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발사 장문동씨가 살아온 이야기

기사입력 2006.10.09 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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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가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 그런데도 우직하게, 때로는 미련스러울 정도의 생활풍속과 노동 등을 통하여 우리들만의 멋과 아름다움, 기억과 추억이 고스란히 배어있는 토종문화와 기층문화, 그 삶을 고집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의 삶이야말로 전통사회에서 우리들 할아버지, 할머니의 삶이었다. 고스란히 예전 방식으로 그 맥을 이어가는 사람들. 토종문화를 지키고 보전하려는 사람들. 또는 직업적 방편으로 먹고 살다보니 언제부턴가 주변에서 잊혀 가는 것들이 정작 내 삶이 되어버린 사람들. 전통사회의 개념으로 본다면 '서민속의 서민'으로까지 표현할 수 있을 그들의 생산적이고 적극적인 삶의 현장을 잠시 기웃거려 본다.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 말은 더 이상 어울리지 않는 세상. 빛의 속도로 세상은 무섭게 변하고 또 진화하고 있다.
너도 나도 편리함과 세련됨을 쫓아서 이리저리 몰려다니는 판에 반세기 가까운 시간동안 변함없이 한군데에서 자리를 지킨다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다.
언제부턴가 젊은 사람들은 더 이상 머리를 깎기 위해 이발소를 찾지 않는다.
이발소가 아닌 미용실이 훨씬 더 간편하고 요금 싸고, 머리 모양도 촌스럽지 않게 나온다고 믿는다.



불과 10여 년 전만 하더라도 남자들은 누구나 이발소에서 수동 바리캉으로 머리 자르고 가죽 띠에 쓱싹쓱싹 갈아서 날을 세운 면도칼로 수염을 미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지만, 지금은 나이 지긋한 남성들만 이발소를 찾을 뿐이고 젊은 남성들은 미용실에 가서 머리를 자르는 것을 당연시한다.

2004년 연말 기준으로 울진군 관내에는 이발소가 40군데, 미용실은 그 배가 넘는 89곳이 영업을 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1999년에 이발소 50군데, 미용실 84곳이 영업을 했는데, 불과 5년 만에 미용실은 5곳이 늘어난 반면 이발소는 10군데가 줄어든 것이다.

젊은 남성들이 더 이상 이발소를 찾지 않는 것만큼, 이발 기술을 배우는 젊은이들도 찾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이러다가는 20년 안에 이 땅에서 이발소를 찾아보기 힘들게 될 것이라는 어느 나이든 이발사의 자조 섞인 말도 지나친 기우는 아닐 것이다.

근남면에 가면 ‘협동이발관’이라는 간판을 단 요즘 보기 드물게 조금은 낡고 허름한 이발소가 있다.
역시 녹록하지 않은 세월 탓에 허옇게 색이 바란 새시 문을 열고 그 안을 들여다보았다.

 
입이라도 하나 덜려고 고향을 떠났지요

협동이발소 주인 장문동(66세)씨는 원남면 신흥리 북수동(일명 북시골)이 고향이다.
가난한 집안에서 아들 다섯, 딸 셋의 8남매 가운데 둘째 아들로 태어난 그는 매화초등학교를 다녔다.  어릴 때부터 할아버지에게 한문도 익히고 풍족하지 않은 집안 농사도 거들던 장씨는 열여섯이 되던 해에 무작정 고향을 떠나 부산으로 향한다. 

“적은 농사에 가족은 여럿이고 그저 입이나 하나 덜어야겠다 싶어서 무작정 부산으로 내려갔는데, 나이도 어리고 배운 기술도 없고 도대체가 마땅한 직장을 구할 수가 있어야지요. 그래도 부산서 교회를 잠깐 다니며 십자갱생원이라는 곳에서 숙식도 해결하면서 야간 중학원을 잠시 다녔어요.”
교회에서 운영하는 갱생원에서 한동안 입고 자는 것을 어렵게 해결하던 장씨는 이대로는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서 6촌 할아버지뻘 먼 친척이 있는 안동으로 올라갔다. 

직장을 구해서 돈을 벌어 보겠다고 부산으로 내려간 지 2년 정도 지났을 때였다.  “소도 비빌 언덕이 있어야 낫다고 그나마 친척이 있는 곳으로 올라갔는데, 6촌 할아버지가 기술이라도 배우라며 친분 있는 이발소를 소개해 주어서 취직을 했지요.”

  어깨너머로 이발 기술을 익혔습니다

장씨가 취직한 이발소는 안동역 부근에 있던 ‘역전이발소’였다.
안동시 옥동파출소 소장으로 근무하던 사람이 운영하던 이발소였는데 당시로서는 규모가 무척이나 커서 이발사만도 10명이 근무했고, 매일 벌어들이는 수입이 많아서 별도로 총무를 두었는데 장씨는 친척 소개에 힘입어 처음부터 총무로 들어갔다.
 
“큰 이발소였어요. 매일 꽤 많은 액수의 현금이 이발요금으로 들어오는데 이발사가 여러 명이다 보니까 별도로 총무가 없으면 영 관리가 안됐습니다. 잠시만 한눈팔면 이발사들이 몇 푼씩 자기 주머니에 삥땅으로 챙겨 넣기에 바빴으니까요.”

장문동씨는 역전이발소에서 총무 일을 하는 틈틈이 어깨너머로 하나둘씩 이발 기술을 익혀갔다.
바리캉을 사용하는 방법이며, 가위질로 머리를 다듬는 기술과 면도칼을 가죽에 갈아 날 세우는 기술, 깨끗하고 상처 없게 면도하는 법까지 유심히 관찰하면서 기술을 배워 나갔다. 
“그때만 하더라도 완전 수동식 바리캉을 사용했는데, 바리캉도 오래 사용하면 날이 무뎌져서 일명 ‘공고도시’라고 부르던 숫돌에 자주 갈아 써야 했습니다. 그런데 바리캉 날 세우는 기술은 고도로 숙련된 기술을 필요로 했어요. 조금만 잘못 갈아도 머리가 제대로 잘리지 않으니까요.”

장씨는 바리캉 날 세우는 전용 숫돌을 사러 일부러 대구 칠성시장까지 오고가면서 기술을 습득해 나갔다.
“처음에 바리캉 날을 나도 한번 갈아보고 싶다고 하니까 선배들이 기겁을 했어요. 당시만 해도 바리캉 값이 꽤 고가였고, 날 한번 잘못 갈면 바로 못쓰게 됐으니까요. 그런 이유로 선배들이 바리캉 날을 가는 숫돌을 빌려주지 않기에 하는 수 없이 혼자서 대구 시내를 뒤져서 몰래 숫돌을 하나 구입해 왔습니다. 바리캉 하나 망친다 생각하고 조심해서 갈아 봤더니 금방 익숙해지더라고요”
역전이발소 총무를 보며 1년 정도 기술을 익힌 장씨는 역전이발소를 인수하여 사장이 되었다.

파출소 소장을 하면서 이발소까지 직접 운영하기에는 무리라고 생각했던지, 소장이 평소 총무 일을 성실하게 봐준 장씨에게 이발소를 직접 해볼 것을 권유한 것이다. 
“집세를 겸해서 한 달에 쌀 한가마니를 주는 조건으로 역전이발소를 맡아서 한 1년 정도 운영했어요. 열명이나 되는 이발사도 그대로 인수인계 받아서 한 1년 동안 잘 벌었지요. 그때 내 나이 겨우 열아홉 살이었는데 떼돈이라도 벌어 금방 큰 부자가 되겠다 싶었지요.”

  4.19 혁명 때문에 다시 고향으로

이발소를 직접 운영하면서 돈맛(?)을 알아갈 때쯤 자유당의 3.15부정선거를 시발로 이를 규탄하는 학생들의 데모와 경찰의 과잉 진압으로 인해 이승만정권의 하야를 요구하는 4.19혁명이 일어났고, 전국이 연일 데모와 시위로 혼란스럽던 그때 장씨는 울진으로 내려온다.  젊은 한때 떼돈을 벌어 부자가 되리라던 꿈도 희망도 한순간에 포기하고 고향으로 되돌아온 것이다.

“당시 안동 시내에서 이발사를 열명씩 둔 대형 이발소를 운영하던 사장이었지만, 나이가 어리다 보니까 고등학교에 다니던 친구들이 꽤나 많이 있었습니다. 4.19 혁명이 터지고 나니까 그 친구들이 매일처럼 찾아와서 같이 데모를 하러 가자는 거였어요. 어릴 때부터 가난하게 살아오면서 사회의 부조리와 불합리를 느껴왔던 터라 부정선거와 그에 따른 경찰의 만행 등을 규탄하고픈 마음이 전혀 없었던 건 아니지만, 부모형제도 없는 이곳 안동에서 잘못하면 맞아 죽겠다 싶더라고요.”

고등학교, 심지어 나이든 중학생 친구들까지 그를 집요하게 찾아왔다.  매일처럼 들락거리며 데모에 함께 나설 것을 강요하는 친구들로 인해 장씨는 돈이고 뭐고 다 포기하고 고향으로 내려가야겠다고 결심했다.
“안동에 계속 남아 있으면 경찰이나 시위 군중에게 맞아 죽을 수밖에 없을 것 같았습니다. 객지 땅에서 죽어 봐야 나만 손해다 싶고, 이왕 죽을 바에는 부모형제가 있는 고향에 가서 죽어야겠다 생각했어요. 그래, 무작정 밤차를 타고 야반도주하다시피 내려왔어요.”

  스무살에 협동이발관을 운영하기 시작해

안동에서 고향인 원남면 신흥리로 피난을 내려오다시피 한 장씨는 잠시 동안 집에서 지냈다.  마침 그때 농업협동조합에서 근남면 주민들을 위한 ‘협동이발관’을 운영하면서 급하게 이발사를 구하게 되었다.
“집에서 쉬고 있는데, 농협에서 수소문 끝에 집으로 나를 찾아왔어요. 이발사를 구하는데 일 해볼 의향이 없냐고......? 그래서 협동이발관에서 처음으로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원래 협동이발소는 현 근남면 양조장 바로 앞에 있었습니다.”
근남면 양조장 앞에 위치해있던 협동이발소는 그 후 제동중학교 앞으로 자리를 옮겼다가 30여 년 전 현 위치로 옮겨왔다.

그동안 장씨는 맹호부대 기갑연대에서 현역병으로 군 생활을 마치고 다시 근남면으로 돌아왔다.
장씨가 군 생활을 하는 동안 협동이발관의 이발사는 서너 명 바뀌었다.  이런 사람에서 저런 사람으로.....   저런 사람에서 이런 사람으로......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오랫동안 한자리에서 진득하게 버텨내지 못했다.
이발사 장씨는 31년 전 현 건물을 사 가지고 입주하여 협동이발관의 오랜 이름과 명성을 변함없이 계속 이어가고 있다.

장씨는 협동이발소 문을 열 당시 이발비가 10원쯤 했다고 술회한다.
“협동이발소를 처음 시작할 때 이발비가 면도 포함해서 10원 정도 했어요. 안동에서 역전 이발소를 할 당시에 7~8원 했고요...... 지금은 이발하고 면도하면 8천원에서 1만원씩 받으니까 치솟는 물가 따라 몇 십 년 동안 이발비도 엄청 많이 오른 것이지요. 그래도 지금 8천원보다는 그때 10원이 훨씬 돈의 가치가 더 있었으니 이건 어찌된 영문인지...... 이 시대는 돈이 너무 흔하고 가치 없어져 버렸지요.”
이발만 하고, 돈만 착실히 모으던 장씨는 군을 제대하고 난 뒤인 스물여섯 살 때 평생 배필로 세 살 연하인 이옥분씨를 만났다.
평소에 이발사 장문동씨의 성실함을 눈여겨보던 협동이발소 단골손님인 처가쪽 7촌 아저씨의 중매로 수곡1리 비율동의 처녀 이씨를 만나게 된 것이다.

장씨는 부인 이옥분씨와의 사이에 1남 2녀를 두었다.
“힘들게 배운 이발 기술로 마누라 얻고 애들 셋을 두었어요. 빠듯한 생활에 어렵게 쪼개 쓰면서 애들 셋을 다 대학 마치게 했습니다. 서른아홉 살 먹은 큰 아들이 현재 대구에서 공인중계사업을 하고 있고, 서른 일곱된 큰 딸이 영양사로 일하고 있고, 서른 넷 먹은 작은 딸내미가 고등학교 교사로 근무하고 있어요. 그런데 다들 결혼을 하지 않으려고 해서 큰 고민입니다. 그래도 나이가 차면 결혼을 해서 가정을 꾸려야 하잖아요.”

  불 고데기와 수동 바리캉
 
장씨가 처음 이발 기술을 배울 때만 하더라도 현재 사용하는 드라이기가 아닌 불 고데기(인두기, 아이론)를 사용했다.
1970년대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집게를 이용해서 연탄불이나 숯불, 톱밥난로에 살짝 달군 불 고데기를 사용하여 곱슬머리를 펴기도 하고 정리하는 등으로 머리를 다듬었다. “숯불이나 톱밥난로에 불 고데기를 달구어서 사용하다 보면 간혹 실수해서 손도 데이고 손님들이 맡긴 머리도 금세 눌어붙고 했어요. 잠시 한눈팔다가 머리카락을 눌어붙게 해서 손님들과 간혹 다투기도 했지요.

당시에는 불 고데기가 남성들의 머리를 멋스럽게 하는 유일한 도구였지요. 아마 울진군에 흔하지 않았던 미장원도 같은 종류의 불 고데기를 사용했을 겁니다. 지금이야 얼마나 편리합니까? 전기 코드 꼽고 그냥 버튼만 위아래로 움직이면 알아서 뜨거운 바람이 술술 나오지 않습니까......?”

스무 살 때부터 근남면에서 협동이발관을 운영했던 장씨는 1968년도에 근남면에 전기가 들어오기 전까지 불 고데기를 사용하여 손님들의 머리를 손질했다고 회상한다.
근남면에 전기가 들어오고 난 이후에 필요가 없어진 불 고데기지만 아직까지도 장씨는 녹슨 불 고데기 두 개를 이발소에 간직하고 있다.
“나이가 들면 추억을 먹고 사는 것이지요. 한때는 이 불 고데기를 이용해서 결혼식을 치루는 새신랑 머리도 펴주고, 중요한 자리에 참석하는 유지 어르신들 머리도 매만지고 했었는데...... 아직도 머리카락이 돼지털처럼 씨굳은 사람들 머리는 헤어 드라이기보다 불 고데기를 사용해서 펴는 것이 훨씬 오래 유지됩니다. 그래서 지금도 아주 가끔씩 사용하기도 하지요. 녹슨 것이야 기름칠 한번 해주면 금세 없어지는 것이니까요.”

이발사 장씨는 불 고데기 두 개 이외에 지금은 거의 사용하지 않는 수동 바리캉도 세 개나 간직하고 있다.
평소 틈날 때마다 기름칠을 해 두어서 아직까지 반짝반짝 윤이 나는 수동 바리캉을 그는 조심스럽게 펼쳐 보인다.
“지금은 자동 전기 바리캉(이발기)이 하도 편리해서 이 바리캉을 사용할 일이 거의 없습니다. 그래도 예전에는 이 바리캉 하나를 의지해서 먹고 살았는데 더 이상 필요가 없어졌다고 해서 소홀히 대접할 수 없지요. 그래서 생각날 때마다 기름칠도 하고 해서 종이에 싸 두고 한번씩 펼쳐 보기도 하고 그럽니다.”

이발관에서 사용하는 이발기의 종류는 마냥 단순하지 않다.
바리캉과 가위, 면도기 등도 사용하는 용도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바리캉도 예전에 사용하던 수동 바리캉에서부터 지금 쏟아져 나오는 수많은 종류의 자동 전기 바리캉이 있는데 그 종류도 엄청 다양하고, 이발 가위 역시 단순히 머리를 자르고 다듬는 가위부터 흔히 머리 숱 치는 가위라고 부르는 튜닝가위까지 종류가 여러 가지다.

  이발 기술을 배우겠다는 젊은이가 없어요

누가 뭐라고 해도 천생 이발사인 장씨는 세월이 흐를수록 이발소에서 머리를 깎는 사람들도 줄어들고, 그에 따라 이발 기술을 배우려는 젊은이들도 사라져가는 세태를 안타까워한다.
“세월이 흐르는 만큼 모든 것이 변하는 게 당연한 이치겠지요. 그러나 아무리 세월이 변해도 사람들은 이발을 할 것입니다. 설마 예전에 상투 틀던 시대로 되돌아가기야 하겠어요? 이발소를 찾는 젊은이들도, 이발 기술을 배우겠다는 젊은이들도 급속하게 줄고 있습니다. 근남면에 현재 2개의 이발소가 영업을 하고 있고, 울진군 관내의 이발협회 회원들이 마흔대여섯 명 됩니다. 막내뻘 이발사가 지금 오십이 가까운 나이가 됐지요. 이발 기술만 있어도 어디가나 한식구 밥 먹고 살기에 부족한 게 없는데 왜들 그렇게 깨끗하고 덜 고생스러운 직업들만 구하려고 하는 것인지......”

그동안 장씨의 협동이발소를 거쳐 가면서 기술을 배운 후배들도 여러 명이다.
이발소에서 먹여주고 재워주면서 하나부터 열까지 이발 기술을 가르쳐 준 사람들만 해도 20여명에 가깝다.
기술을 배워 나가 개업한 사람들도 여러 명이고, 중간에 다른 직업으로 전업한 사람들도 여럿이다.   

   SBS 드라마 ‘폭풍 속으로’에서 반짝 이발사로 출연하기도
  
장씨는 2004년 3월 SBS 특별기획 ‘폭풍 속으로’ 드라마에 직접 출연했던 적이 있다.   공중파 드라마에 직접 출연한 공로를 인정받은 장씨는 2005년 6월10일과 9월5일 각각 사단법인 한국이용사회 중앙회장과 경북지회장으로부터 공로 표창장을 수여받기도 했다.
SBS ‘폭풍 속으로’ 드라마 이용기능 시범에 출연하여 코리아스타 이용사로 선정된 것이다.

장씨의 협동이발소 입구 우측 벽면에는 코리아 스타 이용사로 선정된 사실을 알리는 안내문이 한쪽 가득 자리 잡고 있다. “SBS에서 폭풍 속으로 드라마를 찍는 도중에 이발소에서 이발을 하는 장면이 있었는데, 드라마의 시대배경이 60년대 후반에서 70년대 초반이다 보니까 옛날 냄새가 나는 허름해서 정겨운 그런 이발소가 필요했나 봅니다. SBS 드라마 촬영 팀이 협동 이발소에서 촬영하고 싶다는 제의를 해 왔습니다. 드라마속의 김현태(김민준분)가 이발소에서 이발하는 장면을 촬영했는데, 드라마를 보니까 실제 머리카락을 자르지 않으면서도 머리카락을 바닥에 떨어뜨리면서 가위질을 하는 연기를 실감나게 해야 되더군요.”

애초 SBS 드라마 촬영 팀에서 이발사 역할을 소화할 할 연기자 두명을 데리고 왔는데 아무도 제대로 그 연기를 감당하지 못했다.
가위로 머리를 깎으면서 머리카락을 자연스럽게 바닥에 떨어뜨려야하지만, 정작 연기자의 머리카락은 단 한 올도 자르지 말아야 하는 난이도가 높은 연기를 해낼 사람이 연기자 가운데 없었던 것이다.

감독의 고심 끝에 현직 이발사인 장씨가 급하게 현장에서 섭외되었고, 스텝진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장문동씨는 그 연기를 훌륭하게 소화해 냈다.
“이발사를 연기해야 하는 연기자의 부자연스러움을 보다가 하도 딱해서 내가 직접 해 보기로 했습니다. 담당 감독도 나를 흔쾌히 추천했고요. 먼저 ‘가위를 하나 망가뜨리자’ 하며 가위 날을 양쪽으로 구부려서 휘게 했어요. 그리고 먼저 깎은 손님들의 머리카락을 한손에 쥐고 바닥으로 머리카락을 떨어뜨리면서 김민준이 머리위로 가위질을 시작했습니다. 양쪽으로 휘게 한 가위라서 머리카락을 다치지 않으면서도 머리를 자르는 흉내를 낼 수 있었지요. 이미 잘려진 다른 사람의 머리카락을 한손 가득 숨겨서 쥐고 바닥으로 적당히 떨어뜨려 가니까 감독의 오케이 싸인이 떨어지더군요. 현장 경험이 없는 연기자가 수십 년 현장에서 경험한 이발사를 쫓아올 수 없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지요. 개인적으로는 참 좋은 경험이 됐어요.”

장씨는 다들 어려워하는 그 연기를 4시간 가까이 되풀이하면서 실감나게 해 보이고 소정의 출연료를 받았다.  출연료로 얼마나 받았냐니까 절대 비밀이라며 끝내 소주 한잔 마실 돈 정도만 받았다고 순박하게 웃는다.

  48년 동안 오직 이발사의 외길 걸어



나이 열여덟에 먹고 살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남의 어깨너머로 이발 기술을 배웠다는 이발사 장씨.
이제 그의 나이 예순여섯이다.
그는 장장 반세기 가까운 48년 동안 남의 머리를 깎아주고, 면도하고, 또 감겨주는 이발사로서의 외길을 걸어왔다.
군대에 입대해서 3년 동안 아무 탈 없이 무사히 제대해도 자랑스럽고, 30여년 공무원으로 별 사고 없이 정년퇴직을 맞아도 주변에서 다들 축하하고 존경해주는 법인데, 48년 동안이나 변함없이 이발사로서 한 우물을 파온 장씨......
그렇듯 우직하게 자신의 길만을 쫓는 장인들이 점점 사라지는 세상에 우리는 살고 있다.

장문동씨는 평생 이발만 해 온 것이 자랑스럽다고 말한다. “일평생 이발만 했는데도 후회가 없습니다. 숱한 고생하며 돈 벌어서 부모 돕고 형제자매들 돕고 자식들 남부끄럽지 않게 길렀어요. 동생들 학교까지 내가 시켰어요. 남들은 나보고 돈이 있으면서도 노랭이라느니 구두쇠라느니 손가락질을 하기도 하지만 뭐 어때요......? 남의 재산 탐내지 않고 내 몸 고생시키면서 알뜰하게 돈을 모았고, 부모님과 형제들에게 떳떳했으니 된 거지요. 내가 학교를 보내주었던 동생 한명은 현재 경기도 군포시 시의원으로 있고, 서울 시내에서 대형 속독학원을 경영하는 동생도 있어요. 형, 오빠가 되어서 힘들게 벌어서 키워 놓으니까 자기 밥벌이는 자기가 하고 뭐 그런 것이 사람 사는 기쁨이요, 보람이지요.”
장씨는 지금도 어렵고 힘들게 쪼들리면서 사는 이웃 사람들에게 이발이며 염색을 공짜로 해주고 있다.

인터뷰를 할 당시에도 인근에 사는 장분순(여. 74세) 할머니가 이발소를 찾아왔다.
그 흔한 미장원에 가서 머리를 다듬을 형편은 안 되고 해서 안면이 있는 이발소를 찾은 것이다.
장씨는 그런 할머니를 다정하게 누님이라고 부르면서 익숙한 손놀림으로 머리도 다듬어 주고 정감 있게 빗을 놀리며 염색도 해준다.
“머리가 길어지면 가끔씩 찾아오는 동네 누님뻘 되는 분이지요. 이발도 이발이지만 염색약이 독해서 연세 드신 분이 집에서 혼자 웅크리고 하다보면 눈에도 들어가고, 넘어지기도 하고 위험해서 이발소에 오시라고 했습니다. 이발용 의자에 누워서 머리를 뒤로 젖히고 염색하면 위험하지도 않고 자극이 심한 염색약이 눈에 들어갈 위험이 없어서 좋잖아요...... 물론 돈을 받지 않습니다. 주변에 홀로 계시는 할머니나 할아버지들이 계시면 많이 오시라고 알려 주세요. 정 형편이 안 되는 노인 분들은 머리도 공짜고 염색도 공짜로 해 드립니다.”

  구두쇠가 넘쳐나는 세상이었으면

실상 그는 가족들에게만 도움을 준 것이 아니다.
장씨는 그동안 근남면에서 청년회장을 비롯하여 체육회 임원, 예비군 소대장, 의용소방대장을 역임했고, 울진군 이·미용 협회장도 지냈다.
“근남면 의용소방대에서 36년간 봉사했습니다. 뒤에 소방대장이 되어서는 현장에 출동하고 난 후에 대원들 밥도 사주고 하면서 사적인 돈도 꽤 많이 썼어요. 그런 돈은 아깝지 않습니다. 그러나 불필요한 돈은 10원이라도 쓰는 것이 아까워요. 요즘 젊은 사람들은 많이 반성해야 합니다.”

세끼 밥을 먹기 힘들었던 가난한 집안의 8남매 가운데 둘째 아들로 태어나서 숱한 고생을 하면서 오늘날까지 뒤돌아볼 틈도 없이 앞만 보고 달려온 장씨.
남들처럼 공부가 하고 싶어서 야간중학원도 두 번이나 다녔던 장씨지만, 춥고 배고프니까 그 좋은 공부도 못하겠더라는 장씨.
한평생 후회 없이 이발사의 길을 걸어오면서 가족들과 남을 도왔고, 죽을 때까지 이발을 하겠다는 장문동씨.

우리들 모두는 대부분 더 이상 모자람이 없는 시대에 살고 있다.
오히려 너무 흔해서 귀한 줄 모르고, 사방에 모든 것이 지천으로 널려 있기에 아까운줄 모른다.
전혀 부족함이 없는데도 항상 뭔가를 더 갈구하여 숱한 종류의 범죄가 발생하고, 범죄 발생 요인이 더 이상 밥 한 끼를 위한 것이 아니게 된지는 오래 되었다.

이발사 장씨를 주변 사람들은 구두쇠 또는 인색한 사람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그는 알게 모르게 늘 주위에는 인심을 베풀면서도 자신에게는 철저한 구두쇠일 뿐이다.  타인들에게는 아낌없이 선행을 베풀면서도, 정작 자기 자신에게는 철저하게 인색한 구두쇠가 넘쳐나는 세상이 된다면 이 사회가 좀 더 밝아질 수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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