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청(丹靑)장이로 살았던 장문희씨 이야기

기사입력 2011.08.17 1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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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세월동안 우리네 삶의 한가운데를 관통해온 유교문화, 그 유학의 가르침을 생활 속에서 구현하는 실천적 이념은 급변하는 이 시대에도 여전히 많은 부문에 걸쳐 통용되고 또 지배하는 강력한 힘을 행세하고 있다.  

바로 격조(格調) 때문이다.
한 인간이 가진 품성의 격과 고매한 취향을 아우르는 격조는 곧 한 인간의 모든 것을 결정하는 것이다.  

어느 작가의 소설 구절에서처럼 비바람만 간신히 막아 줄뿐이던 보잘것없던 단칸방이 매화 한그루를 키움으로써 격조가 있는 사랑방으로 변신하듯, 한 인간이 가진 격조는 통속적이고 신파적인 세월조차 가뭄 끝의 단비처럼 듣는 이의 심금에 잦아들게 한다.  

격조는 한순간에 갖추어지지 않는다.
돈이 많다고, 사회적인 지위가 높다고, 권세가 있다고, 직업이 고귀하다고 갖추어지지 않는다.  

예순, 일흔이 넘어서까지 사회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노인으로서의 품위를 잃지 않고 살아간다는 건 또 얼마나 힘든 일일까? 

이 시대, 사회와 가정에서 권위와 존엄성을 잃지 않고 존중받으며 살아가는 노인들 대부분은 격조 있는 삶을 적극 실천으로 옮겨왔고, 또한 옮기고 있는 이들이다.   

특히 시대의 조류와는 상관없이 여전히 힘을 내뿜는 격조에 더해, 지나간 시절에 세세하게 지켜봤던 지역 사회의 문화, 정치, 경제의 단면들까지 잊지 않고 기억하는 이들을 만나게 되면 늘 기쁨이 배가된다.  

소박하게 살아온 과정을 얘기하는 노인들의 육성은 더없이 귀하다.   
전쟁과 보릿고개 등 격동의 세월을 가슴으로 안고 살아온 노인들이 체득해온 삶의 지혜와 혜안은 곧 우리들과 우리 사회의 미래 모습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마을 훈장을 하면서 이 동네는 물론이고 매림, 검은개, 산포 3.4리 아덜에게 한문을 가르쳤어요. 서당 훈장을 하면서 아덜이 책 한권 떼면 선상님 대접한다고 떡 한 양푼이 해서 나눠먹고 그게 전부였네. 큰 아덜이 이 아랫방에 두 줄로 나란히 꿇어앉아서 글을 읽고 쓰고 그랬거든. 그때 아버지가 사용하던 앉은뱅이책상이 아직도 그대로 있어. 

 
장씨의 부친 고(故) 장상훈(張相勳)씨의 초상(肖像)

장씨의 모친 고(故) 최논출씨의 초상(肖像)
장문희(張文熙. 73세)씨는 지금 농사지으며 살고 있는 근남면 산포1리 일명 ‘섬’에서 태어났다.
“원래 여기서 태어났고, 자랐고, 지금까지 농사를 짓고 있어. 젊은 시절에 군 생활을 했던 게 타지 생활의 전부지. 아버지는 인동 장씨(仁同 張氏) 성에 서로상(相)자 공훈(勳)자를 썼네. 아버지는 일흔셋에 돌아가셨어. 어머니는 최씨 성에 말할논(論)자 날출(出)자를 썼고요. 어머니는 여든둘에 돌아가셨고. 원래 아버지 고향이 원남면 신흥리 대잠이라는 곳이여. 아버지는 예전에 면서기로 시작해서 울진군청 산림계에 근무하다가 원남면장과 기성면장 등을 했었지. 그러다보니 이웃에서는 우리 집을 장면장네, 장면장네 그렇게 불렀어. 부모님은 오남매를 두었는데 위로 누나 둘은 돌아가셨고, 나와 쌍둥이로 태어난 남동생이 작년에 세상을 떴지. 제일 막내 남동생은 경찰서장을 하다가 정년퇴직해서 수원에 계속 살고 있고요. 내가 쌍둥이로 태어났어. 내가 형이고 작년에 세상을 뜬 남동생이 함께 태어났지. 아버지 어머니는 슬하에 딸 둘을 낳고 아들을 얻지 못하다가, 연세를 많이 잡숫고 불영사에 가서 공을 들여서 우리를 낳았다고 하더라고. 어쨌든 불영사에서 공을 잘 들인 덕분인지 쌍둥이 아들 둘을 낳고, 막내로 아들 한명을 또 얻은 거지.”  

쌍둥이로 태어나서 자란 장씨는 인근 노음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울진중학교에 진학했다가 가난과 6.25전쟁으로 인해 학교를 그만 두게 된다.
“그때 이미 노음국민학교가 있었어요. 왜정 때부터 있던 학교니까 역사가 오래됐지. 여덟 살에 국민학교에 들어가서 12회로 졸업했어. 그리고 곧장 울진중학교에 들어갔는데 졸업을 못했어. 국민학교 5학년 때 6.25사변이 났지. 전쟁 도중에 노음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울진중학교에 입학해서 얼마 안 다니다가 그만두었어. 쌍둥이 동생은 나보다 조금 먼저 그만 두었고. 울진중학교에 다닐 때 군인들 추럭(트럭)이 비포장도로로 먼지를 날리면서 다녔는데 그 추럭을 자주 얻어 타고 다녔어. 다행히 군인들 추럭을 얻어 타면 학교로 가고 아니면 결석도 하고 그랬지. 지금이야 근남에서 울진까지 아스팔트가 깔려 있지만 그때 도로는 말도 못했어. 울퉁불퉁한 비포장도로에 허연 먼지가 풀풀 날리고 그랬거든. 그러저런 이유들로 결국 중학교를 그만 두게 되었어. 6.25사변 때는 수산다리도 없었는데, 저 수산보 밑으로 추럭이 가다가 빠지면 뒤에서 밀기도 하고 그랬어요. 한창 전쟁 중에는 인민군들이 나무다리를 만들어서 오갔는데, 미군들이 비행기로 폭격을 해서 다리가 없어지면 다시 주민들을 부역 시켜서 나무다리를 놓고 그랬어. 나무다리라도 튼튼해서 사람들은 마음대로 오갈 수 있었고, 추럭이나 다른 차들은 수산보 밑으로 물을 삼고 건너가고 그랬지. 하기야 그때는 군인 추럭 말고 다른 차는 구경하기도 힘들었어요. 우째다(어쩌다) 한 번씩 다른 차를 구경할 수 있었으니까.”  

장문희씨의 부친 장상훈(張相勳)씨는 실력이 뛰어난 인근에서 알아주던 한학자였다.
“원래 우리 쌍둥이 형제는 아버지가 울진군청에 근무할 때 낳았는데 세돌 인가 지났을 때 이곳 근남으로 이사를 왔다고 하더라고. 원래 부모님은 울진향교 앞에 살았는데, 울진 동림사 포교당 뒤쪽에 논도 있었어. 그 집과 터를 다 팔아서 이곳으로 이사를 왔던 거지. 아버지는 한학자였어. 그러니 우리는 아주 어릴 때부터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서 한문을 배웠어요. 천자문도 배우고 명심보감도 배우고. 요 방안에 꿇어앉혀 놓고 회초리로 머리나 종아리도 때리면서 그렇게 한문을 가르쳤지. 그때 글을 가르치던 방이 바로 이방이여. 그때나 지금이나 이 집 구조는 하나도 안변했거든. 아버지는 마을 훈장을 하면서 이 동네는 물론이고 매림, 검은개, 산포 3.4리 아덜(애들)에게까지 한문을 가르쳤어요. 지금도 나이든 어른들은 다들 우리 아버지를 기억하지. 지금 이방에 앉아서 동네 아덜을 모아놓고 글을 가르쳤어. 서당 훈장을 하면서 아덜이 책 한권 떼면 선상님(선생님) 대접한다고 떡 한 양푼이 해서 나눠먹고 그게 전부였네. 따로 수업료를 내는 건 없었고. 큰 아덜이 이 아랫방에 두 줄로 나란히 꿇어앉아서 글을 읽고 쓰고 그랬거든. 그때 아버지가 훈장을 하면서 사용하던 앉은뱅이책상이 아직도 그대로 있어. 사라호 태풍때 물이 들어서 낡기는 했어도 예전 그대로여. 어쩌다 사람들이 오면 그것도 골동품이라고 자꾸 가져가려고 해. 아버지는 조그만 회초리를 하나 가져다 놓고 잘 모르면 한두 대씩 패고 그랬지. 큰 아덜이 아버지께 한문을 배웠으니 우리는 등수에 들지도 못했어. 큰 아덜이 간 다음에 우리 형제가 아버지께 글을 배우고는 했지.”  


<한학자로 마을 훈장을 지냈던 장씨의 부친 고(故) 장상훈(張相勳)씨가 생전에 사용하던 서안(書案)과 벼루>

장문희씨는 울진중학교를 그만두고 집에서 농사를 거들면서 일을 배운다.
“중학교를 그만 두었을 때 나이가 열네다섯 살 됐지. 집에서 농사를 거들면서 일을 배웠어. 그때는 집에 농사를 짓던 일꾼도 있었거든. 동생이 농사일을 아주 잘했어. 밭농사를 짓는데, 여기는 콩 심구고(심고) 여기는 서숙 심구고 또 저기는 보리 심구고 그런 결정을 남동생이 도맡다시피 했거든. 우리가 점점 커가면서 집에서 일하던 일꾼을 내보냈어. 한해 농사를 열심히 지어도 일꾼 새경 주고 그러니 뭐 남는 게 있어야지. 낭기(나무)는 주로 수곡 한티재로 하러 갔어. 한번 나무를 하러 가면 하루 종일 걸렸지. 당장 나무가 없으면 짚도 긁어모아서 때고 껌부지(검불)도 끌어서 때고 그랬어. 한티재까지 가서 까치집같이 낭기를 해서 지고 오고 그랬네. 한티재에 가면 사람도 안 살고 그러니 나무를 해오기가 좋았지. 사유림이든 국유림이든 근남 주변에 있는 산에는 요만한 나무도 없고 전부 다 민둥산이었지. 옛날에는 사는 게 매란(형편)이 없었어. 우리 집뿐만 아니라 다른 집들도 다들 그렇게 살았어. 내가 열일곱 여덟 살쯤 됐을 때 사방 관리소에서 일을 한 적이 있네. 사방관리소에서 보조관으로 일했는데, 아버지가 소개를 했어. 그때 전병하씨라고 북면 고목리에 살던 일가친척 되던 분이 사방관리소 부소장으로 근무했거든. 이승만 정치 땐데 일을 하고 나면 월급 대신에 납딱 보리쌀을 주었어. 기계로 눌러서 납딱(납작)한 보리쌀 있잖가? 그러면 집에 가지고 와서 밥도 해먹고 그랬지. 그때는 사방관리소에서 주로 아가씨(아카시아)를 지부래(집 부근에) 많이 심었어요. 아가씨도 심고 소나무도 일부 심고 오래낭구(오리나무)도 많이 심고 그랬어. 그때 사방 사업한 나무가 지금 저 산에 크고 있는 거여. 민둥산이 지반이 약하니까 먼저 돌 축을 쌓고 나무를 심고. 한 삼년 정도 다녔나 몰라. 사방 관리소 보조관이라는 것이 사방 공사 하는 현장에서 사방 인부들을 관리하는 거였네. 돌 축을 쌓고 잔디를 입히고 흙구덩이를 파서 나무를 심고 그랬는데, 제일 돈을 많이 받는 사람들은 돌 축을 쌓는 인부들이었지. 그 사람들은 1인 5부나 2인 정도 받았지. 한사람 반몫이나 두 사람 몫을 받은 거지. 납딱 보리쌀도 겨우 먹고 살 정도로 월급이라며 주었어. 집에서 농사도 짓다가 사방 일이 있으면 사방 현장에도 가고 그렇게 살았어.”


<중매를 통해 장문희씨는 20살에 동갑내기 부인 노순이씨를 아내로 맞았다>

가마를 타고 장가를 가는데, 내려서 걷다가 평지에서는 타고 가다가, 처가가 될 집으로 들어가서 꼬꼬재배 결혼식을 올렸어요·····할마이가 우리 집으로 들어올 때 조그마한 탁상시계를 하나 예물로 들고 왔어. 서독제인가 그랬는데, 시계가 있는 집이라고 이웃에서 한참 잘 시간인 새벽에 시간을 물으러 오기도 했지.

 
장문희씨의 젊은 시절 어느 한때

새색시 시절, 마당가 우물에서 두레박으로 물을 길어 올리는 장씨의 부인 노순이씨
장문희씨는 20살에 중매로 인근 지역인 잘미 처자와 결혼을 했다.
“스무 살에 결혼을 했지. 그때야 얼굴도 모르고 당연히 중매로 했지. 이모부가 배꺁잘미(바깥 잘미)라고 구산리에 살고 있었는데 중매를 했어. 집에 할마이 친정이 잘미거든. 이름은 노씨 성에 순할순(順)자 저이(伊)자여. 나이가 나하고 동갑인데, 지금 칠십서(일흔셋)이지.”  

옆에서 오가는 얘기를 잠자코 듣고 있던 장씨의 부인 노순이씨가 말을 거들어준다.
“나는 여기 시집을 안 오려고 했어요. 옛날에는 그래도 잘미는 양반 동네고 이곳은 물가동네 아이요? 시집을 안 오려고 해도 우리 시아반님이가(시아버지께서) 얼매나 얼매나(얼마나) 거시가지고(거세가지고) 할 수 없이 시집을 오게 됐어요. 나를 미느리(며느리)를 볼라꼬 우리 집으로 중신애비가 하나도 못 가게 막고 그랬어요. 딴 사람들이 우리 집으로 중신을 하러 가면 우리 집에서 먼저 말띴다(말뗐다)고 막고 그랬거든요. 그래도 우리 집은 잘미에서 제법 부자소리를 들으며 기와집에서 살았는데, 이집으로 시집을 왔는데 말도 못했어요. 밭이라는 게 갈대가 우거 싸고 있고, 일할 사람이 없으니 모래 갱빈(강변)이고. 온 동네가 마카(전부) 다 짚집(초가집)이고 말도 못했어요. 더구나 시집오고 얼마 안돼서 사라호 태풍으로 집들이 다 찌그러졌고요. 옛날에 선비집이라고 하면 말 다했잖니껴?”  

결혼할 당시 장씨는 가마를 타고 처갓집이 될 잘미로 갔다고 말하며 웃는다.
“말을 띠고 초편지도 오가고 상각(상객)으로 아버지가 앞장서고 친구들이 가마를 메고 그렇게 처갓집이 있는 잘미 동네로 갔어요. 친구들이 가다가 무거워서 못가겠다 그러면 중간 중간 내려서 걸으면서 그렇게 갔지. 근남에서 잘미로 가는 구리재가 지금이야 재도 아니지만 그때는 얼마나 가파르고 꼬불꼬불했던지. 내려서 걷다가 평지에서는 타고 가다가, 처가가 될 집으로 들어가서 구식으로 꼬꼬재배 결혼식을 올렸어요. 처갓집이 옛날에는 잘미에서 엄청난 부자였어. 결혼식을 올리고 처갓집에서 이틀 밤 자고 삼일 만에 집으로 돌아와서 하룻밤 자고 다시 처갓집으로 갔어. 상각 손님은 하룻밤 자고 집으로 돌아오고. 달을 건너면 안 된다고 해서 일단 집으로 돌아왔다가 하룻밤 자고 다시 처갓집으로 들어간 거지. 음력으로 구월 스무 여섯 날에 결혼식을 올렸으니 날자가 좀 어중간했던 거지. 전해오는 풍습에 따라서 구월 달에 장가를 들었으니 지달(제달)인 구월 달에 다시 처갓집에 들어가야 했거든. 이 사람은 결혼식을 올리고 스무날 정도 있다가 다시 날을 받아서 시월 스무날에 사댁인 우리 집으로 들어왔어요. 결혼해서 우리 집으로 들어올 때 조그마한 탁상시계를 하나 예물로 들고 왔어. 서독제인가 그랬는데, 시계가 있는 집이라고 이웃에서 한참 잘 시간인 새벽에 시간을 물으러 오기도 했지. 집에 다니러왔던 자식들이 새벽차를 타고 가야 하는데 인근에서는 시계가 있는 집이 우리 집뿐이었거든. 그러면 요만한 호랑불(호롱불)에 불을 켜서 시간을 알려주고 그랬네. 그때는 시계가 그렇게 귀한 물건이었어.”  

장씨는 썩 여유 있는 살림살이는 아니었지만 아버지는 오가는 길손들에게 보리밥이라도 꼭 한 끼 대접하기를 잊지 않았다고 전한다.
“아버지는 마을 훈장을 하고 있었으니 농사일을 할 시간도 없었지. 그때는 개나리 보따리 짊어지고 손님들이 많이 와서 글도 주고받고, 글을 지어서 다른 곳으로 보내기도 하고 그랬네. 아버지는 돈을 모으지는 못했지만 집에 손님들이 오면 보리밥이라도 꼭 한 끼 대접해서 보냈고, 앞뒤 밭에 과수원이 있었으니 배도 따고 사과도 따서 대접하고 그랬어. 지금은 배나무 사과나무를 다 파내고 매실나무를 심었지. 예전에는 까치 까마구(까마귀)가 또 얼마나 많았는지 말도 못했지. 배도 다 파먹고 사과도 다 파먹고. 아버지가 ‘까치 봐라, 까마구 봐라’ 그러면 쫓아가서 워워 소리를 내지르고는 했거든. 보릿단도 돌멩이에 태질하고 도리께질하고 그렇게 먹고 살았어. 논에서 나락을 베 오면 집게로 훑거나 발기계로 털기도 하고.”

장씨의 부인 노순이씨의 얘기가 이어진다.
“시집오자마자 니아까(리어카) 끌고 채소 장사를 했잖니껴? 가만히 생각하니 안 되겠더라고요. 당장 먹고 살게 없으니 까짓꺼(까짓것) 할 수 있니껴? 시장에 주로 배추, 무우, 당근, 호박 같은 걸 내다 팔았니더. 울진 5일장뿐만 아니라 무심 날까지 춘하추동 다녔어요. 지금은 뿌시대고(부수고) 없어진 수산다리로 니아까를 끌고 울진으로 다녔니더. 차도 없었어요. 울진장에 혹불쟁이라고 혹이 달린 할바이가 차가 한 대 있었는데, 그 영감이 채소나 과실을 영덕 같은 곳에서 떼다가 울진장에 팔았고요. 장바닥에 전을 펴고 앉아서 채소나 과일을 팔다가 점심때가 되면 장바닥에 앉아서 보리밥을 사먹었어요. 보리쌀에 감자 한 개 넣고 호박 넣고 된장국을 끓여서 팔았는데 한 그릇에 삼십원 했니더. 아침에 장에 나갈 준비를 한다고 시간이 없어서 밥을 굶고 가보소, 하루 종일 얼마나 배가 고픈지. 우리가 그렇게 살아 나왔어요. 아이고, 참말로. 수산 동네 지나서 울진 들어가는 길에 삼거리가 있는 곳을 수산 웃목이라고 불렀어요. 지금은 평평하지만 그때는 그 재가 꽤나 가팔랐어요. 그 오르막을 못 올라가서 니아까를 끌고 배에 힘을 주면 온 배에 멍장구(멍)가 들고 그랬니더. 내가 그때부터 지금까지 울진장에서 채소장사를 하는데 오십년 넘게 했니더. 사람들이 나를 보면 ‘아이고, 이제 채소 장사 그만하지’ 그런 소리를 해요. 지금이야 영감이 경운기로 시장까지 태워다 주고 데리러 오지만, 옛날에는 항상 니아까를 끌고 다녔어요. 또 젊었을 때야 매일 장사를 다녔지만 나이가 들면서 장날에만 다니고요. 울진장 뿐만 아니라 매화장에도 다녔는데, 근남에서 매화로 넘어가는 저 구리재는 또 얼마나 높니껴? 그래도 예전에는 채소 장사가 괜찮았어요. 그렇게 장사를 해서 오남매 대학까지 다 시켰지요. 그러니 집 마당에 세워져 있는 니아까가 다 떨어져서 골동품이 되었지만, 미련이 남아서 못 버리고 있니더. 내 손에 와서 돈도 참 많이 벌어주었는데 우째(어찌) 버리요?”  

장씨의 부인 노순이씨가 50년여 사용해온 리어카는 일본에서 생산된 제품으로, 배를 이용해서 울진으로 실어 나른 물건이라고 장문희씨가 전해준다.
“저 니아까가 생산되었던 때는 포항제철소도 없고 우리나라에서 철을 못 만들던 때였어. 제동중학교를 설립한 목재상이었던 장성업씨가 수곡 한티재 모태(부근)서 강물이 많을 때 나무를 밀어 내려 보내면 근남 염전 앞까지 떠내려 왔지. 그러면 장성업씨 배가 그 목재를 싣고 부산 같은 곳으로 싣고 옮겼거든. 저 니아까가 부산에서 올라오는 장성업씨의 배에 실려서 울진에 도착한 니아까지. 그때 장성업씨 목재소에 우리 육촌 매형이 기계를 보고 있던 기술자였어. 그 매형에게 부산에서 니아까를 사서 배로 실어다 달라고 부탁을 해서 이리 옮겨왔어. 50년 동안 사용하면서 더러 용접은 했지만, 일본제 쇠로 만든 물건이라서 아직도 끄떡없어.”  


<장씨의 부인 노순이씨가 50년 동안 사용한 일본산 리어카>

장씨는 1950년 6.25전쟁 이전까지는 왕피천을 가로지르는 다리가 없어서 뗏마(무동력 소형 목선)를 이용하여 사람들이 강을 건너다녔다고 전해준다.
“우리가 클찍(클적)에는 수산다리가 없었어. 대신에 이 앞 왕피천을 건너다니는 배가 있었지. 남덕하씨라고 벌써 옛날에 세상을 떠났는데, 홍수가 져서 황톳물이 넘치면 남덕하씨가 쪽배를 끌고 저 강물을 건넜네. 그 양반이 신체가 크고 키가 한 칠 척 됐어요. 힘도 아주 셌고. 노를 저어서 배로 건넜는데 물살이 셀 때면 밧줄을 저 건너편에 메서 밧줄을 잡고 당겨서 건너 다녔지. 아주 작은 뗏마였니더. 예전에는 이 앞 강물에 사람들이 많이도 빠져 죽었어요. 6.25사변 전에 수산 보 밑에 작은 외다리가 있을 때는 술이 취해서 건너다가 물에 빠지면 그냥 죽었어요. 지금과 달리 물도 아주 깊었고 물살도 셌거든. 나무다리도 솔잎가지를 꺾어서 얼기설기 놨는데 술 먹고 건너오다가 저 잘미 사람, 뒤뜰 사람들이 물에 많이 빠져 죽었니더. 참말로 옛날 얘기시더.”

온통 물바다가 되니까 다들 동네에서 제일 높은 지대로 피했어. 비가 계속 오는데 물 가까운 쪽에 있는 사람들은 물이 허리까지 차올라 오고 그랬네. 물이 한창 차올라 올 때는 다들 눈물을 흘리면서 울고불고 그랬어. 한참 있다 보니까 밤이 됐어. 비가 그치는데, 그치자말자 하늘에 달이 훤하게 뜨고 물이 금세 쫙 빠졌어. 하늘의 조화가 그렇게 신기하네.  

20살에 잘미에 살던 노순이씨를 만나 결혼한 장문희씨는 22살 이른 봄에 군에 입대한다.
“결혼한 후 첫애를 낳고 사라호 태풍이 난 이듬해에 군대를 갔어요. 사라호 태풍이 1959년 났으니까 1960년 3월 15일에 군에 입대했네. 그때는 울진군이 강원도에 속해 있을 때니까, 우선 삼척 입영사무소에 집결해서 서로 손잡고 따뱅이굴 있는 가파른 고개를 걸어 올라가서 기차를 타고 논산훈련소로 갔어. 논산 25연대에서 훈련을 받고 대전욱군통신학교에서 다시 14주 동안 훈련을 받았지. 유무선 정비반에서 교육을 받았어. 훈련을 마치고 경기도 20사단에 배치를 받았는데 금방 강원도 철원군 동송면이라는 곳으로 부대가 이전을 했어. 대부분의 군 생활을 철원군 동송면에서 했지. 군 생활 동안 일 년에 한번씩, 두 번 휴가를 나오고 나서는 제대를 했어. 군에서는 관측장교 한명, 무전병 한명, 유선병 한명 그렇게 세명이서 백마고지 밑에서 OP생활을 했어요. 155미리 포병부대였는데 빵카(벙커)에 들어가서 포대경 하나로 이북 쪽 평강들을 관측하면서 상부에 보고하고 그러다가 제대했네. 휴가는 한 번에 보름씩 주었는데, 무료 군용 열차를 타고 안동까지 와서 다시 영덕을 거쳐 울진으로 올라왔어요. 안동에서 영덕까지는 하루에 한번 오가는 버스가 있었지. 나중에는 서울 용산역에서 기차를 타고 대구까지 와서 울진으로 올라왔고. 대구 쪽으로 오면 거리는 멀어도 시간이 훨씬 빨랐어. 그때는 왜 그렇게 교통이 불편했든지. 휴가를 마치고 부대로 복귀할 때는 새벽밥을 먹고 하루 종일 올라가고는 했네.”  

장문희씨는 부인 노순이 씨와의 사이에 5남매를 두었다.
“아들 셋, 딸 둘을 낳았어요. 위로부터 원수(남. 52세. 대구시), 형수(남. 50세. 대구시), 정숙(여. 47세. 대구시), 이수(남. 46세. 서울시), 윤정(여. 43세. 대구시) 그렇게 두었지. 어렵게 살면서도 자식들 다섯 모두 대학을 시켰네. 시집을 오자말자 니아까를 끌고 울진장, 매화장을 오가면서 힘들게 일했던 할마이가 일등공신이지. 부모가 사는 게 힘들다고 그랬는지, 애들도 학교를 다니면서 공부를 열심히 해서 다들 장학금을 받으면서 학교를 다녔고. 학교 다니면서 아덜도 고생을 많이 했어요. 하숙 한번 못시키고 죽으나 사나 저들끼리 자취생활을 했으니까. 지금은 장가 시집가서 다들 잘살지. 조금 있으면 내 생일인데 그때 다들 내려온다고 연락이 왔네.”       


<강원도 철원군에서 군 생활을 하던 장문희씨가 휴가를 나왔을 당시에 촬영한 가족사진>

근남 산포리 섬마을에서 나고 자란 장문희씨는 1959년 당시 전국적으로 가장 큰 피해를 입었던 사라호 태풍에 대해 어느 누구보다도 생생하고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다.  

“1959년도였지. 추석날 아침부터 비도 엄청나게 오고 바람도 엄청나게 많이 불었어요. 팔월 추석에 제사를 지내고 방안에 누워 있는데, 쌍둥이 동생이 집안으로 쫓아 들어오며 ‘아이고, 물 들어온다, 물 들어온다’하면서 소리를 막 질러댔어요. 누워 자다가 벌떡 일어나서 문을 열어보니 마당이 하얗더라고. 지금같이 동마루가 있었는데, 절구방깐이고 나무고 온 마당에 둥둥 떠다니고 있어. 비는 억수같이 쏟아지는데 바로 앞에 있는 사람도 안보일 정도였지. 그때 비는 하늘에서 내리거나 뿌리는 게 아니라 양동이로 막 쏟아 붓는다는 느낌이었거든. 정신이 하나도 없었어. 원래 산포1리 동네가 섬이라고 불렸어. 물이 조금만 들어와도 뺑 돌아서 온 동네가 다 물이 차니까 어디 도망갈 데가 없었어. 지금 근남농협 뒤에 있는 마을 공동묘지 뒤쪽이 이곳에서는 지대가 제일 높은 곳이었네. 동네 사람들 백오십 명 정도가 다들 그곳으로 모여 들었어. 우리 식구도 다들 그곳으로 피해 갔지. 높은 산으로 갈수는 없지. 온 들판에 물이 가득 찼는데 어떻게 피해? 저 오른갈 앞쪽에 비행장이 있던 곳에 있던 나지막한 제방이 순식간에 터지면서 이 동네가 온통 물바다가 됐어. 마을에서 제일 높은 지대로 피했지만 물 가까운 쪽에 있는 사람들은 물이 허리까지 차올라 오고 그랬네. 어떤 사람들은 애들 손을 잡고 피난하다가 놓쳐서 막 울고불고 그랬지. 물이 한창 차올라 올 때는 다들 눈물을 흘리면서 울고불고 그랬어. 지대가 높은 그곳에 마을 사람 전부가 피해서 한참 있다 보니까 밤이 됐어. 비가 그치는데, 그치자말자 하늘에 달이 훤하게 뜨고 물이 금세 쫙 빠졌어. 하늘의 조화가 그렇게 신기하네. 근남 사람들 중에 사라호 태풍으로 죽은 사람은 한사람도 없어. 사라호 태풍이 대낮에 울진 지방을 지나갔으니까 망정이지, 잠자는 밤에 지나갔으면 다들 죽었네. 이곳 산포1리는 요즘도 비가 많이 오면 물이 차 올라와. 몇 년 전에 매미든가 루사인가 태풍이 왔을 때도 물이 집안까지 차 올라와서 혼이 났거든.”

없어진 망양정을 새로 지으려고 관공서 도움 하나 없이 아버지만 분주하게 쫓아다녔어. 나무를 기부 받아서 근남면 사무소 앞 공터에서 최중길 대목이 톱과 끌로 나무에 홈을 파고 깎기 시작했어. 인부들도 많이 참여했는데, 십시일반 부역처럼 일손도 보태고 그랬지.·····망양정을 낙성하고 50년 동안 동네의 무사안녕을 비는 제사를 지내고 있지만 전부 자비로 제물을 준비하지, 관공서에서 제사 비용 한 푼 얻어 쓴 적이 없어요.
 
 
1959년 8월 15일, 망양정 낙성식에서 단청 공로자로 장씨가 수여받은 놋쇠 주발과 술잔
장문희씨의 부친 장상훈씨는 관공서의 재정적 지원 한 푼 없이 백퍼센트 주민들의 기부에 의지하면서 1958년 망양정 중건을 실질적으로 주도한 인물이다.  

그러나 장상훈이라는 이름 석 자는 어떤 이유에서인지 울진군지를 포함한 여러 관련 자료에서 찾아볼 수가 없다.  

특히 일부 자료는 당시 망양정 중건이 울진군청과 울진교육청의 보조금으로 이루어진 것처럼 사실을 잘못 기록하고 있기도 하다.
향후 울진군지를 비롯한 여러 관련 자료에서는 이런 오기가 반드시 수정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역사적 사실은 한번 잘못 기록되면 후대로 전해지면서 관련 사가(史家)를 포함한 일반인들에 의해 지속적으로 확대 재생산되기가 십상이기 때문이다. 
“망양정을 새로 올리기 전만 해도 망양정이 없어진지 오래되어 잡초가 무성했고 흔적을 찾아보기가 어려웠어. 그런데 아버지가 관동팔경인 망양정은 꼭 있어야겠다 해서 망양정을 새로 지을 궁리를 했지요. 옛날 책을 뒤적거려가면서 망양정 원래 터를 찾고, 주변에 아는 사람들을 한사람 두 사람 설득해가면서 나무도 기부 받고 돈도 조금씩 기부 받고 해서 새로 지었지. 근남면 매림동네에 대목으로 일하고 있던 최중길씨라고 있었네. 아버지가 망양정을 지어야겠다고 했지만 막상 최중길씨는 어떻게 지어야 할지 감이 없었어. 그래서 울진읍 대흥리 본동의 대흥사에 가서 그 절을 자세하게 살펴서 본을 뜨고 설계도도 없이 망양정을 지었어. 관공서에서는 거들떠보지도 않았지요. 아버지만 분주하게 쫓아다녔어. 이리저리 다니면서 나무도 기부 받고 해서 근남면 사무소 앞 공터에서 최중길씨가 망양정을 지을 나무를 톱과 끌로 홈을 파고 깎기 시작했어. 짜 맞추어야 했으니 이러 저리 숱한 궁리를 하면서 다듬기 시작한 거지. 근 일 년 이상을 면사무소 앞에서 그렇게 나무를 깎으면서 준비했어요. 망양정을 지을 때 인부들도 많이 참여했는데, 따로 돈을 주지는 않았고 십시일반 부역처럼 일손도 보태고 그랬지. 아버지도 집안일은 제쳐두고 날마다 술을 많이 받아 주었어. 그때만 해도 술 한 잔이면 너도나도 일손을 보태고는 했네. 망양정 옛터를 닦다보니까 주춧돌도 열 개 발견되었고. 망양정을 지을 때만 해도 아버지는 집안일은 전혀 안하고 하루 종일 망양정에 죽치고 앉아서 ‘아, 자네 일 잘한다’ 그렇게 독려했고, 어떤 때는 망양정을 새로 올리는 일이 좋아서 그곳에서 날밤을 새거나 자기도 했지. 없어진 망양정을 다시 짓는 일에 그렇게 빠져 계실수가 없었어. 그렇게 사라진 망양정 터를 찾아서 중건하는 일에 온 힘을 다 바친 아버지였는데, 울진군지나 다른 책 어디를 봐도 아버지 함자는 없어. 당시에 울진군청이나 교육청으로부터는 돈 한 푼 받지 못했는데도, 어떤 책을 보면 군청과 교육청이 돈을 대서 망양정을 다시 지은 것처럼 써 놓기도 했거든. 다 틀린 얘기지. 아버지가 이러 저리 쫓아다니면서 기부도 받고 일손도 끌어 모으고 그렇게 망양정을 새로 지었던 사실은 아직까지도 많은 근남 사람들이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는데 어떻게 된 건지 영문을 모르겠어.”     

장문희씨는 1959년 양력 8월 15일, 망양정이 완공되어 낙성식을 했다고 말한다.
장씨가 기억하는 구(舊) 망양정 중건 연도 또한 울진군지와 다른 자료들의 기록과 차이가 있어 향후 명확환 고증이 필요한 것으로 보인다.  

울진군지를 비롯한 다른 관련 자료에서는 구 망양정 중건 연도를 장씨가 기억하는 1959년보다 1년 앞선 1958년으로 기록하고 있다. 
“1959년 양력으로 8월 15일 날에 낙성식을 했네. 망양정을 낙성하고 얼마 지나서 추석이었는데 그때 사라호 태풍이 올라와서 개락이 났으니 그 연도를 정확히 기억하는거지. 그러니 망양정 낙성식과 사라호 태풍이 같은 해에 있었던 거여. 망양정을 낙성하고 난 이듬해부터 아버지는 한해도 거르지 않고 동네와 주민들의 무사안녕을 비는 제사를 지냈어. 해마다 양력 8월 15일 오전 11시면 동네 어른들이 모여서 북쪽을 보고 제사를 지내지. 술은 산신에 한잔, 용왕에 한잔, 두 잔을 올려. 많이 모일 때는 오륙십 명 정도가 모여서 제사를 지냈네. 대구포, 수박, 토마토, 참외, 계란 그런 음식을 차렸고. 처음에는 미(제사 때 신위 앞에 놓는 메)도 지어서 제사를 지냈는데, 어느 해 시아버지를 따라서 제사 음식을 이고 가던 이 할마이가 미끄러졌는데, 그 다음해부터는 미는 빼고 제사를 지내지. 예전에 흑포에 가면 이석동씨라고 그 어른이 항상 초헌을 했어. 아헌도 있고 종헌도 있고 삼잔을 올리지. 아버지가 살아 계실 때는 나는 제사에 참여를 안했고,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후에는 계속 내가 제사를 지내지. 사는 게 여유가 있으면 제사에 참여하는 어른들 점심이라도 한 끼 대접하면 좋은데 항상 그게 미안하지. 그때 제사에 참여하던 연세 많은 노인들은 다 돌아가시고 없어. 한때 나이 많은 양반들이 망양정 발굴자인 우리 아버지 공로비라도 하나 세우자고 의논했는데, 다들 가난했으니 그것도 무산되고 말았네. 50년 동안 제사를 지내고 있지만 전부 자비로 제물을 준비하지, 관공서에서 제사 비용 한 푼 얻어 쓴 적이 없어요. 그럴 마음도 없고요.”  

망양정 중건과 관련한 얘기를 들려주던 장씨는 1959년에 중건한 망양정자 이전에 세워져있던 정자가 훼손됐던 숨은 사연 한 토막을 들려준다.  

그런데 장씨가 전해주는 얘기는 근남면 일부 주민들에게 구전되어 오는 얘기와는 비슷하면서도 또 다르다.
“우리 아버지가 들려주었어. 예전에 말루에 살던 유부자가 집에서 근남을 건너다보면 망양정이 꼭 죽은 사람을 메고 나가는 행상(상여)같이 보였다고 그래. 말루 앞쪽에 행상 같은 건물이 있으니 말루 동네가 잘 안된다고 해서 부수어 버리기로 마음을 먹었다는 거지. 어느 날 비바람이 억수로(매우) 휘몰아치던 깜깜한 밤에 말루 유부자가 장정 여럿을 사서 망양정 기둥에 밧줄을 걸고 당겨서 부숴버렸다는 거요. 그런 얘기를 전해 들었어.”  

장문희씨가 아버지로부터 전해들은 얘기와는 달리 일부 마을 주민들에게 회자되는 얘기는 조금 다르다.  

예전에 망양정을 찾아와서 음주가무를 즐기던 군수를 비롯한 고관들의 접대를 도맡아 오다가 지겨워진 인근 주민들이 폭풍우가 몰아치던 날 망양정 기둥에 밧줄을 걸고 당겨서 쓰러뜨렸다는 것이다.      


<1977년 8월 15일, 마을의 무사안녕을 비는 망양정 제사를 마치고 난 다음에 촬영한 기념사진>

구(舊) 망양정 네 귀퉁이에 걸려있던 용머리는 대흥사의 용머리를 본뜬 것인데, 전부 다 최중길 대목이 조각을 했네. 지금 생각해보면 설계도 한 장 없이 망양정을 지었던 최중길씨가 정말 실력이 대단한 목수였어.·····용머리나 용이 입에 물고 있는 야광주 같은 걸 깎자면 품도 많이 들고 실력도 대단해야 하는데, 몇 년 전에 새로 지은 망양정에 올라가보면 네 귀퉁이에 용머리가 없어요. 정자의 격을 많이 떨어뜨린 거지.
 
장문희씨는 20살 무렵부터 근남면 망양정, 울진읍 동림사, 남사고선생 별묘 단청 공사에 참여했던 단청장으로 활동해왔고, 많은 이들이 그 사실을 기억하고 있다.  

“아버지가 망양정을 새로 지으면서 마지막 작업인 단청을 올릴 때 평해 월송국민학교에서 교사로 근무하던 손치후 선생과 손이 닿았어요. 손치후 선생은 왜정 때 일본에 건너가서 동양미술학원인가 이년제 대학을 졸업하고 교사로 근무했거든. 내가 스무 살 때 그 양반은 마흔이 넘었으니 나와는 나이도 꽤 차이가 났지. 처음에 단청장으로 손치후 선생을 추천한건 방병주 울진교육장이었어요. 교육장이다 보니 손치후 선생의 경력을 잘 알고 있었던 거지. 손치후 선생은 불상 조각도 하고, 탱화도 그렸고, 불상 개금도 했어요. 나는 아버지의 주선으로 손치후 선생 밑에서 단청을 배우게 됐네. 망양정 단청을 처음 시작할 때부터 참여했지. 한 서너 달 이상 걸려서 망양정 단청을 끝마쳤어. 그때 망양정 네 귀퉁이에 걸려있던 용머리는 대흥사의 용머리를 본뜬 것인데, 전부 다 최중길 대목이 조각을 했네. 지금 생각해보면 설계도 한 장 없이 망양정을 지었던 최중길씨가 정말 실력이 대단한 목수였어. 용머리나 용이 입에 물고 있는 야광주 같은 걸 깎자면 품도 많이 들고 실력도 대단해야 하는데, 몇 년 전에 새로 지은 망양정에 올라가보면 네 귀퉁이에 용머리가 없어요. 아마 업자들이 실력도 없고 시간을 절약하자고 그런 것 같은데 정자의 격을 떨어뜨리는 일이지. 단청을 할 때는 먼저 천으로 감싼 하얀 아연화가루를 구멍이 숭숭 뚫린 단청 본 위에 대고 무늬를 찍어요. 그리고 붓으로 섬세하게 물감을 칠하지. 망양정 단청을 하면서 돈은 한 푼도 못 받았고, 나중에 낙성식할 때 단청 공로자라고 해서 뚜껑이 달린 놋쇠 주발과 술잔 세 개를 받았네. 그릇을 보면 중간 원안에 한문으로 ‘축(祝)’자가 쓰여 있고, 주변을 빙 돌아가며 ‘망양정 낙성 기념’이라고 음각으로 파여 있어.”  


<장문희씨가 다시 쓴 망양정 제사 축문(祝文)>

<장씨의 부친 고(故) 장상훈(張相勳)씨가 글을 짓고 쓴 망양정 제사 축문(祝文)>

망양정 공사를 통해 평해 손치후 선생으로부터 단청을 익힌 장문희씨는 군을 제대하고 난 다음에 울진읍 동림사 포교당의 단청 작업에도 참여하게 된다.
“군대를 제대하고 집에 와서 농사일을 하고 있는데 어느 날 손치후 선생이 집으로 찾아왔어. 울진읍 포교당 단청 공사를 부탁받았는데 함께 계약하러 가자고 하더라고. 그때 동림사 포교당의 대웅전은 울진읍 대흥리에 있던 대흥사 절의 대웅전을 뜯어 옮겨와서 새로 짜 맞추어 지었거든. 당시에 울진읍 월변에서 목재상을 하던 장상진씨가 포교당 대웅전 공사의 비용을 전부 자기 돈으로 대면서 단청 비용까지 감당했던 거지. 계약서를 쓰러 갔는데 손치후 선생이 나보고 쓰라고 했는데, 처음에는 자꾸 미루다가 결국 내가 쓰게 됐어. 그때 이십육만 원에 포교당 단청 공사 계약을 했네. 그때는 근남에서 좋은 논 한마지기가 사만원, 사만 이천원 할 때였으니 이십육만원이라는 돈은 컸지. 내가 직접 계약을 했으니 금액을 아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지.”  

앞서 장문희씨는 근남면 수산다리 공사를 할 당시 높은 곳에서 작업이 수월하도록 돕는 임시 가설물인 공사용 비계(아시바)를 연결하는 기술을 익혔다.  

비계 기술은 이후 장씨가 각종 현장에서 단청 작업을 할 때 아주 유용하게 사용된다.
“지금은 아시바를 쌓을 때 쇠파이프를 사용해서 나사나 클립으로 조이지만, 그때는 소나무로 아시바를 쌓았거든. 당시에는 울진읍내에서 목재소를 하던 장상진씨에게서 아시바로 쓸 마른 소나무를 빌려와서 사용했지. 적당한 굵기의 소나무로 아시바를 메는데, 전부 다 새끼줄을 사용했어. 수산다리 공사할 때 내가 울진 월변 아덜을 데리고 아시바 공사를 했네. 마른 소나무를 새끼줄로 감아서 아시바를 올리면 얼핏 생각할 때 약해서 불안한 것 같지만 아주 튼튼했어. 높은 곳에서 작업할 공간에는 널빤지에 못을 박아서 고정했고. 군대에 가기 전에 수산다리 공사를 하면서 아시바 메는 걸 배웠는데, 단청 공사를 하면서 잘 써먹었지.”


동림사 포교당 단청 물감은 아주 최고를 사용했지. 단청은 색깔이 덜 날리라고 물감과 아교를 섞고 끓여서 칠하는데 아주 오래 가지. 단청이 끝나면 들기름을 붓으로 뚝뚝 떨어뜨려서 단청 색이 오래 유지되도록 했고.·····울진향교 대성전, 행곡의 남사고 선생 별묘, 원남 몽천 삼조어비각 단청도 맡아서 했네. 동네 성황당 단청은 수도 없이 많이 했고.
 
장씨는 동림사 단청을 하는데 3개월 정도의 시간이 소요됐다고 전한다.
“집에서 출퇴근하면서 동림사 단청을 하는데 삼개월 넘게 걸렸지요. 처음에는 손치후 선생과 내가 단청을 시작했는데 얼마 안 있다가 손치후 선생의 조카라는 사람이 작업에 합류했고요. 단청 물감은 중국산을 최고로 쳤는데, 시골에서는 구하기가 어려웠네. 그런데 동림사 단청을 할 때는 비용을 댔던 장상진씨가 일본으로 수입된 중국산 물감을 부산을 거쳐서 구해 왔어. 동림사 단청 물감은 아주 최고를 사용한 거지. 단청은 색깔이 덜 날리라고 물감과 아교를 섞고 끓여서 칠하는데 아주 오래 가지. 단청이 끝나면 들기름을 붓으로 뚝뚝 떨어뜨려서 단청 색이 오래 유지되도록 했고. 그런데 동림사는 들기름을 많이 못썼어. 두되밖에 안 썼거든. 적어도 열 되 정도는 썼어야 하는데, 지금 가보면 단청이 많이 날려 있어요. 울진향교 대성전 단청도 했고, 행곡의 남사고 선생 별묘 단청도 했어. 동네 성황당 단청은 수도 없이 많이 했고요. 남사고 선생 별묘 단청은 아주 잘됐지. 대흥리에 있던 대흥사의 단청 그림을 본떠서 그대로 그렸거든. 용이 있고 양쪽에 목단 꽃이 있는 그림을 살렸어. 얼마 전에 울진읍내 동림사를 가봤더니 부처 그림, 신장들이 칼을 차고 있는 그림들하고 모두 다 색깔이 날려가고 하나도 없더라고. 원남 몽천에 있는 삼조어비각 단청도 맡아서 했지. 울진읍 용재리에 있는 서원 한군데도 내가 단청을 했고.”  

장문희씨는 단청 일을 해오면서 단청 기능사 자격증을 소지할 기회가 있었는데 포기했다며 웃는다.
“손치후 선생이 내 실력을 인정했지. 다른 사람들에게 단청을 맡겨 놓으면 선도 꾸불꾸불하고 색깔도 마음에 안 든다고 했어요. 그런데 나는 붓 하나로 선을 반듯하게 긋고 색깔도 제대로 낸다고 했어. 단청을 마무리하는 시간도 빨랐고. 용 비늘을 그리고 용의 눈을 그리는 데는 내가 아주 천부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다고 칭찬했어. 어느 날 손치후 선생이 집으로 찾아왔어. 서울에 있는 조계사의 단청을 맡았는데, 함께 일하러 가자고. 그런데 그때는 서울까지 가서 일하기는 힘들다면서 안 갔어. 당시에 조계사 만봉스님이 단청 기능사 자격증을 줄 수 있는 그런 권한과 끗발이 있었던 모양이여. 만봉 스님이 우리나라에서는 최고의 기능을 보유한 단청장이었거든. 나중에 알고 보니 그때 조계사에서 단청 일을 한 사람들 중에 군대를 제대한 사람들은 일이 끝나고 난 다음에 모두 다 기능사 자격증을 주었다고 하더라고. 당시에 손치후 선생이 많이 아쉬워했지. 손치후 선생은 나중에 월송국민학교 김기영 교장이 교사를 하든지 단청 일을 하든지 한 가지를 택하라고 강요하면서 단청 일을 그만두게 됐네. 그때부터 지역의 단청 일은 주로 내가 인부들을 사서 이곳저곳 다니면서 하게 됐지.”  


<1959년 장씨의 부친 고(故) 장상훈(張相勳>씨가 주도하여 신축했던 망양정(2003년 촬영)

지금도 논농사 댓 마지기에 사천 평 밭농사를 짓는 장문희씨 부부다.
“몇 해 전에 큰 수술도 하고 몸이 그렇게 좋은 편이 아니지요. 그래도 논밭전지를 놀릴 수야 없잖은가? 밭에 이름 있는 채소는 다 심고, 소도 키우고, 단감, 매실부터 과실나무도 다 심어 놓았으니 복합영농을 하는 셈이지. 울진 오일장날에는 경운기를 끌고 장바닥까지 할마이를 태워다주고, 장이 파하면 다시 집으로 데려오고 그러지. 50년 넘게 울진시장에서 채소와 과일 장사를 했으니 이 할마이를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어요. 이 사람이 고생을 참 많이 했어. 농사를 지어서 객지에 나가 있는 자식들한테도 보내주고 시장에 내다 팔기도 하고 그렇게 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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