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지(餘地)있는 모와(茅窩)의 삶을 이어 사는 전하진씨 이야기

기사입력 2010.07.01 1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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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슬픈 일은 꽃이 시드는 것과 사람이 늙는 것’이라고들 얘기한다.
어느 꽃이든지, 어떤 사람이든지 한때는 아름답고 활기찼던 시절이 있었지만, 세월의 흐름은 누구도 감당할 수 없어서 힘없이 나약하게 늙어간다는 것은 슬픈 일임에 틀림없다.  

 

티 없이 아름답고 잔주름 하나 없이 팽팽하던 얼굴에 하나, 둘 주름살이 늘어가고, 탄력 있던 피부가 늘어지는 것을 사람들은 안타까워한다.
하지만 얼굴에 주름이 지고, 팽팽하던 몸 구석구석이 탄력을 잃는 것보다도 더 슬픈 일은 마음에 주름이 지는 것이라는 사실도 대부분이 공감하는 바이다.  

 

나이 들어 주름살이 많아도 마음이 젊은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나이는 어려도 마음에 덕지덕지 주름살이 낀 젊은이들도 주변에서 흔히 만날 수 있다.
나이는 들어도 마음이 늙지 않는 사람들, 그런 이들을 보면 우리는 행복을 느낀다.  

반면에 나이가 들지 않았는데도 마음에 주름살이 많이 낀 사람들을 보면 불행을 느끼게 된다.  

 

흔히 40대 이후의 얼굴은 온전히 자기 자신의 책임이라고들 말한다.
나이 지긋한 어른들의 얼굴에서는 한 사람이 평생을 살아온 굴곡의 삶을 통해 형성된 뚜렷한 흔적을 엿볼 수 있다.
그런 흔적이야말로 역설적으로 얘기하면, 또 다른 종류의 축복일수 있음을 보여주는 노인들을 주위에서 가끔 볼 수 있다.  

 

오랜 연륜과 경험으로 체득하게 된 삶의 지혜와 여유만한 아름다움이 또 있을까?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변함없는 꿈을 꾸며, 배우려는 자세를 견지하고, 타인에 대한 끝없는 관심을 가지는 노인들.
그런 노인들은 이미 다른 이들에게 또 하나의 희망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전하진씨의 부친인 고(故) 전찬국씨의 초상

 

“동네의 재 너머에 있는‘넘마을’이라는 곳에서 태어났는데, 6.25사변 후에 지금 살고 있는 이곳으로 이사를 오게 된 거지요.”·····“집에 딸린 논밭전지는 논이 10마지기에, 밭이 여남은 마지기 되었고요. 머슴이 없으면 그나마 집에 딸린 얼마 안 되는 농사라도 만만하게 지을 수 없었으니 집에 머슴을 두고 살았어요. 농사를 수확하면 머슴 세경도 계산해줘야 되고, 딸린 식구들이 먹고 살아야했으니 넉넉하지는 않았습니다.”

 

전하진(田河珍. 75세)씨는 지금 몸을 담고 살아가는 죽변면 후정1리 후당(後塘, 뒷당)마을에서 태어났다.
“원래 지금 살고 있는 여기가 아니라 마을 넘어 ‘넘마을’이라는 곳에서 태어났어요. 본 동네의 재 너머에 있는 마을이라고 넘마을이라고 했는데, 이곳에서는 확실히 보이지 않지만 저기 마을회관 너머에 또 마을이 있습니다. 지금도 사람들이 살고 있지요. 그곳에서 태어났는데 6.25사변 후에 지금 살고 있는 이곳으로 이사를 오게 된 거지요.”  

 

전씨의 부모님은 시골 동네에서는 규모가 그리 작지 않은 농사를 지어서 생계를 꾸려 나갔다.
“아버지는 담양 전씨(潭陽 田氏)에 ‘찬(燦)’자 ‘국(國)’자를 썼고요, 어머니는 최씨 성에 ‘업’자, ‘이’자를 사용했어요. 어릴 때 먹고사는 형편이야 다들 고만고만했지요. 집에 딸린 논밭전지는 논 10마지기에, 밭이 여남은 마지기 되었고요. 그렇게 별로 많지 않은 논밭을 부치며 살았는데도 집에 머슴을 두고 살았습니다. 머슴이 없으면 그나마 집에 딸린 얼마 안 되는 농사라도 만만하게 지을 수 없었으니까요. 일년이 지나서 농사를 수확하면 제일 먼저 머슴 세경을 계산해줘야 되고, 딸린 식구들도 먹고 살아야했으니 가세가 넉넉하지는 않았습니다. 대체로 어렵게 살았지요. 그렇다보니 항상 어머니가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제가 어릴 때나 지금이나 이곳 뒷당 가구 수나 인구는 별반 차이가 없어요. 어릴 때부터 뒷당 가구 수는 약 100호가 된다고 했는데, 지금도 그쯤 됩니다. 수년전에 마을에 새로 생긴 아파트 인구를 제외하고도 그만큼 되는데, 아파트까지 엄치면(합하면) 한 350여세대 정도 될 겁니다. 더구나 신울진원전 건설로 인해 공사 중인 옥난골 집단이주단지에 북면 덕천리 주민들 60호까지 이주하고 나면 400호를 넘기게 되니, 오히려 뒷당 인구는 예전보다 많이 늘어나는 것이지요.”  

 

전하진씨의 부모님은 슬하에 1남 5녀를 두었다.
“부모님 아래로 아들은 저 하나뿐입니다. 독자지요. 위로 순남(83세. 강릉시), 순연(78세. 동해시)이라는 누님 두분이 계시고, 그 다음이 저입니다. 그리고 밑으로 순놈(73세. 부산시), 금자(69세. 삼척 도계), 매자(66세. 서울시)라는 여동생이 세명 있지요. 아마 부모님은 아들이 저 하나밖에 없으니 아들 하나를 더 보려고 동생을 여럿 두었던 것 같아요. 아버지도 두형제였으니 아들이 썩 많은 집안도 아니었고요. 누님들과 여동생들도 애초에 시집을 가기는 다 근동으로 가서 지방에서 살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하나둘 객지로 나갔습니다. 어머니는 83살에 노환으로 돌아가셨어요.”
  

“울진초급중학교가 설립 인가가 나고 우리가 제일 먼저 입학했는데, 처음에는 울진향교에서 공부했어요.”·····“울진고등학교 시험에 합격하고서도 입학금이 없어서 진학하지 못한다는 사실 때문에 마음에 큰 상처를 받아 심하게 앓으면서 한동안 드러눕기도 했어요. 어머니도 하나밖에 없는 외동아들인데, 돈이 없어서 고등학교에 보내지 못할 형편이었으니 얼마나 마음이 아팠겠어요?”   

 

전씨는 죽변국민학교를 졸업한 다음 울진중학교까지 걸어 다니면서 졸업을 했다.
“8살에 죽변국민학교에 입학했어요. 지금과는 다르게 학교도 한쪽에 기다랗게 일(一)자로 지어져서 아주 작았습니다. 한 학년이 대개 60명인데, 1반이나 2반으로 가를 것도 없이 한반밖에 없었어요. 죽변국민학교를 7회로 졸업했습니다. 죽변국민학교 3학년 때던가, 일제로부터 해방이 되었고요.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바로 울진중학교에 들어갔지요. 그때의 울진중학교도 지금과 또 다른 것이 울진초급중학교 설립 인가가 나고 우리가 제일 먼저 입학했어요. 울진초급중학교 1회 졸업생인 셈이지요. 처음에 입학해서는 울진향교에서 공부했어요. 그곳에서 잠깐 공부하다가 1학년이 다 가기 전에 지금 자리에 울진중학교를 지어서 이사를 했지요. 울진중학교는 한반에 60명씩 각 학년마다 두반씩 있었습니다. 서예인인 태송 박영교선생, 초대 민선 군수를 했던 전광순군수, 울진약국을 하는 장시윤씨 등이 전부 울진중학교 동기생들이지요.”  

 

전씨는 울진중학교 1학년에 재학 중일 때 6.25전쟁을 겪게 된다.
“울진중학교에 입학한 후 죽변 뒷당 집에서 울진까지 걸어서 학교를 다녔는데, 1학년에 재학 중일 때 6.25가 터졌어요. 전쟁 중에는 학교가 문을 닫았고, 학생들도 다들 한 해 동안 쉬었지요. 1학년 중반에 전쟁으로 휴교하고, 그 다음해에 다시 학교가 열려 공부를 계속할 수 있었지요. 전쟁 중에도 멀리까지 피난을 떠나지는 않았습니다. 언젠가 인민군이 한창 밀고 들어올 때 쫓겨서 산중으로 들어갔던 적이 있어요. 저 하당 인근 ‘올미골’이라는 곳으로 피난을 떠났는데, 올미골에는 우리 집안 윗대의 선영이 있었거든요. 그 선영 밑의 재실에 피난을 가서 며칠 동안 묵다가 다시 집으로 돌아왔지요. 올미골 선영은 아직까지 있지요. 우리 선영에서 저쪽으로 넘어다보면 두천리가 보입니다. 그때는 차도 없고, 그곳까지 걸어서 피난이라고 갔어요. 가족들이 모두 함께 걸어서 그곳까지 피난을 떠났는데, 큰누나는 이미 시집을 가고 난 다음이었지요. 마을 사람들 모두 다 전쟁 중에는 친정 곳이나 외가 곳으로 피난을 떠났고, 그중에는 마땅히 피난을 떠날 데가 없어서 그저 죽으나 사나 집에서 먹고 자고 했던 사람들도 있었고요. 그때는 뒷당 마을 앞의 이 길이 동해안을 북에서 남으로 연결하는 유일한 길이었으니 어떤 때는 인민군들이 새카맣게 이 길로 지나가기도 했습니다.”  

 

6.25전쟁을 겪는 와중에서도 울진중학교를 졸업한 전씨는 상급학교인 울진고등학교 입학시험에 합격하고서도 가정형편으로 인해 진학을 하지 못하는 아픔을 겪는다.
“그때는 고등학교에 진학한다는 것이 참 어려웠어요. 우선 입학시험이 어렵기도 했지만, 시험에 합격하더라도 다들 집안 사는 형편이 거기서 거기다 보니까 눈물을 머금고 포기하는 경우도 흔했지요. 농촌에서 웬만한 사람들은 중학교도 못 가는데 고등학교까지 간다는 건 사실 힘들었지요. 저도 울진고등학교 시험에 합격했는데, 어디 입학금이 있어야지요? 처음에는 고등학교 입학금을 내지 않고도 며칠 동안 학교를 다녔어요. 그런데 울진고등학교 어윤수교장이 어느 날 교장실로 부르더니 입학금을 며칟날까지 내지 못할 형편이면 더 이상 학교에 나오지 말라고 하더라고요. 그때 어린 마음에 ‘남들은 시험에 떨어져서 학교를 못 가는데, 나는 시험에 합격하고서도 돈이 없어서 학교에 가지 못한다’는 사실에 큰 상처를 받았었지요. 그런 상심과 충격으로 인해 한동안 심하게 앓으면서 드러눕기도 했어요. 어머니는 또 어머니대로 하나밖에 없는 외동아들인데, 돈이 없어서 고등학교에 보내지 못하니까 얼마나 마음이 아팠겠어요? 그래도 어떡해요? 6.25전쟁 통에 아버지는 실종이 되어버렸고, 뻔한 농사에 돈 나올 구멍이 어디 있어야지요.”
  

뒷당마을의 간이상수도 수원지 굴착 후에

뒷당마을의 간이상수도 완공 후 통수(通水)하기 전에 마을 성황당에서 제를 올리는 모습

뒷당마을 간이상수도 완공 후에 처음으로 통수(通水)하는 마을 동수(洞首) 어른

 

“국민학교에 입학하기 전부터 한문을 익혔는데, 저는 집에서 할아버지께 한문을 배우면서 천자문과 명심보감을 읽었지요. 동네에서는 훈장선생을 어느 한집에 모셔다 놓고 그 집으로 글을 배우러 다니기도 했었고요.”·····“어릴 때 뒷당마을에서는 초등학교 교장으로 정년퇴직한 전용우교장의 할아버지가 자신의 집에 동네 애들을 모아서 한학을 많이 가르쳤어요. 뒷당은 물론이고 가까운 매정이나 죽변에서도 학동들이 한문을 배우기 위해 몰려들고는 했었지요.”  

 

죽변면 뒷당은 조선후기의 사당이며 서당으로도 이용됐던 몽양사(蒙養祠)가 동네 중앙의 현 마을회관 바로 옆에 위치해 있는 등 예로부터 한학이 뛰어났던 곳이다.

 

뒷당에서 태어난 전하진씨 또한 어릴 때부터 할아버지로부터 한문을 배웠다.
“그때는 다들 어릴 때부터 한문을 익혔어요. 국민학교에 입학하기 전부터 한문을 배웠는데, 저는 집에서 할아버지께 한문을 배워서 천자문과 명심보감을 읽었지요. 동네에서는 훈장선생을 어느 한집에 모셔다 놓고 그 집으로 글을 배우러 다니기도 했었고요. 우리가 어릴 적에 뒷당마을에서는 초등학교 교장으로 정년퇴직한 전용우교장의 할아버지가 자신의 집에 동네 애들을 모아다가 한문을 많이 가르쳤어요. 뒷당마을은 물론이고 가까운 매정이나 죽변에서도 학동들이 한문을 배우기 위해 몰려들고는 했습니다. 저에게 한문을 가르쳐주시던 할아버지는 6.25사변 후에 돌아가셨습니다. 할머니는 일제 해방 전에 세상을 떠나셨고요.”  

 

전하진씨는 10년여 전부터 집에서 붓글씨를 취미삼아서 소일하고 있다.
전씨는 울진중학교 동기생인 태송 박영교 선생으로부터 붓글씨를 배우기 시작한지 10년이 다 되어간다고 전한다.
“태송선생은 울진중학교 동기생이자 서예 스승이기도 합니다. 역시 서예를 하는 백선 윤현수 선생도 저와는 이종사촌지간입니다. 우리 어머니와 백선선생 어머니가 친 자매간이니까요. 그런데 아무래도 붓글씨를 배우기는 중학교 동기생으로 친구인 태송선생이 편하더라고요. 그래서 태송선생에게 서예를 배운지 한 7~8년 정도 됐습니다. 그동안 크고 작은 서예 공모전에 여러 번 출품해서 작은 상들도 타봤고요. 특히 나이가 들면서 서예만한 취미가 없고, 서예공부도 끝이 없다는 것을 많이 느끼게 됩니다. 지금도 일주일에 한두 번은 태송서실에 나가서 붓글씨도 연습하고, 서실에 나오는 20여명 되는 사람들과 세상 돌아가는 얘기도 나누고 그러지요. 집안에 걸려있는 서예 작품 중에는 태송선생이 기념으로 써 준 것도 있고, 제가 처음 서예를 배울 때 쓴 것도 있고 그렇습니다. 서예를 처음 배울 당시에 쓴 글씨는 10년이 지난 지금 보면 많이 엉성하지만, 저 글씨가 두 번 다시는 나오지 않을듯해서 기념으로 걸어두고 있지요.”      

 

외부 벽면에 걸려있는 현판 ‘모와(茅窩)’, 전씨는 9대조 할아버지 생전에 자신의 호(號)를 서각한 것이라고 전한다

 

“아버지는 일정시대에 창유계 사건의 하나인 후란계(後蘭契) 사건에 연류 되었어요. 당시에 그 사건으로 일제 경찰에 붙들려간 사람들 중에는 가혹한 고문 끝에 숨진 분들도 있고, 예심 중에 옥에서 사망한 분들도 있지요. 또 형을 받고 징역을 살던 중에 돌아가신 분들도 있고요.”·····“어느 날 어머니를 따라서 유치장에 수감되어 있던 아버지에게 옷을 가져다주었어요. 겨울이고 추울 때여서 솜바지를 경찰서에 수감되어 있는 아버지에게 가져다주었지요. 아버지는 울진경찰서에서 혹독한 고문을 받고 나서 결국 집행유예로 풀려 나왔습니다.”  

 

전씨의 아버지 고(故) 전찬국씨는 일제강점기에 창유계 사건의 하나인 후란계(後蘭契)사건으로 옥고를 치른 인물이다.
창유계(준향계, 후란계, 독서회)는 일제강점기 당시에 울진 유생(蔚珍 儒生)들이 울진군의 사회운동을 계승하면서 조선의 독립과 공산주의 사회의 실현을 위한 방법의 일환으로 예로부터 전래되던 계(契) 조직을 적극 활용했었다. 

 

『울진군지(蔚珍郡誌)』에 따르면, 1938년 2월 중순경 남원수, 장응두, 노하순, 최효대, 장세전, 전찬문 등이 준향계(準香契)라는 조직을 만들어 1942년 5월까지 수십차례 계회를 개최했다.  

 

그런데 준향계가 활동하고 있던 1939년 여름에 울진농민조합의 목적을 계승하면서도 조선의 독립과 사회주의 사회를 실현하기 위한 조직의 필요성에 따라, 1939년 10월경에 새로운 계(契)인 창유계(暢幽契)가 조직된다.  

 

창유계는 매년 3월과 9월에 정기계회를 개최하기로 하고, 계장 1인과 계원 15인으로 구성한 후 각 계원은 2원씩 계비를 내도록 정했다.
또한 계원은 비밀을 엄수하고, 단결을 공고히 하여 동지를 획득하자는 행동방침을 결정하고, 계의 운동은 울진농민조합의 조직과 운영에 이론적 경험이 풍부했던 최학소의 지도를 받기로 했다.  

 

창유계는 1942년 5월경까지 64회에 걸쳐 집회를 개최하면서 결속을 다지던 중, 1943년 3월 중경임시정부에 연결되어 밀파된 계원 남원수가 만주로 향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된다.
또한 같은 달 19일에 계원 장세전은 지방의 정세를 전달하기 위해 다시 중경으로 출발하려 하다가 출발 전날 역시 일본 경찰에 발각된다.  

 

이를 계기로 일제는 창유계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를 단행하게 되는데, 울진경찰서장(中富)은 일본인 고등계 형사 여러 명과 조선인 이광호를 앞세워 계원인 최황순(崔晃淳)씨 집에 있던 사진을 근거로 수색을 시작하여, 근남면 수산천 도선장에서 통행하던 청년 1명을 검문하던 중 계회 집회 통지서를 발견하고 계회에 참석하여 또한 검거하게 된다.  

 

당시에 일본 경찰은 창유계 사건 관련자 102명을 검거하여 울진연무장에 수감하고, 61명을 무혐의로 석방하고 41명을 입건 구속시켰다.
그 당시의 창유계원들 대부분은 한학을 공부한 후 초등 과정을 마쳤는데, 비록 국민학교 졸업자였지만 한학을 수업한 후 신학문을 접했던 당시의 지식인이었다.  

 

특히 창유계는 활동 방향에서 세계대전의 발발을 전망하면서 전쟁이 발발하면 소련과 일본 간에도 전쟁이 일어날 것이며, 창유계는 계의 자금을 모아 소련과 연락하여 소련에게 전쟁자금을 지원할 계획까지 세웠었다.  

 

결국 소련을 지원함으로써 조선 땅에서의 사회주의 사회를 실현할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아버지는 일정시대에 창유계 사건의 하나인 후란계 사건에 연류 되었어요. 그때만 해도 사회적으로 지식인이었고, 각 마을마다 다들 똑똑하다는 소리를 듣던 사람들이 뜻을 함께 해서 만들었던 모임이었어요. 당시에 그 사건으로 일제경찰에 붙들려갔던 사람들 중에는 가혹한 고문 끝에 숨진 분들도 있었고, 예심 중에 옥에서 사망한 분들도 있었지요. 또 형을 받고 징역을 살던 중에 돌아가신 분들도 있었어요. 그런데 다행스럽게도 우리 아버지는 울진경찰서에서 혹독한 고문을 받고 나서 결국 집행유예로 풀려 나왔습니다. 일정시대이던 그 당시에 창유계 사건은 정말 엄청난 사건이었지요. 날이면 날마다 울진 전체가 창유계 사건으로 들썩거릴 정도였으니까요. 당시에 창유계 사건에 연류 되어 구속됐던 사람들 가운데 일부는 독립유공자로 우대를 받기도 했는데, 우리 아버지는 어떻게 된 일인지 국가유공자 대접을 받지 못했습니다. 전에 언젠가, 삼일동지회라는 단체에서 울진군의 항일투쟁학살사건 진상을 조사한 결과를 책으로 만들어서 저에게 한권 전해주더라고요. 아마도 일정시대에 창유계 사건에 연류 됐던 분들의 후손들에게 한권씩 전해준 모양입니다. 이 책을 보면 후란계, 준향계, 독서회 등 창유계에 가입하여 활동했던 분들의 명단 같은 세세한 내력이 일목요연하게 적혀 있지요. 울진군지에서도 창유계 사건을 상세하게 다루고 있고요. 당연히 우리 아버지 함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전씨는 아버지가 후란계 사건으로 구속됐을 당시에 국민학교 1~2학년에 재학 중이었고 8살 무렵이었다고 전해준다.
“그때가 해방 전이었는데, 아마 8~9살 정도 됐을 때였어요. 아버지는 30대 중반에서 40대 중반정도였을 겁니다. 그때만 해도 저는 아직 어릴 때여서 아버지가 어떤 이유로 경찰서에 잡혀 들어갔는지 잘 몰랐었고요. 어느 날 어머니를 따라서 유치장에 수감되어 있던 아버지에게 옷을 가져다주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겨울이고 추울 때여서 솜바지를 경찰서에 구속되어 있던 아버지에게 가져다주었어요. 당시에 왜놈들은 수감자들이야 춥던 말든 옷도 제대로 주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하기야 강탈당한 나라를 찾겠다고 대한독립을 주장하는데 왜놈들 입장에서야 오죽 미웠겠어요? 고문도 말도 못하게 당했던 모양이더라고요. 후란계가 왜놈 경찰들에게 발각됐을 때, 우리 집안에서는 아버지와 함께 집안의 육촌 할아버지뻘이 되는 전사술씨도 구속됐어요. 전사술씨는 항렬로는 아버지의 아재뻘이었지만 나이는 동갑이었는데 함께 구속됐던 거지요. 전사술씨도 얼마 뒤에 아버지와 함께 집행유예로 풀려났습니다. 그런데 두 분 다 울진경찰서 유치장에서 얼마나 모진 고문을 당하고 또 오랫동안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는지 유치장에서 나올 때 다리를 똑바로 펴지 못하더라고요. 집안 청년들과 어른들이 두 분을 등에 업고 집으로 돌아왔어요. 얼마나 얻어맞았는지 계속 온몸이 쑤시고 결린다고 고통스러워했고요. 그나마 우리 아버지는 원체 타고난 강골이어서 덜했지만, 전사술 할아버지는 온몸을 제대로 못쓰면서 나중에는 정신까지 한번씩 왔다 갔다 하고는 했지요. 두 분은 날마다 걸어서 저 밑에 후정해수욕장의 ‘가리바위’ 근처까지 가서 운동도 하고 무릎을 고친다고 걸어도 다니고 그랬어요. 사람이 살면서 그런 일을 겪는다는 건 본인은 물론이고, 주위 가족들에게도 참 힘들고 아픈 일입니다.”

 

『울진군지(蔚珍郡誌)』에 기록되어 있는 창유계 사건 관련 구속자 명단

『항일투쟁학살사건진상(抗日鬪爭虐殺事件眞相)』보고서

 

“6.25전쟁 기간 동안인 어느 날 아버지는 홀연히 사라졌습니다. 군에 끌려간 것도 아니고, 노무자로 끌려간 것도 아닌데 그냥 사라졌어요. 그해 음력 8월 추석 무렵에 국군이 수복해서 울진으로 들어왔는데 그때 어디로 같이 밀려간 것인지...”·····“세월이 많이 흘러서 호적정리를 할 때도 실종사망이라고 했습니다. 보증인이 필요하니까 사망이라고는 못하고 실종 사망이라고 한 거지요. 가족들에게는 보통 아픔이 아니었지요. 아버지가 실종되고 난 다음에도, 한동안은 제사도 못 지내다가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다음에는 어머니 제삿날에 맞춰서 함께 제사를 모십니다.”  

일제강점기에 창유계 사건의 하나인 후란계 사건으로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울진경찰서 유치장에서 지독한 고문을 당한 후에 후유증으로 오랫동안 고생하기도 했던 전씨의 아버지 전찬국씨는 6.25전쟁 당시에 실종되었다.
“6.25전쟁 기간 동안인 어느 날 아버지는 홀연히 사라졌습니다. 군에 끌려간 것도 아니고, 노무자로 끌려간 것도 아닌데 그냥 사라졌어요. 그해 음력 8월 추석 무렵에 국군이 수복해서 울진으로 들어왔는데 그때 어디로 밀려간 것인지... 일정시대에 창유계 사건에 가담했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좌익성향이 강했던 분들이지요. 그러니 자연히 6.25전쟁이 터지고 인민군이 밀고 내려왔을 때도 자기들 나름대로는 장차 일어날 국내 정세 변화를 관측하고 손익을 따지면서 어떤 계산을 했던 것인지도 모르지요. 어쨌든 생사 자체가 확인이 안 되는 겁니다. 말 그대로 어디로 갔는지도 모른 채 돌연 행방불명이 되고 만 거지요. 그로부터 많은 세월이 흘러서 호적정리를 할 때도 실종사망이라고 했습니다. 보증인이 필요하니까 사망이라고는 못하고 실종 사망이라고 한 거지요. 가족들에게는 보통 아픔이 아니었지요. 집에서 멀쩡하게 지내던 사람이 전쟁 통에 어디 간다는 말도 없이 그냥 사라지고 말았으니 얼마나 당황스러운 일입니까? 들리는 풍문으로라도 어디서 죽었다든지 그래야 하는데, 그냥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오고가는 바람결에라도 소식 한자 전해 듣지 못한 것을 보면, 아마 어디 낯선 객지 땅에서 돌아가셨겠지요. 아니면 미처 소식도 전하지 못하고 울진 땅 어디선가 돌아가셨을 수도 있고요. 아버지가 실종되고 난 다음에도, 한동안은 제사도 못 지내다가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다음에는 어머니 제삿날에 맞춰서 함께 제사를 모십니다. 돌아가신 날을 영 모르는데 어느 날짜에 제사를 지내겠어요?”  

 

전씨는 아버지 전찬국씨가 6.25때 연락도 없이 사라지는 등 좌익을 한 집안이라는 누명(?)을 쓴 덕분에 평생 공무원 시험 응시나 기업체에 입사하겠다는 생각은 애초부터 염두에 둘 수가 없었다고 말한다.
“어쨌든 아버지는 일정시대에 좌익성향을 띄었던 창유계 사건에 연루되어 옥살이도 했고, 6.25전쟁 통에는 흔적 없이 사라지는 등으로 주위에서 우리 집을 보는 시선이 그렇게 곱지만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어쩌면 저 혼자만의 느낌일수도 있었겠지만, 그런 이유로 인해 평생 살아오면서 공무원 시험을 쳐서 공무원으로 근무한다든가 신원을 조회한 다음에 입사를 결정하는 큰 회사에 취직한다든가 하는 생각은 아예 못해봤어요. 그러니 어떻게 하겠어요? 조상 대대로 살아온 이곳 뒷당에서 지금까지 농사를 지으면서 살고 있지요.”

 

울진봉평신라비서예대전 특선 상장

후정1리 마을이장을 지낼 당시, 왼쪽은 현 후정1리 이장인 전찬업씨

 

“한마디로 그때 결혼은 양가 어른들끼리 흥정을 해버리면 그것으로 끝인 거지요. 결혼할 때 제가 먼저 가마를 타고 정림리까지 가서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이곳에서 꽃방을 가서 시거리를 통해서 박금으로 넘어가고 꼬부랑재를 넘어가면 곧장 정림마을에 닿았어요.”·····“군을 마치고 집에 돌아왔는데, 뻔한 살림살이에 당장 돈도 없고 어디 가서 돈이라도 벌어 와야 했습니다. 그래서 삼척 도계광업소라고는 탄광으로 가서 한 2년 정도 일을 했어요. 그때는 5,16혁명이 나고 무엇보다 광산경기가 괜찮을 때였어요.”  

 

울진중학교를 졸업하고 가난 때문에 상급학교에 진학하지 못한 전씨는 집에서 농사일을 거들다가 20살이 되던 해에 결혼하게 된다.
“나이 스물에 장가를 갔어요. 집사람은 울진읍 정림리 사람인데 남씨 성에 ‘필’자 ‘희’자를 써요. 저보다 2살 맏이니까 올해 77살이 됐네요. 당연히 중매로 결혼을 했지요. 그때 정림리에는 우리 할아버지 누님이 그곳으로 시집을 가서 생활하고 있었어요. 그러니까 왕고모님 아들이 중매를 한 거지요. 결혼하기 전에 사진 한 장 본적도 없습니다. 그때는 그랬지요. 그냥 어른들이 한두 번 오가면서 선을 보고 이 사람이다 정해 놓으면, 자식이야 두말없이 어른들 뜻을 좇아서 그 사람을 천생배필로 맞아 들였지요. 한마디로 양가의 어른들끼리 흥정을 해버리면 그것으로 끝인 거지요. 결혼할 때 제가 먼저 가마를 타고 정림리까지 가서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이곳에서 꽃방을 가서 시거리를 통해서 박금으로 넘어가고 꼬부랑재를 넘어가면 곧장 정림마을에 닿았어요. 정림리 뒷산을 꼬부랑재라고 불렀어요. 그때는 동네마다 가마가 한 대씩은 다 있었지요. 집성촌인 마을에서는 종갓집에서 가마를 보관하고 있다가 누구 집에서 쓴다고 하면 빌려주고는 했습니다. 가마를 타고 처가가 될 집에 두시간 정도 걸려서 도착을 한 다음에 구식으로 결혼식을 올렸지요. 그리고 처갓집에서 이틀 밤을 자고 3일째 되는 날에 혼자 집으로 돌아왔어요. 그리고 얼마쯤 시간이 흐른 다음에 날받이하는 사람에게 좋은 날을 받아가지고 신부를 집으로 들이는 거지요. 물론 신부를 정식으로 집으로 데려오기 전에도 이따금씩 처갓집을 찾아가서 하룻밤씩 묵어오고 하면서 얼굴도 재차 익혔고요. 좋은 날을 받아서 신부가 시댁으로 들어오면 다시 동네잔치를 벌였습니다. 신부는 시댁으로 들어올 때 가마를 타고 앞서서 오고, 뒤로는 상객이라고 해서 친정아버지가 뒤따라왔고요. 신랑은 집에서 기다리고 있었어요. 집사람이 이집으로 들어온 날이 음력 12월이었지요.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저는 군에 입대했습니다.”  

 

전하진씨는 부인 남필희씨와의 사이에 2남2녀를 두었다.
“아들 둘에 딸 둘을 밑으로 두었습니다. 위로부터 일출(남. 54세. 서울시), 용복(남. 51세. 서울시), 혜경(여. 48세. 청주시), 덕경(여. 45세. 전라도 영광)이 그들이지요. 이제는 다들 밥걱정 없이 살고, 추석에도 오고 설에도 오고 그러지요. 휴가 받으면 한번씩 오가기도 하고요.”  

 

20살에 결혼한 전씨는 신혼의 단꿈에서 채 깨어나지도 못한 채 몇 개월 뒤에 군에 입대한다.
“결혼하고 몇 달이 지난 그 다음해 3월 달에 만 20살이 되어 군에 갔지요. 논산훈련소에서 기초훈련을 끝마치고 광주 포병학교 통신 훈련을 거쳐서 최전방인 강원도 철원에서 군 생활을 했습니다. 11사단 포병부대에 근무했는데, 그곳이 철원 지경리던가 그랬어요. 그때의 군 생활이야 어디 요즘과 비교가 됩니까? 날이면 날마다 죽으라고 얻어맞고 그랬어요. 맞을 만 일이 아닌데도 이유도 모르고 패고 또 맞고 그랬으니까요. 원수지간도 아닌데 그때는 왜 그렇게 서로 패고 맞고 그랬는지 모르겠습니다. 군대생활이야 무엇보다 얻어맞는 것이 제일 힘든 거지요. 날마다 구타에 기합에 참 힘들었지요. 그래도 시간이 지나니까 제대를 하게 되더라고요. 28개월 만에 군 생활을 끝마치고, 그해 12월 9일 날인가 집으로 돌아왔어요.”  

 

군대를 제대하고 집으로 돌아온 전씨는 잠시 몸을 추슬러서 삼척 도계광업소에서 2년여 일하게 된다.
“군을 마치고 집에 돌아왔는데, 뻔한 살림살이에 당장 돈도 없고 어디 가서 돈이라도 벌어 와야 했습니다. 그래서 삼척 도계광업소라고는 탄광으로 가서 한 2년 정도 일을 했어요. 그때는 5,16혁명이 나고 무엇보다 광산경기가 괜찮을 때였어요. 도계광업소 하청업체인 대흥기업에서 일했는데, 광산 일이 처음이다 보니까 우선 임시직으로 굴을 뚫는 굴진하는 일을 했어요. 한 2년 정도 고생만 하다가 광산 일을 그만 두었어요. 도저히 못하겠더라고요. 가족과 같이 간 것도 아니고 혼자서 객지 땅에서 일을 하려니 너무 외롭기도 했고요.”

 

60대 중반에 부인 남필희씨와 어느 여행지에서

 

“1975년에 새마을지도자를 그만두고 난 다음에는 후정1리 뒷당마을의 이장을 맡아서 1981년도까지 일했어요. 새마을사업이 한창일 때였지요. 그때는 농사를 짓는데 농약을 안치면 감독을 나온 면서기가 난리가 나고 그랬어요. 농약을 쳐서 땅이야 죽든 말든, 그렇게 생산된 쌀이 몸에 좋든 나쁘든 일단은 배불리 먹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겨지던 시절이었으니까요.”·····“30년 전부터 유도회원으로 가입해서 활동하다가 2008년도에 유도회장을 맡아서 1년여 일을 보다가 울진향교 전교(典校)를 맡으면서 그만 두었습니다.”  

 

전씨는 군대 생활과 도계광업소에서 2년여 일한 기간을 제외하면 지금까지 고향 뒷당 집에서 농사를 지으면서 동네일을 맡아 이장일도 보고, 새마을지도자로 활동하기도 하면서 그렇게 지내왔다.  

 

“지금도 농사를 짓고 있지요. 집 뒤편 비상활주로에 인접해 있는 들이 ‘장들’이라고 하는데, 그곳에 논이 10마지기, 밭이 1000평정도 있어요. 요즘이야 기계와 장비가 농사일을 대신 지어주니까, 나이가 들었다고 해도 농사짓는 일이 그렇게 힘들 것도 없지요. 젊을 때는 새마을지도자로 마을지도자도 하고, 죽변면지회장도 하고 그랬습니다. 1975년경까지 새마을지도자로 활동하면서 이것저것 봉사가 되는 일을 많이 찾아서 했던 기억이 새롭네요. 1975년에 새마을지도자를 그만두고 난 다음에는 또 후정1리 뒷당마을의 이장을 맡아서 1981년도까지 일했어요. 그때는 새마을사업이 한창이었는데, 각 마을마다 도로를 넓힌다, 농로를 정비한다, 사방공사를 한다 그러면서 집집마다 부역도 심하고 그랬습니다. 부역은 안 나오면 다른 사람들 눈치 때문에 못 배기게끔 되어 있어요. 또 농사를 지으면서 농약을 안치면 감독을 나온 면서기가 난리가 나고 그랬어요. 요즘같이 친환경농업이 어디 있어요? 농약을 쳐서 땅이야 죽든 말든, 그렇게 생산된 쌀이 몸에 좋든 나쁘든 일단은 배불리 먹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겨지던 시절이었으니까요. 또 그 당시에는 농협에서 농약을 이장 집에 가져다주고 집집마다 배급을 하게끔 했는데, 우선 이장에게 떠맡기고 미리 돈을 받아가면서 도장을 맡아 갔어요. 그런데 그 농약이 남아돌든가, 농약을 타간 주민들이 미처 돈을 갚지 않으면 농약 값을 떼이기도 하는 그런 일이 비일비재했지요. 그때 이장 월급으로 한달에 2만3천원인가를 받았어요. 그리고 마을 주민들이 일년에 집집마다 쌀 두되씩을 모아서 주었고요.”  

 

1970년대와 80년대 초반까지 새마을지도자와 마을 이장으로 활동하던 전하진씨는 울진향교 전교와 유도회장을 지내기도 했다.
“한 30년여 전부터 유도회원으로 가입해서 활동하다가 2008년도에 유도회장을 맡아서 1년여 일을 보다가 울진향교 전교(典校)를 맡게 되면서 중도에 그만 두었습니다. 유도회장 임기는 2년이지만, 유도회장과 향교 전교는 겸임할 수가 없거든요. 울진향교 전교도 주성하라는 분이 전교를 하던 도중에 모친상을 당하면서 제가 그 후임으로 임명됐던 거지요. 상복을 입으면 향교 전교직을 놓게 되어 있었기에 주성하씨가 도중에 전교를 관두게 되었고요. 그 후에 울진문화원 이사를 지내기도 했습니다. 유도회(儒道會)는 전통 문화를 계승하고 실천하는 것을 기본으로 하고 있지요. 한마디로 유학(儒學)에 바탕을 둔 인성교육을 자신은 물론 타인들에게까지 확대하여 유학의 본래 정신을 되살리는데 주력하게 되는 것입니다. 향교에서 매년 봄가을 두차례 석전제를 지내는 것도 유도회에 소속되어 있는 유림이 주축이고, 향교의 전교나 장의(掌議)같은 직에 있는 사람들은 향교를 관리하는 임무를 맡게 되는 것입니다. 유도회장하면 일반인들은 잘 알지 못하지만 성균관에도 가고, 각종 연수도 받고, 강사를 초청해서 유도회원들을 상대로 인성교육에 관한 특별 강의도 하고 꽤나 하는 일들이 많습니다. 그러니까 지역 유림의 한사람으로서 유도회장이나 향교 전교를 맡는다는 것은 큰 영광이기도 합니다.”

 

성균관유도회총본부회장의 울진지부회장 선임장

성균관장의 울진향교 전교 선임장

2008년 4월 22일 성균관(成均館) 신임(新任) 전교(典校) 고유(告由)를 마치고(우측 첫번째)

2009년 울진향교 전교(典校)를 지낼 당시 춘기 석전대제 후에(왼쪽에서 두번째)

 

“마을회관 옆에 있는 몽양사(蒙養祠) 서당 유허비의 전이석 선생은 친할아버지는 아니지만, 항렬로 따지면 저에게 11대조가 됩니다. 전이석과 주필대 선생은 예전 서당의 훈장으로 이 마을과 인근지역의 학동들을 많이 가르쳤는데, 제자들 중에는 북면 신화리 주씨들과 울진읍 고성리 장씨, 뒷당 전씨들이 많았습니다. 그 선생들께 배운 제자들이 나중에 모임을 만들었고, 지금도 매년 음력 3월 20일이면 제자를 조상으로 둔 후손들이 열댓 명씩 모이고는 합니다.”·····“‘일(一)자’‘대(大)’자를 사용하시는 9대조 할아버지 호(號)가 모와(茅窩)였습니다. 띠모(茅)자에 집와(窩)자를 사용했는데, 청렴한 선비가 기거하는 집이라는 뜻이겠지요. 그 할아버지가 자신의 호를 서각한 현판이 대대로 전해옵니다.”  

 

전하진씨는 죽변면 후정1리 뒷당 마을회관 바로 옆에 자리한 몽양사(蒙養祠)에 대한 애정과 자부심이 대단하다.  

몽양사는 효자 전이석(田爾錫)과 학자 주필대(朱必大)의 효성과 학덕을 기리기 위해 1716년(숙종 42년)에 창건한 사당으로, 1868년(고종 5년)에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된 후, 1937년 3월에 그 자리에 다시 세웠다.  

 

지금도 건물의 강당(講堂)이 현존하고 있고, 바로 뒤쪽에는 두 선생을 기리기 위해 세운 유허비(遺墟碑)가 서 있다.  

 

한재(寒齎) 주필대(朱必大) 선생의 유집(遺集)

 

전하진씨는 전이석선생과 주필대선생이 예전에 뒷당마을에서 학동들을 가르쳤던 서당의 훈장들이었다고 전해준다.
“마을회관 옆에 있는 몽양사 서당 유허비의 전이석 선생은 친할아버지는 아니지만, 항렬로 따지면 저에게 11대조가 됩니다. 당시 전이석과 주필대 선생은 서당의 훈장으로 이 마을과 인근지역의 학동들을 많이 가르쳤는데, 제자들 중에는 주씨들과 장씨, 전씨들이 많아 있었습니다. 신화리 장씨들과 고성리 주씨, 뒷당 전씨들이 이 서당에서 많이 배웠지요. 후에 그 선생께 배운 제자들이 모임을 만들었습니다. 제자들이 돈을 조금씩 모아 대지도 마련하고 논도 조금 사서 재산이 조금 있어요. 지금도 매년 음력 3월 20일이면 두 선생의 제자를 조상으로 둔 후손들이 열댓 명씩 모이고는 합니다. 지금 마을회관이 자리한 터와 몽양사 옆에 위치한 집들도 원래 서당에 딸린 터인데, 그 집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땅세를 조금씩 내고 있지요. 그러나 원체 수입이 적어서 수년전부터 건물이 낡아 허물어지고 있는데도 손을 댈 엄두를 못 내고 있습니다. 또 몽양사에 딸린 재산도 개인 앞으로 되어 있던 것을 지난 2007년 12월 특별조치법 기간에 ‘몽양사보존회’를 만들고 보존회 명의로 등기를 마쳤습니다. 그나저나 퇴락한 몽양사를 하루빨리 복원해야 할 텐데 참 큰일입니다. 지금 제가 몽양사보존회 회장을 맡고 있고 고문, 부회장, 총무, 감사를 각각 두고 있지요.”  

 

전씨가 생활하고 있는 집 입구의 왼쪽 벽면에는 ‘모와(茅窩)’라고 새겨진 오래되어 보이는 현판이 한 점 걸려 있다.
“‘일(一)’자 ‘대(大)’자를 써시는 9대조 할아버지의 호(號)가 모와(茅窩)였습니다. 띠모(茅)자에 집와(窩)자를 사용했지요. 띠로 집을 지었으니 청렴한 선비가 기거하는 집이라는 뜻이겠지요. 선비였던 그 할아버지가 자신의 호를 딴 저 현판을 서각해서 걸어둔 겁니다. 오랫동안 변함없이 저대로 걸려 있어요. 조상들의 저런 글귀가 제가 살아오는 과정에서도 항상 교훈과 또 몸가짐을 바르게 하는 귀감이 되었습니다. 전에 어떤 고물장수가 집에 들러서 저 현판을 팔라고 자꾸 졸랐던 적이 있는데, 어디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현판이 돈 몇 푼에 팔수 있는 것인가요? 또 한번은 제가 집에 없는 틈에 집사람이 예전부터 전해 내려오던 궤짝을 6만원을 받고 덜컥 고물상에게 팔아버린 적이 있었지요. 그 얘기를 전해 듣자 말자 바로 후정해수욕장 앞까지 뒤쫓아 가서 돈을 돌려주고 다시 찾아온 적도 있어요. 제가 성격이 꼼꼼한 편이기도 하지만, 옛날 자료들은 종이 한 장도 쉽게 안 버리고 항상 모아두는 편입니다. 지금이야 아무것도 아니지만, 세월이 지나고 나면 종이 한 장에 적힌 글귀나 내용들이 얼마나 많은 사실을 전해주게 됩니까? 지금도 그런 일을 많이 겪잖아요? 불과 몇십년 전의 자료 한 장이 어떤 경우에는 아주 많은 사실들을 얘기해주기도 하지요.”  

 

시간이 지나고 나면 종이 한 장에 적힌 글귀가 때로 많은 사실을 전해주는 것을 알기에 선뜻 버리지 못한다고 말하는 전하진씨.  

 

전씨는 올해 매실은 꽃이 피고 있는 도중에 한쪽에서 얼음이 얼기도 해서 열매가 좋지 않을 것이라고 얘기한다.
“사람이 발을 딛는 것은 몇 치의 땅에 지나지 않지만 벼랑에서는 엎어지거나 자빠진다. 좁은 다리위에서도 번번이 떨어져 시내에 빠지고 만다. 이것은 곁에 여지(餘地)가 없기 때문이다. 군자가 자기를 세우는 것 또한 이와 같다. 지성스러운 말인데도 사람들이 믿어주지 않고, 지극히 고결한 행동인데도 혹 의심을 부른다. 이는 모두 다 언행과 명성에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이 글은 중국 육조시대의 유명했던 문인 안지추(顔之推, 531~591년)가 지은 안씨가훈(顔氏家訓)에 나오는 말이다.  

 

지나치지 않은 여지(餘地), 9대조 할아버지의 호(號)인 모와(茅窩)의 뜻을 늘 잊지 않고 지난(至難)한 과거를 힘들게 걸어왔으면서도 얼마쯤은 파고 들 여지의 공간을 늘 비워두고 살아가는 전씨와 같은 노인들은 이 시대, 또 다른 의미의 아름다운 희망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꽃이 시드는 것과 사람이 늙는 것이 세상에서 가장 슬픈 일만은 아닌 것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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