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영사(佛影寺)
-

시절인연(時節因緣)
쌀 한 되를 하루 숙박비로 주었던 초등학교 시절에 불영사로 수학여행을 갔다. 이름만 들었던 절을 그렇게 처음 만났다. 당시 6학년 담임선생님은“불영사에 가면 절대 과일에 손대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하고 또 했다. 먹을 것도 많지 않았고, 특히 과일이 귀했던 바닷가 동네에 살고 있는 아이들이 염려스러웠던 건 당연했다.
지금은 일주문에서 한참을 걸어야 절이 보이지만 당시는 절 뒤쪽에 있던 구름다리인 이름하여‘출렁다리’를 건너서 다녔다. 우리는 들뜬 마음으로 이미 손님이 타고 있는 버스에 한 반 모두 오르자 금방 만원버스가 되었다. 굵은 자갈이 깔린 비포장 길이었지만, 차를 탄다는 것 자체가 신났다.
그렇게 불영사계곡을 굽이굽이 돌아 구름다리에 도착했다. 출렁거리는 다리위에서 여학생들의 비명에도 아랑곳 않고 발을 굴리는 장난을 치면서 건너자 작은 오솔길이 나타났다.
금강송이 우람하게 붉은 허벅지 살을 드러내어 강건미를 서로 자랑하고, 금방이라도 온 몸에 소나무향이 밸 것 같은 오솔길을 조금 걸어가자 대웅전이 보였다. 소나무 숲 사이로 알록달록한 기와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충격이었다. 단청이 화려하게 되어있는 큰 건물을 난생 처음 보는 순간이었다. 아! 저런 색칠을 한 건물도 있구나. 저렇게 집을 갖가지 색으로 칠해 꾸밀 수 있다는 것에 놀랐다. 흑백의 시대에서 칼라의 시대로 온 느낌 그것이었다. 아마 불국사나 기타 사찰 건물의 화보를 흑백그림으로만 봐 왔던 이유도 있었고, 칼라 사진기가 귀하기도 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 때의 감흥은 아직도 뇌리 속에 강하게 남아 있다. 우리는 그날 대웅보전 앞에 있는 설법당에서 숙박을 하였고, 밤늦도록 선생님으로부터 무서운 귀신이야기며 저아래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면 아침에 쿵하고 소리가 난다는 등 분위기나 배경 완벽한 산사(山寺)에서 실감나게 들었다.
관광(觀光)
우리가 다른 지방이나 다른 나라에 가서 그곳의 풍경, 풍습, 문물 따위를 구경하는 것을 관광(觀光)이라고 하는데, 관광이란 말은 말 그대로‘빛을 본다’는 뜻이다.‘빛을 본다’생각할수록 의미심장한 말이다.
사찰에서 그 빛을 보았던 두 사람의 글을 여기 싣는다.
오래된 사찰 건축물에서 사무치는 고마움의 빛을 보았던 최순우와 어둠속에서 꿈틀거리고 있는 미세한 관능의 빛을 보았던 미시마 유키오. 이들과 나를 돌아보면서 하나의 대상물을 보고 느끼는 감정은 천차만별이구나 생각한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다. 사랑하는 만큼 느낀다고 했다.
우리가 배우고 경험하는 이유는 조금 더 대상을 정확하게 아는 것, 절대적인 적확(的確)은 아닐지라도 본인 능력만큼 정확하게 알고 나아가 내 것이 생기는 것 그것을 위해 우리는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우리가 먼 길을 떠나는 것은 고향의 아름다움을 전하기 위함”이라고도 했다. 『소백산 기슭 부석사의 한낮, 스님도 마을 사람도 인기척도 끊어진 마당에는 오색 낙엽이 그림처럼 깔려 초겨울 안개비에 촉촉히 젖고 있다. 무량수전, 안양루, 조사당, 응향각들이 마치 그리움에 지친 듯 해쓱한 얼굴로 나를 반기고, 호젓하고도 스산스러운 희한한 아름다움은 말로 표현하기가 어렵다. 나는 무량수전 배흘림 기둥에 기대서서 사무치는 고마움으로 이 아름다움의 뜻을 몇번이고 자문자답했다......(중략)......기둥의 높이와 굵기, 사뿐히 고개를 든 지붕 추녀의 곡선과 그 기둥이 주는 조화, 간결하면서도 역학적이며 기능에 충실한 주심포의 아름다움, 이것은 꼭 갖출 것만을 갖춘 필요미이며, 문창살 하나 문지방 하나에도 비례의 상쾌함이 이를 데가 없다. 눈길이 가는 데까지 그림보다 더 곱게 겹쳐진 능선들이 모두 이 무량수전을 향해 마련된 듯 싶어진다.』
국립 중앙 박물관장을 지낸 최순우의‘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의 한 부분인데,“호젓하고도 스산스러운 희한한 아름다움은 말로 표현하기 어렵고, 사무치는 고마움으로 몇 번이고 자문자답했다.”나도 몇 번이고 이 구절을 자문자답해 보았다. 읽을 수록 그가 부러워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추억의 힘으로, 미의 세부는 하나하나 어둠 속에서 신비한 시간의 빛 아래에, 금각은 점차로 명확히 눈에 보이게 되었다. 이토록 완전히 섬세한 모습으로, 금각이 그 구석구석까지 빛을 발하며 내 눈앞에 나타난 적은 없었다. 나는 맹인이 시력을 되찾은 느낌이었다. 스스로 발하는 빛으로 투명하게 된 금각은, 외부에서도 조음동(금각사에 있는 한 건물)의 천장에 그려진 천인주악(天人奏樂)이나 구경정의 벽에 남은 낡은 금박을 생생히 보여 주었다. 금각의 정교한 외부는 그 내부와 뒤섞였다. 내 눈은 그 구조나 주제의 명료한 윤곽을, 주제를 구체화시켜 가는 세부의 정성스러운 반복이나 장식을, 대비나 대칭의 효과를 한 눈에 볼 수 있었다.
법수원과 조음동의 똑같은 넓이의 두 층은 미묘한 차이를 보이면서도 하나의 커다란 처마 그늘에 보호되어, 소위 한 쌍의 아주 비슷한 꿈, 한 쌍의 아주 비슷한 쾌락의 기념처럼 겹쳐져 있었다. 그 하나만으로는 망각되어 버릴 우려가 있었기에, 위 아래에서 서로 다정하게 확인하며, 그로 인하여 꿈은 현실이 되고, 쾌락은 건축이 된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구경정의 급격히 가늘어지는 형태를 3층에 올려놓음으로 해서, 일단 확인되었던 현실은 무너지고, 그 어둡고 찬란하던 시대의 고매한 철학으로 통괄되어, 그것에 복종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널판 조각으로 이은 지붕 꼭대기의 높은 곳에서, 금동의 봉황이 무명(無明)의 긴 밤에 접하고 있었다......(중략)......경호지(금각사에 있는 연못)에 아침 저녁으로 맴도는 안개를 볼 때마다, 나는 그곳이야말로 금각을 세운 어마어마한 관능적인 힘의 본거지라는 생각이 들었다......(중략)......금각의 아름다움은 중단되는 일이 없었다! 그 미는 항상 어딘가에서 울려퍼지고 있었다. 귓속이 울리는 고질을 지닌 사람처럼, 어디에서나 나는 금각의 미가 울려퍼지는 소리를 들었고, 그 소리에 익숙하여졌다. 소리로 비유한다면, 이 건축은 5세기 반에 걸쳐서 계속 울려댄 작은 금방울, 또는 작은 가야금과도 같은 것이리라』미시마 유키오(三島由紀夫)가 1956년에 발표하여 요미우리문학상을 수상한 작품‘금각사(金閣寺)’란 소설에 나오는 대목이다. 금각이라는 건축구조물을 둘러싸고 있는 아름다움을 일본인 특유의 섬세한 감각으로 표현해 내고 있는 대목이다. 어둠에 묻힌 사찰을 관능의 힘이라고 역설하고 있는 미시마.
그들을 뒤로하고 우리는 불영사로 가보자. 비록 높디 높은 선문(禪門)의 공안(公案)이지만,“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祖師)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며 나한을 만나면 나한을 죽이고, 부모를 만나면 부모를 죽이고, 친척권속을 만나면 친척권속을 죽여야만 비로소 해탈하여 어떠한 경계에서도 얽매이지 않고 인혹(人惑)과 물혹(物惑)을 꿰뚫어서 자유자재하게 된다”라고 하지 않았는가.불영사계곡
불영사를 가려면 먼저 아름다운 불영계곡을 지나게 된다. 불영사를 더욱 돋보이게 하는 것은 불영계곡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불영사는 사실 너무나 잘 알려진 불영계곡에 있는 산지가람이다.
울진에서 영주로 가는 36번 국도 변에 위치한 이 불영사계곡(문화재로 말할 때는 불영사 계곡, 군립공원으로 말할 때는 불영계곡이라 부른다)은 명승 제6호로 지정되어 있다. 80년대 초까지만 하더라도 울진과 현동을 잇는 국도는 비포장이었다. 광천계곡(光川溪谷)을 끼고 도는 낭떠러지 길은 아찔한 아름다움을 선사하기에 충분하다. 이 계곡은 울진군 서면 하원리로부터 근남면 행곡리까지 불영사를 중심으로 장장 15㎞나 되는 천연의 비경을 간직하고 있는 구간이다. 심한 감입곡류(嵌入曲流)를 형성하며 계곡 아래부분과 양쪽의 절벽에는 흰빛의 화강암이 드러나 있어 장관을 이루고 있다. 계곡은 울창한 수림(樹林)과 잘 어우러져 있으며, 창옥벽, 의상대(義湘臺), 조계등, 부처바위, 거북돌, 소라산 등 30여 개소의 명소가 있다.특히 이곳은 금강송이라 부르는 보배로운 울진소나무 자생지로도 유명하다. 붉은 나이테로 바람도 샐틈없이 촘촘하게 속살을 채우며 곧게 자라는 금강송.
미인송이나 적송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하늘을 향해 쭈욱쭈욱 뻗은 소나무들을 보노라면 외경심(畏敬心)마저 든다. 연노랑빛 새순이 계곡 산자락에 붙기 시작하면서 계곡의 본격적인 봄은 시작된다. 푸른 소나무 사이에 생강꽃이며 진달래 그리고 군데 군데 화사하게 핀 산벚마저 합세하면 요한스트라우스의‘봄의 소리 왈츠’보다 더 아름다운 선율이 계곡 가득 넘친다. 오뉴월 신록은 때마침 시원하게 흐르는 한 줄기 바람에 보는 이의 가슴마저 파랗게 물들인다.푸른 산기운 안개인 람취(嵐翠)가 계곡에 조용히 번지기도 한다. 풀벌레 소리로 요란하던 계곡도 피서객들이 떠나고 찬바람이 아침 저녁으로 불기 시작하면 하나 둘 잎사귀 마다 마지막 분단장을 한다. 이제 계곡은 한 바탕 붉고 노란 색의 향연을 펼치고 잎들은 땅으로 떨어져, 거름이 되거나 또는 흐르는 광천에 실려 왕피천을 만나고 동해바다에까지 가기도 한다.
어느새 겨울이 차분하게 계곡에 내려앉지만 여전히 푸른 소나무가 그리고 나목(裸木)이 계곡을 지키고 있는데, 눈이 내린다. 아! 계곡의 장엄이여. 그렇게 다시 또 봄을 기다리는 불영계곡. 그 옛날 의상대사시절 이전부터......
그럼 이제 본격적으로 불영사 경내로 들어가보자.불영사는 언제부터?

경북 울진군 서면 하원리 120번지에 위치한 불영사는 천축산(天竺山)의 한 자락과 광천(光川)이 서로 휘감아 도는 태극모양의 형세를 이룬다고 해서 산태극(山太極) 수태극(水太極)이라고 하는 중심에 위치한다. 불영사가 현재의 모습을 갖추기까지는 오랜 역사를 거친다.“의상대사가 인도 천축산 모양을 닮은 이 곳에 도착하니 연못에 용(아홉 마리라고 하는 사람도 있음)이 있었는데, 주문으로 용을 쫓아내고 그 자리에 절을 지은 것이 불영사다”
또는“서쪽 산에 있는 부처바위가 연못에 비추니(佛影) 불영사다.”이것은 울진사람이면 누구나 한 번 쯤 들어 흔히 알고 있는 절의 창건 이야기다. 나 또한 이 이상을 알지 못했다. 그러나 불영사 관련 자료들을 살펴보고서야 어느 정도 정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문화재청에서 발간한‘불영사실측조사보고서’를 중심으로 군지 등 관련 문헌들을 검토해 보았다. 그런데 대부분 같은 내용의 중복이 많았으며, 앞뒤 정황상 맞지 않거나 오기 등 문제점이 여러군데 보였다. 불영사 창건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1379년(공민왕 19)에 한림학사 유백유(柳伯儒)가 썼다는‘천축산불영사기’에 나온다. 이것은 동명 황중윤(東溟 黃中允, 1557-1648)이 1611년에 쓴‘천축산불영사기’의 첫머리에 나오는데 이것도 후대에 다시 쓰여진 것이 전해온다.
그러나 불영사의 창건에 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의 한 토막임에는 분명하다. 황동명은 불영사에서 당시 주지였던 성원법사로부터 유백유의 천축산불영사기와 1408년에 이문명(李文命)이 쓴‘환생전기(還生殿記)’등을 보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황동명은 울진 사동의 유명한 황해월(黃海月)의 아들이다. 여기 천축산불영사기 전문을 소개한다.
『신라 옛 비석에 의하면 당나라 영휘 2년(651)에 의상법사가 동경(경주)에서 해변을 따라 단하동(丹霞洞)에 들어와 해운봉에 올라 북쪽을 바라보고 감탄하기를 서역 천축산을 바다를 건너 옮겨놓은 듯 하며, 또한 시냇물 위에는 다섯 부처님의 영상이 비취니 더욱 기이하고, 하류로 내려와 금탑봉에 오른즉 그 아래에 독룡이 있는 못이 있는지라 법사가 용에게 설법하여 사찰 지을 땅을 베풀기를 청하였으나 용이 따르지 아니하므로 법사가 신통력 있는 주술을 강하게 부리자, 용이 갑자기 분을 발하여 산에 구멍을 내고 돌을 깨뜨리며 사라졌다. 법사는 즉시 사찰 건립을 위해 못을 메우고, 동편에 청련전(靑蓮殿) 3칸과 무영탑 하나를 건립하였으며 땅을 비보하는 뜻으로 천축산 불영사라 편액하였다. 법사가 의봉(儀鳳, 676-678)초에 서산에 들어가 부석사, 각화사 등의 사찰을 창건하고 15년간 천하를 돌다가 어느날 불영사로 돌아오는데 선사촌(울진)에 이르자 한 노인이 우리 부처님이 돌아온다고 기뻐하였다. 이때부터 마을 사람들이 절이 백암산 자락에 있으므로 백암산 불귀사라 속칭하는 것이 바로 이 절이라. 동편 삼각봉 아래 좌망대가 있고, 오룡대 남편에 향로봉, 청라봉, 종암봉이 있고, 서편에는 부용성 학소대, 북에는 금탑봉, 의상대, 원효굴, 용혈사 등이 모두 승경이라 법사가 9년을 머물렀으며, 원효법사로 천축산 불영사이다. 법사는 처음으로 천축의 옛이름으로 명칭하였으나 백암산 불귀사(佛歸寺)라 한 것은 후인이 법사를 추모하여 부르는 새로운 이름이다. 고로 산과 절이 함께 두가지 이름이 있으니 지금 사람 대부분이 옛이름을 버리고 새 이름을 따르는 것은 성스러운 뜻을 거슬림이 심한 것이다. 화엄론에서는 의상법사가 과거 금산 보개여래(寶盖如來)의 후신이라 하였고, 원효법사는 현재 화엄의 대권보살의 지위에 있다. 따라서 이 두 성인이 거처하였은즉, 승려들에게 이름 그대로 귀하고 중하므로 지금의 사람들은 불가불 살펴보아야 하겠다.』불영사의 창건에 관한 시대나 이야기가 이 기록을 모태로 하고 있음은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다. 그래서 원문해석의 전문을 소개했다.
여기서 유백유가 신라 고비(古碑)에 의하고 있다고 했는데, 그 고비는 황동명과 그 외의 기록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불영사에 관한 기록은 이것을 바탕으로 윤색되고 중복되어 소개되고 있다. 우리나라 사찰의 대부분 창건은 다분히 설화적인 요소를 많이 포함하고 있는데 불영사 역시 예외는 아니다. 이 기록에서 의상대사가 651년에 창건했다고 되어 있는데, 651년은 신라 진덕여왕 5년 의상의 나이 26세가 되는 해로, 644년(선덕여왕 13)에 황복사에서 승려가 된 후 7년이다. 의상은 661년 36세가 되어 당나라로 유학을 갔다가 10년 뒤인 671년에 돌아온다. 그가 당나라 유학을 가기도 전에 울진에 와서 절을 지었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무리가 있다. 더욱이 부석사를 당나라 유학 후인 676년에 세운다. 불영사는 그보다 25년이나 먼저 창건한 셈이 된다. 전국적으로 의상이 창건한 사찰은 수도 없이 많지만 대표적인 이른바 화엄십찰(華嚴十刹)인 부석사(浮石寺), 미리사(美里寺), 화엄사(華嚴寺), 해인사(海印寺), 보원사(普願寺), 갑사(甲寺), 화산사(華山寺), 범어사(梵魚寺), 옥천사(玉泉寺), 국신사(國神寺), 삼막사(三幕寺), 초암사(草庵寺), 홍련암(紅蓮庵) 그리고 울진읍 대흥리에 있었던 대흥사(大興寺) 등이다. 이 모두를 그가 창건했다는 것은 사실 무리가 있지만, 의상과 직·간접적인 관계가 있었을 것은 분명하다. 그런데 기록에서처럼 불영사는 백암산 불귀사라고도 부른 것 같다. 즉‘임만휴당문집’에서도 불귀단청문(佛歸丹靑文)이란 글이 있으며‘동국여지승람’,‘동국여지지’에서도 불귀사란 이름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지금은 불귀사란 말은 쓰이지 않고 불영사로만 쓰고 있다.
또 위 기록에 의하면 청련전(靑蓮殿)과 무영탑 하나로 절이 출발한다. 통일신라시대에는 금당 앞에 단탑이 동서의 쌍탑으로 바뀌어 쌍탑 단금당식 가람배치가 9세기 까지 크게 유행하고, 고려조에 오면 평지가람이든 산지가람이든 모두 단탑식 가람배치를 따른다고 한다.
울진군청 심현용 학예연구사는 불영사 삼층석탑의 제작시기를 봉로대(奉爐臺, 배례석이라고도 한다)와 같은 고려초로 보고, 대웅보전 축대 아래 있는 석구(石龜)는 조선 초기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했다. 따라서 불영사 창건은 무영탑 제작시기인 고려초가 아닌가 하는 조심스런 추측도 한다. 그러나 유백유가 거론한 신라고비가 어디에선가 나올 수도 있기 때문에 성급하게 창건연대를 단정 짓는 것 또한 바람직하지 않을 것 같다.
불영사 창건을 지나 오늘에
그렇게 창건된 절은 오랜 세월 풍우로 쇠락되기도 하고, 화재와 임진왜란 등의 참화로 새로 짓거나 여러차례 중건을 거듭하며 오늘에 이른다. 고려말에 유백유가 썼다는 천축산불영사기는 가장 오래된 기록으로 의미가 크지만 의상 창건 이후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다. 창건 이후 조선초기까지 약 800여 년간의 불영사에 대한 기록은 찾을 수 없어 당시의 불영사 모습은 알 길이 없다. 그 이후의 기록은 몇 군데 문헌에서 보이는데 특히 불영사 입구에 있는 불영사 사적비는 창건에서 조선초기 그리고 1900년 초까지의 불영사에 관해 언급하고 있는 금석유물이다.이 사적비는 1933년에 세운 것으로 당시 불영사 주지였던 박기종 스님이 오대산 상원사에 있던 한암(漢岩) 대종사에게 부탁해 글을 짓고 글씨는 창농 전병전(蒼? 田炳典)이 썼다. 이 사적비에서 천축산불영사기의 창건내용이 그대로 실려 있으며, 대표적 사건은 이러하다.『1396년(태조 5)에 화재를 입어 1397년 소운(小雲)법사가 재건하였고, 백극재와 환생전 이야기(나중에 밝히겠지만 환생전 연도를 잘못 표기하고 있다), 1587년(선조 11)에 성원(性元)법사가 영산전(지금의 응진전) 및 서전(西殿)을 세우고 남암(南庵)을 동전(東殿)부근에 창건하였다. 임진왜란에 절의 건물이 모두 잿더미로 변하고, 오직 서전과 영산전만 남은 것을 성원법사가 다시 법당과 동서의 선당을 세웠다. 1680년(숙종 6) 양성(養性)법사가 선당을 개건하고, 이듬해 명부전을 창건하였다. 인현왕후와의 인연으로 불영사 사방 10리 정도의 산을 하사받았다. 1720년(숙종 46)에 화재가 있었는데 영조 원년(1725년)에 천옥(天玉)법사가 중창하였다.』
또 17-18세기 불영사 불사에 관한 기록이 비교적 자세하게 소개된 문헌이 천축산불영사시창기(天竺山佛影寺始創記)이다. 이 기문에 있는 중요 불사에 대해 소개한다.『1602년 9월에 화주 인섬(印暹)이 대웅전을 창건하고, 1614년에는 승당을 지었으며, 1616년에 절에 필요한 잡물(雜物)을 제작하였는데 향반궤(香盤?)와 목어(木魚) 등 9가지에 달했으며, 1629년에는 영산회(靈山會) 금상(金像) 3위, 대비(大悲) 금상 1위, 하단탱 1폭, 미타탱 1폭, 사자병풍(使者屛風) 1점, 달마탱 1폭, 영산회탱 1폭 등을 만들었다. 1636년에는 대웅전 단청공사를 하였다. 그런데 1628년 무영탑을 중수하였다. 1720년의 실화로 인해 향로전, 좌우승당과 상실, 환생전 등이 모두 불에 타는데 영산전(지금의 응진전)만 화를 면한다.
1725년에 대웅전 중창공사가 마무리 되었다. 1750년에는 대웅전 보수공사가 있었으며, 1770년에는 대웅전 불상을 개금하였다는 사실을 적고 있다. 1792년에는 청풍당을 중건하였다.』 그리고 근대에 들어 설운장로(雪耘長老)가 1899년에 불영사에 들어와서 논밭을 사들이고 재정을 마련하여 1905년 대웅전, 서요사(西寮舍), 산신각, 범종루를 중수하고 1923년 법당과 요사를 중수하고 1924년에는 칠성각을 창건하였다. 최근에도 대대적인 불사가 있었다. 1977년에는 구룡교와 불영교를 가설했으며 다음해에 일본인의 시주로 일제 때 공출되어 없어진 범종을 새로 만들었다.
1984년에 응진전의 해체 보수공사가 시행되었고, 1991년 현 주지인 일운(一耘)스님의 부임과 함께 또 한 번 대규모 불사(청운당, 선원, 무위당, 청풍당의 건립)를 하여 지금의 불영사 모습을 갖추게 된다.
이상에서 불영사는 651년 창건에서 임란 전까지 약 1천여 년간은 그 전모를 파악하기가 자료의 빈약으로 사실상 어렵다. 그 후 임란 때의 소실과 뒤이은 17-18세기에 걸친 중·창건과 보수를 하고, 근대를 거쳐 최근의 대대적인 불사로 지금과 같은 가람이 형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불영사는 원래 월정사 소속이었으나 지금은 대한불교조계종 제11교구 본사 불국사의 말사로 소속되어 있으며, 1968년 이후부터는 비구니 수행도량이 되었다.
<다음호에 계속 이어집니다><참고문헌>
▲『佛影寺 大雄寶殿 實測調査報告書』, 文化財廳, 2000. 8
▲ 南錫和『蔚珍郡誌』, 1939
▲『萬休堂集』, 豊川任氏牧使公派宗中, 1995
▲『鄕土史硏究 第 1 輯』, 蔚珍郡鄕土史硏究會, 1988
▲ 심현용『石造物로 본 울진지역 佛敎文化』博物館誌 11호, 강원대학교중앙박물관, 2004<바로 잡습니다>
1월호 74p 「공은 처음 설매(울진읍 신림리의 한 마을)에서 살다가」에서 설매는 설두(雪竇)의 오인으로 설두는‘눈 구멍’이며 이것의 발음이 변해‘누금’이 된 것이다. 신림이 아니고 근남면 수곡리의‘누금동’이 정확한 지명이다. 행곡 4리의 남도원씨가 이의를 제기해 바로 잡는다. 지적해준 남도원씨에게 감사드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