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성품이 판을 치는 시대에는 오히려 기가 죽는 수제품이 있다. 편리를 쫓는 합리적인 이 시대 풍조를 대변하듯 직접 찾아가서 원단을 고르고, 몸의 치수를 재고, 재단하는 과정을 거쳐 가봉하고 기다려야 하는 그런 넉넉함과 여유 있는 마음은 이미 사라진지 오래이다.
오랜 시간동안 힘들여 배웠던 양복 만드는 기술도 이제는 주문 양복을 찾는 손님들의 발길이 뜸해지면서 자주 써 먹을 데가 없다. 불과 20~30년 전, 그 당시에도 맞춤 수제 양복은 고가여서 누구나 쉽게 맞춰 입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남자들이라면 성년이 되거나, 취업 면접때, 또는 결혼 예복으로 때마다 한두 벌씩 양복을 맞춰 입고는 했었다.
현재 우리나라의 맞춤양복 시장은 기성복 시장에 비할 때 3%에도 미치지 못한다고 한다. 무엇보다 비싼 것이 큰 흠인 수제 양복시장은 어느새 죽은 시장이 되어 버렸다.
20년 전만 하더라도 울진읍내에는 10여 군데 가까운 맞춤 양복점이 성업을 했지만 10여 년 전부터 질 좋은 저가의 기성 양복이 대량으로 쏟아져 나오면서 경쟁력을 잃어버린 결과, 꾸준하게 쇠락의 길을 걸어오면서 이제는 겨우 두 곳만이 남아 학생들 교복 맞춤과 옷수선 등으로 명맥을 유지해 나가고 있다.
열일곱살 아버지 손에 이끌려 울진으로
열일곱 살에 처음으로 양복기술을 배우기 시작한 류재권(울진읍. 56세)씨는 원래 대구 반야월이 고향이다.
류씨의 돌아가신 아버지는 당시 대구에서 도매가로 물건을 떼서 영덕 울진을 거쳐 강릉까지 오가면서 소매 옷 장사를 하던 보따리상이었다.
옷 보따리 장사를 하던 아버지 손에 이끌려 류씨는 낯선 곳 울진으로 올라 왔다.
“4살 때 높은 곳에서 굴러 떨어져 허리를 다쳤는데, 하루하루 먹고 사는 일이 힘들었던 부모님들이 제때 치료를 못해주었습니다. 그래서 평생 꼽추로 지내게 된 거지요...”
꼽추가 된 맏아들이 일평생 벌어먹고 살 것을 걱정했던 류씨의 아버지는 아들을 이끌고, 평소 오가던 울진읍내에서 안면 있는 사람이 경영하던 양복점으로 데리고 올라온 것이다.
아버지를 따라 류씨는 비포장이었던 길을 버스로 7시간 30분이나 걸려 울진으로 올라왔다.
“지금 월변다리 사거리 인근에 아카데미라는 이름의 양복점이 있었어요. 노두수라는 분이 사장님이셨는데, 아버지께서 그분을 소개시켜 준 것이었지요. 당시 남파 간첩 김신조가 청와대를 습격한 사건으로 인해 세상이 무척이나 시끄러울 때였습니다.”
그 당시는 양복 만드는 기술이 대부분의 사람들이 선망하는 고급 기술이었고, 시중에 일반 기성품 양복이 쏟아져 나오지 않을 때여서 수입도 썩 괜찮았다.
“그때만 해도 너도 나도 양복을 맞춰 입을 때였지요. 행사나 결혼식 같은 점잖은 자리에 입고 나설 옷이 맞춤 양복 말고는 없었으니까요.”
참으로 고단했던 양복장이 시다 시절
류재권씨는 월변 사거리 아카데미 양복점의 노사장 밑에서 3~4년간 양복기술을 배웠다. 양복을 만드는 과정은 까다롭고 꽤나 복잡한 과정을 거친다.
양복은 손님이 원단을 고르고 나면 체촌(신체 치수를 줄자로 재는 일)을 하고, 그에 맞게 원단을 재단하고, 가봉(임시로 바느질을 해서 손님에게 입혀보는 일)을 하고, 또 다시 응용(수정)하고 난 다음 꼼꼼하게 본 바느질을 거쳐야 완성된다.
참으로 손이 많이 가는 여러 공정을 거쳐야 양복 한 벌이 만들어지는 것이기에 예나 지금이나 수제 양복은 비쌀 수밖에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아카데미 양복점에서 처음에는 청소와 심부름 등 온갖 잡일부터 시작했어요. 그러면서 시간이 흘러 간단한 옷 수선도 하고 그러면서 ‘시다’라고 불리는 재단 파트의 보조가 되었지요. 원래 어떤 분야든지 기술 장이들은 자기가 터득한 기술을 쉽게 가르쳐주지 않는 그런 습관이나 고집 같은 것이 있습니다.”
함부로 자신만의 노하우를 가르쳐주지 않았기에 류씨는 처음 양복 일을 배울 당시 잠만 공짜로 잤지, 하루 세끼 밥값은 따로 지불해야 했다. 그리고 용돈 명목으로 한달에 백환이나 이백환을 받았다.
그렇게 이 눈치 저 눈치 봐가면서 류씨는 양복 단춧구멍 뚫는 기술부터 먼저 배웠다.
당시만 해도 지퍼가 없었기 때문에 양복 상의와 하의는 전부 단추로 채워야 했다. 정확한 자리에 단춧구멍이 뚫리고 또 단추를 제 자리에 다는 것 또한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청소에다 잡다한 심부름에 단춧구멍 뚫는 기술을 배우는 틈틈이 단골손님들의 사이즈도 직접 재보고, 패턴도 뜨고, 원단도 자르고, 전체적인 디자인도 스스로 고민해 보면서 그렇게 류씨는 점점 양복쟁이 기술을 배워 나갔다.
류씨는 불 피우는 것까지 배웠다. 양복 만드는 과정 중에서도 불 피우는 기술은 대단히 중요한 것이라고 그는 강조한다. 아무리 옷을 잘 만들어도 다림질을 제대로 하지 못하면 옷 맵시도 떨어지고 품위도 없어 보이는 법이다.
“당시만 해도 요즘처럼 편리한 전기다리미가 아니라 숯불 다리미로 작업을 했습니다. 풍로에 숯불을 벌겋게 피워서 다리미에 담고 젖은 수건과 다리미 받침, 부채를 옆에 두고 다 만들어진 양복을 다림질 합니다. 당연히 숯불 다리미는 밑 부분이 뚫려 있지 않았기에 불이 약해서 옷이 잘 다려지지 않는다 싶으면 부채로 불꽃을 키우면서 다려야 했어요. 또 불꽃이 너무 세면 옷감이 눌러 붙기 쉬우니까 다리미 밑을 물에 한번 담근 다음 젓은 수건으로 다리미 밑 부분을 몇 번씩 문질러 가면서 온도를 낮춘 다음 옷을 다려야 했습니다.”
겨울철은 그나마 좋았지만, 찌는 듯한 불볕더위에 숯불 다림질을 한다는 건 여간 고역스런 일이 아니었다. 금세 등줄기와 가슴으로 땀이 비 오듯 흘러내리고...... 류씨가 그렇게 힘든 과정을 거치면서 양복 기술을 배워가는 중에 전기다리미가 시중에 나왔다.
“단춧구멍 만들어 단추 달고, 헌 양복을 뜯고 뒤집어서 다시 짓는 우라까이 하고, 다림질 배우고, 소매, 조끼, 우와기(양복상의), 코트, 예복까지 만들면서 3~4년을 보내고 나니까 점점 주변에서 날 양복쟁이로 인정해 주더군요.”
젊었던 날, 한때의 방황
3~4년이 지난 후에 류씨는 아카데미 양복점을 나와서 울진읍 사무소 앞에 위치해 있던 ‘동광라사’로 일자리를 옮긴다. 그 후로도 류씨는 울진읍내의 여러 양복점을 전전하면서 남의 밑에서 일한다.
“처음 양복기술을 배울 때는 성질이 고약한 선배 기술자들로부터 손바닥도 많이 맞고 했지요. 라사지를 재단하는 각자로 많이 맞았는데 그 강도는 보통이 훨씬 넘습니다. 엄청나게 아픕니다. 그때는 그렇게 맞으면서 기술을 배웠어요. 겪어보니 세상에는 참 좋은 사람도 많고, 나쁜 사람들도 많습디다.”
당시 아프게 맞으면서 기술을 익혔던 원망 때문에 정작 류씨가 후배들에게 기술을 가르쳐줄 때는 최대한 부드럽고 친절할 수가 있었다. 그러다가 류씨는 3~4년 동안의 울진 생활을 청산하고 무작정 타지로 나간다.
어느 정도 기술을 익혔다는 자신감으로 류씨는 3년여 동안 대구와 부산 등 또 다른 객지 땅의 양복점으로 떠돌다가 다시 울진으로 돌아온다.
“뭐, 세상에 만만한 구석이 있습니까? 이런 저런 사람들을 만나고 또 조금 색다르다 싶으면 기술도 배우고 하면서 부산과 대구 땅을 정처 없이 떠돌았지요. 그때 일하던 양복점 주인들이 우와기 하나를 재단해주고 나서 내가 재봉틀로 봉제해서 만들면 공임으로 천원을 주었습니다. 바지는 공임도 받지 않고 그냥 만들었지요. 그렇게 잠도 아껴가면서 악착같이 기술을 배웠습니다.”
눈코 뜰새 없었던 유성라사, 그리고 결혼

그렇게 이곳저곳 여러 양복점을 전전하던 류재권씨는 스물다섯 살 때 현재의 울진의료원 앞에다 ‘유성라사’라는 간판을 걸고 직접 자신의 가게를 열게 된다.
“처음 보건소 앞에다 가게를 얻고 양복점을 개업했는데, 그때 나는 기술대고 돈댄 사람은 따로 있었어요. 얼마 뒤에 돈댄 사람과 결별하고 혼자 가게를 운영하게 됐습니다. 개업할 당시 이름을 ‘유성라사’로 지었는데, 지금까지도 계속 그 이름을 사용하고 있으니까 ‘유성라사’라는 상호도 꽤 오래 되었네요.”
류씨가 ‘유성라사’를 개업할 당시 양복 한 벌 값이 9천원 정도 했다고 한다. 류씨는 손님 봐가며 1천원 더 받기도 하고 1천원 깎아주기도 했다고 웃으면서 전한다.
그 당시 공무원 한달 봉급이 평균 4~5만원 선이었다니 양복 한 벌 값 치고는 꽤나 고가였음을 알 수 있다.
류씨는 개업하고 양복을 제일 많이 만들 때는 한달에 40~50벌 이상을 만들었다고 말한다.
양복 한 벌을 만드는데 보통 4~5일이 걸렸고, 일손이 달릴 때는 밑에 부하 직원만 서너명을 두고 밤새우면서 일했었다고......
“그때만 하더라도 눈코 뜰 새 없었어요. 양복 주문이 밀려들어서 밑에 시다(보조)를 두고도 손발이 모자랄 지경이었으니까요. 특히 학교 앞이어서 학생들 교복 맞춤도 수없이 들어왔습니다. 그때는 몸은 피곤했지만 대신 돈을 잘 벌었으니 정말 좋았지요.”
애초 울진의료원 앞에 개업했던 ‘유성라사’는 세월이 흐르면서 현 양내과 옆으로 옮겼다가 4~5년 전 현재의 자리로 이전했다.
류씨는 스물아홉 살에 아는 사람의 중매로 동갑내기 진철순(56세)씨를 아내로 맞았고, 진씨와의 사이에 두 아들을 두었다.
경남 진주가 고향인 부인 진씨는 두 아들의 학교 문제로 친정이 있는 진주에 거주하고 있다.“큰 아들은 학교를 졸업한 후 진주에서 직장을 다니고 있고, 작은 아들은 군을 제대한 후 대학교에 복학할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나는 연로한 어머니를 모시고 혼자 울진에서 생활하고 있어요. 하기는 모시고 사는 것이 아니라 아직까지 내가 어머니께 보호받고 있다는 생각입니다. 일흔 일곱이라는 많은 연세에도 아직까지 내 밥을 직접 챙겨주는 어머니께 항상 고마움을 느끼고 또 미안한 마음입니다.”
개업후 10년 성업한 후 내리막길로
스물다섯 살에 자신의 가게를 열었던 양복쟁이 류씨는 스물아홉 살에 결혼하고 나서 5~6년이 지날 때까지 돈을 많이 벌었다고 회상한다.
근 10여년 가까이 기술장이 선배들에게 두들겨 맞으면서까지 힘들게 양복 만드는 기술을 익힌 다음 10여년 돈을 잘 번 것이다.
“전두환씨가 대통령이 되고 난 다음인 1982년 학생들의 교복과 두발 자율화가 실시되면서부터 학생들의 교복 수요는 일순간 사라지고 청소년들의 캐주얼 시장만 급속도로 확대되어 갔습니다. 통행금지도 그때 해제됐지요. 벌써 20년이 넘은 옛날 일이 됐네요.”
학생들의 교복자율화와 더불어 그동안 서서히 기성품에 잠식되어 가던 맞춤 양복 수요도 급작스레 줄어들기 시작했다.
특히 80년대 초 교복자율화와 대내·외적 문호개방을 경험한 현재의 3040 세대는 더욱 재빠르게 변화하는 유행과 자신만의 스타일에 민감하고, 물리적 나이에 비해 훨씬 더 젊게 보이기 때문에 중후하고 노련한 이미지보다는 신선하고 젊은 이미지를 추구하는 경향이 뚜렷하다.
아마 오늘날 맞춤양복이 미처 쫓아가지 못하는 기성양복의 더없이 화려한 칼라와 과감한 디자인은 그런 이유에 기인하는 바 클 것이다.
나아가서 공장에서 자동화 시스템을 이용하여 대량으로 만들어내는 기성양복의 저렴한 가격을 도저히 쫓아가지 못하는 맞춤 수제 양복의 단점은 이미 오래전부터 지적되어 왔다.
더불어 원단 고르기와, 가봉, 또 다시 찾으러 가야 하는 등 양복 한 벌을 맞추기 위해 손님이 양복점을 적어도 세 번 이상 방문해야 하는 번거로움도 결코 무시할 수 없다.
예전 사람들은 큰마음 먹고 맞춘 수제 양복을 다림질을 하도 해서 옷감이 반들거릴 때까지 수년씩 오래도록 입고 다녔지만, 지금의 젊은 세대는 싼값의 기성 양복을 구입하여 1~2년 걸치다가는 더 이상 입지 않는다.
“성인 남성들 백명이 모이면 백명 모두 다 체형이 틀립니다. 같은 체형은 하나도 없어요. 맞춤양복은 서로 다른 체형을 가진 백명 모두를 다 만족시킬 수 있는 장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양복을 만드는 원단의 색깔도 다양하고 가격 또한 싼 것부터 비싼 것까지 천차만별입니다. 그러나 싼 원단을 사용한다고 하더라도 양복 한벌 값이 최소 40만원은 넘어가요.”
류씨는 모직에 따라 수제 양복 값이 다 틀리기는 하지만, 그래도 양복쟁이가 공임을 남기려면 한 벌에 보통 40만원에서 120만원까지는 받을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아직도 한달에 100여만원 겨우 넘는 봉급으로 살아가는 서민들이 대다수임을 고려하면 여전히 양복값 지출은 가계에 큰 부담으로 작용할 수밖에 없다.
30년 전만 하더라도 모직 40%에 폴리에스텔 60%가 섞인 라사지가 최고급이었지만, 지금은 다른 것이 전혀 섞이지 않은 100% 순수 모직물인 순모가 최고급 양복 천 재료라고 류씨는 전한다.
“요즘은 국내에서 생산하는 양복 원단의 질도 엄청 좋아졌습니다. 양복 한 벌을 맞출 경우 삼성에서 수출용으로 만드는 국내생산 원단 슐레인 150수는 150~200만원, 슐레인 200수는 300~500만원씩 받아야 제 가격을 받는 겁니다. 그런데 시골인 울진에서는 그렇게 받지 못합니다. 슐레인 150수의 경우 120만원 정도 받으면 최고로 많이 받는 거지요.”
어차피 원단 값은 똑 같은데 양복 값을 제대로 받지 못하면 그만큼 양복쟁이의 공임이 줄어들게 되는 것이다.
차라리 시계 고치는 기술을 배웠더라면

그렇더라도 그나마 맞춤 양복을 찾는 사람이나 많았으면 하는 것이 류씨의 바람이다. “기성품이 저렴한 가격과 엄청난 물량공세로 남성복 시장의 주도권을 쥐기 시작하면서 맞춤 양복이 내리막길로 접어든 지가 아마 못돼도 10년은 훨씬 넘었을 겁니다. 그전에 번 돈을 지금 다 까먹고 있는 셈이지요. 맞춤 양복을 찾는 사람이 없으니 당연히 힘들게 배운 기술도 써 먹을 일이 없지요......” 류씨는 그 많던 울진읍내 양복점이 이제는 2군데밖에 남지 않았다고 자조적으로 말한다.
요즘은 한달에 양복 한 벌은 고사하고 바지 두 개 주문 들어오기도 힘들다며 겨우 양복을 수선하는 일로 먹고 산다고 하소연이다.
양복쟁이 류씨는 2003년 연말부터 ‘로또 복권방’을 운영해오고 있다. 그 당시 로또 복권방을 모집하면서 모집 대상자를 장애인, 국가유공자, 기초생활대상자로 제한했는데, 그나마 다행인 것이 지체장애인 5급인 류씨는 꽤 높은 경쟁률을 뚫고 로또 복권방을 시작할 수 있었다.
“내가 장애인이 아니었다면 벌써 오래전에 양복점 때려치우고 ‘노가다’라도 다녔을 겁니다. 양복점을 운영하다가 직업을 바꾼 그런 사람들이 어디 한둘입니까? 그런데 이 사회에서 장애인에게 어디 노가다라도 뛸 일자리를 주는 노동 현장이 있겠어요? 지금 이 가게가 보증금 500만원에 월세 25만원 입니다. 로또 복권을 팔면 판매점에서 판매대금의 5%를 수수료로 받습니다. 로또복권이라도 팔고 있으니까 근근이 가게세라도 내고 살아가는 거지요......”
실제 밖에서 그의 가게를 보면 ‘로또 판매점’이라는 문구가 가득 확대되어 시야에 들어온다. 그가 평생 업으로 소중하게 지켜온 ‘유성라사’라는 문구는 겨우 눈에 뜨일까 말까할 정도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생활이 어려운 현재의 복잡한 심경을 대변하듯 류씨는 “예전에 아버지가 차라리 양복기술이 아니라 시계 고치는 기술이라도 배우게 했으면 금은방이라도 함께 겸하면서 지금까지 먹고 사는 일이 훨씬 수월하지 않았을까......?”하며 쓸쓸히 웃는다.
류씨와 함께 한 리카와 이글 재봉틀, 그리고...
양복장이 류씨의 가게에 들어서면 아직까지 한쪽 벽면 가득히 수십 가지 종류의 양복 원단이 걸려 있고, 정면 왼쪽에는 로또 복권 기계가 위치하고 있다.
그런데 정면 중앙과 오른쪽에는 그가 한시도 떠나지 않고 30여 년 동안 기름칠하며 애지중지 사용해온 재봉틀 두 대가 한쪽 자리를 가득 차지하고 있다.
“처음부터 재봉틀을 사용해서 양복 기술을 배웠습니다. 애초에는 지금보다 작은 크기의 15종이라는 재봉틀을 사용하다가 조금 지나서 103종이라고 불리는 현재의 재봉틀을 사용하게 됐지요. 103종 미싱은 저속이라서 소음도 없고 공간차지도 크지 않습니다. 특히 바느질이 깨끗해서 출시될 당시부터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그는 103종이라는 명칭의 ‘리카’ 재봉틀을 아직까지 아무 탈 없이 사용하고 있다. 사용하지 않을 때도 규칙적으로 기름칠을 해서 언제든지 사용할 수 있게끔 준비해두는 모양새가 평소 꼼꼼하고 치밀한 그의 성격의 단면을 들여다 보는 듯하다. 103종 재봉틀 맞은편에는 ‘이글’이라는 상호의 오버룩 전용 재봉틀도 한 대 자리하고 있는데, 재봉틀 위에는 흰 실과 붉은색 실패 세개가 질서 정연하고 얌전하게 류씨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
30년 동안 꾸준히 써왔다는 재봉틀 두 대는 마치 그간의 오랜 경륜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밑의 다이(대)가 망가져서 둘 다 드레스 재봉틀 다이로 교체되어 있다.
또 그 옆에는 양복을 만드는데 사용되는 도구인 각자, 줄자, 곡자, 초크 등이 가지런히 정리되어 놓여 있고, 양복장이들이 제일로 아낀다는 재단가위도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그래도 죽을 때까지 양복을 만들 터
양복장이 류재권씨는 몇 년 전부터 경상북도가 주최하는 지방 장애인 기능경기대회의 양복부문에 선수로 출전하여 4번씩이나 1등의 영광을 안았다. 2등과 3등도 각각 한번씩 석권했으니 명실 공히 그의 뛰어난 양복기술은 객관적으로 입증된 것이다.
“30여년 양복인생. 그래도 큰 후회는 없습니다. 먹고 살길을 찾느라 힘들고 어렵게 오랜 기간 기술을 배웠고, 어찌 보면 지금까지 그래도 그 기술 덕분에 먹고 살았으니까요...... 늙어서 눈이 보이지 않게 되거나 일을 할 수 없을 만큼 손끝이 무뎌진다면 또 모를까, 죽을 때까지 원단을 재단하고 재봉틀로 박음질하는 양복 일을 손에서 놓지 않을 겁니다. 지금이라도 새로운 일감이 들어오면 또 밤을 새워서라도 정성껏 만드는 것이지, 어쩌겠습니까?”
자신의 숙련된 기술과 열정을 담아서 만든 양복을 손님이 편안하다며 기분 좋게 입어주고 또 태가 날 때가 가장 즐겁다는 류재권씨. 그는 누가 뭐라고 하더라도 천생 양복장이다.
불과 20여 년 전만 하더라도 가위 하나만 들고 다니면 어디서고 대우받고 살던 그런 시절이 있었다.
양복장이 류재권씨도 말 그대로 잘 나가던 시절, ‘유성라사’가 한 시절을 풍미하던 그런 때가 있었다.
류씨가 줄자를 어깨에 둘러메고 찾아오는 손님들을 웃음으로 맞이하며 신체 치수를 정확히 이리재고 저리 잴 수 있는 그런 날, 양복이 화려하게 부활하는 그런 꿈은 요원한 것인지......
그래도 양복장이 류씨는 언제라도 손님의 주문이 있으면 한 땀 한 땀 고단하게 배운 그 기술로 멋진 양복을 만들어 볼 요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