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녕김씨 세거비 제막식 개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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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11월 1일 왕피리 거리고 마을 행목쉼터에서 집안문중 및 내빈 5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김녕김씨 세거비 제막식을 성대히 개최하였다.
김경엽 김녕김씨 왕피리 문중회장의 인사, 김성준 문화원장 축사, 김택연 대종회부회장, 김진국 대구경북종친회장, 김경호 영양군종친회장, 김호기 울진군종친회장의 축사에 이어 세거비 제막 순으로 진행하였다.
제막에 앞서 거리고 마을 입구에 있는 울도산(蔚島山; 울릉도의 옛 이름) 제단에서 입향조 김도생에게 잔을 올리고 행사를 알렸다.
세거비를 세운 곳은 왕피리 거리고 마을이다. 영양군에서 발원한 왕피천(王避川)이 마을을 두르고 있으며, 신라 마의태자(麻衣太子)가 왔다가 금강산으로 갔다는 설과 또는 부족국가 시대에 안일왕安逸王과 고려 공민왕이 이곳으로 피신하였다는 설 때문에 왕피리(王避里)라고 부른다. 왕이 피신해왔을 때 식량과 무기를 보관한 창고가 있었다고 하여 마을 이름을 ‘거리고(巨里庫)’라고도 한다.
이 마을을 개척한 사람은 김도생金道生(1673년생)으로 19세에 연꽃 형국의 성스러운 땅 거리고에 터전을 잡아 덤불과 버드나무 우거진 늪지를 개간하여 자손들 굶지 않고 쌀밥 먹이고자 하였으니, 그 각고의 노력이야 말해 무엇 하겠는가. 입향조는 울릉도를 왕래하며 향나무 장사를 했는데, 울진의 바닷가에서 멀고 먼 이곳 왕피리에서 울릉도까지 어떻게 험한 뱃길을 오갔는지 불가사의할 뿐이다. 그는 마을 입구의 산을 울도鬱島(울릉도의 옛 이름)산으로 명명하고 제단을 설치하여 무사귀환을 기원한 후 험한 뱃길에 나섰다. 부정을 탈까봐 보신탕을 들지 않았기 때문에 후손들도 지금까지 금하고 있다. 타지에 살고 있는 후손들이 단오절에 오면 함께 새벽에 목욕재계하고 울도산 제단에 모여 입향조를 추모하고 마을의 안녕을 위해 잔을 올리고 있다.
김녕김씨(金寧金氏)는 신라 경순왕(敬順王) 후예다. 김시흥(金時興)이 고려시대 광록대부(光祿大夫) 평장사(平章事) 김녕군(金寧君)으로 봉해졌기 때문에 관조(貫祖)가 되었다. 분파조(分派祖)는 사육신(死六臣)으로 절개를 지킨 충의공(忠毅公) 공조판서 백촌(白村) 김문기(金文起)다. 백촌의 7세손인 석병石屛 김천보(金天寶)는 영해부사를 역임했으며, 호남에 살다가 상주로 이사했고, 아들 의일(儀日)은 다시 울진으로 이사했다. 백촌의 11세손 김도생은 왕피리 입향조다. 그 후 입향조의 7세손인 앙모재(仰慕)齋 김재희(金在禧 1832-1894, )는 증통정대부비서원승(贈通政大夫祕書院丞)이며 탁월한 효행으로 1909년 조정으로부터 정려(旌閭)를 받았다. 어려서는 어머니가 병이 있으면 젖을 빨지 않았으며, 생선이나 과일이 생길 때마다 자신이 먹지 않고 반드시 부모님께 먼저 드렸다. 10세 때 백부(伯父)에게 양자로 들어갔으나 양아버지는 일찍 세상을 떠났다. 그 후 양할머니의 상(喪), 생모의 상, 양어머니의 상, 생부의 상에 각각 3년, 모두 12년 동안 고기를 먹지 않았으며, 여막(廬幕)에서 시묘할 때 산중의 맹수도 길들여질 정도였으니, 인근의 사람들이 감탄했다. 성묘하러 갈 때는 60리 산길을 걸었으며, 눈이 내리고 바람이 사나운 날에도 제사와 기일忌日을 거르지 않았고, 제물은 반드시 부모가 생전에 좋아했던 음식으로 정성껏 올렸다. 이러한 효행은 원근에서 칭송이 자자했고 한다. 이곳은 효자로 이름난 사람을 배출하고 궁벽한 곳이지만 학문와 예도를 실천한 유서깊은 마을이다.
세거비문은 김성준 울진문화원장이 지었으며, 비명은 서예가 신상구 씨가 썼다. 현대석물 이석광 대표가 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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