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충단(景忠壇) 귀부(龜趺)와 충의(忠義)의 가문

기사입력 2006.08.25 1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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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울진 지역의 문화유산 중에서 금석과 관련된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금석에 관한 글 자체가 한문이 많고 고문투가 많은데 사물의 이름 · 지명 · 책제목 · 인명 등의 고유명사는 한글 뒤에 한자를 밝혔으나, 한번 한자로 표기되면 부득이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한글로만 썼으며 고문투는 과감하게 현대적 의미로 풀어썼습니다. 옛 것에 생명을 불어넣어 지금의 사람들이 쉽게 다가갈 수 있도록 해보았습니다, / 편집자 주


목   차

1.돌 거북이를 만나다.

2. 경충단 비(碑)

 가.내용

 나.비의 특징(귀부를 중심으로)

3.최시창과 충의의 전통가문

4.마치며


1. 돌 거북이를 만나다.


2005년 가을, 원남면 매화 도로변 가까운 곳에 아주 재미있게 생긴 거북이 귀부가 있다고 월간울진 취재팀장 이명동씨가 소개를 해주었다.

알려지지 않은 지역문화 유산에 관심을 보이던 나는 즉시 기쁜 마음으로 달려가 본 결과 최시창(崔始昌)과 아들 면(沔)이 단종복위를 꾀하다 함께 순절했다는 내용의 귀부비였다.

 

한문이 짧은 우리는 대략적 내용만 파악하고 비문의 내용은 차후 정밀하게 검토하면 되었기에 그야말로 한 눈에 들어오는 비석의 받침돌인(귀부) 거북이에 시선이 고정될 수밖에 없었다.

 

이리보고 저리 보아도 웃음이 절로 나오는 말 그대로 아주 재미있게 생긴 귀부였다. 아니 어쩌면 저리도 해학적으로 만들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저 피비린내 나는 단종복위 사건. 우리가 너무도 잘 알고 있는 사육신과 생육신을 떠올리는 그 사건. 조선 500년사에서 최대의 정치사건이요 가혹한 사법처리로 희생자의 범위와 그 수효를 중심으로 본다면 한국정치사상 모반사건으로서는 유례가 없는 엄청난 규모의 대사건.1) 거기에 연루되어 순절한 父子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그 정신을 기리는 비의 받침돌로 이리 만들 수 있단 말인가.

 

비를 만든 석공이 아무리 문자를 몰랐다고 하나 무슨 비를 만드는지는 알고도 남았을 터. 당시 후손들과 지역의 유림에 의해서 세운 엄숙한 비였는데, 그런 귀부를 만들 수 있게 한 것도 놀라울 뿐이다.

 

이 부자의 후손인 강릉최씨 사간공파(江陵崔氏 司諫公派) 23세 종손인 최기동(崔基東 ,79歲 )옹이 말하길 “당시 내가 아주 어린 나이여서 흐릿하게 기억하는데, 석공은 왕피리에서 왔으며 천막 같은 것을 치고는 6개월여 작업 끝에 지금의 자리(원남면 죽포동)에 세웠다”고 했다.


2. 경충단 비


   가.내용

 비문의 해석은 지역에서 한학에 조예가 깊으신 임무승옹이 많은 자문을 해주었다. 고령에도 불구하고 돋보기로 일일이 살피며 자상하게 도움을 주신 선생께 다시금 감사함을 드린다. 비문의 내용은 대략 이러하다.

 

단종대왕이 쫓겨난 다음해 병자년(1456)에 최시창 · 면(崔始昌·沔) 부자가 사육신을 따랐으나 성공하지 못하고 죽게 되자 집을 지어 살 곳도 없었지만, 다행히 둘째 아들 반(泮)이 화를 면하게 되어 영동지방 울진 죽포리(지금의 매화 인근) 황폐한 터에 살게 되었다.

공(公)의 휘(諱)는 시창(始昌)이요 호는 정재(貞齋)다. 씨(氏)는 강릉이니 경흥부원군 충무공 최필달(慶興府院君 忠武公 崔必達)의 후손이며 증조할아버지는 치안(致安)이다.

 

할아버지는 대사간 직제학(大司諫 直提學)을 지낸 복하(卜河)인데 고려 마지막왕인 공양왕이 선사(仙槎;울진 옛 이름, 지금의 삼척시 궁촌 부근)에 유폐되었을 때 장군 임제(林悌) 장천영(張天永)등과 공양왕을 복위하려고 긴밀히 모의하다 발각되어 순절하였다. 공의 아버지는 현감을 지낸 명달(明達)이다.

 

공의 아들 면은 날 때부터 충과 곧음이 돈독하여 탁연히 드러났다. 하늘이 도와준 듯 몸소 임금을 지키려고 했으나 실패하고, 그의 천지에 서린 영롱한 정기는 끝내 다하지 못한다. 무인년(1458) 동학사(同鶴寺)에 한 스님이 혼을 불러 제를 지낼 때 노산군(단종)과 사육신에 홀연히 깊이 깨달은 바 있어 임금(세조)이 비단을 하사하고 토지를 내리고 노비들과 함께 영원히 살게 명하였다. 아아 슬프다. 풀과 나무만 있는 적막한 땅에 임금과 신하가 한 몸으로 내게 미치는 구나. 갑신년(1464년) 각(閣)을 전(殿)으로 만들고 다시 혼을 불러 숙모(肅慕)라고 하였다. 정묘년(순조 7년,1807)여름에 위패를 봉안하였다.

 

군자가 말하길 임금의 녹도 먹지 않았지만 그를 위해 죽음도 족하다 하는데, 세태는 성군의 녹을 먹고도 그를 섬기지 않는구나. 단종은 성군이다. 후대에 신하의 맘을 가진 자가 공의 풍모와 의에 눈물 흘리지 않을 자가 누구이며 새가 울고 발돋움을 어찌 하지 않으리오. 공의 이력과 품성과 자질이 뛰어났지만 전하지 않고 다만 4자쯤 되는 무덤만 남았구나. 그 후 고을 사람들이 감흥하여 담장을 만들고 공을 생각하니 이는 하늘의 도리요 백성의 떳떳한 의지를 관철시킨 것이다.

 

충혼의 혼백은 만고에 불멸이라. 공이 돌아간 곳이 어디인고. 하늘에 있고 땅에 있으리니, 집에 있는 새까지 숭상하고 사랑함을 후손에게 물려준다. 끝으로 지금의 터는 그 터가 아니지만 최씨의 터이니 지나는 행인이 볼 때 어찌 감흥이 있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어서 말한다.

 

아주 단 샘은 그 근원이 어디며 지초의 뿌리가 어디며 누대에 걸친 관직에 명신으로 탄생된다. 삼군(三軍)에 투신하여 공을 쌓았고 담장에 깃발과 북을 울린다. 돌이 풍우에 잃을 지라도 빛나고 빛나도다. 누가 더불어 나란히 함께 겨룰 수 있을꼬. 왕실은 이미 병들었다. 아아 동학(東鶴:계룡산에 모신 사우)이여 잔을 따름이 부끄럽지 않구나. 하시라도 향을 피우고 솜에 술을 적셔 올리리라.2) 고종 기원후 69년 임신(1932) 남지월 상한(南至月 上澣: 동짓달 상순)에 이조참판 민병승 (閔丙承) 삼가 글을 짓고 시종원시종 완산 이종태 (侍從院侍從 完山 李鍾泰)  삼가 쓰다.


나. 비의 특징(귀부를 중심으로)

비문에 나온 기록을 보면 이 비는 1932년에 만든 귀부비이다. 비의 삼요소인 귀부 비신 이수의 형태를 완전히 갖추고 있다. 이수는 팔작지붕을 하고 있는데 두툼한 기와지붕이 중후한 무게감을 더한다.

비신의 크기는 대략 높이가 132cm, 너비가 39cm, 두께가 18cm이다.

귀부는 사각형에 밑이 넓고 위가 작은 몸통을 하고 있으며, 크기는 길이가 90cm, 너비가 73cm이다.

 

비좌(비신을 꼽는 곳)의 크기는 가로가 59cm, 세로가 43cm의 장방형이다. 귀부는 거북이 형태를 하고 있는데 머리는 사람의 눈과 코를 닮았으며 왼쪽으로 고개를 틀고 있다. 6개의 앞니에 2개의 큰 송곳니를 가지고 있다. 앞발은 5개의 발가락에 뒷발은 뒤 옆구리 쪽에 역시 5개의 발가락을 가지고 몸에 밀착되게 부조식으로 새겨놓았다. 뒷면에 우측으로 꼬리가 만들어져 있다. 갑문(등껍질에 새겨진 문양)은 불규칙적으로 마름모 형태로 사선을 교차시키고 있다. 양식상 통일신라시대의 화려하고 세련된 모양은 아니지만 그야말로 토종 된장뚝배기 맛이랄까.

 

분청막사발의 질박한 맛이 절로 넘친다. 귀부의 목을 과감하게 왼쪽 옆으로 돌려놓아 운동감을 더해주는 이러한 귀부는 아마 우리나라에서는 처음 보는 것 같다. 잔뜩 웅크린 듯한 강릉귀부나 고려나 조선시대에 보이는 위압적인 용두모양의 귀부도 아니고 화려미의 극치인 태종무열왕릉귀부와는 다른, 신경림의 詩 ‘파장’에 나오는 '못난 놈들은 서로 얼굴만 봐도 흥겹다'는 정취 그대로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사육신과 연루돼 순절하여 그 고귀한 정신을 기리는 제단비의 받침돌을 이렇게 과감하게 해학적으로 만든 석공의 마음은 무엇이었을까? 풀리지 않을 수수께끼로 남을 듯하다. 

 

일찍이 우현 고유섭 선생은 한국미의 특질을 ‘무기교의 기교’, ‘무계획성’으로 정의하고, 우리의 전통미를 ‘구수한 큰 맛’으로 표현하였다.

 “구수하다는 것은 순박순후한 데서 오는 큰 맛이요, 예리하고 모나고 찬 이러한 데서는 오지 않는 맛이다. 그것은 깊이에 있어 입체적으로 쌓여 있는 맛이며, 속도에 있어 빠른 것과 반대되는 완만한 데서 오는 맛이다. 따라서 얄상궂고 잔박하고 경망하고 꾀부리는 점은 없다. 이러한 맛은 신라의 모든 미술품에서 현저히 느낄 수 있는 맛이지만, 그러나 조선미술 전반에서 느끼는 맛이다”라고 말했듯이 아마 왕피리에서 온 이석공의 손길도 그러했으리라.


3.최시창과 충의(忠義)의 전통가문


비의 주인공인 세종 때 삼군도진무사(三軍都鎭撫使)를 한 최시창과 그의 아들 면(두 사람의 태어난 해의 기록은 없고 1456년 함께 순절)은 우리 울진 땅에서 거명되는 대표적 충절의 표상이다. 최시창은 고려조 공양왕 복위를 도모하다 죽임을 당한 대사간 복하의 손자가 되는 사람이다. 복하는 울진의 입향조로 그가 대사간벼슬을 했기에 사간공파가 되었다.

 

그는 고려 공민왕 때 문과에 급제하여 대사간에 이르렀으나 국운이 멀지 않음을 알아 벼슬을 버리고 북면 기곡동 무령현(武靈峴:지금의 북면 덕천 부근)에 은거할 때 이성계가 고려 마지막 왕인 공양왕을 원주에 유폐시키고 간성으로 보냈다가 다시 삼척 근덕면 궁촌리 고돌치 깊은 곳에 가두자 이에 의분을 참지 못해 장군 장천영(張天永) 임제(林悌) 태학생(太學生) 전생(田生) 등과 모의하여 공양왕을 복위시키려고 울진 삼척 등에서 수천명의 동지를 규합하여 이른바 고려복벽운동(高麗復辟運動)을 일으키다 사전에 발각되어 관군에 의해 모두 참형을 당하였다.

 

효자집안에 효자 나고 충신집안에 충신이 난다고 했던가. 그가 복위운동을 펼치다 순절했듯이 그의 손자 시창 증손자 면도 단종복위를 꾀하다 성삼문과 연루돼 순절을 한다. 당시 단종복위 모의자들의 사법처리를 보면 처참하리만큼 가혹했다.

 

시신거열자(屍身車列者: 흔히 부관참시라는 것으로 묘에 안치된 시신을 꺼내 시신을 분리시키는 참담한 형벌) 4명에 생체거열자(生體車列者:이른바 능지처참으로 산사람의 몸을 찢어 죽이는 형벌)가 37명, 모의자 또는 그와 연루된 사람들의 어머니, 아내, 며느리, 누이, 딸, 첩의 딸들 모두 공신의 노비가 되거나 여종으로 전락했는데 그 수가 모두 181명이나 되었다.3)

 

조선 500년 동안 이처럼 가혹한 처벌로 마무리된 예가 없는 전대미문의 大 사건이었다.

최시창 · 면 부자는 충남 공주의 계룡산 자락 숙모전(肅慕殿:단종과 그를 복위하려다 순절한 충혼들을 모신 곳)에 위패를 모시고 울진의 후손들이 1904년부터 매년 쌀 한 가마니를 1963년 사단법인 숙모회가 발족할 때까지 보냈다고 했다. 1932년 시창 · 면부자의 위패를 지금의 경충만으로 모시고 와서 매년 음력 3월 14일에 제를 지낸다.


고려 말의 최복하, 조선 초 시창 · 면부자에 이은 이 가문의 충의 전통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울진 의병항쟁을 했던 최경호. 3 ·1운동 때 윤강규, 전병겸, 남재량, 윤병관, 윤학규, 남강호, 장형관 등 남수산 꼭대기에 태극기를 게양하고 매화장터에서 대한 독립만세운동을 이들과 함께  주도한 최중모(최중권과 같은 사람), 최효대등이 있었다. 이 일로 일경에 체포되 모두 옥고를 치른다.4) 이들 중 윤강규는 이글을 쓰도록 도움울 주신 종손 최기동옹의 장인으로 만세운동 뿐 아니라 많은 구휼활동을 한 훌륭한 분으로 해방후 초대 원남면장까지 하였으며 현재 국립묘지에 영면하고 계신다.


5.마치며

 

1975년에 학술원 회장인 이병도 박사는 숙모지 서문에서 “무릇 인간은 일상의 생활에서 가족이나 사회 및 국가와 또는 개인이나 단체와의 인간관계에서 이(利)를 찾아 움직이는 존재임을 부인할 도리가 없는 것이나, 그 추리활동(追利活動:이익을 쫒는 활동)에도 일정한 한도의 원칙 같은 것이 있어 이를 의리(義理)라 부른다면 이 의리를 엄격이 여겨 그 적용한도를 극도로 높이는 행동은 추리(追利)와 상반되어 자기 자신이나 가족 부하들에게 까지 커다란 근본생활의 희생을 동반하고 심지어는 생명까지도 내던지게 되어 사람들로 하여금 숙연케 하는 것이다.”라고 썼다.

 

 

이렇듯 한 개인은 물론 그와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조차 심대한 화를 당할 것을 알면서도 절의(節義)를 지킨 정신이 있었기에 국가와 민족은 이어질 수 있었다고 감히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지역의 문화유산의 아름다움 뒤에 숨겨진 숭고한 정신을 조금은 따라가 보았다. 문향울진 못지않게 이 땅은 오랜 세월 충과 의로 아로새겨진 정신이 면면히 이어오고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쇠락되고 이끼에 얼룩지고 잡초에 묻히는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이 점점 젊은 세대와 유리된 채 저것이 그저 과거의 유물이구나 하는 정도로 사라지고 있음이 안타까워 이렇게 졸서라도 남긴다.

 

그리고 아, 돌 거북이 !

 

누가 그랬다. “미켈란젤로나 로댕은 알아도 경주의 사천왕사, 영묘사, 안압지등에서 나온 힘차고 화려한 기와들을 만든 양지(良志)를 모르시냐고, 더구나 통일신라문화의 독특한 성격을 형성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력을 끼친 예술가 이었으며 동시에 종교인 양지를 왜 모르시냐”고. 바로 이 돌 거북이를 만든 울진의 석공 또한 우리가 모르는 양지처럼. 기록에라도 있는 양지와 달리 이름도 갖지 못한 채 사라졌는지도......


 

[주석]

1) 柳永博『端宗復位 謀議者들의 司法處理』 진단학보 (78)  p,125
2) 서주(絮酒)  술을 담금. 동한(東漢)의 서치(徐치)가 술에 적신 솜을 말려 두었다가, 초상이 나면 그 솜을 다시 물에 적셔 술 냄새가 나게 하여 조상(弔喪)을  하였다는 고사에서 온 말
3) 柳永博『端宗復位 謀議者들의 司法處理』 진단학보 (78) p,144
4) 울진군지 상 p,415 ,p,429 2001, 울진군

 

***참고문헌***

·『강릉최씨사간공파세보』,강릉최씨사간공파종중, 2002.3

·『肅慕誌』 1975,

·『울진군지』,울진군, 2001.2

·『울진향교지』 울진향교, 2004.12

· 柳永博『端宗復位 謀議者들의 司法處理』 진단학보 (78)

· 고유섭『구수한 큰맛』,다할미디어,2005.8 

· 姜友邦『美의 巡禮』, 藝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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