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진 세월로 익은 노동요, 평해 월송 조석랑씨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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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대의 노인들은 일제강점기에 태어나서 식민지 국가의 주민으로 핍박과 차별을 받으며 어린 시절을 보냈고, 얼마 지나지 않아 6.25전쟁의 모질고 암담한 세월까지 함께 보낸 세대들이다.
사람으로 살면서 먹고 사는 일보다 더 중요한 지고지순한 가치가 있을까?
‘배부른 돼지보다는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낫다’는 얘기도 끼니 걱정이 없는 사람들의 사치스런 허언이다.하루 이틀만 강제로 먹을 것을 중단시키면 오로지 배를 채우는 일만이 세상 최고의 가치임을 쉽게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익히 알고 있다.
예전과는 달리 지금은 오히려 먹을 것이 넘쳐나서 탈이 되고 독이 되는 시대이다.
일제강점기와 6.25전쟁을 고스란히 작은 몸뚱어리로 견뎌온 세대는 무엇보다도 당장 먹고 사는 일에 매달려야했기 때문에 제대로 된 교육도 받지 못했고, 전통적인 가치관에 얽매여 요즘에 비해 상대적으로 많은 자식들을 먹이고 입히기 위해 고생만 해온 세대들이다.그런 만큼 칠흑 같은 과거의 긴 터널을 지나온 노인들은, 특히 여성인 어머니들은 강인한 생활력으로 자신의 성격과 형편에 맞게 시대적인 배경상 누구나 가난하던 그때에 딸로써, 며느리로서, 어머니로써 어떤 희생이라도 감내하면서 한 집안의 생계를 책임지는 경우가 많았다.
시대를, 세월을 살아오면서 여성으로서 그 흐름에 순응하기도 하고 개개인이 처한 경제적 형편을 어렵사리 헤쳐 나오면서도 적극적으로 세월을 두팔로 감싸 안았던 이들 또한 과거를 살아온 여성들이다.
그런 노인들은 지금도 여전히 자신의 삶을 반추하고 해석하면서 적응해나가는 능동적이고 다양성을 지닌 주체이며, 이따금은 자신의 핏줄을 가진 가족과 자식을 통해 자아의 욕구를 최대화하기도 한다.
이와는 별개로 가난해서 어렵기만 했던 지난 시절, 시골에서 태어나 농사를 업으로 먹고 살아온 노인들은 민중문학인 구비문학의 대가들이기도 하다.
국문학의 저층이라고 불리는 구비 또는 구전문학은 농사, 길쌈, 고기잡이를 하는 노동의 무료함과 고단함을 달래기 위한 노동요로 즐겨 불렸고, 이런 구비문학은 일하는 사람들의 의식과 심성을 잘 드러낸다.
글자로 기록되지 않은 채 치열한 삶의 현장에서 불려지고, 기억을 통해서만 윗대에서 아랫대로 전승되어 내려온 노동요는 하층 민중의 의식을 세밀하게 들여다볼 수 있는 잣대이기도 하고, 거침없이 밀려드는 외래문화에 오염되지 않은 우리만의 향토문화 자산이자 진흙 속에 꼭꼭 숨겨진 소중한 옥석이기도 하다.
조석랑씨가 현재 살고 있는 집을 새로 지을 당시“친정집은 남매밖에 없어요. 다른 자식들도 더 낳았다는데 다 어릴 때 낳아서 흘려뻐리고 그랬지요.”·····“농사는 얼마 없어도 식구가 적으니까 다른 집들처럼 크게 배는 곯지 않았어요. 그러니 외아들 하나라도 공부를 시켜서 선생질을 할 수 있었지요.”
일제강점기인 1925년에 태어나서 질곡의 세월을 살아온 조석랑(여. 85세. 평해읍 월송리)씨는 지금 살고 있는 월송리가 안태고향이다.
“본데 이 동네 월송에서 태어났어요. 이 동네에서 태어나서, 이 동네에서 커가지고, 이 동네에 시집가서, 지금까지 살아오고 있는 거지요. 친정아버지는 ‘조씨’ 성에 ‘봉’자 ‘술’자를 사용했고요, 친정어머니는 ‘서씨’ 성에 ‘개’자 ‘중’자를 썼어요. 아버지는 제가 칠순잔치 하기 전에 돌아가셨으니 하마 20년도 더 전에 돌아가셨네요. 친정이 본데 이 동네니까 아버지도 조기 안 골목에서 계속 사시다가 나이 들어서 돌아갔지요. 친정어머니는 아버지보다 뒤에 돌아가셨는데, 그것도 하마 20년이 훨씬 넘니더. 친정집은 남매밖에 없어요. 애초에는 다른 자식들도 더 낳았다는데 다 어릴 때 낳아서 흘려뻐리고 그랬지요. 조중환이라고 하는 친정 남동생은 지금도 조기 안 골목에서 살고 있지요. 평생 학교 교사를 하다가 퇴직해서 이제는 집에서 놀고 있니더. 올해 72살인지, 71살인지 모르겠네요. 토끼띠인데, 아마도 71살인가 보네요. 남동생과 저는 10년 넘게 차이가 나지요. 그 사이에 여동생이 셋이나 있었다는데, 어릴 때 다 없애버렸고요. 그런데 어릴 때 죽은 게 모 필요있니꺼?”평해 월송마을에서 일제강점기에 태어난 조석랑씨는 어린 시절에 먹고 사는 일은 늘 고만고만했었다고 말한다.
“친정 부모님은 농사를 지었어요. 먹고 사는 거야 늘 그저 그랬지요. 농사는 얼마 없어도 식구가 적으니까 다른 집들처럼 크게 배는 곯지 않았어요. 그러니 외아들 하나라도 공부를 시켜서 선생질을 할 수 있었지요. 농사는 논농사도 조금 있었고, 밭농사도 조금 있고 그랬어요. 본데 아주 윗대 어른들은 포항 못 미처 흥해에서 살다가 후포로 들어왔다고 하더라고요. 그러다가 후포에서 이곳 평해 월송으로 옮겨와서 영 자리를 잡았어요. 그런 조상들의 역사도 귀가 있으니 듣고 기억해둔거지요.”
1987년 10월, 동네 점방을 운영할 당시에 함께 한 가족들. 점방은 후에 조석랑씨가 현재 살고 있는 집으로 신축되었다“틈틈이 야학을 다니면서 익힌 글씨는 소죽을 끓일 때 부지깽이로 부엌바닥에 써보면서 완전히 익히고는 했어요. 그렇게 글씨를 배워서 완전 까막눈은 면했지요.”·····“우리 친정‘어마이’가 집에 소 먹일 사람이 없다고 학교를 못 다니게 한 거지요. 딸이야 글을 못 읽어서‘눈이 까져 죽든지 말든지’ 그렇게 소가 더 중요하고 귀했지요.”
암울하고 가난했던 일제강점기에 태어난 조씨는 학교를 전혀 다니지 못했지만, 야학을 다니면서 한글을 익혔다고 말한다.
“주위의 어떤 사람들은 여자라도 글은 읽고 쓸 줄 알아야 하니까 국민학교라도 졸업해야 한다고 했지만, 저는 학교를 못 다녔어요. 남동생은 아들 하나뿐이라고 학교를 시키면서 저는 여자라고 학교를 안 시키디더. 그때만 해도 우리 친정집은 주위의 다른 집들보다는 먹고 살기가 괜찮았는데도요. 남동생은 그 당시에도 객지 땅인 대구까지 나가서 대구사범대 체육학과를 졸업하고 체육선생을 했어요. 그래도 저는 정규학교에 입학하지는 못했지만, 일정시대에 각 동네마다 있던 야학을 다니며 글을 깨우쳤지요. 야학을 다니면서 남들보다는 글을 빨리 익혀서 그런지 반장을 맡기도 했어요. 바쁘게 집안의 가사를 도우는 틈틈이 야학을 다니면서 익힌 글씨는 소죽을 끓일 때 부지깽이로 부엌바닥에 써보면서 완전히 익히고는 했어요. 그렇게 글씨를 배워서 완전 까막눈은 면했고, 어릴 때 야학에서 배운 일본어는 지금도 기억이 생생하지요. 일정시대에는 또 강제 공출도 말도 아니게 심했어요. 면에서 서기가 나와서 공출을 했는데, 집집마다 안 뺏기려고 곡식을 단지 속에 넣어서 어디로 들고 가서 숨겨놓기가 일쑤였지요. 독한 면서기들이 집집마다 강제 공출을 하려고 뒤지고 다녔으니까요. 아이고 참말로, 그런 세월을 살아왔니더.”국민학교 입학 적령기에 학교에 입학하지 못한 조석랑씨는 학교를 다니지 못하던 당시의 여느 아이들처럼 부모님을 도와서 농사도 거들고, 소를 끌고 가까운 야산으로 풀도 먹이러 다니면서 유년기를 보낸다.
“다른 아이들처럼 농사에도 손을 보태고 바쁜 농사철이면 소를 끌고 인근 들판과 야산을 돌아다니고는 했어요. 저기 평해로 가다가 ‘모레이’ 도는 곳에서 물을 건너가면 ‘갱빈’이 있고 그 옆에 남산이라고 불리는 곳이 있어요. 그곳으로 자주 소 먹이러 갔던 기억이 나네요. 점심을 먹고 나면 서로 연락이라도 한 듯이 이집 저집에서 아이들이 소를 끌고 한곳으로 풀을 뜯기러 가지요. 20~30명이 한꺼번에 소를 한 마리씩 끌고 이동을 하는데 머슴아들도 있고 여자애들도 섞이고 그랬지요. 사실 우리 친정 ‘어마이’가 집에 소 먹일 사람이 없다고 학교를 못 다니게 한 거지요. 그때는 다들 사는 게 그랬어요. 우리 어마이도 딸이야 글을 못 읽어서 ‘눈이 까져 죽든지 말든지’ 그렇게 소가 더 중요하고 귀했지요. 하기사 당시에는 우리 마을도 여자는 학교에 몇 명 다니지도 못했어요. 그때도 이 동네 규모는 지금과 비슷했지요. 지금이야 객지로 이사를 나가기도 하고 죽기도 하고 그래서 빈집도 많이 생기기는 했지만요.”
조씨의 남편 박성삼씨의 육순 잔치“걸어서 잠깐이면 되는 곳에 시댁이 있었지만, 그래도 가마를 타고 시집을 갔어요. 여자로서는 평생에 한번 뿐인 결혼식인데 아무리 가깝다고 해도 가마를 안타고 갈수가 있니꺼?”·····“남편은 데릴사위가 되어 처갓집으로 들어온 택이지요. 친정어머니는 욕심이 많았는데, 사위를 처갓집으로 들인 것도 농사 일손이나 하나 더 보태자는 심보가 있었을 겁니다.”
여리고 작은 손이나마 집안의 농사일도 거들고 친구들과 어울려서 소를 먹이러 다니기도 하던 조씨는 19살에 중매를 통해 결혼하게 된다.
“중매로 시집을 갔지요. 그때만 해도 연애는 거의 없을 때였으니까요. 시댁도 요 이웃이니더. 요새는 서울로 모두 다 이사 가고 없지만, 그때는 요 이웃에 살고 있었어요. 지금은 죽고 없지만 ‘건강집’이라고 저쪽에 있었는데, 그 집 할바이가 중매를 했어요. 중매 전부터 서로가 이웃해 살면서 알고 지내던 집이었으니 굳이 중매랄 것도 없지요. 이웃집에 살면서 오빠같이 여동생같이 신랑 되는 사람하고도 잘 알고 지내던 사이였지요. 중매를 했던 그 할바이 집을 왜 건강집이라고 불렀는지는 모르지만, 그 집 택호가 건강집이었니더. 남편 되는 사람의 형제자매는 남자 다섯에 여자 둘이었어요. 5남 2녀였는데, 그중에 제 남편이 막내였고요. 남편은 ‘박씨’ 성에 ‘성’자 ‘삼’자를 썼는데, 저보다는 4살 위로 결혼할 당시에 23살이었니더. 시아버지는 ‘박씨’ 성에 ‘예’자 ‘경’자를 썼고, 시어머니는 제가 결혼해서 들어가기 전에 ‘상새(초상)’가 났다는데, 이름도 모르겠어요. 시댁 성씨는 춘천 박씨 남파(영남학파)고요.”19살에 4살 연상의 이웃집에 살던 남편을 만나 결혼한 조씨는 시댁에서 보름을 보내고 남편과 함께 친정집으로 들어와서 살게 된다.
“걸어서 잠깐이면 되는 곳에 시댁이 있었지만, 그래도 가마를 타고 시집을 갔어요. 여자로서는 평생에 한번 뿐인 결혼식인데 아무리 가깝다고 해도 가마를 안타고 갈수가 있니꺼?” 먼저 신랑이 가마를 타고 우리 집으로 와서 3일을 묵고, 저와 시댁으로 들어가서 결혼식을 올리고 난후 보름을 묵었지요. 그러고 나서 갓 결혼한 남편과 같이 친정으로 들어왔습니다. 새신랑이 데릴사위가 되어 처갓집으로 들어온 택이지요. 그때부터 한동안 저와 남편은 우리 친정에 머물러 살았어요. 많지 않았던 친정의 논밭전지도 힘을 합쳐서 부치고 그렇게 먹고 살았지요. 친정어머니는 욕심이 참 많은 사람이었어요. 모르기는 해도 결혼 후에 사위가 되는 남편을 친정집으로 불러 들인 것도 농사 일손이나 하나 더 보태자는 심보가 있었을 겁니다. 남편이 징용으로 끌려가지 전까지만 해도 처가에서 거의 머슴살이를 하다시피 했으니까요. 저는 어릴 때 친정에서 배운 길쌈을 스물 서너 살까지 계속 하다가 삼베옷도 점점 찾는 사람이 줄어들면서 손을 놓았는데, 그때는 삼나무도 직접 밭에 갈아서 키우고 베고 쪄서 삼을 삼았어요.”
조석랑씨의 7남2녀 가운데 다섯 번째 아들인 박용덕씨의 결혼식“구주탄광으로 징용을 끌려갔던 남편은 팔 빙신이 되어서 돌아 왔어요. 손가락도 오그라들고 뒤틀려서 제대로 사용하지도 못했지요. 그런데도 알라들은 자꾸 생기니 낳았지, 그때는 사는 게 정말 몸서리났니더.”·····“애들 키울 때는 식구가 많아서 먹고 사는데 정말 골탕을 먹었어요. 아이고, 무세라.”
결혼한 후에 처가에 들어와서 살던 조씨의 남편 박성삼씨는 조씨가 첫아기를 임신했을 무렵에 일본 큐슈지방의 구주탄광으로 강제 징용을 끌려간다.
“첫애기를 뱄는데 남편이 갑자기 구주탄광이라는 곳으로 강제로 징용을 끌려가게 되었어요. 그리고는 해방이 되어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해방이 되고 나서 귀국할 때 배를 타고 부산까지 와서, 부산에서 평해 월송 집까지는 삼사일 걸려서 걸어 왔다는데 사람의 몰골이 아니었어요. 한 일년 있다가 돌아왔는지, 이년 있다가 돌아왔는지는 자세히 기억을 못하겠네요. 그 당시에 징용으로 구주탄광에 끌려갔던 조선인들은 다 죽어서 돌아왔다는데, 그래도 제 남편은 살아서 돌아왔더군요. 그때는 징용도 참 많이 끌려갔어요. 일정시대의 징용뿐만 아니라 6.25전쟁 때도 강제로 사람들을 끌고 가는 것은 여전했지요. 시댁의 맏시숙 아들도 6.25때 군대에 끌려갔는데 후에 집으로 잿봉지만 덜렁 돌아왔지요. 그 집에서는 귀하디귀한 외동아들인데 죽어서 집으로 돌아온 거시더. 그 잿봉지를 울진 어디다가 올려놓고 일년에 한번씩 제사를 지낸다고 하더라고요. 그나저나 우리 남편은 살아서 집으로 돌아오기는 했지만 팔 빙신이 되어서 왔어요. 왼팔에 무슨 탄피가 날아와서 박혔다는데, 총 실탄 탄피인지 그것도 정확히는 모르겠고요. 다친 팔로 겨우 물건을 들기는 했지만 조금 무거우면 못 들고, 손가락도 오그라들고 뒤틀려서 제대로 사용하지도 못했니더. 촌에서 농사를 지어먹고 살아야하는데, 한쪽 팔을 옳게 사용하지 못하니 그 다음부터는 살아가는데 늘 골탕만 먹었지요. 그런데도 알라들은 자꾸 생기니 낳았지, 그때는 사는 게 정말 몸서리났어요.”조씨는 남편 박성삼씨가 일본 구주탄광으로 징용을 끌려가서 팔을 다치고 돌아와서는 자괴감에 빠져 성격도 거칠어지고, 술로 세월을 보내는 날이 점점 늘어가더라고 전한다.
“몸이 성해서 돌아와도 먹고 살기가 힘든데, 팔 빙신이 돼서 돌아왔으니 그 기분이야 어땠겠니꺼? 장애가 있어서 제대로 일을 할 수 없다는 좌절감 때문에 자주 술독에 빠져 살고, 노름도 하고 그러면서 제 속을 참 많이 썩혔습니다. 술을 마시는 날이면 그런 실망감에 화풀이하는 곳이 자연히 저였고, 때로는 자식들에게도 화풀이가 돌아가고는 했지요. 나중에는 술주정이 심해져서 간간히 폭력도 사용했고요. 그러면서도 무슨 일이든지 해야겠다 싶었는지 소와 돼지를 잡는 기술을 익히더라고요. 그때만 해도 가까운 곳에 푸줏간이 없어서 각 동네마다 잔치에 쓰이는 소 돼지는 그냥 그 마을에서 잡았는데, 인근 동네의 소 돼지 잡는 일은 모두 남편이 도맡다시피 했지요. 기술도 꽤 뛰어났니더. 소 돼지를 잡으면 창자는 오롯이 그것을 잡은 사람에게 돌아오지요. 그러면 집에 와서 그 창자로 국도 끓여먹고, 찌개도 해먹고 그렇게 살았어요.”
조씨는 남편 박성삼씨와의 사이에 7남 2녀를 두었다.
“첫 알라가 뱃속에 있을 때 일본 구주탄광으로 끌려갔던 남편이 살아서 돌아왔는데, 그 다음으로도 알라가 9명이나 더 태어났어요. 그런데 막내아들 하나는 어릴 때 ‘띠깻버리고(없애버리고)’ 아들 7명에 딸 2명을 두었습니다. 위로부터 원덕(남. 66세. 강릉시), 해덕(남. 64세. 서울시), 옥순(여. 63세. 태백시), 해도(남. 61세. 부산시), 광덕(남. 58세. 대구시), 달순(여. 54세. 경산시), 용덕(남. 52세. 울진읍), 왕덕(남. 50세. 대구시), 정덕(남. 46세. 수원시)이지요. 아들자식들 돌림자는 ‘덕’자로 셋째 아들 해도는 집에서 부르는 이름이 명덕이었는데, 뒤에 호적신고를 잘못하면서 해도가 되었어요. 지금이야 명절 같은 때에 객지에 나가 사는 자식들이 한꺼번에 집에 모이면 왁자지껄하게 웃고 떠들면서 다들 즐겁게 보내지만, 애들 키울 때는 식구가 많아서 먹고 사는데 정말 골탕을 먹었어요. 아이고, 무세라(무서워라)...”
1960년대 어느 모임에서. 사진 앞줄 제일 왼쪽이 조석랑씨, 바로 뒤쪽이 남편 박성삼씨“다른 아들들은 겨우 국민학교만 나왔어요. 딸 둘은 그나마 끝에 작은 딸만 국민학교를 마쳤지, 큰 딸은 1,2학년 다니다가 학교를 그만 두고, 다시 조금 다니다가 그만 두고 하다가 결국 국민학교도 못 마치고 중간에 폐지했니더. 아이고, 먹고 사는 게 여북 답답으면 그럴리껴?”·····“바빠서 나무를 구할 수가 없을 때는 농사 끝에 남은 짚을 쳐대기도 했고요. 정 급하면 가까운 산에 올라가서 생 소깝을 꺾어다가 때기도 했지요.”
남편 박성삼씨와의 사이에 7남2녀를 둔 조씨는 없는 집안에 식구들만 많아서 먹고 사는 일이 늘 힘에 겨울 수밖에 없었다며 차라리 웃는다.
“자식들은 많지, 아바이는 그나마 빙신이 돼서 옳은 돈벌이도 못하지, 그러다보니 우찌요? 노상 친정집꺼를 많이 얻어먹고 살았지요. 친정집에서 도와주지 않으면 집에 아바이가 어떤 때는 친정집으로 찾아가서 보태주지 않으면 도끼로 기둥뿌리를 다 뽀사버린다고 얼음장도 놓고 그랬어요. 그러니 안도와줄 재간도 없었지요. 아바이가 몸이 성해서 돌아와도 먹고 살기가 힘들었을 텐데 몸은 다쳐서 왔지, 그런데 알라들은 또 연연이 낳지요, 죽을 뻔 했니더. 먹고 살기도 힘들다보니 자식들 공부도 제대로 못시키고... 자식들에게는 글을 하나도 못 가르켰니더. 그런 게 자식들에게는 늘 미안하지요. 일곱째 용덕이만 학교 선생이 데려다가 자기 집에서 공부를 가르쳤지요. 최형도인가 하는 선생이 용덕이를 가르쳤는데, 재주가 좋다고 공부를 많이 시키라고 하는데도 도무지 시킬 재주가 있어야 시키지요. 그래서 집에 두었다가 어떻게 중학교를 들어갔는데, 이선생인가 하는 선생이 자기 집 아이들 공부시키면서 늘 용덕이를 같이 가르치고는 했어요. 그러다가 저거 외삼촌이 그 학교에 선생으로 들어가다 보니 장학금도 얼마 타서 보태고 해서 다른 형제들보다 조금이라도 더 낫게 공부를 할 수 있었지요. 다른 아들들은 겨우 국민학교만 나왔어요. 딸 둘은 그나마 끝에 작은 딸만 국민학교를 마쳤지, 큰 딸은 1,2학년 다니다가 학교를 그만 두고 다시 조금 다니다가 그만 두고 하다가 결국 국민학교도 못 마치고 중간에 폐지했니더. 아이고, 먹고 사는 게 여북 답답으면 그럴리껴? 힘들고 말고 그냥 앞만 쳐다보면서 죽기 살기로 살았지요. 알라들도 안 죽디더. 낳아서 죽어라고 해도 안 죽으니 또 어쩌겠어요? 그러다보니 몸은 몸대로 골탕을 먹고 마음은 마음대로 노상 속만 탔지요.”
조석랑씨는 결혼하고 나서도 친정집의 도움을 많이 받으면서 생계를 꾸려왔다고 말한다.
조씨는 자식들과 먹고 살기 위해 돈이 되는 일이면 가리지 않았다고 말한다. 사진은 예전에 운영하던 마을 점방
“저 안쪽에 작은 집이 있는데, 그곳이 친정집입니다. 원체 가진 것 없이 살다보니 노상 친정집에서 얻어먹고 살았지요. 친정집은 그런대로 이 동네에서는 알부자였어요. 논이 열댓마지기에 밭도 열서너마지기 농사였으니, 촌에서 남에게 아쉬운 소리는 안 듣고 살았지요. 티브이가 처음 생겼을 때도 월송마을에서는 우리 친정집이 제일 먼저 흑백티브이를 장만했는데, 저녁마다 온 동네 사람들이 티브이를 구경한다고 친정집으로 모여 들었고요. 자동차도 참 빨리 장만했니더. 그런데 하나뿐인 딸인 저는 유독 박하게 대했어요. 구주탄광으로 징용을 끌려갔던 남편이 팔 빙신이 돼 오고 나서는 얼마 되지 않는 친정집 논밭전지도 사람을 사서 부칠 때가 많았지요. 집안에 일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는 여자인 저밖에 없는데 그걸 누가 부치니꺼? 저는 시간이 되는대로 남의 논밭에 모도 심어 주러 다니고, 밭도 매주러 다니고, 어디서 보리쌀이라도 한줌 생기면 평해시장까지 비포장 길을 걸어서 팔러 다니고 그렇게 살았지요. 그래도 여자 몸으로 할 수 있는 일거리는 그때그때 늘 끊이지 않고 생기디더. 저 앞에 보이는 월송들만 해도 얼마나 넓어요? 평해 일대에서는 월송들이 제일 넓니더. 해마다 봄부터 가을까지 흙을 파서 일하고, 겨울에는 혹시 돈벌이가 될 만한 게 있으면 일했지만, 그나마 없으면 또 고만이었고요. 그때는 밥을 해먹거나 방구들을 데울 때도 노상 나무를 때야 했는데, 그 나무는 또 누가 하겠니꺼? 농사 품팔이를 다니면서도 제 손으로 나무를 해서 때기가 일쑤였고, 바빠서 나무를 구할 수가 없을 때는 농사 끝에 남은 짚을 쳐대기도 했고요. 정 급하면 가까운 산에 올라가서 ‘생소깝(생 솔가지)’을 꺾어다가 때기도 했지요.”“흙을 파서 농사를 지어 먹고 살고, 미물 묵을 쑤어서 4~5년 겨울동안 팔기도 했고, 앙꼬빵을 만들어서 멀리 매화장까지 팔러 다니기도 했지요. 당시만 해도 학교 운동회는 마을잔치나 마찬가지였는데, 운동회 때는 운동장 한쪽에 허름한 천막을 치고 국밥을 팔았니더.”
조씨는 많은 자식을 거느리고 살림을 혼자 도맡아 살아오면서 돈이 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닥치지 않고 할 수밖에 없었다고 전한다.설 명절날의 가족잔치. MVP, 우승, 준우승, 장려상 등의 상품이 쌓여있다
명절 가족잔치
“결혼하고 나서 곧장 친정집으로 들어와서 한 3~4년 정도 살다가 따로 분가를 했어요. 분가를 할 때도 시댁이야 가진 게 없으니 고만이었고, 그래도 형편이 조금 나은 친정집에서는 하나뿐인 딸내미가 안돼서 그랬는지, 논을 서너마지기 떼 주었습니다. 밭은 없었고요. 촌에서 농사를 짓고 살면서도 제일 큰 재산인 소도 한 마리 없이 살았으니 어떻게 농사를 짓는 살림이라고 할 수 있었겠니꺼? 하기사 소가 있어도 자식들이 어릴 때는 소먹이는 사람이 없어서라도 키우지 못했겠지만요. 사람한테 먹고 사는 일보다 더 중요한 게 있니꺼? 흙을 파서 농사를 지어 먹고 살고, 미물(메밀)을 직접 밭에 갈아서 추수하고 빻아 묵을 쑤어서 겨울철에 팔기도 했고, 몇 년 동안은 앙꼬빵(국화빵)을 만들어서 저 멀리 매화장까지 팔러 다니기도 했지요. 당시만 해도 학교 운동회는 마을잔치나 마찬가지였는데, 운동회 때는 운동장 한쪽에 허름한 천막을 치고 국밥을 팔았니더. 그리고 지금 이집이 예전에는 동네 점방이었는데, 점방도 한 10년 정도 했고요. 그러다가 점방도 안돼서 접고 일곱째 용덕이가 이 집을 새로 지었어요. 우리야 지어내니꺼? 용덕이가 총각 때 이집을 사서 살다가 나중에 시험을 쳐서 공무원이 됐고, 색시 하나 구해서 울진으로 들어가서 살고 있니더. 그래도 이집이야 어마이가 살고 있으니 우예 팔겠니꺼? 어마이 살라고 그냥 두고 갔지요.”조씨는 남편 박성삼씨가 자신이 세상을 떠날 시기를 미리 예견하는 바람에 회갑 날짜를 앞당겨서 잔치를 했던 흔하지 않은 사연을 전해준다.
“남편은 60살이 되던 해에 저 세상으로 앞서 갔어요. 그런데 이상한 일이지요. 환갑잔치라는 게 만 60살, 그러니까 우리 나이로 61살이 돼서 하잖니꺼? 그런데 음력으로 12월 14일이 생일이자 환갑날인데 3월인가, 4월 봄에 환갑을 땡겨서 해달라고 하더라고요. 자식들도 다들 먹고 살기 어려운데 무슨 염치로 환갑잔치를 땡겨서 해달라고 하나? 하면서도 하는 수 없이 환갑잔치를 해주었어요. 그런데 그해 음력 7월에 세상을 떴지요. 정식 회갑잔치날을 5개월 정도 남겨놓고요. 그때서야 알았지요. 집에 아바이가 자기 죽을 날을 미리 예측하고 있었구나 하는 것을요. 아바이가 먼저 세상을 뜨고 난 다음이라 4년 후의 제 환갑잔치는 엄두도 못 내고 그냥 지나갔어요. 남편이 죽고 없는데 혼자 환갑잔치를 어떻게 하니꺼? 그러다가 10년 뒤에 자식들이 칠순잔치를 크게 해 주었지요. 그나저나 먼저 세상을 떠난 남편도 아마 마음 편하게는 눈을 못 감았을 거시더. 자식들을 마카(모두) 다 어질러 놓고, 그걸 저한테 맡겨두고 눈을 감아야 했으니까요.”조씨는 남들만큼 못 가르친 게 항상 미안한 자식들은 국민학교만 졸업하고 나니까 다들 알아서 타지로 떠나더라고 말한다.
“자식들은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나니까 부모가 나가라고 할 사이도 없이 모두 밖으로 나가더라고요. 하기사 집에 있어봐야 배만 고프니 하루라도 빨리 집을 떠날 마음밖에 생기지 않았겠지요. 자식들은 머리가 다 똑똑해서 공부만 많이 시켜주었더라면 뭐가 되어도 됐을 텐데... 다 저희들이 부모를 잘못 만나서 세상에 태어난 죄지요.”조석랑씨의 아들, 딸들이 매월 1일 어머니의 용돈을 입금하기 위한 효도금 계좌번호
어머니 조석랑씨의 칠순잔치에 함께 자리한 9남매와 며느리, 사위들「질로 질로 가다가니/찔레꽃이가 만발했네/찔레꽃을 좀좀이 따다가/이모 버선에 잔볼거세/이모 보고 버선을 보니/없던 시메가 절로 나네/」
조씨는 어릴때 뿔뿔이 낯선 객지 땅으로 떠나갔던 자식들은 하나둘 기반을 잡아갔고, 가난했던 어린 시절을 함께 겪었던 만큼 형제자매들 간의 우애가 유달리 돈독하다고 전하며 웃는다.
“워낙 없이 살다보니 잘사는 집 자식들처럼 부모가 물려주는 재산 때문에 싸울 일도 없고, 없는 집의 좁은 방에서 다들 뒤엉켜 살면서 컸기 때문인지 형제자매간의 우애와 정은 말할 수 없이 돈독하니더. 십 수 년 전부터는 설날마다 자식들과 손주, 손녀들이 모두 제가 살고 있는 이집에 한데 모여서, 마당에 멍석을 깔고 윷도 치고 노래자랑도 하고 시끌벅적하게 잔치판을 벌이고는 했지요. 그날은 지난 한 해 동안 저에게 효도를 제일 많이 했다고 생각되는 자식을 뽑아서 재미삼아 효도상도 주고는 했어요. 설날이면 그런 잔치를 벌이면서 하루 종일 웃음소리로 온 동네가 다 시끄러웠어요. 동네 사람들이 모두 다 부러워했고요. 제 밑으로 낳은 자식 9남매가 또 자식들을 낳고 해서 모두 39명이나 되고 저까지 합치면 꼭 40명이시더. 명절날이 되면 조선팔도에 뿔뿔이 흩어져 살던 자식들과 손주 손녀들이 한꺼번에 어마이가 사는 이집에 모여 들어서 밤새 이야기꽃도 피우고, 윷놀이도 벌이는 일이 요즘 세상에 어디 흔하니꺼? 그러니까 이웃에서 다들 부러워하는 거지요. 그러다가 손주 손녀들도 커가면서 점점 자기들 일이 바빠지니까 3~4년 전부터는 조금 뜸해졌니더. 없는 살림에 알라를 많이 낳아서 키울 때는 골탕을 먹었는데, 다들 자기 먹을 것은 따로 챙겨서 태어나는지 이제 밥 굶는 자식은 없어요.”일제강점기에 풍족하지 못했던 시골마을 농부의 딸로 태어나서 한평생 일을 손에서 놓지 않았던 조석랑씨는 들판에서 일할 때 부르는 민요인 노동요를 여러 곡조 기억하고 있다.
대를 물리며 구전으로, 기억으로 이어져 내려온 노동요는 민속, 음악, 문학을 아우르는 민초들의 예술로써 근대화의 기계화 과정을 거치면서 주변에서 점점 사라지고 있어 아쉽다.
“다른 집의 모를 심어주거나 밭을 매주러 참 많이도 다녔니더. 논일이나 밭일을 할 때 너무 힘들고 지루하니까, 한 사람이 선창을 하고 다른 한 사람이 후창을 하고 그렇게 노래를 부르면서 일의 피곤함을 달랬지요. 노래라도 부르면서 일하지 않으면 너무 힘이 들어 금세 지치고는 했으니까요. 논밭에서 일하는 여름날 땡볕 밑의 하루해는 어찌나 길던지...”
조씨는 그냥 앉아서 노래를 부르려니까 허전하고 민망하다고 웃으면서도 손바닥으로 무릎을 토닥거려 가락을 맞추어 가며 노동요 두곡조를 읊어준다.
나지막한 음조로 두런두런 애잔한 음률을 타고 너울너울 넘어가는 민요를 듣고 있자면, 자연의 숨소리 같기도 하고, 할머니 어머니가 불러주던 자장가 같기도 하고, 몽롱하게 흥겹기도 하다.
이번 인터뷰를 통해 채록한 평해 월송리 조석랑씨의 모심기 노래는 2001년도에 울진문화원에서 펴낸『울진민요와 규방가사』책자에도 실리지 않은 것이어서 더욱 의미를 더한다.
「장새 장새 항해장새/니 걸머진거이 무엇인가/장두창칼에 우동비녀/팔도기생 머리댕기/머리 좋고 빛난 처녀/걸음걸이도 상내가 나네/지가 무슨 상내가 나노/발바닥에서 땀내가 나네/」
「질로 질로 가다가니/찔레꽃이가 만발했네/찔레꽃을 좀좀이 따다가/이모 버선에 잔볼거세/이모 보고 버선을 보니/없던 시메가 절로 나네/」
동네 마을회관에 다니려니 젊은 사람들(?)속에 끼어 앉아 우두커니 있는 시간이 많아서 싫고, 집에 있다가 정 심심하면 그저 가까운 이웃이나 다니며 하루를 보낸다는 조석랑씨다.
이제 월송 마을에는 집집마다 혼자 사는 할마이들이 많은데, 할마이 하나가 세상을 떠나면 집이 하나 비고, 둘이 떠나면 둘이 빈다고 얘기하는 조씨의 회한과 쓸쓸한 옆모습은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우리들 할머니, 어머니의 그것이었음을 새삼 떠올리게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