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이령(十二領) 길 마지막 주모(酒母) 박금년씨 이야기

기사입력 2010.07.28 1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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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걸어가면 길이 생겼다.
사람들의 잦은 왕래로 흙이 다듬어지며 새로운 길이 만들어지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했다.  

 

아득한 옛날부터 사람들은 항상 이곳에서 저곳으로 옮겨갈 때 가장 빠른 길을 선택했다.
사람들이 만든 길은 목적지에 가장 빨리 도착하고 싶은 잠재되어 있는 욕망이 오롯이 반영된 것이다.  

 

몸뚱어리에 달린 두 다리가 유일한 이동 수단이었던 시절에 사람들은 돌아가는 편평한 길보다는 고달프고 힘들더라도, 앞뒤로 첩첩이 둘러싸인 산을 넘고 또 넘더라도 가까운 길을 찾았다.
그러다보니 이산 저산 곳곳에는 수없이 많은 길이 생겨났다.  

 

사람들이 목적지를 찾아 걸어가는 과정에서 생겨난 길과 산마루마다 각각 고유한 이름도 붙여졌다.
바릿재→평밭→새재→느삼밭재→너불한재→저진치→한나무재→넓재→고치비재→멧재→배나들재→노루재...  

 

울진군의 북부 지역인 부구 흥부장, 울진장, 죽변장에서 봉화군 내성, 춘양, 소천, 법전, 재산장을 오고가며 양 지역의 특산물을 이어주던 보부상인 선질꾼들이 수없이 걸으면서 만들어진 길이 십이령(十二領) 길이다.  

 

울진에서 봉화를 연결하는 좁고 험한 산길에 나타나는 가파른 재(嶺)가 열두개였기 때문이다.
장신구와 잡화 등을 보따리에 싸서 다니며 팔던 봇짐장수(褓商)와 소금, 해산물 따위를 지게에 지고 다니던 등짐장수(負商)를 통틀어서 보부상(褓負商)이라 불렀다.  

 

울진 사람들은 십이령 길을 오가던 보부상을 바지게꾼, 선길꾼, 선질꾼으로 따로 불렀다.
울진과 봉화를 오가던 보부상들은 좁고 험한 12령 길을 날렵하고 빠르게 오가기 위해 일반 지게보다 다리목과 뒷가지가 짧은 쪽지게를 사용했다.  

 

쪽지게는 바지게로도 불리는데, 위쪽의 고정 틀이 하나밖에 없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 쪽지게이다.
울진과 봉화를 오가던 선질꾼들은 쪽지게라는 특별한 지게를 사용했다.
쪽지게를 메고 울진과 봉화를 오갔던 선질꾼들이 만든 길이 십이령길이다.  

 

그러나 이곳저곳에 신작로가 닦이고, 자동차가 울진 땅까지 밀고 들어오면서 정작 울진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조차 점점 잊혀져간 길이 또한 십이령길이다. 

 

사람들이 굳건한 두 다리를 이용해서 만든 길 군데군데에는 주막(酒幕)이 있었다.
북면 흥부장에서 해산물을 가득 사서 쪽지게에 지고 하루 걸려 도착하는 곳이 북면 두천1리 바깥말래이다.  

 

수많은 선질꾼이 봉화와 흥부장을 오가면서 십이령 초입인 말래에는 자연스럽게 주막이 여러 곳 생겨났다.
한때 말래는 선질꾼과 나그네들의 잠도 재워주고, 밥과 술도 팔고, 따로 마련한 마구간에서 마소 등을 재워주고 먹여주던 주막거리가 형성되어 번성했다.   

 

일정한 대가를 받고 숙식을 해결해주던 주막집은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곳이어서 자연히 온갖 정보와 문화의 구심점 역할을 하기도 했다.  

 

북면 두천리 말래에는 울진과 봉화 양 지역의 물화(物貨)를 이어주던 선질꾼들에게 휴식과 요기를 제공하고 각종 정보가 교환되던 주막이 있었다.

 

 

친정 아바이는 일정시대에 현내에 살면서 조합 공무원을 했고, 일꾼을 들여 놓고 농사도 하고, 배사업도 했니더. 친정 어마이는 한 13년인가 15년 전에 하루 모자란 100살에 돌아가셨어요.·····6.25전쟁 때는 남동생 성만이가 경찰을 했었다고 지방 빨갱이들이 수시로 우리 친정집을 들락거리면서 괴롭혔고, 결국 친정 아바이도 그때 화병을 얻어서 돌아가시고 말았지요.

 

열아홉 살에 북면 두천1리 바깥말래의 주막집으로 시집을 가서 50살이 넘어서까지 주막의 주모로 일하며 생업을 꾸렸던 박금년(86세. 북면 하당리)씨는 울진읍 연지리 현내에서 태어났다.  

 

박씨는 십이령길을 오가는 선질꾼들이 넘나들던 길목에 위치한 말래에서 30년 넘게 주막을 운영했던 이 시대의 마지막 주모(酒母)이다. 

 

“울진읍 연지리 현내에서 태어났지요. 친정 아바이는 밀양 ‘박’씨 성에 ‘해’자 ‘일’자를 썼어요. 친정 어마이는 ‘이’씨 성에 ‘간’자 ‘난’자를 썼니더. 어마이는 십 수 년 전에 하루 모자란 100살에 돌아가셨어요. 13년인가 15년인가 그 정도 됐네요. 현내 손자 집에서 평소에 크게 아픈데도 없이 그렇게 살다가 복되게 돌아가셨지요. 일정시대에 아바이는 현내에서 살았어도 공무원을 했어요. 내가 11살 정도 먹을 때까지 했지요. 친정 어마이는 원래 삼척 노실이라고, 호산 위에 있는 동네에서 울진 현내로 시집을 왔고요. 어마이는 평생 아바이 뒤에서 말없이 자식들 건사하면서 발바지(바라지)만 했니더. 아바이는 일정시대에 많이 배웠지요. 조합에 다녔는데 지금으로 치자면 농협 무슨 조합인가 그런 곳에 근무했어요. 조합에 다니면서도 어선을 사서 딴사람을 들여놓고 배사업도 했고, 일꾼을 들여서 농사도 지었고요.”  

 

박씨는 1924년 일본제국주의의 조선에 대한 일제강점기 제2기인 민족분열통치기에 8남매 가운데 셋째로 태어났다.  

 

1010년 한일합병을 한 일제는 1019년 3.1운동까지의 일제강점기 제1기인 무단통치기에 이어, 1919년부터 만주사변을 일으키기 전까지의 일제강점기 제2기인 민족분열통치기에 조선을 일본의 식량 공급지화 시키게 된다.  

 

그만큼 박금년씨가 세상에 태어났던 1924년은 나라 안팎이 정치, 경제적으로 어수선하고 다들 어렵게 살수밖에 없던 빈곤한 시기였다.  

 

“부모님은 아래로 3남 5녀를 두었니더. 위로부터 치자면 옥례(91세. 현내에서 살다가 환갑을 지내고 사망), 금난(89세. 속초시로 시집을 갔는데, 후에 현내로 돌아와서 살다가 사망)이라는 언니가 둘 있고요. 그 다음에 내가 태어났지요. 그리고 아래로 아지(83세)라는 여동생이 있는데, 예전에 아버지가 사위 한명쯤은 가까운 곳에서 보면 좋다고 친정 동네인 현내에 시집을 보냈지요. 그렇게 오래 못살고 61살인가, 62살인가에 먼저 세상을 떠났어요. 그 집은 자식이 아들 셋에 딸이 여섯으로 9남매인데, 아들 딸네가 현내에도 살고, 죽변에 들어가서도 살고, 서울에 나가서도 살고 그렇지요. 그리고 성만이라고 남동생이 있니더. 6.25전쟁 전에 경찰을 하다가 전쟁 통에 피란을 갔다 와서 경찰도 그만두고 나더니 병을 얻어서 죽었지요. 6.25전쟁 때는 남동생 성만이가 경찰을 했었다고 지방 빨갱이들이 수시로 우리 친정집을 들락거리면서 이런 저런 이유를 대 가면서 괴롭혔는데, 결국 친정 아바이도 그런 연유로 화병을 얻어서 돌아가시고 말았지요. 그리고 그 밑에 성조(75세)라는 남동생이 있는데 지금 울진 새마실에서 살고 있어요. 성조 밑으로 성군이라는 남동생이 연지리에 살고 있고요. 올해 73살인가, 74살인가 됐네요. 마지막으로 연자(62세)라는 여동생이 있는데, 설악산 가까운 속초에서 살고 있고요.”    

 

남들보다는 포시랍게 살았어요. 그런데도 아바이는 딸네가 공부를 배우면 바람난다면서 학교라고는 못 다니게 했니더. 나는 아바이 몰래 신림국민학교를 한달 다녔는데, 왕복 60리 길을 다니는 게 더찌없어서 치웠지요.·····일정시대에 울진 장마당에는 일본사람들이 참 많이 살았는데, 다들 조선인 식모와 일꾼을 한둘씩 들여놓고 살았어요. 인근의 좋은 농토는 전부 다 일본 사람들 소유였지요. 그때 일본 사람들은 남의 나라에 와서 다 팔자를 고쳤니더.

 

일제강점기에 울진읍 현내에서 태어난 박금년씨지만 어릴 때 먹고 살던 형편은 남들보다 훨씬 넉넉했다고 말한다.  

 

“어릴 때도 배고픈 걱정을 하지는 않았어요. 친정집이 현내에서는 제일로 잘 살았니더. 일꾼도 두명이나 있었고, 일하는 어마이들도 있었지요. 아바이는 조합에 다니면서도 배를 사서 고기도 잡아서 팔았고, 농사도 많았어요. 농사가 있으니 따로 일꾼을 집에다 들여놓고 있었지요. 우리 형제자매들은 남들보다는 포시랍게(포시럽게) 살았어요. 그렇게 포시랍게 살아도 아바이가 딸네가 공부를 배우면 바람난다고 학교라고는 못 다니게 했지요. 그래도 나는 아바이 몰래 신림국민학교를 한달 다녔어요. 하도 하도 학교가 원이라서요. 그런데 한 달 동안 현내에서 신림국민학교까지 걸어 다니니까 더찌(덧정)없디더. 현내에서 신림까지 길이 30리 아이요? 그래서 치웠니더. 그때 벌써 11살, 12살 됐는데, 울진국민학교에서는 나이가 많다고 입학을 안시켜주어서 신림까지 한달 걸어 다닌 거지요. 사람이 살면서 자기 이름은 읽고 쓸 줄 알아야 하는데, 그때는 왜 그렇게 딸들은 학교에 보내지 않았는지 모르겠니더. 그래도 내 이름 석자는 읽고 쓸 줄 알았는데, 이제는 나이가 많아서 그것도 잊어먹었니더.”  

 

일제강점기 당시 울진읍 현내에는 밀양 박씨들이 집성촌을 이루어 한데 모여 살았다.
“일정시대에 현내에는 박씨 성을 가진 사람들만 소복이 살고 있었어요. 당장 우리 친정 아바이 5형제가 한꺼번에 모여서 다 살고 있었니더. 그리고 6촌들이 딸은 하나도 없고 아들만 여섯이었지. 또 4촌들이 아들만 낳았지. 어디 멀리 나가 살지도 않고 박씨들이 다들 현내 한동네에 모여서 떵떵 울리고 사니까, 타 성씨를 가진 사람들은 그때만 해도 현내에 들어와서 살 엄두도 못 냈어요.”  

 

친정아버지의 ‘여자가 배우면 바람난다’는 엉뚱한 고집 때문에 학교에 다니지도 못하고 집에서 지내던 박금년씨는 14살부터 19살까지 울진읍 시장안의 일본인 집에서 식모살이를 하게 된다.  

 

“학교에 갈 나이가 되어도 학교를 보내주나, 집에는 일꾼들도 있고 일하는 어마이들도 따로 있지, 그래서 울진읍내 일본인 집으로 일하러 들어갔지요. 일정시대이던 그때만 해도 울진읍내 장터거리에는 일본사람들이 총총히 박혀 살았어요. 어느 일본인 집에 식모로 들어가서 밥도 하고 빨래도 하고, 이런저런 잔심부름도 하고 그러면서 일했지요. 낮에는 그 집에서 일하고 먹고 자는 일은 다른데서 했니더. 울진향교 골패목 가는 길 예배당 근처에 우리 6촌들이 살고 있었는데 그 집에서 먹고 잤어요. 아침에 일본인집으로 가서 하루 종일 일하고, 저녁 7~8시면 6촌들 집으로 가서 자고요. 식모로 일하던 일본 사람 집은 온갖 물건을 다 파는 집이었는데, 요새 말로 하면 만물상회였지요. 이것저것 사람들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물건들은 다 갖추어놓고 파는 상회다보니, 젊은 사원들도 둘이나 있었고, 나이어린 청년도 한명 있었고, 정재(부엌, 정지)에서 일하는 나도 있었고 그랬지요. 일본인 집은 주인 영감하고 할마이하고 아들 하나, 딸 하나 네 식구가 살았고요. 가게 규모가 커서 돈도 많이 벌었니더. 그 옆에는 일본인 형님집이 살았는데 그 집도 잘 살았지요. 일정시대만 해도 일본사람들은 다들 조선인 식모를 한둘씩 들여놓고 살았어요. 내가 어릴 때만 해도 울진 장마당에는 일본사람들이 참 많이도 살았니더. 말도 못하게 살았어요. 이쪽 하당, 정림, 행곡리 쪽에 좋은 농토는 전부 다 일본 사람들 소유였지요. 가을에 추수할 때가 되면 나락을 가득 실은 구루마가 일본 사람들 집으로 수도 없이 몰려들었어요. 그때 일본 사람들은 남의 나라에 와서 다 팔자를 고쳤지요. 일본 사람들이 하나같이 울진에서 떵떵거리고 살다가 해방이 되고 자기나라로 돌아갈 때가 되니, 어디 땅을 팔고 갈 시간이나 있었겠니껴? 그렇다보니 일본 사람들 땅을 오래 부쳐 먹던 사람들이 자기들 앞으로 다 하고 그랬지요.”   

 

결혼 50주년 기념사진. 박씨는 19살 되던 해 음력 시월 열이렛날에 5살 연상의 황해일씨를 만나 결혼했다

 

홍교장네 아버지가 친정 아바이에게 ‘곧 처녀공출이 있을 텐데 빨리 시집을 보내라’고 그랬다니더. 지금 시집을 보내지 않으면 딸내미 하나를 달부 잃어버릴 수도 있다면서요.·····친정 아바이가 두천리 말래로 나를 데려다주러 왔을 때, 앞도 산이고 뒤도 산이고, 길만 빠꼼하고 도랑만 요렇게 있는 것을 보고는 냇가에 두 다리를 쭉 펴놓고 앉아서“아이고 내가 죄가 많다. 여기가 어디라고 우리 금년이를 여기다 가져다놨나? 내가 죄가 많아서 죽을세. 원통하다. 내가 왜 이곳에 와보지도 않고 술김에 말을 떼서 딸내미를 여기다 가져다 놨나?”그렇게 한탄했다디더.

 

14살 어린나이에 울진읍 시장안의 일본인 집에서 식모살이를 하던 박금년씨는 19살에 이웃 사람의 중매를 통해 북면 두천리로 시집을 가게 된다.  

 

박씨가 울진 현내에서 외진 산골마을인 북면 두천리 바깥말래로 시집을 가는 과정도 만만하지 않았다.  

 

특히 박씨의 친정어머니는 딸을 시집보내기에 앞서 자신이 직접 도부차림을 하고 사돈을 맺을 집까지 찾아가서 이것저것 살펴보는 신중함을 보이기도 했다.

 

“일본사람 집에서 식모살이를 할 때 옆에 홍교장네라는 집이 있었는데, 그 홍교장 아버지가 중매를 했어요. 홍씨네 집은 아들은 교장을 하고 있었고, 부모들은 시장 안에서 하숙을 겸해서 식당을 하고 있었니더. 식당을 하다 보니 후에 우리 시어마이가 되는 분이 울진시장에 오면 그 집에서 점심도 사먹고 그러면서 서로 친하게 지냈던 거지요. 그러다보니 나이든 우리 시어마이의 아들 장가를 보내야 되겠다는 얘기도 나오고 그랬었나 봅디다. 그러니 평소 친분이 있던 홍교장네 아버지가 딱하게 생각해서 ‘어디 마땅한 미눌(며느리) 하나 권해줄까요?’ 그랬던 모양이지요. 홍교장네 아버지는 그때 일본사람 집에서 몇 년째 식모로 일하고 있던 나를 염두에 두고 있었던 모양이디더. 어느 날 홍교장네 아버지가 우리 친정 아바이를 불러서 술을 한잔 권하면서 ‘아이고 이 사람아. 자네 딸이 심덕도 좋고 그러니 어디 배 안 곯는 집으로 시집을 보내게. 내가 좋은 혼처를 권해 줄 테니’ 그랬답니다. 아버지는 술을 참 좋아했거든요. 그 말끝에 우리 아바이가 ‘우리 딸은 아직 나이도 어리고 해서 시집을 보낼 때가 아닌 것 같다’고 대꾸하니, 홍교장 아버지가 ‘이제 곧 처녀공출이 울진에서도 있을 텐데 빨리 시집을 보내야 안심하지 않겠느냐?’고 그랬다니더. ‘지금 빨리 시집을 보내지 않으면 처녀공출을 당해서 딸내미 하나를 달부(아예) 잃어버릴 수도 있다’면서요. 그때는 전국적으로 처녀공출이 한창 심할 때였어요. 그리고 어느 날 시어마이가 될 사람이 현내 우리 집으로 선을 보러 왔더라고요. 그때가 여름이었는데, 어쩌다 내가 친정에 가서 미역을 막 널고 있는데, 집으로 와서는 ‘아이고 아가씨, 이 옆에 사촌들 집에 왔다가 가는 길인데 시원한 물 한 그릇 주게’ 그러더라고요. 그래서 물을 주었는데, 우리 집을 나서면서 자꾸 나를 돌아보고 또 돌아보고 그러더라고요. 그때 나는 영문도 모르면서 ‘저 할마이가 왜 나를 저렇게 유심히 보노?’ 그런 생각을 했지요. 그런데 며칠 있다가 우리 친정 아바이가 친정 어마이를 보고 그러더랍니다. ‘이 사람아, 내가 며칠 전에 술 한 잔 한 김에 우리 금년이를 시집보낸다고 덜컥 약속을 했는데 어떻게 생각하는고? 지금 처녀공출이 한창인데, 일본 놈들이 처녀들을 잡아서 일본으로 싣고 가다가 바다에서 많이 죽기도 하고 그런다네’ 뭐 그런 얘기를 하더랍니다. 나는 어마이에게 그런 얘기를 듣고 울진읍내 6촌 할아버지 집으로 돌아와서 이런 저런 고민을 했니더. 그 집 할마이가 바느질해서 먹고 살았어요. 할머니 혼자에 아들 하나, 딸 하나 두고 한복이나 삼베옷 같은걸 바느질해서 옷을 지어주고 그렇게 먹고 살았지요. 그래서 할마이한테 어마이에게 들은 얘기를 했더니, ‘아이고, 너그(너희) 아바이가 술김에 왜 그런 얘기를 꺼냈는지 모르겠다’면서, ‘이왕 꺼낸 말이니 혼사가 오간집이 어딘지 곳이나 알아보자’고 하더라고요. 그러고는 우리 어마이에게 도부 하러 간 요량하고, 미역을 이고 저기 분천에서 소광리를 해서 두천 말래로 가서 시집될 집을 살펴보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어마이가 도부차림으로 미역을 이고 소광리에서 십이령 산길을 걸어서 말래까지 가봤다고 하더라고요. 말래까지 와서 시어마이가 하는 주막집 마루에 앉아 짐을 내려놓고 물을 한잔 달라고 하고서 살펴보니, 주막을 하는 시어마이가 인물도 훤하고 그렇더라니더. 그래도 지금도 두천 말래가 외진 곳인데 그때야 오죽했겠니껴? 어마이가 속으로 ‘아이고, 우리 딸이 이런 외진 곳에 와서 살겠나?’ 그런 생각을 했답니다. 끝끝내 사위될 사람 얼굴은 못보고, 주막하고 시어마이가 될 사람 얼굴만 보고 날이 저물었는데도 미처 못 판 미역을 이고 다시 울진 현내까지 40리 길을 걸어서 내려왔다고 하더라고요. 그리고는 친정 아바이하고 대판 싸웠다니더. ‘아주 아주 산골짜기에 거랑(개울)이야 너리고(느르고, 넓고) 좋더구만은, 소낭구(소나무)가 얼마나 들어섰는지 앞뒤에 산이 요렇게 손바닥같이 받쳐 있는데, 거기가 어디라고 우리 딸을 시집보낸다고 대꾸해서 이런 일을 겪게 하느냐?’고 따졌답니다. ‘괜히 시집보내서 딸내미가 못살고 쫓겨나거나 제 발로 걸어오면 그 일을 어떻게 감당하느냐?’면서요. 지금이야 남자 여자가 만나서 살다가 이혼하는 게 밥보다도 쉽니더만은, 그때는 이혼하면 친정집이 어디 있니껴? 집에 한발짝 들어와 보지도 못하고 집안 우세시켰다고 쫓겨났지요. 결혼하고 나서 우째다(가끔) 내가 친정에 가도 아바이는 ‘아이고, 저게 쫒겨오나?’ 그렇게 속으로 걱정하고는 했답니다. 그때만 해도 시집간 딸이 그렇게 자주 친정으로 왔다갔다 할 수도 없을 때였지요. 아이고, 참말로 그때 세상에 태어난 사람들은 다 그렇게 살았니더. 결국 어마이도 아바이의 고집을 꺾지는 못했지요. 아바이는 취중이라도 혼사 얘기를 꺼냈으니, 니가 시집을 가지 않으면 박씨 집안의 명예를 빼앗긴다고 말했어요. 그래서 시집을 가게 되었지요.”  

 

친정아버지의 취중 혼사 약속과 친정어머니의 사전 답사(?)까지 거치면서 박금년씨는 19살이 되던 해 음력 시월 열이렛날에 5살 연상의 황해일씨를 만나서 결혼한다.   

 

“열아홉 되던 해 시월 열이렛날은 꽤 추웠는데, 두천리 말래에서 신랑 될 사람이 가마를 앞세우고 우리 친정집으로 왔더라고요. 와서 행례하고 밥 먹고 또 곧장 나는 가마를 타고 신랑 될 사람과 함께 시댁으로 들어갔어요. 행례는 요즘 결혼식처럼 신랑과 신부가 맞절하는 택이지요. 그때 바닷가 마을 결혼식 풍습은 도신행이라고, 행례하고 당일에 신부가 시댁으로 돌아가야 했고요. 신부는 가마를 타고 가고, 신랑은 걸어서 가고 그랬지요. 그나마 옛날에도 바닷가가 아닌 곳은 결혼 행례를 하고 신랑이 처갓집에서 3일 밤을 자고 되돌아갔다가, 다시 좋은 날을 받아서 신부를 데려가고는 했지만 바닷가 풍습은 그게 아니었어요. 당일에 가마를 끌고 왔다가 다시 되돌아가야 했으니, 가마를 메는 조군(가마꾼)들도 한패가 아니라 두서너 패가 한꺼번에 움직이고는 했어요. 가마 무게만 해도 한 짐인데, 그 무거운 가마에 사람까지 태워서 먼 길을 두명이 계속 메고 갈수는 없었으니까요. 가마 조군이 두명씩이니까 두서너 패면 4명이나 6명 되잖니껴? 결혼을 하게 되면 예전에는 그렇게 많은 조군들이 한꺼번에 움직였고, 그것은 신부 집이 멀면 멀수록 더했지요. 처갓집이 가까우면 가마 조군들도 한패 두명이면 됐지만요. 가마를 타고 시댁으로 들어오는 도중에 호월리를 지나다가 조군들이 물이라도 얻어먹고 가려고 그랬는지 어느 길갓집에 들르게 되었니더. 가마를 세우니, 동네 어만(아주머니)네 서너명이 새각시 얼굴 한번 보자며 가마 문을 들추고 내 얼굴을 보더니, ‘아이고 각시는 신랑보다 못하다. 신랑은 저렇게 잘 생겼는데, 각시는 못하다’ 그런 얘기가 들리더라고요. 그 얘기를 들으니 그래도 기분이 싫지는 않았어요. 친정집에서 행례를 하고 시댁으로 들어와서 첫날밤을 보내는데, 신랑 동구간(동기간)들이 얼마나 장난이 심한지 신혼방 문살 틈의 문종이를 뚫고 지게 작대기가 수도 없이 들락거리디더. 문을 바른 문종이도 다 떨어져버렸는데, 방은 또 얼마나 작은지 새색시가 어디 피할 곳은 없고, 아이고... 그렇게 어정쩡하게 앉아 있는데, 신랑 되는 사람이 보다 못했는지, 문을 뚫고 들어온 지게작대기가 닿지 않을 만 한 거리를 두고 방 중간에 병풍을 가져와서 치더라고요. 그러고 나니 방구석 벽 쪽에 두사람이 겨우 앉을만한 자리가 생겼지요. 그때는 결혼해서 첫날밤을 맞으면 연애상이라는 걸 차려 주었어요. 연애상이라고 해봐야 과일 한 접시에 감주나 술 한주전자 얹어두는 거지만요. 병풍으로 막은 연애상 앞에 앉아서 처음으로 신랑 얼굴을 쳐다봤는데, 얼굴이 허여 허옇고 네모 번듯한 게 그렇게 잘생기고 좋더라고요. 그때 친정 아바이는 나를 데려다주러 처음 두천리 말래로 왔었는데, 아름드리 소나무가 곳곳에 서있지, 앞도 산이고 뒤도 산이지, 정말로 기가 막히더랍니다. 길만 빠꼼하고(빠끔하고) 도랑만 요렇게 있었으니까요. 그래서 아바이는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말래 앞 냇가에 두 다리를 쭉 펴놓고 혼자 앉아서 ‘아이고 내가 죄가 많다. 여기가 어디라고 우리 금년이를 여기다 가져다놨나? 내가 죄가 많아서 죽을세. 원통하다. 내가 왜 이곳에 와보지도 않고 술김에 말을 떼서 딸내미를 여기다 가져대 놨나?’ 그렇게 한탄했다니더. 아바이는 결국 딸이 사는 말래를 다시는 못 와보고 세상을 떠나셨지요.”  

 

주막은 방이 두칸 가재고, 부엌 하나에 마구 하나가 집 뒤에 있었어요. 식구들이 한방에서 모두 자고, 방 하나는 비워서 십이령길을 오가는 선질꾼들을 받고는 했지요.·····결혼은 했는데 신혼부부가 따로 잘 방이 없으니, 묵어가는 손님이 없으면 손님방에서 신랑각시가 자고, 손님이 있는 날이면 시어마이와 시동생, 시누이 이렇게 다섯명이 서로 보대끼며 자고는 했지요. 손님이 없으면 사랑방이 신혼 방이 되는 거고, 손님이 있으면 신혼 방이 없어지는 거고 그랬니더. 아이고, 결혼해서 신혼부부 생활도 억지로 했니더. 요새야 누가 그래 살리껴?

 

박씨의 시어머니 정목단씨. 평생 주막집을 했던 정씨는 열에 열단지라도 한번도 술 담구는데 실패하지 않았다고 한다
박씨의 남편 황해일씨. 8년 전에 세상을 떠났다
박씨는 울진읍 현내에서 두천리 말래로 시집을 갔을 때 시어머니는 주막을 하고 있고, 남편 황해일씨는 어머니를 도와 주막집 일을 거들고 있더라고 전한다. 

 

“시집을 가니까 시어마이는 주막을 하면서 십이령길을 따라서 오가는 선질꾼들을 상대로 잠도 재워주고 밥도 해주고 그러더라고요. 집에서 직접 담은 막걸리를 팔기도 했고요. 한쪽에는 마구간을 지어놓고 말이나 소가 오면 여물도 끓여 주고요. 시어마이 이름은 정목단이었어요. 이름도 이쁘지요? 신랑은 주막을 하는 어마이를 거들고 있었어요. 시아바이는 내가 시집을 가기 전에 돌아가셨다는데, 신랑이 17살 되던 해에 세상을 떠났다고 하더라고요. 시아버지가 세상을 떠날 때 신랑은 나이가 들어서 국민학교에 다니고 있었답니다. 요즘같이 번듯한 학교 건물이 아니고, 이곳 하당 저기 갱빈(강변)에 천막을 쳐놓고 공부를 배웠다고 해요. 요 옆의 삼당분교는 그 후에 학생 수가 많아지면서 우리 영감 또래들이 벚나무도 심고 힘을 보태서 건물도 짓고 그렇게 세웠답니다. 우리 영감은 공부도 많이 배웠어요. 어릴 때부터 시어마이가 주막을 하면서 돈도 크게 궁하지 않았고, 또 맏아들이라고 훈장을 집에 불러서 한문 공부도 계속 시켜주고, 늦은 나이지만 국민학교도 시켜주고 했으니까요. 많이 배웠으니 우리 영감은 글도 좋았어요. 요 건너편 갱빈의 천막 국민학교도 두천 말래에서는 세명만 다녔다고 하디더. 그때만 해도 당장 먹고 살기조차 힘들었으니까요. 우리 영감이 시댁에서는 맏이고, 그 밑으로 순애(80세. 북면 거주)라는 여동생과 해운(74세. 울진읍 거주)이라는 남동생이 있지요.”  

 

두천 말래에서 주막을 할 당시, 박씨의 남편 황해일씨가 지게로 울진에서 져 날랐던 소주 퉁재(소주 초롱)
박씨의 시어머니가 십이령길의 초입인 두천리 말래에서 운영하던 주막의 규모는 그렇게 크지 않았다.
“주막이라고 해도 방이 두칸 가재(뿐)고, 부엌이고, 소먹이는 마구(외양간) 하나가 집 뒤에 딸려 있었어요. 방이 두칸이라고 해도 요즘 집들처럼 크지도 않고 조그만 했지요. 그러니 우리 식구가 한방에 모여서 모두 자고, 방 하나는 비워서 십이령길을 오가는 선질꾼들을 받고는 했니더. 그래도 선질꾼들이 계속 오고 가니까 장사는 참 잘 됐어요. 처음 시집을 가니까 두천 말래에 장수봉이네, 최씨네, 김기민네, 우리 집 이렇게 네집이 주막을 하고 있더라고요. 우리는 방이 한 칸밖에 없으니 손님이 차면 다른 집으로 선질꾼들을 보내고 그랬지요. 그래도 마구간이 따로 있어서 말과 소를 재우고 먹이고 했던 건 우리 주막하고 장수봉이네하고 두집 뿐이었지요. 당시만 해도 말래 주막 인근은 스물여덟가구가 모여서 살았던 꽤 큰 동네였지요. 스물여덟집도 이곳저곳에 떨어져 있었던 게 아니라 한 마당가에 쭈욱 모여서 살았어요. 주막 하는 네집 빼고는 다들 농사를 짓고 살았고요. 처음에 결혼해서 가니까 어디 신혼부부가 마땅히 잘 수 있는 방이 있어야지요. 그러다보니 다행히 묵어가는 손님이 없으면 손님방에서 신랑각시가 자고, 손님이 있는 날이면 시어마이와 시동생, 시누이와 다섯명이 서로 보대끼며 자고는 했니더. 손님이 없으면 사랑방이 신혼 방이 되는 거고, 손님이 있으면 신혼 방이 없어지는 거고 그랬지요. 아이고, 그때야 남들이라고 어디 유별나게 살았겠니껴만은 그렇게 살았니더. 결혼해서 신혼부부 생활도 억지로 했니더. 요새야 누가 그래 살리껴? 다 도망가고 이혼하고 난리가 나겠지요. 결혼해서 시집에 들어갈 때 시어마이는 50이 안됐는데 혼자 살더라고요. 이곳 하당으로 이사를 내려 와서도 한동안은 내가 하숙집 하는 것을 도와주고 그러다가 세상을 떠났어요. 우리 시어마이가 담은 술은 인근에서는 맛있다고 소문이 났었니더. 열에 열단지라도 한번도 술 담구는데 실패를 안했어요. 아주 어쩌다가 두어 말 술을 담았다가 실패를 하면 소주를 구웠고요. 소주를 구우면 첫물은 너무 독해서 먹지도 못하고 받아놓고, 세물까지 받고는 했는데 세물 째면 싱겁지요. 그러면 첫물부터 세물까지 뒤섞어서 적당하게 소주 맛을 냈고, 그렇게 팔았어요. 술을 많이 담다보니 우리 집에서 키우는 소는 아주 좋았어요. 술찌끼에다, 쌀뜨물에다, 음식 찌끼에다 그렇게 잘 먹이니 좋을 수밖에 없었지요.”  

 

박씨가 젊은 시절에는 다들 그렇게 가난하고 배고픈 시절을 자주 겪었었다고 전해준다.
“어느 한해는 숭년(흉년)이 들어서 두천리 집집마다 산에 가서 송구(송기)도 삐깨먹고(벗겨 먹고), 보리 이파리 끊어다가 죽도 끓여먹고, 속새도 베어다가 빻아서 죽 끓여먹고 그런 해가 있었어요. 그때 우리 영감은 산에 가서 칠기(칡)를 캐다가 빻았는데 아주 하얀 쌀갈기(쌀가루) 같은 칡갈기가 몇 말 나왔어요. 그것을 집에서 다 먹지는 못하니까, 나보고 그래도 친정동네는 농사도 짓고 그러니까 칡갈기를 가지고 가서 쌀로 바꾸어 오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친정에 가서 쌀을 두말씩 바꾸어 오니까 옆집에서 보고, ‘저 집은 주막을 하면서 쌀도 귀하지 않은데 며느리도 친정에 가서 칡갈기까지 쌀로 바꾸어온다고 마카(전부) 다 불바(부러워)하고 그랬어요. 시집을 가서 숭년이 들 때 남들은 다 힘들고 어렵게 살아도 우리 시댁은 크게 배를 곯지 않았지요. 남들이 힘드니까 멀찌(괜히) 덩달아서 힘들어했지요. 주막을 하면서 날마다 손님을 치러야 하니까 집에 쌀이 떨어질 일은 없었으니까요.”  

 

19살 나이에 5살 연상의 황해일씨를 만나서 결혼한 박금년씨는 아래로 2남4녀를 두었다.
창근(67세. 북면 하당), 성구(62세. 근남면) 두 아들과, 언희(59세. 울진읍), 언자(54세. 북면 하당), 언수(48세. 포항시), 언성(45세. 포항시)이라는 딸 넷이 그들이다.

 

 

선질꾼들은 대개 장가도 안가고 늙어빠져서 나이든 사람들뿐이었어요. 울진 사람들이 선질꾼으로 나선 것은 보지 못했어요. 선질꾼으로 장사에 나선 것은 봉화 춘양, 내성, 분천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지요. 울진사람들이 쪽지게를 지고 다닌 건 없어요.·····선질꾼들은 대개 빈 걸로 왔어요. 빈 지게로 돈을 가지고 와서 흥부장에 가서 미역이나 간고등어, 꽁치 같은 해산물을 사서 봉화로 되돌아가서 장에 내다 팔아 이문을 남기고는 했지요. 해가 짧은 겨울이면 선질꾼들 숫자가 줄어들었고, 해가 길어지면 숫자가 늘어났지요.  

 

박금년씨는 기존에 알려진 것과는 달리 울진 출신 선질꾼은 거의 없었다고 강조하면서, 선질꾼들은 봉화 출신들이 대부분이었고 나이도 많았었다고 말한다.
“선질꾼들이 십이령을 통해서 봉화와 북면 흥부장을 오가던 모습과 그 사람들의 생활을 직접 눈으로 보았던 사람들은 마카(전부) 다 세상을 떠나고 없니더. 지금 십이령과 선질꾼을 얘기하는 사람들은 거의가 이미 죽고 없는 사람들 얘기를 듣고 입으로 옮기는 것이지요. 일정시대에 태어난 나는 19살에 두천 말래 주막집 며느리로 시집을 가서 시어마이와 주막을 직접 하면서 푹 젺은(겪은) 거지요. 선질꾼들은 대개 장가도 안가고 늙어빠져서 나이든 사람들뿐이었어요. 울진 사람들이 선질꾼으로 나선 것은 보지 못했니더. 울진 사람들이야 농사를 지을 땅도 너리고(너르고) 고기도 잡아서 먹고 살 수 있었는데, 왜 험한 산길을 걸어 다니면서 장사를 하겠니껴? 선질꾼으로 장사에 나선 사람들은 대부분 봉화 춘양, 내성, 분천 출신들이었어요. 울진사람들이 쪽지게를 지고 다닌 건 없니더. 선질꾼들은 주로 북면 흥부장을 봤니더. 거기 가야 미역도 고포미역이 좋고 생선 값도 싸고 했으니까요. 가끔은 울진장이나 죽변장도 봤고요. 선질꾼들은 다들 나이가 많아서 그렇게 산더미처럼 짐을 지고 다니지도 못했고요. 지금이야 십이령이라도 길이 판판하지만, 그때는 낮이라도 나무가 우거져서 아주 캄캄했니더. 기가 맥했(막혔)지요. 선질꾼들은 흥부장날에 맞추어 그 전날에 두천 말래에 도착하고는 했어요. 울진장날과 죽변장날은 별 상관도 안했고요. 흥부장 전날에 주막에 와서 자고 다음날 새벽 일찍 흥부장으로 출발하고는 했니더.”  

 

십이령을 통해서 봉화에서 북면 흥부장을 오가는 선질꾼들은 주로 10여명정도씩 무리를 지어 다녔다.
“한꺼번에 그저 여남은 명씩 모여 다녔니더. 그때 우리 주막방이 소잡고(복잡하고) 그러면 다른 주막집으로 이리저리 몇 명씩 갈라져서 잤고요. 우리 주막 옆 장수봉이네 주막집은 방이 컸는데, 그 집에는 대여섯 명이 한방에서 묵을 수 있었지요. 우리 집은 세명 정도 한꺼번에 잘 수 있었고요. 주막에서는 밥도 팔고 술도 팔았어요. 가을이면 선질꾼들이 대추를 한섬씩 짚 섬으로 지고 팔러 오는데, 분천 옆에 자마리라는 동네는 대추가 아주 유명했지요. 그 대추짐을 세워놓고 선질꾼들이 주막에 묵을 때면 어떤 장난꾼들은 대추가 담겨있는 짚 섬에다 작은 구멍을 뚫어서 대추를 훔쳐 먹기도 했었니더. 그런데 봉화에서 흥부장을 보러 오는 선질꾼들은 대개 빈 걸(짐이 없이)로 왔어요. 우째다가(어쩌다가) 대추나 갖고 왔지, 빈 지게로 돈을 가지고 와서 흥부장에 가서 미역이나 간고등어, 꽁치 같은 해산물을 사서 봉화로 되돌아가서 장에 내다 팔아 이문을 남기고는 했지요. 어떤 때는 몇 명이 어울려서 흥부장에서 소를 20~30마리씩 사서 끌고 봉화로 넘어갔어요. 소장수들이 소를 끌고 와서 주막에 묵을 때면 새벽 3~4시에 일어나서 소죽을 끓여주어야 했니더. 소여물 값은 사람 밥값하고 똑같이 받았어요. 소장수가 주막에 묵는 날이면 많은 짚을 물에 적셔서 튀겨달라고 부탁해요. 그리고는 밤새 잠도 자지 않고 물에 튀긴 짚으로 소가 먼 길을 신고 갈 소 짚신을 맹글어요(만들어요). 소에게 짚으로 만든 신발을 신기지 않으면 먼 길을 갈수 없으니까요. 소장수들은 소 신도 금세 만들고, 또 튼튼하게 만들었어요. 소 신은 소 발굽모양으로 만드는데 엄지발가락에다 걸어서 고정하게 되어 있니더. 소 신발을 밤새 수십 켤레 맹글어서 이튿날 출발할 때 주렁주렁 어깨에 둘러매고 출발하지요. 그런데 움매(얼마) 안가면 소 신이 자갈 같은데 금방 닳아버리니까 새로 갈아 신기고는 하면서 봉화 춘양이나 내성장까지 가는 거지요. 춥고 눈이 오는 겨울이면 선질꾼들 숫자가 눈에 띄게 확 줄어들었고, 봄부터 가을까지는 오가는 선질꾼들이 늘어났지요. 해가 짧을 때는 주로 흥부장에서 돌아올 때 말래에서 묵었고, 조금 길면 장평에 가서 자고 그랬어요. 그리고 선질꾼들에게는 고개마다 있는 서낭당이 자기 본집이나 한가지래요(똑같았어요). 길을 댕길찍에(다닐적에) 항상 서낭당에서 짐을 내려놓고 절을 했고, 사월 초파일, 오월 단오, 팔월 추석에는 어떤 음식이라도 갖다 놓고 절도 하고 기도도 하고 그랬어요. 바릿재를 올라가면 쟁팽(장평) 고갯마루에도 서낭당이 있잖아요? 전에 서낭당 앞으로 길을 뚫으면서 그 서낭당을 없애려고 한 적이 있었는데, 장평에 살던 사람들이 반대하면서 못 없애게 했어요. 그리고 후에 쟁팽 옆 씨시골에서 산판을 할 때 소나무 이다(나무판)를 켜서 서낭당집을 다시 수리했어요. 나이든 선질꾼들의 고달픔이 서린 그런 서낭당이 길 닦는다고 없어져서는 안 되지요.”   

 

선질꾼들은 밥때가 되면 그랑가에 앉아서 따로 밥을 해먹었어요. 밥은 나뭇가지로 불을 때서 작은 지리솥에 했고, 주로 소금으로만 간을 해서 먹었니더. 밥물을 잡을 때 소금을 조금 넣고 간간하게 해서 먹었어요. 간혹 어떤 선질꾼은 고등어를 짜게 간을 해서 작게 토막을 내고 나무 이파리로 겹쳐 싸다니면서 반찬으로 먹기도 했고요.·····나이든 선질꾼 조가라고 불리던 사람이 더 이상 장사를 하지 않을 것 같다면서, 쪽지게에 걸고 다니던 밥하는 지리솥과 소금단지를 나에게 주었어요. 구피로 만든 뚜껑까지 그대로 덮여 있지요. 그러니 얼마나 오래되고 귀한 거니껴?   

 

박씨가 새댁이었을 당시‘조가’라는 선질꾼으로부터 얻은 백자 소금단지. 굴피나무 뚜껑이다. 직경 11cm, 높이 7cm, 뚜껑 직경 7.5cm 크기

박씨가‘조가’라는 선질꾼으로부터 얻은 백자 소금단지의 정교하게 다듬어서 사용한 굴피 뚜껑
박씨는 새댁이었을 당시에 어느 선질꾼으로부터 얻은 백자 소금단지를 아직까지 보관하면서 토종 꿀단지로 사용하고 있다.
백자 단지는 직경 11cm, 높이 7cm, 뚜껑 직경 7.5cm 크기이다.   

 

“내가 선질꾼들이 쪽지게에 달고 다니던 소금단지를 가지고 있니더. 선질꾼들은 쪽지게 뒤에 밥하는 지리솥(질항아리)과 소금단지를 함께 걸고 다녔는데, 걸을 때 보면 뒤에 매달려서 덜렁덜렁하고는 했어요. 선질꾼들은 먼 길을 오가다가 밥때가 되면 그랑가(냇가)에 앉아서 그때그때 따로 밥을 해 먹었니더. 작은 돌멩이를 몇 개 밑에 받치고 나뭇가지로 불을 때서 작은 지리솥에 밥을 했고, 주로 소금으로만 간을 해서 먹었지요. 밥물을 잡을 때 소금을 조금 넣고 간간하게 해서 먹었어요. 간혹 어떤 선질꾼은 고등어를 짜게 간을 하고 작게 토막을 내서 나무 이파리에 겹쳐 싸다니면서 반찬으로 먹기도 했고요. 밥때가 되어 물을 길러 그랑가에 가면 밥을 하고 있는 선질꾼들을 보고는 했는데, 소금으로만 간을 해먹는 것이 안돼서 집에 와서 짐치(김치)나 장이라도 한 숟가락씩 가져다주면 그렇게 고마워할 수가 없었니더. 그나마 돈이라도 있는 선질꾼들은 주막에서 밥도 사먹었는데, 돈이 아까운 사람들은 잠은 주막에서 자더라도 밥은 그랑가에 나가서 따로 해먹었어요. 한꺼번에 몇 명씩 모여 다니면서도 밥은 따로따로 해먹었지요. 밥하는 지리솥도 한사람 밥밖에 할 수 없도록 작았고요. 지리솥과 함께 작은 소금단지도 따로따로 가지고 다녔니더. 어느 날 소금으로 간해서 먹는 것이 딱해서 반찬을 몇 번 주었던 ‘조가’라는 선질꾼이 더 이상 장사를 하러 다니지 않으려고 그랬는지, 흥부장을 보고 봉화로 되돌아가는 길에 자기가 쪽지게에 걸고 다니던 밥하는 지리솥과 소금단지를 나에게 주었어요. ‘그동안 고마웠다’며 ‘지리솥과 소금단지가 아직까지 깨끗하니까 씻어서 꿀단지 같은 것으로 써라’면서요. 구피(굴피, 참나무 껍질)로 만든 단지 뚜껑까지 그대로 덮여 있어요. 그게 얼마나 오래되고 귀한 거니껴? 내가 60년 전 새각시때 선질꾼에게서 직접 받은 거니까요. 언젠가 작은 아들이 지나가는 말로 골동품이니까 내다 팔라고 할 때도 ‘정신이 빠졌다’고 야단을 치면서, 어마이가 새각시때 받은 거니까 내가 죽더라도 대를 이어서 누군가 꿀단지로 사용하라고 했지요. 그런데 지리솥은 두천 말래에서 이곳 하당으로 이사를 오면서 깨져버렸고, 다행히 소금단지는 아직까지 온전하게 꿀단지로 사용하고 있니더.”  

 

박씨는 선질꾼들이 여름에 해가 길 때면 이른 새벽에 흥부장을 보고 하루 만에 서면 소광리까지도 걸어갔었다고 전해준다.
“해가 길 때면 흥부장을 보고 봉화로 되돌아가다가 두천 말래에서 자고 가는 사람도 있었고, 말래를 지나 장평(쟁팽)에 가서 묵는 사람도 있었어요. 그리고 흥부장을 일찍 보고 걸음이 빠른 선질꾼들은 내쳐 소광리까지 가서 자는 사람들도 있었니더. 소광리에 가서 묵은 사람들은 이튿날 봉화 춘양장을 보러 새벽 일찍 출발하기도 했고요. 해가 길 때면 쪽지게에 짐을 지고도 흥부장에서 이틀 만에 춘양까지  걸어갔니더. 요새야 길도 좋고 나무도 베서 훤하지만, 그때는 길 양쪽에 풀도 우거지고 나무도 빽빽해서 말도 못했어요. 대부분 좁은 토끼길 같은 데를 걸어 다녔으니까요.”        

 

주막이 작아 복잡하고, 젊은 부부가 따로 잠잘 방도 없는 것을 보고 딱했는지 산판이 끝날 때 영림서 직원들과 목상들이 큰 적송 두그루를 제무시 트럭으로 실어다 주었어요. 적송으로 집을 지으려고 주막 옆의 넓은 빈터를 그때 돈으로 만삼천원을 주고 샀지요.·····삼월 초이틀에 적송으로 집을 짓는데, 일본 사람에게 목수 기술을 배운 시숙이 지었니더. 우리 시숙이 일본사람에게 목수 일을 배워서 일류 대목이었어요. 하도 하도 방이 귀하다보니 방 다섯칸짜리 집을 지었지요.

 

박씨는 두천리 인근 산에서 산판(山坂)을 했던 목상(木商)들이 가져다준 적송 두 그루만 사용해서 말래 시댁 주막을 다시 지었던 이야기를 들려준다.  

 

“언제인가 신림 쪽으로 큰 질(큰길)이 났어요. 울진읍에서 신림을 통해서 봉화, 영주로 통하는 신작로가 뚫리고 버스가 다니면서부터 두천리 말래 쪽을 통해서 봉화, 영주로 가던 선질꾼들이 끊어지기 시작했지요. 그도 그럴 것이 그 좋은 길을 놔두고 누가 가파르고 좁은 산길을 이용해서 울진과 봉화, 영주를 오고 가겠니껴? 신림 큰 질이 나고서는 어쩌다가 소광리 쪽에서 북면 흥부장 보러 오는 사람들이 콩 같은걸 팔러 왔다가 우리 주막에서 밥 먹고 자고 가기도 하고 그랬니더. 소광리에서 넘어왔다가 날이 저물면 주막에서 자고, 이른 새벽 일찍 흥부장에 가서 콩을 팔고 어물이나 그런 걸 사가지고 다시 되돌아가고는 했어요. 그 당시에 근남 수산에 있던 영림서 직원 두명이 우리 주막에서 몇 년 동안 묵었던 적이 있었어요. 그때만 해도 곳곳에서 산판이 성했는데, 도벌꾼을 막으려고 영림서 직원이 파견되어 있었던 거지요. 그러다보니 우리 주막에는 선질꾼들이 끊어지고 나서도 한동안은 영림서 직원들이 묵으면서 그런대로 유지를 해 나갈 수 있었니더. 영림서 직원들이 묵는 집이다보니 그들의 눈치를 봐야하는 산판의 목상들도 산판에서 일하는 일꾼들이 먹을 반찬이나 잡곡을 우리 주막 마루에 태산같이 재놓고 한번씩 산으로 나르기도 하고 그랬어요. 그런데 그 목상들과 영림서 직원들이 주막에 묵고 또 들락거리면서 보니까 집이 작아서 복잡하고, 젊은 부부가 따로 잠잘 방도 없고 하니까 딱했는지 산판이 끝날 때쯤에 아주 큰 적송 두 그루를 제무시(GMC) 트럭으로 실어다 주었어요. 스물댓자짜리 적송 두 그루가 얼마나 컸는지 모르니더. 지금이야 질(길)이나 좋지만 그때 그 어살픈(어설픈) 질로 제무시에 싣고 왔는데, 바를 칭칭 동여매서 밤중에 우리 주막집으로 옮겨다 주었어요. 그 적송으로 집을 새로 지으려고 주막 옆에 있던 넓은 빈터를 그때 돈으로 만삼천원을 주고 샀지요. 그때 돈 만삼천원이면 땅값을 아주 후하게 쳐주고 산거시더. 그 때는 산판이 성하다 보니 두천리에 제재소도 두군데나 있었는데, 적송 두 그루가 얼마나 큰지 제재소 기계에도 넣을 수가 없었니더. 그래서 사람을 세명 사서 적송 꺼프리(껍질)를 다 벗기고 난 다음에 겨우 제재소 기계에다 넣어서 나무를 켰지요. 그해 삼월 초이틀에 적송으로 집을 짓는데, 우리 시숙이 일본사람에게 목수 일을 배워서 일류 대목이었어요. 그 시숙이 우리 집을 새로 지었는데, 적송으로만 지은 집이다보니 울진이나 북면에서 여러 명이 집 구경을 하러 오기도 했니더. 하도 하도 방귀 귀하다보니 방 다섯칸짜리 집을 지었니더. 마루도 있고 고방도 있는 큰 집을 지었지요. 방 다섯칸 중에 방 두 개는 큰방이었고요.”  

 

애초 적송 두 그루만으로 두천리 말래에 지었던 주막은 울진과 봉화를 연결하는 신작로가 신림방면으로 개통되면서 말래 주막을 찾는 선질꾼들이 없어지자, 박씨가 현재 살고 있는 북면 하당으로 이건된다.  

 

“보소, 지금 살고 있는 이집 나무가 전부 적송이시더. 마룻바닥이며 방문이며 서까래며 전부 다 적송이지요. 세월이 많이 흘렀는데도 어디 비틀어진 거 하나 없고, 틈 하나 없니더. 지금이야 도배를 해서 그렇지, 나무문도 전부 적송이지요. 봉화, 영주로 가는 신작로가 신림 쪽으로 뚫리면서 선질꾼들이 없어지자, 더 이상 주막을 해서 먹고 살수가 없었어요. 그때 이곳 하당에는 지서가 있어서 경찰들이 많이 있고, 학교 선생들이 있고, 울진군청 출장소가 있어 공무원들도 근무했는데, 그 사람들이 마땅하게 하숙을 할 데가 없었니더. 어느 날 이 동네 유지 몇 명이 두천리 말래 주막까지 올라와서 ‘선질꾼들도 끊어지고 없는데, 말래에서 주막을 할 게 아니라 하당으로 내려와서 경찰, 선생, 공무원들 하숙을 하는 게 훨씬 낮지 않겠느냐? 당신들은 음식솜씨가 좋고 하니 하숙을 하면 괜찮을 것’이라고 권하더라고요. 그래, 가만히 생각해보니 그 편이 훨씬 나을 것 같아서 이곳으로 이사를 오게 된 거지요. 원래 이집 터가 밭이었는데, 말래에 있던 적송 집을 그대로 뜯어 옮기고 짜 맞추어서 집을 짓고 하숙을 시작했지요. 이집 바로 옆에 도라지를 갈아놓은 밭이 예전에 하당지서가 있던 곳이고요. 옆에 서있는 은행나무가 그때 지서에 일하러 왔던 사람들이 심어 놓은 거랍니다. 아직 100년도 안됐는데 은행나무는 저렇게 커잖니껴? 그리고 학교가 가까이에 있어서 학교 운동회 때만 되면 운동장에서 국밥을 해서 팔기도 했지요. 적송 두 그루만 가지고 두천 말래에 새로 주막을 짓고 난 후 9년 만에 집을 뜯어서 이곳으로 옮겼으니, 이곳으로 이사를 온지도 37년이나 되었네요.”     

 

남편 황해일씨와 제주도에서

 

말래에서 주막을 할 때는 영감하고 한장 도막마다 울진장을 보러 내려갔지요. 영감은 반찬과 소주를 사서 지게에 지고, 나는 과자와 담배를 사서 머리에 이고 말래로 돌아왔니더. 말도 마소. 두천 말래에서 울진장마당까지 40리니까 왕복 80리 아이니껴? 울진장에 가는데 돌다리를 열한개 건너야 돼요. 돌다리가 많으니 동삼에는 어떻겠니껴? 장화 같은 소리는 하지도 마소.·····우리 할바이가 담배를 뻑뻑 피울 때면 호랑이가 딴 데를 보고 있다가, 담뱃불을 끄고 돌다리를 건너니까 동무를 해준다고 그러는지 저 멀리서 계속 따라왔니더. 그러다가 말래 동네 앞 숲거리에 들어서니까 지대로 다른 곳으로 갔어요.

 

19살에 두천 말래 주막집으로 시집을 간 박금년씨는 50살이 될 때까지 말래에서 시어머니와 함께 주막을 하다가 지금 살고 있는 하당으로 내려왔다.  

 

“말래에서 50살이 될 때까지 계속 주막을 하다가 이곳으로 이사를 내려왔지요. 말래에서 한 30년 정도 주막을 했었네요. 말래에서 주막을 할 때는 영감하고 한장 도막마다 울진장을 보러 내려갔지요. 영감은 주막에서 손님 받을 때 먹을 반찬도 사고, 소주 퉁재(초롱, 소주 단지)도 사서 지게에 지고 왔고요, 나는 과자도 사고, 담배도 사서 머리에 이고 걸어서 말래로 돌아왔지요. 소주 퉁재는 소주가 열닷대 드는데, 됫병 소주는 한참 후에 나왔지요. 담배는 요새 나오는 까치(개비) 담배가 아니라 봉초였고요. 아이고, 말도 마소. 두천 말래에서 울진장마당까지 40리니까 왕복 80리 아이니껴? 울진장에 가는데 돌다리를 열한개 건너야 돼요. 돌다리가 그렇게 많으니 동삼(겨울)에는 어떻겠니껴? 주로 검정 고무신을 신고 다녔고, 어떤 때는 짚시기(짚신)를 삼아서 신고 다니기도 했는데, 돌다리를 건너다가 물에 빠지는 날이면 발은 또 얼마나 시린지... 아이고, 장화 같은 소리는 하지도 마소. 검정 고무신도 어쩌다 배급이 나와서 타 신는 것이었는데요. 동네에 고무신 몇 켤레가 배급이 나왔다 하면 동네 사람들이 모여서 구지비끼(뽑기)를 해서 그나마 운이 좋아야 고무신을 얻어 신을 수 있던 그런 시절이 있었니더. 내가 말래로 시집을 와서 3년인가 있다가 해방이 됐으니까요. 어두운 새벽에 울진장에 가면 날이 어두워져야 집으로 돌아오고는 했어요. 말래에서 주막을 할 때부터 담배도 팔고 과자도 팔고 했니더. 이곳 하당으로 내려와서 하숙집을 하면서도 과자도 팔고 술도 팔고 담배도 파는 점방을 같이 했었고요. 빈 소주 퉁재도 예전에는 우리 집에 두 개나 있었는데, 하나는 고물장수한테 만원 받고 팔아 먹었니더. 과자와 담배 장사는 두천 말래에서 우리 주막만 했었고, 소주는 김기민네라고 우리 주막 밑엣 집에서도 팔았어요. 이곳 하당에서 하숙집을 그만둔 것도 이제 십 수 년밖에  안 되니더. 학교가 폐교되어 선생들도 없어지고, 지서가 없어지면서 순경들도 다 떠나간 뒤에 하숙을 그만두었으니까요.”   

 

박씨는 두천 말래에서 울진장을 보러 다니던 어느 날에 호랑이를 직접 본적이 있다며 경험담을 털어놓는다.  “어느 해 여름 장날에 영감하고 울진장에 갔다가 소국밥을 한 그릇씩 먹고 장꺼리를 해서 영감은 지게에 짐을 지고 앞서 가고, 나는 뒤에서 머리에 짐을 이고 오다가 저기 개물산 나들이라고 올미골 들어가는 곳 갱빈 자갈밭에 앉아서 쉬는데, 저 먼 산에 벌건 불이 뚝뚝 떨어지면서 왔다 갔다 하더라고요. 날은 이미 어두웠지요. 그걸 보고 내가 영감에게 ‘아이고, 저게 무슨 짐승 불빛이지요?’ 하고 물으니까, ‘그래, 아무 소리 말게’ 하더라고요. 전에 우리 할바이는 담배를 피웠는데, 담배를 뻑뻑 피우면 호랑이가 딴 데를 보고 있다가 담뱃불을 끄고 돌다리를 건너니까 동무를 해준다고 그러는지 저 멀리서 계속 따라왔니더. 그러다가 말래 동네 앞에 솔이 아름드리 들어서 있는 숲거리라는 곳에 들어서니까 지대로(저절로) 다른 곳으로 떠나갔어요. 그게 스물일곱 여덟 살 때였지요. 그때만 해도 한창때였지요. 30살 미만일 때야 무거워도 무거운 줄 몰랐지요. 그게 골병드는 것인 줄도 몰랐고요. 그러니 나이 들어서 다리도 아프고 온 몸이 쑤시고 그렇지요. 영감은 모가(무엇이) 급하다고 8년 전에 세상을 떴니더.”

 

손뜨개질을 해서 직접 만들었다는 테이블보를 보여주면서 “아직까지는 눈도 밝고 손도 쓸만하다”며 환하게 웃는 박금년씨이다.  

 

헤아릴 수도 없는 많은 사람들이 몇 백 년에 걸쳐서 해안지방인 울진과 내륙지방인 봉화를 잇는 가장 빠른 지름길을 찾는 과정 끝에 생겨난 십이령길.  

 

한평생 쪽지게를 지고 숙명처럼 고단한 길을 걸으며 살다가, 길 위에서 죽어갔던 수많은 선질꾼들.  

 

한때는 선질꾼들이 길을 걷다가 날이 저물면 찾아 들어가서 요기를 하고, 탁주 한 사발을 서러움으로 마시며 하룻밤 쉬어가던 주막이 있었다.  

 

그리고 십이령 길옆 주막에는 소금보다 짠 인생을 마주하고 살던 주모의 깊은 한숨이 동무마냥 늘 함께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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