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류굴 내부 최초 탐사수기

기사입력 2004.09.08 1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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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진군의 관광명소  -성류굴-

성류굴이 온 국민의 각광을 받아 온지도 벌써 40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다.
성류굴은 새삼스런 소개나 설명이 필요치 않는 국내 최고의 종류석 동굴이다. 이 성류굴이 나와 남다른 인연을 가졌기에 특히나 잊지 못한다.
울진은 내가 태어난 고향이기도 하거니와 그 억겁의 신비를 벗긴 체험자의 일견으로 개굴 당시 하마터면 목숨을 빼앗길 뻔했던 아슬아슬한 사투의 고비가 있었기 때문이다.
장구한 세월로 인간의 접근을 불허한 그 난공불락의 지하 아성을 정복한 내 젊은 날의 용기가 없었던들 내 인생은 얼마나 허황하게 살아 왔을까?
성류굴의 완전 개굴은 1960년 10월 6일에 이루어졌다.
4.19의거를 계기로 자유당 정권이 붕괴하고 가까스로 민주당이 집권했으나 민중의 혼란은 고조되어 관공서의 업무가 마비되고 있던 당시에 이곳 울진 교육청 부설 울진 교육연구소에 근무하던 4명의 연구원(교사)이 해냈다.
김기영, 이원태, 장종욱, 이대연이 그들이고 이날 김진환, 이연모가 이들을 도왔으며 뒷날 전병강, 이보기가 따랐다.
모두가 고향사람으로 그들의 순수한 애향심과 모험심, 그리고 명예와 사리를 헤아리지 않는 소탈한 패기와 집념이 없었던들 오늘의 '성류굴'이 있었을까!
12시 24분, 김진환, 이연모 두 사람은 바깥에 남고 연구소원 4명이 2m간격으로 새끼줄로 묶어 입굴을 감행했다.
한 타래의 새끼줄이 다할 때는 2번째의 새끼줄이 장시간 요동을 한다거나 멈추어졌을 때는 SOS 아니면 비상사태임을 직감하고 즉시 손을 써달라는 비장한 대화를 남기고 김기영씨가 선두로 횃불을 들고 칠흑같은 어둠을 헤치기 시작했다.
횃불, 기름통, 손전등과 각자가 군도를 지니는 한편 세번째 줄에 선 나는 나침반과 스크랩북을 들고 굴 내부의 방향과 대충의 거리 규모를 기록 혹은 스케치하면서 묵묵히 따랐으나 미속과 풍설이 주는 공포의 엄습은 일행들을 위축시켰고 전진을 심하게 방해했다.
첫 광장의 도하작전을 간신히 성공하고 약간의 협곡을 지나 소혈의 광장에 이르렀을 때 박쥐들이 놀라 달아나고 비행이 서투른 놈은 일행의 이마에 부딪쳐 혼비백산의 지경에 이른다.
준비해간 소주병을 돌려 마시고 포복으로 기어 들어가야 할 소협에 이르러 걸음을 멈추었다.
수수께끼의 작은 미로, 예측불허의 캄캄한 험로임에 감히 뚫고 들어갈 엄두가 나지 않아 잠시 머물렀으나 다시 결사의 의지를 다지고 간신히 돌파를 하니 몸은 식은땀으로 물투성이가 되었다.
그 신고의 보람으로 제2광장에 우뚝 선 거대한 석탑앞에서 일행은 처음으로 기쁨의 고함을 질렀다. 이젠 살았다. 용기가 치솟아 걸음을 빨라진다.
그러나 얼마 후 작은 고갯길을 오른편으로 돌아 오르는 순간 불쑥 나타난 소위 마의 심연.
불빛에 어렴풋이 나타나는 마의 괴수는 금방이라도 포위할 것 같아 인간의 전의를 싹쓸이 앗아간다.
한계가 보이지 않는 음산한 사수. 이것이 지옥의 강이 아니던가.
속설의 이무기가 불쑥 고개를 수면 위로 내밀고 포식할 것도 같아 일행의 용기는 만용으로 기울어 더 이상의 전진을 포기하던 중 돌연 연장자 김기연씨가 몰래 준비해 온 미군 야전용 고무침낭을 배낭에서 꺼내 바람을 넣고 새끼줄 두겹으로 복부에 묶고는 풍덩 물에 몸을 던져 생사의 갈림길에 놓였다.
그의 왼손에 높이 들고 있던 횃불이 한쪽 팔과 두 발의 움직임에 따라 서서히 움직여 지각의 심장이 처음으로 요동을 하고 태고의 허를 찌르는 인간의 기백이 아슬한 묘기를 연출하여 마침내 괴수를 정복하고 드디어 피안에 닿았으니 일행의 흥분은 극에 달했으며 인간승리의 감동이 암흑을 뒤집었다.
"도강 성공! 어서 뒤따라라."
마의 심연을 건너니 이로부터가 원시의 땅이요 신천지이다.
세번째로 움츠려 건넜던 나는 인간이 처음으로 발 딛은 처녀지에서 나도 모르게 흥분이 되어 일행은 얼싸안고 만세를 불렀다.
제1광장에서 마의 심연까지는 옛날 누군가 입굴한 흔적이 있었으나 여기는 진정 원시의 땅이었다. 이에 즐비하게 나타나는 기암괴석, 억년의 세월동안 형성된 석종, 석순, 기기묘묘한 종유석의 숲, 자연의 조화라지만 신의 기공이요, 세월의 무게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당일 11광장(막장)을 뚫고 오후 5시 가까이 퇴굴했다.
이리하여 첫날 삼지 11광장 472m의 성류굴을 개굴해 냈다.
성류굴을 뚫었다.
전날 교육청 전직원이 이곳에 가서 야유회를 열었는데 깜깜한 동굴을 기웃거렸을 뿐 감히 개굴의 용기를 내지 못한 것을 연구소가 일본 지질학회의 자문을 받고 마침내 뚫어 낸 것이다.
"교육청 연구소 직원이 성류굴을 뚫었단다.", "백 강아지가 되어 나온다는 말은 괜한 헛소문이었단다."
성류굴 개굴 소식은 퍼져 나갔다. 그 후 관심있는 사람들이 뒷날의 정밀 탐사를 자원하고 나섰다. 10월 13일 두번째 탐사가 있었다.
포복의 기법도 늘고 수영의 기능도 늘어 민첩하게 재 탐사는 쉽게 이루어졌다. 이날 10광장 오른편 상벽 원혈 너머의 12광장을 발견하고 또 한번의 개가를 올렸다.
마의 심연의 수심도 측정하고 언저리의 광경을 스케치도 하며 굴지곡의 조사도 대충 마쳤다.
그리고 돌아와 정황을 위에 보고하고 (당시 문화재 관리권자가 교육감) 곧 굴도를 제작함가 동시에 '성류굴탐사'의 초고를 조선일보사에 보내어 '울진, 거대한 지하 석회암동굴 발견' 이라는 제하의 기사가 4면에 가득히 실림으로서 세상 사람들에게 처음 알려졌다.
성류굴 개굴 과정에서 일어난 사고 경위를 밝히지 않을 수 없다. 사고 당사자가 필자였고 하마터면 생명을 잃을 뻔한 아슬아슬한 고비가 있었음을 앞에서 약간 언급했었다.
세번째로 입굴한 10월 27일 마의 심연에서 준비해간 2인승 고무보트의 언저리를 한 동료가 잘못 밟아 배가 물에 빠졌다. 캄캄한 물 속으로 빨려 들어간 두 사람은 부둥켜안은 채 허우적거리다가 천우신조로 수중으로 뻗어 내린 암반에 발이 닿아 서로가 손을 떼고 물위로 솟아 살아날 수 있었다.
워낙 캄캄하다 보니 전후좌우는 물론 상하를 구분할 수 없는 상태라 그 암반이 없었다면 등산복을 두툼하게 입은 두 사람은 죽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 때 죽었으면 내 인생은 20대 초반에서 요절하고 성류굴의 공포와 위엄은 더 격상이 되어 그후의 개발에 차질을 주었으리라.
가을이 다 가고 11월에 접어들었다. KBS방송국 뉴스 편집반을 불러 촬영안내를 하고 총무처에 낼 문화재 인준허가서를 갖추어 그들의 차를 같이 타고 서울로 향했다. 총무처에서 성류굴의 실황을 설명하고 그날 밤 서울 문화극장 뉴스에 소개되는 성류굴 흑백사진을 본 기억은 평생 잊을 수가 없다.
신문과 극장에서 널리 홍보가 된 성류굴은 각처에서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 방문하고 조사에 들어갔다. 11월 중순 서울대 물리대 교수 일행이 중앙의 문화재 관리관과 함께 성류굴 조사차 울진을 방문했다. 이날 교수팀과 마의 심연 언저리 상층혈에서 동제의 숟가락과 철제 연모 및 항아리 파편과 숯덩이와 함께 아기손뼈 화석을 발견하는 개가를 올렸다.
굴의 생성 나이가 20억년(조사팀 교수들의 주장)이라는 증언과 함께 국내 굴지의 석회동굴임을 확정했고 손뼈화석을 증거로 임진왜란 당시 왜병에 쫓겨 인근 주민100여명이 입굴하여 아사했다는 말이 사실로 드러났으며 역사적, 문화적 개발의 필요성을 공감하게 됐다. 성류굴 개굴 당시에는 교육청에서 관장을 하다가 그후 군청으로 이관되었다.
그후로도 필자는 20여 차례 탐사하였으며 홍보 원고도 20여편 가까이 썼다. 21세기를 시작하는 새 성류굴 개발을 촉구하기도 했고 성류굴이 다른 동굴과는 다른 문화의 배경을 지닌 가치성의 부상을 강조했다. 그리고 반드시 성류굴의 빠른 연혁을 정립해야 한다는 개굴원들의 소리를 적는다.
들리는 소리에 의하면 성류굴 개굴을 주장하는 자칭 영웅들이 있다고 한다. 개발에 참여하면서 입굴한 그들이 개굴 영웅이 될 수 없다. 우리의 개굴 노력이 헛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성류굴은 여느 동굴과는 다른 역사와 문화를 담고 있다.
성류굴의 정사와 개발의 연혁을 정립하고 문화재 개발을 서둘러 명실공히 21세기 새 성류글을 만들 수는 없을까? 개굴자의 한 사람으로 간절히 바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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