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명화회장, 6.25전쟁-인민군 총탄 맞아 죽는 일 많이 보며...

1군단 이등중사로 안강·기계전투 참전
기사입력 2006.07.09 0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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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월 25일은 6.25 전쟁 발발 제56주년을 맞은 날이다.

전국 곳곳에서는 기념행사와 위령제가 열렸고 울진군에서는 이틀 앞선 6월23일 오전 11시 청소년수련관에서 기념행사가 개최되었다.

현재 울진군 관내에는 6.25전쟁에 직접적으로 참가했던 900여명의 유공자가 생존해 있고, 무공 수훈자만도 70여명에 이르고 있다.

이들 대부분은 70~80세에 이르는 노인들로서 이 가운데 상당수가 겨우 빈곤층을 면하고 있는 실정이며, 한달에 겨우 7만원의 참전수당만을 받으며 어렵게 생활하고 있다.

6.25 전쟁이 발발한지 56년이 되는 2006년 6월, 대한민국 6.25 참전 유공자회 울진군지회장인 진명화(78세, 사진) 회장을 만났다.

젊은이들의 투철한 국가관과 안보관을 거듭 강조하는 그는 정부와 울진군, 전후세대들에게 참으로 할 말이 많다고 했다.

몇 살 때, 어느 전투에, 어떤 직급으로 참여했는가.

- 6.25 전쟁이 발발하기 전인 1949년 5월11일 수도여단 사령부에 입대했다. 의정부의 육군 7사단에 근무하던 중에 6.25 전쟁이 발발하여 참전하게 되었고, 전쟁이 발발한지 얼마 안 되어 7사단 장병들은 의정부에서 거의 전멸했다. 
  

1950년 하반기에 7사단의 패잔병들이 다시 모여서 경기도 평택에서 1군단이 창설됐고 나는 그 창설 멤버이다. 박태준 전 포스코회장이 육사 6기로써 그 당시에 우리 부대의 대위였고 나는 이등중사였다. 이등중사는 지금의 계급으로 친다면 육군 병장에 해당한다.

나는 그때 1군단의 이등중사 직급으로 낙동강 방어선이 무너지기 전 안강·기계 전투에서 3일 밤낮을 전투에 임했었다. 결국 경주 불국사까지 후퇴했다가 다시 북진을 거듭하여 함경남도 청진까지 올라갔었다.

그런 가운데 중공군이 전쟁에 개입하면서 1951년 1.4 후퇴 당시 다시 밀려 내려오면서 끝내 고향인 울진까지 후퇴할 수밖에 없었고, 전시 상황이 역전되어 또 다시 북진하던 중에 강원도 속초까지 올라갔다가 휴전을 맞이했다. 
1953년 7월 27일 6.25 전쟁 휴전 후 1년여 동안 군에 더 복무하다가 1954년 9월 제대하여 고향으로 돌아왔다.

전쟁 중에 공을 세웠다고 정부로부터 1953년 화랑무공훈장을 수여받았고, 고향으로 돌아온 후 한동안 쉬다가 울진군청 농산계장을 거쳐 원남면과 북면 면장 등을 거치고 난 후에 퇴임했다.

 

한국전쟁에서 특별히 기억에 남는 일이 있다면

- 바로 옆에서 평소에 각별했던 전우가 인민군의 총탄에 맞아 죽는 일은 워낙 많이 보았기에 특별한 기억이라고도 할 수 없다.

전쟁은 인간이 타고난 감정을 순식간에 무뎌지게 할 만큼 아주 무서운 것이다. 수많은 사건 가운데 특히 기억에 남는 일은 함경남도 함흥으로 북진했을 당시 함흥 형무소 내에 있던 우물 안에서 북한군이 우물 안에 빠뜨려 죽인 200여구의 시체를 두 눈으로 직접 목격했던 일이다.

아마도 북한군이 퇴각하면서 그들 말로 반동분자라고 판단되었던 죄수들을 한꺼번에 우물 안에 쑤셔 박다시피 빠뜨려 죽이고 또 총으로 죽였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도 정말 소름이 끼치는 일이다.

그리고 아오지 탄광으로 내가 소속된 부대의 중대장 부모님을 찾아갔다가 목격했던 대규모 학살 장면은 두고두고 잊을 수 없는 피비린내 물씬 풍기는 장면이었다.

 

전쟁에 어떤 감정으로 임했었나.

- 6.25 전쟁이 발발하던 날 휴가를 나오다가 길거리에서 북한의 남침으로 전쟁이 일어났다는 가두방송을 듣고 부대로 급히 복귀했다.
국가의 부름을 받고 전쟁에 참가하는 군인에게 개인적인 감정이 개입될 수 있겠는가? 국가에서 부르기에 그냥 전쟁터로 달려갈 수밖에 없었고, 그 심정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당시 고향 울진에서는 아버님께서 단지 아들이 군에 있다는 이유로 지역 내의 빨갱이들에게 붙들려서 울진읍 대흥리까지 붙들러 갔다가 중간에 탈출했는데, 탈출하던 중 다리에 따발총을 맞았었다.

제때 치료하지 못해서 따발총을 맞은 상처에 구더기까지 생겼었는데, 생닭을 잡아서 닭살을 상처자리에 갈아 붙이고 하다가 며칠이 지난 후에 포항 병원까지 어렵게 가서 상처를 치료하고 겨우 목숨을 건졌다. 전쟁이란 그토록 잔혹한 것이다.
 

전쟁이 끝난 후에 생활은 어떠했는가

- 1954년 9월에 제대한 후 울진으로 돌아와서 몇 년 쉬었다. 나는 일제 강점기 강릉 농업학교를 나온 농업 기술자다. 몇 년 쉬고 난 후 공무원의 길을 걸었다.

결혼은 군에서 제대하기 전인 24살 때 중매로 했다. 당시 나의 계급은 상사였고 일반 사병과는 달리 영외거주가 가능했기에 결혼생활을 할 수 있었다.

아내와의 사이에 아들 넷, 딸 둘 여섯 남매를 두었다.

 

전쟁 후에 국가로부터의 대접은

- 대가를 바라고 전쟁에 임했던 건 결코 아니지만 국가에 대해 섭섭한 것은 어쩔 수 없다. 
  

현재 민주화 유공자도 몇 천만원씩의 보상금을 받고 있는데, 우리들 국가 유공자는 한달에 기껏 7만원의 참전수당을 받고 있고 무공 수훈자는 월 10만원씩의 보조금을 지급받고 있다.
그것도 2005년 작년부터 지급받기 시작했고, 그 전에는 생계가 곤란한 유공자에 한하여 생계 보조비 몇 만원씩을 받았을 뿐이다.

우리들 6.25 참전 유공자들은 거의가 70~80세에 이르는 노인들이다. 제일 막내가 지금 일흔 세 살이다.

우리가 살면 얼마나 더 살 수 있겠는가? 6.25 전쟁을 몸소 겪은 우리들 세대는 전쟁에 참전했을 뿐만 아니라, 전쟁이 끝난 후에도 복구와 재건운동에 몸과 마음을 다 바쳤고 새마을 운동에도 신명을 다했다. 이루 말로 다할 수 없는 그런 고생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은 겨우 입에 풀칠만 하고 살아가는 수준이다.

뭔가 잘못되지 않았는가?

실제로 우리들은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도 참전 유공자증이나 국가 유공자증이 아니라 경로 우대증을 먼저 꺼내게 된다. 경로우대증보다 참전 유공자증이 더 홀대받고 있다. 금전적인 혜택에 앞서 참전 유공자증이나 국가 유공자증이 경로 우대증보다 못한 대접을 받는다는 것은 분명 문제가 있지 않은가?

특히 국가 유공자와 민주화 유공자 사이에는 어느 정도 상반되는 괴리감이 존재한다. 그런데 국가 유공자보다 민주화 유공자가 훨씬 더한 우대를 받는 세상에 우리는 살고 있다.   

학생들 교과서는 또 어떤가? 학생들 교과서에는 6.25 전쟁에 대해서 변변한 설명도 한줄 없다. 대체 학교에서 무엇을 가리키는 것인가?

우리 아이들에게 절대 필요한 투철한 국가관은 저절로 생겨지는 것인가?

이 나라가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데... 참으로 서글프다고 느껴질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6.25 참전 유공자회에서 추진 중인 사업이나 계획 중인 사업은 어떤 것이 있는가

- 6.25 참전 유공자 가운데 국가로부터 훈장 등을 수여받은 사람들을 별도로 국가 유공자로 부르고 있다. 물론 정부에서 매월 지급되는 보조금도 몇 만원 차등 적용된다.
   

6.25 참전 유공자회 울진군지회는 중앙의 유공자회에서 추진하는 사업에 보조를 맞추고 있다. 예를 들면 6.25 참전 유공자라는 호칭을 일괄적으로 국가 유공자로 바꿔 부르는 문제, 그리고 현재 7만원에서 10만원씩 매월 지급되는 정부의 보조금을 상이용사 7급 정도에 준하는 액수인 30~40만원 정도로 지급하는 사안 등을 정부 측에 요구하고 있는 중이다.

지금 당장 보조금 액수가 상향조정된다고 한들 우리 여생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추가로 지급될 액수가 얼마나 더 커지겠는가? 또 명색은 우리가 국가를 지켜낸 유공자로 불리면서도 변변한 사무실 하나 없이 셋방을 얻어 살고 있다.   

지난 2002년인가 정부로부터 참전 유공자 사무실 시설비로 사용하라며 3천만원이라는 돈이 내려온적이 있었다. 그 당시 울진군청에 수차례 쫓아가서 사무실 시설비로 3천만원이 내려왔으니, 군유지를 20~30평만 무상으로 임대해 달라고 사정했으나 보기 좋게 거절당했다.

당장 사용하지 않는 군유지 가운데 자투리땅이라도 얻을 수 있었다면 벌써 사무실을 지었을 것이다.

결국 울진군의 비협조로 인해서 2003년 연말 사무실 시설비 3천만원을 눈물을 머금고 반납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지금도 900여명의 회원들로부터 원망을 많이 듣고 있다. 회장이 돼서 변변한 사무실 하나 마련하지 못한다고...

그뿐만이 아니다. 사회단체 보조금은 또 어떤가? 울진군의 숱한 단체들에게는 매년 몇 백만원에서 몇 천만원씩 쉽게 주고 있는데, 우리 참전 유공자회는 겨우 2년 전부터 일년에 고작 200만원씩 받고 있다.

현재 울진군에 생존해 있는 6.25 참전 유공자만도 900여명에 이르는데, 우리 회원들 숫자가 적고 그동안 한 일이 적어서 고작 200만원밖에 지원 받지 못하는 것이겠는가?

 

전후세대에 한마디

- 6.25 전쟁은 먼 나라의 전쟁이 아니었다. 아주 오래전의 이야기도 아니다. 우리나라에서 발발한 전쟁이었고, 불과 반세기 전에 벌어진 전쟁이다.
   

6.25 전쟁이 어떤 이유로 발발했는지, 또 누가 하나뿐인 목숨을 바쳐가면서까지 나라를 지켜냈는지를 학교에서 제대로 교육해야 하고, 장차 이 나라를 이끌어갈 학생들은 철저하고 정확하게 배워야 한다.   

얼마 전 울진군에서 열렸던 6.25 전쟁 발발 56주년 기념행사만 보더라도 앞당기거나 미뤄서 할 것이 아니라 6월 25일 당일에 해야 한다. 우리들이 눈이나 비가 온다고, 공휴일이라고 전투하지 않았었나? 그 숭고한 의미를 희석시키거나 퇴색시키는 일은 결코 없어야 할 것이다.

또 이번 월드컵에서 길거리로 쏟아져 나와 밤을 낮 삼아 응원하는 수많은 젊은이들을 보며 참으로 많은 생각을 했다. 태극기를 찢고 도려내어 옷을 해 입거나, 응원이 끝난 뒤에 광장에 버려진 채 숱한 사람들의 발에 무참히 짓밟힌 채 걸레조각처럼 버려져 있는 태극기들은 끝내 무얼 웅변하는 것이겠는가?

우리 세대는 태극기를 지켜내기 위해 전쟁터에서 죽고 다치고 불구가 됐다.

과연 태극기를 그렇듯 가볍게 여기는 수많은 젊은이들이 만약 6.25와 같은 전쟁이 다시 일어나게 되면 즉시 총을 둘러메고 나라를 지키기 위해 전쟁터로 나갈 수 있을 것인가? 나는 지극히 힘들 것이라고 생각한다.

국가가 없는데 나라는 개인이 존재할 수 있는가? 아직도 한반도는 분단 상태이고, 6.25 전쟁은 끝난 것이 아니라 말 그대로 잠시 휴전상태를 유지하고 있을 뿐이다. 월드컵을 응원하면서 태극기로 의상을 만들어 몸에 걸치고, 발에 밟히는 태극기를 선뜻 줍고 말리고 펴서 소중하게 간직하지 못하는 젊은이들의 부모님들이 직접 겪은 전쟁은 정말 처참했다.

아직까지 종결되지 않은 전쟁, 그것을 또 다시 후손들에게 대물림하지 않기 위해서는 좀 더 투철한 안보관과 국가관이 필요하다. 그것이야말로 진정 전후세대의 몫이 아니겠는가?

제발 이념과 안보의 중요성을 망각하지 말자.

 


울진부근 전투(戰鬪) 경과요도

당시 오진우(吳振宇)가 울진지역 공격
<發堀, 울진 관련 문서>

 

아래 실린 지도는 6.25 전쟁이 발발한지 일주일 뒤인 1950년 7월2일에서 3일, 이틀 동안 울진 땅에서 벌어졌던 전투 경과요도이다.

개전 초기 북한군의 막강한 화력에 밀려 후퇴에 후퇴를 거듭할 수밖에 없었던 한국군의 아픔이 생생히 전해진다.

전쟁 발발 일주일 만에 당시 북한군 제2군단 소속 766부대가 이미 울진군에 발을 들여 놓았고, 그것도 두 팀으로 나눠 해안과 산악을 따라서 남하하는 부대에 쫓기면서 이틀 만에 근남면에서 평해읍까지 밀리는 모습을 보여준다.

당시 북괴군 제2군단 제766 부대장이 총좌계급이던 오진우(吳振宇)였다는 사실도 눈길을 끈다. 북한의 혁명 1세대인 오진우는 6.25 전쟁 당시 766유격 부대장으로 동부전선 상륙작전을 감행하여 한국군과 국제연합군(UN)에게 큰 타격을 준 전과를 기반으로, 1961년 노동당 중앙위원이 되었고, 이후 군총참모총장, 중앙노동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상무위원회 위원, 인민무력부장등을 지낸 인물이다.



대담 이명동 기자 / 사진 김석칠 기자

[대담 이명동기자,사진 김석칠기자 uljin@uljin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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