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호]유방을 잘라 땅에 던지니, 하늘의 빛이 흐려졌다

왜적을 맞아 순절한 울진 장씨 여인
기사입력 2006.09.01 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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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임란 때 남편과 함께 왜적에 대항하다 순절한 영인(令人) 울진장씨의 절려비에 관한 것이다. 일부의 사람들은 알고 있지만 지역의 소중한 얼이 담긴 여각(閭閣)과 방치되고 있는 비에 얽힌 이런 저런 이야기를 다루었다.
/ 편집자 주

 

절려비(節閭碑)라 부르고 싶다.
울진에서 화성리 막걸리 파는 주막 삼거리 조금 못 미친 곳 길 옆의 언덕에 조그만 여각이 있는데 바로 울진 장씨의 절려비가 있는 곳이다. 이 비는 열녀비라고 해도 되고 정려비라고 해도 되지만 특별히 절려비라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한 말인 것 같다. 왜냐하면 열녀라는 것은 남편을 따라 죽거나 수절을 하다 정절을 위해 목숨을 끊는 경우 나라에서 정려를 내리고 여각과 더불어 비(비는 시간이 많이 경과된 뒤에 만드는 경우가 많다)를 만드는 경우 정려비 또는 열녀비라고 해도 무리가 없지만 이 비의 경우 특히 왜적을 상대로 절개를 지킨 것으로 볼 때 단순히 열녀비라고 하기보다 충절의 의미가 크므로 절려비라고 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더구나 수많은 비의 명칭들이 정확히 일치하게 부르는 지는 의문이기 때문이다.

 

열녀를 생각하다.
우리나라 어디를 가나 효자, 효부며 열녀각 없는 곳이 없지만 그리 쉽게 눈에 띄는 것도 아니다. 우리 울진 땅에도 많은 효열각이 있다. 2001년에 간행된 울진군지 하권 제7절 열녀편에 실려 있는 사람만해도 장씨· 서씨· 박씨· 남씨·홍씨· 전씨· 차씨·최씨·김씨·윤씨·권씨·임씨·이씨·안씨·곽씨·황씨등 32명이나 된다. 이쯤 되면 흔한 열녀 하나 배출 못한 가문은 팔불출에 들 만하다.

 

특히 조선 후기는 양반사회의 분화가 심화되었는데 최상층의 벌열(閥閱)계층에서는 남편이 일찍 죽은 여성이라도 남편을 따라 죽지 않았다. 열녀를 배출한 대다수의 양반 가문들은 대체로 이름만 남아있는 형식적인 양반으로 ‘잔반(殘班)‘이라고 불리우는 계층이었다. 즉 남편을 따라 죽는 선택을 해야 했던 양반 여성들은 가문의 명예를 회복해야 한다는 중압감 속에 있던 가난하고 몰락한 양반 출신이었음을 알 수 있다.

 

열녀전이 여성의 자결을 정당화하고 미화하기 위해 어떤 방식의 서사전략을 이용하고 있다. 열녀전은 조선 시대 여성 담론의 폭력성을 전형적으로 보여준다. 즉 모든 여성들은 열녀라는 하나의 여성상으로 환원시키고, 여성의 신체가 고통을 느끼지 않는 것처럼 서술하며, 남편이 죽은 책임을 여성에게 떠넘기고 여성을 죄인으로 구성하는 서술을 보여주고 있다.1)

 

박지원(朴趾源)의 열녀함양박씨전병서(烈女咸陽朴氏傳幷序)에 “농가와 여항의 젊은 부인들이 부모가 재가하라고 몰아세우지도 않고 자손이 벼슬 못하는 수치를 당하는 것도 아닌데 수절로는 부족하다 해서, 종종 밝은 대낮을 스스로 버리고 남편을 따라 무덤에 들어간다고 물과 불에 뛰어들고 독약을 마시거나 목매는 것을 즐거운 곳에 가듯이 한다. 열(烈)은 열이지만, 어찌 지나치지 않은가''2)

 

또 정약용(丁若鏞)의 열부론(烈婦論)에 ``나는 진실로 말한다. 제 몸을 죽이는 일은 천하에 나쁜 일이다. .......그런데 백성의 윗사람 된 자가 그를 위해 그 집 문설주를 빛나게 하고 패목을 받아 붉게 하며 호세를 면제하고 그 자손의 부역을 감해주니, 이는 백성들에게 서로 본받아 천하에 나쁜 짓을 하도록 권하는 일이니 어찌 옳겠는가.''3) 이러한 현상은 특히 여성에 대해 보수적인 윤리관을 고수하고 있던 영남 지방에서 그 배출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4)

 

사실 ` 집안 식구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라는 내용은 다수의 열녀전에서 발견되고 있다. 그러나 여성들을 죽지 못하게 만류하며 지키던 이들은 순절의 순간에는 어이없게 자리를 비우거나 옆사람이 죽어도 모를 만큼 깊이 잠들어버린다. 이러한 ’만류‘가 정말 진심으로 죽음을 막고자 하는 것이었다면 그렇게 허술하게 없어지거나 잠들어버릴 수가 있는 것일까 하는 웃지 못 할 아이러니도 있다. 물론 이러한 시각도 편향된 면이 없지 않다. 당시의 여성에게 남편을 따라 왜죽었느냐고 묻는 것 자체가 무의미 할 수 있다. ’열녀 담론의 새로운 독해‘를 쓴 홍인숙 본인도 “열녀는 다른 모든 고전문학에서의 여성 자료들과 마찬가지로, 그 당대를 살고 있던 사람들의 입장에서 읽혀져야 한다”고 밝히고 있듯이, 분명히 열녀의 담론에 관한 것은 당시 사회 문화가 구축한 오래된 틀, 그 구조속에서 이해해야 한다고 본다. 오늘날 우리가 바라보는 관점도 분명히 한계가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논개의 의암이 부러울소냐, 울진의 절부 장씨려(節婦 張氏閭)
그러나 여기 다루고자 하는 장씨같은 경우는 군지의 열녀조에 있지만 이상에서와 같은 시비거리에 휘말릴 이유가 없다. 죽음을 방조한 가족이나 그것을 조장하는 사회라 작금의 여성이론가들에게 비평받을 필요없이, 명백히 왜국에 항거하고 여성의 자존심을 지킨 것이라 볼 수 있다.

 

열녀라고 하기는 아쉬움이 남아 절려비란 이름을 쓰기로 했다. 진주 남강의 의암 논개를 떠올리면 더욱 그러하다. 열손가락 마디마디에 반지를 끼고 술에 취한 왜장 게야무라 로구스케(毛谷村六助)를 꾀어 벽류(碧流) 속에 있는 바위에 올라 껴안고 남강(南江)에 떨어져 함께 죽은 朱논개. 비록 계책이 있었던 사건과는 다를 지라도 왜국의 병사들이 그 절개에 놀라 시신을 표시까지 해두고 떠났다는 장씨. 우리 울진이 자랑할 만한 절의(節義)의 상징이 아니고 무엇인가.

 

많지 않은 장씨의 기록을 찾다가 사재감(司宰監) 첨정(僉正)5) 주호(朱?)와 그의 부인인  영인(令人)6) 울진장씨의 행장과 묘갈명 장절부정려기(張節婦旌閭記)가 수록된 정렬기실(貞烈記實)의 기문(記門)에서 다음과 같은 구절을 보았다. ‘칼을 가지고 스스로 죽으니 하늘의 해가 흐려졌다.’(引刀自盡天日晦光) 물론 하늘이 흐려졌다는 것은 과장된 부분도 없지 않지만, 마치 이차돈의 순교처럼 숙연해지는 맘 절로 든다. 옛 여인들은 이름이 없다. 그냥 성씨만 나온다. 해서 여인들의 기록이란 남자들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참 귀하다.

 

장씨와 주호의 기록은 책에 따라 다소 차이가 난다. 다행히 간재 전우(艮齋 田愚, 1841~1922)선생의 수제자 였던 석농 오진영(石農 吳震泳)이 지은 장절부정려기(張節婦旌閭記)에 대체적인 사건의 전후가 기록되고 있다. 이 기문은 현재 나무에 판각되어 정려각 안에 걸려있다.『내가 듣기를 이 정려는 선조대왕조에 사재감(司宰監) 첨정(僉正)으로 봉해진 주호와 영인의 벼슬을 받은 그의 처 장씨를 기리는 것이다. 주호가 부인과 왜적이 쳐들어오는 큰 난을 만나자 함께 산으로 피신하고 고산성에서 적을 맞아 싸우다 중과부적으로 죽음을 당한다. 부인의 미색에 왜적이 손으로 부인의 유방을 잡자 통분하여 칼로써 유방을 잘라 땅에 던지고 꾸짖다가 죽는다. 왜적이 놀라 당황하였으며 많은 시신들 중에서 부인을 따로 표하고 떠나갔다. 이 때가 계사년(1593) 8월 이다. 이 사실을 들은 선조는 감탄하여 포상을 내렸다. 성스러운 조상이 만든 백성의 덕이 그 얼마이며, 부인의 절의(절의)가 사람들에게 모두 이해관계를 떠나게 한다.

 

고관대작이나 문벌이 오히려 충절이 적고 일개 백성인 주공(주호)이 홀로 왜적에 항거하다 순절하니 그 진실로 대장부라 할 것이요 하물며 연약한 여인인 장씨의 절열(절열)은 더욱 늠름할 뿐 아니라 여름날 찬 서리같다. 아 모범되고 보배롭구나 추한 여인으로 취급됨을 부끄럽게 여겨 죽었구나. 부인의 후손들이 내게 기문을 부탁해와 사양하지 못하고 이렇게 기록한다. 주공은 신안인이요 부친은 세창(世昌)으로 영일교수(迎日敎授)를 지냈는데, 송강 정철이 동백(東伯, 강원도 관찰사)으로 재임시 시를 지어 효와 우애를 칭송했다. 영인은 울진 장씨 전(悛)의 따님으로 증조부는 강계부사를 지낸 백손(백손)이다. 정려는 선사(선사, 울진의 옛 이름)의 북쪽 응야리(응야리, 매니라고 하는 곳)에 둔 것은 오늘날 사람들이 불꽃처럼 우러르고 그 본심을 잃지 말 것을 위함이다. 이것을 보는 사람마다 귀를 쫑긋하게 하고 감흥은 절로 우러날 것이다. 흑마세 청양월 수양 오진영 기(黑馬歲 淸陽月 首陽 吳震泳 記 : 임오년(1942) 정월 수양 오진영이 기문을 짓다.)』

 

임진란 다음해인 계사년에 화를 당하다
이상이 기문의 내용인데 기문에서 보면 임진년이 아니라 다음해인 계사년에 부처가 화를 당하는 것으로 나온다. 임진왜란은 1592년(선조 25) 4월 14일 새벽에 부산성을 공격으로 시작되어 정유재란까지 7년간에 걸친 전쟁으로 이어지는데 여기서 그 구구한 이야기를 할 생각은 없다. 다만 울진 지역(강원도 지역이라고 볼 수 있다)에는 어떤 경과를 거쳐 오게되었는지는 미루어 짐작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왜적이 고산성에 출몰한 1593년 8월은 이미 조선이 곳곳에서 승리하고 있었으며 전쟁도 소강상태였다. 사실 임진왜란은 1592년 4월에 일어나 2달만에 임금이 의주로 몽진을 갔지만 6월 이후 부터는 전세가 바뀌기 시작하는데, 이때 이미 소서행장에 의해 대동강 상에서 이덕형과 야나가와 시게노부의 휴전회담이 열리고 8월에는 심수경과 일본군의 회담이 평양에서 성립되어 평양 북방과 부산원에 말뚝을 세워 이를 경계로 하는 휴전협정을 맺는다. 강원도 지역에 왜적이 나타난 것은 왜장 森吉成 부대가 8월 초 강릉 삼척 등지로부터 안동의 재산 소천 등으로 넘어가 약탈과 살상을 일삼았다.7) 또 왜군은 주둔지나, 경유지를 중심으로 영동 9읍과 영서 17읍으로 불리는 강원지역의 26군현 전역에 퍼져 노략질을 자행했다.8) 1593년부터 강원지역에 주둔하던 왜군은 명의 참전과 경성에서 왜군의 주력군이 철수함에 따라 남하하였다.9) 삼길성군의 일부는 정선 평창 평해 지역에서 의성 안동 등지로 바로 철군하였던 것으로 보인다.10) 따라서 추측컨대 삼길성군이 남하 하면서 울진 고산성 전투를 벌인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이들이 퇴각한 후 강원지역은 임진왜란의 전기간 동안 왜군의 재침이 없었기 때문에 더 이상의 전장으로 주목되지 못하였다.11)
아래 표에서 알 수 있듯이 임진왜란 당시『東國新續三綱行實圖』에 나타난 강원지역의 피해사례에서도 울진 지방에 열녀 한 명을 기록하고 있다.

 

지명

원주

횡성

춘천

낭천

김화

철원

안협

이천

평강

회양

흡곡

통천

간성

강릉

삼척

울진

합계

충신

 

 

 

 

 

 

 

 

 

1

 

 

2

 

 

 

3

효자

1

 

 

 

2

 

 

3

 

1

1

 

 

 

 

 

8

열녀

12

2

5

1

5

4

1

4

3

1

1

1

1

3

1

1

46

합계

13

2

5

1

7

4

1

7

3

3

2

1

3

3

1

1

57

 

숭고한 비는 여각 뒤에서 울고 있었다.
전세가 불리해지자 남하하던 왜적이 울진지방을 지나게 된다. 이 왜적들과 싸우다 장열하게 죽은 주호와 왜적에 조금도 굴함이 없이 절개를 지키고자 목숨을 던진 그의 처 장씨의 고귀한 기록의 흔적인 비석. 지금 여각 뒤 습한 곳에서 비를 맞으며 이끼가 낀 채 방치되고 있다. 도대체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1991년 도로공사 시 지금의 장소로 옮기면서 새로 비를 만들고 원래 있던 비는 뒤에다 방치를 하였다. 어떻게 이런 처사가 가능한 지 상식을 가진 사람으로는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다.

 

현재 정려비각 앞의 안내판에는 ‘1991년 1월에 도로 확장으로 405년 만에 후면에 열녀각을 신축하고 이에 비를 세우다‘라고 되어있다. 405년 만에 비를 세우면서 원비를 버리는 그런 어리석음은 도대체 어떤 발상에서 가능했더란 말인가? 원비에 기록이 적다고 버린 것인가? 물론 자세한 기록을 새긴 비를 새로 만들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원비를 중앙에 세우고 새로 만든 것은 옆에 따로 두든지 차라리 만들지 말고 안내판에 자세하게 기록해두면 된다.

 

원비는 정면에 烈女 僉正 朱?妻 張氏 之閭(열녀 첨정 주호처 장씨 지려)로 해서로 되어있고, 뒷면에는 두 줄로 崇禎後 二 辛酉 三月 日 壬辰亂 立節 于七月 二十日(숭정후 이 신유 삼월 일 임진란 입절 우7월 20일)라고 새겨져 있는데, 붉은 색으로 글자를 칠한 흔적이 남아있다. 여기서 숭정은 명나라의 마지막 황제 의종(毅宗) 연호로, 2 신유년이면 1743년(영조 17)이고, 3월에 비를 세운 것이다.  처음 여각이 있던 자리는 지금의 죽변면 화성리의 매니(응야리;鷹野里)로 장씨가 입절한 곳이라고 한다. 추정컨대 부군이 고산성에서 전사하고 참담한 경황에 죽변 매정(장씨의 친정)으로 피신하던 중 왜적을 만나 화를 당한 것으로 보인다. 이상한 것은 문헌의 기록은 8월에 죽은 것으로 되어있는데, 비에서는 7월 20일 입절이라고 못박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 부부는 구만동 동쪽 도흠산(道欽山)에 합장묘로 안치되어 있다. 지금 방치되어 있는 원비를 하루속히 제대로 안치할 것을 촉구한다. 주논개 못지않은 충절의 흔적이다. 전국에서 양쪽 유방을 잘라 땅에 던지며 왜적에 굴하지 않았던 기록은 보지 못했다. 갑자기 하늘빛이 흐렸던 그 때의 의연함을 생각하면 우리는 절비(節碑) 앞에 부끄러울 뿐이다.

 

1) 홍인숙, 『열녀 담론의 새로운 독해』 한국고전여성문학연구, 5권, 단일호, 2002 p.86
2) 이혜순 . 김경미 역, 『한국의 열녀전』,월인, 2002, p314 재인용
3) 이익성 역,『다산 논총』, 을유문화사, 1972, p283 재인용
4) 홍인숙,『조선후기 열녀전 연구』, 이화여대 석사학위논문, 2001, p14. 재인용
5) 조선시대 정3품 당하아문(堂下衙門) 중 시(寺)·원(院)·감(監) 등의 이름이 붙은 관아에 속한 종4품직.
6) 1396년(태조 5) 문무 각품의 정처(正妻)에 대한 봉작제(封爵制)를 시행할 때는 3품관의 처에게 내려진 작호였고 세종 때에는 종3품관의 처에게 내리다가, 나중에는 정, 종4품관의 처에게 내렸다. 문무관 4품에 오른 남편들의 작호는 봉정대부(奉正大夫), 조산대부(朝散大夫), 진위장군(振威將軍), 정략장군(定略將軍) 등으로 나누어졌으나, 부인들은 통틀어 영인이라고 하였다.
7) 趙靖 『日記』 p94, 선조 25년 8월 5일 재인용
8) 趙靖 『견문록』『壬亂日記』,선조 25년 12월 초 3일 경상도 우도 순찰사 장계草
9) 신호 『再造藩邦志』2, 계사년 1월 19일(『大東野乘』권 36)
10) 趙靖 『日記』1, 참조
11) 이상훈『임진왜란기 강원 지역의 항전과 역할』아시아문화 제 12 호 p169-1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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