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대 서면 광천교 도로 개설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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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천교 전경. 광천교에서 소광리까지의 계곡을 대광천(大光川, 큰 빛내)이라고 한다소개하는 사진은 새마을운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이전인 1960년대 중반에 취락지의 도로 개설 사업으로 실시된 서면 광천(光川, 빛내) 입구의 광천교 건설과 도로 개설 공사 현장을 촬영한 것이다.
애초 광천교는 경상북도에서 공사를 발주했고, 진영건설주식회사에서 교량 시공을 담당한 가운데 1966년 6월에 공사에 착공하여 1968년 7월에 준공되었다.
현재 이용되고 있는 광천교는 당초의 광천교가 노후화되어 철거된 이후에 인접한 곳에 새로 건설된 것이다.
광천교 아래에서 서면 통고산(通古山)과 진조산(眞鳥山)에서 발원한 계곡의 지류들이 합류하여 왕피천의 최대 지류를 형성하며 유유히 흐른다.
1961년 5.16군사정변에 성공한 후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으로 취임하여 2년 7개월간 군정을 실시하고, 1962년 3월 윤보선 대통령의 사임으로 대통령 권한대행을 함께 맡았던 박정희대통령은 역대 정권의 무관심과 사회적 혼란 속에 방치되어 있던 국토 경제개발계획에 착수한다.
울진에서도 오지중의 오지로 불리는 서면 광천 입구에서 실시된 취약 지역의 도로 개설 작업 또한 박정희정부의 국토 개발 시책에 따른 것으로 짐작된다.
취약지 도로 개설(광천교 입구)
소개하는 사진에서는 깎아지른 듯 한 절벽 아래에서 변변한 안전 보호 장구 착용 없이 삽을 이용하여 시멘트를 섞는 장면, 손으로 높게 쌓은 석축을 다듬는 장면, 인근에서 베어낸 것으로 보이는 나무 등을 이용하여 지지대를 세우고 교량을 건설하는 장면, 괭이와 삽을 이용하여 주변을 절·성토하는 장면, 안전 장비 없이 높은 절벽위에서 오햄머와 정을 이용해서 암벽을 깨트리는 장면, 깨트린 돌멩이를 지게에 싣는 장면 등 당시의 건설 노동 현장을 생생하게 살펴볼 수 있다.
작업자 가운데 일부는 최소한의 안전 장비로 허리에 밧줄을 동여매고 높은 절벽위에서 해머와 정으로 아슬아슬하게 암벽을 깨고 있다.
1960~70년대에 정부에서 추진하는 각종 사업 현장에는 인근 지역 주민들이 부역(賦役)이라는 명분하에 변변한 보수도 없이 반강제로 동원되었다.
부역은 일제강점기는 물론이고, 해방 후와 박정희대통령의 새마을운동 당시까지 그대로 이어진다.
특히 새마을운동이 실시되던 당시에는 정부에서 대부분의 공사현장에 시멘트를 무상으로 지원해주고 각 마을마다 자체 인원으로 독자적인 사업을 할 수 있도록 독려했다.
시멘트 무상 지원에 따른 주민 숙원사업은 대부분 부락민들의 자체 노력과 자체 자금으로 이루어져야 했다.
새마을운동에 대한 시각 차이는 지금도 여전히 엇갈리고 있지만, 어쨌든 이로 인해 ‘보릿고개’라는 단어로 상징되던 고질적인 절대 빈곤을 면한 것은 박정희정부의 큰 업적으로 평가받고 있다.
현재 36번 국도를 연결하는 광천교(오른쪽) 좌측에 1960년대 중반에 건설됐던 광천교의 잔해와 교량 표지판이 남아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