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연재② / 역사 앞에서(한 경찰관의 6.25 일기)

기사입력 2010.02.02 16:00  
댓글 0
  • 카카오톡
  • 카카오 스토리로 보내기
  • 네이버 밴드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 플러스로 보내기
  • 기사내용 프린트
  • 기사내용 메일로 보내기
  • 기사 스크랩
  • 기사 내용 글자 크게
  • 기사 내용 글자 작게

 

 

이 글은 6.25 전쟁 당시에 울진경찰서에 근무했던 정종화(1924~1987) 경찰관의 일기이다. 그러나 어찌 보면 당시의 상황이 너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어, 단순한 일기를 뛰어넘어 시간대별로 특정 사건을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있는 보고서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한 자의 명문이나 한 줄의 기록이 전해주는 가치가 얼마나 귀중한지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더구나 목숨이 경각에 달린 절박한 상황에서도 시간대별로 기록을 남긴 정신은 대단하다.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한 목숨을 부지하기도 어려운 시기에 귀한 기록을 남긴 것은 개인의 일기를 넘어 하나의 소중한 역사적 자료이다.

 

특히 구주령, 백암산, 형제봉, 외선미, 광품, 선구리, 통고산, 수비, 발리, 본신, 입암, 창수, 영양읍까지의 험준한 산악을 타고 수시로 이동하면서 생활했던 과정을 여과 없이 기록하고 있다. 개인적인 시각에서 쓴 글이지만 당시의 급박하고 처절했던 정황이 잘 묘사되어 있다. 간간이 문학의 서정적인 표현도 있어서 더욱 인간적으로 다가오는 글이다.

 

정종화씨의 6.25 일기는 국한문 혼용체로서 지금은 사어(死語)가 된 단어도 많이 보이고, 일반적인 표기법도 지금과는 사뭇 다르다. 최대한 원문을 그대로 싣고, 내용상의 무리가 없다면 현대문으로 표기했다. 원문에서 판독이 불분명한 것은 무리하게 옮기지 않았으나, 전체적인 내용을 이해하는 데는 어려움이 없다.

 

그리고 날짜에 다소 앞뒤가 맞지 않는 부분도 있는데, 아마 현장에서 메모 형태로 기록했던 것을 옮기는 과정에서 오차가 발생한 것으로 보인다. 내용상의 원문은 앞부분 일부와 뒷부분 일부가 손실되어 있다.

 

정종화씨가 6.25 전쟁 기간인 1950년 7월부터 9월까지 약 3개월 여간 기록한 일기를 본지에 연재한다.                                                           
[역주. 신상구 편집인]

 

<지난호에 이어>

그 다음날 정보원으로 하여금 지방 정보를 수집한즉 인민군 약 1개 사단이 평해 온정간 광품리 산골짜기에 본부를 설치하였으며, 온정면 소태리 국민학교에는 연대본부를 설치하고, 수십명이 있다.   

 

소위 정치부대는 벌써 지방에다 ‘인민위원회’ ‘민청위원’ ‘여맹’ 등을 조직하기 시작하였으며, 지방도피자 3명 외 북로당원인 듯 한 지방 좌익 청년들은 의기양양하여 모든 지방 실정을 정치대에게 알려줌으로 인하여 2~3일 내에 면민은 인민공화국이 된 적에게 아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부득이 지방에서 양심적인 인물 몇 명을 부락에 보내어 식량 두 가마니를 보급 받아 분배 소지하고, 온정면 선구리 ○○에 자연으로 된 바위 밑을 집으로 삼고 면장 이하 일행 7명이 아지트생활을 하였다.   

 

단지 원하는 것은 아군의 북진이었으나, 아군의 소식은 들을 수 없고 통쾌한 것은 아군 함대의 함포소리와 아군 비행기의 폭격하는 폭음뿐이었다.   

 

그러자 하루는 일행 중의 한 사람인 온정면 ‘한청감찰대장’ 박진봉이가 급히 몸이 아파서 신음하기 시작하였다. 

우리들은 가지고 있는 약을 썼으나 조금의 효과가 나지 않는다.   

 

부득이 부락이 있는 곳으로 보내고 나니 너무나 불안하여 우리들은 그 장소를 이동하여 속칭 매실골로 가는 도중 소먹이는 목동 아이들에게 발견되었다.
그것이 아마 7월 24일 경이다. 마침 소낙비가 퍼붓기 시작하였다.   

 

우리들은 초막을 치고 그 속에 들어가서 소낙비를 피하는 순간, 뒷산 고지에서 우쿨하는 소리에 놀라 급히 쳐다보니 지방 좌익청년 4~5명과 집총한 인민군이다.   

 

우리는 숲속을 타면서 금정산으로 달렸다. 인민군들은 집중사격을 감행한다. 그러나 우리 일행은 한 사람도 명중되지는 않았다.
금정산 최고봉에 올라가 보니 인민군은 뒤따라오지 않았다.   

 

1960년대 후반 울진읍내 파출소

 

우리 일행은 잠시간의 호흡을 돌리어 본신리곡(本新里谷)으로 피하였다.
본신은 너무나 산곡(山谷-산골짜기)이므로 아직 좌익은 조직되어 있지 않았다.
본신 구장(마을 이장)은 우리를 반가이 맞이해 주었다.   

 

우리는 구장과 ○○산 고지에서 저녁을 먹고 그날 밤을 새우니 7월 26일 새벽이다.
부락민에게 “동요하지 말고 굳은 신념하에 결의를 갖고 노력하면 조만간 아군은 반드시 승리 북진할 것”이라 말하였다.   

 

그리고 그날 밤 우리는 강원도와 경북 경계선인 모산곡에 가서 초막을 치고 3일간을 유하면서 경북 정보를 수집하였더니 ‘영양경찰대’가 있다는 정보를 듣고, 면장 이하 일행은 초막에다 두고 나의 유일한 연락원 정○○군을 데리고 영양으로 가는 도중 영양군 수비면 발리동에서 울진서 근무 순경 박○○과 도주환을 만났다.  

 

낙임(落任-임무를 맡지 못함)된 사유를 물은즉 ○○지서 주임 경사 최용운의 명령으로 정보 수집차 원남까지 나왔다가 통고산으로 간즉, 최○○지서 부대는 벌써 남하하고 없어서 이곳저곳을 쫓아다니다가 부대를 찾지 못하고 산에서 산으로 숨어 있다가 부득이 위험을 무릅쓰고 남쪽으로 나갈 계획이라 한다.   

 

나는 대단히 반가웠다. 우리 일행은 4명이 되었다.
우리는 경찰이라는 것을 일체 감추고 피난민으로 변장하고 영양에 도착한즉 경찰대는 한사람도 없었다.
남아있는 노인에게 물었더니, 영양 경찰대는 지난 밤 출발하여 남하 하고 강원도 ‘장성경찰대’ 있다가 금일 12시경 자동차로 출발하였다고 한다.   

 

우리가 도착하기 5시간 전 출발하였다는 것이다.
우리는 장성서원(장성경찰 대원)을 만나기 위하여 바쁜 걸음으로 영양군 진보로 가는 도중 ‘입석’(立石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영양군 ‘입암’의 오기가 아닌가 본다)이라는 부락에 인민군 약 400명이 집결하고 있음을 보았다.   

 

우리들은 단체 행동을 버리고 개인행동을 취하기로 각오하고, 나는 연락원 한사람을 데리고 임동으로 향하였다.
임동으로 가는 도중 안동 피난민과 북진하고 있는 대피 난민 무리를 만나 실정을 물은즉, 안동은 7월 28일자로 국군과 미군이 후퇴하고 안동에는 한사람도 없고, 임동에도 인민군이 들어왔기에 우리들은 영양으로 피난 간다고 한다.   

 

우리 두사람은 생각하기를 기왕 인민군이 있는 곳을 통하여 남하하지 않으면 안 될 경우라면 지리를 알 수 있는 동해안을 타고 남하하는 것이 유리하다고 보고 진보로 내려왔다.   

 

진보 모산곡에서 휴대하였던 식량으로 밥을 지어먹고 산맥을 타고 남하하는 도중, 8월 2일 밤 인민군에게 체포되었다.
인민군의 문초에 우리들은 미리 준비해 두었던 말로 “우리는 인민군 동무들의 물품을 운반해주고 집으로 돌아가는 도중인데 길을 잊어서 이리저리 헤맨다”고 하자, 인민군들은 대단히 수고하였다고 하고 길을 알려주었다. 

그러나 일보도 남쪽으로 나가지는 못한다고 한다.   

 

우리들은 다시 영양으로 들어오다가 창수로 가는 방향을 타서 산곡을 이용해 남하하는 도중, 창수면 변산곡에서 또 다시 체포당하였다.
여전히 우리들은 인민군 동무들의 물품을 진보까지 운반해 주고 귀가하는 도중이라고 한즉, 송림이 울창한 어느 산곡으로 데리고 가더니 ‘경무관’이라는 완장을 한 군인 5명이 있는 곳으로 인도하였다.   

 

경무관이라는 인민군 5명은 세세히 조사한다.
우리들은 끝끝내 인민군의 물품을 운반해주고 오는 길이라고 고집하였다.
정당 단체에 대하여는 과거 남로당원으로서 대구형무소에 가서 6개월간 징역을 살고 나온 후는 조직생활을 한 사실이 없다고 변명하였더니, 그자들은 우리 두 사람의 손바닥을 들여다보더니 가라고 한다.   

 

우리 두사람은 너무나 세밀한 조사에 답변하기 입장이 곤란하였다.
우리 두사람은 가라는 말에 반가워서 한꺼번에 영양으로 들어왔다. 영양에는 인민군 약 200명이 들어와 있다.   

 

우리들은 인민군에게 또 잡혔으나 별로 공포감은 느끼지 않았었다. 우리의 답변은 여전하다. 여기서도 별 조사는 없었다.
우리는 그 부근에서 모든 정보를 종합컨대, 그 당시 아군과의 교전은 ‘흥해’ ‘청하’ 부근에서 교전하는데 인민군들은 약 2만명이 산곡에 있으며 교대로 나가서 전투하고 있으므로, 각 산곡마다 인민군이 없는 곳은 없었으며 도저히 남하할 수는 없다고 한다.   

 

그리고 8월 15일 해방 기념일을 기하여 아군의 대규모적인 반격전이 있을 것이며, 이미 일본 군대가 약10만 명이나 부산에 상륙하여 불원간(不遠間) 북진하리라고 한다.   

 

여하한 정보를 들은 우리 두사람은 아군이 북진해 올 때까지 산곡에 초막을 짓고 적의 동향을 살피면서 아군이 들어오면 그 정황을 제보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며 또한 가능한 일이다라고 판단하였다.   

 

그러나 이 지방에서는 식료품을 보급 받을 도리가 없으니 온정면 가까이 가서 좋은 장소를 선택하기로 하고 영양군 수비면 소재지인 발리동에 도착하니 온정면장, 단장과 방위 장교 1명과 수비면장이 모산곡에 있다는 정보를 접하고 그곳으로 찾아가서 면장 일행을 만났다.   

면장 일행은 몹시 반가워하며 남쪽 정세를 묻는다.   

 

1960년대 후반 서면 지서

 

우리는 실정을 말하고 이 장소는 위험하니 식량을 구해서 깊은 산곡으로 들어가기로 하고, 수비면 창고에 들어있는 벼 3가마니를 얻어 백미화시켜 각자 분배소지하고 식염 2되를 구비한 후 면장 이하 우리 일행 5명은 경북과 강원도와의 경계선인 예텃골(古基谷-고기곡)이라는 심곡(深谷-깊은 골짜기)에 들어간즉, ‘잡목이 욱어 싸고 대래덤풀이 한없이 무성하며 원곡(湲谷-물 흐르는 계곡)마다 맑은 물 흐르는 소리 산새와 매미우는 소리, 그야말로 평야에서는 상상치 못할 자연미(自然味)를 상기(想起)할 수 있었다.’  

 

우리들은 어느 다래덤불을 이용하여 초막을 구축하였더니 누가 부근에 가까이와도 좀처럼 초막이라고 인정할 수 없을 만큼 잘되었다.   

 

우리들은 연락원을 수비면 또는 온정면 등지에 파견하여 적의 동향과 조직상황 등을 수집하였다.
그러나 초막 생활에서 통쾌한 것은 역시 아군 함대의 함포소리와 비행기 폭격소리다.
그리고 또 하나의 재미있는 것은 원곡(湲谷)에서 흘러나오는 물에 노는 고기와 가재 잡이이었다.   

 

우리가 이러한 생활을 하는 중에도 제일 고달픈 것은 매일같이 내리는 소낙비로 진실로 원망스러웠다.
우리는 이러한 생활을 하다 8월 15일을 맞이하였다.   

 

아침 일찍이 기상하여 고산봉(高山峯)에 올라가 손수 수건에다 풀물로써 태극기를 그려 생송목(生松木)에 걸고 진정한 마음으로 국민의례를 마치고 8.15 기념행사를 하는데, 특히 묵념에는 약 30분간 각자가 아군의 북진을 마음껏 빌었다.
그날은 우리 기대하는 바와 같이 비행기와 함포가 특히 심하였다.   

 

우리들의 신변에 커다란 불안이 당도하였다. 그것은 식량이 바닥난 것이다. 아지트 생활에서 제일 곤란한 것은 식량 생활이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협의한 후 8월 16일 전원 온정면 독실곡이라는 산곡으로 이동하며 정보를 수집한 후, 식량보급을 받기로 하고 8월 16일 19시경 초막을 떠났다.   

21시경 독실에 도착한즉, 독실에는 소개민들이 10명 들어와 화전(火田)을 개척하고 있었다.   

 

우리는 그곳에서 쉬는 동안 지방인을 이용 정보를 수집하였더니, 정보원은 8월 11일 포항이 점령되었다는 비보이다.
우리는 탄식을 하면서 장기전을 예상하였다.
그러자 한청면단장 정종길은 자기가 식량보급을 해올 것을 원하자, 우리 일행 중 가장 연소한 정수용이도 같이 갈 것을 청함으로 우리는 두 사람을 보내고 기다리다, 8월 18일 이른 아침에 정종길 외 1명은 적에게 체포당하였다는 비보를 받고 우리는 장소를 이동하여 산봉으로 옮기고, 면장이 보급차 나가더니 면장 역시 체포되었다는 비보다.   

 

두 사람(나와 방위장교)은 적의 정보망이 세밀하고 지방적 조직이 물샐틈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우리 두 사람은 협의하여 분산하고 개인행동을 취할 것을 결의 하고 흩어졌다. 나는 혼자 생각하니 갈 곳이 막연하다.   

 

최후의 나의 결의는 내선미리에 가서 식량보급을 받고 서면 통고산으로 들어갈 것을 마음속 깊이 결심하였다.
그것은 내가 울진경찰서 사찰계 근무 당시 공비 토벌차로 서면 통고산에서 약 15일간 잠복한 적이 있어 곡곡마다 지형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8월 18일 17시 경 금정산에 도달하자, 건너편 산중 허리에 청년 세사람이 앉아서 무엇인가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나는 놀라서 내 몸을 감추기 바빴다. 나는 은신한 체 그 청년들의 동태만 살피이고 있던 중, 그 청년 세 사람은 행동을 개시하여 내가 있는 금정산 중허리로 이동해온다.
나는 어느덧 그 사람들이 가까워 오는 것을 보고 피신자인 것을 알 수 있었다.

 

조금 후에 본 즉, 그 세 청년은 선구리 한청단장 도수일을 비롯한 간부 두 사람이라는 것을 판명하였다.
나는 사방을 살펴보고 타인이 없음을 알고 소리쳐서 세 청년을 불렀더니 세 청년도 놀랐다.
항상 접촉하던 쪽의 소리라 세 청년은 재빠르게 알아들었다.  

 

우리는 상호 접근하여 서로 만나자 인사의 말도 하기 전에 뜨거운 눈물이 옷자락을 적셨다. 한 5분 후 서로 사유를 묻는다.
그 세 청년들은 금정산 서편 어느 심곡에서 토굴 생활을 하다가 면한청단장 면장 등이 체포되었다는 말을 듣고 자기들은 더 이상 피신할 용기가 없어서 비겁하나마 자수차 귀가하는 길이라 한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적극적으로 말릴 수 없었다.
왜냐하면 식량 보급이 여의치 못함으로 함께 행동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단지 그 세 청년들에게 말하기를 “동지들의 행동에 대하여 나는 가타부타 할 수 없다. 그러나 불원간 아군은 반드시 승리하여 북진할 것은 확신하는 바, 부디 민족정신을 망각하거나 비양심적인 행동을 취해서는 동지들의 사선(死線-죽음)을 재촉하는 것인즉, 깊이 생각하여 행동을 취하라. 나의 최후적 부탁이다.”라고 말하자, 세 청년들은 “우리는 결사코 비양심적 행동은 취하지 않는 것은 물론, 아군이 승리 북진한다는 굳은 신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부터 귀가하면 모든 위험을 무릅쓰고 적은 물론 지방 좌익분자들의 행동을 하나하나 감시해 두었다가 아군경이 복구해오면 제공할 것을 결심하고 맹서한다.”고 한다.   

 

나는 그 자들의 말에 만족감을 느꼈다.
아군이 북진한 후 상호간 다시 만나기로 하고 헤어지려고 할 때 세 청년은 무엇을 생각하였는지 주임님! “우리는 귀가하면 밥은 먹을 수 있을 것이니 이것을 가지시오” 하고 자기들이 소지하였던 식량 약 5되와 식염 등을 나에게 양도해주었다.   

 

우리들은 서로 건투를 빌면서 헤어지고, 나는 22시경 내선미리에 알고 있던 ○○집으로 가만히 찾아들어가니 내실에서 ○○동지가 나왔다.
동지는 깜짝 놀라며 나를 내실로 인도하며 식사를 준다.   

 

식사를 마친 후 상세한 것을 물은 즉, 그 부락은 전염병이 만연되었다고 면인민위에 보고 하였더니 부락민은 출입을 금하고 인민군들도 그 부락에는 들어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는 동지의 굳은 결의와 확고부동한 신념을 보고 온정면에서는 도저히 더 이상 유지할 수가 없음을 알았다.
하여 통고산으로 갈려고 식량 및 기타도구를 준비해줄 것을 청하였다.
동지는 백미 3말과 취사도구 일절과 기타 초막 구축용 도구 일체를 즉시 준비해주면서 자기 자신이 통고산까지 운반해주기로 하였다.   

 

그 다음날인 8월 19일 미명(未明-날이 밝기 전)에 출발하기로 하고 내선미리 독립가옥에 가서 취침하려고 하였으나 좀처럼 잠은 오지 않고 쓸데없는 공상과 아군이 금명간 곳 복구해오리라는 희망적 관측뿐이다.
잠이 들어서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말았다.   

 

어느 때나 되었는지 문 밖에서 인기척이 나는 듯 하여 깜짝 놀라 일어나니 벌써 내가 자던 방을 중심으로 4~50명의 집총한 부대가 집을 포위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나는 의외의 급습에 낙담하였다. 일시에 눈이 캄캄하고 정신이 흐리멍덩하였다. 
  

그러자 외부에서 한 사람이 큰소리로 “정종화, 네가 만약 반항하거나 혹은 도주할 시는 너는 물론이거니와 너의 가족까지도 살려두지 않을 것이다.”하고 창문에 총구를 들이대며, “사나이답게 두 손을 들고 나오면 살려줄 것이다.” 하고 외친다.   

 

나는 다시 반항할 용기도 도주할 용기도 나지 않는다.
나는 위기일발인 그 때에 복받쳐 오르는 분노와 공포심을 억제하고, 나지 않는 용기를 내서 큰소리로 “정종화는 반항할 의사도 도주할 의사도 없다. 원컨대 동무들이 고이 체포해가기를 바라는 바이다.” 하고 외쳤다.
그러자 4명의 청년이 일시에 방안으로 뛰어 들오면서 “손들어!”라 한다.

 <다음호에 계속>


 

<저작권자ⓒ빠른뉴스! 울진뉴스 & www.uljinnews.com 무단전재-재배포금지. >
 
 
 
 
 
    울진뉴스/월간울진(http://uljinnews.com |   창간일 : 2006년 5월 2일   |   발행인 / 대표 : 김흥탁    |   편집인 : 윤은미 
  • 사업자등록번호 : 507-03-88911   |   36325. 경북 울진군 울진읍 말루길 1 (1층)   |  등록번호 : 경북, 아00138    |   등록일 : 2010년 7월 20일                         
  • 대표전화 : (054)781-6776 [오전 9시~오후 6시 / 토, 일, 공휴일 제외(12시~1시 점심)]   |  전자우편  uljin@uljinnews.com / ytn054@naver.com
  • Copyright © 2006-2017 uljinnews.com all right reserved.
빠른뉴스! 울진뉴스의 모든 콘텐트(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무단 전제·복사·배포 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