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해(大海) 황응청(黃應淸)과 정려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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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울진 지역의 문화유산 중에서 금석과 관련된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금석에 관한 글 자체가 한문이 많고 고문투가 많은데 사물의 이름·지명·책제목·인명 등의 고유명사는 한글 뒤에 한자를 밝혔으나, 한번 한자로 표기되면 부득이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한글로만 썼으며 고문투는 과감하게 현대적 의미로 풀어썼습니다. 옛 것에 생명을 불어넣어 지금의 사람들이 쉽게 다가갈 수 있도록 해보았습니다. / 편집자 주
- 목 차 -
1. 그를 만나다.
2. 황응청에 대하여
가. 일생은
나. 그의 시대와 사림(士林)
다. 학맥
라. 사상
마. 대해집과 교유한 인물들
3. 황응청 정려비
가. 내용
나. 비의 특징
다. 명문
4. 마치며
1. 그를 만나다.
우리에게 문화재란 과연 무엇인가
이 글을 쓰면서 먼저 던져보는 화두다. 무엇이 문화재란 말인가.
오래되었다고?, 가치가 있다고?, 아름답다고?, 의미가 있다고?
누구는 “유물은 스스로 말하지 않는다”고 했다.
대해 황응청(大海 黃應淸)!
몇 년 전 기성에서 평해로 가는 도로변에서 그를 우연히 만났다.
오래된 듯한 여각(閭閣)에 끌리어 갔더니 곱게 다듬은 비석 전면에 ‘孝子通訓大夫行眞寶縣監黃應淸之閭(효자통훈대부행진보현감황응청지려)’라고 새겨진 글귀가 먼저 보이길래 흔히 있는 효자각에 효행을 읊은 내용이겠거니 하였다.
그런데 밑쪽을 보니 울진지방에서 보기드문 거북모양의 받침인 귀부(龜趺)를 갖추고 있는 비석이 아닌가. 한눈에도 예사롭지 않는 귀부였다. 시간의 무게가 실리고, 연한 흙빛에 단아한 기품이 서린 거북이었다. 아, 이렇게 멋진 것이 있었구나! 그 귀부의 아름다움에 빠져 한참을 보다가 도대체 이 비의 주인공이 누구일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이것이 대해선생과의 첫만남이었다. 이 비의 주인공이 평해황씨 조상중의 한 분일 것이다는 막연한 상상을 하고 몇 년이 흘렀다. 지난 달 평해북천교비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그 때의 기억이 되살아나 이 비의 주인공을 찾아 나섰다.
2. 황응청
가. 일생은
황응청(1524~1605)의 년표는 자세하게 나온 것이 없다.
대해선생의 고향인 기성면 정명리 전경
다만 그의 문집인 대해집(大海集)
1)에 석계 이시명(石溪 李時明)2)과 학사 김응조(鶴沙 金應祖)3)가 쓴 행장(行狀)4)에 그의 일대기가 간략하나마 보인다. 그는 평해인으로 자(字)는 淸之(청지), 호(號)는 대해(大海)로 당시 평해군 지금의 기성면 정명촌(正明村)에 살았다. 신라시대에 큰 공을 세운 장군 황재(黃在)의 후예로 증조부 옥숭(玉崇)은 한성판관을 지냈고, 조부 보곤(輔坤)은 성균생원이었다. 성주목사(星州牧使)를 지낸 아버지 우(瑀)와, 어머니 삼척김씨 참봉 빈(三陟金氏 參奉 鑌)의 따님사이에서 1524년(중종 19)에 태어났다. 1552년(명종 7)에 사마시(司馬試)5)에 합격한 뒤 1560년(명종 15)에 세자의 입학을 경축하는 별시문과에 응시하였다가 책제(策題)에 좋지 않는 말이 있음을 보고 과장을 뛰쳐나왔다. 그후 두문불출하고 산림에 묻혀 유유자적한 삶을 살면서 행실을 더욱 바르게 하고 절조를 닦았다. 부모와 형제 사이에 효제(孝悌)의 도리를 다하여, 양친이 돌아갈 때마다 각각 3년 동안 시묘살이를 하였다. 이같은 지행고절(知行高節)과 효성에 감동한 고을 군수들이 관찰사에게 알리어 1578년(선조 11)에 살아있을 때 정려(旌閭:충신·효자·열녀 등에 대하여 그들이 살던 고을에 정문(旌門)을 세워 기리던 것.)가 내려졌다. 1584년(선조 17) 조정에서 학행지사(學行之士)를 수용할 때 그도 반열에 들어 예봉사 참봉(禮奉寺 參奉)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다시 개성 연은전(延恩殿) 참봉에 제수되었는데, 일단은 명을 받들었지만 얼마 되지 않아서 사직하였다. 왜냐하면 일찍부터 박연폭포의 절경을 한번 가서 구경하기를 원했었는데, 마침 연은전 참봉에 부임하는 기회를 이용하여 폭포를 실컷 구경하고서 낙향했기 때문이었다. 1594년(선조 27) 조정에서 장원서 별제(掌苑署 別提)로 그를 불렀다. 당시는 왜란을 치루고 있을 때였는데, 마침 선조가 의주로 몽진하였다가 환도하였다. 이에 신하의 의리로 끝내 자신의 지조만을 지킬 수 없다고 생각하여 대궐로 나아가고 아울러 시폐(時弊) 4조를 논한 상소를 올렸다. 선조가 그의 상소문을 가납하고 그를 진보현감에 임명하였다. 진보현감으로 부임하여 포용력있는 정사로 다스리다가 2년도 채 안되어 정명리에 돌아와버렸다.그 뒤 후학을 가르치며 독서와 사색으로 사상의 경지를 넓혀갔으며 월천 조목(月川 趙穆,1524∼1606)6)이나 대암 박성(大菴 朴惺, 1549~1606)7)과 편지를 주고 받고, 아계 이산해(鵝溪 李山海, 1538~1609)8)등 당대의 지성들과의 교류를 갖다가 1605년 8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후 1671년(현종 12) 명계서원에 봉안되었다. 그는 울진장씨 강계부사 백손(江界府使 佰孫)의 아들인 한보(漢輔)의 따님에게 장가를 들어 3남 1녀를 두었으나 세 아들 모두 그보다 먼저 세상을 떠나 유고(遺稿)를 수습할 수 없었다. 오늘날 소략한 형태의 대해집이 남게된 것도 그 때문이다.
나. 그의 시대와 사림(士林)
대해가 살았던 16세기는 조선왕조사에 있어 15세기를 통해 정비되었던 사회체제가 동요되는 시기로서 집권관료층 내부의 대립. 갈등이 제도권 안 뿐만 아니라 지주제의 전개에 따른 토지겸병이 활발히 진행되어 자영소농민층의 몰락과 토지소유의 불균형을 가져왔고, 그 결과 사노비의 증가 유민의 발생 향시(鄕市)의 증가등 경제 사회적인 변동이 급속하게 진행되고 있었다.9) 정치적으로 사림이 정치 세력화하여 훈․척계열과의 갈등과 대립을 거치면서 정국운영의 주도권을 장악해 가는 정치세력의 재편시기였다.10) 15세기 후반 세조의 왕위찬탈을 겪으면서 다시 훈구파와 사림파로 분기되어 갔다. 왕조 교체기의 재야 사대부와 맥락을 같이 하면서 훈구파의 집권아래 주자학적 향촌지배 질서와 새로운 선진 농법을 향촌사회에 적용하여 원만한 주노(主奴) 관계와 지주전호제(地主佃戶制)를 근간으로 지역개발을 활발히 추진하는 과정에서 향촌사회의 획기적 성장과 함께 자신들의 정치 사회적 진출을 꾀하였다.11) 그 후 네 번의 사화(士禍)를 거치고 명종 선조 연간에 걸쳐 사림이 등극할 수 있었던 것은 향촌사회에 든든한 뿌리를 내리고 있는 사림의 축적된 수권능력 때문이었다.12) 15세기 영남사림의 정통후계자들은 16세기에 퇴계와 남명의 문하에서 문과급제자들이 대거 배출됨으로서 하나의 정치세력을 형성하기 시작한 이들은 기호지방에 뿌리를 둔 율곡․ 우계(牛溪)의 제자들과 대립하여 학문적으로는 영남학파와 기호학파로 정치적으로는 동인과 서인으로 분립하게 된다.13) 그러나 퇴계의 영남 사림의 특징은 처사지향적 성향이 강했다. 그런데 벼슬과 관련된 양상을 살펴 보면 적극사환파(仕宦派), 순수처사형 및 중간파로 크게 나누어 볼 수 있을 것이다. 적극 사환파란 일찍이 대 소과에 급제하여 벼슬길로 나선 이들을 말하고 순수 처사파란 과거에 급제하지 못했거나 소과에만 급제한 후 일생을 학문연구와 후진양성에 전념한 인물들로서 문과에 급제하여 출사하는 것보다도 더 어렵고 영광스러운 유일(遺逸: 유능한 사람이 등용되지 않아 세상에 나타나지 않음 )로 천거되어도 끝내 벼슬을 마다하고 처사로서의 지조를 지킨 인물들이다. 그리고 중간파는 비록 벼슬길에 나가기는 하였으나 관직에 있은 기간은 얼마 안되고 생애의 대부분을 향리
에서 학문연구와 후진양성으로 보낸 인물들을 말한다. 그들은 실제 생활태도에 있어서는 처사와 크게 다를 것이 없지만 일단 임금이 내리는 벼슬을 받았다는 점에서 순수처사들과는 입장이 달라진 인물들이다. 퇴계의 제자들 절대다수가 이 중간파에 해당되는데,14) 大海도 이 중간파라고 볼 수 있다. 그는 과거장에 책제가 마음에 들지 않아 과장을 뛰쳐나온 일로 당시 그를 두고 화정(和靖)의 풍(風)15)이 있다고 했다 그후 여러번 천거를 받지만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으나 진보현감을 잠시 제수받은 것으로 볼 때 그러하다. 대체적으로 그는 당시 영남사림의 정신과 시대적 상황에 행보를 같이 했으며 말년에는 다양한 사회분화와 임진왜란같은 어려운 시대를 겪게된다.▼ 대해 · 해월선생을 배향하고 있는 명계서원
(기성면 정명리 소재)
다. 학맥
그가 어디 누구에게서 배웠다는 기록은 보이지 않았다.
다만 그의 학문계통에 대하여 조정융(曺挺融)16)의 명계서원봉안문(奉安文)과 정옥(鄭玉)17)의 명계서원묘우이건봉안문(明溪書院廟宇移建奉安文)에서 송나라의 주돈이와 정이천(程伊川) 형제를 자득하였고 퇴계 이황을 사숙(私淑:직접 수업한 일은 없지만 스승으로 받들고, 그의 글을 읽어 자신을 다스리는 것)하였으며 월천 조목을 도반으로 삼았다고 했다.18) 그 외 몇 몇 기록에서 보이는 일반적인 이야기는 향촌에 살면서 가학(家學;집안어른이나 친인척에게 배우는 학문)에 바탕을 두고 독학을 한 것으로 되어있다.그의 대표적 문인(門人:제자)으로는 조카인 해월 황여일(海月 黃汝一)19)과 영해 인량리의 운악 이함(雲嶽 李涵)20) 같은 인근 선비들이었다. 大海에게 어릴 때부터 수업을 받은 해월은 퇴계학통의 적전(嫡傳;정통에서 정통으로 전함)인 학봉 김성일계통의 제자로 기록되어 있다. 특히 大海 행장을 쓴 석계 이시명(石溪 李時明)은 이함의 아들로 그의 학문은 부친의 家學에다 학봉의 직계제자이며 그의 장인이기도한 경당 장흥효(敬堂 張興孝. 1564∼1633)21)로부터 의발을 전수받아 아들인 갈암 이현일(葛庵 李玄逸, 1627~1704)22)로 전해진다. 갈암의 학문은 고스란히

종손 황덕진옹이 대해선생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우측사진은 대해선생문집(필사본).
아들 밀암 이재(密庵 李栽, 1657~1730)
23)로 이어지고 다시 대산 이상정(大山 李象靖, 1710~1781)으로 전하여진다. 이들이 누구던가 흔히 퇴계학맥의 적전(嫡傳)계통도에 대표적으로 나오는 그림 바로 퇴계 이황→애학(厓學:서애 류성룡과 학봉 김성일)→경당 장흥효→갈암 이현일→밀암 이재→대산 이상정으로 이어지는 영남사림학파의 거두들이 아닌가. 대해는 가학과 독학으로 이룬 학문이었지만 당시 퇴계학의 최고 엘리트 그룹에서 스승으로, 때론 도반으로 인정하고 있음을 알 수 있어 그의 학문적 깊이나 인품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당시 퇴계나 회재 남명등에게 집지(執贄:제자가 스승을 처음으로 뵐 때 예폐(禮幣)를 가지고 가서 경의를 나타냄 )한 후 제자가 된다는 사실은 이미 상당한 학문적 수준에 도달했을 때에만 가능한 일로 그들을 그만한 수준으로 교육시킨 하부구조가 이를 지탱하고 있었을 것이다. 퇴계가 단기간 내에 그토록 많은 제자를 배출할 수 있었던 것은 퇴계 문하에 인재를 공급해 준 숱한 서당이나 서숙이 이미 향촌에 많이 존재하고 있었다고 봐야 한다.24) 즉 대해도 이러한 방법으로 상당한 학문적 수준에 도달했으며, 아울러 그에 의해 해월이나 운악․석계등에 영향을 주었다고 보여진다.라. 사상
그의 사상은 기본적으로 성리학에 바탕을 둔 도학자 사림의 전형을 보여준다고 볼 수 있는데 특히 퇴계의 사상과 맥을 같이하고 있다.
그가 퇴계를 학문적 사숙이라고 한 것에서, 그를 흠모했던 것으로 보인다. 퇴계의 처사형 선비기질을 가장 잘 이어받은 사람이 바로 월천 조목인데, 그와 동년배로서 서신을 주고 받으며 일상적 안부를 물을 정도로 가까운 사이였다는 것에서도 퇴계의 사상적 연원이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퇴계의 구방심(求放心)에 의한 경(敬)사상과 일치하고 있다. 퇴계에 있어서 경은 그의 주된 사상으로 대해와 비슷한 삶을 산 퇴계는 벼슬을 버리고 고향에 돌아온 이후 성리학의 학문적 이론을 심화시키면서 동시에 자연을 벗삼아 즐기며 지냈다. 특히 그는 자연과 깊은 교감속에서 학문적 성과를 이루어 간 것으로 잘 알려져있다. 그 과정에서 그는 자신의 마음과 세계를 시와 문장을 통하여 나타내었다. 그는 정자(程子)와 주자의 ‘경이 안된 상태에서 시를 짓거나 글씨를 쓰는 일, 혹은 산수자연을 노닐며 즐기는 일 등도 경계해야 한다’는 말을 인용하여 그러한 모든 일은 경을 유지하여 행하여야 한다고 보았다. 이황이 이처럼 시를 창작하고 자연을 즐길 때 경을 중요시한 것은 마음이 멋대로 달아나는 것, 바로 방심(放心)을 막기 위해서였다. 즉 구방심(救放心)인 것이다. 이것은 바로 이황 수양론의 빼놓을 수 없는 방법으로, 마음이 여러 가지 잡다한 일이나 외물에 빠지게 되는 상태를 벗어나는 것이다. 다시말해 경을 지녀야 마음이 자신을 주재할 수 있고 마음이 자신을 주재해야만 물(物)은 물대로 존재하여 마음에 해가 되지 않아 참된 경지 ‘진경(眞景)’들 수 있다고 보았다. 이는 성리학의 수양법과 통하는 것으로서 이황은 벼슬에 나아가는 것을 삼가고 산림에 뭍혀 위기지학(爲己之學)을 독실히 하며 처사적 삶을 살았다.25) 이러한 퇴계의 학풍과 삶의 모습은 大海의 말속에서도 일치하고 있는데, 그의 사상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일화가 아계 이산해를 만나는 대목이다. 아계유고(鵝溪遺稿)의 정명촌기에는 이러한 말이 나온다.
《정명촌은 월송정에서 북쪽으로 시오리 거리에 있는데, 우뚝이 솟은 기봉과 준령도 없고 드넓게 펼쳐진 평원과 큰들도 없으며,지세가 낮고 비좁은데다 토양까지 척박하여 벼, 삼, 콩, 조, 보리 등의 곡식이 자라기에 적합치 않다. 나의 늙은 벗 黃군 淸之가 이곳에 살고 있길래, 내가 그에게 묻기를, “그대는 기성사람이오. 기성이 비록 유배지라고는 하지만 군의 서쪽에는 그윽하고 빼어난 곳이 많다는 것을 그대도 잘 알고 있거늘, 어찌하여 산수가 아름다우며 땅이 기름지고 넓은 곳을 택하여 살지 않고 이곳에서 배회하며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소?”하니, 그가 대답하기를, “나는 성품이 본래 오활하고 편벽되어, 빼어난 산과 아름다운 물은 사람이면 누구나 좋아하는 것임에도 나는 좋아할 줄 모르고, 높은 누각과 너른 정자는 사람이면 누구나 즐기는 것임에도 나는 즐길 줄 모르며, 고량진미의 좋은 음식은 뭇사람들이 맛있어 하는 것이지만 나는 맛있어 하지 않고, 비단이나 여우 가죽으로 만든 옷은 뭇사람들이 가지고 싶어 하는 것이지만 나는 가지고 싶어 하지 않으니, 나의 좋아하고 즐기는 것이 다른 사람들과 다른 점이 있음이 아니겠소. 나는 오직 현재 처한 바와 가진 바에 따라 마음을 편안히 할 따름이오. 그러므로 여기를 버리고 저기로 가거나 옛 곳을 떠나 새 곳으로 가고 싶지 않은 것이오-중략-
거처가 비록 누추하나 무릎을 용납할 만하고(이 구절은 도연명의 귀거래사를 인용한 듯하다. 즉 審容膝之易安 : 겨우 무릎을 들여놓을 정도로 작은 집도 편안함을 알다) 밭이 비록 척박하나 경작하여 먹고 지낼 만하오. 채소 뿌리와 나물국이 내입에는 달고 낡은 옷과 짧은 갈옷이 내 몸에는 편하여, 남에게 구함이 없이 내 스스로 만족하니, 그저 이렇게 살면서 여생을 마치는 것이 좋소. 달리 어디로 가겠소.”하였다. 내가 이 말을 듣고 탄식하여 말하기를, “훌륭한 말씀이오. 위기(爲己)26)의 학문을 아는 분이며, 능히 안분자족(安分自足)하여 천명을 따르는 분이라 하겠소. ‘중용’에 이르길 부귀에 처하여서는 상황에 따라 행하고, 빈천에 처하여서는 빈천한 상황에 따라 행하고, 이적(夷狄:오랑캐)에 처하여서는 이적의 상황에 따라 행하고, 환난에 처하여서는 환난의 상황에 따라 행한다. 하였으니, 이는 현재 처한 위치에 따라 행동함을 말한 것이지요. 그러나 반드시 함양과 절조의 힘이 있은 뒤에야 비록 이적이나 환난 가운데 처하더라도 만나는 상황에 따라 편안할 수 있어, 어디를 가나 자득할 수 있을 것이오. 지금 그대가 이러한 도리를 실천하고 있으니, 반드시 평소 공부를 하여 마음에 홀로 얻은 바가 있을 것이오. 그대는 이에 대해 나에게 말해주기 바라오.”하니, 황군이 말하기를, “아, 나는 일반 사람들과 다름이 없는데 무엇을 숨기겠소. 나는 천명을 알고 즐기는 자가 아니며, 또한 위기(爲己)의 학문에 종사하는 자도 아니오. 단지 나는 동(動)과 정(靜)의 득실에 관해 조금 알 뿐이오. 우선 일상 생활하는 가운데 사람들이 누구나 알고 있는 것을 가지고 말해 보겠소. 이를테면, 한여름 더위가 찌는 듯할 때 비록 비좁은 방 안에 처했다 하더라도 눈을 지긋이 감고 꿋꿋한 자세로 앉아 있으면 몸에 땀이 흐르지 않을 것이고, 한겨울 추위가 매서울 때 비록 얼어붙은 땅에 처했다 하더라도 목을 움츠리고 발을 싸매고 있으면 피부가 얼어 터지지 않을 것이오. 그러나 만약 스스로 견디지 못하고 미친 듯이 어디론가 달려가 서늘한 정자나 따뜻한 방을 찾아서 몸을 맡기고자 한다면, 그러한 정자나 방은 쉽게 얻지 못하고 내 몸은 이미 병들고 말 것이오, 비유하자면 티끌을 쓸 때 쓸면 쓸수록 먼지가 더욱 일어나므로 차라리 쓸지 말고 그대로 두어 먼지가 절로 가라앉게 하는 편이 나은 것과 같으며, 비유하자면 우물을 칠 때 휘저으면 휘저을수록 물이 더욱 흐려지므로 차라리 휘젓지 않고 그대로 두어 물이 절로 맑아지도록 하는 편이 나은 것과 같으니, 이는 모두 정의 힘이 동을 제어하는 경우가 아님이 없다 하겠소. 이로써 유추해 보면 천하의 모든 일이 이와 같지 않은 것이 드무오. 만약 이러한 이치를 알지 못한 채 급급하게 자기에게 편리함만 도모한다면 내 마음에 좋아하는 것이 무궁하여 외물을 좇아 망동함에 못하는 짓이 없게 될 터이니, 어디 이래서야 되겠소. 이것이 내가 현재 처한 상황에 따라 내 마음을 편안히 하여 무익한 곳에 망동하고 싶지 않은 까닭이오.”하였다. 이에 내가 일어나 옷깃을 여미고 말하기를,“그대의 말이 참으로 나를 깨우치는 구려, 그대가 아니었으면 나는 하마터면 자각하지 못할 뻔했고. 아, 나는 동만 알고 정은 모르는 자이니, 학문이 넉넉하지도 못하면서 일찍 벼슬길에 오른 것이 동의 망녕됨이요 재주가 민첩하지 못하면서 나라일을 도모한 것이 도의 망녕됨이오 뿐만 아니라 언어가 공허하여 힘이 없는 탓에 위로는 임금을 잘인도하지 못하고 아래로는 조정에 신임을 얻지 못했으니, 이것이 동의 망녕됨이 아니고 무엇이겠으며, 말투가 경솔하여 치밀하지 못한 탓에 사람을 접함에 모가 지나치게 드러나고 일을 만남에 결함이 쏟아져 나왔으니, 이것이 동의 망녕됨이 아니고 무엇이겠오. 이제부터는 생각을 고쳐 심신을 수렴하여 정을 기르고자 하니, 그리하여 망녕되이 치달리면서 허둥지둥 길을 찾는 지경에 이르지 않는다면 모두 그대의 덕택일 것이오.”하였다. 내가 그의 말에 감복하였다. 》여기서 알 수 있듯이 퇴계의 구방심(求放心)에 의한 敬사상과 무위자연(無爲自然)의 노장적 철학사유를 가진 사람으로 보인다.
마. 大海集과 교유한 인물들
대해집은 황응청의 시문집(詩文集)으로 목판본 1권 1책으로 18세기 후반 이세택(李世澤)27)과 평해 士林들에 의해 간행된 듯 하다. 내가 본 것은 대해집 필사본이었다. 대해집은 권두에 1776년에 쓴 이세택의 서문이 보이고, 이어서 62수(首)의 시(詩)와 4편의 부(賦)가 있으며, 진폐소(陳弊疎) 1편과 조목에게 보낸 편지 3편이 있다. 잡저(雜著)로는 기성향헌서(箕城鄕憲書), 상홍상국혼요(上洪相國渾謠), 선연기우제문(仙淵祈雨祭文)이 남아있다. 부록으로는 행장(行狀) 2편(이시명, 김응조), 이상정28)이 쓴 묘갈명, 황여일이 지은 제문, 이함과 백견룡29)이 쓴 만사(挽詞:죽은 사람을 위하여 지은 글. 상여글), 이시명이 쓴 향사봉안문· 상향축문(鄕社奉安文․常享祝文), 조정융(趙挺融)이 쓴 명계서원봉안문(明溪書院奉安文), 김응조가 쓴 상향제문(常享祝文), 정옥이 쓴 명계서원묘우이건봉안문(明溪書院廟宇移建奉安文) 윤시형(尹時衡)30)의 향사봉안시기서(鄕社奉安時記序) 작자불명의 향사상량문(鄕社上樑文), 강석규(姜錫圭)의 명계서원묘우상량문(明溪書院廟宇上樑文), 정옥이 쓴 명계서원묘우이건상량문(明溪書院廟宇移建上樑文), 이재가 쓴 정려비음기(旌閭碑陰記), 이산해의 정명촌기(正明村記) 등이 수록되어 있다. 대해집에 보이는 인물은 하나 같이 깊은 학식과 높은 인품을 갖춘 스승으로 추앙받았으며 특히 퇴계학문을 더욱 발전시킨 적전 계승자들이었다. 예컨데 묘갈명을 쓴 대산 이상정은 갈암 이재의 외손으로 소퇴계라 부를 정도였다. 더구나 학맥을 기록할 때 순서를 애학(厓學)으로 하느냐 학애로 하느냐로 류성룡계와 김성일계가 논쟁을 하고, 율곡의 예안지방 배향을 둘러싼 긴 논쟁 등에서 볼 때 지조와 학덕을 가진 사림들이 그의 문집에 흔쾌히 글을 남긴 점으로 보아 대해의 위치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 외에 격암 남사고(南師古, 1509~1571)31), 백인국(白仁國)32), 백견룡(白見龍) 등과도 교유하였다.
3. 황응청 정려비(旌閭碑)
가. 내용
비문의 내용은 대략 이러하다.
선생의 휘(諱)는 응청(應淸)이요 자(字)는 청지(淸之)이다. 성은 황씨로 평해에 오래동안 살면서 누대로 관직에 오른 집안으로 호는 대해다. 선생이 동해 변에 출생하여 특별히 교육받은 바 없으나 천품이 도에 가깝고 특히 효성은 하늘이 낳아 평소 고인(古人)의 법대로 따르며 행동을 자제하고 바른 몸가짐으로 맛있는 음식으로 부모님을 섬기며 안색을 밝게 하여 봉양함에 집이 가난해도 맛있는 음식을 비우지 않았으며, 집에 있을 때와 나갈 때 친인척에
정려비음(旌閭碑陰) 탁본
대한 일 처리와 이웃과 고을 사람들을 대함이 어질고 따뜻한 은혜로서 그 도를 다하였다. 후진교화에는 예로서 하였으며 더욱이 관혼상제를 삼가 행하여 모범이 되니 비루한 벽지 고장이 문헌(文獻)의 지역이 되었다. 임금에게 진폐4조를 올려 구악의 폐습과 교화를 주장하였다. 선생은 조용히 청렴한 도를 즐겨 사람이 알아주기를 구하지 않고 의를 몸소 닦았으며 특히 인근 군수들이 연달아 그 효행을 관찰사에게 고하여 소경왕(선조)11년(1578)에 정려가 내려졌다. 그리고 149년 후에(1726년, 영조2) 후손 황창한(黃昌漢) 등이 정려문이 세월이 오래되어 비(雨)에 쇠락되어감을 안타까이 여겨 정려의 내용을 돌에 새겨 오래도록 전하고자 하여 비석의 기문을 받으러 연세가 많음에도 수백리 힘든 길을 멀다 않고 나에게 왔으니 여러 가지 부족한 내가 부끄럽지만 가만히 돌아보니 일찍이 나의 증조부 참판공은 젊을 때 선생의 문하에서 수업하였고, 조부 판서공도 또한 선생의 행장을 지어 대대로 존경 흠모하였는데, 어찌 감히 사양하리오. 외람되이 삼가 선생이 크게 이룬 바의 처음과 끝을 적었다. 옛적 제왕들이 선정을 펼 때 떳떳이 인륜을 세우고 풍습을 교화 한 것이 선생 가문의 지나온 내력과 같은 것이다. 북쪽 5리에 명계서원은 지방 사림들이 선생을 제향하는 곳이다. 상지 이년 병오 삼월 갑인 후학 안릉 이재기 (上之 二年 丙午 三月 甲寅 後學 安陵 李裁記) 후 십일년 병진 시월 일 본원 각립 (後 十一年 丙辰 十月 日 本院 刻立)
이상이 비문의 대체적인 내용이다. 비문에서 볼 때 상지 2년 즉 지금의 왕 영조 2년 1726년에 대해선생의 후학 안릉 이재가 기록하다라고 되어있다. 여기서 안릉이란 말은 영해 인량리(나락실)의 재령이씨 후예이고, 이재는 바로 밀암 이재(密庵 李裁, 1657~1730)를 말한다. 뒤에 병기한 것은 이재의 기문을 받고 본원 즉 명계서원 사림들에 의해 11년이 지나 돌에 각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1726년에 기문을 받고 11년 뒤인 1736년에 비를 세웠다고 되있다.
이재가 죽기 4년 전에 기문을 받고 비가 만들어 질 때는 이미 그의 사후였다.
나. 비의 특징
정려비
내용적으로는 정려비이지만 양식상으로는 귀부비(龜趺碑)라고 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귀부비란 거북모양의 받침돌 위에 비좌(碑座...비신을 꼽는 받침)를 만들고 그곳에 비신(碑身:보통 글자가 새겨지는 몸통 부분)을 꼽고 비신 윗부분에다 반룡(蟠龍:이무기 종류)들이 여의주를 서로 희롱하는 듯한 모양을 장식하고 전액(篆額:특별히 전서체로 쓴 비석 제목을 말하는데, 전서가 아닌 예서나 해서로 써 있으면 그냥 비액이라고 하면 된다)을 새긴 이수(螭首)를 갖추고 있는 비를 말하는데, 이 비는 귀부와 비신은 있으나 이수가 없이 단순히 둥글게 다듬었다. 우리나라 귀부비는 많은 학자들이 통일신라시대 이후에 나타난 것이라 보고 있다. 그 이전 삼국시대 비에서는 귀부가 나타나고 있지 않다. 귀부비는 후한(後漢) 때부터 있어오던 것이 우리나라에서는 경주 서악리에 있는 태종무열왕릉비(661년)가 처음이다. 이후 많은 귀부비가 만들어지고 8세기 후반부터 9세기 말까지는 일시적으로 쌍신두 귀부(한개의 돌에 두 마리 거북이를 조각한 귀부)도 나타난다.
귀부비는 당나라 풍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고려와 조선을 거쳐 오늘날에도 그 명맥이 이어져오고 있다. 이 비가 세워지던 조선 후기는 대게가 귀부가 없이 대좌 위에 사각의 비신에다 우진각이나 또는 팔작지붕을 한 이수가 대부분이다. 또는 나선모양의 문양을 음각으로 새긴 둥근 종부도 모양을 한 이수를 한몸으로 만들거나 또는 이수가 없는 것도 많다. 그런데 이 비는 조선후기에 만들어진(1726~1736사이에서 만들었다고 봐야한다) 보기 드문 귀부비이다.
귀부의 크기는 대략 높이 33cm, 넓이 78cm, 길이 108cm이며 퇴화된 형태의 비좌의 크기는 장방형(長方形)으로 가로 55cm, 세로 28cm이다.
거북이 몸에다 용을 닮은 머리형태를 취하고 있으나 용머리라고 하기는 문제가 있다. 용은 뿔이 있어야 한다. 해태형의 귀두라고 보기도 무리가 따른다. 해태도 사자모양을 한 뿔을 가진 동물이다. 이것이 무슨 동물 또는 상상의 동물 그무엇이라 성급히 결정할 일은 아닌 것 같고, 더 정확한 고증을 위해 차분한 연구가 필요하다고 본다. 귀갑문(귀부 등에 새긴 문양으로 갑문이라고도 함)은 복연화문(伏蓮花紋)의 변형으로 보이고 크기도 일정하지 않다. 특히 통일신라시대나 고려의 귀부에서 보이는 세련된 수법에 화려한 문양을 새기고 장방형의 어느정도 높이를 가진 비좌가 이 귀부에서는 나타나고 있지 않으며 약간의 모양만 주고 있다. 머리와 목 귀갑의 표면은 오돌도돌하게 처리하였으며, 양 쪽 코에서는 수염인지 불을 뿜는 것인지 모를 문양이 있고 가지른한 잇빨사이에 견치가 있다. 앞발은 4개의 발가락을 가지고 있으며 뒷발은 보이지 않지만, 몸에 밀착되게 새긴 꼬리가 하나 있다. 머리 뒤에서 시작하여 귀갑 중앙으로 띠 모양의 직선 문양이 새겨져 있다. 바닥에는 대좌 없이 시멘트로 고정하여 아쉬움을 더한다. 아무튼 이 귀부는 전체적으로 굉장히 단순화 된 형태로 통일신라시대의 귀부처럼 사실적이지 않고 화려하지도 않다. 하지만 단순미에서 오는 차분한 이미지로 고요함이 배어나온다.
다. 명문(銘文)
비신 정면에 孝子通訓大夫行眞寶縣監黃應淸之閭(효자통훈대부행진보현감황응청지려)라고 해서(楷書:정자체)로 각한 글이 있으며, 좌․우 그리고 뒷면에 모두 521자(字)의 역시 해서로 쓴 명문이 있다. 비신의 크기는 높이 135cm, 넓이 46.8cm, 두께 15cm 이다. 글씨는 구양 순(歐陽 詢)풍의 단정한 해서로 동국진체(東國眞體)의 맛이 흐른다. 전체적으로 고르고 엄정한 기품이 서린 능서가(能書家)의 글씨로 보이는데, 글씨를 쓴사람이 누구인지는 나와있지 않다.
4. 마치며
구 정려각 해체 당시 잔해
불민(不敏)하기 그지없는 내가 16세기 우리 고장에 살았던 한 위대한 스승의 흔적을 따라가보았다. 그가 가르치고 교유하고, 사후 그와 관련된 사람들은 하나 같이 당대의 대 석학이요 덕을 겸비한 선비들이었다. 유물은 스스로 말하지 않는다고 했지만 작은 흔적 하나에도 많은 이야기를 함축적으로 웅변하고 있다. 그것을 우리가 잘 모를 뿐이다. 처음 그를 만났을 때 차들만 휭하니 달리는 도로변에 삭막하기 그지없었는데, 얼마 지나지
대해선생 묘지 (기성면 방율리)않아 가보았더니 여각은 산산조각 부서진 잔해로 남아있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약 15m 안쪽으로 새로운 여각이 세워져 있었고 귀부비는 그곳에 있었다. 참으로 안타까웠다. 벽면은 시멘트로 둘러져 있었고 조악한 기와는 번들거렸으며 거북이 좌대는 시멘트에 고정되어 있었다. 안타까움을 넘어 심미적 분노마져 들었다. 비석 명문에도 나오듯이 쇠락되어가는 여각의 의미를 오래도록 전하고져 고령의 나이에 먼길을 가서 기문을 받고 11년의 세월이 걸려 비를 만들어 세웠는데, 이렇게 무참히 쉽게 얼버무린 상태로 오래된 귀한 유산을 손상해도 되는지 참으로 한심했다. 문화재란 원래의 상태로 보존하는 것이 최우선인 것으로 알고 있다. 비도 비지만 처음 정려를 내리고 그것을 상징하는 기념물이 정문(旌門)이요 여각이다. 그렇다면 그 흔적 하나라도 소중히 하여 함부로 훼손되지 않게 함은 당연한 일이요, 보수를 한다면 원형을 최대한 살리는 방향으로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 한다고 본다. 한 번 훼손된 문화재는 되돌릴 길이 없다. 굳이 옮긴다면 지금의 도로변은 좀 문제가 있고, 정명리 마을 입구 어디메쯤 세우는 것이 타당하다고 본다. 지금 살벌하게 달리는 자동차 도로상에서는 주차하기도 위험하여 우리지역의 소중한 정신자산을 느낀다는 것은 요원해보인다. 당시는 그곳이 행인들이 조용하게 지나 다니는 마을 입구였다고(정려문이나 각은 마을 입구나 중앙에 세웠다) 볼 수 있지만 지금은 도로 확장에 따라 접근이 어렵고, 저것이 정명 마을과 연관이 있을 것 같지는 않게 지형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대해 황응청! 그는 향촌의 위대한 지도자였다. 우리가 자랑스럽게 문향울진이라고 불러도 될 떳떳한 선조가 이땅에 살았다. 말로만 문향인가
이번 조사에서 아직도 그 흔한 문집 하나 제대로 간행된 것이 없다는 것에 놀랐다. 무엇이 문향이고 무엇이 문화재란 말인가. 우리가 과거를 잃어버릴 때 미래도 함께 사라지는 것이다.
주 석
1) 황응청(1524~1605)의 詩文集(시문집)으로 목판본과 필사본등이 있으며 1권 1책으로 1777년경 李世澤과평해 士林들에 의해 간행을 본 듯 하다라고 퇴계학 자료총서 제 11冊 해제부분에 나온다.
2) 석계 이시명(1590~1674)대해의 행장을 기록한사람으로 대해의 문인인 운악 이함의 아들이다. 바로 유명한 정부인 장씨의 부군이며 경당 장흥효의 사위이다. 경당으로 부터 애학의 퇴계 심학을 전해받는다. 1623년에 향시 별과를 응시하였으나 나아가지 않았고, 1629년에 향시에 거듭 합격을 하였다. 1640년 영양 석보에 은거하며 대를 짓고, 모옥茅屋(띠집)을 얽었다. 이 무렵 생활이 매우 궁핍하였으나 자식들에게 비록 걸음걸이를 하거나 대답을 하는 때, 그리고 밥을 먹거나 옷을 입는 때라도, 반드시 스스로 신실 공경하는 예를 극진히 하도록 가르쳤다. 1653년부터는 영양수비로 옮겼다. 그는 병자호란 이후 나라가 수모를 당하자 이를 울분한 나머지, 산간 벽처에 기하며 생애를 보냈던 굳건한 선비였다.
3) 학사 김응조(鶴沙金應祖, 1587~1667)는 大海의 행장을 쓴사람으로 본관 풍산. 자 효징(孝徵). 호 학사(鶴沙) 아헌(啞軒). 안동 출생. 17세 때 유성룡(柳成龍)에게 사사하였다. 1613년(광해군 5) 생원이 되었으나 광해군의 난정을 보고 문과응시를 포기하고, 장현광(張賢光)의 문하에서 학문연마에 힘썼다. 1623년 인조가 즉위하자 알성문과에 병과로 급제, 병조정랑 ·선산부사를 지냈다. 1634년(인조 12) 사직하고 낙향하였으나, 다시 지평 ·장령 ·공조참의 ·대사간 ·한성부우윤 등을 인조 ·효종 ·현종 삼대에 걸쳐 역임하였다. 효종 초에는 사간 ·동부승지(同副承旨) ·좌부승지 ·공조참의(參議)를 거쳐, 1659년 효종이 즉위하자 공조참의로 있으면서 임금으로서 하여야 할 도리를 상소하였다. 1662년(현종 3) 대사간(大司諫)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그 뒤 한성부윤이 되었다. 문장에 능하였다. 안동의 물계서원(勿溪書院) ·영천의 의산서원(義山書院)에 배향(配享)되었다. 문집에 《학사문집》, 저서에 《사례문답(四禮問答)》《산중록(山中錄)》 《변무록(辨誣錄)》 등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