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학교를 졸업하던 14살부터 ‘소목장이’로 살아온 김천학씨 이야기

기사입력 2010.03.11 1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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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를 다루는 목수(木手)는 집을 짓는 대목과 가구나 문짝 등을 짜는 소목 기술자를 통틀어서 이르는 말이다.  

 

소목장(小木匠)은 목재를 다루는 장인 가운데서도 장롱, 소반, 문갑, 탁자 등 실내에서 사용하는 세간살이인 가구와 목공품을 만드는 사람을 일컫는다.  

 

소목장이 수작업으로 톱, 대패, 망치, 칼 등의 연장을 이용하여 가정에서 사용하는 세간살이 가운데 이불이나 옷을 넣는 장롱, 식사를 하거나 공부를 하는 탁자, 소중한 문서나 그 밖의 것들을 보관하는 문갑 등을 만들면 그 아름다움의 멋은 배가된다.  

 

조상들로부터 대물림되어 내려온 오래된 문갑이나 탁자는 백자 등과 더불어 한국의 아름다움을 대표할 만큼 우리 고유의 미의식이 충실하게 반영되어 있다.

 

우리 민족의 심성을 닮아 크기가 작고 나지막하여 실용적이고, 주변의 자연을 닮아 불필요한 장식을 최대한 배제하고 나뭇결을 살려서 단순하게 제작된 전통 가구는 오래전부터 우리나라만의 독특한 조형양식으로 발전을 거듭해왔다. 

 

쇠못을 사용하지 않고 전통적인 짜임방식으로 만들어지는 소목은 제작할 목공품을 구상하고, 크기별로 나누어서 나뭇결의 문양을 살려 재단하고, 대패로 표면을 다듬어 굴곡을 없애고, 나무판의 짜임을 위해 연결 부위의 홈을 만들어 끼워 맞추고 난 다음, 사포질을 해서 표면을 고르고 색을 입히게 되는 복잡한 과정을 거치며 명품으로 태어난다.  

 

그런데 어느 때부터인가 빨리 빨리의 행동 양식과 가치보다는 편리함과 이익을 우선시하는 생활 풍조 탓으로 인해 전통적인 방식으로 가구를 제작하는 ‘소목장이’라는 직업도 우리 주위에서 점점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다.  

 

또한 소목장이 수공으로 제작하는 전통 방식의 짜임 가구는 한 작품을 완성하기까지 걸리는 시간과 정성으로 인해 일반 기성품 가구에 비해 상대적으로 비싼 탓에 수요자가 많지 않고, 그런 만큼 소목 가구를 만드는 장인들의 생활고는 그들의 또 다른 고민이기도 하다.  

 

한때 울진 지역에서 ‘소목장이’로 살아가던 사람들 대부분은 나이가 들고 노동이 힘에 부치면서 현역에서 은퇴했고, 나머지 ‘소목장이’들 또한 가난하고 고된 삶을 이어가기가 버거워지면서 일반 공사현장을 찾아 막노동에 종사하거나 또 다른 직업을 찾아서 떠나버렸다.  

 

오롯이 한국적인 전통을 간직한 소목 가구들, 그중에서도 특히 ‘절문’ 또는 ‘조선문’이라고 불리어지는 문짝을 짜는 ‘소목장이’는 더 이상 후계자가 없고, 수요도 넉넉하지 않아서 적어도 울진 지역에서는 대가 끊어질 지경에 처해 있다.  

 

규모가 큰 공장에서 무한정으로 찍어내는 값싼 기성품에 밀려 주변에서는 더 이상 전통을 발전시켜온 우리만의 명품 조선 문짝을 구경하는 일이 영영 불가능하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굶기를 밥 먹듯 했고요. 날이면 날마다 배가 고팠습니다. 날마다 배가 고파서 학교에 가니까 무슨 공부가 되겠어요?”·····“글도 반, 농사도 반이던 아버지는 평생 술을 좋아했고, 그런 만큼 가정에는 너무나 소홀했던 분이었지요.”

14살에 노음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상경하여 노량진‘서울가구점’에서 목수 일을 처음 배울 당시에 김천학씨가 사용하던 톱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곧장 서울로 올라가서 목수 기술을 배운 이후 지금까지 45년 동안 소목장으로 일하고 있는 김천학(金千學. 59세. 원남면 매화리)씨는 근남면 수산리가 고향이다.  

 

“윗대부터 대대로 원남면 기양3리의 저수지가 있는 마을인 ‘두태’에서 터전을 이루고 살았었다고 합니다. 고조부와 증조부, 할아버지 할머니 묘소가 전부 다 그 마을에 있어요. 그러다가 아버지가 장가를 들어 처가 곳인 근남면 수산으로 이사를 가서 새로운 일가를 이룬 거지요. 그러다보니 우리들은 다 근남면 수산리에서 태어났고요. 아버지는 ‘김해 김씨’ 성에 ‘죽’자 ‘복’자를 사용했고요, 어머니는 ‘윤씨’ 성에 ‘무’자 ‘출’자를 썼습니다. 아버지는 27년 전, 제가 32살 때 세상을 떠나셨고, 어머니는 제가 13살에 돌아가셨어요.”  

 

그 시절, 많은 사람들이 먹고 사는 일을 버거워했지만 특히 김천학씨 집안의 먹고 사는 형편은 무지 어려웠었다.
“우리 집은 농사가 하나도 없었습니다. 집에 딸린 논밭전지 한마지기가 변변하게 없었어요. 그러니 무척이나 고달프게 살았지요. 정말로 굶기를 밥 먹듯 했고요. 국민학교에 다닐 때는 학교에서 점심시간에 미국산 원조 옥수수로 죽을 쑤어서 주고는 했어요. 그러면 그 죽을 도시락에 부어 집으로 가지고 와서는 씨래기(시래기)를 넣고 다시 죽을 쑤어서는 일곱 식구 온가족이 둘러앉아 먹고는 했습니다. 그나마 집이 잘살았던 부잣집 애들은 점심 도시락으로 밥을 싸서 학교로 왔는데, 어떤 때는 그 밥과 제가 먹을 옥수수 죽을 바꾸어서 집으로 들고 와 죽을 써서 한끼를 때우기도 했고요. 날이면 날마다 배가 고팠습니다. 날마다 배가 고파서 학교에 가니까 무슨 공부가 되겠어요?”  

 

김씨의 아버지는 김씨가 태어나기도 훨씬 전이던 일제강점기에 중국 만주를 오가면서 장사를 했지만, 그렇게 상술이 뛰어난 장사꾼은 아니었던 듯하다.
“아버지는 제가 태어나기 전이던 일정시대에 돈을 벌어보겠다고 마차를 끌고 만주를 들락거리면서 장사를 했다고 하는데, 왜 그렇게 집안은 찢어지게 가난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버지는 글도 반, 농사도 반이었어요. 그래도 아버지의 웃대(윗대)는 아주 잘살았었다고 해요. 할아버지는 7남매 가운데 셋째였는데, 두태에서는 우리 땅을 밞지 않고는 다닐 수가 없었다고 하니까요. 그때는 지금 매화저수지가 있는 곳에 물레방앗간이 있었는데, 할아버지가 그 물레방앗간을 운영했다고 합니다. 그 시절에 시골동네에서 물레방앗간을 했으니 농사 규모도 컸을 테고, 그만큼 잘살았겠지요. 그러나 그런 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아버지는 두형제중에 형이었습니다. 그러다가 나이가 들어서 수산으로 장가를 갔는데, 두 살이던 밑의 남동생을 데리고 처갓집으로 들어갔다고 합니다. 아버지의 웃대 할아버지 형제분들이 일정시대에 만주로 들어가면서 기양리 두태에 있던 산이며 논밭전지며 있는 재산을 다 우리 아버지에게 주고 갔다는데, 장가를 들어서 처남과 만주로 장사를 하러 다닌 거지요. 그러면서 만주로 한번씩 떠날 때마다 한자리 팔아가서 그 돈 다 까먹고, 고향으로 돌아와서 애나 하나 낳고 잠시 살다가 다시 있는 재산을 팔아서 만주로 장사를 한다며 떠나고, 그러면서 있던 재산을 다 없애버렸다고 합니다. 아버지는 노름도 안했고, 여자도 별로 가까이 안했는데 무조건 꺾어서 조졌던 거지요. 술을 그렇게도 좋아했습니다. 집안의 가장인 남자가 그렇다보니 자연히 가정에는 소홀하게 되는 거고, 그런 남편을 두었던 어머니만 죽으나 사나 날품팔이를 다니면서 먹고 살려고 아등바등 거렸던 거지요. 서면 왕피리에는 우리 집안이 많았는데, 어머니가 두루마기라도 깨끗이 손질해 놓는 날이면 또 그렇게 친척집을 찾아다니면서 세월을 보냈습니다. 글 반, 농사 반인 분이다 보니 왔다 갔다 하면서 세월 보내기가 오죽 좋았겠어요? 하기야 아버지인들 속이 편했겠어요? 요즘으로 말하자면 돈을 벌기위해 중국을 왔다 갔다 하는 것인데, 윗대로부터 물려받은 재산을 팔아서 만주로 장사를 다녀도 제대로 되는 일은 없고 그러니까, 그 고달픔을 또 술로 달랬던 것이겠지요. 한평생 술을 좋아했고, 그런 만큼 가정에는 너무나 소홀했던 분이 아버지였어요.”  

 

김씨의 부모님은 슬하에 4남1녀를 두었다.
김씨는 ‘세월이 흐르다 보니 누나 이름도 빨리 생각나지 않는다’며, 자신이 ‘쪼끄만 할 때 누나가 시집을 갔는데 그때는 그것이 시집을 가는 것인지도 몰랐다’며 웃는다.  

 

“위로부터 영학(78세. 북면 덕천리), 정학(73. 근남면 수산리), 만학(70. 부산시)이라는 형님과 옥순(76세. 죽변면 봉평리)이라는 누님이 계시는데, 정학이 형님과 만학이 형님은 이미 돌아가셨습니다. 형들과는 나이 차이가 좀 지는데, 첫째 형수가 시집을 왔을 때 제가 7살이었으니 큰형수가 저를 등에 업고 다녔어요.”
  

김천학씨가 전통 짜임 기법으로 제작한 서안(書案). 단순 간결하면서도 도형미와 미적 감각이 탁월하다

“안 그래도 사람이 못 먹어서 누렇게 떠 있는데, 나물에다 밀지울을 섞어서 끓여 먹으니 막 뽀다끼고 쌔빠닥도 알거리한 게, 멀쩡한 사람도 핑핑 자빠지고 그랬던 기억이 나네요. 아이고 참말로, 요새는 소여물도 그보다는 낫니더.””·····“제가 3학년 때 바로 위의 누나가 장질부사를 앓다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때는 돈이 없어서 약을 살 형편이 못되니 죽은 거지요. 그때 누나가 노음초등학교 5학년이었습니다.”

1959년도에 8살이 된 김천학씨는 노음국민학교에 입학했고, 14살에 26회 졸업생으로 학교를 마쳤다.
“8살이 되어 노음국민학교에 입학을 했어요. 그런데 입학하던 그해 가을에 사라호 태풍이 울진 지방을 덮쳤어요. 학교는 전부 다 물에 쓸려 내려가고 형편이 없었지요. 학교뿐만 아니라 수산리와 산포리 일대가 전부 다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물에 잠겼고, 물이 빠지고 난 다음에는 밀려든 모래로 온통 백사장이 되다시피 했어요. 내 집, 남의 집 할 것 없이 집집마다 온갖 살림살이는 물에 다 떠내려가고 없었고요. 더구나 우리 집은 수산 동네 나지막한 곳에 있다 보니까 방안의 선반까지 물이 차올라 오더라고요. 수산 일대의 들판도 다 파묻어버렸습니다. 그 당시에는 사람 목숨 건진 것만 해도 고마워해야할 형편이었습니다. 그래도 농사를 지어먹을 땅이라도 있던 사람들은 어쨌든 먹고 살 수 있었지만, 논밭전지가 하나도 없던 사람들은 당장 품팔이할 곳도 하나 없는데 어디서 먹고 살 방법을 찾을 수 있었겠어요? 농사가 있는 사람들이야 파묻힌 논도 있었지만, 높은 곳에 있던 논이나 밭에는 그나마 곡식이 조금씩은 남아 있었으니까요. 지금 돌이켜보면 무척이나 고단하고 지루하고 힘든 시절을 겪었네요. 밥을 굶는 일은 거의 습관이 되다시피 했어요. 어른들이 날일로 품을 팔고 싶어도 품팔이를 받아주는 것이 없으니, 형님들이 온 산을 헤매 다니면서 칡을 파왔어요. 형님들이 칡을 캐오면 그나마 있는 집들은 칡떡이라도 해먹었는데, 우리 집은 떡을 해먹을 형편이 안 되니 씨래기를 넣고 푹 끓여서 죽을 만들어 먹고는 했지요. 사라호 태풍이 휩쓸고 간 다음해 봄에는 미국에서 원조 밀지울(밀기울)을 없이 사는 사람들에게 배급했는데, 어머니가 온 산을 다니면서 봄나물을 뜯어다가 밀지울에 넣고 죽을 끓여 먹었어요. 안 그래도 사람이 못 먹어서 누렇게 떠 있는데, 나물에다 밀지울을 섞어서 끓여 먹으니 막 뽀다끼고(뒤틀리고) 쌔빠닥(혓바닥)도 알거리(알싸하다)한 게, 멀쩡한 사람도 핑핑 자빠지고 그랬던 기억이 나네요. 그래도 산목숨이 죽을 수는 없으니 속이야 뽀대끼든 말든 억지로라도 먹을 수밖에 없었지요. 아이고 참말로, 요새는 소여물도 그보다는 낫니더.”  

 

사라호 태풍으로 근남면 수산리 인근 마을과 노음국민학교가 없어진 이후에도 김천학씨는 이리저리 옮겨 다니며 공부를 했다고 전한다.
“사라호 태풍이 물러가고 난 다음에 보니 노음국민학교는 형체도 없어졌고, 그 다음부터는 망양정으로 다니면서 공부도 하고, 수산다리 밑에서 공부도 하고, 모래와 뻘밭(개펄)으로 변한 학교 한쪽에 천막을 치고 공부도 하고 그랬습니다. 비가 오기도 하고 바람도 불고 하니까 주로 수산다리 밑에 천막을 치고 공부를 했지요. 그러다가 제가 3학년 때 바로 위의 누나가 장질부사(장티푸스)를 앓다가 앞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때는 돈이 없어서 약을 살 형편이 못되니 죽은 거지요. 집에 약이라도 살 돈이 있었으면 그때도 장질부사가 죽을병은 아니었어요. 그때 누나가 노음초등학교 5학년이었습니다. 누나가 장질부사를 앓다가 죽고 나니까, 학교에서 ‘혹시 너도 다른 애들에게 전염시킬 수 있으니 당분간 학교를 오지 말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학교를 안가고 집에 있다가 학교에 나오라고 하면 다시 학교를 조금 다니다가 또 못가고, 그렇게 학교를 다니다가 말다가를 한 1년 정도 반복했어요. 그래도 학교를 빠졌다고 해서 낙제시키는 일도 없었고, 친구들과 함께 졸업할 수 있었지요.”

 

“가정에 애착이 없이 소홀하기만 했던 아버지로부터는 정말 양말 한짝 못 얻어 신었어요. 그렇다고 어머니가 무슨 돈이 있어서 옷이나 양말 한짝이라도 사줄 수 있었겠어요?”·····“뜨뜻한 이밥 한그릇 못 잡숫고 고생해가면서 우리를 키워주신 어머니는 제가 서울서 목수 일을 배우던 시절에 갑자기 돌아가셔서 임종도 못 지켜봤어요.”

전통 짜임 기법으로 제작한 조선문. 김천학씨는 거실용 탁자를 만들기 위해 이 문짝을 짰다고 말한다
김천학씨는 어릴 때는 물론이고, 국민학교에 다니면서도 아버지로부터는 양말 한짝 못 얻어 신었다며 지난 기억을 떠올린다.
“일정시대에야 아버지가 장사를 한다며 만주로 떠돌아다녔다고 하는데, 우리가 어릴 때는 죽 집에 계셨지요. 집에 있으면서 이곳저곳으로 놀러 다니기도 하고, 좋아하는 술도 마셨고요. 그러나 가정에 별다르게 애착이 없이 소홀하기만 했던 아버지로부터는 제 기억에는 정말 양말 한짝 못 얻어 신어 봤어요. 그렇다고 어머니가 무슨 돈이 있어서 저에게 옷이나 양말 한짝이라도 사줄 수 있었겠어요? 그런데 당시에 셋째 이모가 삼척 도계에서 고물상을 크게 하고 있었는데, 마침 그 집에 저와 나이가 동갑인 사촌이 있었지요. 같은 해에 태어났어도 사촌은 12월에 태어났고, 저는 3월 달에 태어났는데 주로 그 사촌동생 옷을 주워 입었어요. 셋째 이모가 근남 수산 집으로 자주 오지는 못했지만, 아는 사람이 그 집에 들르게 되면 사촌동생에게 사 입혔던 옷을 늘 저에게 보내주고는 했습니다. 그러다보니 옷은 물론이고 속옷이고 양말이고 사촌동생 옷가지만 받아 입고 살았지요. 아버지는 양말 한짝 자식들에게 사줄 형편이 안 되지, 그렇다고 어머니는 당장 끼니 걱정하기에 바빴는데 옷사줄 엄두를 어찌 냈겠어요? 어머니가 참 고생 많이 했습니다. 가정은 돌보지 않고 날마다 술에 취해서 살던 남편을 만났으니, 이곳저곳으로 다니며 품팔이도 많이 했고, 어디 뜨뜻한 이밥 한그릇 못 잡숫고 돌아가셨어요. 모내기할 철이면 모심어 주러 다니고, 남의 밭에 지심(김) 매주러 다니고 그런 일을 했어요. 그런 일이 없으면 나무를 머리에 이고 시장으로 팔러 다녔고요. 형님들이 수곡리 인근의 산으로 가서 나무를 해오면 도끼로 쪼개 장작을 만들어 공석으로 가서 어물하고 바꾸어 와서 먹고 살기도 했고요. 그렇게 고생해가면서 우리를 키워주셨는데, 제가 서울서 목수 일을 배우던 시절에 갑자기 돌아가셔서 임종도 못 지켜봤어요. 후회스럽고 가슴 아픈 일이지요.”

 

“가구점에서 한 1년 동안은 주인이 일하는 것을 지켜보면서 이것저것 연장 심부름이나 하고, 일이 끝나고 나면 대팻밥이나 끌어 담고 그랬습니다. 그러다가 몇 달이 지나서 연장 가는 법을 배웠어요. 꼬박 1년이 지나고 나니까 주인 영감님이 대패를 주면서 나무를 한번 깎아 보라고 하더라고요.”·····“지금 돌이켜보면 그렇게 맞아가면서 단단히 일을 배웠으니 야무지고 꼼꼼하게 일을 마무리한다는 얘기를 듣는 거겠지 싶습니다. 예전에 집수리를 한창 할 때도 다른 목수들이 짰던 문은 다 폐기처분했는데, 제가 짰던 문짝은 새집을 지으면서도 그대로 사용했습니다.”

14살에 노음국민학교를 졸업한 김천학씨는 곧장 서울로 상경하여 일자리를 구하게 된다.
“노음국민학교를 졸업하고 난 다음에 곧장 서울로 올라갔습니다. 서울에는 둘째 형님도 있었고, 막내 이모도 살고 계셨어요. 그런 연줄로 해서 서울로 올라간 거지요. 서울로 올라가서는 잠깐 동안 둘째형님과 형수님이 살던 단칸방에서 함께 먹고 자고 했어요. 우리 둘째 형수가 고생을 참 많이 했습니다. 둘째형님은 서울로 먼저 올라가서 자리 잡고 살던 막내 이모부가 땡겨(당겨) 올려서 고무신을 만들던 신발공장에서 근무했습니다. 그런데 둘째형님은 헌병대에서 군대 생활을 했는데 남들보다 곤조(근성)가 심했어요. 특히 술쿠사(술주사)가 심했지요. 둘째 형수님이 그런 술쿠사를 다 받아 주려다보니 얼마나 마음고생이 심했겠어요? 서울로 올라가서 처음에는 둘째 형님이 살던 안집 할아버지가 아는 금방을 소개해 주었는데, 보증인을 못 구해서 금방 근처에도 가보지 못했어요. 날마다 고가의 금을 세공하는 금방이다 보니 만일을 대비해서 보증인을 새우고 난 다음에 일자리를 주었던 거지요. 그런데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고 자란 제가 어디서 보증인을 구할 수 있었겠어요?”  

 

둘째 형님이 세 들어 살던 주인집 할아버지가 소개해준 금방에 보증인을 구하지 못해서 취직하지 못한 김씨는 두 번째로 소개해준 ‘서울가구점’에 취직해서 목수 일을 배울 기회를 가지게 된다.  

 

“금방에 취직하는 일이 어려워지자, 둘째 형수님이 안집 할아버지에게 다시 부탁해서 가구점을 소개받았습니다. 노량진에 있던 ‘서울가구점’이라는 곳에 취직해서 처음으로 목수 일을 접하게 된 겁니다. 그 당시만 해도 가구점은 요즘처럼 공장에서 생산된 기성품을 취급하는 것이 아니라, 주문이 들어오는 가구를 직접 제작해서 맞춤가구를 판매할 때였지요. 당연히 가구점 주인은 직접 가구를 제작할 수 있는 실력이 뛰어난 목수여야 했고요. 서울가구점은 그렇게 규모가 큰 공장은 아니었지만, 공장 한구석에 방이 조그마한 게 붙어 있어서 취직 후에는 그 방에서 먹고 자고 했어요. 그 가구점 주인 영감님은 이북에서 내려온 사람인데, 일정시대에 일본 목수에게서 일을 배웠다고 하더라고요. 당시에 나이는 환갑이었고요. 임목수라고 불렀는데 이름은 정확히 모르겠네요. 그 영감님은 고가구만 짰어요. 시시한 일반적인 농은 아예 손도 대지 않았지요. 당시에도 맞춤 가구는 큰 부잣집에서나 주문을 했지, 일반 서민들은 엄두도 못 냈습니다. 그 가구점에 취직을 하여 기술을 배우면서 처음 3년 동안은 돈은 한푼도 못 받았고 그저 먹고 자고, 철 따라서 옷이나 한 벌씩 얻어 입고, 어쩌다가 용돈이라고 몇푼씩 받고 그랬어요. 일을 배울 때는 돈을 받을 생각도 하지 않았고, 또 돈을 쓸 줄도 모르고 그랬습니다. 그러다가 3년이 지나고 나니까 월급이라면서 당시 돈으로 3만원을 주더라고요. 3만원이라는 돈이 평생 처음 내손으로 일해서 직접 번 돈이지요. 주인 영감님이 이제는 너도 목수로써 한몫을 할 수 있겠다고 판단했던 것 같아요. 첫 월급으로 고생이 많았던 둘째 형수님 속옷도 한 벌 사 드리고, 조카들 양말도 한두 켤레 사주고 그랬지요. 지금 생각해도 그게 눈에 아른 합니다. 목수는 3년을 배우고 나면 기술을 가르쳐준 선생이 연장 한 벌 장만해서 줍니다.”  

 

서울로 올라가서 노량진의 ‘서울가구점’에 취직한 김씨는 처음 1년 동안은 목수인 주인 심부름이나 하면서 연장 가는 일부터 배웠다고 말한다.
“그리 큰 가구점이 아니다보니 주인과 저 두명이 일을 했어요. 저는 목수일이 처음이니까 한 1년 동안은 그저 옆에서 주인이 일하는 것을 지켜보면서 이것저것 연장 심부름이나 하고, 일이 끝나고 나면 대팻밥이나 끌어 담고 그랬습니다. 그러다가 몇 달이 지나서는 연장 가는 법을 배웠어요. 목수는 연장 가는 법부터 배우게 되거든요. 꼬박 1년이 지나고 나니까 주인 영감님이 대패를 주면서 나무를 한번 깎아 보라고 하더라고요. 그래도 그냥 주인이 시키는 대로 요만큼 깎아라 하면 고만큼 깎고, 더 깎아라 하면 조금 더 깎고 그런 수준이었지요. 그때만 해도 요즘처럼 전동 공구로 처음 일을 배운 게 아니라 완전히 수공 연장으로 일을 배운 겁니다. 요즘이야 전동 연장이 얼마나 편리하고 좋습니까? 처음에 그 영감님 가구점으로 들어갔을 때의 일인데, 일이 끝나고 저녁에 청소를 하다보면 대팻밥이나 톱밥 사이에서 100원짜리 동전이 여러 개씩 자주 보이더라고요. 그래서 저는 이게 무슨 돈인가 싶으면서도 말없이 그 동전을 주워서 일하는 작업다이(작업대) 위에다가 얹어 두고는 했어요. 한달 가까이나 계속 그런 일이 일어나더라고요.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영감님이 제 마음을 떠 보려고 그랬던 것 같습니다. 그전에 가구점에서 일하던 사람들이 돈도 훔쳐서 내빼버리고, 연장도 훔쳐서 내빼버리고는 했다고 나중에 말하더라고요. 일하러 들어온 사람을 상대로 일종의 시험을 했다는 것은 한참 뒤에 알았지요. 그때는 가구를 제작하면서 곡선을 만들어도 실톱 같은 연장으로 정성을 들여서 일일이 손으로 도려내야 했는데, 참 시간이 많이 걸리는 일이었어요.”  

 

김씨는 ‘서울가구점’에 취직하여 목수 일을 배우는 과정에서 연장으로 두들겨 맞기도 참 많이 맞았었다고 술회한다.
“그 주인 영감님에게 일을 배우면서 두들겨 맞기도 참 많이 두들겨 맞았습니다. 어떤 일을 한번씩 시켰다가 제대로 못하면 사정없이 연장으로 때리고는 했어요. 요즘 젊은 사람들 같으면 일을 배울 때 그렇게 하면 어디 참아내겠어요? 다 도망가 버리고 말지. 봄이 되면 일할 때 왜 또 그렇게 잠은 쏟아지는지, 대패질을 하면서 혹시 꾸벅거리며 졸기라도 하면 뾰족한 망치로 인정사정없이 머리를 콕 찧어요. 그러면 그저 머리에서 피가 뚝뚝 떨어지기가 일쑤였고요. 그래도 일을 때려치우지는 못했어요. 머리를 망치로 찍어서 피가 나도 그곳에서 나오면 단박에 갈 곳이 없었으니 꾹 참고 버틴 거지요. 제 아무리 서울이 넓다고 해도 그곳에서 나오면 당장 어디로 가겠어요? 그러니 머리에서 피가 나도 쓱 닦고 일하고, 어떤 때는 피가 흐르다가 말라붙어서 얼룩이 지기도 보통이었고요.”  

 

14살 때 서울로 올라가서 일본인으로부터 일을 배운 가구점 주인으로부터 혹독하게 목수 일을 배운 김천학씨지만, 그래도 그 영감 덕분에 평생 목수로 살면서도 일을 대충 한다는 소리는 들어본 적이 없다고 말하는 김씨다.  

 

“그래도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때 그 영감님한테 맞아가면서 단단히 일을 배웠으니, 지금까지 야무지고 꼼꼼하게 일을 마무리한다는 얘기를 듣는 거겠지’ 싶습니다. 예전에 집수리를 한창 할 때도 다른 목수들이 짰던 문은 수리를 하면서 다 폐기처분하더라도, 제가 짰던 문짝은 새집을 지으면서도 그대로 사용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덜 마른 나무로는 절대 문짝을 짜지 않았어요. 일을 안 해주고 욕먹으면 잠시 지나가고 말지만, 덜 마른 나무로 문을 짜주면 나중에 뒤틀리고 그러면서 두고두고 욕을 먹는 거잖아요. 그런 일을 왜 하겠어요? 그 영감님은 슬하에 자식이 없었는데, 입고 먹는 것에는 절대로 차별이 없었어요. 먹는 것도 영감님이 잡곡밥을 먹으면 저도 잡곡밥을 먹고, 이밥을 먹으면 이밥을 함께 먹고 그랬지요. 어쨌든 저에게는 평생 고마운 분이지요. 울진으로 내려오고 난 다음에 제가 27살쯤 무렵에 서울로 올라가서 그 가구점을 찾아간 적이 있었는데, 가구점은 벌써 없어졌는데, 그 영감님은 세상을 떠났고, 할머니는 양로원으로 갔다고 주위에서 전해주더라고요. 또 주위에서 그 영감님이 죽기 전까지 제가 떠난 것을 아쉬워하면서 그리워했다고 전해주었는데, 그때 가슴이 찡했습니다. 또 모르지요, 그때 그 가구점에 계속 남아 있었더라면 자식 대신에 그 가구점이라도 물려 받았을 지요. 어쨌든 평생 그 영감님에게 배운 목수 기술로 지금까지 넉넉하지는 않더라도 먹고 산 것이니, 제가 첫발을 잘 넣었던 거지요.”

 

매화목공소 내부

 

“가구점에 주문이 들어오면 직접 짜서 팔기도 하고, 얼마 뒤에는 기성품으로 공장에서 나오는 호마이카 장롱 같은 걸 직접 짰어요. 반들반들하게 윤이 나던 호마이카 장롱은 당시에 큰 인기를 끌었지요. 호마이카 장롱에 붙이는 자개는 혼자개가 아니라 인조자개였어요.”·····“방위를 받기위해 입소한 훈련소에서도 사회에서 목수로 일했다고 차출되어가서 막사를 짓는 일만 했습니다.”

노음국민학교를 졸업하던 14살에 서울로 올라가서 노량진 ‘서울가구점’에서 목수 기술을 배우던 김천학씨는 20살에 고향 울진으로 내려오게 된다.  

 

고향에 내려온 김씨는 3년여 동안 매화시장 안에서 가구점을 운영하던 외종사촌 매형 집에서 일하면서 ‘호마이카’ 가구를 주로 짜서 팔았다고 말한다.  

 

석유에서 뽑아낸 불포화 폴리에스테르 수지인 ‘호마이카’를 발라서 반들반들하게 윤이 나던 ‘호마이카’ 장롱은 자개장보다 저렴해서 60~70년대의 혼수 필수품이기도 했다.   

 

“20살에 주민등록을 하러 울진으로 내려왔지요. 그때 그 영감님에게 아예 이참에 고향으로 내려가겠다고 얘기를 했더니, ‘천학아 내려가지 마라, 내가 이 일을 하면 얼마나 하노?’ 그러면서 저를 붙들었어요. 그런데도 저는 그 영감님 밑에서 고되게 목수 일을 배우고 그런 것이 정말 몸써리 났어요. 그래서 주민등록을 하러 집에 내려왔다가 그대로 눌러 앉았지요. 집으로 내려와서는 이만준이라고 외종 사촌 매형이 요 옆쪽에 ‘매화가구점’을 하고 있었는데, 그 집에서 먹고 자고 하면서 한 3년 정도 일을 했습니다. 그 당시는 한창 새마을 사업을 한다면서 초가지붕을 벗겨내고 스레트(슬레이트)를 잇고 그럴 때였어요. 매형도 원래는 소목 기술자였는데, 나중에는 건축과 토목 일을 배워서 거의 그쪽 일을 하고 있었어요. 매형이 가구점을 운영하면서 건축 토목 쪽 일을 하니까, 저도 자연히 매형 일을 옆에서 거들면서 그쪽 일을 배우게 되었고요. 그러면서도 가구점에 주문이 들어오면 직접 가구를 짜서 팔기도 하고, 얼마 뒤에는 기성품으로 공장에서 나오는 ‘호마이카’ 장롱 같은 걸 직접 짰어요. 서울에서 주로 고가구를 제작하다가 ‘호마이카’ 가구를 짜기 시작했는데, 금방 배우겠더라고요. 반들반들하게 윤이 나던 ‘호마이카’ 장롱은 당시에 큰 인기를 끌었지요. 그래도 큰 마음먹고 장만해야 하는 고가품이었어요. 좀 더 여유가 있는 사람들은 자개를 붙이기도 했는데, 자개는 공장에서 주문해서 안료를 발라서 완성했고요. 그때도 ‘호마이카’ 장롱에 붙이는 자개는 ‘혼자개’가 아니라 ‘인조자개’였어요. ‘매화가구점’에서는 월급도 꽤 많이 받으면서 일을 했습니다.”  

 

외종사촌 매형이 운영하던 매화가구점에서 틈틈이 일을 하면서 김천학씨는 방위생활을 마친다.
“사촌 매형 집에서 일을 하면서 방위를 받았어요. 방위를 받기위해 울진에서 101명인가 함께 올라가서 안동훈련소에 입소했는데, 3주 동안 사격 한번 못해봤습니다. 훈련소에 입소하자말자 제 이름을 부르면서 앞으로 나오라고 하더라고요. 처음에는 ‘내가 키가 작아서 집으로 되돌려 보내는 모양이다’ 싶어 보따리도 다 싸고 해서 앞으로 나갔더니, 옆 사단으로 데리고 가더라고요. 사회에서 목수로 일을 했다고 6사단에서 7사단으로 차출되어가서 훈련소에서 필요로 하는 막사를 짓는 일을 하게 된 거지요. 훈련소를 퇴소하던 날도 한창 막사를 짓는 일을 하고 있는데, 동료 훈련병들이 찾으러 와서 퇴소하는 날인줄 알았어요. 퇴소하는 날에 막사를 짓는 일을 떠맡았던 청부업자가 그 당시 돈으로 38만원인가를 손에 쥐어 주더라고요. 처음에는 극구 사양하다가 나중에는 마지못해서 받았는데 참 긴요하게 사용했지요. 훈련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와서는 원남면 오산리에서 근무하게 되었는데, 오산부대에서도 근무는 안서고 날마다 출근해서 군부대 막사를 짓는 일만 했어요. 그 당시에는 경찰서에 방위병을 담당하는 담당자가 있었는데, 방위를 담당하는 순경이 부르더니 근무는 안세우고 막사와 무기고만 짓게 하더라고요. 예전의 원남 지서 무기고부터 원남 무기고와 갈면 무기고, 무릉과 초산 막사를 그때 제손으로 다 짓다시피 했지요. 그러다보니 지금도 저의 군 등록 사항을 떼보면 방위 공병으로 되어 있어요. 그렇게 열심히 막사를 짓다보니 방위를 담당하는 순경이 낮뿐만 아니라 밤에도 근무를 선 것으로 선처를 해주어서 7개월 7일 만에 방위를 끝낼 수 있었습니다. 방위를 받을 때는 시간이 나는 틈틈이 가구점 일을 돌봐주면서 가구점 바로 옆쪽에서 자취를 했습니다. 방위를 마치고 나서도 한 일년 정도 사촌 매형 가구점에서 더 일을 했습니다.”

 

“어떤 사람의 소개를 통해 경주에 내려가서 ‘경주목공소’라는 곳에서 ‘절문’짜는 법을 배우게 되었지요. 일반 문과 절문은 짜 맞추는 방식이 전혀 틀려요. 사찰에서 사용하는 ‘절문’은 ‘조선문’이라고도 부릅니다. 당시에 ‘경주목공소’의 김종군이라는 사람이 저에게 ‘절문’ 짜는 법을 가르쳐준 스승이지요.”·····“몇 년 객지 땅을 떠돌다가 26살에 매화리 외사촌 매형 가게 인근에 ‘새마을가구점’을 열었습니다.”

방위생활을 끝마치고도 1년여 사촌 매형이 운영하던 가구점에서 더 일하던 김씨는 좀 더 폭넓은 목수 기술을 익히기 위해 한동안 떠돌아다니게 된다.  

 

“사촌 매형 밑에서 일을 하다가 ‘한군데에서 일하다보니 더 이상 기술도 늘지 않고 해서 좀 더 떠돌아다니면서 색다른 기술을 배워보자’ 싶더라고요. 그래서 북면에서 문짝을 전문으로 짜던 가구점의 최진용씨 밑으로 들어갔습니다. 당시는 한창 부구광산이 잘 돌아갈 때여서 가구도 많이 팔려 나갔고, 새집을 많이 짓다보니 문짝도 많이 제작했습니다. 최진용씨 밑에서 2년 반 정도 있으면서 일반 문짝을 짜 맞추는 기술을 배웠어요. 그런데 최진용씨는 조선 문짝을 짜는 게 아니라 일반문짝을 짜던 사람이었지요. 그래도 최진용씨가 제 문짝기술의 첫 스승인 셈입니다. 서울에서도 문짝 짜는 것을 가끔씩 구경하기는 했어도 제대로 배운 건 아니었습니다. 그때는 나이도 젊고, 좀 더 나은 기술을 배우려고 전국을 일주할 계획도 거창하게 세웠어요. 그러면서 삼척, 동해, 강릉, 속초, 철암, 장성 등지로 목수 기술이 뛰어난 사람이 있다는 곳을 찾아서 많이 돌아다녔습니다. 한자리에 오래도 안 있고, 5개월이나 6개월씩 머물면서 그렇게 떠돌아 다녔지요. 그러다가 황지에서 ‘더 이상 떠돌아다니다가는 안 되겠구나, 돌아서자’ 싶어서 도계로 내려왔지요. 도계에서 어릴 때 옷도 사주고 하던 셋째 이모 고물상 인근의 극장 옆 가구점에서 다시 ‘호마이카’도 짜고 그렇게 한 2년 정도 지냈어요. 그러다가 다시 경주로 내려갔어요. 어떤 사람의 소개를 통해 경주에 내려가서 ‘경주목공소’라는 곳에서 절문 짜는 법을 배우게 되었지요. 일반 문과 절문은 짜 맞추는 방식이 전혀 틀려요. 당연히 절문 짜는 법이 어렵고 일도 섬세하고요. 일이야 많고 말고지요. 사찰에서 사용하는 ‘절문’은 ‘조선문’이라고도 부릅니다. 당시에 ‘경주목공소’의 김종군이라는 사람이 저에게 절문 짜는 법을 가르쳐준 스승이지요. 경주에서 6년 6개월 정도 일하면서 절문 짜는 법도 익히고 나니까 목수 일에 자신이 붙기 시작했습니다.”  

 

강원도 일원을 거쳐 경주까지 가서 절문 짜는 방법까지 익힌 김천학씨는 원남면 매화리로 되돌아와서 외사촌 매형이 운영하던 가구점 인근에 ‘새마을 가구점’이라는 상호의 가게를 열고 장사를 시작한다.  

 

“몇 년 객지 땅을 떠돌다보니 26살이 되었어요. 지금 생각하니 경주에서 올라와서 울진읍내로 가지, 왜 이곳 매화에서 가구점을 열었는지 모르겠니더. 더욱이 외사촌 매형 가게 인근에 ‘새마을가구점’이라고 또 다른 가구점을 열었으니 성질이 깐진(까다로운) 매형 때문에 한동안 심신이 고달프기도 했지요. 그때만 해도 기성 장롱이 많이 쏟아져 나오면서 더 이상 수제작한 가구를 원하는 사람들이 없었어요. 그러다보니 가구점을 하면서도 가구는 별로 취급하지 않고 순다지 문짝만 짰습니다. 이곳저곳 집짓는 곳으로 가서 문짝을 주문 받아와서 바쁘게 손을 놀려서 문짝을 짜고 그랬지요. 또 이름이 알려지면서부터는 집짓는 업자들이 문짝을 주문하기 위해 많이들 가구점으로 찾아오기도 했고요. 그때는 목공소도 가구점이라는 상호를 많이 붙였는데, ‘새마을가구점’이라는 상호를 ‘매화목공소’로 바꾼 지는 이제 한 10년 정도밖에 안되었습니다.”

 

29살 되던 해에 4살 연하의 이정순씨를 만난 김천학씨는 슬하에
덕우(뒷줄 오른쪽)와 덕륜, 두 아들을 두었다

김천학씨 집안의 가훈 ‘천번 만번’. 김씨는 ‘천번을 만나면 천번을 인사하고, 만번을 만나면 만번을 인사하라’는 뜻이라고 설명한다

 

“집사람은 중매를 통해서 만났어요. 처음에는 집사람이 저를 썩 마음에 들어 하지 않고 싫다고 했는데, 제가 좋아서 집사람을 많이 쫓아다녔지요. 끈질기게 계속 집으로 찾아갔어요.”·····“우리 집 가훈이 ‘천번 만번’입니다. 경주의 어느 절에 계시던 스님이 사람은 인사를 잘해야 행동도 밝아지고, 마음도 맑아진다고 얘기하더라고요. 그 얘기를 듣고 난후에 기억하고 있다가, 애들을 낳고 난 다음에는 누구든지 쉽게 실천할 수 있는 ‘천번 만번’을 가훈으로 정하게 되었지요.”

평생 소목장이로 살아온 김천학씨는 29살 되던 해에 4살 연하의 이정순씨를 만나서 결혼한다.  

 

김천학씨의 부인 이정순씨는 현재 울진의료원에서 간병인으로 근무하고 있다.
“집사람은 중매를 통해서 만났어요. 큰 형님이 북면 덕천리에서 아버지를 모시고 살았는데, 그 동네에서 알고 지내던 어느 아주머니와 함께 중매를 한 거지요. 죽변면 3리 봉계가 고향인 집사람은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하다가 여름 휴가 때 내려와서 집에서 한달 쉬고 있었는데, 그때 중매를 한 겁니다. 처음에는 집사람이 저를 썩 마음에 들어 하지 않고 싫다고 했는데, 제가 좋아서 집사람을 많이 쫓아다녔지요. 끈질기게 계속 집으로 찾아갔어요. 집사람은 결혼하고 나서 목공소의 일이 줄어들면서부터 초등학교와 중학교 급식소에서 계속 일하다가, 애들이 학교를 관두면서 급식소도 그만두게 되었지요. 제 목공소의 일이 많으면 함께 일하면 되겠지만, 95년 무렵부터 샤시(새시)가 쏟아져 나오면서 문짝 제작이 엄청난 타격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집사람은 따로 돈 되는 일을 찾아 다녔지요. 집사람은 정말 돈 되는 일이라면 밤이고 낮이고 가리지 않고 이리저리 찾아 다녔어요. 집사람에게는 항상 고맙고 미안하지요. 급식소를 관두고서는 간병인 자격증을 따러 대구에 있던 제 사촌동생 집으로 내려가서 학원을 다니면서 간병인 자격증을 땄어요. 그때부터 의료원에서 간병인으로 지금까지 근무하고 있지요. 간병인으로 근무하는 일은 돈도 돈이지만 무엇보다 봉사정신이 있어야 되는데, 집사람은 보람도 느끼면서 지금까지 잘 근무하고 있습니다.”  

 

29살에 연하의 부인 이정순씨를 만난 김천학씨는 슬하에 두형제를 두었다.
“덕우와 덕륜, 두 아들을 두었습니다. 큰 아들 덕우는 안동에서 대학교를 나와서 현재 구미에서 초등학교 계약직 교사로 근무하면서 대학원에 다니고 있어요. 27살에 결혼해서 지금 7개월 된 아들 하나를 두었고요. 작은 아들은 안동에서 대학교를 3학년까지 다니다가 3사관학교를 나와서 경기도 연천에서 중위로 군에 근무하고 있습니다. 집안 형편이 그리 넉넉한 편이 아니었는데도 두 아들 모두 반듯하게 자라주어서 항상 고맙게 생각하고 있지요.”  

 

부인에게 항상 미안하고 두 아들에게 고맙다고 말하는 김천학씨의 집 거실 중앙에는 나무에 서각을 한 ‘천번 만번’이라는 가훈이 걸려 거뜬히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우리 집 가훈이 ‘천번 만번’입니다. 총각 시절에 경주의 어느 절로 문짝을 달러 갔는데, 어떤 스님이 사람은 인사를 잘해야 행동도 밝아지고, 마음도 맑아진다고 얘기하더라고요. 그 얘기를 듣고 난후에 기억하고 있다가, 애들을 낳고 난 다음에 교육문제를 고민하다가 누구든지 쉽게 실천할 수 있는 ‘천번 만번’을 가훈으로 정하게 되었지요. 살아가면서 아는 사람들을 만나게 될 때, ‘천번을 만나면 천번을 인사하고, 만번을 만나면 만번을 인사하라’는 뜻입니다. 예전에 애들이 어릴 때 목공소 근처에서 놀다가 노는 일에 정신이 팔려서 이웃 어른들에게 인사를 안 하면, 애들을 불러서 어른들을 뒤쫓아 가서라도 다시 인사를 하고 오라고 시키고는 했어요. 그러다보니 우리 애들은 온 동네에서 인사를 잘한다고 소문이 났어요. 어릴 때부터 그렇게 교육을 시켰더니 아직까지 인사를 잘하는 습성은 몸에 배어 있고요.”

 

“나무를 살 돈조차 마련할 길이 없어서 공사업자들에게 제때 문짝을 납품하지 못하니 신용은 신용대로 떨어졌지요. 심지어 ‘김천학이에게 문짝을 맡기면 한 일년은 간다’는 소문까지 떠돌고는 했어요.”·····“그날 밤은 보름달이 유난히도 훤하게 밝았어요.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나서 ‘이젠 죽자’ 싶어 농약병을 따고 마시기전에 물속을 내려다보니, 우리 큰아들이 물속에서 방긋방긋 웃고 있더라고요. 하늘을 쳐다보다가 다시 물속을 들여다봐도 또 아들이 방긋방긋 웃고요. 그래서 아이고 내가 살 팔자지, 죽을 팔자는 아닌 모양이다 싶어서 농약병을 물속에 던져 버렸어요.”

원남에서 ‘새마을가구점’을 운영하던 김천학씨는 30살에 오토바이를 타고 설날 대목 수금을 다녀오다가 대형 교통사고를 일으킨다.  

 

사고 후에 한동안 김씨는 평생을 통틀어서 가장 혹독한 시련기를 보내게 된다.
“올해로 29년이 지난 일이네요. 그해 겨울, 설날 바로 전날인 섣달 그믐날에 오토바이를 타고 오산리 큰골이라는 곳으로 설 대목 수금을 갔다 오는데, 군부대 소초 앞에서 어떤 군인이 매화시내까지만 태워달라며 손을 들더라고요. 그래서 ‘눈비가 살살 오는데, 급해서 그렇겠지’ 싶어서 태워주었는데, 도중에 모레이(커브)에서 오토바이가 눈길에 미끄러지면서 그 군인이 뇌진탕으로 그만 세상을 떴습니다. 그 일 때문에 참 굉장한 고통을 겪었습니다. 그 일로 영덕까지 갔는데, 땡빚을 내서 합의를 보고 집행유예로 겨우 풀려나기는 했어도 가정은 가정대로 남아 있는 돈은 하나도 없고 그랬어요. 또 합의금으로 이자가 삼부 사부되는 빚을 얻어 썼으니 어디 사람이 살수가 있어야지요. 그때 집사람이 마음고생, 돈고생 죽을 고생을 다했습니다. 하도 급해서 결혼할 때 목걸이 5돈, 반지 3돈 했던 것까지 다 팔았을 정도니까요. 사람이 살다가 갑작스레 계획에 없던 그런 일을 당하고 나니 가정생활이 금세 엉망이 되더라고요.”  

 

얻어 쓴 빚으로 가정생활이 엉망이 된 김씨는 한때 돈이 없어서 문짝을 짜는 재료인 나무를 구하지 못해 든든하게 지켜왔던 신용까지 바닥으로 추락하자, 농약을 마시고 죽을 각오까지 했었다고 전해준다.  

 

“교통사고 합의를 본다고 비싼 이자까지 물어가면서 빚을 얻어 썼으니 집에 남아 있는 돈은 없고, 나중에는 나무 살 돈조차 마련할 길이 없었습니다. 그래도 먹고 살려니 공사업자들로부터 문짝 주문은 받아야 했고, 제때 문짝을 납품하지 못하니 또 신용은 신용대로 떨어졌지요. 제 사정을 알지 못하는 공사 업자들 사이에 소문도 금세 안 좋게 나고, 그러다보니 일거리는 또 일거리대로 줄어들었고요. 심지어 ‘김천학이에게 문짝을 맡기면 한 일년은 간다’는 소문까지 떠돌았습니다. 여기서 벌면 저곳의 빚 갚고, 저기서 돈을 벌면 이 빚을 막고 참말로 정신이 하나도 없었어요. 도저히 어떻게 빠져나갈 방법이 없더라고요. 그래서 어느 순간에 ‘마누라와 자식들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나 혼자 가자’ 싶은 생각에 못 먹는 술과 농약 한병을 사서 요 너머 하천으로 내려갔습니다. 그때만 해도 하천에 물이 많이 흘렀어요. ‘집사람도 내가 죽고 없으면 어디 딴 데로 갈 것이고, 그러면 지금보다야 사는 게 낫겠지’ 싶은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곳에서 두발을 물에 담그고 혼자 네홉들이 소주 한병을 다 마셨는데 취하지도 않더라고요. 그날 밤은 보름달이 유난히도 훤하게 밝았어요.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나서 ‘이젠 죽자’ 싶어 농약병을 따고 마시기전에 물속을 내려다보니, 우리 큰아들이 물속에서 방긋방긋 웃고 있더라고요. 하늘을 쳐다보다가 다시 물속을 들여다봐도 또 아들이 방긋방긋 웃고요. 그래서 ‘아이고 내가 살 팔자지, 죽을 팔자는 아닌 모양이다’ 싶어서 농약병을 물속에 던져 버렸어요. ‘죽을 용기가 있는데 왜 살지 못하겠나’ 싶더라고요. ‘죽을 각오로 살자’하고 결심을 하고 나니까, 긴장이 풀려서 그런지 갑자기 못 마시는 술이 확 오르면서 정신을 잠시 잃고 말았어요. 그러다가 정신이 들어서 힘없이 집으로 돌아왔는데도 여전히 문짝 나무 재료를 살 돈은 없었습니다.”

 

 

“원자력 1,2호기 건설 현장의 동아직영 공사장에 가서 기술 시험을 봤는데, 그전에 배운 실력이 있다 보니 현장 인부들을 통솔하는 조장이 됐습니다. 매일같이 밤낮으로, 야간에 철야에 정말 죽도록 일했습니다. 그때 하루 일당이 13,500원이었는데, 제가 동아건설 직영업체 인부들 중에서는 최고로 많은 일당을 받았어요.”·····“이집을 살 때도 밤낮으로 집사람과 문을 짰습니다. 집사람도 목수 남편과 오래 살다보니 문 짜는 일을 잘합니다. 저는 나무를 대패로 다듬고 깎아서 문짝의 홈을 만들고, 집사람은 옆에서 작은 망치로 문살을 두들겨가면서 문을 짜 맞추었고요.”

오토바이 사고로 빚을 짊어지고 살길이 막연하여 농약을 마시고 죽을 작정까지 했던 김천학씨는 다시금 마음을 다잡고, 마침 당시에 시작된 울진원자력발전소 1,2호기 건설 공사현장에서 인부로 일하면서 겨우 빚을 청산하게 된다.  

 

“당장 밑천이 없으니까 문짝 짜는 일을 할 수가 있어야지요. 그때 마침 원자력공사가 시작되었어요. 원자력공사 건설 현장의 동아직영 공사장에 가서 기술 시험을 봤는데, 그전에 배운 실력이 있다 보니 현장 인부들을 통솔하는 조장이 됐습니다. 주로 닥트 일을 했어요. 조장이 되니까 밑으로 50명, 60명이 딸려 있는데, 이 작은 덩치에 그 많은 사람들을 끌고 다녀보소. 매일같이 밤낮으로 야간에 철야에 정말 죽도록 일했습니다. 그때 하루 일당이 13,500원이었는데, 제가 동아건설 직영업체 인부들 중에서는 최고로 많은 일당을 받았어요. 한달 동안 제일 많이 가지고 올 때는 당시 돈으로 200만원 넘게까지 집으로 가지고 왔으니까요. 한 1년 넘게 죽었다하고 정신없이 일하면서 원자력발전소 공사 현장을 다니다 보니까 겨우 빚을 다 갚겠더라고요. 그리고 몇 년 뒤에 울진원자력 3,4호기 건설 공사 현장에도 잠깐 일하러 다녔는데, 그때 집에서 빈둥거리며 놀고 있는 매화리의 백수란 백수는 전부 다 데리고 함께 일하러 다녔습니다. 그때 제 시간을 뺏겨가면서 서류도 다 만들고, 출입증도 다 만들어주고 했는데, 시간이 지나니까 남에게 베풀었던 그런 고마움은 흔적도 없더라고요. 그래도 원래 인복이 없는 팔자니 또 어쩌겠어요? 빚을 다 갚고 나서는 원래 배운 재주대로 목수로 돌아왔지요.”  

 

울진원자력발전소 1,2호기 건설 공사 현장에서 밤낮없이 일한 덕분에 빚을 다 갚은 김씨는 다시 원래 직업인 목수 일을 시작하게 된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철야와 야간을 해서 남의 빚을 겨우 갚고 나서는 다시 가구점을 열고 일을 시작했지요. 그리고 지금 살고 있는 이집을 계약하게 되었는데, 수중에 3만원밖에 없어서 나머지 7만원을 남에게 빌려서 계약했어요. 당시에 이집은 땅주인이 따로, 집주인이 따로 있었는데, 100만원 주고 집을 사고, 또 120만원을 주고 땅을 샀습니다. 이집을 살 때도 먹고 살려니까 그랬는지, 때마침 기성면 방율리에서 집수리가 두채 들어왔어요. 그래서 밤낮으로 집사람과 문을 짰습니다. 집사람도 목수인 남편과 오래 살다보니 문 짜는 일을 잘합니다. 저는 나무를 대패로 다듬고 깎아서 문짝의 홈을 만들고, 집사람은 옆에서 작은 망치로 문살을 두들겨가면서 문을 짜 맞추었고요. 집사람도 문짝 붙이는 일은 잘하니더. 하도 마음이 급하다보니 그때는 밤이 왜 생겼는지 한탄할 정도였어요. 그렇게 집을 사고 나니 돈도 조금 남았습니다. 그리고 4년 후에는 농협에 대출을 받아서 새로 집을 지었지요. 그나마 제 손으로 직접 집을 지었으니 남들보다는 싸고 튼튼하게 지을 수 있었습니다.”       

 

“1톤 트럭으로 나무를 외상으로 싣고 왔지요. 그때 나무 한 트럭이 48만원인가 됐어요. 그 돈을 한달 보름 만에 다 갚았지요. 그랬더니 ‘니놈은 남의 돈 떼먹는 성질이 못되니까, 앞으로도 얼마든지 외상을 주겠다’고 하더라고요.”·····“샤시 창호가 나오면서 당장 일이 끊기니 어쩌겠어요? 공사현장이란 현장은 가리지 않고 다 쫓아다녔지요. 한 가지만 해서는 도저히 밥도 먹고 살길이 없고, 애들 공부도 시킬 재간이 없다는 생각을 했어요.”

원자력발전소 건설 공사 현장에서 일하면서 빚을 다 갚고 집까지 사게 된 김천학씨였지만, 여전히 그의 수중에는 문짝 재료인 나무를 살 돈이 넉넉하지 않았다.
“집은 샀지만 여기서 벌면 저기에 돈이 들어가고, 저기서 벌면 여기에 돈이 들어갔으니 여전히 문짝 재료인 나무를 사지 못할 때가 많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울진서 창성목재를 하던 어른이 우리 집으로 찾아와서는 ‘왜 요새는 나무를 사러 오지 않느냐?’고 묻더라고요. 그래서 돈이 없어서 나무를 사지 못해 당장 일을 못하고 있다고 솔직히 말씀드렸지요. 그러니까 저보고 ‘니가 참 바보다’ 하면서 내일 당장 나와서 외상으로 나무를 필요한 만큼 가지고 가라고 하더라고요. 정말 피눈물 나게 고마운 말 한마디였지요. 그래서 1톤 트럭으로 나무를 외상으로 싣고 왔습니다. 그때 나무 한 트럭이 48만원인가 그렇게 됐어요. 그 돈을 한달 보름 만에 다 갚았지요. 그랬더니 ‘니놈은 남의 돈 떼먹는 성질이 못되니까, 앞으로도 얼마든지 외상을 주겠다’고 하더라고요. 지금 생각해도 그때 그 어른의 마음 씀씀이가 너무 고맙지요. 사람이 어떻게 그런 고마움을 잊고 살겠습니까?  

 

살아오면서 죽을 결심을 할 만큼 큰 어려움을 극복한 김천학씨는 1995년경부터 공장에서 새시 창호가 대량으로 쏟아져 나오면서 나무로 문짝을 만드는 일이 거의 끊겼다고 말한다.  

 

샤시문으로 인해 일거리가 뚝 끊긴 다음부터 김씨는 각종 공사현장을 따라 다니면서 닥치는 대로 건축 토목 일을 했다.
“샤시로 만든 문이 나오면서 당장 일이 끊기니 어쩌겠어요? 공사현장이란 현장은 다 쫓아다녔지요. 한가지만 해서는 도저히 밥도 먹고 살길이 없고, 애들 공부도 시킬 재간이 없다는 생각을 했어요. 공사현장에서 남들이 못을 치면 같이 못도 치고, 도면도 배우고 그랬습니다. 지금도 전화가 오면 어느 현장이든지 달려갑니다. 일해서 먹고 사는데 자존심도 없지요. 일거리가 없으면 제가 먼저 업자들에게 전화해서 ‘일거리 좀 달라’고 하고, ‘나도 함께 좀 먹고 살자’고 하고 그러지요. 아파트나 게인 주택 공사 현장, 도수로 공사, 도로 공사 현장, 안 다녀본 곳이 없어요. 집짓는 일도 보일러를 깔고 설치하는 기술만 조금 딸리지, 제 손으로 집 한 채를 다 지을 수 있을 정도입니다. 저는 성격이 어떤 공사 현장에 들어가면 그 공사가 끝나야 나오지, 중간에 나오는 법은 평생 없습니다.”    
  

 

가난하게 살면서도 막내아들에게 따뜻하게 마음을 써주며 키워준 어머니를 나중에 죽어서 만나게 되면, 평생 고단하게 일하느라고 험해진 손에 대해 뭐라고 둘러 돼야 할지 난감하다는 김천학씨다.  

 

울진 지역에서 현역으로 활동하고 있는 소목장이 가운데, 짜임 제작 기법으로 전통적인 조선문을 제작할 수 있는 목수는 김천학씨가 거의 유일하다.  

 

국민학교를 졸업하던 14살 때부터 당장 먹고 살기가 힘들어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아 가면서까지 어렵게 배운 목수일이지만, 평생 호의호식하며 살아오지도 못한 소목장이 김천학씨다.  

 

일평생 소목 목수로 살아온 김천학씨는 지금까지 서너명의 젊은 사람들이 목수 일을 배워 보겠다며 찾아왔었지만, 다들 얼마 버티지 못하고 다른 일을 찾아 가더라며 쓸쓸해한다.  

 

밤늦은 시간까지 계속된 인터뷰를 마치고 돌아오는 내내 김씨의 마지막 말이 여운을 남긴다.
“요새 젊은 사람들이야 다들 등 뜨시고 배부른데, 누가 이런 힘든 일을 배우려고 하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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