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곡교회, 울진군 최초교회-지하방공호 등 당시 상황 엿볼 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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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Lev Nikolajewitsch Tolstoi)’는 “살아있는 모든 것들에 대한 사랑, 이것이 나의 종교다(My religion is love to all living beings)”라고 말했다.종교인에게 비종교인은 타자고, 똑같이 비종교인에게 종교인은 타자일 수 있다. 양자는 서로 다른 세계에서 살아간다.
종교인과 비종교인은 서로 다른 차이성의 세계에서 살아가겠지만, 끝내 서로의 차이성을 이해하고 적극적으로 마주쳐야만 진정한 대화와 성장, 이해가 가능한 것이 아닐까.
타자를 타자로 인정하고 열린 마음으로 마주치는 삶, 그것이 우리 모두의 공동과제가 된지는 이미 오래다.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을 사랑하자. 생명이 있는 것들을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나 종교인이다. 행곡교회(杏谷敎會), 그곳에 가면 종교인이던, 비종교인이던 가슴 가득 밀려드는 사랑을 느낄 수 있다.
근남면 행곡리 천연마을에 위치한 행곡교회는 울진군에서 최초로 건립된 교회이며, 전국적으로도 5번째 설립된 침례교회이다.
행곡교회는 1907년 11월 15일 침례교회의 ‘말콘 펜윅(Malcolm C. Fenwick-캐나다)’
선교사에 의해 조직된 대한기독교회의 권서문서 전도자인 손필환(孫弼煥)교사가 울진 행곡리를 방문하면서 시작되었다.
당시 손필환교사는 행곡리 남규백씨의 초당채를 빌려 행곡교회의 설립 예배를 시작했는데, 이것이 울진 지역에 침례교회의 뿌리를 내리는 첫 계기가 됐다.
1907년 겨울 충남 구역의 공주교회에서 대한기독교회 총회격인 「제2회 대화회」가 열릴 당시 손필환교사는 울진 지역 출신인 전치규, 전치주, 남규연, 남규백씨 등 8명의 성도를 이 대회에 동참시키는 등 침례교회의 전파에 온 힘을 쏟았다.
이후 1944년 일제(日帝)의 교단 해체령에 따라 예배와 집회가 금지된데 이어 교회가 폐쇄되고 재산을 몰수당하는 기독교 사상 최악의 시련기가 닥쳐왔지만, 8.15 해방과 더불어 학원 설립과 후진양성 등 기독교단 재건에 다시 박차를 가하게 된다.
울진의 근대문화유산 행곡교회
1907년 행곡리에서 남규백씨의 초당채를 빌려 예배를 시작했고, 이후 바로 앞에 위치한 터에 행곡교회를 건립했지만 이 옛 교회의 정확한 신축연대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현재 행곡교회의 신도들은 1983년 9월1일 신축한 신교회에서 예배를 보고 있으며, 옛 교회는 이 교회 김형욱 목사의 살림집으로 사용되고 있다. 한옥형 목조건물인 행곡교회는 7번국도 근남면 수산리에서 불영사계곡 방면으로 2킬로미터 정도 가면 우측으로 마을 쉼터 뒤쪽에 위치하고 있다.
평평한 대지위에 지어진 행곡교회 마당에 들어서면 마주 보이는 정면에 옛 행곡교회 건물이 위치해 있고, 좌측에 신축한 교회가 있다.본 건물 우측에는 전체적으로 ㄷ자형을 이루고 있는 부속건물이 남향으로 배치되어 있다.
울진군의 최초 교회인 행곡교회는 정면 4칸, 측면 2칸의 동서로 긴 장방형이고 내부는 통칸으로 동쪽에 강단(講壇)이 설치되어 있다.
바닥은 전체가 마룻바닥이며 천정은 당초에는 연등천장(목조건축의 내부에서 서까래 바닥 면을 보이게 한 천장)이었으나 현재는 대들보 위를 베니어합판으로 마감했다.
이 건물은 막돌 외벌대 기단(잡석으로 된 댓돌을 1단으로 설치한 기단) 위에 초석(礎石)을 놓고 네모기둥을 세워 한식 지붕가구를 받친 전통 한옥 구조로써, 지붕은 원래 팔작지붕에 한식기와를 이었는데 수년전에 일식 기와로 교체했다고 한다.
창호(窓戶)는 정면의 좌측에서 두 번째 칸에 주 출입문인 두짝 미서기 문을 달았고, 우단에는 외여닫이문을 달았으며, 창은 쌍여닫이창과 두짝 미서기창을 달았다.
이 건물 대들보 밑면에는 「嘉慶十四年乙巳三月二十五日午時立柱上樑(가경십사년을사삼월이십오일오시입주상량)」이라는 묵서명(墨書銘)이 있다.
대들보 밑면의 묵서명에 대해 문화재 전문가들은 “예전 행곡교회를 지을 당시 다른 곳의 건물 목재를 가져와서 사용한 것”으로 추정했다.
세 명의 기독교 순교자 배출
1983년 신축한 신교회 정면의 우측 벽면 머릿돌에는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으로 주후 1908. 11. 15 ‘불러냄’을 받은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영적생활을 위하
고 침례교단 앞에 거룩한 숭고의 피를 바치신 본 교회 출신인 고 전치규목사(1944. 2. 13 함흥형무소에서 고문으로 옥사)와, 고 전병무목사(1949. 10. 7 경북 울진군 행곡서 공비총살로 순교), 고 남석천 성도(1949. 10. 7 경북 울진군 행곡서 공비 총살로 순교)의 숭고한 신앙정신을 기리기 위해 이 성전을 세워 교회의 머리 되신 주님께 바칩니다.
주후 기공 1983년 9월 1일 행곡 침례교회 담임목사 주성백 외 성도 일동 드림』이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머릿돌에 이름이 올라 있는 침례교 교사 출신 전치규(穉田珪) 목사는 침례교회의 대한기독교회시대(1906-1920)이던 1916년 9월 흥선골 교회에서 열린 「대화회(大和會-성경의 신앙과 정신을 바탕으로 인류의 선결조건은 화목이라 하여 대화회라고 명명했고, 교인들의 친교에 역점을 두었다)」를 통해 목사 안수를 받았으며, 원산 총부 ‘말콘 펜윅’의 비서가 되어 성경번역에 참여하기도 했다.
그는 침례교회 역사에서 분류하는 동아기독대 시대(1940~1948)이던 1942년 6월 일제 헌병대에 의해 32명의 교단 지도자가 원산 감옥에 투옥될 당시 함께 투옥되어 온갖 박해를 받다가, 1944년 2월13일 함흥감옥에서 66세의 나이에 고문으로 순교했다.
행곡교회에는 이밖에도 2명의 순교자가 더 있다.
1949년 10월 7일 행곡교회 전병무(田炳武)목사와 남석천(南錫天)신도가 지역에서 활동하던 빨치산들의 총에 맞아 순교한다.
당시 순교한 전병무목사는 앞서 동아기독대 시대에 32명의 교단 지도가가 일제(日帝)에 의해 원산 감옥에 투옥될 당시 고 전치규목사와 함께 ‘감로’라는 직책으로 투옥되었던 인물이다.
한국 침례교회는 교단이 태동한 이래 총 21명의 순교자가 나왔는데, 이중 3명이 행곡교회 출신이어서 행곡교회는 한국 침례교의 성지로 자리하고 있다.침례교인들은 지금도 행곡교회를 “순교자 기념 교회당” 또는 “동해안의 예루살렘”으로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행곡교회에 가게 되면 눈에 잘 띄지 않게 감쪽같이 만들어진 마룻바닥 한 곳이 있는데, 목사님이 가르쳐 주지 않으면 쉽게 찾기가 어렵다.
그 곳 마룻바닥 한쪽 마룻장을 들어내면 바로 지하 방공호(?) 역할을 한 곳이 있는데, 반평 넓이에 깊이 약 2미터의 공간이 나온다. 아마도 1949년 당시 이 교회의 전병무목사와 남석천신도가 빨치산의 총에 맞아 순교한 점 등으로 미루어 볼 때, 교회 초창기부터 위급한 상황이 닥쳤을 때 피신처 역할을 톡톡히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밖에도 행곡교회에는 일제 강점기 또는 해방 직후부터 사용되었을 것으로 보이는 강단과 의자, 강대상(講臺床-목사가 설교하는 책상), 특이한 조형의 문짝, 예배 시작을 알리는 오래된 손 종(핸드벨-Hand Bell) 등 골동품급(?) 볼거리가 구석구석 많이 있다.1990년 행곡교회 제19대 담임목사로 부임한 김형욱목사는 “행곡교회를 찾아오는 연세 드신 목사들과 신도들은 순교자들이 직접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던 강대상 앞에 서면 경건하고 숙연한 마음에 눈물을 흘리게 된다”고 전해준다.

전치규(田穉珪)목사는...
1878년 1월 5일 울진군 근남면 행곡리에서 전달용(田達龍)씨의 둘째 아들로 태어난 전목사는 서당에서 한문을 수학한 후 한학자로 살았다.
1910년 32세로 기독교인이 되었고 1916년 9월 목사 안수를 받았다.
1924년 제3대 감목(監牧) 으로 취임해 10년간 침례 교단 발전에 심혈을 기울인다.
1941년 6월 11일 일본 헌병대에 체포되어 원산형무소에서 옥살이를 했고, 1944년 2월 13일 66세의 나이로 부인과 슬하에 2남3녀, 손자 둘을 남긴 채 함흥감옥에서 영양부족과 고문 후유증으로 세상을 떠났다.병무(田炳武)목사는...
울진군 근남면 행곡리에서 1888년 4월 21일 전내석씨의 외아들로 태어나 한문을 공부했다.
22세에 기독교인이 됐고, 1916년(29세) 순교자 전치규목사의 형님인 전치헌씨의 주선으로 함경도 원산으로 가서 ‘펜윅’ 선교사로부터 성경을 배웠다.
1926년(39세) 교역자로서 감노직분을 위임받고 행곡교회를 시무했다. 당시 ‘성탄가’와 ‘구주 탄생가’를 직접 작사했다.
1942년 침례교단 대표 32인이 원산감옥에 투옥될 때 자진 투옥된다.
1944년 출감하여 폐허가 된 행곡교회로 돌아온 지 15개월 만에 해방을 맞이한다.
해방 뒤 그는 울진군 면장과 군민회장을 잠시 맡기도 했다. 1949년 제39회 총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울진군과 울릉도 양 구역을 1개월씩 교대로 체류하며 순회목사로 봉직한다.
1949년 10월 7일(62세) 지역에서 활동하던 빨치산들에 의해 남석천(南錫天)신도의 집으로 끌려가서 함께 총을 맞고 죽는다(당시 남석천 신도는 26세). 1949년 10월 12일 교계 저명인사들과 사회 저명인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교회·사회장 합동장례식이 치러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