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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르무즈에 촉지무(燭之武)는 없는가.

  • 장원섭 교수
  • 입력 2026.11.02 1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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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원섭(작가, 역사학자)

 

 『좌전(左傳)』 희공 30년 조에는 강대국의 포위에서 살아남은 정(鄭)나라의 외교가 기록되어 있다. 진(晉) 문공과 진(秦) 목공의 연합군이 정나라 도성을 에워싸자, 나라의 운명은 바람 앞의 등불과 같았다. 

 

그때 늙은 신하 촉지무(燭之武)가 밤중에 밧줄을 타고 성벽을 내려가 진(秦) 목공을 만났다.

촉지무는 살려달라고 애원하지 않았다. 동맹의 의리를 들먹이지도 않았다. 그는 나라와의 관계에서 이해득실을 말했다.

“어찌 정나라를 멸망시켜 이웃 나라만 키워주려 합니까? 이웃이 강해지면 진(秦)나라 임금의 힘은 약해집니다.”

정나라를 없애면 가까운 진(晉)나라만 영토를 넓히고, 멀리 떨어진 진(秦)나라는 얻을 것이 없다는 뜻이었다. 반대로 정나라를 남겨두면 동쪽을 왕래하는 진(秦)나라 사신과 군대에 편의를 제공하는 ‘동도주(東道主)’가 될 수 있다고 제안했다. 나아가 탐욕스러운 진(晉)나라가 정나라를 삼킨 뒤에는 서쪽의 진(秦)나라를 넘볼 것이라고 경고했다.

 

촉지무의 말은 진 목공의 계산을 바꾸었다. 진(秦)나라는 정나라와 맹약을 맺고 철군했으며, 동맹을 잃은 진(晉)나라도 포위를 풀었다. 정나라는 전쟁에서 이긴 것이 아니다. 적의 연합을 이해관계로 갈라 나라를 구했다. 

 

약한 나라의 외교란 강대국의 명령에 순종하는 기술이 아니라, 강대국이 자신의 결정을 다시 계산하게 만드는 능력이다.

훗날 정나라가 채나라를 공격해 승리하자 온 나라가 기뻐했지만, 재상 자산(子產)은 “작은 나라가 문치와 외교적 신뢰 없이 무공만 세우면 그보다 큰 화는 없다(小國無文德而有武功, 禍莫大焉).”라고 탄식했다.

 

그의 예상대로 곧 초나라가 보복했고 뒤이어 진(晉)나라 군대가 쳐들어왔다. 외교적 설계가 없는 무공은 국력이 아니라 강대국을 불러들이는 불씨였다.

 

요즈음 호르무즈 해협을 둘러싼 대한민국의 처지가 이와 다르지 않다. 미국은 한국의 군사적 기여를 압박하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한국이 대이란 지원을 거절했다는 불만을 한미연합훈련 축소와 연결했다. 한반도 방위를 위한 동맹 훈련을 제3국 전쟁의 청구서로 내민 것이다. 

 

이란은 한국군이 참여하면 ‘심각한 결과’를 맞을 것이라고 위협했다. 한쪽은 동맹을 담보로 겁박하고, 다른 한쪽은 보복을 담보로 협박한다.

 

정부는 아랍에미리트에 현지조사단을 보내고도 “결정된 것은 없다”는 말만 되풀이한다. 조사는 필요하다. 그러나 무엇을 조사하고 어떤 기준으로 판단할 것인지 밝히지 않은 채 ‘검토 중’이라는 안개만 피운다면 신중함이 아니라 책임 회피다. 대통령실과 국가안전보장회의가 져야 할 책임을 실무 조사단 뒤에 숨겨서는 안 된다. 조사단은 위험을 살피는 눈이어야지, 파병의 길을 닦는 선발대가 되어서는 안 된다.

 

호르무즈의 자유항행은 우리의 국익이다. 원유 수입의 61%와 나프타 수입의 54%가 이곳을 통과한다. 이란의 항행 방해와 상선 공격은 용납할 수 없다. 그렇다고 자유항행을 지키는 일과 미국의 대이란 전쟁에 가담하는 일이 같은 것은 아니다. 

거론되는 해상초계기와 군수지원함도 이름만 ‘비전투’일 뿐이다. 초계정보는 표적 선정에 이용될 수 있고 지원함은 전투를 지속시키는 힘이 된다. 감시는 정보지원으로, 상선 호위는 교전으로, 자위권 행사는 보복전으로 번질 수 있다.

 

정부는 촉지무처럼 양쪽의 계산을 바꾸어야 한다. 미국에는 자유항행을 위한 국제적 책임은 나누되 직접 타격과 대이란 봉쇄에는 참여하지 않겠다고 밝혀야 한다. 파병이 불가피하다면 다자적 방어체계 안에서 작전구역·지휘체계·교전수칙·기간·철수조건을 공개하고 국회의 동의를 받아야 한다. 

 

프랑스나 오만과 주요 원유 수입국을 묶어 부담을 분산하고 외교적 해법을 먼저 제시해야 한다. 이란에는 우리 선박을 위협하면 반드시 책임을 묻되, 한국이 공격작전에 참여하지 않는다는 점을 분명히 하여 오판을 막아야 한다.

 

외교는 두 개의 협박 가운데 덜 무서운 쪽을 고르는 일이 아니다. 강대국이 강요한 선택의 틀을 깨고 우리의 선택지를 만드는 일이다. 동맹은 복종계약도 백지위임장도 아니다. 한미연합훈련을 호르무즈 파병의 지렛대로 삼는다면 그것은 연대가 아니라 징발이다. 미국의 눈치를 보며 국익을 흥정하고 이란의 보복이 두려워 ‘검토’ 뒤에 숨는 것 역시 외교가 아니다. 눈치 보기다.

 

강대국의 요구를 받아 적는 자는 관리에 불과할 뿐, 외교관이라 할 수 없다. 

지금 대한민국에 촉지무(燭之武)는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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