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앞에서(한 경찰관의 6.25 일기)

기사입력 2010.01.25 1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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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6.25 전쟁 당시에 울진경찰서에 근무했던 정종화(1924~1987) 경찰관의 일기이다. 그러나 어찌 보면 당시의 상황이 너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어, 단순한 일기를 뛰어넘어 시간대별로 특정 사건을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있는 보고서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한 자의 명문이나 한 줄의 기록이 전해주는 가치가 얼마나 귀중한지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더구나 목숨이 경각에 달린 절박한 상황에서도 시간대별로 기록을 남긴 정신은 대단하다.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한 목숨을 부지하기도 어려운 시기에 귀한 기록을 남긴 것은 개인의 일기를 넘어 하나의 소중한 역사적 자료이다.

 

특히 구주령, 백암산, 형제봉, 외선미, 광품, 선구리, 통고산, 수비, 발리, 본신, 입암, 창수, 영양읍까지의 험준한 산악을 타고 수시로 이동하면서 생활했던 과정을 여과 없이 기록하고 있다. 개인적인 시각에서 쓴 글이지만 당시의 급박하고 처절했던 정황이 잘 묘사되어 있다. 간간이 문학의 서정적인 표현도 있어서 더욱 인간적으로 다가오는 글이다.

 

정종화씨의 6.25 일기는 국한문 혼용체로서 지금은 사어(死語)가 된 단어도 많이 보이고, 일반적인 표기법도 지금과는 사뭇 다르다. 최대한 원문을 그대로 싣고, 내용상의 무리가 없다면 현대문으로 표기했다. 원문에서 판독이 불분명한 것은 무리하게 옮기지 않았으나, 전체적인 내용을 이해하는 데는 어려움이 없다.

 

그리고 날짜에 다소 앞뒤가 맞지 않는 부분도 있는데, 아마 현장에서 메모 형태로 기록했던 것을 옮기는 과정에서 오차가 발생한 것으로 보인다. 내용상의 원문은 앞부분 일부와 뒷부분 일부가 손실되어 있다.

 

정종화씨가 6.25 전쟁 기간인 1950년 7월부터 9월까지 약 3개월 여간 기록한 일기를 본지에 연재한다.                                                [역주. 신상구 편집인]

 

·

····마음을 진정시키는 동안 벌써 부락주민들은 머리위에 무엇인지 조그마한 보자기를 이고 남부여대(男負女戴-남자는 지고, 여자는 이고)하여 남쪽으로 흘러나가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우리들은 그 피난민을 보고 무어라고 지시했으면 좋을지 몰라서 각자 의사에 맡기고 말았다.   

7월 17일 18시경 평해 지서에 본부를 설치하고 지휘하시던 서장님으로부터 기성 이북지서는 즉시 행동을 개시하여 평해에 집결하라는 명령이다. 우리들은 지체 없이 행동을 개시 20시경 평해에 도착하여 경무 주임을 통하여 서장님께 신고하였더니, 미리 준비해두었던 저녁밥을 배당해줌으로 지서원과 가족이 조금씩 나누어 먹고 평해 시외 서방고지 근무를 배치하고, 그날 밤은 불안과 초조 속에서 날을 새우고 나니 7월 18일이었다.   

1960년대 후반 울진경찰서

어디서 흘러나온 말인지는 모르나 국군 일개 연대가 미구(未久-그리 오래지 아니함)에 들어온다니 미국에서 비행기 ○○대가 ○○으로 온다느니 하는 말이 떠돌아서 각자가 영웅이요. 각자가 ○○○○장이었으며 호언하기를 좋아하던 사람들은 이 기회에 마음대로 조언하여 발설하여 놓고 남하하는 대중이 동요하는 것을 보기를 한갓 취미를 가진 듯하다. 울진군내에 자가용 자동차는 30여대나 있었으나 경찰에 협력하고 있는 차는 불과 10여대, 20여대는 자기의 친척과 있는 재산을 다 때려 싣고 포항으로 도주하였다.   

그러자 시간은 11시를 울리고, 집합명령이 나더니 ○서장님께서 말씀을 하기를 “제군들 중에서 원남면 매화리까지 가서 적정(敵情-적의 특별한 동향이나 실태)을 살피어 보고할 용기 있는 자가 없는가? 하고 우리들 열원(列員-줄지어 있는 사람)에게 묻는다.   

나는 “저가 갔다 오겠습니다.” 하고 왼손을 들었다. 그러자 본서 사찰계 형사대 10여명이 연달아 손을 들었다. 서장님은 만족하신 안색으로 그러면 지금부터 보안주임 ○○○○을 책임자로 하여 원남면 매화리까지 가서 적정을 전화로 보고하라는 명령이 내리자, 경비전화기 1대를 줌으로 즉시 보안주임 인솔 하에 출발하여 17시 경 매화리에 도착하는 동안 적영(敵影-적의 그림자)은 보지 못하였으나, 각 부대에는 노인 약간 명을 제외하고는 젊은 사람은 한 사람도 볼 수 없었다. 

즉시 매화지서 경비 전화선에 전화기를 달고 평해 본부에 그 상황을 보고하였더니, 서장님은 매화에 분대본부를 두고 근남까지 정찰반을 파견하여 적정을 탐지 보고하되, 명령 없이는 절대 적과의 전투는 피하라고 하였다. 수명(受命-명령을 받음) 즉시 2명 1조로 편성한 4개조가 지방청년들과 합류하여 근남으로 들어가는 도중 근남 지서 북쪽 강변에 녹색 복장을 입은 것을 보아 적인 듯 한 약 50명이 강물로 도하함을 보고 분대본부에 보고하였더니, 전원 분대본부에 인상(引上)하라는 보안주임의 명령이다.   

즉시 분대 본부에 돌아온즉 평해 본부에서 해군지트(해군 정보대)와 경찰 정찰반이 우리 분대와 교통한다는 것이다. 약 30분 후 해군 지트원 5명과 경찰정찰대 7명이 매화에 도착하였다. 우리들은 수집한 적정 및 모든 실정을 인계하고 자동차로 평해 본부로 귀대하여 서장님께 복명한즉, 대단히 수고 하였다고 말씀을 하면서 별명(別命-별도의 명령)이 있을 때까지 대기 장소에서 대기하라는 명령이다.

1960년대 후반 울진읍내 파출소

그날 밤을 새우고 7월 19일 10시경 전원 집합하라는 명령이다. 집합이 완료하자 부대 개편이다. 나는 제1중대 제2소대장으로 임명되었다. 우리 소대원은 경사 2명 순경 43명으로서, 내가 봐서는 다른 소대보다 가장 강력한 듯 보였다. 나는 소대를 3개분대로 나누고, 우리소대는 가장 강력한 소대다. “우리는 우리 힘으로 적을 무찔러서 울진경찰서를 복구시키고 나아가서는 적을 38선 이북으로 몰아낼만한 기백을 가지자”는 격려의 말과 취임사를 마치고 대기하는 중, 평해 후방고지 경비 사무에 임하라는 명령이다. 당시 각 분대를 배치하고 나는 부근 지형을 잘 살피어 보았다. 19일 16시경 서장님께서 오라는 명령이다. 즉시 가서 신고한즉 한 사람의 육군대위를 소개하였다. 그 장교는 ‘독립대대 대대장’이라고 하며 울진 평해 간의 경비와 전투를 목적으로 하고 왔다는 것을 말하였다.  

그 병력은 약 270명인데 시내에 꽉 찬 듯 하였고, 평해 시민은 물론 남하한 피난민은 만족한 듯이 얼굴에 희색을 띄고 있었다. 나 역시 국군의 용감스러운 모습과 M1 총기, 로켓트포, 박격포, 기관포 등으로 완전무장한 것을 보고 만족하였을 뿐만 아니라 울진에 들어온 적은 완전히 전멸당하리라고 보았다. 그것은 지금 와서 생각하니 나는 적을 너무나 과소평가하였을 뿐만 아니라, 과거 공비와 똑같이 생각하였다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었다는 것을 금치 못하겠다.  

대대장은 시가지에 있는 사람을 전부 집합시켜 놓고 하는 말이 “나는 독립대대 대대장 대리입니다. 여러분 대단히 죄송합니다. 적이 울진까지 나오도록 물리치지 못해, 그러나 적은 비겁하게도 불의에 남침을 해옴으로 우리는 작전상 약간 후퇴하였으나, 지금부터 본격적인 전투로서 적을 모조리 잡고야 말 것이니 여러분 안심하시고 우리 군경을 믿어주시오. 그리고 여러분들은 쓸데없는 유언비어를 유포시키지 마시오.” 하고 믿음직한 말을 하였다.   

1960년대 후반 온정면사무소 전경

그리고 서장님 실에 오더니 오만분지 일 작전 도면을 내놓고 적이 원남면 길곡으로부터 온정면 선구리 형제봉으로 흘러오는 경황이 농후하니 이 선을 경찰에서 방어해달라는 것이다. 서장님은 알았다는 듯이 목을 흔드시더니 하관(下官-부하)을 보고 정군(鄭君-이 일기를 쓴 정종화씨)은 지금부터 즉시 소대원을 이끌고 온정면에 가서 온정 지서원 14명을 얻어 형제봉을 방어하라는 명령이다.   

나는 즉시 복창하고 경비 근무 중인 소대원을 인솔하여 차지(此旨-이 지시)를 선언하고 약간의 보급품을 가지고 자동차로 온정을 향하였다. 온정면에 도착한 즉 면장, 지방 유지를 비롯한 면민은 반가이 맞이해주었다. 그것은 내가 ○○지서 주임으로 발령 받기 전에 온정지서 주임으로 약 8개월간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면장을 안정시키기 위하여 “절대 안심하시오 온정으로 나오는 적은 내가 방어하겠습니다.” 한 후 한청면단장(韓靑面團長-한국청년단 면단장) 정종길의 한청 100명만 삽과 괭이를 가지고 나오도록 주선해 달라고 부탁하였더니, 단장은 20분 내에 100명을 동원시켜주었다.   

나는 즉시 온정 주임 경사 김태익과 협조하여 온정지서원 14명을 응원 받아 60명을 5개 분대로 편성하여 형제봉 현장으로 갔다. 진지 구축 작업을 시작하기 전 1개 분대와 한청원(韓靑圓) 5명을 전방 2km에 전초병으로 배치하고 작업을 시작하려고 하는 순간, 전초병이 요란스럽게 뛰어 오면서 “적 수십 명이 1km 전방에 나타났다”고 큰소리를 치며 달려오자, 한청원이 질서 없게 분산되며 달아나기 시작하자, 소대원 전부가 분산되며 사방으로 흩어지고, 내 옆에는 단지 소대전령 2명이 남아 있을 뿐이다.   

약 5분이 경과하여도 적은 보이지 않았다. 부득이 좌우 고지에 가서 부대를 수습해 보았으나 겨우 18명이 모이고 잔여 대원은 온정지서까지 연락하기 위하여 가고 말았다. 나는 대원의 보고를 받고 훈련이 되어 있지 않은 것과 소대장의 통솔력이 부족한 것을 느꼈으나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잔여 대원 18명을 이끌고 적이 온다는 전방 고지에 배치하고 적의 동향을 살피는 중 22시, 적은 선구 부락에 들어오는데 야간임을 의식한 점은 알 수 없고 행렬을 보아 약 500명으로 추산하고 우리 일행은 일제히 발사하였다. 적은 당황하여 그 자리에 복병(伏兵-엎드리다)하더니 아방(我方-우리 쪽 방향)에 병력이 얼마 되지 않음을 알고 일제히 포위형태로 반격해옴으로 우리는 중과부적에 대원의 사기 저하로 산악을 이용하여 온정지서까지 후퇴하였더니, 온정면 주민들은 벌써 피난하고 한 사람도 남지 않았다.   

1960년대 후반 죽변면 파출소
분산된 우리 소대원과 온정지서원도 이미 후퇴해버렸다. 우리는 연락을 취할 방도가 없음으로 부득이 평해 본부로 귀대하는 도중, 온정면 광품리에서 분산되었던 대원과 온정지서원을 만나 평해 본부로 돌아가서 그 상황을 복명한즉, 독립대대 대대장은 부대를 개편하여 즉시 야간행동으로 온정지서까지 복귀하라는 엄명이다.  

 

당시 부대를 개편하여 50명 소대를 인솔, 군용차 2대로 20일 4시경 온정면 금천학교에 도착하여 부근 적정을 관찰한즉, 적은 벌써 온정면 소태리 지서 부근에 약 400명이 집결하고 휴식 중에 있었다. 그 상황을 휴대전화기로 본부에 보고한즉 대대장은 접적(接敵-적을 직접 접함)은 피하고 정찰행동만 취하라는 것이다.

적은 11시경 행동을 개시하여 온정면 조금리를 통과해 경북 영덕군 창수면으로 남하하였다. 나는 소대원을 금천고지에 배치하고 ○○○○○를 대동, 한복을 입고 농군으로 위장해 지서 소재지와 부근 일대를 관찰하였으나, 적정이 없음으로 전 소대원을 지서에 집결시켜 적정 관찰과 민심수습에 노력하였다.   

피난 갔던 면민은 모두 돌아오기 시작하였다. 6월 23일 ○○로부터 적 약 300명이 선구리로부터 온정면으로 향하여 남하한다는 보고였다. 즉시 소대원을 각 고지에 배치하고 경비하던 차에 13시경 적 약 300명은 인공기를 들고 지서 소재지인 소태리에 집결하여 중식을 한다는 그 상황을 본부에 보고하였으나, 본부에서도 병력을 사방에 분산 배치시키고 증원병을 보낼 병력이 없었다.   

적은 또 다시 17시경 행동을 개시 경북 창수로 남하하였다. 우리 소대는 또 다시 지서에 복귀하였다. 이러한 동일행동으로 후퇴와 복귀를 7회나 거듭하고 나니 아무런 공포감은 사라지고 마치 장난처럼 생각되었다.   

1960년대 후반 기성면 지서

7월 2일 홍종경을 대동하고 한복을 입어 농민으로 가장하고 선구 외선미간 협곡을 걸어가는 도중, 돌연 적의 낙오병인 듯 한 인민군 9명이 30미터 전방에 나타났다. 너무나 근거리라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즉시 논에 엎드려 제초를 하는 모양을 취했더니 적은 별 의심 없이 통과하였다. 우리는 뛰는 가슴을 움켜 안고 지름길을 이용하여 지서에 뛰어와서 즉시 소대원을 요소에 배치하고 매복하던 중 적 9명이 통과하기 시작하였다. 사격개시 신호로서 일제사격을 하여 사살 4명, 생포 3명, 따발총 2정, 기관단총 2정의 전과를 얻고 우리소대는 아무런 피해가 없었다. 이 보고를 본부에 하였더니 서장님은 분에 넘치는 찬사를 하셨다. 온정면민은 매우 반가워하면서 축하해주었으며, 대원들은 사기충천하여 언제나 싸울 결의를 굳게 한 표정을 보였다.   

다음 7월 3일 민간 정보에 의하면 인민군 2명이 선구리 독가촌에 와서 있다는 보고다. 7월 4일 미명(未明-새벽 동트기 전)을 기하여 소대원 6명을 대동, 현지에 와보니 적 2명은 가장 낙관한 듯이 자고 있었다. 우리는 생포하기 위하여 손을 잡으라 하였더니 적은 소지하였던 수류탄을 투척함으로 부득이 집중사격으로 2명 모두 사살하고 중요문서 외 다수의 전리품을 획득하였다.  

1960년대 후반 근남면 지서

7월 11일까지 하등의 적정이 없어 민심 수습에 노력하다가 7월 12일 10시경 ○○로부터 패잔병 9명이 구주령으로부터 온정을 향하여 남하한다는 보고를 접하고 중요 도로에 잠복, 매복 중 11시경 9명의 적이 우리 소대 부근 가까이 오자 발사하였더니, 이 9명은 적의 척후병이었고 적 주력부대 약 300명이 후방으로부터 기습해옴으로 우리 소대는 사분오열 분산되어 명령계통이 서지 않았다.  

나는 겨우 적의 포위망을 벗어나 백암산으로 피신하였더니 소대원은 한 사람도 보이지 않았고, 약 한 시간 후에 면장, 단장을 위시한 지방유지 4~5명이 내가 있는 장소에 나타났다. 면장과 단장을 비롯한 지방유지 등은 무의식적으로 나에게 악수해오면서 하는 말이 “나는 주임이 적에게 포위당하였을 때 우리들은 전사하거나 혹은 포로가 되었는지 우리들은 애처롭게 생각하였다”하면서 입에 침이 없었다.

14시경 지서 청사와 면 식량 창고에서 검은 연기와 붉은 불빛이 하늘을 찌를 듯이 힘 있게 타오른다. 우리들은 자연히 나오는 탄식을 금치 못하였다. 참으로 야만적인 인간들이다. 왜냐하면 식량창고에는 백미와 벼가 약 300입(入-가마니)이나 적재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즉시 면장, 단장을 비롯한 청년 약 50명을 동원 대동하고 소재지를 잘 볼 수 있는 고지에 가보았더니 군인은 한 사람도 볼 수 없었다. 소재지에 잔류하고 있던 노인과 부인에게 향하였더니, 표독한 인민군은 지서청사와 식량창고에 방화한 후 역시 ○○리를 통과 경북 창수로 가버리고 말았다. 

우리들은 즉시 소재지에 도착하여 부락 남여를 총동원하여 진화하였으나 지서청사는 완전히 소실되고 지서주임 관사는 겨우 진화하였고, 식량창고는 반소하였다. 나는 면장과 협의하여 재고량 식량을 전부 각 부락에 4~50가마니로 나누어 창고를 비웠다. 나는 그 상황을 서장님께 특사로서 보고하였더니, 서장님께서 평해 본부는 후포로 이동하였다고 했다. 특사 정○○은 그 익일(翌日-다음 날) 4시경 귀환하였다.

서장님으로부터 지시사항이다. 내용은 “그대의 용감한 투쟁에는 만족한 감을 금치 못하겠다. 계속 적정을 수집해준다면 우리 부대 작전에 대단히 유리하겠으니 단신으로 위험하거든 본대로 돌아오라”고 하는 말씀이다.  

1960년대 후반 서면 지서

나는 즉시 면장, 단장을 비롯한 지방 유지를 데리고 본부로 내려갈 준비를 완료하고, 출발할 때에 지방유지측에서 지금부터 우리가 남하하면 언제 귀향할는지 모르니 최후로 술이나 한 잔 마시자는 요청으로 탁주 5되를 사서 맑은 물 흘러가는 개울가에 가서 마시는데, 민간 정보원 한사람이 달려오면서 “주임, 국군 수백 명이 옵니다.”라고 보고한다. 나는 무엇인지 모르나 가슴이 두근거린다. 손에 들었던 술잔을 땅에 놓고 언덕위에 가보았더니 틀림없는 국군인바 약 천명을 보았다.  

약 10분 후 확실한 것을 알고 보니, 우리 국군이 틀림없었다. 고향산천에 부모처자를 다 버리고 남쪽으로 정처 없이 떠날 준비를 하던 면장, 단장은 가장 반가워하면서 그 눈에서는 무슨 의미인지는 모르나 눈물이 글썽거린다.  

우리들은 즉시 국군 책임자를 찾아갔더니, 젊은 소령 한분이 내가 ○○산 대대 대대장이라고 인사한 후 즉시 인부 300명을 동원할 것과 700명분의 식사를 제공할 것을 요청함으로, 우리는 산에 피신한 청년들을 소집시키고 부인회를 소집시켜서 식사 분배와 인부 동원을 하였다. 즉시 진지를 구축하고 식사를 간단히 한 후 전투 배치를 완료하였다. 나는 이 상황을 후포 본부에다 특사 편으로 보고하였더니 특사가 돌아와서 말하기를 경찰대는 벌써 영덕으로 남하하고 후포 고지에는 없었다고 보고한다. 그 후 당분간(6일간) 적정은 보이지 않았다.  

7월 ○일경 대대장 이하 2개 중대는 연대본부 작명(作命-작전명령을 줄인 말)을 경북으로 이동하고 나는 대대장의 지시로서 김중위가 인솔하는 1개 중대와 행동을 같이 하면서 적정 연락과 일반 정보수집에 노력하였다.   

그러는 동안 7월 18일경 온정면 금천리 ○○고지에서 잠복 배치하고 있던 김중대장 이하 약 80명의 중대원은 평해로부터 온정을 향해 오는 적 자동차 17대를 발견하고 우리 부대인줄만 알고 만세를 부르면서 영접할 요량으로 접근한즉 적이었다. 당황한 중대장 이하 대원들은 그 자리를 피하려고 노력했으나 중과부적으로 적에게 포위되어 5~6명을 남기고 전부 장렬한 전사를 하였다는 정보가 내가 있는 소태리에서 전해왔다.   

나는 너무나 실연(實然)적인 변사(變事-예사롭지 아니하고 이상한 일)에 당황하여 면장, 단장 지방유지 몇 사람과 피신, 남하하려고 하였더니 적은 이미 소태리 조금리 온정리에 가득 차고 각 고지에 적의 대부대가 배치되었다.   

우리 일행은 모두 백암산에 집결할 것을 약속하고 각자 개인행동으로 그 자리를 피하자고 했다. 나는 즉시 전투복을 벗어 내가 소지하였던 칼빈총과 함께 ○○적치소에 매몰하고, 이미 준비하였던 중고 ○○복장에다가 밀짚모자를 쓰고 물괭이를 들고 완전히 농민으로 변장하고 그 자리를 피하는 도중, 인민군을 만났으나 나에게 아무런 말도 묻지는 않았다.   

그러나 남쪽으로는 1km도 가지 못한다는 것을 예고한다. 그날 밤 21시경 백암산 허리 어느 광산 굴에 도착하니 면장, 단장을 비롯한 10여명의 지방유지 인사들이 그 속에서 떨고 있었다. 구태여 그날 밤은 심한 소낙비가 내리기 시작하였다.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을 만큼 어두운 밤이다. 우리는 번득이는 개똥벌레 불에 몇 번이나 놀랐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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