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축(安軸)과 함께 하는 울진유람 `그 어떤니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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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일 전 태풍이 큰피해 없이 울진땅을 지나간 뒤라 대기는 더없이 맑은데, 따스한 가을 햇살은 대지를 축복처럼 살찌운다. 봄에 내리는 비가 수혈(輸血)이라면 가을의 햇빛은 질좋은 양분이다. 한 웅큼의 햇살도 우리네 농가에게는 너무도 귀하여 손길이 절로 분주해지는 때다. 고추금이 좋았던 올해는 그 자연빛으로 말리는 이름하여 ‘태양초 고추’를 만드느라 내리는 비를 피하려고 전쟁을 치렀고, 요즘 바닷가 마을에는 가을 오징어 말리느라 금싸라기 같은 햇빛을 놓치지 않으려고, 과장하면 초를 다투며 건조작업하는 모습을 어렵잖이 볼 수 있다.
우리 울진은 농촌과 어촌 그리고 산촌이 모두 그 나름대로의 삶을 이어가고 있는 지역이다. 고려후기의 대표적 문인이며 신흥사대부(新興士大夫)의 한 사람인 근재 안축(謹齋 安軸,1282-1348)이 울진에 남긴 흔적을 따라가는 길에도 부지런히 오징어 말리는 주민들의 모습이 보였다.
안축은 누구?
근재를 따라갈려고 하는데, 근재가 누구인지는 알아야 한다. 근재는 안축의 호이다.

<월송정에 판각되어 있는 안축 詩(글씨 : 해정 김세호>
국문학도도 아니고 한학자도 아닌 내가 따라가기는 사실 벅차다. 그러나 믿는 구석이 하나 있다. 누구나 처음은 잘 몰랐다는 것. 그 처음을 용기로 믿고 따라 나선다. 사실 근재는 고등학교 국어시간에 졸지 않았다면 국민 모두가 아는 사람이다. 바로 경기체가(景幾體歌)를 지은 사람으로. 나 또한 뭐 그런 정도로 아는 것 이상은 아니었다. 그를 처음 만난 것은 월송정자에 판각되어 있는 그의 시에서 였다. 글을 쓴 사람이 개인적으로는 학부에 은사의 인연이 있는 해정 김세호(海庭 金世豪)선생 이었다. 그리고 군지나 기타 문헌에서 울진과 그가 관련된 사실을 심심찮게 접하고 나서 언젠가 한 번 나도 그가 왔던 곳을 다녀보리라 마음먹었다. 답사를 가기 전 그에 대해 몇 개의 문헌을 뒤지고. 아! 안축이 이런 사람이었구나를 조금은 알게 되었다.
사실 근재는 국문학적으로 워낙 유명한 사람이라 많은 연구가 되어 있어 여기서는 자세하게 언급하는 것을 피하기로 한다. 그는 고려사 열전과 또 그의 문집인 근재집(謹齋集)에 가정 이곡(稼亭 李穀:1298-1351)이 지은 묘지명에 잘 나와 있다.
이곡은 익재 이제현(益齋 李齊賢 1287-1367)의 문인이며 유명한 목은 이색(牧隱 李穡)의 아버지다. 이곡은 울진의 성류굴을 직접 탐방한 글을 남긴 적도 있다. 근재는 고려 충렬왕 8년(1282)에 태어났다. 자(字)가 당지(當之)이고, 호는 근재(謹齋)이며 복주흥녕현(福州興寧縣) 사람이다. 흥녕은 지금의 영주 순흥을 말하는데, 그의 가계는 대대로 지방 향리였다.
그의 학문적 연원은 족친 안향(安珦,1243-1306)에 이은 것으로 가학(家學)에 바탕을 두고 당시 과거제도로 중앙 관계에 진출한 이른바 신흥사대부의 대표적 인물이다.
금주사록(金州司祿)을 시작으로 관리의 길에 나선 그는 충숙왕 11년(1324)에 중국의 원나라 과거에 급제하여 관리가 되기도 한다.
충숙왕 17년 5월(1330)에 강원도 존무사(江原道 存撫使)로 외직을 나간다. 그리고 다음해 9월에 임기를 마친다. 강원도 존무사 재임 시기가, 바로 이번 답사의 중요한 모티브를 제공한 기간이다. 그가 이 기간에 지은 시문집 ‘관동와주(關東瓦注)’가 있는데 지금의 『근재집』 모본이 된다. 그 후 내직으로 판전교, 지전법사를 거쳐 62세에는 외직으로 상주목사가 되기도 한다. 이 당시 순흥에 있는 모친에게 효성을 다했다는 기록도 보인다. 충목왕 4년(1348) 6월 21일에 졸하여 7월 11일에 대덕산에 장사지냈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며 향년 67세이다. 그 후 조선 중종 39년(1544) 순흥의 소수서원에 추배(追配)되었다.
근재가 살았던 시기는
이상이 대략적인 그의 일대기다. 무슨 충숙인지 충선인지 충혜인지 그 왕이 그 왕같은 이름에 적잖이 헷갈린다. 바로 무신정권과 몽고침략에 의한 정치적 소용돌이를 짐작케 한다. 근재가 활동했던 14세기는 원나라의 간섭기 였으며, 그동안 실권을 잡아온 문벌귀족과 권문세족에 대항해 새로운 세력으로 과거를 통해 신흥사대부들이 등장하게 되어 이들은 훗날 조선개국의 주체세력으로 등장하게 된다.
이들은 향촌에 그 세력기반을 두고 과거를 통해 중앙정계로 진출, 농민과 가까운 관계를 가지며 행정실무를 담당하여 사물이나 사실을 중시했다. 이 당시 대표적 인물로는 이제현·최혜·이곡· 이색· 이인복·백문보 등을 들 수 있다.
목은집(牧隱集)에서 최혜는 근재보다 5살 아래인 동년배였으며 세 사람은 교분이 아주 두터웠다. 이곡의 아들인 목은 이색이 15세 때 이인복을 만났는데, 이인복이 이색을 한 번 보자 참으로 천재가 났다고 칭찬하였다.
이색이 26세에 을과에 장원급제 할 때 근재의 동생 보(輔)가 주재하였다. 또 이곡은 근재의 묘지명을, 이색은 근재의 아들인 종원(宗源)의 묘지명을 썼다. 이곡은 안보와 동년으로 스스로 근재의 업을 이어받는다고 하였다.
근재와 교유한 이들은 모두 당대의 문장가들로 그들의 학문은 조선에까지 그대로 이어진다. 또 이들 대부분이 안향에 이어 원나라에서 과거에 급제 중국에까지 필명을 떨친다.
원에서의 견문은 문학적으로나 정치적으로 큰 전환을 맞는 사상적 연원이 된다.
엄밀히 말해 근재의 경기체가인 관동별곡이나 죽계별곡 모두 이 영향을 받아 탄생된 작품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감정융통(感情融通)
경기체가는 고려 중엽 이후에 발생한 장가(長歌)로. 또는 ‘경기하여가(景幾何如歌)’라고도 한다. 노래 말미에 반드시 “경(景) 긔 엇더니잇고(그 어떠합니까)” 또는 “景幾何如”라는 구(句)를 붙이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다. 고려 중엽 이후로부터 조선 초기에 걸쳐 주로 한학자들에 의하여 읊어졌는데, 고려시대의 것으로는 고종 때의 제유(諸儒)의 작으로 알려진 한림별곡(翰林別曲)과 고려 말의 안축(安軸)이 지은 관동별곡(關東別曲)과 죽계별곡(竹溪別曲) 등이 있으며, 조선시대의 것으로는 권근(權近)의 상대별곡(霜臺別曲), 변계량(卞季良)의 화산별곡(華山別曲), 정극인(丁克仁)의 불우헌곡(不憂軒曲)과 작자 미상의 오륜가(五倫歌), 유림가(儒林歌), 연형제곡(宴兄弟曲), 이 밖에도 김구(金絿)의 화전별곡(花田別曲), 권호문(權好文)의 독락곡(獨樂曲) 등이 있다.
처음 발생시에는 무신들에 의하여 초야로 쫓겨난 문신들이 향락적·유흥적인 생활과 그들 심상(心像)을 읊었는데, 조선시대에 와서는 그 형식을 본떠 조선 건국을 칭송하는 내용을 담기도 하였다. 훈민정음이 창제된 후에는 한글을 약간 섞어 짓기도 하였으나, 그 이전에는 한학자들이 순전히 한문으로 지었다. 따라서 일반대중과는 유리된 일종의 기형적인 문학이라는 평을 받았다. 이와 같은 점에서 청산별곡(靑山別曲), 가시리 등 고려의 속요와 대조를 이룬다.
이들 속요는 일반대중 가운데에서 발달하여 구전되었기 때문에 보통 그 작자를 알 수 없으나, 경기체가는 한학자라는 특수층이 한자만으로 지었기 때문에 대개 작자가 알려져 있다. 내용에 있어서도 경기체가는 사물이나 경치를 나열·서술하는 것이 특징인 데 대하여, 속요는 사랑의 노래가 흔하며 사랑도 육감적이고 노골적으로 표현된 경우가 많다.
경기체가라 할 때 이것은 끝에 ‘가(歌)’ 즉 노래란 말이다. 노래란 넓은 의미로 시라고도 할 수 있다. 근재가 남긴 관동별곡의 경기체가와 관동와주에 실린 한시도 노래라고 할 수 있다. 노래라고 하면 먼저 저 유명한 시경의 관저장(關雎章)이 떠오른다. ‘관관저구(關關雎鳩, 在河之洲 꾸욱꾸욱 물수리새 모래톱에 정답듯이) 요조숙녀 군자호구(窈窕淑女, 君子好逑. 아리따운 아가씨는 사나이의 배필이라)'로 시작되는. 물론 이 관저장이 시경에 첫 번째 있는 것을 공자는 말하길 “관저는 지극한 것이로다.
저 관저를 지은 사람은 우러러 하늘을 보고 굽어 땅을 살폈으니, 지극히 깊고 오묘하여 덕이 저장되어 있으며 얽히고 끓는 것처럼 도의 실행이 있으며 마치 신룡의 변화처럼 그 문장이 빛난다. 위대하구나! 관저의 도여.......(關睢至矣乎!夫關睢之人,仰則天,俯則地,幽幽冥冥,德之所藏 紛紛沸沸,道之所行,如神龍變化,斐斐文章 大哉!關睢之道也.....).”
또 논어 팔일(八佾)편 제20장에서는“시경(詩經)의 관저편(關雎篇)은 즐거웁지만 음란하지 않고, 슬프지만 마음 다치지 않는다(子曰 關雎 樂而不淫 哀而不傷)”라 하였다. 관저는 시(詩)지만 노래에 더 가깝다.
경기체가도 이것 처럼 감정융통을 위한 노래로 볼 수 있다. 이우성은 「고려말 이조 초의 어부가 」에서 “우리 나라에는 일찍이 ‘가창문학(歌唱文學)과 음영문학(吟詠文學)’이 공존하여 왔다”고 했는데, 이것은 모시서(毛詩序)에서 “시라는 것은 뜻이 가는 바이다. 마음에 있으면 뜻이 되고, 말로 나타내면 시가 된다.
정이 마음 가운데에서 움직여 말로 나타나는데, 말로 부족하여 차탄(嗟歎 : 탄식하고 한탄함)하고, 차탄으로 부족하여 읊조리고 노래하며, 읊조리고 노래하는 것으로 부족하여 모르는 사이에 손발로 춤을 춘다”고 하였다. 또 공자는 논어 위정편에서 시를 일러 詩三百 一言而蔽之 曰 思無邪(시 300편을 한마디로 말하면 사악함을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또는 논어 계씨(季氏)편 제13장에“시를 배우지 않으면 말을 할 수가 없다”(不學詩 無以言)이라 하였고, 문학평론가인 경희대의 김재홍 교수는 ‘현대시 100년 한국명시 감상집'의 서문에서 "한 편의 명시는 세상에서 가장 죄 없고 순수하며 아름다운 우리 모두의 정신적 문화재”라고 정의한다.
과학자 아인슈타인도 “인간이 성취하고 창조하는 모든 것의 뿌리는 시와 사랑의 강에 있다”고 말했다. 결국 시란 인간의 목소리를 위해 씌어진 음악이라고 할 수 있다.
관동별곡 ‘그 어떠하옵니까?’
그러면 이제 안축의 창작물인 경기체가 중의 하나인‘관동별곡’을 따라가 보려고 한다.
이 관동별곡은 조선 선조대에 지은 송강 정철의 국문 관동별곡보다 250년 전에 쓰여진 것이다. 모국어와 중국어의 이질성으로 인한 한계성 즉 감정융통의 어려움에 따른 극복 방편으로 경기체가인 관동별곡이 탄생되었다고 본다.
근재의 관동별곡 중에서 울진 부문만 살펴보기로 한다. 관동별곡이 근재의 현손(玄孫)인 숭선(崇善)이 세종 때 편집한 근재집 권 2에 비로소 출현하지만 당대에 살았던 이곡의 증언으로 볼 때 원본과 큰차가 없다고 봐야 한다. 모두 9연으로 되어 있는데 울진 부분이 나오는 곳은 제 8연에 삼척 죽서루와 함께 나온다. 서사격(序詞格)인 1연과 이하 8연에 특정 고을을 각각 배분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참고로 관동별곡의 첫째 연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바다는 겹겹, 산은 첩첩, 아름다운 관동의 뛰어난 경치
나부끼는 푸른 기 붉은 장막, 집무처의 위엄있는 병마절도사.
옥대 띠고 일산 기울이며 검은 창 붉은 깃발 늘어진 명사길에서
아! 순찰하는 광경 그 어떠합니까?
북방 백성들의 문물제도 의를 사모하고 선현을 따르니
아! 임금은 은덕 입어 중흥하는 광경 그 어떠합니까?》
이 첫째 연으로 인하여 정무룡은『안축(安軸)의 관동별곡 반추(反芻)』에서 관동별곡은 근재가 강원도 존무사로 가는 백문보를 위해 창작한 경기체가라고 주장하였다.
관동별곡의 8연에 소개되고 있는 울진 부분을 감상해보자. 노래라 생각하고 읽어보는 것도 괜찮으리라.
《감도는 오십천, 강벽에 우뚝한 죽서루, 삼척의 빼어난 여덟 곳 경치.
맑고 그윽한 울진의 취운루, 월송정 십리에 들어선 푸른 소나무 경치
옥피리 불고 거문고 타며, 고운 노래 소리, 느릿한 춤.
아! 귀한 손님 맞이하고 보내는 광경 그 어떠합니까
속된 티끌 떨쳐내는 망사정에 올라 보니,
아득한 푸른 물결.
아! 날아드는 갈매기 반갑기도 하여라.》
이 연에서 울진의 취운루(翠雲樓)와 월송정(越松亭) 그리고 망사정(望槎亭)을 소개하고 있다. 근재의 경기체가인 관동팔경이 특정 경물(景物), 즉 객관의 자연을 읊고 주관인 감정을 차탄하고 있음을 여기서도 볼 수 있다. 이런 류의 한문 가요는 기존의 한시와는 분명 차별화 된 것으로 높이 평가받고 있는 것도 주지의 사실이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취운루와 월송정의 푸른 소나무를 읊고 있다는 것이다. 지금 취운루와 망사정은 그 자취가 없다.
“취운루(翠雲樓)는 울진읍 읍내 3리 월변동에 위치하였다고 한다. 옛날 松亭으로 소나무가 울울창창하였으나 광복 후 벌목, 자연유실 등으로 황폐해져 현재는 송림의 흔적도 없는 상태이다”라고 1997년에 펴낸 『울진의 유적 2』에 나온다. 그런데 근재의 관동별곡에는 루(樓)로 되어 있고, 관동와주에 실린 기문(記文)에서는 정(亭)으로 되어 있어, 루나 정 중 그 정확한 것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다. 아무튼 그의 취운정기문(翠雲亭記文)을 보자.
《내가 황경(皇慶) 임자년(충선왕4, 1312) 봄에 한 필 말에 몸을 의지하여 선사군에 놀았다.
고을 남쪽 흰 모래 평평한 둑에 어린 소나무 수천 그루가 있는데 다북다북 사랑스러웠다. 내가 함께 노는 읍 사람을 돌아보며 하는 말이 “저 소나무들이 자라기를 기다려서 정자를 여기에 지으며 그 운치가 한송(寒松)·월송(越松)의 두 정자와 더불어 우열을 다툴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 후 읍사람이 나를 찾아오는 이가 있으면 반드시 그 소나무들이 잘 자라는지를 물었다. 태정(泰定) 병인년(축숙왕 13, 1326) 간에 존무사(存撫使) 박공(朴公)이 선사군에 새 누대를 짓는데 풍치가 아주 아름답다는 말을 듣고, 그 장소를 물으니 곧 내가 옛날 본 그 어린 소나무들이 있던 곳이다. 항상 한번 이 누대에 올라서 나의 옛날의 뜻을 풀어볼 것을 생각하였지만 어찌 할 수 없었는데, 지금 다행히도 이 지역에 나와 진무(鎭撫)하게 되어, 다시 이 누대에 오르니 그 맑고 그윽한 경치야말로 이것이 진세염열(塵世炎熱) 간에서 일찍이 보지 못한 일이었다.
대저 누정(樓亭)을 짓는 것이 높고 넓은 데 있지 않으면 그윽하고 깊은 데 있는 것으로서, 저것이 싫으면 이것을 생각하고 이것이 싫으면 저것을 생각하는 것은 인정의 보통 있는 일이다. 무릇 관동지방의 누대나 정자가 모두 높고 환한 곳에 있기 때문에 유람하는 사람들이 눈은 풍랑 파도의 거센데 싫증이 나고, 몸은 짙은 안개에 지치게 된다.
그런데 이 다락에 올라서 그 맑고 그윽한 운치를 얻게 되면, 들판을 달리던 곤한 짐승이 밀림 골짜기에 들어간 것 같고, 공중에 나르는 지친 새가 무성한 숲으로 돌아온 것 같아서 지극한 낙이 있으니, 이것이 아마도 박공이 이 다락을 지은 뜻일 것이다. 박공으로 말하면 그 높은 정취(情趣)와 투철한 견식이 나 같은 용렬 비루(卑陋)한 사람의 비할 바가 아닌데, 이 다락의 지은 것이 우연히도 나의 지난날의 옅은 소견과 서로 합하였으니, 내가 기이한 경치 신비한 지경에 대하여 안목이 있다 하여도 괴이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예전 놀던 일을 다시금 생각해 보면 지금 기[紀 : 1기는 12년]나 되었으니, 소나무의 어리던 것이 모두 벌써 자랐을 것이다.
대저 사람으로서 소나무가 어린 것을 보고 또 그 성장해진 것을 보면 생각이 없을 것이랴 하고, 차마 그대로 말없이 지나칠 수가 없어 이것을 써서 기(記)로 한다. 》
그가 강원도 존무사로 파견되기 8년 전에 울진의 이곳에 한 번 더 왔음을 알 수 있다.
거의 700년 전 쯤 되는 시기에 왕피천 하구 어디 쯤에 취운정이나 루가 있었고, 그곳에서 풍광과 감흥을 요즘 그 흔한 카메라가 없던 시절에 기록한 소중한 흔적이다.
당시 소개하고 있는 지리적 위치를 고려할 때 취운정은 말루나 수산 어디 쯤이 될 것 같다. 지금 이 곳에서 루나 정이 있을 법한 자리를 잡아 솔 숲이 푸르게 펼쳐진 모습은 찾기 어렵다. 길게 이어진 송림은 없지만, 다행이 수산 엑스포 공원의 송림은 볼 수록 그 아름다움에 흠뻑 빠진다. 지금 울진의 공원 중에서 세계에 내놓아도 자랑할 만한 명소로 자부할 만한 곳이다. 또 근재가 이곳 취운정에서 읊은 시도 한 수를 감상하면 그림이 눈앞에 아련히 펼쳐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城南新構一層樓 / 성 남쪽에 새로 한 층의 누를 지었는데
栽種成陰地轉幽 / 나무 심어 그늘 이루니 더욱 그윽하다
午日燒空紅不漏 / 한낮의 해가 공중을 불태워도 붉은 빛 새어들지 않고
夏陰籠檻翠如流 / 난간 덮은 여름 녹음 푸르름이 흐른다
故人遠在誰同賞 / 오랜 친구 멀리 있으니 누구와 함께 이 경치 즐기랴
馹騎催行爲少留 / 역마는 가기를 재촉하는데 잠깐 머무네
舊眼稚松今已壯 / 예전 보던 어린 소나무 지금 이미 크게 자랐으니
登臨感念昔年遊 / 오르자 옛날 생각 마음에 사무치네

<울진군 평해에 위치한 월송정(越松亭) 전경>
월송정
월송정은 그 때나 지금이나 소나무 숲이 무성한 것은 같다. 월송정은 관동팔경(關東八景)의 하나로 평해읍 월송리 송림 속의 백사장에 세워져 있다. 고려 충숙왕(忠肅王) 13년(1326년)에 존무사(存撫使) 박숙(朴淑)이 처음으로 이 정자를 지었으며 고려 충선왕(忠宣王) 때 안축(安軸)의 기문에서 “정자를 여기에 지으면 그 운치가 한송(寒松) 월송(越松)의 두 정자와 서로 우열을 다툴 것이다”라고 한 기록이 있다.
고려 충숙왕 때 이곡(李穀)의 동유기(東遊記)에 의하면 “평해 군청에서 5리 되는 곳에 이르면 일만 주의 소나무 속의 정자를 월송이라 하고 이 월송에 사선(四仙)이 놀고 지나갔다 하여, 그 이름이 연유된 것이다”라고 하며, 또한 옛 군지의 기록에 “신라시대에 영랑(令郞)·술랑(述郞) 남석(南石) 안상(安祥) 등 네 화랑의 유람지라 하였는데, 달밤에 솔밭에서 놀았다”고 하여 월송정(月松亭)이라 하고, 또한“월국(越國)에서 소나무 묘목을 가져다 심었다”고 하여 월송(越松)이라고도 한다.
그 후 이 정자는 조선 연산군(燕山君) 때 관찰사 박원종(朴元宗)이 중건하였으나, 후에 다시 퇴락하여 1933년에 교포로 구성된 금강회(金剛會) 등 80여명이 1969년 4월 18일에 철근콘크리트 2층의 정자를 중건하여 낙성하였다. 그러나 정자의 옛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으므로 울진군에서 도비 8천만원으로 1979년 2월 19일에 정자를 철거하고, 새 설계에 의한 정자를 착공하여 1980년 7월 29일에 고전양식(古典樣式)인 고려식 건물로 복원하였으며, 월송정 현판은 짧은 임기중에 인연이 닿은 최규하(崔圭夏) 전대통령의 친필이다.
이왕이면 오래 오래 사랑받을 수 있는 당대의 묵객으로 필명이 높은 일중 김충현의 글이 아니어서 개인적으로 아쉬움이 든다. 대통령도 의미가 있지만 아름다운 월송정에서 문인묵객이 남긴 풍류의 역사를 생각하면 더욱 안타까움으로 남는다.
월송정 올라가는 계단 입구에 1980년에 세운 월송정 중건비가 있다. 이 비는 현대의 유명한 시조 시인인 노산 이은상이 짓고, 당대 최고의 서예대가인 일중 김충현의 글씨로 되어있다.
노산이 읊은 월송정 중건비문에《우리 겨레는 산수를 찾고 즐기고 자연을 사랑하는 전통을 끼치었다. 월송정은 관동팔경 중의 하나로서 신라 때 화랑들이 노닐던 곳이요, 고려 이후 수많은 시인들이 와서 시를 남기고 간 유적지다. 이 정자는 오래 전해온 옛터에.....(중략).....창송(蒼松, 푸른 소나무) 좋은 경치에 조화되는 고전 양식의 정자를 완성한 것이라, 이 고장 산수자연을 찾는 이마다 즐거운 시간을 누리고 갈 것이다》
월송정은 소나무를 빼고는 이야기가 되지 않는 곳이다. 700여년 전 당시 10리나 되는 푸른 송림을 읊고 있는데, 지금도 월송정 주변은 울창한 송림이 가히 일품이다.
그런데 월송정 입구에 떡하니 버티고 흉물스런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이 눈에 거슬린다.
바로 관광 울진 안내 간판인데, 아무리 생각해도 내 머리로는 이해가 되질 않는다. 월송정을 소개하고 있는 한 구절만 읽어도 저런 흉물을 만들어 세우지는 않았을 것이다.
입구에 아름답게 펼쳐져 있는 송림을 감상하며 이름 그대로 그 송림을 지나면 나타나는 월송정! 그 소나무 숲의 그윽한 운치를 느껴볼 기회를 입구에서부터 막고 있다.
어떻게 이런 발상이 가능한지...... 관광 안내판이야 나지막하게 한들 정말로 위치를 찾고 싶은 사람들은 작게, 하다못해 책자만하게 만들어져 있다 한들 보지 않겠는가. 거대한 간판으로, 오히려 위쪽에 있는 글자는 시력이 좋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무용지물이다.
무슨 간판 하나에 이리 호들갑이냐 하겠지만, 관광 안내도 좋지만 원래의 문화유산이나 자연물을 막을 권리는 없는 것이다.
안목을 가진 사람에게는 울진을 자랑하고 안내하는 것을 보고 오히려 비웃을까봐 걱정이다. 그것은 심하게 말하면 개인이 조상대대로 내려온 아름다운 문화유산의 감상 자체를 아무생각 없이 막는 또 다른 폭력이다.
하루 속히 철거를 하든가, 주변환경에 어울리는 작은 것으로 바꾸길 촉구한다. 이 기회에 문화유산 안내간판이 주인공을 막고 있는 것이 또 없는지 고민하길 바란다.
월송정에서 근재가 남긴 시 한 수를 소개한다.
事去人非水自東 / 세월은 가고 사람은 바뀌어도 바닷물은 예와 같은데
千年遺踵在亭松 / 천년 전 남긴 자취 정자 소나무에 있네
女蘿情合膠難解 / 이끼는 정을 머금은 듯 떼어내기 어렵고
弟竹心親粟可舂 / 아우대는 마음 친해 좁쌀방아 찧겠네
有低仙郞同煮鶴 / 그 아래의 선랑은 학을 삶아 내는 것 같아
莫令樵斧學屠龍 / 초부로 하여금 용을 잡은 법 배우게 하지 말지라
二毛重到曾遊地 / 흰머리 되어 다시 지난날 놀던 자취 찾고 보니
却羨蒼蒼昔日容 / 도리어 젊고 젊었던 그 시절 아쉽다
<다음호에 계속 이어집니다>
아래의 참고 문헌들은 문외한인 내게 안축에 관한 많은 정보를 주었다.
특히 후포역사연구회의 신진철 부회장이 `근재문집'을 선뜻 구해 주어 큰 도움이 되었다.
지면을 통해 감사드린다.<참고 문헌>
-『謹齋全集(上下卷)』, 謹齋思想硏究會, 1994
-『謹齋先生文集(全)』, 順興安氏三派大宗會, 2004, 12
-『울진의 유적(2)』, 울진문화원, 1997. 5
-『蔚珍郡誌』, 울진군, 2001. 2
- 정무룡『안축(安軸)의 <관동별곡> 반추(反芻)』, 한민족어문학회, 한민족어문학, 2005
- 정무룡『안축(安軸)의 〈관동별곡〉 창작 시기와 그 배경』, 한국시가학회, 2006.02.24
- 김동욱『 關東瓦注 와 安軸의 詩文學 』, 상명대학교 논문집, 상명여자사범대학, 22권, 2005
- 최종현『安軸의 勝景觀에 관한 硏究 - 關東別曲을 중심으로 - 』,
한국전통조경학회(구 한국정원학회), 한국전통조경학회지, 18권,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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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동욱『關東別曲 ,竹溪別曲 과 安軸의 歌文學 』, 반교어문학회, 반교어문학회지, 1권, 198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