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무시 운전수 -강태성씨가 살아온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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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가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
그런데도 우직하게, 때로는 미련스러울 정도로 생활풍속과 노동 등을 통하여 우리들만의 멋과 아름다움, 기억과 추억이 고스란히 배어있는 토종문화와 기층문화, 그 삶을 고집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의 삶이야말로 전통사회에서 우리들 할아버지, 할머니의 삶이었다. 고스란히 예전 방식으로 그 맥을 이어가는 사람들. 토종문화를 지키고 보전하려는 사람들. 또는 직업적 방편으로 먹고 살다보니 언제부턴가 주변에서 잊혀 가는 것들이 정작 내 삶이 되어버린 사람들. 전통사회의 개념으로 본다면 '서민속의 서민'으로까지 표현할 수 있을 그들의 생산적이고 적극적인 삶의 현장을 잠시 기웃거려 본다.
60년대에서 80년대 초반까지 험준한 산골길을 야무지게 누비고 다니던, 그리고 아직까지도 힘찬 건재함을 과시라도 하듯 산판(山坂-나무를 벌목하는 현장)이나 광산, 송전철탑 건설 현장 등지에서 왕성하게 현역으로 활동하는 제무시는 인류가 만들어낸 최강의 트럭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미국의 자동차 회사인 General Motors Company의 앞 글자를 딴 G. M. C.에서 생산된 전·후륜까지 합쳐 6륜구동의 힘 좋은 트럭을 시골 사람들은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그냥 `제무시(제무시키)'라고 불렀다.
제무시 트럭은 깊은 산중에 위치한 산판과 광산의 가파르고 험한 길을 오르는데 아주 요긴하게 사용되었다.
대부분 1942년에서 1944년에 걸쳐 생산됐고, 지난 6.25 동란 시에 미군들이 군용으로 사용하다가 이 땅에 남겨두고 간 제무시는 60년대 말 ``15년 이상 된 차량은 폐차해야 한다''는 법 규정에 따라 전량 폐기될 뻔한 위험을 겪기도 했지만, 당시 지하철 공사가 막 시작된데 따라 ``그만큼 힘 좋은 트럭은 없으니 공사현장에서 계속 사용하게 하라''는 박정희 대통령의 특별지시에 의해 내구연한에 상관없이 계속 사용되어 왔고, 지금까지도 산악이나 험한 비포장 길에서 목재와 석재 등을 나르는 데 필수적으로 이용되고 있다.울진지역에서도 나무를 가득 실은 채로 길거리를 오고가는 제무시를 가끔씩 만날 수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제무시는 강원도 태백이나 인제, 또는 인근 지역인 영양과 봉화, 멀리 전라도 등지에서 출장 나온 차들이다. 현재 울진지역에 차고지를 두고 현역으로 뛰고 있는 제무시는 겨우 서너대에 불과하다. 이리저리 어렵게 수소문한 끝에 20대 초반부터 제무시 운전을 시작한 강태성(61세, 위 사진)씨를 서면 광회리에서 만날 수 있었다.
처음에는 ``내가 먹고살기 위해 막 살아온 인생이 무슨 인터뷰할 꺼리가 있다고......''하며 한사코 손사래를 치던 강씨였지만, 끝내 자신이 살아온 결코 짧지도 순탄하지도 않았던 인생 이야기를 술술 풀어놓았다.강씨는 서면 광회 1리, 일명 `광비'에서 출생하여 지금까지 60평생을 고향땅에서만 살아가고 있는 순 토박이다. 19살 때 1년 연하의 부인을 만나고 1~2년 농사를 짓던 강씨는 부칠 수 있는 땅덩어리는 작은데 식구는 많은지라, 하도 먹고 살길이 막막하여 강원도 황지와 인제의 산판 현장으로 들어가게 된다.
``별다르게 배운 기술은 없고 무작정 산판현장으로 들어가서 톱질부터 시작했습니다. 그때 산판에서 나이든 영감들하고 긴 톱을 맞잡은 채 하루 종일 톱질하고, 밤이면 산속에다 나무로 얼기설기 뼈대를 세우고 비닐로 지붕을 대충 만든 후 구들장을 놓은 그런 움막에서 먹고 자고 했어요...''
산판은 항상 겨울에만 공사를 벌인다. 아무리 빨라도 온산에 단풍이 질 때쯤이 되어야 산판은 시작된다. 나무가 생장을 잠시 멈추는 겨울이 아닌 다른 계절에 벌목한 나무는 목재의 빛깔도 곱지 않고, 벌레가 쉽게 먹어서 값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목상(재목상-材木商)이 특정한 산을 입찰보고 난 후에 인부들을 보통 십여명 정도 모아서 산판을 벌입니다. 깊은 산속에서 나무 베는 벌목공, 나무를 져 나르는 목도꾼, 제재소로 나무를 운반하는 제무시 운전수, 밥해주는 아줌마 두어명, 그런 사람들 십여명이 한군데 모여서 짧으면 한두 달, 길게 가면 서너 달씩 생활하게 되는 거지요”
하루 종일 녹초가 되도록 뼈 빠지게 톱질을 하고 강씨가 받은 임금은 한달에 5천원으로 당시에는 꽤 큰돈이었다.
``추위가 사정없이 살갗을 파고드는 한 겨울에 산판현장에서 한달 벌고 난 다음, 재수가 없어 눈이라도 많이 내리는 해면 그 눈 속에 갇혀서 일도 못하고 한두 달 움막에서 밥만 축내게 됩니다. 그런 때는 돈을 백원이라도 벌기는 고사하고 밥값으로 빚만 지고 집에 돌아오기가 일쑤였어요''오로지 먹고 살기 위해 톱질로 산판현장을 찾아다니던 강씨는 톱질보다 훨씬 편해 보이고 폼도 나고, 임금도 높은 제무시 운전을 배워야겠다고 마음을 먹게 된다.
그때 당시 산판에서 운행하던 제무시는 미군부대에서 사용하다가 내구연한이 지난 것을 일반인들이 불하받은 것들이었다.
강씨는 먼저 제무시 운전 조수로 취직했다. ``조수로 일을 배울 때의 고생이야 말해서 무엇 합니까? 운전사가 오기 전에 본네트 앞에 달린 작은 구멍으로 시동기를 넣어 시동을 걸어놔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온갖 잡심부름에 심지어 툭하면 망치 같은 공구로 머리를 두들겨 맞으면서 악착같이 제무시 운전을 배웠어요. 그래도 제무시 기사가 톱질하는 벌목공보다는 당시 몇 천원 더 받을 수 있었으니까요''
그렇게 수년간 제무시 운전을 배우고 난 강씨는 처음에는 면허증도 없이 운전을 시작했다. 요즘처럼 단속이 심한 것도 아니었고, 주로 산중에서 산중으로 옮겨 다니면서 산판일을 하기 때문에 단속을 당할 위험도 없었다.
신혼 초에 조수생활로 운전을 시작하면서 주로 강원도 등지에서 벌어지는 산판 현장을 쫓아 이리저리 떠돌아 다녔기에 부인과 애틋한 부부의 정을 나눌 짬도 거의 갖지 못했다.
``쌀을 가득 지고 들어가서 몇 달씩 깊은 산속의 산판 움막에서 일하고, 먹고, 자고 했는데, 일이 하도 힘들어서 아무 생각도 나질 않았어요. 추운 겨울날 아침에 일어나면 움막을 덮은 비닐 안쪽으로 얼음이 허옇게 덮여 있기도 하고, 낮이면 또 얼음이 녹으면서 물이 뚝뚝 떨어지고는 했습니다. 또 그때는 젊었으니까 추위만큼 외로움도 뼛속 깊이 파고들었고... 먹는 거요? 밥과 김치에 멀건 된장국이 전부였지요''
그렇게 강씨는 혹독한 강원도의 겨울 산중을 한두 달, 길게는 서너 달씩 이리저리 옮겨 다니면서 집에 남아서 기다리는 많은 식구들을 위해 힘들게 돈을 모으고 또 모았다.
산판이 끝나면 강원도 현장에서 봉화 분천까지 기차를 타고 와서 서면 광회리 집까지 왔다가 또 떠나가기를 수도 없이 반복하면서......제무시는 목재를 가득 실은 채로도 80도 가까운 산비탈을 무리 없이 치고 올라가는 엄청난 괴력을 자랑한다.
강씨에 따르면 제무시는 상상을 초월하는 특유의 파워에 더해 차체의 무게중심이 잘 맞아서 아무리 험한 임도를 타고 다녀도 전복되는 사고가 잘 나지 않는다고 한다.
당시나 지금이나 꼬불꼬불하고 경사각이 심한 산중의 각종 공사판이나 산판에서는 제무시를 쫓아올만한 트럭이 없다는 것이다.
깊고 험한 산중에서 산판을 벌이게 되면 제일 먼저 산판으로 제무시가 오르내릴 수 있는 길을 닦게 된다.
요즘처럼 굴삭기나 불도저 같은 중장비가 없던 시절, 산중으로 길을 닦는 데는 남포(다이너마이트 발파)와 삽, 괭이, 사람의 일손이 전부였다.깊은 산중에 몇날며칠 천지를 진동시키는 남포소리가 들리고, 삽과 괭이를 든 사람들의 부산한 일손이 보태지고 나면 어느새 울퉁불퉁한 길이 턱하니 생기고는 했다.
``잘 닦이지 않아도, 대충만 길이 만들어져 있어도 제무시는 갈수 있어요. 사실 제무시가 가지 못하는 길은 없었지요. 생산연도도 오래되고 험준한 길만 골라서 다니다보니 자연히 제무시는 고장도 잦았습니다. 특히 산중에서 제무시의 샤우도(샤프트)가 부러지면 임시 처방으로 박달나무로 샤우도를 깎아서 사용하기도 했어요. 그래도 잘 굴러 갔습니다''
짐칸 가득히 산판에서 베어낸 나무를 싣고도 모자라서 작은 나무로 부목을 대고 또 다시 나무를 층층이 올려 쌓은 흡사 거대한 괴물처럼 보이는 제무시를 운전하며, 강씨는 남포로 급하게 닦아서 울퉁불퉁 요철이 심한 임도를 따라 산판 길을 쉼 없이 오르내리며 젊은 시절을 산속에다 묻었다.
가끔은 박달나무로 제무시 부속을 깎아 끼우기도 하면서 그렇게......
강태성씨는 ``지금까지 살면서 단 한번도 즐거운 날이 없었다''고 잘라 말한다.
어찌 한 사람의 일생에 단 한번도 즐거운 날이 없었을 까만은, 그만큼 그의 인생이 남다르게 고달팠음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심사일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이때까지 정말 고생만 죽도록 했어요. 학교는 문턱에도 가보지 못했어요. 학교 다니는 친구들이 부러워서 부모님께 학교 보내 달라고 하면 꼴 베라, 소 먹여라, 밭에 나가 일해라...... 보잘것없는 살림살이에 무슨 할일은 또 그렇게나 많은지, 한때 겨우 학방을 다녔는데 천자문도 다 떼지 못하고 내 이름 석 자 쓰는 것만 배웠습니다''
자신이 못 배운 게 한이 되어 1남 3녀인 자식들만은 원 없이 공부를 시켜주려고 했는데 그것도 뜻대로 되지 않았다는 강태성씨.
강씨가 산판으로 돈 벌러 들어가고 나면 남아 있는 식구들은 작은 밭뙈기에 감자와 옥수수를 심어서 그렇게 근근이 먹고 살았다.
``윤보선 대통령 때인가 그때, 광회리 마을에 보(洑-논에 물을 대기 위해서 둑을 쌓고 냇물을 끌어들이는 곳)를 만들면서 논농사라는 것을 짓게 됐고, 그때 처음으로 쌀밥을 먹어 봤어요. 보가 만들어지고 난 다음에는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자기 땅에다 맨손으로 논을 일구었습니다. 그 당시 보를 만들 때 막일꾼은 품값으로 하루 30원, 바위를 깨뜨리는 남포 기술을 가진 화약기술자는 100원씩 받았더랬지요''
강씨는 지금도 감자를 즐겨 먹지 않는다. 아주 어린 시절부터 젊은 시절에 이르기까지 감자를 하도 자주 먹어 질려 버렸기 때문이다. ``식구는 많고 먹을 것은 부족하고, 그놈의 감자는 생각만 해도 징그럽습니다. 일 년 내내 감자만 먹고 나면 덧정 없어요. 그나마 봄에는 산나물이라도 뜯어 삶아 감자를 싸 먹으니까 한결 나았지요. 감자에 질릴 때쯤 보리 당가리(보리등겨)로 음식을 해 먹게 되는데, 이걸 먹고 나면 또 심한 변비에 걸려 며칠씩 끙끙거리며 고생해야 했어요. 그때는 왜 그리도 빨리 배가 꺼지던지......''강씨는 8남매의 맏이로 태어났다. 거기에 더해 어머님이 돌아가시고 난 뒤 아버지가 재혼하여 3남매를 더 두었으니 11남매의 맏이인 셈이다.
``정말 겪어본 사람만이 알 수 있겠지만 11남매의 맏이는 죽을 지경일 수밖에 없습니다. 없는 살림에 먹고 살아야지, 동생들 뒤치다꺼리해야지...... 정말 돈이 아까워서 술, 담배도 배우지 못했습니다. 집사람에게 항상 미안하지요. 집사람이 시집오자말자 꼬박 10년 동안 시할머니 대소변을 받아내면서 고생했어요. 시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난 다음에 시어머니를 계속 모시다가 또 돌아가시고 난 후 이제 좀 편해지겠다 싶었는데, 이번에는 울진~영주를 오가면서 소 장사를 하시던 아버지가 어머니 돌아가시고 2년 만에 새어머니를 모시고 집으로 들어왔습니다.
신혼 때부터 먹고 살기 위해 툭하면 산판으로 떠날 수밖에 없는 남편 만나서 심하게 마음 고생했지, 시할머니 한분에 시어머니 두분까지...... 말도 못하게 고생한 거 다 압니다. 미안한 마음이야 끝이 없지요''
강태성씨는 1945년 일제로부터 해방되던 해에 태어난 해방둥이다. 그는 자신이 해방둥이어서 가난하게 살아왔다고 믿는다. 자신의 친구들 역시 해방둥이여서 잘된 사람이 없다고 한다. 해방둥이들은 대부분이 다 가난하고 힘들게 살아간다고 그는 말한다. 그저 남한테 빚 안지고 삼시 세끼 제때 밥 먹고 사는 친구들이 제일 잘된 친구들, 해방둥이들이라고 생각한다.겨우 남의 빚 얻어 쓰지 않고 밥은 먹고 살만하다고 여겨지던 4년 전에 강씨는 주변에 있던 어떤 사람의 빚보증을 섰다가 1억원이 넘는 돈을 아무런 대책 없이 빚으로 떠안게 됐다.
“참 환장할 일이었지요. 그때 죽으려고도 몇 번 시도했었는데 사람의 목숨이란 것이 그렇게 쉽게 죽어지는 건 아니더라고요. 잘 안 죽어 지대요. 뭐, 이렇게 또 살아보는 거지요''
강씨가 산판으로 일거리를 찾아서 떠돌아다니던 70년대 중반, 집 앞으로 36번 국도 확, 포장 공사가 시작되었다.
``참말 찢어지게 힘들게 살다가 박정희대통령때 36번 국도 확, 포장 공사를 하면서부터 조금 먹고 살만해졌어요. 근 10년 가까이 도로공사 현장에서 막노동도 하고 운전도 하면서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때 집사람은 수십 명이나 되는 공사현장 인부들의 인심을 얻어서 밥도 해주고 하면서 제법 알차게 한푼 두푼 돈을 모았어요. 그래서 10년 가까이 모은 돈으로 당시 400만원이던 빚도 다 갚을 수 있었습니다”
36번 국도 확, 포장 공사현장에서 일하던 그때가 그나마 자기 인생에서 제일 먹고사는 걱정이 덜했었다는 강씨다.
그 후 강씨는 중석을 채굴하는 옥방광산에 다니면서도 한동안 기계 담당 기사로 생활했다.20대 초반부터 일평생 제무시와 함께 한 강씨지만 이젠 그도 제무시 운전을 그만 두어야 겠다고 마음먹고 있다.
제무시는 요즘에 출시되는 자동차처럼 운전이 편하지도 않고 힘이 많이 드는데다가, 산판을 벌이는 곳도 예전에 비해 현저하게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수년전부터는 수입목재도 엄청나게 많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고, 원래 강원도와 울진 등지의 산판에서 베어낸 나무는 광산 갱도의 버팀목인 갱목으로 많이 사용됐었는데 점점 광산이 줄어들면서 목재 사용량도 그에 따라 급격하게 줄어들고 있습니다. 그것보다 우선은 운전하는데 당장 힘이 달리기도 하고요''
강씨가 수년전 구입한 일명 ``딸딸이''로 불리는 제무시 모양으로 개조된 트럭도 얼마 전 산판 현장에서 일하던 중 고장이 나서 현재 집 옆에 꼼짝달싹 못하고 세워져 있다.
정비공장에 알아봤더니 엔진을 고치는데 몇 백만 원이 든다고 하기에 포기하고, 조만간 부속 값이라도 후하게 쳐주는 중고 자동차 업자에게 제무시를 팔아치울 계획이다.
``엄밀히 얘기하면 지금 내가 갖고 있는 제무시는 정통 제무시가 아니라 요즘 자동차 엔진에 껍데기를 짜깁기한 그냥 제무시를 흉내 낸 트럭입니다. 1940년대에 생산된 제무시는 벌써 환갑 진갑을 다 지났으니까, 생산될 당시의 차체모양을 여전히 유지하고 있는 제무시는 전 세계 어디서도 구경할 수가 없게 된 것이지요......''
요즘 강씨는 각 기관에서 시행하는 산림 간벌작업에 작업자로 참여하면서 일당을 벌고, 집 곁에 딸린 천여평 밭에 고추농사도 지으며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
그때는 그랬었다. 산골동네 조무래기들이 어느 날 산판현장을 찾아서 우렁찬 굉음으로 마을에 나타난 제무시에서 뿜어져 나오는 배기가스 냄새를 조금이라도 더 맡아 보려고 죽을힘을 다해 트럭의 뒤를 쫓던 그런 시절이 있었다.
아주 느리게 먼지를 날리며 비포장 언덕길을 힘들게 올라가는 제무시 꽁무니에 1미터, 2미터 발을 동동거리며 매달려 간 것을 또래들에게 무용담처럼 자랑하던 그런 시절이 있었다. 불과 20여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평생 ``단 한 번도 즐거운 날이 없었다''고 술회하는 제무시 운전사 강씨를 뒤로하고 내려오는 길, 뭔가 울컥하고 목구멍을 넘어오면서 여운을 남기는 이것은 또 무엇인지......이명동기자 / uljinnews@empal.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