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천대(酒泉坮) 청연(淸緣)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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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천대의 소나무들

12월호 글 모두(冒頭)에 주천대 보호수인 소나무 세 그루를 동봉, 격암, 만휴 또는 만휴, 한재, 우와를 빗대어 말했는데, 소나무를 연상시키는 그들을 잠시 만나보기로 한다.
만휴, 한재, 우와는 12월호에 언급된 것으로 갈음하고, 동봉과 격암 그리고 또 한사람이 있는데 바로 서파 오도일(西坡 吳道一)이다.
물론 그도 그 소나무에 넣고도 남을 사람이다. 굳이 서파를 뺀 것은 보호수가 세 그루인 점도 있지만, 서파는 울진 현령으로 부임하여 이 고장에다 크게 문풍을 진작시키고 떠난 인물로 당시 지역 유림들이 고산서원에 생사당(살아 있는 사람을 모심)을 지어 배향할 정도였다. 그러나 주천대에 오랫동안 터 박고 살아온 소나무 의미를 생각하다 보니 그가 빠지게 되었다.
이런 의미라면 동봉도 빠져야 되겠지만 동봉은 서파가 울진 현령 재임 시 동방의 백이(伯夷)라 하여 그 절의를 크게 숭상하여 주천대 고산에 잠시 머문 그를 위해 자신의 봉급을 털어 동봉묘(東峯廟 : 김시습의 사당으로 뒤에 동봉서원으로 부르다 구암 서원으로 고쳐 부르게 됨)를 지은 것으로 봐 동봉이 소나무에 먼저 들어가는 것이 순서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남사고가 살았던 남수산 아랫 마을 전경, 이곳에 몽천서당도 있었다
먼저 격암 남사고(格菴 南師古, 1509-1571) 를 만나본다.
격암에 관한 연구는 울진군에서 학술발표회까지 가진 적이 있지만, 나는 격암의 인간적인 모습이 잘 나온 이 부분이 제일 와 닿는다. 만휴당 집에 ‘격암선생유전(格菴先生遺傳)’이라고 만휴가 지은 장문의 글이 있다. 이 글에서 격암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 있다
『공은 처음 설매(울진읍 신림리의 한 마을)에서 살다가 남수산(울진군 원남면) 밑으로 옮겨와서는 달팽이 같은 조그마한 집을 지어 살았다. 바람과 비도 제대로 가리지 못하였고 주위가 쓸쓸하기 말할 수 없었으며 떨어진 돗자리 조각으로 문에 달고 살면서도 조금도 개의치 않았고 의연하였다. 부인이 술을 좋아하는 공을 위하여 천신만고 끝에 술을 빚어 겨우 마실 만큼 익으면 공은 술동이에 표주박을 띄우고 마시다가 혹시 집 앞을 지나가는 사람이 있으면 같이 마셨는데, 술동이를 다 기울인 뒤에야 그만두곤 하였다......(중략) 평소에 주천대의 경관을 좋아하여 매일 같이 제자들을 거느리고 찾아가 노닐면서 우거(寓居)하고 싶어 하시다가 얼마 후 그곳에서 오두막집 하나를 짓고 옮겨 와서는 문을 닫고 조용히 앉아 속세에 대한 잡념을 모두 떨쳐버리고 태극의 오묘한 원리에 잠심하였는데, 늙어갈수록 생각하는 바가 더욱 깊으셨다......(중략) 천리자연에 법칙들을 궁구하면서 여생을 이곳에서 마치려 하셨다.』
도연명이 지은 오류선생전(五柳先生傳)의 다음과 같은 구절이 절로 연상된다.
『선생은 어떤 사람인지 알지 못하고 그 성명도 자세하지 않다. 집주변에 버드나무 다섯 그루가 있으므로 그로 인해 호를 삼았다. 한가롭고 고요하여 말수가 적었고 영화와 이익을 바라지 아니하였다. 독서를 좋아했지만 심각하게 따지지 않았으며 매양 뜻을 깨닫게 되면 흔연히 밥 먹는 것을 잊곤 하였다. 성품이 술을 좋아했으나 집이 가난해 항상 얻지는 못하였다. 친구는 그가 이러함을 알고 간혹 술상을 차려 그를 부르곤 하였는데, 나아가 술을 마시면 문득 다 마시고 반드시 취하기를 바랐으며 이미 취한 후에는 가고 머무름에 마음을 두지 아니하였다.(閑靜少言,不慕榮利 好讀書,不求甚解,每有會意,便欣然忘食 性嗜酒,家貧不能常得 親舊知其如此,或置酒而招之 造飮輒盡,期在必醉;旣醉而退,曾不吝情去留)』.
또 격암의 인품을 설명하고 있는 만휴당 집의 격암선생유전(格菴先生 遺傳)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어릴 적부터 독서하기를 좋아하였고, 행동 또한 건실하였는데, 장성하여서는 수술학(數術學)에 정진, 천문과 지리 등에서 막힘이 없었다......(중략) 내가 어린 시절부터 공의 명성을 놀랄 만큼 신비롭게 들어 온 터라 울진 땅에 오면서 나이 많은 어른들을 대할 때마다 항상 공에 대해 물어보곤 하였으나, 모두 공의 행적을 높이 평가하면서도 명쾌하게 대답해주는 이가 없었다. 그러나 오직 한 사람 임천일사(臨川逸士 : 임천은 격암의 제자였던 남세영의 호, 일사는 세상을 등지고 숨어 사는 선비, 또는 뛰어난 선비)만이 공의 문하에 높은 제자라 공을 가장 잘 알고 있었다. 그가 말하기를“내가 선생님에게서 믿고 배운 것은 선생님의 탁월하신 덕행이지 자네가 궁금해 하는 선생님의 신기한 이적(異蹟)이 아니다. 그렇다고 선생님을 보통 사람들과 다르지 않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어찌 보통 사람들과 다를 수 있겠는가. 단지 불행하게도 궁벽한 곳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배울만한 스승도 없었고 서로 도와서 탁마(琢磨)할 수 있는 벗도 없었지만 독학으로 절묘한 학문을 자득하였으며 진리의 근원을 연구하여 우주와 자연법칙을 깊이 관찰하였고, 풍진 세상에 초연한 사람으로......(중략) 학문에 잠심(潛心)하여 깨달은 바가 심히 높고 높지만 평상의 말에도 조심조심 하였으며......(중략) 나는 스승님과 같은 南氏로, 문하에 출입하기를 어언 수십 년인데 선생님은 나를 친자식처럼 생각했지만 잠시라도 흐트러진 모습을 보지 못했다. 나의 어머님이 선생님과 인척인 관계로 가끔 나의 편에 안부를 전하면 반드시 절하고 받으며, 혹시 무슨 일을 나의 편으로 묻기라도 하면 꼭 엎드려서 아뢰니 선생님의 자수(自修 : 스스로 닦음)하는 행실이 이와 같았다......(중략)”』‘제자의 부모 안부를 묻거나 들을 때도 반드시 절하고 받으며 응했다’에서 어찌 제자가 스승을 존경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스승이 몸소 보여주는 참으로 아름다운 풍경이 아니고 무엇인가.
이어서 동봉 김시습(東峯 金時習, 1435~1493)이다. 그의 호를 동봉(東峯), 매월당(梅月堂), 청한자(淸寒子) 등으로 부르는데 생육신의 한 사람으로 신동이었느니, 스님이 되었느니 등등, 인구에 많이 회자된 그를 여기서 구구하게 설명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그는 울진 장씨를 외가로 둔데다, 성류굴과 이곳 주천대까지 유람한 기록으로 인하여 당시 울진현령 서파 오도일은 생육신의 한 사람인 그를 평소 숭모했던 나머지 주천대 옆에 동봉묘란 그의 사당을 짓게 되고 후일 고산서원에까지 배향된다. 서파가 쓴 동봉서원 상량문에서『한 나라의 국민이 영원한 세월을 두고 모두 다 경건한 마음으로 우러러보며 본받을 만 한 가장 모범적인 훌륭한 서원을 지을 수 없는 것인가. 오직 여기 이 집터에 새로운 사당과 서원을 지었으니 공경히 동봉 선생을 우러러 생각하고 헤아려 보건대......(중략) 관동 땅 울진의 고요하고 한적한 이곳에 오시어 쉬어 가셨으니 어찌 이 고장의 영광이 아닌가. 이곳은 동봉의 외가인 울진 장씨의 원파지지(源派之地 : 성씨 유파가 유래된 고장)며, 성류굴은 천고의 신비를 간직하고 기이한 자취가 머물러 있는 곳이다. 성류사(聖留寺 : 성류굴 인근에 있었던 절로 지금은 없다)에서 사흘 밤을 머물렀는데 주옥같은 글을 읽을 때마다 옷깃을 여미며, 한없는 경의를 느끼게 되었다. 고매하신 어른의 지팡이와 신발이 그 절 방문 밖에 있었음을 상상할 때 곧 달려가 우러러 뵈옵고픈 마음 간절하다. 이에 지방의 노인들과 의논하여 하루 바삐 사당을 짓기를 도모하니 이 고을이 모두 기뻐하며 찬성하는지라 그를 사모함이 크다는 것을 알겠고, 많은 사람이 협력해주니......(중략).』에서 그가 얼마나 동봉을 숭모하고 있었는지 엿볼 수 있다. 매월당이 성류사에 묵으며 지은 시 한 수를 소개한다. 1939년에 발간한 울진군지에 실려 있다. 봄날에 성류굴 앞에 서서, 절벽과 흐르는 물을 보면서 느낄 수 있는 풍경이다.
窟前春草?苔磯 山後巖花暎落暉 (굴 앞 봄풀은 이끼 낀 돌 위에서 일렁이고, 바위산 꽃들은 빛나게 떨어진다)
更有一般淸意味 夜深巢鶴警人飛
(맑고 그윽한 맛 더욱 새롭고, 밤 깊은데 인기척에 놀란 학이 집 속에서 날아가네)
다음으로 서파 오도일(西坡 吳道一, 1645-1703)이다.
그가 매월당을 숭모했던 것으로 미루어볼 때 어떤 성품과 사상을 가지고 있었는지 짐작이 간다. 절개를 높이 쳤을 것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본관이 해주(海州), 자는 관지(貫之), 호가 서파(西坡)이다. 영의정 오윤겸(吳允謙)의 손자이며, 오달천(吳達天)의 아들로 조선 후기의 문신이다. 현종 14년(1673) 정시 문과에 급제, 숙종 6년(1680) 병조 좌랑(兵曹佐郞) ·지평(持平)·부수찬(副修撰), 1682년 헌납(獻納), 1683년 지제교(知製敎)·이조 좌랑(吏曹佐郞)·집의(執義)를 거쳐, 1686년 부응교(副應敎)·사간(司諫), 1687년 승지(承旨)가 되어 동인(東人)을 옹호하다가 파직되었다. 1689년 대사성(大司成)에 오르고, 1694년 이조 참의(吏曹參議)·개성부유수(開城府留守)를 거쳐 주청부사(奏請副使)로 청나라에 다녀와 대사간(大司諫)·부제학(副提學)·강원도 관찰사에 이어 다시 부제학을 거쳐 1696년 도승지(都承旨)·부제학(副提學)·대사헌(大司憲)을 지냈다. 이듬해 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사직(司直)·이조참판(吏曹參判), 1698년 이조(吏曹)·공조(工曹)의 참판(參判)을 지내고 양양 부사로 좌천되었다가 1700년 대제학(大提學)·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병조판서(兵曹判書) 등을 역임하였다. 1702년 민언량(閔彦良)의 옥사에 연루되어 장성에 유배되었다가 배소에서 죽었다.
주천대 입구에 위치한 고산서원 옛터(지금은 가정집으로 변해 있다)
이상이 대략 그의 관직 이력서인데, 그는 1683년(숙종 9년) 7월에 울진 현령으로 부임하여 1686년(숙종 12년) 3월에 관직이 사복정(司僕正)으로 승진되어 서울로 갔다. 그는 이 부임기간에 많은 업적을 남긴다. 숙종 때 대제학을 지내다 당쟁으로 인해 울진현령으로 좌천되어 2년 3개월을 머무르게 된다. 술을 좋아하고 시문에 능하여 당시 울진 선비들의 칭송과 존경을 한 몸에 받던 분으로 그 또한 주천대를 사랑하여 자주 이곳에 오기를 즐겨했다. 나라를 근심하는 마음이 간절하고, 성품 또한 강직한 까닭에 바른말을 서슴지 않았다.
그는 공직생활 30여 년간 집 한 칸 땅 한 평도 재산을 늘린 것이 없어 진정한 청백리의 표상이 되었다. 장성에서 귀양살이를 하다 채 1년도 못되어 죽었는데 그를 흠모하여 찾아와서 배우는 자가 수없이 많았고 상여가 나가는 날 고을 경계까지 따라 나와서 전송하는 자가 수 백 명을 헤아렸으며, 그가 다스렸던 고을에서도 수 백리 먼 길에도 불구하고 조문하여 애도하는 자가 줄을 이었다고 한다. 울진현령 재임 시 각 면에 훈장을 두어 교육에 전념하고, 향약을 제정하여 미풍양속을 위해 지방교화에 많은 업적을 남긴다. 황림 윤사진(篁林 尹思進)이 쓴『고산서원 사적기』에 서파를 설명하면서“학문을 좋아하여 재임 3년에 문화가 크게 진흥되었다......혹 서파공이 와서 동봉의 절의를 숭상하고 천양(闡揚 : 생각이나 주장을 드러내어 밝혀서 널리 퍼뜨림)해주지 아니 했으면 이 고을 선비들이 어찌 동봉선생의 고결한 인품을 숭모할 수 있었겠는가......
서파 선생이 이 고을에 와 다스릴 때 옛 촉(蜀)나라의 문옹(文翁) 같았고, 옛 조주(潮州)의 사람들이 한문공(韓文公)을 제사 지내던 일을 모방하여 그의 생사당(生祠堂)을 세웠다. 그가 죽은 뒤 만휴묘(萬休廟)에 합향하고 다시 동봉과 합향하여 고산서원에 세 선생을 모시게 된다”라고 하였다. 대문호인 동시에 위대한 정치가로 청렴 강직하여 숙종 대의 혜성과 같은 존재인 서파가 울진 땅 주천대에 온 것 또한 우리들에게는 축복된 인연이 아닐 수 없다. 그의 유저(遺著)인 『서파선생문집』 30권이 오늘에 전한다. 주천대 소나무들이 어찌 이들 언급한 인물뿐이랴. 이 외에도 문헌에는 나오지 않지만 소나무같은 이들이 또 얼마나 많았을 지는 아무도 모르는 것이다.
만휴가 만난 사람들중에 깊은 인연을 맺은 사람으로 애제자인 한재와 우와 외에 이우당 주개신(二友堂 朱介臣), 우암 윤시형(憂庵 尹時衡), 임천 남세영(臨川 南世英)을 들 수 있다. 당연히 이들 모두 주천대에 올랐으리라.
이우당 주개신(二友堂 朱介臣, 1572-1640)은 1572년(선조 5) 7월 30일 울진읍 구만동에서 태어났다. 그의 조부는 독송정 세창(獨松亭 世昌)으로 바로 임란 때 고산성에서 왜적에 항거하다 전사한 주호(朱?)의 아버지이다. 만휴가 지은 이우당 묘지명에 보면 二友堂을 알 수 있는 대목이 나온다. 『내가 서울을 떠나 행곡리에 와서 우거한지 13년인데 그 동안 옹의 부자와는 각별한 교의(交誼 : 사귀어 친해진 정)가 있었고, 특히 이우당의 아들 형(炯)과는 부모를 위하여 수친계(壽親契), 만휴를 중심으로 지역 문사들이 조직한 일종의 상포계(喪布契)까지 모았고 나와는 동갑이라 끊을 수 없는 교우지간이니 그 친근함이 나와 같은 자가 없을 진대, 내가 아니면 누가 이 묘지명을 지을 것인가』.
여기서 만휴가 이우당과 함께 아들 형(炯)을 거론하고 있는 것은 1640년에 4월 13일 몽천에서 이우당이 죽자 그의 장자(長子)인 炯이 지나치게 슬퍼하다 같은 해 7월 5일 빈소에서 죽으니 이웃 사람들이 이 말을 듣고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11월 3일에 원남면 고무곡(高茂谷)에 부자가 함께 묻히고 그 묘지명을 만휴가 짓기 때문이다. 또 묘지명은 이어진다.『공은 체격과 키가 크고 풍모가 준엄하고 행동이 민첩하며 바탕이 후(厚)하고 지혜가 많아 의논을 좋아했으나 재물을 몰랐다.
항상 있는 것 같아서 늙어 죽을 때까지 가난하면서도 의리만은 숭상하니 향당과 친척이 모두 다 아끼고 중히 여겼는데 나와도 더불어 즐거이 놀았다.....(중략) 몽천 샘터 위에 집을 짓고 주위에 매화와 대나무를 심고 이를 호로 삼아 이우당이라 했다. 살림이 가난하여도 인성이 좋아 친구들의 방문이 끊일 날이 없었는데 급기야 죽으니 장사지낼 대책이 없었다......(중략) 옛적에 마소유(馬少游)가 말하기를 선비가 이 세상에 나서 지위가 낮은 벼슬을 해도 향리에서 어진 사람이란 칭송을 들으면 족하다 하였으니 그 말이 옳다. 주옹(朱翁 : 이우당)이 그렇구나. 옹이 죽어서 천 백년이 지나 그 무덤이 여우와 토끼의 구멍이 되었을 때 묘지가 없으면 누가 능히 이 묘가 옹의 것이라 알겠는가. 그래서 내가 이 묘지를 적는다. 슬프다』. 또 만휴가 지은 이우당 기문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남쪽 마을(몽천)에 주씨 늙은이 개신(介臣)이 이우당이라는 서당을 짓고 날로 시를 읊고 술을 마시며 놀고, 스스로 즐기면서 가로되“매화와 대는 내 친구다”하거늘.....옹은 대개 하늘을 즐겨하고 도리를 체득한 자인데 내가 옹의 뜻한 바를 알겠다. 집 위에 푸른 산은 어진 자가 즐기는 바이고, 문 앞에 흐르는 냇물은 지혜로운 자가 즐기는 바인데, 옹이 당(堂)의 오른쪽 뜰에 풀과 나무와 꽃들이 즐비하건만 돌보지 않고 오직 매화와 대만을 바라보며 친구라 하니, 심하다. 옹의 좋아함이여!......(중략) 옹이 가로되“착하다. 자네가 먼저 내마음을 알았구나』. 이들의 교유가 어떠했는지 우리가 무슨 말을 더하겠는가.
그리고 우암 윤시형(憂庵 尹時衡, 1602-1663)이다. 우암과 만휴의 관계가 어떠했는지 역시 만휴가 지은 우암의 묘지명에 잘 나온다.『우암은 나보다 한 살 적고, 주형(朱炯)은 나와 동갑으로 그들은 내외종(內外從)간으로서 나와 더불어 막역한 교우가 되었다. 내 죄인 된 몸으로 객지에 우거해서 山水間에 방임하여 새와 짐승들의 무리들과 짝지어 놀며, 발자취 없는 즐거움 속에 나날을 보내고 있는 터라, 그들과 함께 놀 처지가 되랴마는 서로 뜻이 같고, 같은 연배이다 보니 때로는 그윽한 간곡(澗谷 : 산골짜기)을 찾고 높은 산에 올라가 山海를 바라보며 구름 나부랭이를 먹고 이슬을 마시며, 구름과 달을 읊어 희롱하고 옛 책에 침잠해서 선불(仙佛)에 출입하기도 하였다.
또 때로는 도깨비처럼 뛰며 즐거이 근심 걱정을 잊고 놀기를 20여년이더니 슬프다. 炯이 먼저 가고 그대들의 부친들이 따라가더니 내가 각각 묘지를 짓게 되었다. 세월은 흘러 이제는 천리(이 때는 만휴가 울진 생활을 마치고 서울에 있었다) 밖에 있어 피차 생사조차 알지 못하였는데, 옛 일을 생각하며 홀연히 감회가 일 때마다 매양 눈물이 한 없이 흘렀는데, 또 그대마저 가다니 그게 무슨 말인가. 이생에 날 알아주는 이 그대 밖에 없고, 그대 또한 문아(文雅 : 詩文을 짓고 읊는 풍류의 道, 풍치가 있고 아담함)가 있었고, 정력이 나보다 나아서 내가 죽으면 응당 그대가 내 묘지를 적어 줄줄 알았는데 슬프다. 우암의 묘지를 또 내게 부탁하다니? 내 차마 이를 할 수 없노라......(중략) 슬프다. 풍채 좋고 큼직한 마음자리며 형형(炯炯 : 반짝반짝 빛나면서 밝은 모양)한 눈빛과 미간에 서린 맑은 뜻과 빛나는 재기가 있던 그대를 이제 다시 볼 수 없게 되었구나......(중략) 누금동 건지원(乾之原)은 그대의 유택(幽宅 : 무덤)이니 대개 그 잿마루 밑과 푸른 바닷가에 슬픈 구름 일고, 긴 솔 큰 나무에 쓸쓸한 바람이 부니 참창(慘愴 : 몹시 슬퍼함)하고 소슬할 때 그대의 혼은 어디에 붙어 의지 할꼬?.....(중략) 훗날 뒷사람으로 하여금 우암이 왔다 간 줄 알게 하리라』.
이들의 묘지명을 대하니 내가 죽었을 때 누가 내 묘지명을 짓는다면 그 묘지명에 나를 뭐라 할 지 그저 부끄러울 뿐이다. 우리가 어떻게 살다 가야 할 지 웅변으로 보여주는 만남들이다. 우암은 아들인 삼족당 여룡(三足堂 如龍)과 고산서원 사적기를 쓴 그의 증손 황림 윤사진과 더불어 임금으로부터 세 차례나 비지(批旨 : 상소에 대하여 임금이 내리는 하답)를 받아 지금 몽천 삼조어비각에 모시고 있다. 우암의 아버지 매오 몽열(梅塢 夢說)은 이우당과 더불어 몽천 서당을 창건하여 지역 교육에 많은 기여를 한다. 그는 또 석계 이시명 김시온 등 퇴계학파의 남인계 인사들과도 절친하게 지내는 등 교유의 폭이 넓었다.
『깨끗하기 구슬처럼 아리따운 그대가 어쩌면 이렇게도 허무하게 죽단 말가
베옷 입은 시골 선비 임금을 꾸짖어 벼슬하는 신하들을 부끄럽게 하였구나
기이한 재주 있어 써먹지도 못하였고 백성 살릴 큰 포부 시험하지 못했구나
천추에 빛날 효렴(孝廉 : 효성스러움과 청렴함) 길이 썩지 아니하여 어진 사관 기록하여 만세에 전하리라 (皎皎玉山姿 那知子止斯 布衣干聖主 肉食愧明時 奇氣終難試 風雲不可期 千秋孝廉傳 良史?無遺)』. 그가 죽고 난뒤 만휴가 지은 우암 만사(輓詞 : 죽은 사람을 위하여 지은 글, 상여 글)이다. 우암을 위한 만사는 만휴의 애제자인 한재와 우와의 詩도 있지만 내용이 비슷하여 만휴의 글만 소개한다.
그리고 또 한 사람 임천 남세영(臨川 南世英)이다.
호(號)는 임천일인(臨川逸人) 또는 죽림노인(竹林老人)이다. 삼종숙(三從叔) 격암문(格菴門)에서 수업하여 공무에 나가지 않고 은거하여 바른 길로 가니 만휴가 그를 공경하고 중히 여겨 노백(老栢)의 가난한 자세와 추강(秋江)의 맑은 모습이라 칭찬하였다. 그리고 어버이의 종기 병을 고치기 위해 종기를 빨고 대변 맛을 보며 안팎의 어려운 일을 다 함으로써 효도가 지극하여 부모의 상(喪)을 당하여는 묘 옆에서 여묘(廬墓 : 상제가 무덤 근처에 여막을 짓고 살면서 무덤을 지키는 일)하였다. 또 임천서재(臨川書齋)를 성류굴 아래에 건립하여 자제와 문생을 강습하니 강파(江坡) 권상임(權尙任)이 재기(齋記)를 짓고 노송(老松) 윤동헌(尹東憲)이 기문(記文)을 지었다. 후손이 그가 살던 근남면 오로촌(五老村)에 사당을 세웠으나 무진년 고종(高宗) 때에 나라의 명에 의하여 철폐되었다. 임천은 만휴와 주천대에서 자주 교유하였으며, 스승 격암의 가르침을 몸소 실천하였다.‘노백의 가난한 자세와 추강의 맑은 모습’이라 칭찬을 받을 사람이 지금 그 얼마나 될까 싶다.
그의 며느리인 곽씨(郭氏)는 시부모에게 극진히 효도하고 공양을 하였는데 이런 일화가 있다.
시아버지 임천공(臨川公)이 늙어서 이가 빠져 음식을 먹지 못하므로 곽씨가(나이 65세가 되어도 젖이 나왔다고 한다) 매일 아침 계단 아래에서 절하고 곧 마루에 가까이 가서 시아버지에게 젖을 대접하여 수명을 연장케 하니 향인들이 그의 효행을 칭찬하였다고 한다. 며느리도 효부로 손색이 없지만 모두 임천의 높은 인품을 높이 존경해서 나온 것이 아닌가 싶다. 만휴가 궁향 벽지에서 우거한 것도 기구한 것이지만 그가 주천대 옆에서 오랜 기간 정붙이고 살 수 있었던 것은 어찌 아름다운 山川 뿐이었을까. 이 땅에 마음을 주고받을 수 있는 우암, 이우당, 임천등과 같은 知己에다 한재나 우와 같은 사랑스런 제자가 있어 가능했을 것이다.
그 외 만휴의 몇 가지 행적들
만휴가 36세 되던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서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들어가서 포위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이현영과 협력하여 승군 등 300여명을 모집 인솔하고 달려가던 중, 원주에 이르러 강화가 체결되었다는 소식을 접하자 의병을 풀고 울진으로 돌아왔다.
1649년에 모친의 상을 당하여 광주 고산으로 장사지내고 거려(居廬 : 상제가 무덤 가까이 지은 누추한 초막에서 머무는 일로 廬墓와 같은 말)하고, 부친이 상을 당했을 때는 어려서(7세) 상주질을 잘 못하였다고 하여 심상(心喪) 3년을 더 지내니 묘 아래서 도합 6년을 소식(素食)하고 지냈다. 이러한 일화는 당연히 그의 제자와 주변사람들에게 그가 어떤 신념을 갖고 어떻게 행동으로 옮긴 사람인지 잘 보여주고도 남는다. 그는 1631년 지금의 울진군지와 같은 성격의 선사구지(仙?舊誌)의 발문을 쓰는데 지금 이 선사구지는 전하지 않고 발문만 남아있다. 그는 또 일종의 상포계(喪布契)라 할 수 있는 수친계(壽親契)를 주도적으로 만들었다.
엄격한 규약과 믿음을 바탕으로 상부상조하는 정신은 이 지방 상포계의 효시란 면에서 그 끼친 영향은 자못 크다. 만휴가 울진을 떠난 뒤 제자 우와가 지은‘주천대 추모만휴사(酒泉臺追慕萬休先師)’란 스승을 추모하는 시 한 수다.
『선생을 이별한지 어언 몇 해 되었는고. 지난 날 생각하니 한마당 꿈일레라. 그 옛날 모시던 스승님 자취 간 곳 없어도, 그리는 마음 갈수록 새로워라.
임 떠난 거처를 돌아보니 그리움 한량없어, 그 모습 그 거동 꿈결에 보이는데,
개울가에 찬 매화 바위 아래 저 대나무가, 청고한 스승의 의표를 그대로 닮았구나.
(一違?丈幾經春 二絶相逢隔若晨 杖屢遊從今不在 羹墻追慕久猶新 顧瞻園宅傷心劇 想像儀形人夢頻 溪上寒梅岩下竹 淸表玉??傳神)』
현재의 주천대 전경
마치며
지금 주천대에 가면 안내 간판이라고 할 수 있는 비석 4개가 있다. 그런데 모두 현대인들이 알기 어려운 국한문으로 되어 있으며 비석과 새긴 글씨 색이 비슷해 읽기가 매우 불편하다. 물론 비석은 세울 당시의 역사적 의미가 있으므로 비석을 흠잡을 생각은 없다. 다만 아주 관심 있는 사람이 아니면 억지로 읽을 것 같지가 않아, 이곳이 무엇인지 잘 모를 수 있다. 현대인들도 읽기 쉬운 작은 안내 간판이라도 하루 속히 세웠으면 한다.
늘 하는 말이지만 제발 경관을 막거나 눈에 거슬리지 않게 심사숙고해서 세우길 희망한다.
주천대에 올랐던 청연들을 만나 보았는데, 그 중심에 만휴가 있었다. 주천대에서의 만남이 방법은 다르더라도 인간을 마음으로 만났던 청연이 오늘날 우리들이 하고 있는 만남은 어떠한지 돌아볼 시간이라도 되었으면 좋겠다. 아울러 주천대는 교육의 성지로 가꾸어도 손색 없는 곳이다. 없는 것도 새로 만들거나 비슷한 것만 있으면 갖은 핑계나 작은 실오라기 같은 끈을 부여잡고는 문화 상품화 하고 있다. 원조가 우리 동네니 아니니 하면서 또는 우리동네 출생이니 아니니 하면서 싸우는 작금이다. 이에 비하면 주천대는 너무도 명백한 사건에다 아름다운 경관까지 갖춘 곳이다.
우리고장의 격조 높은 역사가 면면히 이어졌던 곳이다. 오늘날 교육의 한 장소로 가꾸어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 활용하면 효과도 크지 않을까 싶다. 어찌 보면 주천대 청연들로 인해 우리 고장은 일대 교육의 질과 격이 높아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고장으로는 참으로 귀한 인연이 아닐 수 없다. 그들은 그렇게 맑은 인연으로 교유했는데, 지금 우리는 스승이 없고 제자가 없다고 한다. 막연히 한 시대에 그런 일이 있었다고 치부하기에는 너무나 소중한 우리의 자산이다. 주천대에서 시를 짓고 청류(淸流)를 굽어보던 그들이 그리운 시대다.
※ 1988년 ‘울진군 향토사 연구회’에서 발간한『향토사 연구』가 이번 글을 있게 한 모태다. 물론 오·탈자와 사용하지 않는 고어들이 많았지만 숨어 있던 원문을 찾아 세상에 빛을 보게한 성과는 높이 쳐야 할 줄로 안다. 일차 번역자료로 귀중한 도움이 되었다. 그들의 편집후기에서 “오늘날 한글의 시대인지라 과거의 난삽한 한문 속에 갇혀 있는 역사적 사료들이 날로 소멸되어 가고 있어......(중략) 우리의 후손들이 울진의 역사를 알고 싶어도 알 수 없게 될 것이니......(후략)”라고 밝히고 있듯이 나 또한 고전과 현대를 이어보는 작업에 보람을 느낀다. 지금은 고인이 되신 울진 향토사 연구회의 윤병한 회장님을 비롯한 회원님들께 머리 숙여 감사의 말씀을 전한다.
참고 문헌
▲『蔚珍郡誌』, 울진군, 2001. 2
▲『萬休堂集』, 豊川任氏牧使公派宗中, 1995
▲『鄕土史硏究 第 1 輯』, 蔚珍郡鄕土史硏究會, 198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