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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미교에서 바라본 구미마을늦가을 오후에의 주천대 원경(둥근원 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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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가을 오후에
11월 하순, 비가 오는 오후에 주천대를 찾았다. 근남면 수산교에서 영주방면으로 가다보면 초입에 민물고기 생태체험관이 나오는데 거기서 조금 더 올라가면 멋진 송림이 우측에 펼쳐져 있고, 주천대가 있는 구미마을 앞으로 왕피천이 흐르고 주천대는 송림 맞은 편 조금 위쪽에 있다.
입동이 지난 지 오래지만 아직도 나무들은 노랗고 붉은 단풍을 달고 군데군데 색을 더해 동네를 온통 늦가을 정취로 흠뻑 빠져들게 하는데, 비까지 살짝 곁들여 내리니 주천대 앞에 선 사람을 더없는 서정으로 젖게 한다. 참 한적하고 아름다운 풍경이다.
그 옛날 이 곳에서 놀던 사람들을 떠올리며 주천대에 올랐다. 대(坮)에는 오래된 소나무 세 그루가 자라고 있는데 마치 동봉(東峰), 격암(格菴), 만휴(萬休) 세 사람인 듯 아니면 만휴, 한재(寒齋), 우와(愚窩) 인 듯 다정히 서 있는 소나무.
이 소나무 세 그루는 모두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는데 수령이 350여년이라고 한다. 그들이 주천대에 놀면서 심었다 해도 비슷한 시기가 된다. 주천대 아래는 광천이 늦가을 물색을 띠며 흐르는데, 하이얀 모래톱은 맑고 파아랗기 그지없다.
주천대 ! 내가 중학교 다닐 때 소풍을 왔던 곳이다. 그 때 주천대 밑 강가 모래밭에서 놀면서 보물찾기도 했던 기억이 있다. 사람의 생각은 참 묘한데 까지 이어지는데, 나는 이곳만 오면 왜 초등학교 운동회를 생각는지 모를 일이다.
달리기를 지지리도 못했던 나는 늘 운동회 때 마다 바보 상을 받았는데, 선생님들이 그렇게 야속할 수 없었다. 그것도 꼭 폐회식에서 많은 사람들이 보는 정지된 시점에서“오늘 상품을 한 개도 못 받은 사람은 손을 들라”고 했는지. 그리고 무슨 죄인처럼 노트 한 권씩을 받아야 했던 창피함이 스멀스멀 기어 나오는지 모를 일이다. 이곳만 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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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천 바로 옆에 위치한 주천대(왼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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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천대와 주변
우리 지역은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은 그 유명한‘관동팔경’에다‘천혜의 자연’까지 늘 승경(勝景)을 이야기하는 고장이지만, 이 곳 주천대라는 이름은 일부 지역민들에게만 알려져 있을 뿐이다. 주천대에 관한 글들을 읽다 보니, 주천대야 말로 여러 가지 면에서 울진에서 자랑할 만한 승경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주천대는 근남면 행곡 4리에 있는데, 자연 부락명이‘구미(龜尾)마을’이다. 구미마을은 옛날 구암동(龜巖洞)으로 불리었는데,“어느 때부터 구미로 불리게 되었는지 알 수는 없다”고 울진향교 전교를 지냈던 남호열(南鎬烈)씨가 말해주었다. 그는 구미보다는 구암으로 부르는 것이 정확하다고 했다. 남호열씨 집안 문집인 우산세고(愚山世稿)에‘구암동(龜巖洞)’이라고 분명히 나오고 있었다.
주천대 뒷산의 형세가 거북이 모양을 닮았다고 해서 구암이라고 한다. 행곡은 원래 쌀고(米庫)라고 불렀는데, 이유인즉 마을 앞의 금산(錦山) 지맥(支脈)이 동쪽으로 뻗어 있고, 마을 앞 광천(光川:왕피천) 건너 수십 척의 석벽(石壁) 중턱에 석실(石室)이 있었다.
신라시대에 원효대사가 여기에 암자를 짓고 수도(修道)하였는데, 매일 아침저녁으로 바위구멍에서 쌀이 조금씩 나왔다 하여 이곳을 천량암(天糧岩)이라 하고 마을 이름도 미고(米庫) 즉 쌀고라 하였다. 후에 발음이 변하여 쌀구에서 살구로 살구 행자를 차용 행곡(杏谷)이라 부르고 있다.
이 외에도 행곡은 마을 중앙에 샘터가 있어 맑은 물이 솟아올라 연못을 이루었다는 유래가 있어 마을 이름을 샘실이라 부르는 행곡1리가 있는데, 1686년경에 안동권씨(安東權氏)가 개척하였다고 한다.
또 회임질(花林, 上川前, 海鹽洞)로 부르는 행곡 3리가 있다. 이 마을은 옛날에 호수(湖水)로 이곳까지 밀려들어 온 바닷물로 소금을 만들었다 하여 ‘해염동(海鹽洞)’이라 한다. 지금도‘모래등질’이라는 곳의 모래가 바다 모래와 흡사하다 한다.
또는 냇물의 상류에 위치하였다 하여 상천전(上川前)이라고도 하고, 꽃이 많이 있는 곳이라 하여 화임질(花林)이라 부르고 있다. 이 마을은 1500년경에 단양우씨(丹陽禹氏)가 개척하였다 하나 분명치 않고, 1600년경에 정선전씨(旌善全氏)가 이주(移住)하여 화임질(花林)이라 부르고 집단으로 살고 있다. 그리고 내앞(川前)이라 부르는 행곡 2리가 있는데, 이 마을은 고가(古家)와 돌담이 잘 어우러져 고색창연한 맛을 자아낸다.
마을 입구에 천연기념물로 지정된‘처진 소나무’는 그 모양새가 가히 일품이다. 이 마을은 또 얼마 전에 방영한 mbc TV 드라마‘사랑한다 말해줘'의 무대가 되기도 했는데, 터널을 이룬 대숲과 더불어 최근 관광객들이 자주 찾는 명소로 되고 있다. 그럼 이제부터 주천대를 본격적으로 찾아가 보자.
임만휴(任萬休)
주천대는 만휴를 빼고는 얘기가 되질 않는 곳이다. 그는 오늘날 부르고 있는 주천대의 이름을 짓고 이곳에서 오랜 기간 머물면서 많은 일화를 남겼기 때문이다. 만휴당 임유후(任有後, 1601~1673)는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이 풍천(豐川)이다.
만휴당(萬休堂)은 그의 호이며, 자가 효백(孝伯), 시호는 정희(貞僖), 1624년(인조 2)에 생원시 진사시, 1626년 정시문과에 각각 급제하여 가주서(假注書)가 되었다. 1628년 동생 지후(之後)가 반란을 음모하다가 발각되어 숙부인 예조판서 취정(就正)과 그 두 아들이 죽임을 당하자 사직했다.
이 해 세상과의 연을 끊고 울진 행곡의 주천대 옆에 집을 짓고 20여 년간 살게 된다. 효종(孝宗)이 즉위한 후 종성부사(鐘城府使)로 기용되어 여진족에 대한 방비를 하고, 백성들에게 유학(儒學)을 가르쳤다. 1660년(현종 1) 예조참판을 거쳐 승지를 지내고 1670년 공조참판·병조참판·경기도관찰사를 거쳐 경주부윤을 하다가 임지에서 죽었다. 뒤에 이조판서로 추증되었다. 울진군 근남면 행곡리 구미마을의 고산서원(孤山書院)에 배향되었다. 저서에《만휴당집(萬休堂集)》《휴와야담(休窩野談)》 등이 있다.

구미마을 입구에서 바로본 소고산과 주천대(오른쪽 끝)
그가 주천대에 온 까닭은
앞서 언급한 것이 그의 간략한 일대기인데, 여기서는 그가 울진으로 오게 된 시점에 주목하고자 한다. 그는 1628년(인조 6년)에 가문으로나 본인 인생으로나 엄청난 사건을 겪게 된다. 바로 그의 동생 지후(之後)가 향리 사람들과 은밀히 반란을 도모하다가 도리어 이를 고발함으로써, 고발당한 사람들이 격분한 나머지 만휴의 숙부인 판서 취정(就正)도 함께 가담했다고 무고를 하여 판서의 父子 3人이 모두 장사(杖死 : 장형(杖刑)을 당하여 죽음)되고, 그도 연루자가 되어 구속되었으나 혐의가 없음이 밝혀져 곧 석방된다.
이 일로 그는 크나큰 절망을 한 듯하다. 집안의 이 참화로 그는 아우 지후와 인연을 끊는 절의문(絶義文)을 지어 부친 기일에 사당에 고하고 종신토록 그 아우의 얼굴을 대하지 않았다.
그의 절의문 한 부분을 보면 참담했던 심정이 잘 나타나 있다.“슬프다 흉동(凶童:흉악한 어린놈)아, 너 내 동생이 아닌가? 선친이 세상을 버릴 때 너는 강보에 싸인 젖먹이였고 나와 두 형은 불과 7,8세 미만의 철부지로서 외롭고 외로워 어찌 무사히 커서 대성하기를 바랄 수 있었겠는가?
오직 어머님이 알뜰히 키우시고 돌봄으로써 서로 의지하여 자라왔고...중략...돌돌(咄咄:뜻밖의 일에 놀라 지르는 소리)한 이 흉동 지후야! 너는 어찌하여 스스로 화를 지어 우리 집을 이 지경이 되게 하고 선인을 욕되게 함이 이에 이르더란 말이냐. 너 어릴 때 병이 많았는데 차라리 그 때 일찍 죽어버리지 아니하고 오늘 날 이 지경이 되었는고?......”참으로 형제지간에 할 수 있는 최악의 말이 아닐 수 없다. 그의 심경이 어떠했는지 짐작이 간다.
집안과 그의 처지가 이 지경에 이르자 세상과의 인연을 끊고자 멀리 동해를 따라 어머니를 모시고 이곳 주천대까지 내려와 숨어살게 된다. 이때가 1628년 그의 나이 28세 때의 일이다. 지금으로부터 378년 전의 일이다.

주천대에서 바라본 구미마을
주천대, 이름을 얻다
주천대는 원래 수천대(水穿坮)로 불려져 왔는데, 만휴가 수천대를 주천대(酒泉坮)로 명명하고부터 그 이름이 바뀌었다. 그 내력은 만휴가 지은 주천대 기문(記文)에 잘 나타나고 있다. 기문을 보면 당시의 주변 풍광과 인물들의 대화가 그림처럼 펼쳐져 주천대 안내문으로는 이 기문 이상은 없을 듯하다. 기문은 다음과 같은데, 가급적 현대어로 재구성해 보았다.
『1628년(인조 6)에 내가 서울에서 쫓겨, 울진현의 남쪽 촌에 우거(寓居:정착되지 아니하고 임시로 몸을 붙여 삶, 겸양의 의미)하였는데 이 촌은 백암산의 북쪽 지맥(支脈) 한 줄기가 내려앉은 마을이요, 계곡이 구곡(九曲)으로 흐르는 곳인데 동쪽과 서쪽에 인가 8~9호(戶)가 있고 마을과 마을 사이에 돌다리가 있다. 왼편은 그 바깥이 바다이고 오른쪽은 천축산(天竺山:불영사가 있는 산)이 있고 남쪽으로는 장천굴(掌天窟:성류굴)이 있다. 설두(雪竇 :누금동)와 몽천(蒙泉)에서 내려오는 물은 성류굴 아래를 돌아 전천(前川)에서 모였다가 바다로 흘러 들어간다. 이 마을의 이름을 미고(米庫)라 하는데 원효대사의 옛 자취이다.
내(川)가 흐르는 위에는 천량암(天糧庵)이라는 굴방이 있는데 원효대사가 이곳에서 수도하자 바위틈에서 매일 아침저녁으로 한 되 가량의 쌀이 나왔다고 하니 기이하다고 하겠다.
몇 길이나 되는 석대(石坮)가 있으니 곧 백암산의 단애(절벽:곧 주천대를 말함)이다. 그 석대 위에 세 그루의 큰 소나무가 우뚝 서 있는데, 푸른 잎 붉은 줄기가 뱀같이 꿈틀거리는 모습이 절벽아래의 소(沼)에 비친다. 소의 넓이는 배 하나가 자유로이 다닐 만하고 깊이는 수십 척이나 된다. 소 앞에 한 작은 바위산이 있는데, 바위틈에는 늙은 소나무와 파리한 대나무가 섞여 있다.
내가 이곳을 떠나지 못하고, 이 동천(洞天)에 즐기고 살면서 근심을 잊었다. 고을의 부로(父老:마을 어른들)들이 내가 여기 온 것을 즐거워하면서 대(坮) 위에 술과 음료를 차려 놓고 나를 불러 함께 마시니, 내가 산건(山巾)을 쓰고 야복(野服)을 입고 유연히 술이 얼큰해지자 술잔을 들고 북쪽을 돌아보며“저 앞에 높다랗게 솟은 봉우리가 백련봉(白蓮峰)이며, 구름과 무지개 바깥에서 모였다가 흩어지면서 아득히 기이함을 드러내는 산이 천축산(天竺山) 부용봉(芙蓉峰)인가.”라고 말했다.
대개 대관령 동쪽 9개 군은 모두 산수가 아름다운 고장인데 내가 서울 있을 때 이곳을 다녀온 사람을 보면 누구나 다 선향(仙鄕)에서 노는 즐거움을 가졌고, 호사자(好事者)는 한 폭의 산수화를 그려서 전하였다. 또 노래하고 읊조리며 이를 퍼뜨렸다.
돌아와서는 관동팔경하면 오로지 7읍만 이야기하고 문득 울진은 일컫지 않아 내가 괴이하게 생각했다. 지금 이런 승경(勝景)을 보니 이른바 높고 밝은 것은 쉽게 좋아하게 되나 그윽하고 먼 것은 잘 알지 못함인가. 아! 창해의 광대함과 호수와 산의 뛰어남은 울진 또한 있으며 누(樓)·대(臺)·정(亭)도 있었다.
이보다 아름다운 곳이 어느 지역인가. 8읍은 아니로다. 사람들이 보는 것은 오로지 이름에만 의존하고, 조화로움은 관심 밖이니 어찌 뜻에 찰 것인가. 그러나 이곳을 한번 올라가 보니 매우 상쾌하여 세상 어디에 어찌 산수(山水)의 얕고 깊음을 다하여 자득(自得)의 눈을 여는 것이 있겠는가.
그런즉 이 동네(洞府)는 넓고 한적하고 계곡은 그윽하여 그 아름다움은 이원(利愿)의 반곡(盤谷)과 같고, 깊고 그윽한 것은 무릉(武陵)의 도원(桃源)과 같으며, 산 빛은 아미산(峨眉山)의 괴이한 광채에만 머물지 않고, 물은 망천(輞川) 못지 않으니 선경(仙景)에서 말하는 단구(丹邱)나 현포(玄圃)는 나는 알 수 없지만 세상에서 일컫는 산수가 뛰어난 곳(煙霞別區:연하별구)은 이를 말하는 것이 아니랴. 아름답도다 주천대여, 또한 아름다운 이름을 가졌구나! 좌중에 한 늙은이가 오른손은 대(坮)를 짚고 왼손을 들어 손가락으로 석산(石山)을 가리키면서“저 산과 이 산은 하나의 산이었는데 아득한 옛날에 냇물이 뚫어서 갈라버렸다. 그 까닭으로 수천대(水穿坮)라 불러왔다”고 하였다.
그 말을 듣고 내가 탄식하며“아, 그것은 주천대가 와전된 것이 아닌가. 천량암이 생겨남으로 말미암아 마을을 쌀고(米庫)라고 부른 것은 이 대(坮)의 이름인 주천(酒泉) 또한 어찌 춘(春)과 주(酒)가 바뀌지 않는다고 말하랴. 높아지면 깎아지른 듯이 험하게 되고 흘러가면 광대하게 되니, 이 모두가 흘러가는 물과 우뚝 솟은 언덕이 자연스레 그러한 것이다.
어찌 세속의 말을 가지고 본래의 것을 억지로 훼손하려 하는가. 주성(酒星)은 하늘에 그득하게 벌려져 있고 주천(酒泉)은 땅에서 나와 하늘과 땅을 끼고 있으니, 주천이 가까운 이름이 아니리요.
패강(浿江)의 주암(酒岩)과 학성(鶴城)의 주조(酒槽)가 다 이렇게 지어진 이름들이다. 내가 험한 타향살이를 하면서 늘 이 대에 올라, 흐뭇하게 즐기며 날이 저물도록 배고프고 목마른 것을 잊었는데, 하물며 지금 술이 샘처럼 있음에랴.
내 청컨대 뒷산을 이름하여 소고산(小孤山)이라 하고 대를 주천대로 부르고자 하니 여러 어른들은 어떻게 생각하시오.”하니, 모두 다“좋다”하면서 술잔을 물에 씻어 다시 술 한 잔을 부어 나를 축수(祝壽:이 잔에 모든 것을 담겠습니다)해 주면서 말하기를 “이 대가 벽향(僻鄕: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오지)에 묻혀있어 세상 사람들이 알아주지 못하는 가운데 수천 년이 지났다.
옛적 청한자(淸寒者:동봉 김시습)가 성류사에서 하룻밤을 쉬어 갔지만 그 발자취가 여기까지 미치지 못하였고, 또 격암(格菴) 남사고(南師古)가 이곳에서 자득하면서 무성한 풀을 베고 터진 곳은 벽돌을 쌓았다. 그러나 사람이 사는 곳에 조그마한 집을 장만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는데, 그대는 여기 와서 집까지 마련하고 온 마을 사람들의 환영을 받으며 지내니, 김시습이나 남격암(南格菴)이 미치지 못한 바를 그대는 얻었으니, 이 대가 생겨서 수천 년 만에 남옹(南翁:남사고)이 얻은 바 있고 옹이 죽은 뒤 60여 년 만에 그대가 와서 얻은 바 있으니, 남옹이 있음으로 해서 이 대가 알려지게 되었고, 그대가 옴으로 해서 이 대의 이름까지 짓게 되었으니 이 대의 흥망이 어찌 없으리오.
아마도 신이 아끼고 귀신이 감추었다가 그대가 오기를 기다린 것은 아닌지. 이곳에 올라서 사방을 바라보면 즐길만한 곳이 이 곳 저 곳 한두 군데가 아니니, 바라건대 그대는 이름을 지어 이 대의 빼어난 경치를 더하여 주시오”하였다. 이에 내가 술잔을 들어 마시고 잔을 돌려주면서 자리를 피하여 말하기를“내가 국도(國都:서울)에서 쫓겨나서 여기 오니 이곳 산수는 나를 받아 주었고, 손님과 교유할 수 없었지만 어른들이 와 주었으니 청한자(김시습)가 미혹된 바를 나는 찾게 되었고 남격암은 일찍이 원했던 것을 나는 이루게 되었으니, 불가에서 말하는 전생의 숙업(宿業)이요 인연이라 하지 않으리요. 내가 세상일에만 골몰하면 비록 세상 밖의 파도에 떠다니고 싶다고 하더라도 지금과 같은 것을 어찌 얻었을 수 있었으리요. 비록 강산이라 하나 가히 기대할 만한 것이 있구나. 내 비록 소홀하고 거칠지만 감히 어른들의 명을 따르지 않으리요.”하였다.
마침내 서로 취하여 춤을 추면서 나는 손짓을 해가며 이름을 읊기 시작했다.“이 대에서 올라가면 돌이 겹겹이 쌓인 꼭대기에 바람이 우수수 부는 소리가 나니‘송풍정(松風亭)’이라 하고, 그 밑의 바위는 ‘무학암(舞學岩)’이라 하고, 냇물은‘족금계(簇錦溪)’라 하고, 좌우로 수면에 벌려진 절벽은‘창옥벽(蒼玉璧)’이라 하고, 벽의 북쪽에 있는 것은‘해당서(海棠嶼)’라 하고, 돌다리 동쪽에 상투처럼 생긴 봉우리는‘옥녀봉(玉女峰)’이라 하고, 고산 쪽으로 걸려 있는 것 같은 돌 자갈 땅은‘비선탑(飛仙榻)’이라 하고, 오른쪽에 있는 모래톱은‘앵무주(鸚鵡洲)’라 하였다. 이름 짓기를 마쳤으나 이것으로 어찌 대의 승경을 다했다 하랴. 대의 천연한 기상과 자득(自得)의 취향은 오직 나와 어른들이 느낄 뿐이니, 이것을 아는 자도 속인(俗人)과 더불어 도를 말하기 어렵도다.”
어른들이 듣고 매우 즐거워하면서 하는 말이“자네 말을 이 돌 벽에 새겨서 뒤에 오는 자들에게 보이고자 하니 청하건대 그대는 이대의 기(記)를 써라.” 하였다.』

주천대에 자리한 소나무 3그루(수령 350년, 1999년 보호수로 지정)
동쪽언덕에 올라 길게 휘파람을 불다
주천대가 이름을 얻은 후 많은 문인묵객의 쉼터가 되는데, 이 모두가 만휴의 공(功)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서울에서 태어나 가학을 바탕으로 학문의 깊이가 상당히 높은 경지에 이르렀다. 그의 조부 국노(國老)는 이조판서를 지냈으며, 부친 수정(守正)은 홍문관 교리에 이르렀다.
이러한 집안 문풍(文風)에다 정각(鄭恪), 유대진(兪大進), 임효달(任孝達), 이유(李惟) 등으로부터 훈도를 받았으며, 삼종형(三從兄)인 소암 임숙영(疎庵 任叔英)으로부터 오랫동안 교육을 받는다. 이들은 모두 학문과 관직으로 일가를 이루었던 사람들로 그들의 학문과 품성이 전승되었다고 봐야 한다. 이렇게 서울의 한 엘리트가 벽지 울진의 행곡 주천대 옆에 살게 되자 자연스레 그의 학문을 배울 수 있는 기회가 생기게 되는 것이다.
비록 옛 사람들이지만 스승과 제자, 벗들을 하나씩 찾아 나가다 보면 서로 서로 지역을 떠나 연계되어 있음을 발견하게 되는데, 마치 퍼즐을 맞추어 나가는 듯 할 때가 한 두 번이 아니다.
만휴는 그의 학문을 이곳에서 가르치기 시작하는데 사표로서 대단한 모범을 보인다. 울진에서 그의 대표적 제자가 우와 전구원(愚窩 田九畹)과 한재 주필대(寒齋 朱必大)이다.
우와는 재주가 민첩하고 한재는 지조가 굳세어서 만휴는 특히 이 두 사람을 소중히 하였다.
한재집에 만휴가 지은 시가 있어 소개한다. 春風披壑振群芳 蘭氣先聞九畹香 有鳥不鳴鳴必大 月巢幽桂待朝陽 (봄바람이 스쳐 뭇 꽃봉오리 피게 할 때, 난초 기운 먼저 알고 구원향을 피웠더라. 새 있어 울지 않으나 크게 울 날 있을지니, 묵묵히 때 오기를 기다려 보거라) 이 시는 우와가 진사시에 먼저 급제하고 돌아왔을 때 지은 것으로, 여기서 한재에 대한 기대도 컸음을 알 수 있다.
뜻이 돈독했던 한재는 뒤에 사마시에 합격했으며 그 때의 학행으로 관동부자(關東夫子:관동의 공자)라는 칭송을 받았다. 만휴가 경주부윤으로 재직하다 타계하자 울진 선비 및 그의 문인(門人)인 한재와 우와를 포함 34명이 연명으로 제문을 지어 천리 길 서울 천호동으로 찾아가 문상한 일이 있었는데, 그 제문을 보면 스승에 대한 가없는 그리움과 존경심을 엿볼 수 있다.
『아! 슬프다 선생님이시여 선생님의 덕행은 만세의 사표(師表)가 되고 그 문장은 순수하여 일세에 높이 뛰어났으며, 관직에 계실 때는 어진 정사를 베풀어 본보기가 되었습니다. 울진에 오셔서는 저희들 시골 사람들을 업신여기지 아니 하시고, 기꺼이 벗으로 삼아주시니 마치 저 하늘의 신선이 세속에 내려와 잡다한 속인들과 사귀는 것 같았으며, 백설 같이 깨끗하고 격조 높은 뜻을 간직하고 계시면서도 이곳 촌 동네와 잘 융합하셔서 선생님 계신 곳은 언제나 따스하고 훈훈한 화기가 감돌았습니다. 높고 높은 절개는 저희들의 마음가짐의 표적이 되었습니다. 예절이 바르시어 공손하고 겸손하며 너그러우신 선생님의 높은 덕을 저희들은 진정으로 존경해 마지 않았습니다.
한적한 우리 고장 행곡에 은거하심을 기꺼이 하옵시고 생활이 안정되자 저희 후배들을 가르치심에 게을리 하지 않으시고, 힘껏 이끌어 주셨습니다. 우둔한 사람이나 총명한 사람을 가리지 않으시고 나라에 충성함과 부모에 효도할 것을 매양 강조하셨고, 의리를 목숨보다 중히 여기게 하여 선비의 나아 갈 길을 횃불처럼 밝혀 주셨습니다....(중략)....어머님을 섬기는 지극한 효성은 참으로 저희들의 본보기가 되시었고, 그 공경하고 사랑하는 마음은 지극히 순수하여 오가는 정은 봄바람이 얼음을 녹이듯 했습니다...... 그 감화는 이 곳 풍속을 일변시켰습니다. 한가한 시간에는 자연을 사랑하여 산과 들을 다니시며......
달 밝은 밤에 텁텁한 촌 막걸리와 질박한 안주로 서로 권하고 마시면서 반평생이 되도록 이곳에 계셨으니...... 서울에 가셔서도 이곳 울진을 잊지 못하시고 자주 편지를 보내 오셨습니다.......
아 ! 슬프다 선생님이시여. 지나간 옛 일들을 낱낱이 헤아리니 슬픈 마음 한이 없고, 오직 눈물만이 앞을 가립니다. 옛 살던 집은 그대로 남았는데, 선생님은 간 곳 없어 그 집 볼 때 마다 눈물 절로 흐르고, 그렇게도 사랑하시던 저 주천대의 산과 내는 이제 주인을 잃었습니다. 물위에 나는 새도 선생님을 그리워 운답니다. 선생님이 계시던 저 정자는 이제 황폐해졌고 선생님이 정성스레 가꾸시던 저 대나무는 소슬한 바람에 쓸쓸하기 그지없습니다......
선생님의 풍모를 회상하니 비 개인 뒤의 밝은 달과 같고 깨끗하기가 청아한 빙호(氷壺:얼음을 넣은 항아리라는 뜻으로, 아주 깨끗하고 맑은 마음을 이르는 말)와도 같았습니다. 이제 선생님의 그 모습 뵐 길 없고, 그리운 음성 들을 길 없어 천리 길을 찾아와 고하니 슬픔은 한이 없어 우리 모두 일제히 통곡하오니 선생님이시여 부디 흠향하소서』
물론 제자들의 글이라 친다 해도 한 인간인 스승에 대한 사랑이 이정도면 그가 어떻게 스승으로서 본보기를 보였는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제문에서도 나오지만 그가 얼마나 주천대를 사랑하였는지 알 수 있다. 당연히 그의 제자들이나 지인들과 함께 주천대에서 자주 풍류를 즐겼다고 볼 수 있다. 유명한 도연명의 귀거래사에 나오는 구절 그대로리라. ‘登東皐以舒嘯(등동고이서소)하고, 臨淸流而賦詩(임청류이부시)’라. 즉「동쪽 언덕에 올라 길게 휘파람을 불고, 맑은 시냇가에 앉아 시도 지어본다.」마을 동쪽에 있는 주천대와 맑게 흐르는 광천 그곳이었다.
<참고 문헌>
▲『蔚珍郡誌』, 울진군, 2001. 2
▲『萬休堂集』, 豊川任氏牧使公派宗中, 1995
▲『鄕土史硏究 第 1 輯』, 蔚珍郡鄕土史硏究會, 1988
<다음호에 계속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