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초(史草)

기사입력 2013.09.02 1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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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원섭((경민대학교 교수)

안명세(安名世, 1518∼1548)는 1544년(중종 39년) 별시문과에 급제해 사관(史官)의 직무를 맡게 되었다. 이듬 해 장경왕후의 아들 인종이 즉위 8개월 만에 죽고 문정왕후의 아들인 경원대군이 열두 살의 어린 나이로 조선 제13대 왕에 오르니 그가 바로 명종이다.

인종이 살아 있을 때 경원대군을 세자로 책봉하는 문제를 둘러싸고 장경왕후의 오빠 윤임(대윤)과 문정왕후의 동생 윤원형, 윤원로(소윤) 형제 사이에 치열한 암투가 벌어졌는데, 명종이 즉위하자 윤원형 측은 을사사화를 일으켜 결국 윤임 일파를 숙청했다. 이때 사관 안명세는 을사사화의 진행과정을 있는 그대로 당시의 상황을 상세하게 시정기(時政記)에 적어 넣었다. 그것은 사관의 직(職)을 맡은 자로서 본연의 임무였고 존재 이유이기도 했다.

그러나 1548년(명종 3) 이기(李芑) 등이 자신들의 집권과정을 정당화시키기 위하여 이른바《무정보감(武定寶鑑)》을 찬집할 때, 을사년 당시 그와 함께 사관으로 있었던 동료 한지원(韓智源)이 시정기의 내용을 이기와 정순붕(鄭順朋)에게 밀고함으로써 체포되어 국문을 당하게 되었다. 문제가 된 시정기에는 인종의 장례식 전에 윤임(尹任) 등 3대신을 죽인 것은 국가적인 불행이라는 지적과, 이기 등이 무고한 많은 선비들을 처형한 사실, 그리고 이를 찬반 논쟁하던 선비들의 명단 등이 담겨 있었다. 사초는 당대에 절대 공개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었고 임금 역시 볼 수 없었으나, 권력욕을 앞세운 무리들에게 안명세의 소신은 한 줌의 가치도 없는 것이었다. 
 
《연려실기술(練藜室記述)》은 안명세가 모진 국문을 당하면서도 소신을 굽히지 않고 당당하게 이기와 정순붕의 죄악을 폭로하였고 사형에 임해서도 의연한 모습을 보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의 처자는 종이 되었으며 재산은 몰수당했다. 이때 그의 나이 30세였다. 힘 있는 자들과 타협해 훗날을 기약할 수도 있었으나 끝까지 사관의 책무를 다하고자 했던 안명세를 두고 조선왕조실록은 목숨을 걸고 직필을 한 대표적 사관(史官)으로 기록하고 있다.《송자대전(宋子大全)》에도 이 사건으로 인하여 조선시대 3대 기인의 한 사람으로 안명세와 절친한 친구였던 토정 이지함이 벼슬길을 포기하고 은거하는 처사(處士)의 길을 택하였다고 애석해 하고 있다. 충북 괴산군 감물면 이담리 계담서원(桂潭書院)에 한림공(翰林公) 안명세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사초(史草)는 공식적인 역사편찬의 자료가 되는 기록을 말한다. 조선시대에는 봉교(奉敎) 이하 8명의 사관이 교대로 궁중에 숙직하면서 조정의 모든 행사와 회의에 참여하여 정사의 잘잘못과 국왕의 언동, 인물의 선악 등을 일정한 형식을 따라 기록했다. 2부를 작성하여 1부는 왕이 죽은 후 정해진 시간 내에 춘추관에 제출하고, 1부는 개별적으로 보관하였다. 시정기는 정부 각 기관의 공문서를 사관이 종합, 정리한 것으로서, 매달 1책 또는 그 이상으로 묶어 춘추관에 보관하였다. 사초는 철저히 비밀에 붙여져 국왕을 포함한 누구도 볼 수 없게 되어 있었다. 새 국왕이 즉위하여 선왕대의 실록을 편찬할 때 춘추관에 모아 자료로 이용하였으며 작업이 끝나면 세초(洗草)라 하여 실록 초고본들과 함께 물에 풀어 기록을 없애고 종이를 재생하였다. 따라서 국정의 모든 일이 기록되어 역사편찬의 자료가 된다는 점은 집권자들에게는 현실적으로 커다란 제약이 아닐 수 없었다.

사관제도는 정확한 직필(直筆)로써 국가적인 사건, 왕의 언행, 백관의 잘잘못, 사회상 등을 기록하여 후세에 정치를 하는 데 거울로 삼게 하려는 것으로, 사관이 기록한 사초는 시비를 가리지 못하고 또한 수정도 가하지 못하며 사관의 기록 행위도 일종의 면책권이 있어 제도적으로 신분이 보장되었다. 또, 사초를 말소, 누설, 개작을 행한 자는 참수형 이하에 처하도록 규정하고, 국왕이 사초와 실록을 열람하는 것을 금지하는 것은 물론, 사초를 작성한 자의 이름도 기재하지 않도록 하는 등의 조치를 취하였다.

하지만 실제로는 이러한 제반 규정에도 불구하고 사관의 직필을 꺼린 국왕이나 대신 등의 탄압이 가해지기도 하였다. 1393년(태조 2) 이행(李行)이 《고려사》를 편찬할 때 이성계가 죄 없는 우왕과 창왕, 변안렬을 죽였다고 직필한 사초를 제출하자, 이성계를 무고(誣告)했다는 사헌부의 탄핵을 받아 가산이 몰수되고 강원도 울진으로 귀양 갔다.

또, 1498년(연산군 4) 김일손(金馹孫)이 김종직이 쓴 〈조의제문(弔義帝文)〉이 포함된 사초를 납입한 일을 계기로 무오사화가 야기되었다. 물론 심약한 사관도 있었다. 〈세조실록〉을 편찬할 때, 대신들의 비행을 낱낱이 쓴 사초를 제출한 뒤 책임을 물을까 염려하여 다시 고친 것이 발각되어 사관 민수(閔粹)는 곤장을 맞은 뒤에 관노(官奴)가 되어 제주도로 추방되었다. 이처럼 500년 조선왕조의 기록은 수많은 사관들의 피와 눈물과 희생으로 만들어졌다.

최근 여야 국회의원들이 국가기록원 대통령기록관을 방문해 2007년 남북정상회담 대화록 원문을 찾았으나 발견하지 못하고, 이어 국가기록원도 대화록은 물론 두 정상 간의 녹음 기록물도 갖고 있지 않다는 공식 입장을 국회에 전달했다. 당연히 대통령 기록물로 남아 있어야 할 남북 정상의 대화록이 처음부터 국가기록원으로 넘어오지 않았을 가능성이 커진 것이다. 노무현정부 때 청와대에서 일했던 인사들은 남북정상회담 관련 자료를 국가기록원에 넘겼다고 밝혔지만, 막상 국가기록원 측에서는 없다고 하니 참으로 해괴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대통령 지정 기록물은 최장 30년 동안 당사자 외에는 누구도 볼 수 없도록 정해진 ‘비밀문서’다. 정상적이라면 노무현정부 당시 청와대의 문서관리시스템인 이지원에 저장됐다가 퇴임 후 이명박정부 관리로 넘어왔어야 한다. 이 문서가 사라졌다면 가능성은 크게 두 가지다. 회의록이 애당초 국가기록원으로 넘어오지 않았거나 중간에 누군가가 고의로 망실한 경우다. 어느 쪽이건 대통령 지정 기록물 실종 사건은 NLL 포기 논란 이상으로 중요한 국가적 문제가 된다. 대통령 기록물은 선조들이 왕실 기록을 후대에 남겨 보존한 사초(史草)와 같은 귀중한 역사 자료다. 그 누구도 함부로 손대거나 훼손해서는 안 될 일이다.
“선왕조(선조)의 실록은 편찬해야 하는데 평시의 사초가 하나도 남아있지 않아 전혀 근거할 바가 없으니 매우 걱정스럽습니다. 혹은 사대부가 보고 들은 바를 모으기도 하고, 혹은 사사로이 간직하고 있는 일기(日記)를 거두어들여서라도 막중한 일을 해야 합니다.”

1609년(광해군 1년), 춘추관에서 당시 실록 편찬위원인 신흠(申欽, 1566~1628년)이 “큰일 났다”는 내용으로 올린 상소다. 그는 실록청 총재관(편찬위원장) 이항복을 찾아가 ‘사초실종’의 내막을 전하면서 ‘잃어버린 25년의 사적을 그날그날의 일을 다 찾아 기록하자면 10년이 걸려도 완성할 수 없을 겁니다.’라며 분통을 터뜨린다.

선조는 재위기간이 40여 년이나 될 정도로 긴 세월 동안 통치했고, 또 큰 전란을 겪었기 때문에 그의 실록 또한 양적으로 방대할 수밖에 없지만,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이전의 기록은 너무나 보잘것없는 내용으로 채워져 있다. 그 이유는 사초를 지켜내야 할 사관들이 도리어 이를 불태워 버리고 도망갔기 때문이다.

신흠은 《상촌휘언(象村彙言)》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정묘년(1567년, 선조 즉위년)부터 신묘년(1591년, 임진왜란 직전)까지의 역사기록이 깜깜한 채 징험할 수 없게 됐다. 임진왜란(1592년)을 겪으면서 사관인 조존세(趙存世), 박정현(朴鼎賢), 김선여(金善餘), 임취정(任就正)이 사초책을 모조리 불태워 버리고 도망갔기 때문에, 선조가 즉위한 후 임란이 일어나기까지 25년간의 사적이 깜깜하게 되었다”

왜 이런 참담한 비극이 일어났을까. 1592년 6월1일 밤, 평안도 안주에 도착한 선조는 국외 망명을 결정했다. 그러자 왕을 따라 다니던 ‘사관 4인방’이 짊어지고 다니던 사초책을 불태우고 야반도주했다. 이들이 도망간 뒤 ‘대타 사관’이 된 이호민은 지필(紙筆)도 없이 맨손으로 입시했다. 9년 뒤인 1601년(선조 34년) 이호민이 ‘그때 머릿속에 입력시킨 기억을 어찌 지금 되살릴 수 있겠느냐?’고 토로하는 대목이 실록에 등장한다. ‘사초 실종’의 대가는 혹독했다.

“실록 편찬에 고증할 만한 자료가 없습니다. 개인 일기들이 있지만 너무도 소략합니다.”

실록청은 ‘잃어버린 25년’을 되살릴 사대부의 개인 일기와 문집, 그리고 각 관청의 공문서와 관보까지 색출하다시피 했다. 그래도 역부족이었다. 편찬위원들은 할 수 없이 “죄는 크지만 역사는 써야 한다.”면서 ‘사관 4인방’의 복직을 요청했다. 외직을 전전하던 ‘사관 4인방’은 광해군 시절 끈질긴 생명력을 발휘하며 권력의 핵심으로 부활했다. 그러나 실록에 등장하는 ‘4인방’의 이름 앞에는 늘 ‘사초와 임금을 팽개친 자’라는 수식어가 붙어있다. 당연히 〈선조실록〉은 가장 질 떨어지는 실록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썼다. “나라는 망하지 않았지만 그들 때문에 역사는 망했다”는 신흠의 말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던져주고 있다.
대화록 열람 후 NLL 문제를 정리하려던 여야가 회의록 존폐 여부를 둘러싸고 다시 확전 양상으로 치닫고 있다. 그동안 남북정상회담에서 시작된 여야의 NLL 다툼에 식상한 국민들로서도 여간 실망스러운 일이 아니다. 관련 기관들은 하루빨리 진상 규명에 나서 진실을 찾아내야 한다. 회의록이 언제, 누구에 의해 어떻게 실종됐는지를 밝혀야 여야의 소모적 논쟁을 끝내고 과거 정부를 두고 벌어지고 있는 국민적 불신과 의혹도 해소할 수 있다

정치권의 행동은 갈수록 가관이다. 사초의 행방을 찾는 게 우선인데, 협상 운운하는 여당의 태도나 당사자로서 마땅히 먼저 해야 할 일은 팽개치고 장외투쟁을 한다는 야당의 행태는 백 번을 양보해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노무현정부의 역사가 현대판 선조실록이 될 것이라는 우려가 나오는 이유다.

어찌하다 우리나라가 이 꼴이 되었는가! 사초의 실종은 곧 역사의 실종이요, 민족혼의 실종이다. 우리는 지금 민족의 혼백이 빠져나간 시대에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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