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川橋碑(북천교비)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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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들어가며
2.북천교비가 현 위치에 서기까지
3.금석유물과 금석학
4.북천교비 특징과 내용
5.북천교비가 있었던 시대
6.맺는말
1. 들어가며 우리 고장 울진에도 과거의 금석유물이 많이 산재해있지만, 뭐니뭐니해도 最古(최고)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1988년 1월 죽변면 봉평2리의 논에서 발견된 신라 법흥왕 11년(524)의 국보 242호 울진 봉평신라비(蔚珍 鳳坪新羅碑)이다.
지금 까지 조사된, 물론 선사시대의 암각화도 넓은 의미로 금석유물로 볼 수 있지만, 銘文으로 발견된 것은 봉평비가 가장 오래된 것으로 이견이 없다.
다음의 古碑(고비)1)가 바로 이 글에서 다룰 1603년에 세운 平海 北川橋碑(평해 북천교비)다. 울진군민들 다수는 이 碑가 현존하는 두 번째 古碑임을 아는 이도 드물 것이다.
나 또한 이번 조사과정에서 알게된2) 사실이었다.
이 글은 역사적 사료에 바탕을 두고 있지만 지역문화에 대한 애정과 관심을 유발하고자 함에 목적을 두고 있어 될 수 있는대로 쉽고 재미있게 쓸려고 하지만 금석문에 관한 글 자체가 나 자신도 잘 모르는 한문이 많고 딱딱할 수 밖에 없는 한계를 갖고 있어 걱정이다.
해서 단순히 비의 판독에 얽매이지 않고 당시의 이야기와 오늘을 함께 이어볼 생각이다.3)
2. 북천교비가 현 위치에 서기까지
북천교비가 현재의 위치(울진군 기성면 구산리 366-5, 7번국도변)에 세워지기까지는 꽤 많은 곡절이 있었다. 처음 7번 국도 공사과정에서 발견되었는데, 파손4)이 심해 포항의 모 석물공장에다 수리를 부탁했으나 석물공장의 부도로 이 비는 종적이 묘연해지게 된다. 우연히 경주 문화원관계자들이 포항의 어느 도로변에서 발견하고 경주 문화원 정원에 세워두게 된다. 참으로 다행이 아닐 수 없다. 만약 그 때 그렇게 보관하지 않고 어느 공사현장의 축대에 들어가거나 시멘트로 발라져 땅속에 뭍혔을 수도 있었다. 생각해보면 그 비가 세상에 빛을 볼 운명이었나보다. 그렇게 있던 비가 울진에 알려지고 모 뜻있는 분들의 노력으로 지금의 위치로 안치되었으며 2004년 10월 14일부터 경상북도 지정문화재 제 361호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다. 경주문화원 관계자와 이 비를 울진에까지 올 수 있도록 노력한 분들게 감사를 드린다. 3. 금석에 대하여
가. 금석물과 금석학
이러한 碑를 우리가 흔히 金石物(금석물)이라고 하는데, 금석물의 종류는 참으로 많고 다양하다. 금석의 명칭과 분류는 학자들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으나 우리가 금석물의 이해를 위해서는 먼저 금석학과 금석물은 무엇이고 어떤 종류가 있으며 어떤 명칭을 사용하는지 정도는 알아야 한다. 다양한 견해들이 있지만 대략 요약하면 이렇다.
금석학이란, 銅器(동기)·鐵器(철기)·石(석) 그리고 화폐·印章(인장) 등에 새겨진 銘文(명문)을 연구하는 학문으로, 그 대상으로는 식기·술병·술잔·악기·무기·도장·銅鏡(동경)·불상·*5)梵鐘(범종) 甲骨類(갑골류)·陶器類(도기류)·錢幣類(전폐류) 등 다양하게 있으나 石物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이 석물 중에서도 흔히 ‘碑石(비석)’라고 하는 유물이 대부분 인데 碑石이란 故人(고인)의 事蹟(사적)을 칭송하고 이를 후세에 전하기 위하여 문장을 새겨 넣은 돌로 碑․빗돌․석비(石碑) 등 여러 말이 있다. 비석의 시초는 옛날 중국에서 廟門(묘문) 안에 세워 祭禮(제례) 때 희생으로 바칠 동물을 매어 두던 돌말뚝에서 비롯되었다 하며, 또 장례식 때 귀인(貴人)의 관을 매달아 壙內(광내)에 공손히 내려 놓기 위하여 墓壙(묘광) 사방에 세우던 돌을 말하기도 한다. 그 돌을 다듬고 碑面(비면)에 공덕을 기입하여 묘소에 세우게 된 것은 훨씬 후세의 일이며, 당시는 비석이라 하지 않고 刻石(각석)이라 하다가 이것을 비석으로 부르게 된 것은 前漢(전한) 말기나 後漢(후한) 초의 일이다. 진대(秦代) 이전의 각석으로는 우(禹)나라가 치수공사(治水工事) 때 세웠다고 하는 구루비(碑:河南省 衡山),주(周)나라 목왕(穆王)이 "길일계사(吉日癸巳)"의 4자를 새긴 단산각석(壇山刻石) 등이 있으나 진위(眞僞)는 확실치 않다. 진나라 때는 시황(始皇)이 세운 태산(泰山)의 각석 등이 있고, 한(漢)나라 이후에는 유서(儒書)나 불경(佛經)을 돌에 새긴 석경(石經)도 유행하였다.
한국에서는 비석이 언제부터 세워졌는지 확실치 않으나 현존하는 最古(최고)의 碑는 1989년에 발견된 신라 지증왕 4년(503)의 국보 264호 영일냉수리비(迎日冷水里碑)가 세워진 것으로 보아 그 이전부터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고구려의 광개토왕비(廣開土王碑)6)와 신라의 진흥왕순수비(眞興王巡狩碑), 창녕(昌寧)의 척경비(拓境碑), 백두산 정계비(定界碑) 등은 역사상 자랑할 만한 비석이다. 통일신라시대를 거쳐 고려시대에는 많은 비석이 세워졌으며, 조선시대에는 여러 종류의 비석이 성행하여 그 유품의 일부는 오늘날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비석의 종류로는 묘비(墓碑)를 비롯하여 능비(陵碑)․신도비(神道碑)․기념비․巡狩碑(순수비)․정려비(旌閭碑)․송덕비(頌德碑)․애민비(愛民碑)․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 등이 있으며, 그 밖에도 유허(遺墟)․성곽(城廓)․대단(臺壇)․서원(書院)․묘정(廟庭)․빙고(氷庫)․교량․제지(堤池) 등에 세우는 (紀蹟碑(기적비)가 있다.7)
비석은 대개 비신(碑身, 주로 명문이 새겨짐)·이수(螭首, 비의 머리부분)·귀부(龜趺, 비의 받침부분)로 되어 있으나, 이수와 귀부 없이 비신만을 세우는 경우도 있다. 또 자연석의 일면을 갈아서 글을 새기고 위를 둥글게 한 것을 갈(碣)이라고 한다.
금석학 연구가 명문과 그것을 기록한 물건이 불가분의 관계에 있으므로, 명문뿐만 아니라 유물 그 자체도 연구할 경우가 있는데, 이때에는 자연히 고고학의 일부가 된다.
금석학은 정확한 문헌자료가 별로 많지 않은 고대사(古代史)를 해명하는 데에 있어서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것으로 특히 문헌으로 남는 것은 그 진실성에 의구심이 들 수도 있지만
금석은 움직일 수 없는 물증8)으로서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다.
이처럼 금석학은 해독으로 시작하는 그 자체(字體)나 서법(書法)의 연구, 문자가 새겨진 기물(器物)의 연구, 사료(史料)로서의 연구 등 그 분야가 아주 넓다.
따라서 중국에서의 귀갑(龜甲)이나 수골(獸骨)에 새겨 넣은 문자의 연구, 즉 갑골학(甲骨學)9), 이토(泥土-진흙)에 새겨 넣거나 찍은 봉니문자(封泥文字)의 연구, 서남아시아에서의 니판문서(泥板文書)에 새겨 넣은 설형문자10)의 연구, 즉 설형문자학, 인장의 문자를 연구하는 인장학, 고전(古錢)의 문자를 연구하는 고전학 등도 금석학의 일부분을 이루고 있다.
나, 금석학의 발전
우리나라에서는 대체로 금석학이 형성되기 시작한 시기를 17세기로 보고 있다.
이보다 앞서서 있었다고 하기에는 미미한 수준으로 금석문의 종합적인 정리 연구로 볼만 것이 확인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즉, 金石資料를 모은 것은 조선 중기 17세기에 이르러 조속(趙涑 1595~ 1668)의 「金石淸玩」11)이 처음이고 19세기에 淸의 유희해 (劉喜海)가 우리나라 금석문을 모은 「海東金石苑」을 냈고 특히 『北學議』를 저술한 박제가의 제자가 되어 청조고증학을 연구한 秋史 金正喜(추사 김정희, 1786∼1856)는 북한산 순수비를 발견하고「禮堂金石過眼錄」과 같은 높은 수준의 논문을 남겼으며, 黃草領巡狩碑·北漢山巡狩碑, 䥐藏寺碑 등의 보호책을 강구하는 등 많은 관심을 보였다. 그의 글은 철저한 고증의 정신을 바탕으로 많지 않은 그의 글 가운데에는 많은 저술을 능가하는 慧眼이 숨어 있다.12)
이 외에도 고려와 조선시대에 금석과 관련된 서적들은 있다. 그러나 전하지 않거나 본격적 연구라고 칭하는 데는 문제가 있어 생략한다.
그 후 일제 조선 총독부에서 1919년에 「朝鮮金石總覽(조선금석총람)」이라는 책을 냈으며 이 시기에 한국인으로서 금석학을 발전시킬 수 있었던 가장 가능성이 컸던 인물로는 吳慶錫(오경석, 1831-1879)13)의 가업을 계승한 吳世昌(오세창, 1864-1953)이었다. 그러나 그는 수난기의 실천적인 지식인으로서 독립운동에 더 열중해야 했고, 금석학에 몰두할 수 없었다. 이러한 가운데서도 금석·서화의 인명사전이라 할 수 있는 『槿城書畵徵(근역서화징)』을 완성하였다. 그가 정리한 탁본과 이를 표구한 공백에 細書(세서-아주 작은 글씨)로 註를 남긴 많은 작품이 있었으나, 오늘날 곳곳에 散藏(산장-흩어져 소장)되었고, 그 일부는 해외로 유출되어 그 전모를 파악하기 어렵다.14) 그리고 1976년 황수영(黃壽永)의 「韓國金石遺文(한국금석유문)」이 출판되었다. 금석학의 발전이 이와 같이 전개되었지만, 이러한 금석학이 추사 김정희와 같은 인물로 꽃을 피게 된데는 청나라의 영향이 컸다고 할 수 있다.
淸나라의 雍正(옹정) 乾隆(건륭)15) 年間에 일어난 學士들이 정치에 관한 글을 써서 투옥되고 살해되는 소위 文字獄(문자옥)이 자주 일어나서 뜻이 있어도 그 뜻을 펴기 어려운 시기라, 정치와 무관한 금석학 연구에 눈을 돌리게 되었으며 아울러 당시에는 古代 금석의 출토가 빈번하기도 해 그 연구가 급진전 되기에 이르렀으며, 특히 兩漢金石記(양한금석기)의 저자 翁方綱(옹방강,1733-1818), 南北書派論(남북서파론)과 北碑南帖論완(북비남첩론)의 저자 阮元(완원, 1764-1849)등의 학자에 이르러 하나의 학문으로 자리 매김 된다. 특히 옹방강은 만년에 젊은 추사를 만나 사제의 관계를 맺고 추사에게 많은 영향을 주게된 것은 周知의 사실이다.
4.비의 특징과 내용
가. 특징
이 북천교비는 기성면 구산을 지나 월송리 군무교 조금 못미쳐 7번국도 변에 세워져 있다.
멀리서 보니 포근한 흙색을 띠고 화사한 봄햇살을 가득받고 있었다.
나는 저런 古石物(고석물)을 볼 때마다 왜 지금의 석구조물들은 생명을 잃어버렸을까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만든 사람들이야 거금의 경비로 정성을 들여 만들었겠지만, 유감스럽게도 없는 것만 못하다고 느낄 때가 한 두 번이 아니다.
북천교비는 이수(비의 머리 부분을 따로 만든 것)가 없이 둥글고, 사각으로 다듬고 前面(전면)과 背面(배면)에 글자를 새겨 넣었다.
비의 석질은 사암이며 세 동강이 났으나 현재 접착제로 다시 붙여 놓은 상태이다.
비의 크기는 높이(高라고 표현하기도 함)가 187cm, 너비(幅이라고도 함)가 64cm, 두께(厚라고 하기도 함)가 18cm로 다소 큰 비에 해당된다.
가까이서 글자들을 보니 마치 천진한 어린아이가 쓴 듯한 글씨다.
경주문화에 실린 보고서에는 ‘간결한 해서체에 가깝다’고 되어있으나 서예를 전공한 내가 보기에는 간결하다고 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는 듯하다.
특히 종이에 먼저 쓰고 옮기는 것이 통례이나 이 비는 그냥 돌에다 마치 직접 새긴 듯 하고 간격이나 배치를 전혀 고려하지 않은 듯하며, 글자의 크기도 제각각이 많다.
나중에 새겨 넣은 듯한 글자들도 보이고, 군데 군데 行草書(행초서)도 있다.

나. 내용
내용으로 볼 때 이 비는 紀蹟碑(기적비)16)에 해당된다.
비의 전면에 평해군 북쪽 10리 월송 변에 하나의 沙川(사천, 모래 거랑)이 바닷물과 서로 통해 사시(四時)로 물어 넘쳐 민들의 일상생활과 상인들의 통행이 어려워, 당시 평해 군수 趙仁徵(조인징)이 고을사람들과 의논하여 돌다리를 세움으로서 그간의 불편함을 해소하게 되었다는 건립경위와 萬曆(만력) 31년 3월이라는 건립시기 및 供大主(공대주) 金洪水(김홍수)와 石手(석수) 黃從伊(황종이), 그리고 △應上(응상) 등 大施主(대시주) 71인의 이름을 새겼다.
배면에는 대시주 20인의 이름과 승려로 이해되는 亦悟(역오) 등 3인의 供養主(공양주)와 태인(太仁) 등 2인의 별좌(別坐)17), 化主(화주) 洪信(홍신)의 이름 등이 새겨져 있다.
이 비에 보이는 평해군수 趙仁徵(조인징)은 읍지에 의하면, 선조 32년(1599) 2월에 도임하여 선조 36년(1603) 3월 청원부사로 移拜(이배)되었다고 하므로, 이 비는 그가 평해를 떠나기 직전에 세웠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비에 새겨진 사람들 100명의 이름은 군수 조인징을 빼고는 모두 평해지역에 거주하던 일반 백성 혹은 향리들로 그 중에는 재력이 있어서 크게 시주한 사람도 있고, 돌을 다루는 석수라는 장인명도 있고, 성조차 없어서 막 부르던 이름을 소리나는 대로 적은 이도 있고, 공사에 음식을 제공한 인물과 스님으로 보이는 공양주도 나타나 있다.
예를 들어 ‘金㗟石(김줏돌이)’ ‘韓五十同(한오십동)’ ‘李㗟沙里(이줏사리)’ ‘金岩(김바우)’ ‘金莻叮(김늦쩡)’

참고로 이 다리가 있었을 부근에 위치한 현재의 군무교 머릿돌을 보면 그 차이를 확연히 알 수 있다.
‘金莻(김늠이)’ ‘金甘石(김감돌이)’ ‘金无音石(김묵돌이)’ ’黃唜丁(황끝쩡)’ ‘林莻同(임늦똥)’ ‘廣大柳金(광큰버들쇠)’ 등 많이 보인다.18) 물론 이렇게 번역하는 것이 정확한 것인가는 국어학적 연구가 필요한 부분이다.
여기에서 볼 때 지금으로 보면 공사감독은 물론 기술자에서 막노동하는 사람에 이르기까지 다리공사에 관여하거나 도움을 주고 일했던 사람들을 모두 기록하고 있다는 것이 이 비의 독특한 점이라 할 것이다. 지금은 다리 공사가 끝나면 간단한 기록을 銘文(명문)으로 남기고 있다.
더구나 우리나라의 조선중기 이전의 금석의 銘文유물은 그렇게 많은 편이 아니다.
그런데도 비석을 세워서 하층민까지 기록으로 남긴 것은 그 의의가 크다 하겠다.
아마 이런 類의 비는 전국을 둘러보아도 희귀할 것으로 보인다.
하나의 銘文이 전해주는 정보는 참으로 크다는 것은 앞에서도 언급했다.
5.북천교비가 있었던 시대
지금으로부터 403년 전에 세워진 이 북천교비가 정확히 어디에 있었는가 보다 사실 북천교가 어디에 있었는가 하는 물음에 더 마음이 간다. 왜냐면 碑야 다리 부근에다 세웠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아쉽지만 북천교는 지금 그 흔적조차 남아있지 않다.
북천이 당시 평해군청에서 약 10여리 북쪽에 있었다는 것은 비의 기록에 나와 있으므로 지금의 황보천 어디메쯤 있었을 것이 분명하다.
다리공사 후의 기록19)들을 보면 수해도 많이 일어났는데, 아마 다리도 그 때 떠내려 갔을 확률이 높다.
그 이후에도 많은 재해기록이 보이는 것으로 봐서 통신이 원활하지 않던 시대에 기록되지 못한 수해나 천재지변은 또 얼마나 많았겠는가.
그런데 북천교가 수해나 기타 천재지변으로 사라지게 되었다는 기록은 남아있지를 않아 언제 어떻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준공 10여년 전의 평해와 인근지역의 인문지리적 기록은 반갑게도 당시에 영의정을 하다가 평해 황보리로 귀양을 3년간 오게 된 鵝溪 李山海(아계 이산해, 1539~1609)20)의『鵝溪遺稿(아계유고)』21)중에서 箕城錄(기성록)22) 에 고스란히 남아 그 당시의 모습들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아계선생의 평해 유배기간은 그에게 문학적으로도 매우 의미 있는 시기였다. 특히 아계유고에 실려 있는 시 840首(수) 가운데 절반이 넘는 483수가 이 기간에 지어진 것이라고 한다.
蛟山 許筠(교산 허균, 1569~1618)은 아계의 시를 일러 “만년에 평해로 귀양가 있으면서 조예가 극도로 깊어졌다.”고 평한 것을 볼 때 그의 평해 시절은 실로 그의 삶에서도 빼놓을 수 없는 부분으로 남는다.23)
아계유고의 기성록에 그가 남긴 발자취를 따라가며 나는 형언할 수 없는 감흥이 일었다.
정치의 중심에 서있었던 그, 더구나 壬亂(임란)이라는 격동의 시대에 살았던 사람이 아닌가. 당시 사람들이 그를 두고 “국토가 유린된 어려운 시국에 유배로 조용한 생활을 하다가 난이 끝나고 다시 영의정으로 복직이 된 복이 많은 사람이라고”역설적으로 말하기도 했다 한다.
가. 당시의 사회모습
그가 처음 유배지로 도착한 곳이 기성면 사동이었는데, 당시 모습이 旗城錄(기성록)의 海濱蜑戶記(해빈단호기)에 보인다. 《날이 이미 캄캄하여 沙銅(사동) 西京浦(서경포)에 임시로 묵게 되었다. 이 포구는 바다와의 거리가 수십 보가 채 안 되고 띠풀과 왕대 사이에 민가 십여 채가 보였는데, 집들은 울타리가 없고 지붕은 겨릅과 나무껍질로 이어져 있었다.
맨땅에 한참을 앉았노라니, 주인이 관솔불을 비추고 사방 이웃에서 사람들이 구경하러 모여들었다. 그들은, 남자는 쑥대머리에 때가 낀 얼굴로 삿갓도 쓰지 않고 바지도 입지 않았으며 여자는 어른 아이 없이 모두 머리를 땋아 쇠 비녀를 지르고 옷은 근근이 팔꿈치를 가렸는데, 말은 마치 새소리와 같이 괴이하여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방으로 들어가니 비린내가 코를 휘감아 구역질이 나려 하였으며, 이윽고 밥을 차려 왔는데 소반이며 그릇이 모두 악취가 나서 가까이할 수가 없었다. 주인 할아범과 할멈이 곁에서 수저를 대라고 권하기에 먹어보려 했지만 도저히 먹을 수가 없었다. 이에 내가 몹시 놀라, 窮鄕僻地(궁향벽지-아주 궁한 삶에 멀리 떨어져 사는 동네)에는 반드시 별종의 추한 인종이 세상에는 알려지지 않은 채 살고 있나 보다 생각하였다.
그 후 사람들에게 물어본즉 이곳이 이른바 바닷가의 蜑戶(단호-바닷에 사는 미개인의 집)란 것으로 기성에만 열 한 곳이 있으니, 餘音(여음) 栗峴(율산) 鷗尾(구미) 蟹津(해진)24) 正明(정명) 朴谷(박곡), 表山(표산), 長汀(장정-긴 백사장이 있는 동네로 보면 될 것 같다.), 陶峴(도현), 望洋亭(망양정)등이며 사동도 그 중 하나라 하였다.
아, 옛 사람들은 혹 품팔이꾼으로 몸을 숨기기도 하고, 대장장이로 몸을 숨기기도 하고, 저자거리에 몸을 숨기기도 하고, 鹽戶(염호-소금 만드는 염전)에 몸을 숨기기도 하고, 노역부로 몸을 숨기기도 하고, 창고지기로 몸을 숨기기도 하였으니, 어찌 그들이 처한 곳이 몹시 비루함을 알지 못하였겠는가. 그런데도 그곳을 마치 樂土(낙토-좋은 터)인 양 여기며 산 것은 자취는 비록 더럽혀지더라도 마음은 더러워지지 않기 때문인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도 기이한 재주를 지닌 사람이 비린내 풍기는 이 더러운 곳에 자취를 숨기고 살고 있되 사람들이 알 수 없는 것은 아닐까. 아! 》25)
외지의 유명한 고관대작이 왔다고 사람들이 구경을 왔는데 그들의 말은 알아들을 수 없고, 음식은 구역질이 나고 ,별종의 추한 인종이라고까지 한 표현에서 당시 바닷가에 살았던 민초들의 모습이 어떠했는지 상상이 간다. 거의 짐승에 가까운 삶이라고 하는 것이 맞을 듯 하다. 그래도 그는 그들의 마음만은 더러워져 있지 않았다 하고 있다.
또 내륙지방의 모습을 설명한 旗城錄(기성록)의 旗城風土記(기성풍토기)에 《토질이 척박하여 곡식을 심기에 적합지 않으니 분뇨를 거름으로 주지 않으면 양식을 하기도 어렵다.
따라서 집집마다 거처 가까운 곳에 뒷간을 지어두었는데, 이는 남들이 분뇨를 훔쳐갈까 염려해서이다. 집들은 나무껍질로 지붕을 이었고 뜰이 없어 낮에도 집 안에서 해를 볼 수 없으며, 누에치기를 좋아하지 않아 삼을 자아서 옷을 짓는데, 사람들은 尊卑(존비-귀하고 천한)를 막론하고 모두 시든 뽕잎 빛 누른 옷을 입는다. 물은 맑지도 차지도 않으며 독한 瘴氣(장기)가 항상 자욱이 피어 올라 병이 들었다하면 거의 일어나지 못하는 탓에 고을에 노인이 적다. 귀신을 숭배하여 집집마다 사당을 짓고 紙錢(지전)이며 삼베를 걸쳐두고는 드나들 때마다 반드시 기도하니, 곳곳마다 모두 이러하다. 따라서 여인으로서 다소 의식이 풍족한 자는 모두 무당이다. 성씨는 孫(손)과 黃(황)이 많다.》
비문에도 황씨 성을 가진 이가 많이 보이고 초서로 쓴 손씨도 보이고 있다.
북천 부근의 바닷가에 살던 蜑戶(단호)같은 사람들과 노인이 적고 모두 누렇게 시든 뽕잎 빛 같은 옷을 입은 내륙 사람들! 북천교는 그런 사람들이 만들었다고 보면 된다.
나. 북천교가 있었던 지역은
지금 군무교 다리 옆에 있는 바위산을 말하는 것 같다. 현지인들은 굴미봉이라 부르고 다리도 굴미봉 다리로 부르는 것으로 보아 굴산은 이 바위 언덕을 두고 하는 것이 맞는 것 같다.북천교가 있었던 곳은 비슷한 시기에 가장 인근 지역에 대한 설명으로 같은 책에 있는 越松亭記(월송정기)를 들 수 있는데, 부근 정황이 잘 묘사되어있다.26)
《월송정27) 은 군청28)소재지의 동쪽 6, 7리 거리에 있다.29) 그 이름은 어떤이는 “신선이 솔숲을 날아서 넘는다. ‘飛仙越松(비선월송)’이다는 뜻을 취한 것이다.” 하고 어떤 이는 “月(월)자를 越(월-뛰어넘을 월)자로 쓴 것으로 聲音(성음)이 같은 데서 생긴 착오이다.” 하니, 두 說(설)은 어느 것이 옳은지 알 수 없다. 그런데 내가 月자를 버리고 越자를 취한 것은 이 정자의 편액을 따른 것이다......중략......
솔숲 동쪽에는 모래가 쌓여 이루어진 산이 둘 있는데, 위의 것을 上水亭(상수정)이라 하고 아래 것을 下水亭(하수정)이라 하니, 지긋이 물을 누르는 형국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자 아래에는 한 줄기 물이 가로 흘러 바다 어귀와 통하며, 물을 사이로 동쪽에는 모래 언덕이 휘감아 돌아 마치 묏부리와 같은 모양을 하고 있다. 언덕에는 모두 해당화와 冬靑草(동청초-겨우살이 풀)뿐이며, 그 밖은 바다이다. 솔숲 서쪽은 花塢村(화오촌)으로 민가가 근 수십 호이며, 솔숲 남쪽은 곧 萬戶浦(만호포)의 城樓(성루)로 누각이 粉鵠(분곡)과 마주하여 있다. 솔숲 북쪽에는 바위가 불쑥 솟아 봉우리를 이루고 있는데, 그 이름이 堀山(굴산)이다. 이 고을 사람들은 이 바위가 신령하다고 믿어 무릇 구원을 바랄 일이 있으면 여기에 빌곤 한다.
......중략......내가 일찍이 花塢村(화오촌)30)에 寓居(우거)31)하면서 기이한 경관을 실컷 차지하였다. 따스한 봄날 새들이 다투어 지저귈 때면 두건을 젖혀 쓴 채 지팡이를 끌면서 붉은 꽃 푸른 솔 사이를 배회하였고, 태양이 불덩이 같은 여름날 땀이
비오듯 흐를 때면 솔에 기대어 한가로이 졸면서 울릉도 저편으로 정신이 노닐곤 하였다. 그리고 서리가 차갑게 내려 솔방울이 어지러이 떨어지면 성긴 솔가지 그림자가 땅에 비치고 희미한 솔바람의 운율을 들을 수 있었으며, 대지가 온통 눈으로 덮히어 솔숲이 만 마리 흰빛 용으로 변하면 구불텅 얽힌 줄기 사이로 구슬 가지 옥잎이 은은히 어리었다.▼ 황보천과 황보제 
게다가 솔비늘이 아침 비에 함초롬히 젖고 안개와 이내가 달밤에 가로둘러 있는 경치로 말하자면, 비록 龍眠居士(용면거사-宋나라 때 저명한 화가인 李公麟(이공린)의 號)를 시켜 그리게 하더라도 어찌 만분의 일이나 彷彿(방불-비슷하다)할 수 있으리오. 》
그렇다면 다리도 굴미봉 아래 어디메쯤 있었다고 보면 될 것 같다.32)
북천의 물이 흘러 동해로 들어가고 碑에도 언급되어 있듯이 물의 범람이 잦았지만 통행에 불편을 주고 있다고 보아 많은 양의 물이 흐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계선생 유배당시에는 아마 징검다리 비슷한 것으로 겨우겨우 왕래했다고 보면 될 것 같다.
6. 맺으며
북천교비는 지금으로부터 400여년 전에 평해 북천위에 石橋공사를 끝내고 그 세운 이유와 공사에 관계된 사람들의 이름을 尊卑를 떠나 모두 새겨놓은 것이다.
지금이야 첨단 장비가 동원되어 섬과 섬을 잇는 대형 다리도 만들고 하지만 당시는 그야말로 인력에 의존해 만들었다. 그런 공사 내역을 금석유물로 남긴 기록은 많지 않다.
더구나 당시에 성도 가지지 못했던 백성들의 이름까지 남긴 점은 특이하다 하겠다.
그렇게 이땅에 가난하게 왔다 가난하게 살았던 이들의 땀으로 만든 다리도 이제 그 자취마저 없고 지형도 많이 바뀌었다. 지금 북천위로는 차들만 요란하게 달리고 있다.
그래도 당시 석공들의 정소리와 목도꾼들의 영차하는 메김소리가 잡힐 듯, 한 조각 흔적으로 이 碑에 남아 흐르고 있다.
끝으로 아계선생의 기성록의 월송정記에 나오는 한 토막으로 이 글을 마무리 하고자 한다.
비록 월송정자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북천교를 따라가 본 나의 마음과 다름이 없다.
《천지간에 만물은 크든 작든 저마다 分數(분수)가 있어 생겼다. 사라지고 찼다가 기우니, 이는 일월과 귀신도 면할 수가 없는 법인데, 하물며 산천이며, 식물이며, 사람일까 보냐.
이 정자가 서 있는 곳이 당초에는 못이었는지 골짜기였는지 바다였는지 뭍이었는지 알 수 없는 일이거니와 종내에는 또 어떠한 곳이 될까. 또한 솔을 심은 이는 누구며 솔을 기른 이는 누구며, 그리고 훗날 솔에 도끼를 댈 이는 누구일까. 아니면 솔이 도끼를 맞기 전에 이 일대의 모래 언덕과 함께 흔적없이 사라져버릴 것인가. 내 작디 작은 一身(일신)은 흡사 천지 사이의 하루살이요 창해에 떠 있는 좁쌀 한 톨 격이니, 이 정자를 좋아하고 아끼어 손이 되고 주인이 되는 날이 그 얼마 일는지 알 수 없거니와, 정자의 始終(시종...처음과 끝)과 성쇠는 마땅히 조물주에게 물어보아야 할 것이다.》
신상구(申相九)
△서예 작가
△현재 울진읍내에서 붓한자리 서실 운영
△T.011-9590-430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