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난 ‘새마을’이라는 구호아래 온 국민이 단지 먹고 사는 데만 힘을 쏟았던 시절이 있었다.
여름철이면 “지력은 국력이다. 퇴비 모아 식량 증산”, “퇴비 없이 증산 없고 증산 없이 부강 없다”는 구호가 동네마다 내걸렸다.
풀이 제일 왕성하게 자랄 뿐만 아니라 높은 기온과 습도탓에 베어낸 풀이 빨리 썩어서 가장 좋은 유기질 비료가 된다는 7~8월 달이면 정부의 주도 아래 울진군에서도 매년 풀베기 대회를 열어 주민들을 독려했다.
이름하여 ‘퇴비 증산 대회’. 그때는 왜 그렇게도 갖가지 명분을 단 대회가 많이 열렸던지......

풀베기 대회가 열리는 날이면 미리 지정해 놓은 산은 온통 대회에 참가한 사람들로 뒤덮였고, 제한된 시간 안에 좀 더 많은 풀을 확보하기 위해 참가자들은 급한 손놀림으로 낫을 움직였다.
대회가 끝날 시간이 가까워 오면 지게 가득 풀을 진 사람들이 산을 내려와서 한 자리에 모이고, 군청에서 파견된 감독관은 저울로 무게를 달아서 1등, 2등, 3등순으로 등수를 매겼다.
좋은 성적을 올린 사람들과 상대적으로 많은 풀을 확보한 동네에는 군수의 표창장이 주어졌다.
그때는 중·고등학교 학생들도 툭하면 풀베기 등 각종 새마을 사업에 동원되었고, 여름방학이 끝나고 개학할 때 풀을 몇 킬로씩 가져오라는 숙제에도 시달려야 했다.
풀베기에 강제로 동원된 학생들은 삼삼오오 친한 친구들끼리 짝을 이뤄 리어카를 끌고, 또는 지게를 지고 한손에는 낫을 든 채 어설픈 낫질로 풀베기에 열중했다.
익숙하지 못한 낫을 놀리다가 팔다리를 베이고, 털이 촘촘한 풀쐐기에 쏘여 벌겋게 부어오른 팔뚝을 벅벅 긁기도 하면서......
요즘 같으면 “공부나 시키지, 학생들을 왜 강제로 노동에 동원시키느냐”는 학부모들의 항의가 빗발쳤을 법도 하지만 그때는 당연히 그래야 하는 것으로 알았다.
풀베기 대회에 맞춰 각 동리별로도 공동 퇴비사가 지어졌고, 동네사람들은 서너 명씩 짝을 지어 무더운 여름 한철 퇴비 모으는 일에 분주했다.
(사진제공 : 죽변면 손은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