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진 기행

기사입력 2010.08.31 1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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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용일(시인, 수필가)

일 년 중 가장 덥다는 중복절, 둘째 아이 가족과 함께 피서의 길을 나선다. 큰 손자 현기는 이웃 나라로 연수차 떠났고 초등학교 3학년인 준기의 재치와 익살에 출발부터 웃음꽃이다.

 

처(妻) 부모가 결코 편치 않을 터인데도 기회를 마련한 마음씨가 이 아니 가상(嘉尙)한 일인가. 때가 때인 만큼 대관령을 넘기가 만만치 않다. 해돋이의 명소 정동진을 지나 심곡나루에서 한 숨을 고른다. 6.25 전란이 일어난 줄도 몰랐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외진 곳이다.

 

감자 요리로 요기를 하고, 동해의 푸른 물결을 따라 남으로 향한다. 역사학(歷史學)을 전공한 대학교수인 둘째 사위, 그의 탯자리는 경상도이면서도 강원도의 정서가 짙은 울진이다. 「월간울진」이라는 향토지에 “장원섭 칼럼”을 연재하면서 향토문화의 연구와 발전에 한 몫을 담당한 지 이미 오래다.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냈다는 북면 나곡리 석호부락. 아담한 모래톱에 터를 잡은 한적한 어촌이 포근하게 다가온다. 지금은 원자력 발전소가 지척(咫尺)에 자리하여 상전이 벽해가 되었다며 지난날을 회상하느라 어쩔 줄을 모른다.

 

바다가 육지 되고 육지가 바다 되는 천지개벽이 어찌 여기뿐이랴. 어제가 옛날로 느껴지는 무상한 변화, 온고지신(溫故知新)을 생각게 한다.

 

울진장씨의 관시조 문성공 장말익(張末翼) 공과 그의 팔세손(八世孫) 장양수(張良守) 공을 배향한 월계서원(月溪書院), 장마철인데도 잡초 하나 없이 정갈한 환경이 인상적이다. 조선(祖先)을 흠모하고 일가(一家)끼리 돈목(敦睦)하는 가풍(家風)이 역연(歷然)하다. 인척(姻戚)으로 인연된 울진장문 (蔚珍張門), 유난히 영민(英敏)한 손자들을 떠올리며 살며시 웃는다.

 

망양정을 둘러보고 월송정에 오른다. 관동팔경 중 일경(一景)들이다. 망양도 좋거니와 월송은 더욱 좋다. 가슴을 파고드는 비경(秘經)의 풍광(風光), 어찌 필설로 표현할 수 있으랴. 난간에 기대어 망연(罔然)히 섰다가 몇 번이나 뒤돌아보며 걸음을 옮긴다.

 

문화원장 오당(梧堂) 남문열(南文烈) 선생, 서예가 초사(艸史) 신상구(申相九) 선생, 월간울진 발행인 김흥탁(金興鐸) 대표, 이명동 기자, 울진군청의 심현용 학예연구사, 우리 일행을 환대하는 밥상머리는 오래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다.

 

역사와 문화, 서예에 이르기까지 걸릴 게 없는 환담(歡談)에 술잔을 헤는 것은 예(禮)가 아니다. 만당(滿堂)한 방담(放談) 중 한 대목을 움켜쥔 초사(艸史)가 화선지를 펼쳐 놓고 붓을 든다.

 

‘오동나무는 천 년을 늙어도 항상 거문고 소리를 간직하고(桐千年老恒藏曲), 매화는 일생을 추위에 얼어 살아도 향기를 팔지 않는다(梅一生寒不賣香).’는 경구(警句)다. 아호(雅號) 오당(梧堂)을 찬(讚)하는 덕담으로 들먹였는데 어느 새 흰 백지위에 꿈틀꿈틀 되살아난다. 필력(筆力)이 주력(酒力)을 만나자 말 그대로 일필휘지(一筆揮之)다. 월간울진을 보고 문향(文鄕)의 고을임을 짐작은 하였으나, 비로소 이제 그 깊이를 알 것 같다.

 

금강송 군락지를 느릿느릿 걷는다. 내 이제껏 수많은 소나무를 보아 왔지만 이처럼 늠연(凜然)한 자태는 처음이다. 품격이 전혀 다르다. 곧고 붉은 줄기에 청청한 가지와 잎으로 하늘을 떠받치고 서있는 기상이 범상치 않다. 대인(大人)을 만나면 여산여석(如山如石)을 느끼듯, 은연중 중압감으로 다가온다.

 

한 번 청산에 들면 다시는 나오지 않겠다던 고운(孤雲), 일편단심(一片丹心)의 포은(圃隱), 낙락장송(落落長松) 매죽헌(梅竹軒), 아니 두문동(杜門洞) 현사(賢士) 72인이 다 여기에 있구나. 오금이 저려 발걸음을 옮기기가 쉽지 않다. 수 없이 가슴만 쓸어내리다가 지난 날 보부상들이 힘겹게 넘나들던 십이령(十二嶺) 옛 길에 오른다.

 

북면 말래에서 서면 소광리에 이르는 수십 여리, 사람의 흔적이 희미하다. 울울창창한 숲에 가려 하늘은 조각조각 별이 되는 곳, 무슨 말이 필요하랴. 물 소리, 바람 소리, 새 소리를 가슴으로 느낀다.

 

노자(老子) 도덕경(道德經)의 한 구절이 스멀스멀 살아난다.
‘우주 안에 네 가지 큰 것이 있는데 인간도 그중의 하나로 산다. 사람은 땅을 본받고 땅은 하늘을 본받고 하늘은 도를 본받고 도는 자연을 본받는다.(域中有四大 而人居其一焉 人法地 地法天 天法道 道法自然)’

 

천법(天法)도 자연이요, 도법(道法)도 자연이다. 천도(天道)를 걸으며 천법을 느낀다. 물이 흐르듯 바람이 불 듯 걸림 없이 살고픈 마음을 되새기며 불영계곡을 거슬러 귀로에 오른다.

 

‘눈이 아프면 하늘을 보고 사람이 싫으면 산에 오르라’ 했던가. 내 언젠가 다시 와 아내의 손을 꼬옥 잡고 십이령 옛길을 휘적휘적 걸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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