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면 쌍전1리 대봉전(大鳳田) 산골마을 남계유씨 이야기

기사입력 2010.01.19 13:00  
댓글 0
  • 카카오톡
  • 카카오 스토리로 보내기
  • 네이버 밴드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 플러스로 보내기
  • 기사내용 프린트
  • 기사내용 메일로 보내기
  • 기사 스크랩
  • 기사 내용 글자 크게
  • 기사 내용 글자 작게

 

고전인 채근담(菜根譚)에서는『交市人(교시인), 不如友山翁(불여우산옹)-시중 사람을 사귀는 것은 산골 노인을 벗함만 못하다.』고 설파한다.  

 

서면 쌍전1리(雙田一里) 대봉전(大鳳田) 마을은 저 뒤쪽으로 멀리 솟아 있는 진조산(眞鳥山) 아래 소나무를 비롯한 온갖 수목이 하늘과 어울려 늘 푸른빛으로 물들어 있는 전형적인 산골 마을이다.  

 

마을의 형세가 커다란 봉황새가 날아오르는 모양이라 하여 대봉전(大鳳田)이라는 마을 지명을 얻게 되었다는 이 마을은 지난 1960~70년대 마을 주민의 상당수를 차지하는 영양남씨(英陽南氏)를 주축으로 새마을운동을 활기차게 전개했던 곳으로 주목을 받았던 곳이기도 하다.  

 

사람들도 나무와 하늘을 닮고 사시사철 변함없이 졸졸거리며 말없이 흐르는 냇물을 닮아 인심이 순박하고, 공기 좋고 물이 좋아서 건강하게 생활하는 할아버지와 할머니, 아저씨와 아주머니들이 살고 있다.   

 

대봉전 마을 인근에는 덕거리(德巨里), 깨밭골(荏田谷), 진전(眞田), 대우치(大牛峠), 불근이(佛近), 너다리골, 복상터, 용소목이, 맹산터(孟山基), 심미골(深美谷) 등 그 이름도 정겨운 작은 동리들이 골짜기마다의 넉넉함으로 사람을 품고 있다. 

 

산중에는 모든 것이 일찍 찾아온다. 
어김없이 이 겨울도 일찍 찾아들어, 개울가 곳곳에는 흰 얼음이 옅은 두께를 견주어가며 크기를 부풀리고, 골짜기를 휘돌아 내몰리는 바람은 차기만 하다.  

 

쌀쌀한 겨울 한가운데를 걸어서 찾아간 곳, 서면 쌍전1리 대봉전 마을에서 주변에 펼쳐진 수려한 자연이 가져다주는 한가함을 즐기는 산중 생활에 익숙한 노인 한사람을 만날 수 있었다.  

 

사시사철 동삼에도 늘 푸른 자연을 그대로 닮아서 만면으로 웃음 짓는 모습이 온화하다 못해 천진스럽게까지 느껴지는 그런 노인 한사람을.  

 

남계유씨는 서면 쌍전1리 대봉전 마을이 풍수사상에서 말하는 군조조봉형(群鳥朝奉形)이라고 설명한다. 사진은 남씨의 집

 

그리 넉넉지 않은 산골마을에서 육남매 중 셋째아들로 태어나·····“집 지을 땅만 있으면 아무데나 집을 짓고 산에 불을 놓아서 산전을 해 먹었어요. 그때는 산에 불이 나도 아무도 신경을 안 썼어요.”

 

젊은 시절 군 생활을 제외하고는 단 한번도 타지로 나가 살지 않고 선조 때부터의 고향인 안태본(安胎本)에서 한평생 흙을 일구고 살아온 남계유(76세. 서면 쌍전1리 대봉전반)씨는 현재 살고 있는 쌍전1리 대봉전 마을에서 태어났다.  

 

“원래는 지금 이집에서 조금 올라간 곳에 있는 본가에서 태어났지요. 이집은 군대를 마친 후에 분가를 해서 내려왔고요. 여든여섯에 세상을 떠난 아버님은 ‘진’자에 ‘학’자를 사용했는데, 후에 ‘봉’자 ‘호’자로 개명했어요. 어머님은 ‘사’씨 성에 ‘분’자 ‘옥’자를 썼는데, 여든 정도 되어서 돌아가셨고요.”  

 

남씨는 그리 넉넉지 않은 산골마을에서 육남매가운데 셋째아들로 태어났다.
“부모님은 아래로 육남매를 낳았습니다. 아들 다섯에 딸을 하나 두었는데, 위로 계순, 계문 형님이 계셨는데 지금은 다 돌아가셨지요. 그리고 제 밑으로 계선(영주시), 계홍(울산시)이라는 남동생 둘과 계월(경남 밀양)이라는 여동생이 한명 있고요. 제일 맏이인 계순 형님은 이 마을에 있는 본가에서 살다가 한 20년 전에 아랫동네인 덕거리 밑의 복상터라는 곳에서 교통사고로 돌아가셨지요. 볼일을 마치고 버스를 타고 오다가 차가 절벽 밑으로 추락하는 대형 교통사고가 났는데, 그때 한 20여명이 유명을 달리했지요. 둘째 계문이 형님은 이 동네에서 함께 살다가 7년 전쯤에 세상을 떠났고요.”  

 

일제강점기에 태어난 남계유씨는 서면 쌍전1리는 무엇보다 교통이 참 불편했었다고 전해준다.
“그때는 교통편이 참 불편했지요. 일제 시대에는 36번 국도 신작로로 목탄차가 가끔씩 지나다닐 뿐이었습니다. 지난 60~70년대만 하더라도 서면 일원에서는 면장을 하던 이면장이라는 사람만 차를 한대 끌고 다녔습니다. 그렇다보니 산판을 오가는 제무시끼(제무시)라도 한대 만나면 학생이고 마을 사람들이고 너나 할 것 없이 차를 세워서 얻어 타고 다녔어요. 나무를 가득 실은 제무시끼 위에 위험하게 올라앉아서 타고 다녔는데, 지금도 생각해보면 아찔합니다. 울진에서 제무시끼가 나무를 부라 놓고(하차하고) 서면으로 올 때는 빈차로 오는데, 그럴 때면 화물칸에 사람들이 소복하게 타고 왔어요. 그것도 서로들 먼저 타려고 아우성이었습니다.”  

 

지금부터 50~60년 전에는 모두들 그랬듯이 남씨 또한 어릴 적에 먹고 사는 형편은 만만한 게 아니었다.  
“우리 집안은 증조할아버지 때부터 이 동네에서 터전을 일구고 살아왔어요. 산골 동네에서는 누구나 그랬듯이 땅을 일구어 농사를 지어 먹고 살았지요. 첩첩산중이라 농사를 지어먹을 땅이 많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예전에는 화전이라도 마음껏 부쳐 먹을 수 있었으니 잡곡을 먹더라도 굶어죽을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우리들은 화전을 산전이라고 불렀는데 불을 놓아서 땅을 개간하고 나면 미물(메밀)도 갈아먹고, 다른 잡곡도 갈아먹고, 산에 가서는 꿀밤(도토리)도 주워 먹고, 칠기(칡)도 캐먹고 그렇게 살았지요. 집 지을 땅만 있으면 아무데나 집을 짓고, 산에 불을 놓아서 산전을 해 먹었습니다. 그때는 산에 불이 나도 아무도 신경을 안 썼어요. 6.25 동란 후에는 그나마 산전을 하면서 옆 산으로 큰불이 옮겨 붙어도 아무도 산에 들어가지를 못했습니다. 전쟁 통에 떨어진 총알이며 포탄 같은 것이 불에 달아서 이쪽저쪽에서 펑펑 터지기가 일쑤였으니까요. 불이 나면 위험하니까 산으로 불을 끄러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피난을 다녔습니다. 이 지역은 골짜기마다 군인들과 인민군 사이에 교전이 많이 벌어졌던 지역이었으니까요. 그 당시에는 다들 큰 여유는 없이 겨우 그럭저럭 먹고 살았지요.”
  

 

노인회에 대한 공로로 이의근 전 경북도지사로부터 표창을 수여받는 남계유씨

 

“노상 나물만 무쳐서 밥 삼아서 먹다보니 해마다 콩 열댓 말씩을 장으로 담갔어요.”·····“남자들은 열댓 살을 넘으면 노상 지게가 붙어 다녔지요. 그 지게를 지고 나무도 하러 다니고 남의 품앗이도 다니고요. 바쁠 때는 여자들도 지게를 지고 다니기가 보통이었으니까요.”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산골마을에서, 그것도 수십 년 전의 먹고사는 고생이야 미루어 짐작하고도 남을 듯 하다.
“생활이야 항상 보잘것이 없었지요. 그때는 한집안에 딸린 식구들이 대개 열대여섯씩 됐습니다. 우리 집도 부모님을 포함해서 형님들이 결혼을 했으니 밑으로 어린애들이 한둘이나 서넛씩 딸리지, 장가나 시집 못간 식구들도 다 함께 모여 살았으니까요. 집에 딸린 밭이 조금 있기는 했지만 그 당시에는 겨우 퇴비나 넣을 정도였으니 농사도 그렇게 안 될 수가 없었어요. 비료 같은 건 아예 없었고요. 우리 집은 논이 대여섯 마지기에 산전도 해서 먹고 살았는데, 산골짜기에 조금씩 흩어져 있는 논이라는 것이 계곡에서 나는 찬물 때문에 물고가 나서 늘 농사가 시원찮았습니다. 그리고 요새같이 모를 할 때 편리한 비니루(비닐) 같은 것도 없었고, 항상 물모자리만 해댔으니 모도 늦게 심어야 했지요. 조상 제사 때나 되어야 쌀밥을 얻어먹을 수 있었으니, 누구네집 제사다 하면 그 이튿날에 친척도 모이고 이웃사람도 모이고 해서 제사를 나누어 먹었습니다. 그래도 이웃 간의 인정은 먹고 사는 게 넘쳐나는 요즘보다 훨씬 더 좋았던 시절이었지요. 당시에는 북해도라고 일본에서 들여온 나락 종자가 있었습니다. 북해도는 추운 곳에서도 잘 자라는 종자였는데, 이상하게 이 동네에서는 모도 잘 안서고 또 늦게 심어야했으니 수확량이 보잘것없었어요. 이곳에서는 다른 곳보다 늦은 유월 현충일이나 돼서 모를 심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지요.”  

 

부족한 논밭전지를 일구는 고단한 중노동을 하려면 어떤 음식으로라도 속을 채워야했던 시절이었지만, 요즘은 고급음식이라고 찾아다니는 칠기떡, 취떡, 쑥떡 같은 것이 사실은 속을 훑는 음식이었다고 남씨는 말한다.  

 

“온가족이 달라붙어서 산전을 힘들게 일구어 감자나 고구마를 심어놓으면 이번에는 또 산돼지가 그것을 다 파두져서(파헤쳐서) 못쓰게 만들지요. 그러니까 수확할 때가 되면 밭 주변에 작은 움막을 짓고 생활하면서 밤낮으로 우우 소리를 질러서 산돼지를 쫓아야 했습니다. 밤이 되면 이 골짜기 저 골짜기에서 산돼지를 쫓으면서 내지르는 소리가 우우 나고는 했어요. 그래도 감자를 갈아서 주로 주식을 했고, 무꾸(무우)라도 갈아 키워서 먹고 살았으니까 아주 죽을 정도는 아니었지요. 식구들 배는 대부분 나물로 채웠습니다. 노상 나물만 무쳐서 밥 삼아서 먹다보니 해마다 콩 열댓 말씩을 장으로 담갔어요. 된장으로 나물을 무쳐서 항상 배를 채웠고, 죽도 더러 해먹었지요. 칠기도 캐먹고 봄에 소나무에 물이 오를 때면 송구(송기)도 더러 해먹고는 했어요. 송구를 벗겨서는 절구에다 오래 찧어서 보드랍게 만들고 난 다음에 갈기(가루)를 좀 넣어서 떡을 해서 먹고는 했는데, 산골이라서 쌀 갈기는 귀하니까 감자 갈기든지 아무 갈기나 넣어서 송구떡을 해먹었습니다. 그때는 먹고 사는데 음식의 질은 전혀 중요하지 않았고, 식구가 많으니까 어떻게 하면 양을 늘릴 수 있을까만 고민 했었지요. 산에서 얻는 모든 것은 갈기만 넣어서 버무리면 먹을 수 있었습니다. 송구, 칠기, 쑥, 취나물 그런 것을 주로 먹었는데, 칠기는 나무망치로 두들겨서 물에다 빨게 되면 보드라운 갈기가 가라앉게 되지요. 질 좋은 하얀 갈기가 앉을 때도 있고, 약간 질이 떨어지는 새카만 갈기가 앉기도 합니다. 맛은 조금 ‘쓰검’합니다마는 그래도 먹을 만했던 게 칠기떡이었고요. 취나물도 갈기를 묻혀서 취떡을 해먹었어요. 쑥떡이나 취떡은 그중에서도 고급음식이었지요. 요즘은 그런 음식을 약 삼아서 서로 찾아다니면서 먹으려고 하지만, 사실은 그런 음식은 사람 속을 훑는 음식입니다. 그래도 당장 배고픈 것은 면해야하니까 속을 훑는 그런 음식을 해먹고, 집집마다 된장을 많이 해놓고 온갖 나물을 무쳐 먹고는 했어요. 요새야 돼지고기같이 기름기 있는 음식을 잘 먹고 하니까, 몸에 좋다면서 그런 음식을 먹어도 소화를 시킬 수 있는 거지, 그때는 일년 내내 기름기 있는 음식을 구경하기가 힘들었으니 속을 훑은 거지요. 그래도 하루 종일 일을 해야 하니 무슨 음식이라도 만들어서 배를 채워야 했고, 식기에 그득하게 먹을 것을 채워서 먹더라도 끈기가 없어서 한나절 일을 하기가 늘 힘에 겹기만 했습니다. 요즘 같으면 그렇게 고봉으로 수북이 음식을 담아주면 하루에도 다 못 먹을 텐데요. 지금이야 밥 말고도 부식이 워낙 좋으니까요. 당시에 부식이라고는 산에서 뜯어온 나물밖에 없던 시절이었어요.”   

 

지나간 시절의 산골생활을 얘기하던 남계유씨는 그나마 없이 사는 사람들은 남의 집에서 내다버린 감자껍질로 연명할 정도였다며 예전 기억을 떠올린다.

“조금이라도 있는 사람들이야 나물이나 죽이라도 먹고 살았지만 아주 없이 사는 사람들은 다른 집에서 깎아서 내다버린 감자껍질도 주워가서 다른 음식에다 보태서 양을 늘릴 때였으니까, 참 어렵던 시절이었지요. 남자들은 열댓 살을 넘으면 노상 지게가 붙어 다녔습니다. 그 지게를 지고 나무도 하러 다니고 남의 품앗이도 다녔고, 바쁠 때는 여자들도 지게를 지고 다니기가 보통이었으니까요. 산골마을에서는 밤이 긴 겨울철에 먼 길을 걸어서라도 이웃으로 자주 놀러 다녔어요. 남의 집에 놀러 가면 장작 아궁이에 방바닥은 따뜻하니까 멍석을 덮어도 잠은 편하게 잤고요. 놀러가서 입이 심심할 때면 ‘빙무꾸(빙무우)’라도 하나 주면 아주 맛있게 먹을 텐데, 그것조차 얻어먹기가 어렵던 때였습니다. 빙무꾸는 밑이 잘록하고 통통하게 생긴 중국산 품종인데, 지금은 중국에서도 구하기가 힘들다고 하더라고요. 빙무꾸를 씹어 먹으면 단맛과 시원한 맛이 함께 우러나는데 아주 기가 막히지요.”  

 

“울진 오일장을 보려면 꼬박 이틀이 걸렸고, 장에 한번 갔다 오면 다리가 부르트고 아파서 그 다음날도 쉬느라고 일을 못했습니다.”·····“산골에서는 제사를 지낼 때 제수음식으로 생선과 산에서 잡은 토끼나 꿩 같은 육고기를 주로 썼지요.”

남계유씨 부친이 지은 글을 엮은 ‘남봉암시문집(南鳳菴詩文集)’. ‘봉암대시문집 (鳳菴臺詩文集)’과 합본이다
차가 없던 당시에 서면 쌍전1리 대봉전 마을에서 울진 오일장을 한번 보려면 걸어서 이틀이 소요됐었다.
“울진 장을 보려면 가는데 하루, 되돌아오는데 다시 하루, 꼬박 이틀이 걸렸어요. 여기서 울진까지는 산길로 80리길입니다. 버스도 없지요, 다른 차도 없던 때였습니다. 일제 해방 무렵에 이 앞에 36번 국도라 불리는 신작로가 뚫리기는 했지만, 막상 지나다니는 차는 구경하기 힘들었지요. 울진장을 가려면 36번 신작로를 타고 가기도 하고, 십이령길을 타고 가기도 했습니다. 36번 국도로 가면 대흥리를 지나서 재를 넘고, 상토일과 하토일로 연결되는 가진재를 넘어서 울진장에 도착했습니다. 그리고 십이령길로 가기도 했는데, 북면 두천을 지나서 죽변 화성리쯤에 친척이라도 있으면 그곳에서 하룻밤 묵고 울진장을 가기도 하고, 또 죽변장을 보러 가기도 했어요. 꽁치 같은 해물을 살 일이 있으면 주로 죽변장을 보러 갔지요. 이곳에서는 울진장도 보고 죽변장도 보고 했습니다. 발이 빠른 사람이라도 울진장을 보고 오는데 당일치기는 힘들었어요. 하루는 장보러 가고 또 하루는 장보고 오는데, 장에 한번 갔다 오면 다리가 부르트고 아파서 그 다음날도 쉬느라고 일을 못했습니다. 80리 산길을 빈걸(아무것도 없이)로 걸어가는 것도 아니고, 장을 보러 가는데 콩이라도 좀 지고 가야 팔아서 돈을 만들 수 있었으니까요. 이 산중에 돈 될게 뭐가 있었겠어요? 그러니 콩이든지 산나물이든지 뭐라도 만들어 가야 장에 가서 돈으로 바꾸어 꽁치 한두름이라도 사서 집으로 돌아오지요. 왕복 160리나 되는 산길을 짐을 지거나 이고 오가야 하는데 누가 당일치기를 하겠습니까? 무거운 장작이나 숯은 팔러 다니지 않았어요. 너무 멀어서 그런 걸 지고 팔러 다니려면 골탕을 먹었겠지요. 울진장에 나무는 주로 신림이나 행곡 같이 울진읍내에서 가까운 곳이나 조금 멀리는 대흥리 같은 곳에서까지 팔러 다녔습니다.”

 

울진장이나 죽변장을 오가기 힘든 사람들은 산골 동네를 찾아다니는 도부장수들로부터 어물을 구입해서 사용했다고 남씨는 말한다.
“울진이나 죽변 쪽에 친척이 단 한집도 없는 사람들은 울진장에 가는 걸 포기하고 ‘도부(到付)’들에게서 생선 같은 것을 사서 쓰고는 했습니다. 장을 안볼 수는 없었지요. 아무리 없는 집이라도 일년에 한두번 이상은 조상 제사를 모셔야 했는데, 생선 한마리도 없이 맨밥만 올려놓고 제사를 지낼 수는 없지 않습니까? 산골에서는 제사를 지낼 때 제수음식으로 생선과 산에서 잡은 토끼나 꿩 같은 육고기를 주로 썼지요. 예전에는 도부장수라고 생선 같은 것을 머리에 이고 깊은 산골의 골짜기를 찾아다니는 장사꾼들이 있었습니다. 보통 나이가 든 여자들이 많이 했는데, 간혹 지게에 어물을 지고 다니는 남자 도부들도 있었고요. 도부장수들은 주로 생선을 다라이(대야)에 가득히 이고 다녔는데, 촌에 돈이 없으니 생선을 사고 콩이나 팥 같은 곡물을 주면 그것을 이고 가서는 시장에 내다 팔고, 또 다시 생선을 사서 이 동네 저 동네 산골 마을을 돌아다니고는 했어요. 여자가 다라이를 이고 도부장사를 하다보니까 무거운 생선보다는 마른 가자미나 그런 것을 보통 가지고 다녔지요. 바쁜 촌사람들은 시장에 가는 일도 만만하지 않지, 그렇다보니까 도부장수가 한참동안 마을에 나타나지 않으면 밥상에서 생선 한 마리도 구경하기 힘들 때가 많았습니다. 도부장수들은 혼자서 다니는 일이 많았는데, 이 마을 저 마을 돌아다니다가 날이 저물면 안면이 있는 집에 들어가서 자고 아침 일찍 다시 떠나고는 했어요. 그러다보니 마을에 자주 나타나는 도부장수들은 마을사람들과도 흉허물 없이 트고 지내는 사이가 되기도 했고요.”  

 

남계유씨의 부친 남봉호씨가 대봉전 마을의 빼어난 명소로 명명한 봉암팔경(鳳菴八景) 중 일부

 

“설이사냥을 나가서 산돼지를 잡는 날에는 모처럼만에 온 동네에서 고기 냄새를 맡을 수 있었지요.”·····“불과 삼십년 전만 해도 호랑이를 가끔씩은 볼 수 있었고 또 호랑이를 봤다는 얘기를 심심찮게 전해 들을 수 있었습니다.”

남계유씨는 사방이 산으로 빼곡히 둘러싸인 산골마을에서는 겨울철 눈이라도 내리면 산돼지 사냥이 성행했었다고 기억을 떠올린다.
“원래 산중에는 눈이 많이 내리지요. 겨울에 눈이 많이 내려 무릎까지 푹푹 빠지는 날이면 동네 장정들이 집집마다 한두 자루씩 보관하고 있던 창을 앞세우고 산돼지 사냥을 떠납니다. 그것을 눈설(雪)자를 써서 ‘설이사냥’이라고 불렀지요. 한번 설이사냥을 나가면 산돼지나 토끼를 여러 마리씩 잡았어요. 산돼지는 매우 난폭한 짐승이어서 사냥을 할 때 대단히 조심해야 했는데, 처음에 창질을 잘못해서 급소를 비켜 나가게 되면 도리어 공격하던 사람이 위험에 처하기가 일쑤였습니다. 그래서 설이사냥을 가서 산돼지를 사냥하다보면 사람들이 다치기도 하고 죽기도 더러 죽었지요. 눈이 무릎까지 빠질 때 설이사냥을 나가면 설피를 신었는데, 설피는 산에 흔한 다래덤불이나 노간주나무 같은 것으로 만들어서 신었어요. 그런데 눈에 깊이 빠지지 않으려고 설피를 신으면 사람도 함께 둔해져서 산돼지의 급소를 한방에 찌르지 못하면 사람이 오히려 무게중심을 잃고 눈 속에 빠지거나 넘어지고는 했습니다. 그럴 때면 산돼지가 무시무시하게 생긴 어금니로 공격을 해오지요. 이른 아침을 먹고 산돼지 사냥을 나가서 하루 종일 이산저산을 헤매다가 배가 고프면 금방 잡은 산돼지를 칼로 잘라서 그냥 날고기를 먹기도 하고 그랬는데, 산돼지는 생고기를 먹어도 탈이 나지 않습니다. 산돼지 사냥은 주로 당일치기로 했는데, 그 추운 한겨울에 산에서 날밤을 지새울 수는 없는 노릇이었지요. 설이사냥을 나가서 산돼지를 잡는 날에는 모처럼만에 온 동네에서 고기 냄새를 맡을 수 있었습니다.”  

 

산골동네에 눈이 많이 내렸을 때는 창을 들고 설이사냥을 나가지만, 눈이 없을 때는 ‘양투’나 ‘목로(올가미)’를 놓아서 토끼, 꿩, 산돼지를 잡았다. 

“겨울철 눈이 없을 때는 목로를 놓고 양투를 새워서 산돼지나 토끼, 꽁(꿩), 오소루(오소리)를 잡았습니다. 목로는 철사로 올가미를 만들어서 짐승이 그곳에 걸리면 모가지가 조여서 죽게 되는데, 요즘과는 달리 옛날에는 철사가 귀하다보니까 와이어 줄을 하나씩 풀어서 그것으로 목로를 만들었고, 그것으로 산돼지까지 잡았습니다. 양투는 짐승들이 다니는 길목에 나무를 베어서 양쪽에 말목을 세우고 또 다른 나무 하나는 베어서 위에 받쳐서 만드는 사냥도구입니다. 양투는 지나가는 짐승이 아래의 줄을 건드리면 찌지 캐서(깔려서) 죽도록 하는 덫이지요. 그리고 아주 큰 짐승은 ‘바젓(바자)’이라는 덫으로 잡는데, 바젓은 나무를 브이자로 만들고 위에 짐을 싣고 괴어 놓았다가 아래의 함정을 건드리면 그 무게에 깔려 죽도록 하는 것이지요. 노루나 돼지 같은 짐승을 잡을 때 그 짐승들이 즐겨 먹는 옥수수나 깨보시(깻가루) 같은걸 위에 매달아서 유혹했습니다. 어른들이 하시는 말씀이 훨씬 옛날에는 양투나 바젓으로 호랑이까지 잡았었다고 합니다. 호랑이를 유혹하는 먹이는 중간 크기의 중개를 잡아서 먹이로 매달아두었다고 하고요. 그렇게 잡은 짐승 고기는 조상 제사를 모실 때 귀한 제물로 쓰이고는 했습니다.”
  

산중에서 나고 자란 남계유씨는 젊은 시절 호랑이를 직접 본적이 있다고 전한다.
“전두환 대통령이 36번 국도를 포장한다 어쩐다 하던 그 시절에 봉화 춘양장을 보고 마을 사람 네명이 걸어서 함께 집으로 돌아오는데, 어두워서 옥방 점빵에서 후라시(후레쉬)를 하나 사 가지고 길을 밝히며 걷고 있었지요. 그런데 너다리골을 지날 때 저쪽 언덕 위 오백미터도 넘는 듯 한 곳에서 시퍼런 불덩이가 움직이는 것이 보였어요. 아마도 후레쉬 불빛을 보고 따라오는 것이 아닌가 싶었습니다. 우리는 걸어가고 호랑이는 소나무 부대기(북데기)를 안고서 언덕위에서 내려다보는데, 얼마나 오싹한 기분이 들었는지 모릅니다. 그래도 사람들이 여럿이 걸어가는데 호랑이라도 설마 어찌하겠나 싶더라고요. 크기는 아주 큰개 정도 되는데 쪼그리고 앉아 있었지요. 그때 나는 함께 걸어가는 동네 사람들도 보라고 후레쉬를 그쪽으로 비추었는데 나중에 불어보니 아무도 못 봤다고 하더라고요. 분명히 토범이라고 부르는 ‘개갈가지’나 ‘시라소니(스라소니)’는 아니었습니다. 산골에서 살다보니 그런 것은 확실하게 구별할 수 있지요. 그 당시에 현재 통고산 휴양림이 있는 심미골에 살던 주치달씨라는 영감님은 요 아랫동네 덕거리에 놀러왔다가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호랑이를 자주 봤다고 했어요. 한번은 거적으로 대충 입구를 둘러막은 변소에 앉아서 볼일을 보다가 앞에 나타난 호랑이를 보고 기겁을 해서 그대로 주저앉았다는 얘기도 들었고요. 지금이야 호랑이가 멸종되었다고 하지만, 불과 삼십년 전만 해도 호랑이를 가끔씩은 볼 수 있었고 또 호랑이를 봤다는 얘기를 심심찮게 전해 들을 수 있었지요.”        

 

예전에는 짚신도 직접 만들어 신었다는 남계유씨는 심심해서 근래에 삼았다면서 손수 만든 짚신 한 켤레를 보여준다.
“그전에는 ‘미투(미투리)’라고 삼(대마)을 재료로 신발을 만들어 신었는데, 짚신과 모양은 비슷했지만 짚신보다는 훨씬 더 고급스러웠고요. 일정 때는 ‘찌까다비’라고 뒤쪽으로 끼워서 신는 신발이 있었습니다. 가끔은 농구화도 사서 신었고요. 그런 건 귀하니까 최대한 아껴서 신었지요. 그러나 촌에 살던 사람들은 그런 신발을 신는다는 것을 엄두도 못 냈습니다. 더운 여름이나 추운 겨울이나 맨날 짚신만 신고 다녔지요. 짚신은 겨울에 농사가 한가할 때 한꺼번에 삼사십 켤레를 신어놨다가 필요할 때마다 꺼내서 신었습니다. 얼마 전에는 하도 심심해서 겨울철에 화장실을 가거나 아궁이에 넣을 장작을 나를 때나, 부엌을 들락거릴 때 신는다고 짚신 한 켤레를 삼아놨어요. 고추 모종을 매는 흔한 나이론끈으로 삼았는데 여간 질기지 않습니다. 겨울에 오래 신고 있으면 발이 시리겠지만 잠깐씩 볼일 보러 갈 때면 우선은 신고 벗기가 편하니까 여간 좋은 게 아니지요. 고무신보다 훨씬 좋지요. 예전에야 짚으로 짚신을 삼았었지만 요즘이야 짚신 삼을 질긴 나이론끈 같은 재료가 주변에 쌨잖아요? 한두 켤레 삼아 놓으면 산골에서 집안에서 왔다갔다 할 적에 편하게 신고 다닐 수 있지요. 저렇게 한 켤레 삼는 데는 시간도 얼마 걸리지 않고 끈을 가늘게 찢어서 삼으면 아주 곱게도 삼을 수 있지요.”

 

“장가를 가던 날은 가마를 타고 가다가 오르막을 만나면 잠시 내려서 걷고, 또 다시 가마에 올라타고 가고는 했는데, 처갓집에 들어갈 때는 꼭 가마를 타고 들어가야 했어요.”·····“할마이는 환갑도 못보고 세상을 떠났어요. 평생 산골짜기에서 농사만 죽어라고 지으면서 고생만 했는데, 일년만 더 참고 있다가 환갑이나 해먹고 떠나지.”

남계유씨는 17살에 중매를 통해 소광리에 살던 한살 연상의 박연환씨를 배필로 맞아들인다

젊은 시절 부인 박연환씨와 함께
일제강점기이던 1933년에 태어난 남계유씨는 현동고등공민학교를 거쳐 울진 월변에 있던 고등공민학교를 마쳤다고 전한다.
“일제 시대에 우리 동네에는 ‘회의실’이라고 있었고, 그곳에서 큰형님이 일본어를 가르쳤는데 그때 일본어를 조금 배웠습니다. 이 마을에서는 30리 떨어진 삼근까지 가서 학교를 다녀야했는데 하숙을 하지 않으면 안 될 지경이었으니 학교를 다닌다는 건 사실 어려웠어요. 6.25전쟁이 끝나고 난 다음에는 현동에 있던 고등공민학교를 사촌들과 자취를 하면서 한 2년 다녔고, 그러다가 울진 월변에 있는 고등공민학교를 또 1년 더 다니고 졸업을 했습니다. 어릴 때는 아버지로부터 한문을 조금 배웠는데 명심보감을 떼고 통감을 2권까지 읽었어요. ‘영’자 ‘조’자를 쓰시는 할아버지는 이 마을에서 훈장을 지냈습니다. 아버지는 할아버지로부터 들은 풍월로 글을 했는데, 제대로 배운 것도 아니었는데 글도 잘 지었고 또 잘 썼습니다. 박정희 대통령 때는 성균관에 한문으로 글을 지어 올려서 성균관 진사를 하기도 했을 정도니까요. 할아버지는 훈장을 지냈지만 글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은데, 오히려 아버지는 호를 딴 ‘남봉암시문집(南鳳菴詩文集)’도 남아 있고 그렇습니다. 또 전국적으로 시를 지어서 서로가 주고받던 모임인 ‘만향계’가 있었는데 그 분들의 시를 모은 ‘만향계시집’도 남아 있어요. 아버지는 정식으로 선생도 없었는데 한시도 잘 지었고 풍수도 잘 보셨던 분이지요. 이 동네에는 아버님이 대봉전 마을의 빼어난 명소로 명명하여 직접 쓰고 새겼다는 봉암팔경(鳳菴八景)이 남아 있습니다. 봉암대(鳳菴臺), 탁영담(濯纓潭), 세족반(洗足磐), 은폭포(銀瀑布), 병치잠(屛峙岑), 앵소령(鶯巢嶺), 휴게정(休憩亭), 차강산(此江山) 이렇게 여덟 곳을 봉암팔경이라고 하는데, 그 당시를 살았던 분의 멋과 여유를 알 수 있지요. 형님들은 겨우 국민학교만 졸업하는 정도였으니 그만큼 다들 먹고 사는 일이 버거운 시절이었습니다. 그래도 형님은 한때 대한청년단 총무일도 맡아서 동분서주했던 분이었지요. 위로 두 형님은 평생 이곳에서 살다가 돌아가셨고, 저도 이곳에서 죽 살아오고 있지요. 밑의 동생들은 다들 고향을 떠나 밖에 나가서 살면서 나름대로 일가를 이루었고요.”  

 

남계유씨는 17살에 중매를 통해 소광리에 살던 한살 연상의 박연환씨를 배필로 맞아들인다.
“17살 되던 해에 이웃에 살던 마을 어른의 중매로 결혼했습니다. 중매를 섰던 그 어른이야 벌써 돌아가셨지요. 그 시절이야 남자들도 결혼하는 것이 부모님의 명령대로 움직일 때였어요. 이웃 어른이 중매를 서고 나면 우리 집안의 어른 가운데 한 사람이 그 집안을 살펴보고 와서 결혼을 시킬지 말지가 결정되었습니다. 오죽했으면 장가가던 날에 처갓집이 어디 있는지 처음 알았겠어요? 처갓집이 있는 소광 2리는 요 앞의 웃터골 재를 넘어서 한 8킬로쯤 되는데 걸어서 두어 시간이 걸리는 길입니다. 장가를 가던 날은 가마를 타고 가다가 오르막을 만나면 잠시 내려서 걷고, 또 다시 가마에 올라타고 가고는 했는데, 그때 풍습이 처갓집에 들어갈 때는 꼭 가마를 타고 들어가야만 했어요. 처가에 가서 구식으로 혼례를 올리고 난 다음에 신부를 데리고 본가로 돌아왔지요. 처갓집과 신부 얼굴을 그날 처음 구경하게된 것입니다. 6.26 전쟁 중에 결혼을 했는데, 그때가 상당히 어수선할 때였어요. 우리 마을은 덜했지만 처갓집이 있는 소광 2리쪽은 공비나 빨갱이들이 아지트를 파고 활동하고 있었으니, 다 큰 처자를 집안에 두고 있기가 무서운 처가 쪽에서 딸을 서둘러 결혼시켰다고 봐야지요.”  

 

남씨는 부인 박연환씨와의 사이에 3남3녀를 두었다.
“집에 할마이와 아들 셋에 딸 셋을 낳았어요. 인화(남. 울진읍), 춘예(여. 강원 임원), 상요(남. 대구), 춘옥(여. 울산시), 추월(여. 대구시), 상익(남. 안동시) 이렇게 6남매지요. 60~70년대에 정부에서 한창 가족계획을 하라고 했을 때는 자식이 많아서 남들 보기도 남사시럽더니(남우세스럽더니) 다들 키워 놓으니 먹고 살지요. 산골 촌에서 키우다보니 제대로 먹이고 입히지 못하고, 공부도 남만큼 못 시키면서 그렇게 살았니더. 집에 할마이는 예순살에 세상을 떠났어요. 그때 내 나이가 쉰아홉이었는데, 할마이는 환갑도 못보고 세상을 떠난 거지요. 평생 산골짜기에서 농사만 죽어라고 지으면서 고생만 했는데... 일년만 더 참고 있다가 환갑이나 해먹고 떠나지. 그때에 비하면 지금이야 비니루가 잘 나오니까 지심(잡초) 맬 걱정도 덜하고 농사짓기가 얼마나 쉽니껴?”   

 

6.25전쟁 당시에 사살된 군인, 경찰, 민간인을 추모하기 위해 시멘트로 만든 충혼비
인적이 드물고 민가가 군데군데 흩어져 있던 산골마을인 대봉전이지만 6.25전쟁은 혹독한 아픔을 남기고 지나갔다.
“6.25전쟁 때 이 마을은 그렇게 부산스럽지는 않았어요. 피난은 인민군이 퇴북할 당시에 자주 다녔지요. 당시에는 대개 낮에는 인민군이나 공비를 피해서 산으로 올라가서 숨어 있다가 밤이 되면 집으로 내려와서 잠을 자고, 다시 날이 밝으면 산으로 피난을 들어가고를 반복했습니다. 당장 먹을 곡식을 논밭에 심어놨고 집에서 기르는 가축도 있다 보니 전쟁 중이라도 어디 먼 곳으로 피난을 떠날 엄두는 다들 내지 못했습니다. 퇴북하는 인민군 후퇴병들이 큰길로는 못 움직이니까 주민들은 대부분 큰길을 접하고 있는 외진 곳으로 피해 다녔지요. 인민군이 퇴북할 당시에는 이 마을에도 큰 아픔이 있었습니다. 이 마을에 살던 주민들 가운데 네사람이 후퇴하는 인민군과 맞닥뜨렸는데, 그중에 세사람이 인민군에게 붙들려서 사살되고 한명이 겨우 도망을 쳐서 살아남았어요. 그때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과 6.25전쟁 때 죽은 군인들과 경찰을 기리는 추모비가 저 위쪽에 있는데, 당시에 시멘트로 급하게 만들다보니 이제는 그분들의 이름 석자도 희미해져 버렸습니다.”      

 

“우리 삼형제가 군대에 가 있는 동안 집에는 부모님과 며느리 세명이 고만고만한 애들을 키우면서 한집에서 길쌈도 하고, 소죽도 끓이고, 서숙이나 나락도 디딜방아로 찧고, 또 땔나무도 하러 다니고, 그렇게 고생을 하고 있었습니다.”·····“봄이나 여름에 베어낸 소나무 뿌리에서는 봉양이 잘 생겨나지 않아요. 봉양은 죽은 소나무 뿌리에서만 생기는데, 그때만 해도 곳곳에서 산판을 많이 할 때였으니까 봉양 생산도 많았지요.”

남계유씨는 결혼하고 몇 년 뒤에 군대에 입대해서 군 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결혼하고 몇 년이 지나지 않아서 21살인가 휴전 되던 해에 군대에 갔어요. 저는 제주도 훈련소에 입소를 했지요. 그곳에서 16주 동안 기초적인 군사훈련을 받고 그나마 고등공민학교라도 나왔다고 교관단에 배속되어 훈련병들을 지도하는 조교생활을 5개월 정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제주도 훈련소가 없어지면서 논산 훈련소로 옮겨서 신병연대 22연대에서 또 조교생활을 했지요. 그 후에는 후반기 교관단에 근무했고요. 군 생활을 45개월 동안 하고 제대를 했지요. 전쟁 동안에는 군 생활 기간이 50개월이었는데 그나마 휴전이 되고 난 뒤라고 45개월로 단축되었던 겁니다. 그 당시에는 제 위의 형님 두분도 군 생활을 하고 있었으니까, 집에는 부모님과 며느리 세명이 고만고만한 애들을 키우면서 한집에서 길쌈도 하고 소죽도 끓이고, 서숙이나 나락도 디딜방아로 찧고 또 땔나무도 하러 다니고 그렇게 고생을 하고 있었습니다. 집안에서 한창 일해야 될 장정 셋이 동시에 군에 가서 생활하고 있었으니 집에 남아 있던 여자들이야 오죽 고생이 심했겠습니까만, 그때는 또 너나없이 다들 그렇게 빡빡하게 살 때기도 했습니다.”  

 

17살에 결혼을 하고 난 다음 21살에 군에 입대해서 3년 9개월 만에 제대를 해서 고향 쌍전리 대봉전 마을로 돌아온 남계유씨는 여전히 산골 생활을 이어갔다.
“군을 제대하고 집에 돌아와서는 여전히 변함없이 산골마을에서 농사도 짓고 산전도 일구어 씨 뿌리고 수확을 해서 그렇게 먹고 살았습니다. 옛날 산골농가에서는 소만큼 큰 재산이 없었어요. 농사를 짓는데 우선은 소를 안 먹이면 안 되었습니다. 소가 있어야 논밭을 가는데 쟁기도 끌 수 있었고, 소에게 풀을 먹여서 그 분뇨로 거름을 생산해서 논밭을 걸굴수 있었고, 새끼를 낳으면 우시장에 내다 팔아서 목돈을 만들고 그랬으니까요. 촌에서야 소라도 팔아야 목돈이 되지, 그것 말고는 돈 될게 없었습니다. 겨울철 농한기에 산을 헤매고 다니면서 약초를 캐서 시장에 내다 팔아봐야 겨우 푼돈이 생기는 정도였고요. 겨울에 농사가 없을 때는 하루 종일 이산 저산을 오르내리면서 ‘봉양(복령)’도 많이 캤지요. 봉양은 가을에 베어낸 가을벡이 소나무 뿌리에 붙어서 사는 혹같은 것으로 약으로 쓰이는데 꽤 비싼 값에 팔려 나갔습니다. 한창 물이 오르는 봄이나 여름에 베어낸 소나무 뿌리에서는 봉양이 잘 생겨나지 않아요. 봉양은 죽은 소나무 뿌리에서만 생기는데 그때만 해도 곳곳에서 산판을 많이 할 때였으니까 봉양 생산도 제법 많았지요. 소나무도 겨울에 베어내면 덜 썩는데, 여름에 베어내면 1년도 못가서 모두 썩어버리니까 나무의 성질이라는 것도 알고 보면 참 묘하지요. 봉양 같은 약재를 캐면 봉화 춘양장에 내다 팔기도 하고, 당시에는 약재상들이 산골 마을마다 자주 약재를 거두러 다녔는데 그런 약초장사들에게 팔기도 하고 그랬습니다. 저 아래 통고산휴양림 골짜기를 심미골이라 부릅니다. 예전에 그 골짜기에서 산판을 할 때는 베어낸 참나무나 잡목에 ‘후루래기’ 버섯이 많이 달렸었지요. 그것도 양분이 많은 가을에 나무를 베어내야 후루래기가 많이 달렸습니다. 후루래기가 달릴 때가 되면 동네 사람들은 그 버섯을 따려고 심미골로 몰려가고는 했었지요.” 

 

예전 시골사람들에게 부역(賦役)은 필연적인 것이어서 해방 전후는 물론이고, 1970년대 박정희대통령이 주창한 새마을운동 당시에는 주민들에게 온갖 부역이 강요되었다.
“열살 무렵부터 36번 국도 신작로 닦으러 부역을 다녔지요. 동네 구장이 언제 어디로 부역을 나오라고 집집마다 찾아다니면서 전하면 일부 농가에서는 농사일이 바쁘니까 어른 대신 애들을 부역하는 공사 현장으로 보내게 됩니다. 그러면 또 구장은 구장대로 어른이 나오지 않고 힘이 모자라는 애들을 보냈다고 잔소리를 하면서 난리가 났고요. 당시에는 구장이 하는 일도 보통이 아니어서 골짜기마다 흩어져서 살고 있는 화전민들에게까지 부역을 나오라고 전하러 다녀야 했으니, 누구나 구장과 반장은 맡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자기 시간을 뺏기는 건 물론이고, 안 그래도 바쁜데 부역 나오라고 한다고 동네사람들에게 애꿎은 욕도 많이 먹어야 했으니까요. 특히 군을 제대하고 집에 돌아와서는 박정희 대통령때 마을 재건사업을 한다고 집집마다 정신이 하나도 없었어요. 저도 이 마을 반장을 맡아서 한 이년정도 했는데 정말 몸서리납니다.”      

 

천고사(天告祀)를 올리는‘독미산’ 정상에는 따로 제단이 없고 그냥 늘펀한 공간이 있을 뿐이다

 

“이곳 지명이 대봉전(大鳳田)이다보니까 영남풍수들이 이곳에 최고의 명당인 군조조봉(群鳥朝奉)이 있을 것으로 여기고 자주 들락거리며 산의 형세를 살폈었다고 합니다.”·····“하늘에 천고사(天告祀)를 올리는 곳은 야트막한 야산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마을에서는 ‘독미산’이라고 부르지요. 따로 제단이나 그런 것은 없고 그냥 늘펀한 공간이 있을 뿐입니다.”

서면 쌍전1리 대봉전 마을에는 특이하게도 아직까지 하늘에 제를 올리는 ‘천고사(天告祀)’가 남아 있다. 사진은 천고사 축문
지금은 36번 국도변 덕거리에서 자동차로 십여 분밖에 걸리지 않는 곳이지만, 십수년 전만 하더라도 두메산골일수밖에 없었던 산중마을에서 나고 자란 남계유씨는 서면 쌍전1리 일대의 지명과 지리를 훤히 꿰뚫고 있다.  

 

“이 마을 지명은 옛날부터 대봉전이라고 불렀으니, 마을 이름은 대봉전반이 되지요. 한문으로는 큰대(大)자, 봉새봉(鳳)자, 밭전(田)자를 사용하고요. 오랜 옛날부터 이곳 지명이 대봉전이다보니까 영남풍수들이 이곳에 최고의 명당인 군조조봉이 있을 것으로 여기고 자주 들락거리며 산의 형세를 살폈었다고 합니다. 풍수사상에서 말하는 군조조봉형(群鳥朝奉形)이라는 것은 주위의 온갖 산들이 머리를 숙여서 절을 하는 형국의 중앙에 위치한 명당을 일컫는 것이지요. 뭇 새들이 봉황을 향해서 머리를 숙여 절을 하는 형국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곳이 실로 뛰어난 명당이라고 하더라고요. 예전에는 이 마을에도 백여호가 이곳저곳에 흩어져서 살았는데 이제는 사십호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사람이 죽어서 행상(상여)이 나갈 때면 전에는 스물네명이나 서른두명씩 두 패로 나누어 행상 좌우에 붙어서 운구를 했는데, 이제는 열두명 정도가 붙어 서서 겨우 운구를 하고 있을 정도니까요. 그나마 요즘이야 편하게 자동차로 운구하는 일도 잦고요. 아버님은 한학을 해서 풍수에 밝았었는데, 나도 그런 영향 탓인지 풍수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촌에서 살려니 심심하기도 해서 그런 책들을 찾아서 읽고 공부하기도 했고요. 이 마을의 이런 저런 지명을 살피고 나름대로 풀이도 하다 보면 시간가는 줄도 모르고 참 재미가 있어요.”  

 

서면 쌍전1리 대봉전 마을에는 특이하게도 아직까지 하늘에 제를 올리는 ‘천고사(天告祀)’가 남아 있다.  

 

지역은 물론 전국적으로도 천고사를 구경하기 힘든 지금, 마을의 안녕과 풍요를 비는 천고사가 남아 있는 쌍전1리 대봉전 마을은 민속학적으로 큰 의미를 지닐 것으로 보인다.    

 

“우리 마을에는 하늘에 제사를 올리는 천제단 성격을 지닌 곳이 아직까지도 남아 있고, 지금도 삼년에 한번씩 제를 올리고 있습니다. 천고사를 올리는 곳은 야트막한 야산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마을에서는 ‘독미산’이라고 부르지요. 따로 제단이나 그런 것은 없고 그냥 늘펀한 공간이 있을 뿐입니다. 원래 그 주변에는 행상(상여)을 넣어두는 고새집(곳집)이 있었어요. 그런데 예전 어느 날 밤에 마을 사람 한명이 동네 가까운 곳에 고새집이 있는 것을 달갑지 않게 여겨 불을 질러서 다 태워버렸지요. 아주 오랜 옛날부터 독미산에서 해마다 제를 올렸다고 전하는데, 근래에는 삼년에 한번씩 정월달에 정성스럽게 제수음식을 준비하고 제관을 뽑아서 엄숙하고 정갈하게 제를 올리지요. 어릴 적만 해도 이곳 독미산 천제단 장소에서 생닭을 잡아서 생피를 주변에 뿌리고 난 다음 불에 구워서 제수음식으로 사용했는데, 이제는 번거로워서 그런 격식은 따로 차리지 않아요. 옛날 한때는 독미산이 아닌 저 옆쪽의 갈미봉으로 옮겨서 하늘에 제를 올렸는데, 그 후에 동네에서 멀쩡하던 소도 죽고, 사람도 해를 입는 우환이 자꾸 생기면서 다시 이곳 독미산으로 옮겨와서 제를 올린다고 전합니다. 이곳 독미산 인근에서는 사냥도 잘 안된다고 합니다. 지금도 이산은 신성시되는 면이 있어 인근에서는 나무도 함부로 베지 않고요.”  

 

‘오늘 참 귀한 손님이 오셨니더’라며 문득 찾아간 길손을 반겨주는 남계유씨의 얼굴이 환하다.
“가끔 우체부나 찾아와서 내가 없으면 마루위에 편지를 돌멩이로 찌지카놓고(눌러놓고) 가고는 하는데. 봄이 되면 새가 날아와서 자기도 집 한칸 달라고 조르기나 하지. 겨울인 요즘은 새우는 소리도 안 들리고 너무 조용합니다. 혼자 부식 두어 가지에 밥해먹고 나면 설거지하기도 편하고 그렇지요. 집에 할마이가 세상을 뜬지 17년째인데 지금은 차라리 산골에서 혼자 사는 게 아주 편해요. 딸린 밭이 있으니 운동 삼아서 고구마나 한박스씩 하고, 콩도 한포대씩 하고 그렇게 살지요. 콩도 요즘은 한포대에 십이만원 정도밖에 안하니 재미가 없고요. 드럽(두릅)나무도 예전에는 돈이 좀 됐는데 지금은 돈이 안 됩니다.”  

 

집에 할마이가 없으니 돈 욕심이 없어졌다는 남계유씨다.
둘이 살면 그래도 돈 욕심이 남아 있을 텐데, 혼자 사니 차라리 편하고 내가 죽으면 돈을 싸들고 가겠느냐며 웃는 남씨다.  

 

할마이가 살아 있을 때는 음식 맛이 있니 없니 하면서 잔소리도 했는데, 혼자 음식을 해먹으니 음식 맛이 없다고 나무랄 일이 없어서 편하다는 남씨다.   

 

누구든지 서면 쌍전1리를 지날 일이 있으면 대봉전 마을에 들러보기 바란다.
그곳을 찾아 주변의 뛰어난 산세를 구경하고, 남계유씨의 부친이 직접 쓰고 새겼다는 봉암팔경(鳳菴八景)을 완상함에 후회가 없을 것이라 여겨진다.  

 

이와 함께 산골마을을 이어주는 좁은 길에서 우연히 남계유씨를 만나게 된다면 그것은 대봉전 마을을 찾은 나그네의 작은 행운이다.

 

남계유씨가 묘소를 쓸 때 구성지게 부르는 달구질 소리를 쉽게 외우는 방법을 설명하고 있다

<저작권자ⓒ빠른뉴스! 울진뉴스 & www.uljinnews.com 무단전재-재배포금지. >
 
 
 
 
 
    울진뉴스/월간울진(http://uljinnews.com |   창간일 : 2006년 5월 2일   |   발행인 / 대표 : 김흥탁    |   편집인 : 윤은미 
  • 사업자등록번호 : 507-03-88911   |   36325. 경북 울진군 울진읍 말루길 1 (1층)   |  등록번호 : 경북, 아00138    |   등록일 : 2010년 7월 20일                         
  • 대표전화 : (054)781-6776 [오전 9시~오후 6시 / 토, 일, 공휴일 제외(12시~1시 점심)]   |  전자우편  uljin@uljinnews.com / ytn054@naver.com
  • Copyright © 2006-2017 uljinnews.com all right reserved.
빠른뉴스! 울진뉴스의 모든 콘텐트(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무단 전제·복사·배포 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