 더 뛰어나다.
집안 대소사에 관한 기억들은 특히 그렇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최씨의 부인 박월출씨의 이야기는 계속 이어진다.“나이 17살에 중매를 해서 시집을 왔는데, 옛날에는 행예를 해도 신부는 두루막 같은 활옷을 덮어쓰고 있으니까 신랑 되는 사람 얼굴조차 그때까지 한번도 보지 못했지요. 옥방에서 가마를 타고 시집으로 들어와서 첫날밤에 연애상이라고 차려 두었는데, 그 앞에 한참 앉아 있다 보니까 신랑 되는 사람이 방안으로 성큼 들어섰지요. 그 어두운 호롱불 밑에서 얼핏 쳐다보아도 신랑이라는 사람이 영감 같아 보이고 두루막도 엉클은 사람이 들어오더라고요. 중매를 했던 시댁 사촌 시누이는 남편 되는 사람이 25살이라고 했는데, 첫날밤에 남편 되는 사람 얼굴을 쳐다본 저는 어린 나이에 하도 놀래서 방 뒷문을 통해 그대로 밖으로 뛰쳐나갔더랬지요. 낯선 마을에서 어디 멀리 가지도 못하고 처마 밑에서 한참을 있었어요. 한참이나 지난 뒤에 그래도 꾀는 있었는지 손가락에 침을 묻혀서 문구멍을 뚫고 안을 가만히 들여다보니까, 호롱불 밑에서 담배를 피워서 방안은 연기가 자욱하디더. 그렇게 밖에 서 있는데 동네 사람들이 호기심으로 신혼 방안의 소리라도 들어보겠다고 뒤안으로 돌아왔다가, 나하고 마주치자 깜짝 놀라서 나가자빠지는 사람들도 있고 그러더라고요. 그런데 밖에서 밤을 새우며 서 있는데도 신랑이라는 사람은 이미 한 대목 겪어본 사람인지라 ‘떠보자’ 싶어서 그런지, 문 열고 들어오라는 말 한마디도 없었어요. 그러다보니까 신랑이 이불을 깔고 호롱불을 끄고 들어 눕는 게 보이더라고요. 그러고도 밖에서 새벽까지 계속 서 있으니까 춥기도 하고 결국은 나갔던 문으로 제가 다시 방안으로 들어갔어요. 들어가서는 문 바로 앞에서 그대로 잤는데, 남자가 가만 있니껴? 슬그머니 손이 와서 조 땡기지. 아이고, 그러다보니까 한세상 또 이렇게 다 됐지요 모. 무슨 내력인지도 모르고, 첫날밤까지 보내고 여자가 집 나가면 곧 죽는 줄 알았을 때였으니까. 말도 하지 마소. 딸린 얼라들은 요런 게 줄줄이 있제, 호호백발 시어머니 계시제. 그렇게 첫날밤 보내고 나니 오갈 데도 없고, 그렇게 한평생 살아온 거지요. 조금 시간이 지나보니까 총각이 아니라 전처도 있었고, 전처 사이에 자식도 줄줄이 있고, 나이도 저와 20년이나 차이가 나더라고요. 제가 이집으로 시집을 오고 난 다음에도 일년이나 더 있다가 영감의 전처 빈소가 밖으로 나갔니더.”
17살 어린 나이에 20년 연상인 최씨의 두 번째 부인으로 처녀 시집을 온 박월출씨는 시댁이 얼마나 가난한지 먹고 사는 일이 형편이 없었다고 전해준다.
“그게 어디 사람 사는 거니껴? 삼월 삼짇날에 이 집으로 들어왔는데 당장 먹을 양식거리가 없었어요. 쌀이 있어야 무엇을 해 먹지요. 그래도 다들 천하게 태어나고 커서 그런지 그렇게 못 먹고 못 입고 해도 나쁜 병 한번 걸리지 않고 살았어요. 제가 시집을 와서는 남의 소를 먹이기도 하고, 문중 소유의 논도 부치고 그러면서 먹고 살았지요. 그때는 농사도 왜 그렇게 안됐는지 모르겠어요. 논 한마지기에 쌀 한가마니도 안 나왔어요. 그 땅에 보리를 심어 놓으면 보리 꼬투리가 대여섯개도 안 달리니 말해서 무엇 하니껴? 아이고, 제가 이집으로 시집을 와서 마음고생, 몸 고생한 얘기는 하늘도 모르고 땅도 모르니더.”최용순씨는 토담집을 사고 난 다음에 돈을 들여서 세번이나 집수리를 했다고 말한다.
“이 집에서 살면서 수리만 세번이나 했습니다. 처음에 토담집을 사서 이사를 왔을 당시에는 방 두칸중에 한쪽방 흙벽이 당장 무너질 것 같이 기울어 있었어요. 혹시 애들을 재웠다가 흙벽이 쓰러져서 다치면 어쩌나 싶어서 행장대를 받쳐두고 애들은 딴방에 재웠지요. 한번은 집수리를 하는데 군청에서 못하도록 해서, 산에 가서 나무를 베어다가 남의 눈을 피해 가면서 밤에만 작업을 했던 적도 있어요. 인부를 몇 명 사서 밤에 집을 짓는데, 산에서 베어온 소나무를 누가 보면 신고라도 해서 잡혀갈까봐 생소나무에다 시커멓게 흙을 칠해가면서 그렇게 집을 지었지요. 말이 집수리지, 도로가에 접해있는 흙벽만 남겨두고, 몰래몰래 집을 새로 지은 거나 마찬가지였지요. 그때는 왜 세상 사는 게 그리도 빡빡했는지 모르겠니더.”
맏아들 중덕(53세. 인천시)씨의 결혼식에 참석한 최용순씨 부부와 하객들
부인 박월출씨, “없이 살다보니까, 여러 애들 키우면서 책보자기 하나 변변한 것으로 사주지 못했니더. 한번은 시장에 가서 밀지울을 샀는데, 봉두로 주지 않고 꼭지를 탁 쳐내고 주더라고요. 그냥 물을 많이 붓고 끓였지요.”9살에 아버지를 잃고 10살에 기성면 삼산리로 머슴살이를 가서 12년 동안 머슴을 살다가 22살에 첫 부인을 만나 결혼해서 살면서 자식 4남매를 낳고 난 다음에 부인과 사별하고, 37살에 20년 연하의 두번째 부인 박월출씨를 아내로 맞은 최용순씨는 박씨와의 사이에 6남매를 두었다.
“전처와 사별하고, 이 사람과 살면서 중덕(남. 53세. 인천시), 중여(여. 50세. 포항시), 복녀(여. 대구시. 47세), 중명(남. 46세. 청주시), 미숙(여. 43세. 포항시), 중염(남. 39세. 울진읍), 이렇게 3남3녀를 두었지요. 자식들이 많다 보니까 집안 일이 있을 때 쌍쌍이 한자리에 모이면 꽤나 시끌벅적합니다. 무엇보다 집사람이 고생 참 많이 했지요. 조상으로부터 조금 불려 받은 땅은 전처 자식들에게 다 내 주고, 맨 몸뚱어리만 달랑 나와서 그래도 이만큼 살아왔으니까요. 없이 사느라고 고생했고, 남이 낳은 자식들 다 키워서 살림 내주고, 집사람이 참 고생 많이 했어요.”
자식들 얘기가 나오자, 옆에서 귀가 어두운 최씨의 통역(?)을 맡아주던 부인 박월출씨가 다시 말을 거든다.
“아이고 살아오면서 겪은 마음고생, 몸 고생이야 어찌 다 말하겠소? 시집을 와서도 한참동안은 집안에 숟가락이 모자라서 옆집의 몽당 숟가락을 빌려서 사용했니더. 생각을 해보소. 꼬부라진 시어머니에, 전처 자식 있지, 제가 낳은 자식 있지, 우리 내외 있지. 밥을 먹을 때마다 10명이 넘는 사람들이 한자리에 들러 앉아야 하니까 정신이 하나도 없지요. 또 영감만 벌어서는 먹고 살기가 힘드니까, 저도 가까운 산은 물론이고 저 멀리 삼척 갈령재까지 가서 온산을 헤매고 다니면서 약초를 캐서 자식들 공부시키는데 보태고는 했지요. 여러 애들 키우면서 책보자기 하나 변변한 것으로 사주지 못했니더. 한번은 시장에 가서 밀을 빻고 체로 쳐서 남은 찌꺼라지인 밀지울(밀기울)을 샀는데, 그냥 봉두로 주면 좋을 텐데 꼭지를 탁 쳐내고 주더라고요. 거기에다 콩부스러기라도 있으면 함께 넣어서 양이라도 많게 해서 먹을 텐데, 아무것도 남아 있는 게 없으니 그냥 물을 많이 붓고 끓였지요. 자식들이 아홉명이나 있지, 시어머니 있지, 다 퍼주고 나니까 내 입에 들어올게 어디 있겠어요? 그까짓 밀지울 한되를 꼭지까지 쳐내고 사왔는데... 그냥 부엌에 앉아서 저 멀리 산만 바라보았지요. 뱃속의 창자는 맞붙어서 꼬르륵거리며 소리를 내도, 그저 배고픈 흉내 못 내고 그렇게 살았니더. 시어머니는 또 성질이 고약했어요. 영감이 6.25전쟁이 끝난 후에 소방대에 근무하다가 노무자로 끌려간 적이 있어요. 신랑이 없는 열달 동안 참 많이도 울었지요. 그때 제가 뱃속에 첫 얼라를 가지고 있었는데, 영감이 노무자로 끌려가면서 먹고 싶은 것 사먹으라면서 돈 50원을 주고 갔습니다. 돈 50원은 잊히지도 않아요. 그래도 영감이 노무자로 끌려가면서 주고 간 돈인데, 먹고 싶은 게 있다고 어째 덜컥 돈을 쓸 수 있겠어요? 헝겊으로 싸서 집에다 두었는데, 시어머니가 다 뒤져서 그 돈을 찾아 가지고 가더라고요. 그리고 시어머니는 제가 신랑과 한방에서 같이 자는 것을 그렇게 싫어했어요. 신랑하고 옆방에서 함께 자고 나오면 그날 아침상은 서너번도 더 새로 차려야 했어요. 그래서 자주 시어머니와 한방에서 잤지요. 시어머니와 한방에서 자고 일어나는 날은 아침상을 아무 말 없이 받아 잡수시고는 했거든요. 그런데 영감은 그런 답답한 속사정도 모르고, 자기가 나이가 많아서 한방에서 자기 싫어한다고 하면서 빨리 짐 싸들고 집으로 가라고 나무라고... 그래도 시어머니의 그런 고약한 성격을 있는 그대로 영감에게 얘기하지도 못하고 그렇게 살아왔니더. 요즘이야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이름만 다르지, 딸같이 예뻐하고 엄마같이 따르고 하는데, 그때는 왜 그렇게 살았는지 모르겠어요.”
자녀 결혼식에서 폐백을 받고 있는 최용순씨 부부
6.25전쟁 중에 국군 보국대로 끌려가서 군수물자를 지고 강원도 인제까지 올라갔다가 보름 만에 집으로 돌아와·····6.25 전쟁 후에는 소방대에 근무하다가 강원도 속초, 고성군 간성까지 노무자로 끌려가서 열달 동안 죽을 고생 겪어최용순씨는 6.25 전쟁 초기에 인민군이 울진을 점령했다가 후퇴할 당시에 울진을 수복한 국군의 보국대(保國隊)로 끌려갔던 이야기를 들려준다.
군수물자 이송 등의 중노동에 동원하고자 만들어진 보국대는 대부분 강제 동원 방식이었고, 어떤 때는 자기 자신과 가족의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자원하는 경우도 있었다.“6.25 전쟁 중에 국군이 울진에 들어왔는데 보국대로 끌려갔지요. 식량과 탄약 같은 짐을 잔뜩 짊어지고 근남을 출발해서 북면 덕구 매봉산 골짜기를 타고 계속 올라가서 설악산을 지나서 강원도 인제까지 올라갔습니다. 올라가는데 군데군데 인민군 시체들이 널부러져 있고 그 냄새는 어찌나 독하게 코를 찌르는지... 거의 산길을 타고 걸으니 신발은 금방 밑창이 닳고 마는데, 그럴 때면 인민군 시체의 신발을 벗겨서 신기도 하고, 그러면서 강원도 인제까지 올라갔지요. 아이고, 지금 같으면 그만한 짐 지고 그 먼 길을 걸어서 인제까지 갈 사람이 누가 있겠소? 짐 무게가 등때기를 계속 내리 누르니까 등짝은 아예 감각이 없고, 얼마나 죽을 고생을 했는지 모릅니다. 보국대로 끌려갔다가 보름 만에 살아서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지요.”
6.25전쟁 중에 국군 보국대로 끌려가서 강원도 인제까지 군수물자를 져 나르고 보름 만에 집으로 돌아온 최씨의 지독한 고생은 6.25 전쟁 후에도 이어진다.
최용순씨는 6.25전쟁이 끝난 후에 근남면에서 의용소방대 대원으로 근무하던 도중에 속초에 노무자로 끌려가서 10개월 동안 강제 노역을 당했던 일을 전해준다.
의용소방대는 6.25 전후의 혼란 속에서 각종 화재가 빈번히 발생하자 1954년부터 전국적으로 조직되었고, 1958년 소방법을 제정하면서 의용소방대 설치 규정이 마련된다.
최씨는 ‘의용소방대’가 아닌 ‘소방대’로만 기억하고 있다.
“지금 53살인 맏아들이 집사람 뱃속에 들어선지 두어 달 됐을 때부터 근남면 소방대 대원으로 근무했어요. 6.25전쟁이 휴전된 지 한 3년쯤 지난 뒤였지요. 월급을 받고 근무하는 것이 아니라, 동네의 청년들을 중심으로 자율적으로 구성된 소방대였어요. 군복을 입고, 명찰을 달고, 모자도 쓰고, 지금 경찰이 하는 일과 똑같은 일을 했습니다. 근무하는 날짜가 되면 총을 메고 근남 지서에서 보초도 섰고요. 어느 날 저녁에 근무를 나갔는데 경찰들이 무작정 속초로 끌고 가더라고요. 소방대원으로 있으면서 당장 먹고 사는 일이 바빠 근무때 자주 결석했는데, 그것이 눈 밖에 난 모양입니다. 뒤에 들으니까 그런 사람들 명단을 동네 구장이 지서에 올려서 속초로 끌려갔다고 하더라고요. 울진에서 끌려간 사람들이 아주 많았습니다. 속초로 끌려가니까 항구와 철도변 주위에 미군들이 잔뜩 천막을 치고 있는 군부대로 데려갔지요. 그곳에서 미군들의 군수물자인 쌀도 져서 나르고, 철조망도 나르고 그런 일들을 했어요. 그러다가 나중에는 강원도 고성군 간성이라는 곳까지 집수리를 한다고 파견을 나가고는 했지요. 노무자로 끌려가기 전에 기와도 잇고, 미장도 하고, 방구들도 놓고 하는 그런 기술로 벌어먹고 살았으니까 간성 집수리하는 곳으로 파견을 나간 거지요. 그때만 해도 간성에 있던 집들은 전부 다 지붕에 얇은 돌을 얹어서 죽 이어 놓았어요. 또 속초 시내에서도 집을 짓고 집수리도 했는데, 당시에 속초 인근 산을 불도저로 다 밀어내고 한창 집을 지을 때였습니다. 그때는 앞으로 미는 불도저만 있었지, 뒤로 땡기는 쪽배기(포클레인)는 없었어요. 집도 짓고 학교도 지었습니다. 그래도 저는 기술자니까 일을 할 때면 노무자들을 대여섯명씩 조무자로 붙여 주었지요. 그때는 집 한채를 지어주면 집주인들이 부대의 군인들 몰래 빨간 돈 5원씩을 손에 쥐어주고는 했어요. 그렇게 일하다가 오후 4시가 되면 차가 와서 부대로 다시 데리고 갔고, 매일 그렇게 일하면서 열달을 속초 군부대에서 보내고 나서야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어요. 그때 저와 함께 끌려갔던 근남 사람 중에서는 행곡리 구미마을에 아직까지 한사람이 살아있을 겁니다.”
여행지에서 친구들과 함께 한 최용순씨(사진 뒷줄 왼쪽)
“지게 가득히 흙을 지고 불영사 대웅전이나 망양정 지붕 꼭대기로 올라갈 때면 그 무게 때문에 사다리가 흔청흔청하고는 했지요”·····“기와 한 장을 잘못 이어 놓으면 대들보를 썩힐 수도 있어요”6.25전쟁이 끝난 후에는 농사를 지으면서 미장도 하고, 사방공사도 다니면서 돈을 벌어 가족을 부양했다는 최씨.
평생 지붕의 기와를 잇는 번와장으로, 건물에 흙이나 시멘트를 바르는 미장이로, 구들장 놓는 구들장이로 살아오면서 인근에서는 최용순이라는 이름만 대도 다들 알만한 기술 장이로 살아온 최씨는 17~18세쯤 됐을 무렵에 일본인 기술 장이로부터 공사판의 노동일을 처음 배우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기성면 삼산리에서 머슴살이를 하던 열일곱 여덟살 때 일본인 노가다(공사판 인부) 기술자가 삼산리 어느 과수원에서 집을 지었는데, 그때 그 양반의 디모도(보조자)를 하면서 처음으로 노가다 일을 배우기 시작했어요. 남달리 특별하게 배운 기술은 없지, 그렇다고 남들보다 더 배운 것도 없으니 자연히 평생 공사판에서 하는 일들이 직업이 된 거지요. 기와도 이어주고, 당시는 거의 모든 집이 흙벽이었는데, 흙벽에 미장도 하고 하면서 벌어서 먹고 살았어요. 울진국민학교도 짓고 울진중학교도 흙벽으로 지을 당시에 일하고... 울진중학교를 지을 때는 교실 열두칸을 미장했습니다.”
최씨는 기와를 잇는 번와장으로 일하면서 불영사 대웅보전과 망양정 기와를 잇는 일에도 직접 기술자로 참여했다.
예전 어느 때, 최용순씨가 자신의 집 구들장을 새로 놓기 위해 방고래를 파헤쳐 놓은 모습
“불영사의 대웅전 기와를 잇는 일도 하고 망양정 기와도 잇고 했습니다. 그 당시에 평해향교 기와도 제가 이었지요. 일반 가정집이나 다른 절 기와도 많이 이었고요. 기와를 이을 때는 중간 중간 흙으로 틈새를 막아야 하는데, 그러려면 먼저 물로 갠 흙을 지붕위로 올려야 하잖아요? 높은 지붕 위까지 사다리 하나를 걸쳐 놓고 지게로 흙을 져 올리는데, 다들 벌벌 떨면서 한두번 져 올리다가는 나중에는 도저히 안 되겠는지 밑에서 지붕 위로 흙을 던져 올리고는 했지요. 그게 제대로 지붕 위까지 올라갈 리가 있겠어요? 그럴 때는 사정없이 호통을 쳤지요. ‘이 사람들아, 이 까짓것도 사다리 타고 못 지고 올라온단 말인가?’ 하면서요. 지게에 흙을 가득히 지고 불영사 대웅전이나 망양정 지붕 꼭대기로 올라갈 때면 그 무게 때문에 사다리가 흔청흔청하고는 했지요. 지붕 위로 흙을 지게로 져 올릴 때는 싸리나무로 만든 보통 바소쿠리는 못써요. 바소쿠리에 담아서 나르면 흙이 바소쿠리에 엉겨 붙어서 부을 수가 없지요. 기와를 잇는 공사판에서는 이다(널빤지)로 만든 특별한 바소쿠리를 사용했습니다. 그래야 흙을 져 올리고 난 다음에 바닥으로 쏟아 붓기가 원 쉬우니까요. 처음 기와 잇는 일을 하는 사람들은 높은 지붕위에 올라가면 눈이 핑핑 돌지요.”한평생 막노동을 하면서 돈도 참 많이 벌었다는 최씨는 대부분 날품으로 일당을 받으면서 일했었다고 말한다.
“스무살 조금 넘어서부터 본격적으로 공사판을 돌아다녔는데, 처음 일을 할 때는 4원인가, 8원인가 그렇게 받았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평해향교에서 기와를 이을 때는 돈을 조금 더 받았던 기억도 있고요. 기와 한장을 잘못 이어 놓으면 대들보를 썩힐 수도 있기 때문에 큰 공사를 할 때는 온 정신을 일하는 데만 쏟아야 하지요. 불영사나 망양정 공사 같은 큰 공사도 전부 다 날품이었지, 일을 띠 가지고(청부를 맡아서)는 안했니더. 한시도 쉬지 않고 부지런히 공사판을 옮겨 다녔으니 돈도 많이 벌었지요. 농사를 지으면서 기와도 잇고, 미장도 하고, 사방공사를 다니면서 돌망태기도 만들어서 쌓고, 구들장도 놓아주고 하면서요.”
“성류산 꼭대기에서 나는 돌이 구들장 하기에는 딱 좋았어요”·····“구들장은 불목에는 두꺼운 돌을 놓고,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점점 두께가 얇은 돌을 써야 되지요”최용순씨는 자기 손으로 구들장(방구들)을 놓아준 집만 해도 족히 수백가구는 넘을 것이라고 전한다.
“구들장을 놓아주러 집집마다 많이도 다녔어요. 아마 수백집도 넘을 겁니다. 구들장은 이 뒤쪽 성류산 꼭대기에서 떼어다 썼어요. 성류산 꼭대기에서 나는 돌이 구들장 하기에는 딱 좋았으니까요. 구들장을 뜰 때면 정, 망치, 지렛대를 들고 두명이서 성류산 꼭대기까지 올라가지요. 올라가서 구들장이 될 만한 괜찮은 돌을 찾으면 망치로 정을 때려가면서 구멍을 대여섯 군데 만들고, 지렛대를 자꾸 이리저리 움직여가면서 적당한 크기로 떼어냅니다. 그리고는 굵은 나뭇가지 서너개를 바닥에 깔고 그 위에 구들장을 포개 얹어서 아래로 끌고 내려옵니다. 이제는 성류산 꼭대기에도 구들장 할 만한 돌은 없어요. 산에서 구들장을 떼어서 집짓는 곳으로 가져가면 적당한 크기별로 골라내서 아궁이 바로 다음의 불목에는 두꺼운 돌을 놓고 구들개자리와 구들고래, 고래개자리로 갈수록 점점 두께가 얇은 돌을 쓰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굴뚝개자리를 만들고 집밖에다 굴뚝을 세우지요. 기름보일러가 들어오기 전까지 제 손으로 직접 구들장을 깔아준 집만 해도 헤아릴 수가 없어요. 구들장을 잘못 놓으면 아궁이에 나무를 아무리 많이 때도 방이 따뜻해지지도 않고 굴뚝으로 연기도 잘 빠져 나가지 않는데, 그래도 제가 인근에서는 구들장을 제일 잘 놓는다고 알려졌었지요.”
구들장 놓던 시절을 회상하던 최씨는 웃으면서 성류산에서 구들장을 뗄 때 겪었던 이야기 한 토막을 들려준다.
“왜, 마을마다 자기에게 이익도 되지 않는데 괜히 남에게 시비 걸고 그런 사람들 꼭 한명씩은 있잖아요? 성류산 너머 마을에도 성질이 아주 나쁜 그런 사람이 한명 있었어요. 어떤 한날은 성류산에 올라가서 하루 종일 구들장 수십장을 다 떼서 내려올 준비를 하는데, 그 사람이 시비를 걸려고 산으로 올라오는 게 보였어요. 자기 산도 아닌데 괜히 그러는 거지요. 그 사람이 올라오는 것을 보고 하루 종일 땀흘려가면서 떼놓은 구들장 수십장을 아래 골짜기로 다 굴려 버렸습니다. 하도 없이 살다 보니까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그렇게 어려운 일을 겪었던 게 한두번이 아닙니다.”아흔여섯이 된 지금까지도 끌차(유모차)를 밀고 화목보일러에 지필 땔나무를 하기 위해 가까운 곳에서 나뭇가지나 작은 잡목을 베어 집으로 옮겨 온다는 최용순씨.
인터뷰 도중에 놀러온 백목수라는 이웃에게는 “이제는 톱이 안 들면 나무할 때 팔이 아파서 안돼”라며, “언제 시간 날 때 줄로 톱날을 좀 갈아주게”라며 부탁한다.
이제는 나이가 들어 허리도 휘어지고 힘도 없어서 직접 일을 할 수는 없지만, 한평생 손과 눈에 붙어서 따라다닌 기와를 잇는 일이나 미장을 바르는 일, 구들장을 놓는 일은 지금도 일머리가 훤하다며 웃는 최용순씨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