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평생 무속인(巫俗人)으로 살고 있는 이창해씨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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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에 산재해있는 다양한 종교 가운데 가장 본질적이고 오래된 종교(宗敎)는 토속적 민간신앙(民間信仰)인 무속신앙(巫俗信仰)이다.
무속을 종교라고 표현하면 성격이나 형식이 틀린 ‘다름’을 절대 인정하지 못하는 소수의 배타적인 종교인들은 반론이 구구하다.
그들은 앞뒤를 가리지 않고 무속은 미신(迷信)이다, 없어져야 할 관습이다, 무지한 사람들이 의지하는 신앙이다 등등의 말로 일단 폄하부터 하고 본다.
그러나 무속은 다른 유신론적 종교와 신령의 성격이 다를 뿐인 고유 신앙으로서, 종교의 성립에 필요한 요소를 모두 갖춘 순수 종교이다.
천상신(天上神), 산신(山神), 신장신(神將神) 등의 자연신(自然神)과 왕신(王神), 장군신(將軍神) 등의 인신(人神)이나 영웅신(英雄神) 등의 신령을 모시고, 강신(降神) 체험을 통해서 신을 받은 무당(巫堂-여자 무당)과 박수(男巫-남자 무당), 보살(菩薩) 등이 사제 노릇을 하고, 신도들인 단골이 있으며, 굿과 치성 등의 종교의례를 고루 갖추고 있다.
뿐만 아니라 신령을 만나는 종교적인 체험을 통해서 신과 인간에 대한 깨달음과 화해가 나타난다.
고대 이래로 유구한 역사를 지닌 우리 민족의 전통 신앙인 무속은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유교를 숭상하던 유학자들로부터 배척받았고, 일제강점기에 들어와서는 일본의 고유 종교인 신도(神道) 세력을 키우려는 목적에서 모진 탄압을 받게 됐고, 해방 이후에는 외국에서 들어온 기독교적 가치관에 의해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은 비합리적인 것이라고 일방적으로 몰아붙이는 의식으로 인해 미신으로 치부되면서 무속신앙의 이해를 일반인들에게 왜곡시켜왔다는 것은 이미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
무속은 예로부터 신령과 만나는 종교 체험의 한 경지인 ‘신들림’과, 신들림을 즐기는 의례로써 조화를 이루는 음주가무의 종교문화로써 한민족의 체질로 가꾸어져 왔다.
현재 대한민국에는 30만 명의 무속인이 종교로써의 무속신앙을 지키고 있고, 단골과 신령사이의 다리를 놓아주며 활동하고 있다고 한다.
초월적 존재로써 신령과 조상을 믿고, 단골들을 신도로, 사제로써 존재하는 무당이 각종 종교의식을 펴면서 엄연히 존재하고 있는 것이 현실인 만큼, 일부에서는 무속을 단순한 풍속이나 민속학 이상의 범주에서 활발히 논의하고 있기도 하다.미파골 집 앞과 옆에 밭이 댓 마지기 있었고, 대흥리 본동마을의 송정논 두마지기에 음지논 한마지기, 집 뒤에 한마지기, 양지논 한마지기 그게 전부였어요. 밭 댓 마지기, 논 댓 마지기기에 달라붙어서 씨 뿌리고 거두어 온 식구가 먹고 산거지요.·····집 앞에는 암지다람이라고 꼬불꼬불하게 높은 재를 가진 산이 있었지, 왼쪽 뒤로는 독점골이라는 깊은 골짜기가 있었지, 오른쪽 뒤로는 뽁두기라고 높은 산과 긴 골짜기가 죽 연결되어 있었으니까요. 또 바로 뒤쪽으로는 악구산이라고 아주 험하고 높은 산이 버티고 있었으니 만만하지 않았지요.
열세 살에 단시점(短蓍占)을 쳤고, 열여섯 살부터 북을 둘러메고 굿판을 쫓아다니다가 결혼한 후 신이 강림하여 한평생 무속인으로 살면서 점(占)도 하고, 다양한 종류의 굿도 주관하는 이창해(李昌海, 67세. 죽변면)씨는 대흥리 건잠마을에서 오른쪽으로 꺾어 올라가서 나타나는 본동을 지나서도 한참을 더 올라가야 만나게 되는 악구산 자락의 외진 마을인 미파골이 안태고향이다.
“대흥리 미파골에서 태어났어요. 바로 위의 막내 누나와 나, 그리고 남동생이 그곳에서 태어났지요. 형제자매는 위로 누나가 다섯 명이고, 아래로 남동생이 하나 있어요. 부모님은 내리 딸만 다섯을 낳고 끝으로 아들 둘을 얻었습니다. 우리 아버지는 외동아들이었어요. 원래는 위로 형님 한분이 계셨다는데, 어릴 때 세상을 등졌다고 하더라고요. 위로 누나들이 복록(82세. 죽변면), 재록(서면 삼근리에서 거주하다가 사망), 복동(76세. 울진읍 고성리), 복만(73세. 대구시), 복영(69세. 죽변면)이라고 있고, 그리고 내 밑으로 창수(60세. 대흥리)라는 남동생이 하나 있지요. 대흥리 미파골에는 우리가 살던 집이 그대로 있는데, 지금은 악구산 밑 장구령이라는 마을에 살던 방모씨네 가족이 살고 있습니다. 예전에는 집이 지금 자리보다 더 뒤로 물러나서 산자락 바로 밑에 있었는데, 1959년 사라호태풍 때 산사태로 집이 완전히 붕괴되어서 앞쪽으로 옮겨 새로 지었지요.”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어디를 둘러보아도 온통 푸름 일색이고, 고개를 들어 쳐다보면 손바닥만 한 하늘만 빠끔히 바라보이는 산골동네에서 태어나 자란 이창해씨의 어린 시절 또한 동시대의 다른 이들과 다를 바 없이 궁색하긴 마찬가지였다.
“먹고 사는 거야 어느 집이나 다를 바 없이 고만고만했어요. 늘 어려웠지요. 죽을 먹는 날이 많았고. 미파골 집 앞과 옆에 밭이 댓 마지기 있었고, 대흥리 본동마을의 송정논 두마지기에 음지논 한마지기, 집 뒤에 한마지기, 양지논 한마지기, 그게 전부였어요. 그러니 밭 댓 마지기, 논 댓 마지기에 달라붙어서 씨 뿌리고 거두어 온 식구가 먹고 산거지요. 그렇게 넉넉하지는 못했지만, 그때야 다들 그렇게 먹고 살았으니까요. 그래도 부칠 논밭전지가 있다 보니 죽이라도 먹었지, 굶는 날은 없었다고 봐야지요. 부모님, 누나들, 동생과 함께 가난했던 어린 시절을 보냈어요. 내가 태어났을 때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세상을 뜨고 안 계셨고요.”
이창해씨는 어린 시절에 살던 집이 미파골에서도 외따로 떨어진 독가촌이었다고 말한다.
“미파골에는 우리 집 한 채밖에 없었어요. 인근에는 영호네, 남봉달씨네, 안미파골 해서 여섯 집이 있었지요. 우리 집은 아주 위딸(외딸)았어요. 위따로 떨어져 있다 보니 어린 마음에 무섭기도 했고요. 집 앞에는 암지다람이라고 꼬불꼬불하게 높은 재를 가진 산이 있었지, 왼쪽 뒤로는 독점골이라는 깊은 골짜기가 있었지, 오른쪽 뒤로는 뽁두기라고 높은 산과 긴 골짜기가 죽 연결되어 있었으니까요. 또 바로 뒤로는 악구산이라고 무지 험하고 높은 산이 버티고 있었으니 만만하지 않았지요. 정말 간이 작은 사람들은 살지도 못할 곳이었습니다. 미파골이라는 곳은 그렇게 이 골짜기 저 골짜기를 서로 연결해주는 꼭짓점 같은 곳에 위치해 있습니다.”
<신림초등학교 2학년 재학 당시 단체 기념 사진>
전해 내려오던 족보와 한문 고서들은 후퇴하던 인민군들이 휴지로 쓴다면서 다 뺏어갔지요. 처음에는 없다고 버텼는데 결국 족보와 고서를 보관하던 보루박스를 들켰고, 인민군들이 그걸 고스란히 들고 가 버렸지요.·····미파골에서 신림국민학교까지 그 먼 길을 이산 넘고 저산 넘고, 이 골짜기 저 골짜기 빠져서 걷다가 뛰다가 그랬지요. 껌은 보자기에 온갖 걸 다 넣어서 배에 두르고 삔또도 싸가지고 그렇게 출렁출렁하게 걷고 뛰면서 국민학교를 졸업했어요. 삔또라는 것도 시커먼 조밥에다가 입쌀이 쪼끔 섞이거나 그랬지요.이창해씨는 어릴 때 6.25사변을 겪는 와중에 집안에 전해 내려오던 족보와 고서 대부분을 후퇴하는 인민군들에게 빼앗겼다고 전한다.
“6.25사변 때는 너나 나나 할 것 없이 먹고 사는 게 더욱 형편없었지요. 다들 밭에 가서 풋보리를 베어 먹기도 하고, 남들 눈도 있고 하니까 우리 어머니는 빈 솥에 불을 때고 막 그랬어요. 남들 눈도 있었지만 당장 먹을 게 없으니 뜨신 물이라도 마시려고 했겠지요. 6.25사변 중에 울진 방면으로 후퇴하는 인민군들은 독점골로 내려와서 대흥리 미파골을 타고 뽁두기쪽으로 북상했어요. 아무래도 깊은 골짜기와 험한 산을 타고 도망가야 했으니까요. 우리 집에는 옛날부터 전해 내려오던 족보와 한문 고서들이 꽤 많았는데, 인민군들이 후퇴할 때 거의 다 뺏겼지요. 아버지에게 전해들은 바로는, 인민군들이 후퇴하면서 우리 집에 들렀는데 휴지로 쓸 종이를 달라고 하더랍니다. 전쟁중이다보니 볼일 보고 사용할 휴지가 필요했던 거겠지요. 처음에는 없다고 버텼는데 결국 족보와 고서를 보관하던 보루박스를 들켰고, 인민군들이 그걸 고스란히 들고 가 버렸지요. 여러 권 전해져 내려오던 족보 중에서 바로 윗대 조상들의 함자가 적힌 것만 부모님이 통사정을 해서 겨우 남았지요. 족보 두 권만 남기고 열다섯 권 정도의 족보와 책은 인민군 세 놈이 들고 갔다고 하더라고요. 어린 기억에도 인민군들이 우리 마당에 우글우글했던 게 생각나네요. 인민군이 우리 집 마당에 모여서 물먹고, 봉초 담배를 달라고 해서 피우고, 집에서 키우던 닭도 세 마리나 잡아먹고 그랬어요.”
어린 시절에 미파골에서 6.25전쟁을 겪은 이창해씨는 여덟 살이 되던 해에 신림국민학교에 입학한다.
“여덟 살에 막내누나와 함께 신림국민학교에 입학했어요. 누나들 다섯 명 중에 위로 세 명은 학교를 다니지 못했고, 넷째 누나는 신림국민학교를 먼저 졸업한 뒤였지요. 그해에 입학한 동창생들 거의가 임오생이었어요. 그러니까 자연히 내가 제일 어렸고, 행사가 있을 때면 항상 제일 앞줄에 서고는 했지요. 아침이면 학생들이 달밭에서도 내려오고, 장구령에서도 내려오고 그러다보면 암지다람을 넘기 전에 일곱 여덟 명이 미파골에 모이고는 했습니다. 너나 나나 할 것 없이 껌은 보자기에 책도 넣고, 삔또(도시락)도 넣고 그렇게 둘둘 싸서 허리춤이나 어깨에 둘러메고 학교를 걸어 다녔지요. 미파골에서 신림국민학교까지 그 먼 길을 이산 넘고 저산 넘고, 이 골짜기 저 골짜기 빠져서 걷다가 뛰다가 그랬지요. 그렇게 수십리 산길밖에 떨어져 있는 학교를 힘들게 다녔습니다. 껌은 보자기에 온갖 걸 다 넣어서 배에 두르고 삔또도 싸가지고 그렇게 출렁출렁하게 걷고 뛰면서 국민학교를 졸업했어요. 삔또라는 것도 시커먼 조밥에다가 입쌀이 쪼끔 섞이거나 그랬지요. 조밥에 섞여있던 입쌀은 눈을 크게 뜨고 찾아보면 보일락 말락 했지, 겨우 임내(흉내)만 낼 정도였어요. 신림국민학교 6학년 때 남동생이 입학해서 일년을 함께 다녔지요. 미파골에서 신림국민학교를 가려면 암지다람을 오르고, 고방골을 넘어서 쉰배미를 지나고, 마당등을 올라서 지금 용천사라는 절이 있는 곳을 지나야 했어요. 고방골에는 집이 한 채가 있었는데 고덕수라는 사람이 살았고, 논이 쉰마지기가 있다고 쉰배미라고 부르는 동네에는 일곱 집이 살았고요. 그때는 이 골짜기 저 골짜기에 집들도 많았고, 사람들도 많이 살았습니다. 지금이야 집터도 사람도 흔적이 없어졌지만요. 어릴 때는 집에서 아버지가 직접 만들어준 나무 게다를 신고 다녔어요. 나무를 맞춤하게 잘라서 깎고, 다듬고, 구멍을 뚫고, 질긴 노끈을 매서 발가락을 걸 수 있도록 했는데, 가끔은 짚신도 신고 다녔고요. 손재주가 뛰어났던 아버지는 명절 때가 되면 알록달록한 천을 군데군데 넣어서 짚신을 삼아 주었어요. 이불 홑청이나 떨어진 옷의 천을 모아두었다가 짚신을 삼을 때 섞었지요. 그러면 그걸 아낀다고 잘 신고 다니지도 못했고요. 국민학교에 들어가서는 다이야표 껌둥 고무신을 신었습니다. 다이야표 껌둥 고무신은 진짜 질겼지요. 험하게 막 끌고 다녀도 일 년은 신을 수 있었으니까요.”
신림국민학교를 졸업한 이창해씨는 한동안 서당을 다니면서 한문을 익힌다.
“동네에 딱히 정해진 서당이 있는 게 아니라, 다른 곳에서 글 선생인 훈장을 불러다가 이집 저집 돌아가며 숙식을 제공하고 동네 아덜(아이들) 한문을 가르쳤어요. 훈장이 한집에서 보름씩 머물다가 또 다른 집으로 옮겨갔고요. 이년정도 서당을 다니면서 한문을 배웠습니다. 깨밭골로 훈장이 옮겨가면 독점골을 지나고 입석이라고도 불리는 돌산골로 빠져서 그곳까지 걸어 다녔지요. 미파골에서 깨밭골까지 가는 길이 신림 가는 길보다 더 멀었어요. 겨울이고 여름이고 할 것 없이 아침 여덟시면 서당이 시작되니까, 이른 새벽에 집에서 출발했지요. 학동들은 점심 도시락을 싸가지고 다녔는데, 놋 식기에 밥을 퍼서 담고 깟두배(밥뚜껑)로 딱 덮어놓으면 보자기에 싸서 막 뛰어다녀도 절대 쏟기거나 하지 않지요. 반찬은 다른 그릇에 주로 장찌(장아찌)를 싸 다녔고요. 깨밭골, 달밭, 미파골로 옮겨 다니면서 서당이 열렸어요. 학동은 보통 열 명 정도 됐고요. 학채를 줄 형편이 되지 않는 학동도 그때 두 명이나 함께 공부를 했지요. 훈장선생은 죽변면 화성리 용장에 살던 전동수라는 분과 셋째 매형 친척뻘 되는 보부천 뿔나무재 밑에 살던 홍훈장이라고 두 분이 가르쳤어요. 홍훈장은 역술가로도 인근에서 이름이 많이 알려져 있었지요.”
<이창해씨의 부친 고 이석만옹의 회갑잔치>
사라호태풍 때는 하늘에서 비가 내리는 게 아니라 그냥 쏟아졌어요. 산사태가 날 때 안방에 누워있던 나와 남동생은 그대로 흙더미에 묻혀 버렸지요. 그때 곡괭이에 찍혀서 나는 발목 복숭아뼈에 큰 흉터가 생겼고, 남동생은 얼굴 한쪽에 큰 흉터가 졌지요.·····송이는 짚으로 두 개나 세 개씩 묶어서 울진장에 내다 팔았지요. 동송이는 짚으로 다섯 개씩, 열 개씩 엮어 두름을 만들어서 팔았는데, 주로 중국집에서 사갔습니다. 울진장에 나가면 장세로 동송이는 보통 두 개를 뺏어갔고, 넓게 퍼진 갈퍼대기는 하나를 뺏어갔어요.신림국민학교를 졸업한 후 중학교에 진학하려던 이창해씨는 사라호태풍으로 인해 중학교 입학의 좌절감을 잠시 맛보게 된다.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가려고 하던 무렵에 사라호태풍이 났어요. 열서너 살쯤 됐을 때였습니다. 사라호태풍 때 집 뒤의 산이 순식간에 무너지면서 산사태가 났는데 집이 전파가 되고, 밭이고 논이고 물속에 잠겨서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였지요. 태풍으로 엄청나게 쏟아 부은 빗물이 무섭게 불어나면서 미파골 양쪽 계곡을 타고 내려와서 가득 차버린 겁니다. 악구산 장구령을 거쳐서 안미파골 쪽에서 내려오는 물길과, 뽁두기를 거쳐서 검미파골 쪽에서 내려오는 물길이 미파골에서 합수되어 서로 부딪치면서 미처 빠지지 못하고 미파골 전체를 눈 깜짝할 사이에 뒤덮어버렸지요. 그날 아침까지만 해도 산으로 송이를 따러갈 만큼 날씨가 괜찮았어요. 점심을 먹고 잠깐 자리에 누워있을 때 산사태를 맞았습니다. 그 시점이 낮 12시 30분쯤 됐고, 오후 3시쯤에 사라호태풍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지요. 사라호태풍 때는 비가 내리는 게 아니라 하늘에서 그냥 쏟아졌어요. 산사태가 날 때 나와 남동생과 어머니가 안방에 누워 있었지요. 누나와 다른 사람들은 사랑방에 모여 있었고요. 어느 순간 쿵하는 소리와 함께 산사태가 집으로 밀고 내려왔는데, 안방에 있던 나와 남동생은 그대로 흙더미에 묻혀 버렸고, 사랑방은 그나마 가볍게 쓸고 지나갔어요. 나와 남동생과 집에서 키우던 고양이가 흙속에 그대로 묻혀 버렸지요. 어머니는 많이 묻히지 않았고, 난 그래도 형체라도 알아볼 수 있을 만큼 묻혔는데, 남동생은 흔적도 없이 일 미터 이상 흙속에 묻혀버렸습니다. 그때 우리 집에 최태환이라고 주어다가 키우던 애가 하나 있었는데, 원래 집은 하당이었어요. 산사태가 나자말자 태환이가 미파골에서 꼬꼴양지 비알(비탈)을 타고 안미파골로 가서 셋째 매형에게 연락해서 우리 아버지와 함께 흙속에서 나와 남동생, 고양이를 곡괭이로 파내서 살렸어요. 태환이가 미파골에서 꽤 떨어져있는 안미파골까지 사람을 데리러 갔다 온 시간이 있으니, 우리가 한참동안이나 흙속에 그냥 묻혀 있었던 거지요. 처음에는 어머니가 정신없이 손으로 흙을 막 파헤쳤는데, 하도 급하니까 아버지와 셋째 매형이 곡괭이로 흙속을 막 찍으면서 찾기 시작했지요. 그러다가 먼저 나를 파내고, 그 다음에 남동생을 파냈어요. 산사태가 나기 전에 동생은 내 옆에 가까이 붙어 있었는데, 흙속에서 파낼 때 보니까 이미터 이상 밀려나 있더라고요. 처음에 동생을 흙속에서 꺼냈을 때는 죽어 있었어요. 그런데 한쪽에다 옮기고 사람들이 달려들어서 팔다리를 한참이나 주무르고 난 다음에야 겨우 긴 숨을 토하면서 살아나더라고요. 그때 곡괭이에 찍혀서 나는 발목 복숭아뼈(복사뼈)에 큰 흉터가 생겼고, 남동생은 얼굴 한쪽에 큰 흉터가 졌지요. 마구에 매여 있던 소 두 마리도 죽지 않고 살았어요. 흙속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 나왔는데, 밖은 여전히 눈을 뜰 수 없을 만큼 비가 억수로 퍼붓고 있었어요. 그 길로 우리 식구들은 뽁두기 아래 산중턱에 외따로 떨어져 있던 영호네 집으로 피난을 갔습니다. 온 식구가 그 집 사랑방에서 한동안 지냈지요.”
사라호태풍 때 집이 전파가 되어 터전을 잃어버린 이창해씨 가족은 정부에서 지급된 피해 보상금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 새집을 짓는다.
“얼마 안 있어서 태풍 피해 조사가 끝나고 보상금이 나와서 미파골에 새로 집을 짓고 온 식구가 옮겨왔어요. 처음에는 조사를 나온 공무원들이 살던 집이 없어졌으니 울진읍내로 옮겨서 살겠느냐? 아니면 그냥 미파골에서 살겠느냐? 그렇게 물어봤지요. 그래도 대흥리에 논밭전지가 다 있으니 미파골에 눌러 살게 된 거지요. 새 집은 원래 집터에서 앞쪽으로 옮겨서 지었고요. 태풍 피해를 조사하러 나온 공무원들이 우리 집을 덮친 산사태 흙의 양이 칠 톤에서 십 톤쯤 되는 것으로 보고했다고 들었어요. 정확히 얼마인지는 모르겠지만, 흙의 양이 많아야 보상금을 더 탄다고 아버지가 무엇을 대접했던 것 같더라고요. 내 생각에 그 당시에 산골에서 달리 줄건 없고, 토종벌을 많이 쳤으니 아마 꿀을 주었던 것 같기도 하고요. 어쨌든 그 덕분에 다른 집들보다 보상금을 조금 더 많이 받았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사라호태풍 때 대흥리 인근에서는 깨밭골 전씨네 식구 다섯 명이 몰살했고, 본동 인지감 개골 올라가는 길에 살던 진모라는 사람도 물길에 휩쓸려가서 근남 수산다리 밑에서 시체가 발견되었지요. 불영사휴게소 인근에 살던 사람 한명도 물에 빠져 죽었고요.”
사라호태풍으로 인한 산사태로 흙속에 묻혔다가 천우신조로 살아난 이창해씨와 남동생 이창수씨는 곡괭이에 찍힌 후유증으로 인해 죽변에서 한동안 치료를 받기도 했다.
“산사태 후에 영호네집으로 옮겨서 오륙일 있다가 울진 병원으로 내려왔지요. 그런데 울진시장안의 병원과 약국이 전부 다 물에 잠겨서 영업을 하지 않기에 죽변면으로 옮겨서 치료를 받게 되었어요. 그때 큰누나가 죽변에 살고 있었거든요. 대흥리에서 울진을 거쳐 죽변까지 나와 남동생은 가마에 앉아서 왔습니다. 교꾼이 미파골에서 암지다람을 넘고 쉰배미를 거쳐 신림을 통해서 울진까지 왔다가, 다시 울진에서 호월리를 거치고 정림골을 지나 남산골을 넘어 죽변까지 가마를 메고 온 거지요. 어머니하고 나하고 남동생하고 큰누나 집에 두 달 묵으면서 죽변시장 안에 있던 동화약방 주인에게 치료를 받았어요. 다리와 얼굴이 곡괭이에 찍히고 정신적인 충격도 많이 받았으니 걷지도 못했고 정신도 어리 했지요. 그래서 동화약방 주인이 방칩골(방축골, 죽변면 후정3리)에 있던 누나 집까지 매일 찾아와서 치료를 해 주었습니다.”
이창해씨는 사라호태풍으로 인한 산사태 등으로 유실된 논밭을 복구하는 과정에서 얼마간 논밭의 면적을 늘릴 수 있었다고 말한다.
“사라호태풍 때 집 건너편의 양지논은 거의 사라졌어요. 집 뒤의 산이 무너졌으니 집 앞에 있던 밭도 도무지 알아볼 수 없었고요. 당장 갈아먹을 논밭은 있어야 했으니 논밭을 새로 쳤지요. 그중에도 음지논을 칠 때는 이웃해 살던 막내 매형이 고생을 참 많이 했지요. 막내누나는 처음에 매화리로 시집을 갔어요. 매형이 매화양조장에서 막걸리도 배달하면서 그렇게 살림을 했지요. 그런데 사오년 후에 먹고 살기가 힘드니까 처가가 있는 미파골로 이사를 온 거지요. 막내 누나가 시집 갈 때 내가 함을 지고 갔는데, 미파골에서 본동을 거치고 행곡을 지나서 성류굴 앞으로 빙 돌아서 매화까지 걸어갔던 기억이 새삼스럽네요. 한겨울에 걸어가는데 얼마나 먼지 말도 못했고, 겨울인데 얼마나 추운지 귓방맹이(귓볼)가 다 얼었어요. 그 먼 길을 함을 지고 갔는데 함 값도 한 푼 못 받았어요.”
가을 산에서 채취하는 송이 가격은 지금도 금값이지만, 지난 50년대 후반에서 60년대 당시에도 송이는 시장에서 활발하게 거래됐다.
“사라호태풍이 불던 해에도 송이를 따러 다녔어요. 짚으로 두 개나 세 개씩 묶어서 울진장에 내다 팔았지요. 동송이(갓이 피지 않은 송이)는 짚으로 다섯 개씩, 열 개씩 엮어 두름을 만들어서 팔았는데, 주로 중국집에서 사갔습니다. 그때도 송이는 비쌌어요. 요즘처럼 산골 동네를 찾아다니며 송이 수매를 하는 장사꾼은 없었고요. 울진장에 나가면 장세로 동송이는 보통 두 개를 뺏어갔고, 넓게 퍼진 갈퍼대기(갓이 퍼진 송이)는 하나를 뺏어갔지요. 하루는 어머니가 울진장에 송이를 팔러갔다가 장세 받는 사람이 갈퍼대기를 빼앗아가려고 밀고 당기다가 중간이 부러지는 바람에 막 싸우고 그랬던 기억도 있고요. 그때는 지금처럼 동송이가 비싼 게 아니라 양이 많이 나오는 갈퍼대기가 대접을 받았어요. 가을에는 송이뿐만 아니라 싸리버치(버섯)나 굴뚝버치도 따서 팔았고, 여름이면 악구산에서 참나무에 달리는 후루래기도 따고 산도라지도 캐다가 울진장에 팔았지요. 산도라지는 온 식구가 캐다가 팔았는데, 가격이 좋아서 촌에서는 아주 큰 수입이었어요. 산도라지는 장마당에 내다팔기도 했지만, 고성리에 살던 이씨라는 영감이 미파골까지 와서 직접 사가기도 했지요.”
산지 한 마리를 팔아서 신림국민학교 동창이던 고철근이라는 친구와 함께 서울로 올라갔습니다. 집안에서는 나를 찾는다고 난리가 났었고요. 야간에는 고등학교 공부를 하면서 낮에는 아이롱 코발트라고 하는 다리미를 팔러 다녔지요.·····장에 가서 나무를 장바닥에 내려놓으면 어머니가 흥정을 해가며 팔았지요. 어머니가 이고 간 건 300원 정도 받았고, 내가 지고 간 건 150원정도 받고 그랬어요. 아버지는 안미파골 옆 오무골이나 서낭골에서 숯을 구웠지요. 울진장에 나무를 팔러 가면 장세로 여자들이 머리에 이고 온 둥치에서는 두 가지를 뺏었고, 애들이 지고 간 둥치에서는 한 가지를 뽑고 그랬어요.신림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집에서 통신중·고등학교 공부를 하던 이창해씨는 부모님 몰래 집에서 키우던 송아지 한 마리를 팔아서 친구 한명과 서울로 무작정 상경했었다고 전한다.
“그 무렵에 대흥리 본동에 살던 장모씨라는 사람이 어떤 쪽지를 가지고 왔는데, 그게 통신중학교 입학원서였어요. 농촌에서 어렵게 살면서 정규 중학교를 입학하지 못하는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통신중학교 입학원서를 전해주러 다녔던 거지요. 그래서 통신중학교 공부를 시작했지요. 그때 중학교 교장이 이철갑씨였어요. 통신중고등학교를 졸업한 후에 졸업장도 다 가지고 있었는데, 이사를 다니고 그러면서 다 없어져 버렸네요. 통신고등학교 공부를 할 당시에는 서울 면목동에서 한 일 년 지내면서 야간고등학교를 다니기도 했지요. 서울로 올라 갈 때는 산지 한 마리를 팔아서 올라갔습니다. 집안에서는 나를 찾는다고 난리가 났었고요. 서울은 신림국민학교 동창이던 고철근이라는 친구와 함께 올라갔어요. 야간에는 고등학교 공부를 하면서 낮에는 아이롱 코발트라고 하는 다리미를 팔러 다녔지요. 아이롱 코발트 다리미 사장은 전라도 사람이었는데, 처음에는 하루에 한 개를 떠맡기고 신용을 얻으면 두 개도 주고 그랬어요. 그걸 들고 다니면서 팔았고, 주소를 알려주면 수금은 다른 사람이 하고 그랬지요.”
젊은 시절 이창해씨는 부모님들의 농사도 거들고 산에 가서 나무를 해서 울진장에 내다 팔기도 하면서 생활한다.
“열네 살 때 처음으로 나무를 지고 어머니와 함께 울진장으로 팔러 갔지요. 나이가 어리니까 나무를 지게에 지고 가는 게 아니라, 밧줄로 매서 울진장으로 지고 갔어요. 머리에 장작을 잔뜩 이고 가는 어머니보다 적게 지고 다녔습니다. 장에 가서 나무를 장바닥에 내려놓으면 어머니가 흥정을 해가며 팔았지요. 어머니가 이고 간 건 300원 정도 받았고, 내가 지고 간 건 150원정도 받고 그랬어요. 당시에 아버지는 이골 저 골에서 숯을 구웠어요. 안미파골 옆 오무골이나 서낭골에서 숯을 구웠지요. 겨울만 되면 숯을 구워서 울진장에 남몰래 내다 팔았지요. 숯 굽는 일은 정부에서 금지하는 일이었거든요. 숯은 장작보다 가격이 비쌌어요. 숯을 한번 팔면 대여섯 번 장작을 내다 파는 돈을 벌수 있었으니까요. 그러나 경찰에 걸리면 숯을 다 뺏기기가 일쑤였는데, 어머니도 숯을 장에 내다팔다가 두어 번 걸려서 다 뺏긴 적이 있지요. 울진장에 나무를 내다 파는 일은 사오년 정도 했지요. 지금 생각해보니 울진장을 오고가면서 쉴 때, 머리에 인 장작을 올려주거나 내려주는 사람이 필요해서 어머니가 나를 장에 데리고 다녔던 것 같기도 하네요. 울진장에 나무를 팔러 가면 장세로 여자들이 머리에 이고 온 둥치에서는 두 가지를 뺏었고, 우리 같은 애들이 지고 간 둥치에서는 한 가지를 뽑고 그랬어요. 산나물을 내다 팔 때는 장세로 작은 방티(함지박)는 십 원, 방티에 담지 않은 큰 둥치는 이십 원을 받았어요. 울진장에 가서 나무를 팔면 점심으로 풀빵을 열 개나 스무 개 정도 사먹고, 돈이 되는대로 이것저것 시장을 보고, 다시 길을 되짚어서 미파골로 되돌아오고는 했어요. 미파골에서 울진장에 가려면 신림국민학교 지나 뚜꺼우바우를 거치고, 위솔백이를 지나서 가마이와 구마이를 지났지요. 천상(천생) 두꺼비처럼 생긴 뚜꺼우바우에서는 항상 쉬어 갔어요. 그곳에서 쉴 때는 쩍 벌리고 있는 뚜꺼우바우 입안에 재수가 있으라고 빌면서 돌멩이 한두 개를 꼭 집어넣었지요. 하도 사람들이 뚜꺼우 입안에 돌을 넣다보니 뚜꺼우 입이 반들반들했습니다. 미파골에서 울진장을 갈 때는 네 번 쉬었는데, 우선 암지다람재에 올라가서 한번 쉬고, 지금 용천사 절 있는 곳의 도로변에 가서 쉬고, 그 다음에 신림 포강이 하나 있는데 거기서 쉬고, 마지막으로 뚜꺼우바우에서 한 번 더 쉬었어요. 그리고 어떤 때는 도산재 위솔백이 아래에서 한 번 더 쉬고요. 그리고는 곧장 울진장까지 가지요. 가마이를 지나서 구마이로 건너 갈 때는 다리가 없을 때니 신발과 양말을 벗고 물을 건너야했는데 겨울이면 늘 귀찮고 고생스러웠지요.”
이창해씨는 미파골 산골에서 태어나 성장하면서도 어린 시절에 대흥리 본동마을의 대흥사 경내에서 태권도를 배웠었다고 전한다.
“태권도를 배울 때가 열네 살 정도였지요. 당시에는 대흥리 본동에 대흥사 절이 그대로 있었어요. 그 후 1963년도에 대웅전을 전부 다 뜯어서 울진읍내 동림사로 옮겨서 다시 지었거든요. 그때 대흥사에 태권도 사범이 한사람 머무르면서 동네 아이들을 모아놓고 태권도를 가르쳤어요. 처음 삼개월 동안은 삯을 내지 않고 새끼를 감은 나무작대기에 토종꿀 밀을 발라서 법당 마룻바닥을 밀고 닦아서 광도 내고 청소도 하고 그러면서 공짜로 태권도를 배웠지요. 그러다가 나중에는 한 달에 쌀 두되도 주고 세대도 주었어요. 그때 쌀 세 되면 많았지요. 사범 이름이 문정수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멀리 깨밭골에서도 태권도를 배우러 왔어요. 태권도 문파는 청도관이었고요. 그때만 해도 대흥사 대웅전에는 삼존불이 있었고, 절 좌측으로는 산신각이 하나 있었고, 요사채도 있었지요. 요사채에는 장원준 아버지라는 분이 살았는데 그때 이미 92살인가 그랬어요. 아들인 장원준이라는 사람도 이미 70을 넘긴 나이였고요. 스님들은 없었습니다. 명절이면 대흥사에서 활동사진도 보여주고, 여러 사람이 화장을 하고 꾸며서 재미있는 연극도 하고 그랬지요. 당시에는 대흥리 본동과 인근에 170 여호가 넘게 살았으니 산골치고는 상당히 큰 마을이었습니다. 술과 담배, 과자를 팔던 가게도 있었으니까요.”
<결혼식-1966년 10월 31일>
곰곰이 생각 끝에 그 처자 오빠에게 협박편지를 썼습니다. 왜 날 믿지 않고 주위의 소문만 믿느냐? 여동생을 주지 않으면 개챙피를 시켜주겠다, 그렇게요. 얼마 있다 보니까 임영감과 큰 매형이 미파골로 올라왔어요. 저쪽 처자 집에서 말을 띠준다고 했다면서요. 그렇게 결혼을 하게 되었지요.·····김병태라는 친구와 함께 악구산 밑 장구령, 달밭, 영호네 아지미 집 등지를 옮겨 다니면서 와루바시를 만들었어요. 한 이년정도 했는데, 소나무를 베서 도끼로 젓가락 크기만큼 쪼들고 기계를 사용해서 와루바시를 만들었어요. 화물로 대구, 영주, 봉화 쪽의 와루바시 취급 가게로 보냈지요.
이창해씨는 19살에 죽변면에 살던 김순자(金順子. 65세)씨를 만났고, 일 년 뒤에 결혼하여 평생 인연으로 살아가고 있다.
이창해씨와 김순자씨의 약혼기념 사진. 1965년 1월 27일
“19살 때 죽변에 살던 넷째매형 장조카가 시집을 가게 됐는데, 우리 집과는 사돈처지다 보니 부주로 떡을 해 짊어지고 죽변으로 가게 됐어요. 대흥리 미파골에서 떡을 잔뜩 짊어지고 수십리 길을 걸어서 죽변까지 오는데 얼마나 무거운지 봉평쯤 와서 애를 먹었던 기억이 납니다. 하루 전날에 결혼식이 있는 사돈집에 떡을 가져다주었지요. 이튿날에 결혼식 구경을 하는데, 신부쪽 우인으로 처자들 대여섯 명이 나와서 쭉 서 있더라고요. 그중에 어떤 아가씨 한명이 양갈래 머리를 하고 있는데 마음에 쏙 들었어요. 그래서 ‘저 처자가 누구냐’ 고 알고 지내던 사람에게 물어봤지요. 그랬더니 요 뒷집에 사는데, 엄마는 없고 아버지 밑에 오빠들과 산다고 그러더라고요. 그 말을 듣고 임철봉이라는 사람에게 이튿날 만나자고 연통을 넣어달라고 했는데, 처자 쪽에서 안 만나준다고 했다고 그러더라고요. 그래서 임철봉이라는 사람의 아버지에게 중신을 좀 넣어달라고 부탁했어요. 그 영감님이 중신을 한 거지요. 한 삼개월 지나고 난 다음에 임영감님이 큰 매형과 함께 미파골로 왔더라고요. 그래서 그 처자 집으로 갔는데 아버지와 오빠들이 쭉 앉아 있었어요. 술을 권하기에 주는 대로 몇 잔을 연거푸 마셨는데, 술을 그렇게 잘 마시는걸 보니 사위로 삼기가 힘들겠다고 하더라고요. 그리고 한해 전 여름에 죽변 누나 집에 놀러왔다가 어떤 젊은 사람과 싸움이 붙었는데, 상대방이 상처가 나서 병원에 가서 꿰매고 돈을 물어주고 했던 적이 있었어요. 그러니 누가 이창해는 깡패라고 좁은 동네에 소문을 냈던 거지요. 도저히 딸과 여동생을 줄 수 없다고 하니 어쩌겠어요? 그냥 미파골로 되돌아왔지요. 그리고 곰곰이 생각 끝에 그 처자 오빠에게 협박편지를 썼습니다. ‘왜 날 믿지 않고 이창해가 깡패라는 주위의 소문만 믿느냐?’ ‘여동생을 주지 않으면 내가 어떤 방법을 쓰더라도 개챙피(창피)를 시켜주겠다’ 그렇게요. 얼마 있다 보니까 임영감과 큰 매형이 미파골로 올라왔어요. 저쪽 처자 집에서 말을 띠준다고 했다면서요. 그렇게 결혼을 하게 되었지요. 먼저 아버지가 울진읍 고성리 주영감님이라고, 예전에 도의원 했던 주기돈씨 아버님에게 가서 결혼 날을 잡았지요. 그 영감님이 날받이를 잘 했어요. 결혼식은 먼저 죽변 큰누나 집에 가서 하룻밤 자고 이튿날 가마를 타고 처가가 되는 집으로 들어갔지요. 가마는 미파골에서 죽변까지 메고 갔어요. 가마 앞은 지금 깨밭골 사는 이정만씨가 맸고, 그 옆은 김진태씨가 맸고, 네 명이 가마를 메고 죽변으로 넘어갔지요. 결혼식을 올리고 난 다음에는 바로 새 각시를 제무시에 태워서 미파골까지 갔지요. 그때 뽁두기 산에 한창 산판이 벌어지고 있었는데, 산판에서 운행하던 제무시를 빌려서 죽변으로 온 거지요. 말하자면 도신행을 한 겁니다. 그리고 삼일이 지난 후에 티상을 갔습니다. 결혼하던 날 동네사람들이 새신랑인 내 얼굴에 잿봉지를 얼마나 던지는지 말도 못했어요. 대흥리에서 따라온 우인 일곱 명이 신랑을 대신해서 그걸 고스란히 맞아주었지요. 새신랑에게 재가 가득 담긴 봉지를 던지는 건 아마도 좋은 일에 따라붙는 잡귀를 쫓겠다는 그런 뜻이 담겨 있는 것 같았어요.”
이창해씨는 부인 김순자씨와의 사이에 위로 아들 둘, 아래로 딸 둘, 2남2녀를 두었다.
명동(44세. 죽변면), 운동(43세. 포항시), 미화(39세. 부산시), 매화(38. 충남 아산시)가 그들이다.
열여덟 살부터 이창해씨는 대흥리의 4H회장으로 봉사하면서 4H의 기본이념인 지(智), 덕(德), 노(勞), 체(體)를 생활화하는 농업인의 길을 걷는다.
“대흥리 4H회장을 열여덟 살에 맡아서 스물서너 살까지 육칠년 했어요. 대흥리에 원두충 나무와 지황, 패모, 당귀, 황기, 작약, 시호 같은 약재를 보급하기 시작했지요. 4H 회장을 하면서 대흥리 높은밭등에는 감자를 심었는데, 어느 한해는 60가마니 정도를 캤던 적도 있고요.”
4H회장을 역임하면서 당시에는 보편화되지 않았던 특용작물인 각종 약초 재배를 대흥리에 보급시킨 이창해씨는 한동안 나무젓가락 제조 판매와 곰치 장사를 하기도 했다.
또 한동안 울진에서 현대소리사라는 상호의 전파사를 운영했다.
“김병태라는 친구와 함께 악구산 밑 장구령, 달밭, 영호네 아지미(아주머니) 집 등지를 옮겨 다니면서 와루바시(나무젓가락)를 만들었어요. 스물네 살 정도였지요. 한 이년정도 했는데, 소나무를 베서 도끼로 젓가락 크기만큼 쪼들고 기계를 사용해서 와루바시를 만들었어요. 와루바시에 종이 집까지 끼워서 완제품을 만들어 냈지요. 와루바시를 만들고 나면 말려서 집으로 가지고 와서 포장하는 작업을 했어요. 완제품이 만들어지면 화물로 대구, 영주, 봉화 쪽의 와루바시 취급 가게로 보냈지요. 와루바시는 소나무뿐만 아니라 대나무로도 만들었는데, 대나무는 깎고 다듬기가 힘들어서 얼마 안했어요. 와루바시를 취급 점포로 보내다가 남으면 병태라는 친구와 직접 둘러메고 춘양, 봉화, 영주 쪽으로 팔러 다니기도 했는데, 그때 물곰(곰치)이나 명태포 같은 어물도 울진장이나 죽변장에서 구입해서 함께 팔러 다녔습니다. 물곰 같은 어물은 집집마다 찾아다니면서 팔기도 하고 그랬지요. 울진에서 현대소리사라는 상호로 전파사를 하기도 했는데, 와루바시를 만들기 전이었지요. OK 라디오도 만들고 호마이카 전축도 만들어서 팔고 그랬습니다. 소리사를 하기 전에 서울로 올라가서 통신학원에 등록을 하고 통신교재를 받아와서 독학으로 라디오나 전축을 직접 조립했어요. 그렇게 오래 하지는 않았고요. 그런 영향 때문인지 후에 남동생이 서울로 올라가서 통신학원 삼년 과정을 마치고 평생 전자제품 에이에스 기사와 소리사를 했지요. 동생이 서울에서 통신학원을 다닐 때, 집에 있던 소를 세 마리 팔아서 도와주었어요. 그때만 해도 우리 집은 소를 적게는 열 몇 마리, 많을 때는 이삼십 마리 이상 키웠지요. 집에서 다 못 키우니까 매화리와 북면 하당 등지의 이집 저집에 배미기(배냇소)를 주었어요. 배미기 준 소가 새끼를 낳으면 첫 번째 송아지는 키우는 집이 차지하고, 두 번째 송아지는 우리가 차지하고 그랬지요. 배미기 소가 새끼를 낳았다고 연락이 오면 아버지가 어느 집에 가서 소를 보고 오라고 했는데, 그 일이 참 힘들었어요. 대흥리 미파골에서 매화리나 북면 하당까지 걸어가서 송아지를 보고 와야 했으니 보통 일이 아니었지요.”
<울진읍 대흥리 예비군 소대-울진제2중대 제9소대>
열일곱 살 때 아버지가 다 떨어진 헝겊가방을 나에게 주고 ‘나는 이제부터 집안의 모든 돈 권한을 손 놓고 너에게 맡긴다’면서, 집에서 키우던 소 두 마리에 대한 권한과 집문서, 토지 문서를 꺼내 주더라고요.·····가을로 접어들면 다음해에 논밭에 사용할 거름을 만들기 위해서 풀을 져 나릅니다. 지게로 가득히 150짐 정도 져 날라야 되는데, 대여섯 명이 삼일 꼬박 산에서 풀을 베서 져 날라야 됩니다. 땀에 절고 풀쌔비는 끊임없이 쏘지, 촌에 사는 사람만 불쌍한 거지요.이창해씨는 열일곱 살이 되던 해에 아버지로부터 재산에 관한 모든 권리를 물려받았다고 전한다.
“아버지로부터 집안의 돈 권한을 물려받은 게 열일곱 살 되던 해 사월달입니다. 잊어버리지도 않아요. 어느 날 장나무를 이고 울진장에 팔러갔던 어머니가 술을 많이 마시고 들어와서는 아버지에게 ‘당신은 장작만 팰 줄 알았지, 생나무를 장에 지고 가서 고생만 죽도록 했다’면서 막 달려들더라고요. 장작을 패면 부엌아궁이 같은 곳에 겹쳐 쌓아서 말려주어야 장에 이고 갈 때 덜 무겁고 돈도 더 많이 받고 하는데, 아버지는 그런 융통성이 없었던 거지요. 생나무는 장에 많이 이고 가지도 못하고, 고생만 죽도록 하게 됩니다. 그러니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대든 거지요. 그러더니 ‘그렇게 살려면 돈 권한을 당신이 맡고 있지 말고 나에게 넘기라’고 큰소리를 치고 그랬어요. 그 다음날에 어머니와 함께 다시 울진장에 나가서 장작을 팔고 집에 돌아오니까 아버지가 울었는지 눈이 퉁퉁 부어 있더라고요. 저녁을 먹고 나니까 아버지가 나를 부르더니 다 떨어진 헝겊가방을 하나 꺼내 놓는데, 그 안에 달랑 돈 50원이 들어 있었습니다. 그걸 나에게 주면서 ‘나는 이제부터 집안의 모든 돈 권한을 손 놓고 너에게 맡긴다’고 그러더라고요. 그리고 집에서 키우던 소 두 마리에 대한 권한과 집문서, 토지 문서를 꺼내 주더라고요. 그때 집에 딸린 토지라고 해봐야 70평이 조금 넘는 양지논과 한마지기가 될까 말까한 양지밭이 전부였지요. 그래서 내가 왜 그러냐고 하니까, ‘나는 아무리 해봐야 돈 구경도 못하고 재산도 늘지 않으니까, 모두 손 놓고 너에게 줄 테니까 소를 팔던지 논밭을 팔던지 모두 니가 알아서 하라’고 그러더라고요. 그 다음부터는 소장수가 소를 팔라면서 우리 집으로 찾아오거나 하면 아버지는 모든 상의를 우리 아들과 하라면서 나에게 떠맡겼지요.”
열일곱 살이 되어 아버지로부터 집안의 돈 관리 권한을 넘겨받은 이창해씨는 결혼하고 난 다음부터 착실하게 재산을 늘여간다.
“결혼을 하고 나서 농사도 열심히 짓고, 가을이면 송이도 부지런히 따고 해서 재산을 조금씩 늘려가기 시작했어요. 미파골 인근의 서낭골 땅, 본동 감나무골 입구 산, 본동 초입 땅을 샀지요. 서낭골 땅에는 약초인 황기와 더덕을 갈았습니다. 어느 날은 서낭골에서 생산한 황기를 나와 집사람이 이고 지고 울진장에 가서 팔고, 백암온천으로 갔지요. 고생만 실컷 하다가 오랜만에 둘이서 바람도 쐬고 온천욕도 하고 그렇게 돌아올 참이었어요. 약초를 팔아서 수중에 돈도 몇 만원 들어있었고요. 그런데 호텔에서 자고 이튿날 아침에 방에서 나오다 보니 파출소 순경이 우리보고 조사할게 있으니 따라오라고 하더라고요. 나중에 알고 보니 우리 옆방에 투숙했던 사람이 밤새 도둑을 맞았던 거지요. 주민등록증이라도 가지고 다녔으면 조사가 금방 끝났을 텐데, 시장에 약초 팔러가는 사람이 주민등록증도 안가지고 갔지, 결국 한참이 걸려서 신원조회를 마치고 풀려났지요. 촌에서는 지금처럼 가을로 접어들면 다음해에 논밭에 사용할 거름을 만들기 위해서 풀을 져 나릅니다. 지게로 가득히 150짐 정도 져 날라야 되는데, 보통 대여섯 명의 사람을 사서 풀을 져 나르지요. 대여섯 명이 삼일 꼬박 산에서 풀을 베서 져 날라야 됩니다. 땀에 절고 풀쌔비(풀쐐기)는 끊임없이 쏘지, 어쩌면 촌에 사는 사람만 불쌍한 거지요. 그 풀을 마당 한쪽에 쌓아두었다가 겨울 내내 소 키우는 마구에 넣으면 소의 배설물과 뒤섞이게 되고, 그러면 또 따로 쳐내서 한쪽에 쌓아 두었다가 봄에 거름으로 사용하게 됩니다. 그때도 비료야 있었지요. 그러나 돈이 있어야 비료를 사서 쓰지요. 돈이 있어 비료를 샀다고 해도 건잠에서 미파골까지 지게로 져 날라야 했으니 그 일도 보통은 넘었고요. 시장에서 소금을 사더라도 꼭 건잠에서 미파골까지 수십리 산길을 져 날라야 했으니 노상 몸이 죽을 지경이었습니다. 소가 끄는 쟁기로 논밭도 참 많이 갈았어요. 우리 아버지는 소 쟁기로 논을 하루에 두마지기 정도 갈았지만, 나는 네 마지기를 갈았어요. 밭은 일곱 여덟 마지기 갈았고요. 소에게 쟁기를 걸기 전에는 집에서 담은 막걸리를 서너 되 먼저 먹여야 돼요. 그래야 소가 지치지 않고 하루 종일 쟁기를 끌 수 있거든요.”
산중 작은 마을에서 태어난 이창해씨는 열네 살 때부터 상여를 매러 다녔다고 말한다.
“열네 살 때 아버지를 대신해서 행상을 매러갔는데, 너무 어리다면서 행상 앞에 메고 가는 작은 요해(영여)를 매라고 하더라고요. 그러다가 열여섯 살이 되던 해부터 직접 행상을 맸지요. 우리 아버지는 오래도록 속병을 앓았는데 일은 잘 안하고 여름이면 낚시를 다니고, 겨울이면 사냥을 다니고 그렇게 한량같이 살았어요. 그러니 어릴 때부터 집안의 엔간한 일은 맏아들로 태어난 내가 할 수밖에 없었지요. 보통 집은 아덜한테 행상 같은 걸 매러 다니게 하지 않았는데, 우리 아버지는 자식들을 꽤나 엄하고 강하게 키웠던 것 같기도 합니다.”
<이창해씨의 회갑연(回甲宴)때 단체로 촬영한 가족사진>
대흥리 본동의 마을회관 있는 곳이 당시의 683경비대 대흥리 초소였는데, 옆에 무기고도 있었고 무엇보다 성능이 아주 뛰어난 사이렌이 있었어요. 낮 12시면 사이렌을 손으로 돌려서 울렸고, 사이렌 소리를 듣고 마을사람들이 점심시간이 되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고포 무장공비 침투 사건 때 악구산 밑 동네 장구령과 서낭골 같은 산골에 살던 집들은 전부 본동으로 피난을 내려와서 집집마다 흩어져 살았어요. 피난생활을 하던 그해는 역사상 최고로 눈이 많이 왔어요.결혼을 하고 난 이후에 이창해씨는 683경비대 대흥리 초소의 경비대장으로 근무하면서 군 생활을 끝마쳤다.
“안동에서 기본 군사 훈련을 마치고 대흥리 초소에서 683경비대장을 했어요. 683경비대는 36사단에서 관장했고, 내가 제대한 뒤에 울진경찰서로 이관되었지요. 군 생활을 하는 동안에는 안동이나 울진에서 수시로 재훈련을 받았고요. 당시의 경비대는 흔히 알고 있는 방위병이라는 군 체계와는 성격이 조금 다른데, 다들 자기 고향에서 군 생활을 할 수 있게 해주던 한시적인 제도였습니다. 경비대장으로 초소 무기고에 보관하고 있던 수류탄, 실탄, 총기 관리를 총괄했지요. 지금 대흥리 본동의 마을회관 있는 곳이 당시의 683경비대 대흥리 초소였는데, 옆에 무기고도 있었고 무엇보다 성능이 아주 뛰어난 사이렌이 있었어요. 낮 12시면 사이렌을 손으로 돌려서 울렸고, 사이렌 소리를 듣고 마을사람들이 점심시간이 되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사이렌 소리가 얼마나 큰지 거리상으로 한참 떨어져 있는 미파골에서도 들릴 정도였어요. 대흥리 초소의 근무인원은 많을 때는 열대여섯 명씩 됐고, 밤낮으로 조를 편성해서 근무했지요. 북면 고포로 무장간첩이 넘어왔던 사건도 있었으니, 근무하는 군인들이 모두 실탄과 수류탄을 소지하고 있었어요. 지금 근남면 성류굴 들어가는 입구 아래쪽에 보면 왕피천을 끼고 큰 공터가 있는데, 그곳이 당시에 비행장이었지요. 고포 무장공비 침투 사건 때 사살된 공비들도 비행기로 싣고 와서 그 비행장에 죽 눕혀놓았어요.”
120명의 북한 무장공비가 1968년 10월 30일, 11월 1일, 11월 2일 3일간에 걸쳐 야음을 틈타 북면 고포해안으로 침투했다. 이른바 울진·삼척무장공비침투사건이다.
고포 무장공비 침투 사건 당시에 미파골에 살던 이창해씨는 아랫마을인 본동으로 피난을 내려온다.

“고포로 무장공비가 침투했을 때 우리 집은 본동 양금지네 집으로 피난을 내려왔지요. 그때는 악구산 밑 동네 장구령과 서낭골 같은 산골에 살던 집들은 전부 본동으로 피난을 내려와서 집집마다 흩어져 살았어요. 본동에서 한 보름정도 피난생활을 했습니다. 피난생활을 하던 그해는 역사상 최고로 눈이 많이 왔어요. 그 겨울에 셋째 매형과 네댓 명이 사냥을 갔는데, 내가 암지다람 꼭대기 눈 속에서 옴짝달싹 못하는 노루를 붙잡았지요. 노루를 붙잡아서 양쪽에 나 있는 연한 뿔을 먼저 뜯어먹기 시작했어요. 그러다보니 다름 사람들이 뒤늦게 와서 뜯어먹던 뿔을 마저 갉아먹기 시작했고요. 그해 겨울에 나 혼자서 노루를 대여섯 마리는 잡았을 겁니다. 한꺼번에 다 먹지 못하고 간장조림을 해서 항아리에 쟁여 놓고 두고두고 먹었어요. 산에 가면 눈 속에 빠져서 달아나지 못하는 노루를 손으로 붙잡고 그랬으니까요. 지금 미파골에 남아 있는 소개(疏開) 집은 고포 무장공비가 모두 잡히고 난 다음에 온데 흩어져 있던 집들을 한군데로 모은 겁니다. 피난이 끝나고 일 년 후에 미파골에 소개 집을 짓기 시작했는데, 온 여름 내내 동네사람들이 인부들에게 밥을 해주고 재워주면서 그렇게 지었어요. 미파골에만 소개 집 일곱 채를 지었지요. 미파골, 장구령, 건잠 같은 산골 동네 곳곳에 소개 집을 지어서 이 골짝 저 골짝에 흩어져있던 독가촌을 한데 모았지요.”
뽁두기 산 밑에 살던 역술가인 영호네 할아버지가 농사일이 바쁠 때 사람들이 찾아오면 나보고 대신 점(占)을 봐주라고 했지요. 열세 살에 단시점(短蓍占)을 배운 이후에 열여섯 살부터는 영감님이 막음이나 굿을 하는데 따라 다니며 옆에서 북을 두들겨 주었어요.·····꿈에 미파골 집 옆 도감나무 옆 밭둑의 큰 바위 밑에서 엄청나게 큰 구렁이가 나타나서 구슬 일곱 개를 뱉더니 먹으라고 했습니다. 알록달록한 구슬 다섯 개를 먹고, 두 개는 도저히 못 먹겠다고 버티다가 잠을 깨니까 온 몸이 마비가 돼 있었어요.결혼하고 나서 신을 받은 이창해씨는 지금까지 무속인(巫俗人), 역술가(曆術家)로 활동하고 있다.
“처음 점(占)이라고 해본 건 열세 살 때였지요. 미파골 뽁두기 산 밑에 역술가인 영호네 할아버지가 있었어요. 마을사람들이 집안에 궂은 일이 있을 때면 영호네 할아버지를 찾아가서 이것저것 물어보고는 했지요. 그 영감님이 우리 할아버지와 이종사촌간입니다. 영감님은 근심이 있어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작은 책을 펼쳐놓고 이것저것 짚어가면서, 이건 어떻고 저건 어떻다 조언을 해주었고, 누가 아프다고 찾아오면 여러 가지 방도를 가르쳐주었지요. 모심기같이 농사일이 바쁠 때 사람들이 찾아와서 이것저것 물어보면, 나보고 ‘창해야, 이게 보이나?’해서 ‘보인다’고 그러면, 저 사람 점을 니가 좀 봐주어라 그랬어요. 그 책은 한글로 이것저것 기록해 두었는데, 나이가 몇 살인지 그런 걸 끼워 맞추면 점괘가 나왔습니다. 내가 영감님보고 ‘나이를 맞추니까 19괘가 나왔니더’ 그러면 ‘옳지, 19괘면 북이나 징을 두들겨야 된다’ 그러면서, 날을 정해주고 간단하게 음식을 준비하게 하고 경문(經文)을 읽으면서 막음을 해주고는 했어요. 그러면 또 금세 아픈 사람이 나았고요. 영감님 대신 내가 한 번씩 점을 쳐주고 그러다보니, 나중에는 이웃 사람들이 나에게 하나둘 점을 보러 오기 시작하더라고요. 영감님이 보던 그 책이 단시점(短蓍占)이라는 거지요. 단시점은 책을 보고 솔잎 같은 걸 이용해서 간단하게 치는 점입니다. 단시는 반 육효점(六爻占)인데, 그 할아버지는 단시와 육효점 괘를 빼서 책에 적어두었던 거지요. 육효점은 주역의 팔괘 원리를 사용해서 치는 점이고요. 영감님이 가지고 있던 책은 작은 병풍처럼 쭉 펼쳐볼 수 있도록 돼 있었어요. 그때 그 책을 보고 베껴둔 게 아직까지 나에게 있습니다. 단시점을 배우고 열여섯 살부터는 영감님이 막음이나 굿을 하러다니면 따라 다녔어요. 할아버지가 경문을 읽으면 나는 옆에서 영감님에게 배운 대로 북을 두들겨 주었지요. 나보고 참 빨리 배운다고 했어요. 어렵던 시절에 굿판에서 북을 두들겨주면 먹을 것도 생기고, 가끔은 돈도 생기고 그랬습니다. 영감님 굿판을 따라 나서면 아버지 어머니는 절대 가지 말라고 야단을 치면서, 어떤 때는 신발도 감추고 그랬지요. 그래도 나는 굿판을 따라 나서는 게 좋았고, 영호네 할아버지도 굿하는 날짜를 나에게 몰래 알려주고는 했어요. 대흥리와 서면 하원, 삼근, 보부천, 신림 그런 곳을 다 돌아다녔어요. 영호네 할아버지는 강릉의 어떤 역술가에게 점술을 배웠다고 하는데, 점과 막음은 물론이고 풍수에도 아주 뛰어났던 역술인이었어요.”
열세 살 때 처음으로 단시점을 접하고, 열여섯 살부터 굿판을 따라다니던 이창해씨는 스물여덟 살에 신비한 꿈을 꾼 후부터 신병(神病)을 앓게 된다.
무속사회에서 신병이나 무병(巫病)으로 불리는 병은 장차 무당이 될 입무(入巫)에게 나타나는 병으로서 의약으로는 고칠 수 없고, 신을 받아서 무당이 되면 저절로 낫게 된다고 알려져 있다.
“어느 날 밤에 자다가 꿈을 꾸었는데, 미파골 집 옆 도감나무 옆 밭둑에 있던 큰 바위 밑에서 엄청나게 큰 구렁이가 나타났어요. 꿈에서는 용이라고 믿었지요. 구렁이가 나타나서 눈물을 흘리면서 자꾸 헛구역질을 하더니 목안에서 구슬 일곱 개를 뱉어서 먹으라고 했습니다. 알록달록한 구슬 다섯 개를 먹고, 두 개는 도저히 못 먹겠다고 버티다가 잠을 깼지요. 깜짝 놀라서 눈을 뜨니까 온 몸이 마비가 돼 있었어요. 허리도 못쓰고 꼼짝달싹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 후부터는 농사일을 하기는 했어도 절룩거리면서 다니게 되었지요. 무거운 것도 못 들고 몸이 영 정상이 아니었어요. 그때부터 어머니는 원남 몽천에서 유명했던 할머니에게 찾아가서 점도 하고, 영호네 할아버지에게도 물어보고, 울진 귀골에도 가고 그랬어요. 집사람도 꿈을 꾸고 왜 이유 없이 아픈지 온데로 점을 하러 다녔고, 나중에는 울진 월변에 있던 덕수병원에도 가봤지요. 여인숙에서 먹고 자면서 덕수병원에서 치료를 받았는데 전혀 차도가 없더라고요. 그때 큰누나가 죽변에 강릉어마이라는 유명한 무당이 있으니 점을 한번 해보라고 했어요. 그래서 큰 굿을 하게 되었지요. 그런데 굿을 하는 도중에 겨우 앉아서 버티고 있던 내가 굿상을 발로 차서 굿을 끝내지도 못하고 중간에 그만두었어요. 그때는 몸에 통증이 오면 종아리에 굵은 지렁이 같은 게 왔다 갔다 했는데, 내 눈에만 보이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 눈에도 똑같이 보였지요. 그럴 때면 정말 참을 수 없이 엄청난 고통이 뒤따랐어요. 막 주물러도 안 되고 도저히 방법이 없었지요. 그런 끔찍한 고통이 한 일 년 동안 계속되었어요. 굿을 말도 못하게 여러 번 했어요. 어떤 때는 한 달에 굿만 열한 번을 했습니다. 영호네 할아버지도 와서 빌고, 셋째매형 사돈어른도 와서 빌고, 뽁두기 밑에 살던 봉달이 할배(할아버지)도 와서 빌고, 곽종록이라는 사람도 와서 빌고. 한 달에 열한 번을 빌면서 스텐 다라를 밤마다 두들기니까 나나 다른 식구들이나 몸서리가 났지요. 그때는 징이 없어서 스텐 양푼이를 두들겼어요. 나중에는 스텐다라를 자주 두들기니까 그게 또 살(煞)이 되더라고요. 그러면 또 다른 집으로 피접을 했고요.”
건잠을 지나 행곡으로 내려가는 곳에 큰 소가 있는 모레이를 도는데 저 앞 도로위에 호랑이가 떡하니 버티고 서 있더라고요. 호랑이를 직접 보고 기겁을 한 매형이 앞뒤도 보지 않고 혼자 집으로 뒤돌아 올라가버렸어요. 그러나 나는 호랑이에게 죽으나 숨이 차서 죽으나 똑같다는 생각에 호랑이를 보면서도 앞으로 계속 걸어갔어요.·····포항에서 치료를 받을 당시에 자다가 꿈을 꾸었는데, 하얀 옷을 입은 어떤 할머니가 나타나서 알약 다섯 개를 주면서 먹으라고 했어요. 알약 다섯 개 가운데 세 개를 먹었는데 잠에서 깨었지요. 그런데 꿈에서 깨어나니까 일어서서 걸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때부터 겨우 다시 걷기 시작했지요.뚜렷한 이유 없이 끔찍한 통증이 빈번하게 지속되는 허리와 호흡곤란 증세로 인해 울진병원을 찾아가던 이창해씨는 대흥리 건잠과 근남 행곡리 중간쯤에서 호랑이를 만났던 이야기를 들려준다.
“허리가 아파 틀어져 넘어가고 할 때 신경통 약을 다량으로 복용했더니 이번에는 노랑병이라고 하는 황달이 왔어요. 아침에 하얀 속옷을 갈아입으면 반나절이 못가서 옷 색깔이 노랗게 변했습니다. 온몸의 땀구멍으로 노란 땀이 흘러 나왔고, 눈동자도 노랗게 변했지요. 황달에다가 숨까지 차서 하늘에 닿았지요. 옆에서 사람들이 눈을 뜨고 못 볼 지경이라고 했으니까요. 그날이 사월 스무여드레 날로 할머니 제사가 드는 날이었지요. 황달이 워낙 심하고 숨이 넘어가니까, 제사고 뭐고 울진 병원에 가려고 오후 늦게 이웃에 살던 막내매형과 함께 걸어서 건잠으로 내려갔지요. 대흥리 본동 서낭당을 벗어날 때쯤에 벌써 저쪽 산으로 호랑이 불빛이 따라 오는 게 보이더라고요. 그런데 중간 중간에 불빛이 보이지 않다가 건잠을 다 나가니까 그쪽에 또 불빛이 보이더라고요. 그러나 나는 호랑이 불빛이고 뭐고 당장 병원에 가지 않으면 숨이 넘어가서 죽을 것 같으니까 계속 앞서 걸어갔지요. 건잠을 지나서 행곡으로 내려가는 곳에 큰 소(沼)가 한군데 있어요. 그 모레이(굽은 길)를 도는데 저 앞 도로위에 호랑이가 떡하니 버티고 서 있더라고요. 호랑이를 직접 보고 기겁을 한 매형이 잡아먹히지 말고 되돌아가자면서, 앞뒤도 보지 않고 혼자 집으로 뒤돌아서 올라가버렸어요. 그러나 나는 호랑이에게 죽으나 숨이 차서 죽으나 똑같다는 생각에 호랑이를 보면서도 앞으로 계속 걸어갔어요. 그런데 내가 앞으로 걸어가는 만큼 호랑이가 그만큼 뒤로 물러나는 게 보였어요. 그러다가 어느 순간 정신이 번쩍 드는데, 행곡 부근까지 다왔다는 생각이 들고 호랑이도 어디로 갔는지 흔적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때 참 이상한 경험을 하게 되었지요. 조금 전까지 숨이 하늘에 닿아서 헉헉거렸는데, 그 증상이 없어진 겁니다. 하도 이상해서 몇 번이나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가 내쉬었다가 해도 괜찮더라고요. 몸이 날아갈듯이 가벼워졌고요. 그래서 퍼뜩 정신을 차리고 집으로 되돌아간 매형을 뒤쫓으려고 막 뛰어서 올라갔지요. 집에 들어가니까 이미 할머니 제사도 끝났고, 매형은 ‘처남을 혼자 두고 저 혼자만 살겠다고 올라왔다’면서 장모인 우리 어머니에게 심한 야단을 맞고 있더라고요.”
호랑이를 만난 이후에 숨이 차는 호흡곤란은 사라졌지만 황달이 여전히 심했던 이창해씨는 부인의 결혼반지를 팔아서 약을 사먹고 황달을 고쳤다고 전한다.
“황달로 고생을 하는데도 집안에 약 사먹을 돈이 없었지요. 그러자 집사람이 결혼반지라도 팔아서 약을 사먹자고 그러더라고요. 나는 하나뿐인 결혼반지까지 팔아야 하나 싶어서 서글펐지만 끝내 두 돈짜리 금반지를 팔고 울진 현대약방에 가서 타치온이라는 약을 사먹고 황달을 고쳤지요. 결혼반지를 팔아서 약을 사고 나니까 삼백 원이 남더라고요. 나중에 알고 보니 몸이 틀어져서 넘어갈 때, 신경통 약을 하루 세 번씩 일곱 여덟 알씩 달아서 먹었는데, 그것 때문에 황달이 왔던 거지요.”
혹독하게 신병을 앓는 와중에 병원도 다니고 굿도 여러 차례 했는데도 별 차도가 보이지 않자 이창해씨는 포항도립병원을 찾아간다.
“마지막으로 어디 큰 병원이나 한번 가보자 해서 포항도립병원을 찾아갔습니다. 허리가 끊어질 것 같아서 걸을 수 없으니 막내 매형과 돌이 아버지가 가마를 메고, 나는 그걸 타고 건잠까지 갔어요. 그때는 마을 사람들이 가마계를 모아서 본동에 가마가 한 채 있었어요. 건잠에 도착해서 완행버스를 타고 울진에서 갈아타고, 비포장 길을 몇 시간 달려서 경북도립포항병원에 도착했습니다. 검사를 받고 난후에 통원치료를 했어요. 당장 돈이 없으니 울진읍사무소에 가서 극빈자 우대 카드를 발급받아서 그렇게 치료를 받았지요. 병원 가까이 선내여인숙이라는 곳에 숙소를 정하고 5일정도 병원을 다녔는데도 역시 차도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원장이 오더니 ‘병명은 디스크인데, 돈이 많이 들어서 수술을 할 수가 없다’고 하더라고요. 그 말을 듣고 낙심을 하고 있는데, 선내여인숙 주인아주머니가 ‘포항 정류소 뒤에 가면 야매로 침을 놓는 한의사가 있는데 용하다’고 권하더라고요. 그곳에 가서 삼일 정도 침을 맞고 뜸을 뜨니까 조금 차도가 보이고, 일주일정도 치료를 하니까 허리도 펴지고 옆에서 부축하면 오십 미터 정도씩 걸을 수 있게 되었어요. 그런데 한의사가 이젠 집으로 돌아가서 찜질이나 하라고 그러더라고요. 그런데 또 누가 포항국민학교 뒤의 갑자원이라는 한의원에 가면 금침을 놓아주는 할아버지가 용하다고 하더라고요. 갑자원에 가서 대롱 속에 넣어서 놓는 금침을 맞았지요. 그리고는 미파골 집으로 올라왔어요. 포항에서 한 달 보름정도 머물면서 병원 치료도 하고, 한의원 치료도 받고 그랬지요. 동짓달 보름날에 갔다가 섣달 지내고 설을 쇨 때쯤 집으로 올라왔습니다.”
한 달 보름여 동안 포항에 내려가서 병원과 한의원 치료를 받던 중 이창해씨는 또 다시 기이한 꿈을 꾸게 된다.
“포항에서 치료를 받을 당시에 자다가 꿈을 꾸었는데, 하얀 옷을 입은 어떤 할머니가 나타나서 알약 다섯 개를 주면서 먹으라고 했어요. 알약 다섯 개 가운데 세 개를 먹었는데 잠에서 깨었지요. 그런데 꿈에서 깨어나니까 일어서서 걸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때부터 겨우 다시 걷기 시작했지요. 미파골로 올라와서는 곧장 본가로 들어가지 못했어요. 셋째매형 아버님 되는 사돈어른이 본가에 살이 끼었으니 다른 집에서 피접을 하다가 집에 들어가라고 권했습니다. 그래서 셋째 매형네 소개 집에서 일주일 피접을 하고 본가로 들어갔지요. 그런 후에도 노상 점집이나 무당을 찾아다니면서 어디가 탈이 났는지 물어봤고, 굿도 하고 막음도 하고 그랬어요. 한 달에 열한번이나 막음을 할 때는 열 닷 말이 들어가는 우윳가리(우유가루) 통의 수성쌀이 바닥을 보일 정도였습니다. 이삼일이 멀다하고 쌀밥에다 무우국을 끓여대면서 막음을 하고 빌었으니 가뜩이나 없는 집안 살림이 어찌 됐겠어요? 포항에서 돌아온 다음부터는 이년정도 일도 못하고 지팡이를 짚고 겨우 걸어 다녔지요. 그 와중에 노랑병인 황달까지 걸렸고요. 나도 나지만 누구보다 집사람이 무진 애를 먹었지요.”
미파골에서 독점골로 올라가는 초입에 우리집안에서 예로부터 믿어오던 본주본산이 태백산의 준령인 악구산 자락 아래 십자소라는 곳이 있어요. 그 소에서 청수를 떠놓고 백일기도를 올렸지요. 백일이 지날 때쯤에 내 몸에 깃든 신이 누구인지 확실하게 느껴졌고, 그때부터 이일 저 일이 보다 명확하게 보이기 시작했지요.·····통돼지는 천신에게 바치는 거지요. 그리고 돼지를 세우고 나면 해체해서 태백산 산신, 지리산 산신 등 팔도산신에게 봉지를 주게 됩니다. 내가 모시는 몸주는 산신과 장군신인데, 굿판마다 필요한 몸주를 부르게 되는 거지요.포항에서 병원과 한의원을 오가면서 치료를 받던 이창해씨는 집으로 돌아온 후부터 점도 치고 굿도 하는 역술인과 박수(拍手)의 길을 본격적으로 걷게 된다.
“병원에서 돌아온 후부터 인근 동네에 아픈 사람이 있으면 나에게 와서 이것저것 묻는 사람들이 많아졌어요. 그럴 때 혼자 그 집으로 가서 북을 치면서 경문도 읽고 빌면 떨꺽 낮고 그랬습니다. 어떤 날은 쉰배미까지 막음하러 갔다가 새벽한시쯤에 집으로 돌아왔는데, 어두운 산길을 걸어왔더니 온몸이 물에 빠진 것처럼 흠뻑 젖어있기도 하고 그랬어요. 그러면서 차츰 막음과 굿으로 유명했던 장상중씨와 포항도 다니고 그랬지요. 나보다 먼저 신을 받고 죽변으로 내려가 살던 막내 누나가 불러서 죽변도 자주 내려가서 점도 하고 굿도 하고 그랬지요. 또 일 년에 한두 번은 객지에 나가서 찌라시(전단지)를 보고 찾아오는 손님들을 상대로 점도 했고요. 강릉, 임원, 후포, 포항, 흥해 등지로 한번 나가면 보름이나 한 달씩 머물다가 집으로 돌아왔어요. 신을 받을 처음에는 울진읍 귀골에 살던 장씨라는 보살 할매(할머니)가 작은 탱화 한 점을 가져다주고 신당을 차렸는데, 영 신통치가 않아서 내손으로 다 부셔버렸어요. 그리고는 혼자 백일기도를 해서 신을 받았습니다. 미파골에서 독점골로 올라가는 초입에 수심이 아주 깊은 십자소(沼)가 있어요. 십자소는 윗대부터 우리 집안이 위해오던 본주본산인 태백산의 준령인 악구산 자락 밑에 있지요. 그 소에서 매일 한밤중에 청수를 뜨면서 기도를 올렸습니다. 백일이 지날 때쯤에 내 몸에 깃든 신이 누구인지 확실하게 느껴졌고, 그때부터 이일 저 일이 보다 명확하게 보이기 시작했지요. 눈앞에 뿌옇게 끼어있던 안개가 한순간에 확 걷힌 느낌이었습니다. 십자소에서 백일기도를 할 당시에 여러 가지 경문도 함께 익혔습니다. 몸이 아플 때 무속인을 불러서 굿과 막음도 여러 번 했지만, 굳이 따지면 나는 역술 선생도 따로 없고, 살풀이 굿 같은 절차를 가르쳐준 선생도 따로 없었어요. 어렵게 혼자 독학으로 익힌 셈이지요. 미파골에 있으면서도 집안의 본주본산인 태백산을 두어 번 다녀왔지요. 삼척까지 급행버스를 타고 가서 기차로 갈아타고 황지에 도착해서 태백산으로 올라갔어요. 당시만 해도 태백산에는 윤씨산당 밖에 없었어요.”
서른한 살이 되던 해에 이창해씨는 대흥리 미파골의 집과 산, 논밭전지를 모두 정리하고 처가동네인 죽변으로 이사를 내려온다.
“대흥리 미파골에 살면서도 죽변에 자주 내려왔기에 아는 사람들은 많았어요. 국민학교 다닐 때부터 죽변 살던 큰누나 집에서 방학을 보내면서 알게 된 사람들도 많았고, 신을 받고 나서는 죽변 막내누나와 함께 뱃고사(告祀)도 지내고 굿도 하러 다니고 그랬으니까요. 죽변으로 이사를 와서 얼마 안 있다가 오토바이를 한 대 샀습니다. 오토바이를 타고 멀리 태백산도 가고, 강릉이나 임원을 다니면서 굿도 하고 고사도 올려주고 그랬지요. 어떤 날은 오토바이 뒤에 굿할 사람과 제물 음식까지 싣고 태백산을 오가기도 했고요. 그때는 자갈이 울퉁불퉁했던 비포장 길이었지요.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면서 넘어진 적도 숱한데 심하게 부상을 당한 적이 없고, 타이어 펑크가 난적도 거의 없었어요. 그럴 때마다 항상 보이지 않는 어떤 힘이 나를 보호해주는구나 느끼게 되지요. 한겨울에 오토바이를 타고 장거리를 가면 또 얼마나 추운지, 찬바람을 막으려고 잠바 안쪽에다 신문지를 두툼하게 말아서 넣고 다니기가 일쑤였습니다. 지금은 주로 태백산, 일월산, 팔공산, 두타산 등지를 다니면서 굿이나 살풀이를 하고, 규모가 작을 때는 가까운 굿당을 찾아가지요.”
<이창해씨가 주관하는 굿판의‘사실(寫實) 세움’은 각지의 명산에 산재한 산당(山堂)에서 널리 알려져 있다>
이창해씨가 주관하는 굿판의 ‘사실(寫實) 세움’은 각지의 명산에 산재한 산당(山堂)에서 널리 알려져 있다.
‘사실 세움’이란 굿판의 후반부에 행해지는 절차 중의 하나로써, 강림한 신이 제대로 감응(感應)했는지를 알아보기 위해 삼지창(三枝槍)에 통돼지 등을 꿰어서 똑바로 세우는 절차이다.
이때 제물로 바쳐지는 ‘사실’이 잘 서야 신이 제대로 감응했다고 판단하게 된다.
‘사실 세움’에서 사용되는 세 개의 뾰족한 날을 단 삼지창은 양쪽의 한쪽 날은 태양, 다른 한쪽 날은 달, 그리고 중간 날은 별을 상징한다고 알려진다.
“털을 벗긴 통돼지를 사용하는 돼지 세우기를 한지도 이십 년여 됩니다. 굿의 제물인 통돼지는 천신에게 바치는 것입니다. 세움이 끝난 통돼지는 그 자리에서 해체하여 또 다른 작은 삼지창에 꽂아서 세우는 절차를 반복하면서 태백산 산신, 지리산 산신 등 팔도산신에게 봉지를 주게 되는 겁니다. 내가 모시는 몸주는 산신과 장군신인데, 굿판마다 필요한 몸주를 따로 부르지요. 병점은 주로 팔도 산신을 부르고, 재수굿 같은 경우에는 장군신을 부릅니다. 사소한 일로 점을 칠 때는 동자신(童子神)을 부르기도 하고요. 그러나 대부분의 점괘는 역술(曆術) 역리점(易理占)으로 빼지요. 먼저 사주를 빼고, 육효를 뽑고, 필요하면 신을 부르고 그럽니다. 아니면 육괘(六卦) 괘상을 뽑기도 하고 그러지요. 단시점인 육효를 뺄 때 나는 대나무를 가늘게 다듬어 사용하는데, 경우에 따라서는 솔잎도 사용해요. 어떤 경우든 신은 제일 마지막에 부르고요.”
20대 초반에 참기 힘든 지독한 신병을 앓다가 견디다 못해, 집안의 본주본산인 태백산 준령 악구산 자락인 십자소에서의 백일기도를 통해 신의 강림을 체험한 이창해씨는 일평생 무속인으로 생활하면서 해동불교대학을 졸업하고, 몽골불교대학교 명예박사학위를 취득했다.
또한 지역사회의 다양한 봉사활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죽변라이온스클럽회장, 로타리조기회·일지회 회장, 죽변면자율방범위원회 위원장, 죽변중·고등학교 육성회장, 죽변면새마을지회장 등을 두루 역임했다.
<1992년에 해동불교대학을 졸업한 이창해씨는 2005년 9월 5일 몽골불교대학교 명예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역술을 좀 더 깊이 있게 배워보고 싶은 욕심에서 서울 해동불교대학 불교철학과에 입학을 했지요. 서울까지 참 열심히도 오르내렸어요. 5년 과정을 끝마치고 1992년 3월 7일에 졸업했고, 수계를 받으면서 동산(東山)이라는 법명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2005년 9월 5일에는 몽골불교대학교 명예박사학위를 받았어요. 또 몇 년 뒤에는 포항 위덕대학교 풍수학과 교양학부를 거치면서 일부분 수강생들의 강의를 직접 맡아서 가르치기도 했어요. 모두 다 고생하고 애쓴 만큼 보람이 있는 일이었지요. 또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이 좋아서 서른한 살에 죽변으로 이사를 와서 많은 모임에 참여했습니다. 서른대여섯 살에 친하게 지내던 편영호, 고건수, 전억수씨와 함께 지역에서는 처음으로 로터리조기축구회를 만들었어요. 초대부터 구년정도 회장을 맡아서 열심히 운동을 했지요. 수년 뒤에는 새벽에 축구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일지회라는 축구회를 따로 만들었고요. 일지회도 올해로 한 이십 년여 됐을 겁니다. 지역에 몸담아 살면서 죽변면 자율방범협의회장, 죽변중고 육성회장, 새마을협의회 죽변지회장, 죽변라이온스클럽 회장 등 꽤나 많은 활동을 했습니다. 모임의 장을 맡으면 짧게는 이삼년, 길게는 오륙년씩 열심히 쫓아다녔고요. 그런 일들이 다 보람으로 남아 있지요.”
전문가들은 오랜 옛날부터 민간층의 종교였던 무속신앙은 한국이라는 땅에 깊숙하게 뿌리박고 있으면서 이국땅인 한국을 찾은 외래종교의 한국적 변용에 큰 영향을 미쳐왔다고 지적하고 있다.
이 땅의 근본 신앙으로 자리 잡아 온지 오래인 무속은 얼핏 보면 정형화된 타 종교처럼 완벽한 틀을 갖추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점점 더 많은 이들의 객관적인 연구와 무속인들의 삶을 통해 변함없이 전통적인 방식과 체계로 현실 속에서 꾸준히 실행되고 있다.
일상생활 전체를 자연신, 인신, 영웅신 등 신의 섭리로 돌리고, 신 앞에 복종하는 절대성으로 폭넓게 민간층을 포섭하고 지배하는 종교적 기반을 장점으로 가지고 있는 무속신앙은 앞으로도 여전히 무당, 박수, 보살, 점술가, 철학관, 역술가 등으로 불리는 무속인들에 의해 전승되고 또 계승될 것이다.
천지가 가르쳐주는 교리와 기복성을 따르는 무속은 분명 전통의 고유한 의미와 역사성을 찾고 지켜내며 이 시대에도 꾸준히 진화하고 있는 중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