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세윤(제동중학원 제4회 졸업생/전수원출입국외국인청장)
이세윤씨의 고향, 근남면 구산 1리 뒷뜰 마을과 성류굴 일대. 굴 앞에 흐르는 하천이 왕피천이다. 오른쪽 매화천이 왕피천으로 흘러들고 있다.
지난 9월 중순 일요일 오후, 조금 선선해진 시간에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걸려 왔습니다. 전화를 건 분은 50년 전 고교 선배이자 근남문화원에서 야간 학습을 함께하였던 친한 형님이었습니다. 선배님은 울진교육사를 집필하면서 1960~1970년대 근남제동학교와 등대학교에 다녔던 졸업생들을 수소문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제가 제동학원에 다녔다는 이야기를 듣고 연락처를 알아 전화를 한 것이었습니다.
실로 50년 만에 나눈 전화였습니다. 선배님은 제게 학창 시절과 살아온 이야기를 들려 달라고 하였습니다. 글재주가 부족하여 망설였지만, 울진교육사 집필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제 기억을 더듬어 보았습니다.
제동중학원 교무실과 교실(학교 전경)
제동중학원 교무실, 학교종이 이채롭다.
가난 속에서도 배움을 이어 간 제동학원 시절
저는 산 좋고 물 맑은 울진군 근남면 구산1리에서 태어났습니다. 마을 앞 냇물은 매화면에서 흘러왔고, 뒤쪽 냇물은 구산5리 굴구지에서 수곡리를 거쳐 성류굴 앞에서 만났습니다. 두 물줄기가 합쳐지는 이른바 두물머리 마을이었습니다. 논농사를 주로 짓는 80여 가구가 살아가는 맑고 조용한 마을이었습니다.
시냇가와 가까워 아이들은 국민학교에 들어가기 전부터 개구리헤엄을 칠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물이 가까운 마을이라고 해서 늘 평온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1959년 사라호 태풍으로 큰 피해를 입었고, 살아남은 주민 가운데 일부는 강원도 철원군 근남면으로 이주하였습니다. 나머지 주민들은 지금처럼 산자락에 가옥을 붙여 마을을 이루고 살았습니다. 홍수가 나면 양쪽 냇물이 불어나 마을이 물에 갇혔고, 학교에 가지 못하는 날도 있었습니다.
또래보다 키가 작아 1년 늦게 노음국민학교에 입학하였습니다. 학교에 다니면서 붓글씨를 배웠고, 경시대회에서 최우수상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렇게 노음국민학교를 무사히 졸업하였습니다.
1968년 노음국민학교를 졸업하였지만, 집안 형편이 어려워 정규 중학교에 진학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근남면 소재지인 노음1리 제동중학원에 다니게 되었습니다.
학교 남쪽 교문 가까이에는 양조장이 있었습니다. 등교할 때면 하얗고 구수한 냄새를 풍기는 술밥을 햇볕에 널어놓곤 하였습니다. 그 냄새에 침이 꼴깍 넘어가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교문 앞에는 큰 소나무 몇 그루가 서 있었고, 마을 성황당도 있었습니다.
제4회 제동중학원 졸업 사진첩(1971년).
학교명은 제동중학교이다.
이시백 교장(위)과 장성업 이사장(아래), 제동중학원 선생님(장극두, 장소택, 최진만)
열악한 교육여건에도 열성으로 가르친 선생님들
운동장은 꽤 넓었으며 배구장이 있었습니다. 운동장 옆 제방 쪽으로는 시멘트 농수로가 버드나무 숲을 지나갔습니다. 교무실은 10평 남짓한 단층 시멘트 슬라브 건물이었습니다. 교실은 허름한 창고였고, 책상도 제각각이었습니다. 그중에는 회사 사장이 쓰던 듯한 넓은 나무 책상도 있어 서너 명이 함께 썼습니다.
운동장에는 울타리가 없었습니다. 동창의 아버지는 운동장 한쪽을 차지하여 늘 시멘트 블록을 만들고 있었습니다. 운동장 앞에는 또 다른 튼튼한 창고가 있었는데, 그 창고 벽을 향해 축구공으로 수없이 벽치기를 하였습니다.
학생들은 저마다 사정이 있어 정규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한 형님과 누나들이었습니다. 나이에 관계없이 입학하였고, 교모와 교복도 갖추어 겉으로 보기에는 정규 중학교와 다름없었습니다.
우리 제동중학원 4회 입학생은 1968년 약 60명이었습니다. 학비는 한 달에 500원이었으며, 공부를 1등 하면 한 달 학비를 면제받았습니다. 이시백 교장 선생님을 비롯하여 장소택 영어 선생님, 노재현 수학 선생님, 장극두 국어 선생님, 최천환 체육 선생님께서 가르쳐 주셨습니다. 최 선생님은 체육뿐 아니라 음악도 가르쳐 주셨습니다. 「산타 루치아」와 「메기의 추억」 같은 노래는 지금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장소택 저 소설 갈대꽃
(도서출판 오미 / 2000 / 김진문 소장)
장소택 필묵 (김진문 소장 / 1995)
장소택, 그리운 담임 선생님!
장소택 선생님은 제자들에게 늘 더 큰 꿈을 품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돌이켜보면 자신이 이루지 못한 꿈을 제자들이 대신 이루어 주기를 바라셨던 것 같습니다. 선생님은 제동중학원에서 교편을 놓은 뒤 한동안 야인으로 지내셨습니다. 훗날 지역구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셨지만 뜻을 이루지는 못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아마도 선생님이 품었던 꿈 가운데 하나는 법조인이나 정치인으로서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일이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선생님은 그 뒤에도 울진을 떠나지 않고 지내시다가 생을 마치셨다고 들었습니다. 지금은 고인이 되셨지만, 선생님이 살아 계셨다면 우리 사회와 정치가 더 나은 민주주의로 나아가기를 여전히 바라고 계시지 않을까 싶습니다. 제자들에게 큰 꿈을 심어 주셨던 분이었기 때문입니다.
사법고시를 준비하던 장소택 선생님은 영어와 사회 과목도 가르쳤습니다. 사회 시간에는 헌법 전문과 조문을 달달 외우도록 하였습니다. 그때 외운 헌법 조문은 훗날 헌법 시험을 치르는 데에도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선생님과 함께한 학교생활에서 가장 또렷하게 남아 있는 추억은 모의 형사재판 수업입니다. 사회과 수업 시간에 선생님께서는 우리에게 실제 법정과 같은 재판을 열어 보게 하셨습니다. 재판장에는 배금호가 앉고, 좌우에 배석판사가 자리했습니다. 남문현은 검사, 강해순은 변호사, 남영태는 법정경비, 홍현숙은 법정 서기를 맡았고, 다른 친구들은 피고인 역을 맡았습니다. 모두가 맡은 배역에 따라 대사를 외우고 진지하게 연기했습니다.

사회과 수업 <모의 형사재판 역할극>장면
나도 처음에는 변호사 역할을 맡았습니다. 그런데 변론 내용을 외워야 할 것이 너무 많았습니다. 결국, 부담을 이기지 못하고 변호사 역할을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그것마저도 선생님이 마련해 주신 수업 한 장면으로 오래 기억에 남습니다. 교과서 속에서만 배우는 법과 사회가 아니라, 직접 역할을 맡아 재판을 해 보면서 민주주의와 법의 절차를 몸으로 익히게 한 수업이었습니다.
세월이 흐른 뒤 친구들의 삶도 각기 다른 길로 이어졌습니다. 당시 재판장 역할을 맡았던 배금호는 경찰관으로 근무하다 퇴직했고, 검사 역할을 맡았던 남문현은 서울 송파소방서장을 지내고 퇴직했습니다. 그때 교실에서 법복 대신 역할을 맡아 열연했던 아이들이 훗날 각자의 자리에서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 살아간 것입니다.
장소택 선생님은 배구도 무척 좋아하셨습니다. 체육시간이면 우리와 함께 배구를 즐기셨습니다. 당시에는 지금처럼 6인제가 아니라 9인제 배구를 했습니다. 선생님은 주로 왼쪽 공격수 역할을 맡으셨고, 나는 오른쪽 중앙이나 뒤쪽에서 수비를 맡았습니다. 공을 받아 올리고 서로 호흡을 맞추며 뛰던 그때의 운동장은 지금도 기억 속에 생생합니다.
무엇보다 선생님은 영어 선생님으로 학생들에게 인기가 많았습니다. 당시 우리에게 영어는 쉽지 않은 과목이었습니다. 하지만 선생님께 영어를 배우면서 우리는 조금씩 영어의 문을 열 수 있었습니다. 영어를 전혀 모르던 우리에게 글자를 읽고 뜻을 알아가는 기쁨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것은 단순히 영어 한 과목을 가르친 것이 아니라, 배움에 대한 자신감을 심어 주신 일이었습니다.
세월은 참 많이 흘렀습니다. 함께 공부하던 친구들도 각자의 삶을 살아가고, 우리를 가르치셨던 선생님도 이제는 우리 곁에 계시지 않습니다. 그러나 교실에서 재판을 열어 주시던 모습과 운동장에서 배구공을 받아 올리시던 모습, 그리고 영어를 가르치시던 목소리는 제 기억 속에 아직 남아 있습니다. 뒤에 들었지만, 김진문 선배와도 인연이 있었다고 한다. 그에게 당신이 쓰신 소설 <갈대꽃>과 묵필 한 점을 주었다고 하는데 이번 선배와의 통화에서 확인되었다.
그리운 담임 선생님, 장소택 선생님.
늦게나마 선생님께 깊은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제자들에게 꿈을 심어 주시고 세상을 바라보는 눈을 열어 주셨던 선생님을 오래 기억하겠습니다. 이제는 편안히 쉬시기를 바랍니다. 삼가 명복을 빕니다.
제4회 졸업생과 담임 장소택 선생님, 급훈 우리의 신조가 눈길을 끈다(위 좌측 사진), 제4회 졸업 급우들.(뒷줄 가운데 파란색 화살표가 이세윤 학생, 위 우측 사진), 아래 가을 소풍(불영사)과 체육대회
점심은 수돗물로 때우고 공만 죽도록 찼다
하지만 학교생활은 결코 녹록하지 않았습니다. 학생들 대부분은 점심을 싸 오지 못하였습니다. 수돗물로 점심 한 끼를 대신하는 친구들이 많았고, 도시락을 가져오는 학생은 거의 없었습니다. 점심시간이면 배구와 축구를 하며 운동장을 뛰어다녔습니다. 배고픔을 잊으려는 마음도 있었을 것입니다. 지금 돌이켜보면 참으로 눈물겨운 시절이었습니다.
당시 제동학원은 교실이 부족하여 선배들은 산포리 섬마을 회관 등에서 공부했다고합니다. 어쩌면 근남문화원 시설을 빌려 교실로 이용했을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이후 근남문화원에서 등대학교가 운영되었고, 오전에 수업하였다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당시 등대학교와 제동실업학교가 어떤 관계였는지는 정확히 알지 못합니다. 다만 가정 형편 등으로 정규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한 학생들이 등대학교에서 영어와 수학 등을 배웠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나는 당시 제동학원에 다녔지만 3학년 2학기가 되어서야 우리 학교가 정규 중학교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고등학교에 진학하려면 검정고시 9과목에 합격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해 포항중학교에 가서 검정시험을 보았지만, 처음에는 낙방하였습니다.
검정고시 참고서가 있는 줄도 몰랐습니다. 그러던 중 마을 친구 문종수가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자신이 보았던 고교 입학시험 참고서 겸 문제집을 주었습니다. 그 책을 과목마다 서른 번은 넘게 읽고 외웠을 것입니다. 그 덕분에 검정고시에서는 미술을 빼고 거의 만점에 가까운 성적을 받았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먼지나는 고구마저장 창고에서 공부하다.
1968년 입학 당시 우리 학년은 운 좋게도 폐업한 고구마 저장 창고를 교실로 가게 되었습니다. 바람이 자유롭게 드나드는 허름한 창고였습니다. 바닥은 마른 진흙이었고, 먼지가 풀풀 났다. 소나무 판자로 만든 벽에는 구멍이 숭숭 뚫려 있었습니다. 나무판을 덧대어 만든 출입문은 잠금장치도 부실하여 바람이 마음대로 드나들었습니다. 바람이 불면 교실 안에 먼지가 사정없이 날렸습니다.
어느 해부터인가 교실을 새로 짓는다며 수업을 반나절만 하고, 강둑 너머 수산 천에서 돌을 주워 오는 일을 하였습니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보내며 교실을 지었습니다. 우리가 동원되어 지은 교실 자리에는 지금 근남문화복지센터가 들어섰다고 합니다.
학원 이사장님은 좋은 차를 타고 아주 가끔 학교를 방문하였습니다. 우리가 듣기로 외제차라하여 자동차 주변을 기웃거리기도 하였습니다. 1968년 무장공비 섬멸 작전 때에는 2학년 선배가 왕피천 비행장에 있던 미군 초병에게 다가가 소고기 통조림을 얻어 오기도 하였습니다. 당시 그 선배가 영어를 가장 잘하는 학생으로 제동학원에서 인정받았습니다.
어느 해 가을에는 이시백 교장 선생님 논에서 벼 베기를 하였습니다. 그 보상으로 흰쌀밥을 배가 터지도록 먹었습니다. 가난한 시절, 그 밥 한 끼는 오래도록 잊히지 않는 추억이 되었습니다.
평해 온정 백암온천으로 수학여행 갔을 때 찍은 사진도 기억에 남습니다. 한 여학생이 호기심에 카메라 필름을 햇볕에 드러내는 바람에 우리 반 소풍 사진은 한 장도 남지 않았습니다. 요즘 아이들은 필름이 무엇인지조차 잘 모를 것입니다. 지금 생각하면 추억거리가 사진에 담겼는데 좀 아쉽지요.
제동학원 동창 가운데는 생업 때문에 학교를 그만둔 친구들도 여럿 있었습니다. 졸업사진에는 42명이 담겨 있고, 주소록에는 49명의 이름이 남아 있습니다. 같은 학년이지만 나이 차이로 덩치가 큰 여학생들도 있었습니다. 때로 반말을 하다가 혼나기도 하였습니다.
제가 기억하기로는 제동중학원이라는 이름은 4회까지, 1971년부터는 제동실업학교라는 이름으로 4년 동안 운영하다가 정규 사립 제동중학교가 되었다고 들었습니다. 제동실업학교는 검정고시 4과목만 치르면 되는 학교여서 이미 졸업한 학생도 다시 3학년에 입학하여 공부하였습니다.
그 혜택으로 검정고시에 합격한 친구 한 명이 더 생겼고, 그 친구는 1972년 울진농업고등학교 동기가 되었습니다. 지금도 가끔 연락하며 지냅니다. 제가 고등학교에 입학하기 전, 제동실업학교 후배들이 졸업식에 참석하라는 연락을 하였습니다. 졸업식에 갔더니 검정고시 합격을 축하한다면서 영어사전과 국어사전을 선물로 주었습니다. 그 사전은 제게 참으로 고마운 선물이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주마간산처럼 스쳐 지나간 아련한 추억입니다. 그러나 열악한 환경에서도 우리를 가르쳐 주신 선생님들께는 감사한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울진농고 시절 농장 실습생으로
제동학원에서 검정고시에 합격한 뒤 울진읍에 있는 울진농업고등학교에 진학하였습니다. 입학할 때 농과와 임과 가운데 어느 과를 선택할 것인지 고민하다가 임과를 택하였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조금 우스운 이야기지만, 농과를 포기한 데에는 거머리에 대한 두려움이 한몫하였습니다.
농과에서는 학교 논을 직접 가꾸었습니다. 봄에는 모를 심고, 가을에는 벼를 베는 등 농사일을 몸으로 배웠습니다. 울진 농고 실습지인 논은 무논이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어린 시절부터 보아 온 논에는 거머리가 많았습니다. 농사를 짓지 않은 사람에게는 ‘무논’이라는 말부터 낯설 수 있습니다. 무논은 말 그대로 물을 대어 놓은 논, 곧 물이 늘 고여 있는 논을 말합니다. 무논 가운데는 논바닥이 깊어 발을 들여놓으면 무릎까지 빠지는 곳도 있었습니다.
무논에 발을 담그고 모를 심다 보면 거머리가 어느새 발이나 종아리에 달라붙어 피를 빨았습니다. 거머리에 물리면 피가 쉽게 멎지 않아 여간 성가신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모내기 철이 되면 농촌 여자분들은 스타킹을 신고 무논에 들어가기도 하였습니다. 얇은 스타킹이 거머리를 완전히 막아 주지는 못했지만, 맨살을 물속에 드러내는 것보다는 나았습니다.
지금은 농약 사용과 농사 환경 변화로 논에서 예전처럼 거머리를 쉽게 보기 어렵지만, 당시에는 무논에 들어가 농사를 짓는 사람들에게 거머리가 흔한 골칫거리였습니다. 저에게는 그 기억이 꽤 강하게 남아 있었습니다.
우리 마을 뒷뜰에는 물을 대지 않는 마른논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뒷뜰 논은 벼도 심지만 채소가 잘되었고, 특히 마늘은 일대에서 그 품질을 알아주는 농산물이었습니다.
더구나 농사를 직접 배워야 하는 농과에 들어가면 거머리가 많은 무논에서 모를 심어야 한다는 생각부터 들었습니다. 결국, 농과에는 원서를 내지 않았습니다. 대신 임과를 선택하였습니다. 임과는 나무를 기르고 산림을 가꾸는 공부를 한다고 하니, 자연스럽게 마을 뒷동산의 나무와 숲이 떠올랐습니다. 그렇게 저는 농과 대신 임과에서 새로운 학교생활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실업계 고등학교에서는 성적이 우수한 학생들을 따로 뽑아 실습생으로 운영하였습니다. 제가 기억하기로는 입학성적이 좋은 학생들이 선발 대상이 되었습니다. 농업고등학교에서는 실습생이 되면 학교 농장을 관리하는 일을 맡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저도 실습생으로 뽑혀 학교 임업과 실습장을 돌보면서 학교생활을 하였습니다.
실습생에게는 공납금 일부를 면제해 주는 혜택도 있었고, 학교를 대표하여 해마다 열리는 실업계 학교 경시대회에 참가하기도 하였습니다. 또 같은 계열 대학에 진학할 때 가산점을 받을 수 있다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다만 이 부분은 당시 제가 정확한 제도까지 확인했던 것은 아니므로, 지금 기억으로 단정하기는 어렵습니다.
돌이켜보면 농과 대신 임과를 선택한 것은 거머리가 무서웠기 때문이라는 아주 작은 까닭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선택으로 저는 나무와 숲을 배우는 임과 학생이 되었지요. 한때는 무서워 피했던 무논과 거머리가 지금은 오히려 그 시절 농촌의 풍경을 떠올리게 하는 한 장면으로 남아 있습니다.
앞서 이야기했지만, 1학년 때부터 임과 실습 학생으로 학교 옆 육묘장에서 일하였습니다. 농장 실습생이 되면 분기별 공납금 2,680원을 면제받았습니다. 당시 뽀빠이 과자 한 봉지가 50원이었으니, 학비 면제는 집안 형편이 어려운 저에게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3학년 때에는 대학에 진학할 학생은 육묘장에서 일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 때문에 경제적으로 조금 더 어려워졌습니다. 담임 천창욱 선생님께서 장학금을 줄 테니 받을 사유를 써 오라고 하셨지만, 가난하다는 까닭만으로 장학금을 받을 수 있을지 자신이 없어 신청서를 내지 않았습니다.
농고 시절, 집안 부모님께 학비를 받아 신발이나 참고서를 사야 했습니다. 언제나 용돈이 부족했고, 버스를 타고 통학할 형편도 아니었습니다. 고등학교 3년 동안 왕복 40여 리 길을 걸어 다녔습니다. 성류굴 길을 이용하거나 꾸리재를 넘고 자길길을 걸어서 울진 읍내까지 다녔습니다. 등·하교 길을 걸으면서 영어 단어를 외우곤 하였습니다.
지금은 7번 국도가 뚫리고 고속열차까지 다닌다고 하니 고향이 참으로 많이 발전하였습니다. 고향의 무궁한 발전을 기원합니다.
고등학교 1학년 때인가, 학교에 가기 싫어 한 달 동안 결석한 적도 있었습니다. 담임 선생님 연락을 받고 학교에 나갔더니, 그해부터 학점제가 시행되어 결석 한 시간마다 한쪽씩 보고서를 제출하면 유급을 면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반 친구들에게 볼펜과 백지를 주고 교과서 내용을 써 달라고 부탁하였습니다. 친구들이 써 준 수십 장의 보고서를 제출하여 유급을 면하였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친구들에게 참으로 고마운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어느 날 등굣길에는 근남 지서 앞에서 사설우체국 쪽에 있던 또래 학생이 저를 공격하기도 하였습니다. 다행히 잘 피하였습니다. 당시는 누구인지 몰랐고, 그 한번으로 끝났지만, 지금도 그 사람한테 왜 나에게 느닷없이 그런 행동을 했는지 묻고 싶네요.
해군사관학교 지원, 신체검사에서 탈락하다.
울진농고 2학년 때에는 포항에서 열린 고교 경시대회에 참가하여 4종목인가에서 수석을 하였습니다. 서양사 가운데 페르시아 쪽 역사는 연대와 인명을 외우기 어려워 그 종목에서는 수석을 놓쳤습니다. 이 기억은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6년 전쯤 친구 자녀 결혼식에서 경찰 총경 출신인 고교 선배를 만나 그 이야기를 듣고서야 다시 떠올렸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3학년 때에는 사관학교에 가려고 새벽마다 마을 앞길에서 달리기 연습을 하였습니다. 가을 교내 체육대회에서는 마라톤 1등을 하였고, 그 점수가 높아 우리 반이 전체 1등을 하였습니다.
언제인가는 육영수 여사가 주최한 독후감 경시대회에도 포항에 가서 참가하여 금메달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이사를 다니다가 그 메달을 잃어버렸습니다.
어느 날 수학 시간인데 수학 공책이 없다고 주 아무개 선생님께 손바닥을 맞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선생님께서 칠판에 낸 문제를 잘 풀고 나서는 수학 공책이 없어도 꾸중을 듣지 않고 넘어갔습니다. 고등학교 졸업 성적은 중간 이하였고, 실업 과목 점수가 좋지 않았습니다.
졸업할 무렵에는 대학 예비고사가 있었습니다. 그해 응시생 중에서 임과에서 저 한 명, 축산과에서 한 명이 합격하였는데, 두 사람 모두 우리 마을 구산리 학생이었습니다.
그러나 대학진학은 엄두도 못 내고, 당시 집안 형편이 어려워 학비와 생활비가 전액 면제되는 사관학교에 지원하였습니다. 교장 선생님과 울진군수 신원보증을 받아 해군사관학교에 지원하였으나, 대구 육군병원 신체검사에서 오른쪽 눈 시력이 1.0 이상이 되지 않아 탈락하였습니다. 그때 받은 충격은 오래도록 남았습니다. 이후 건강검진을 받을 때면 시력 판별표에 있는 1.0에서 1.5 사이 숫자를 모두 외워 버릴 정도였습니다.
가을소풍(불영사, 1973. 10. 13), 1973년 등대학교 불영사 가을소풍에 참가한 야간반 재수생들(김진문, 임문홍, 이세윤, 남하중, 임문홍, 이위영 등) 사진 김진문 제공
등대학교 야간 대입반에서 공부하다.
고등학교 2학년 때에는 선배 이종교 씨의 권유로 등대학교 야간 대입반에도 다녔습니다. 야간반에는 고교 재학생이 두 명쯤 있었고, 나머지는 일곱, 여덟 명의 고향 선배들이었습니다. 그분들이 모두 대입 재수생이었는지는 당시에는 잘 몰랐습니다. 나는 선배들 틈에 끼여 공부하면서 이른바 선행학습을 한 셈이었습니다.
등대학교에서는 수산 군부대에서 복무하던 군인들이 짬을 내어 영어와 수학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서울대 등 명문대학을 졸업한 107연대 군인들이 맡은 강의는 귀에 쏙쏙 들어왔습니다. 이분들은 군 복무 중에도 대민 봉사 정신으로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한 지역 아이들을 낮에는 가르치고, 밤에는 고교 재학생과 대입 재수생을 지도하였습니다.
도시 학원은커녕 학원 문턱조차 넘어 보지 못했던 농촌 학생들에게 이분들은 배움의 길을 열어 준 고마운 선생님들이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그분들은 우리에게 인생 등불과 같은 존재였습니다.
등대학교 야간 학습이 끝나면 밤 10시쯤 되었습니다. 오릉갈 길을 지나 성류굴 앞길로 돌아가기도 하고, 때로 마름 동네 신작로를 지나 구리재 산길을 이용하기도 하였습니다. 성류굴길로 가는 곳은 성류굴 입구를 지날 때 기분이 섬뜩했습니다. 마름 동네를 지나서 꾸리재 길은 고려장같은 구멍이 뚫려 있어 무서웠습니다. 더구나 밤에 비가 오는 날이면 어두운 산길을 걷는 일이 더욱 두려웠습니다.
배움과 중국, 그리고 40년 공직생활
결국, 대학진학은 포기하고 고등학교를 졸업하였습니다. 그러나 당시에는 만 18세가 되지 않아 9급 공무원 시험에도 응시할 수 없었습니다. 하는 수 없이 집에서 1년 동안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였습니다. 대학에 가지 못한 아쉬움이 마음 한편에 남아 있었지만, 주어진 길에서 새로운 출발을 준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때 노음국민학교 동창인 김창석의 도움이 큰 힘이 되었습니다. 그의 도움으로 1977년 6월 9급 공무원 시험에 합격하면서 공직생활을 시작하였습니다. 공무원이 된 뒤에는 군 복무를 하였고, 1979년 근남 수산 솔밭에 주둔하던 107연대 해안초소에서 군 생활을 마쳤습니다. 제대 후에는 다시 공직으로 돌아와 맡은 일을 하나씩 배워 나갔습니다.
김포공항에서 근무할 때에는 새로운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외국어대학교에서 6개월 동안 중국어 연수를 받았고, 이를 계기로 중국과 인연을 맺게 되었습니다. 중국에서 연수생으로 3년을 지내는 등 실무자로 19년을 근무하였습니다. 과장으로 승진한 뒤에는 관리자로 일하며 퇴직할 때까지 20년을 더 근무하였습니다. 처음 9급 공무원으로 출발한 지 40년, 그렇게 한 직장에서 공직생활을 마무리하였습니다.
대학진학을 포기했던 아쉬움은 배움에 대한 마음으로 남았습니다. 결혼한 뒤 방송통신대학교 법학과에 입학하여 공부를 이어 갔고, 마침내 졸업하였습니다. 배움에 대한 열정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베이징에 있는 중국정법대학교에서 공부하며 석사과정을 수료하였습니다. 젊은 시절 이루지 못했던 대학 공부를 뒤늦게나마 이어 가면서, 배움에는 늦은 때가 없다는 것을 몸으로 느꼈습니다.
중국에서 생활하면서는 일뿐만 아니라 그 땅의 자연과 역사도 가까이에서 만날 수 있었습니다. 백두산에는 네 번 올랐고, 압록강변에도 여러 차례 갔습니다. 압록강은 바라볼 때마다 푸른빛을 머금고 있었습니다. 반면 해란강과 두만강은 노래 가사에서 들었던 모습과 달리 아스팔트 빛깔을 띠고 있었습니다.
한라산에도 아홉 번 올랐지만, 지나온 세월을 돌아보면 가장 아름답게 남아 있는 곳은 역시 백두산 천지였습니다. 그곳에서 바라본 넓고 맑은 천지 모습은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도 마음속에 선명하게 남아 있습니다.
중국에서는 베이징 주재 한국대사관에서 3년 반, 선양에서 3년을 비롯해 모두 9년 반을 생활하였습니다. 국내에서는 인천출입국청장과 수원출입국청장 등을 지냈습니다. 젊은 시절 9급 공무원으로 시작한 길이 어느덧 관리자로 이어졌고, 마침내 40년 공직생활을 마치게 되었습니다.
돌이켜보면 처음부터 순탄한 길은 아니었습니다. 대학진학을 포기해야 했고, 공무원 시험에도 바로 응시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한 해 동안 시험을 준비하며 다시 출발할 길을 찾았고, 친구 도움으로 공직에 첫발을 내디뎠습니다. 그 뒤 중국어를 배우고, 중국에서 일하고, 다시 대학에서 공부하며 부족했던 배움을 채워 갔습니다.
퇴임할 때 홍조근정훈장을 받았습니다. 훈장보다 더 오래 마음에 남는 것은 40년 동안 만났던 사람들과 함께 일했던 시간,
중국에서 배우고 경험했던 날들, 그리고 뒤늦게라도 배움을 이어 갔던 시간입니다.
지나온 길을 돌아보니 인생은 처음 세운 계획대로만 흘러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때로는 돌아서기도 하고 늦게 출발하기도 하지만, 걸음을 멈추지 않는다면 새로운 길은 다시 열리는 것 같습니다.
지나온 길에 감사하며
이제 퇴직한 지도 10년이 되었습니다. 가끔 강의 요청이 들어오면 출강하기도 하면서 조용히 지내고 있습니다. 돌이켜보면 처음부터 큰 계획을 세우고 살아온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때그때 주어진 상황에 맞추어 진로를 바꾸며 여기까지 왔습니다.
제가 잘나서 이룬 것보다 주변에서 많은 분이 도와주셨기에 가능했던 일들이 더 많았습니다. 그래서 공을 세우려고 애쓰기보다 과오를 범하지 않고 맡은 직무에 충실하려고 애썼습니다.
백번 하던 일이라도 한 번쯤은 의심해 보아야 하고, 관심을 갖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 것이 있다는 생각도 늘 마음에 두었습니다.
아들 둘과 손자 셋을 두었지만, 자녀들에게 특별한 교육을 하지는 않았습니다. 자식을 가르치려는 마음이 지나치면 부모와 자식이 서로 멀어질 수도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부모와 자식 사이에도, 친구 사이에도 서로를 존중할 수 있는 적당한 거리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아이들은 저마다 자기 길을 찾아 살아갈 것입니다.
다만 마음이 바르면 몸가짐도 바르고, 몸가짐이 바르면 그림자도 바르다는 말을 전하고 싶습니다. 밤중에 누가 문을 두드려도 두려울 것 없는 삶을 살아가기를 바랄 뿐입니다.
가끔 고향 근남을 지날 때면 어린 시절의 고생과 함께 제동학교에서 공부하던 날들이 떠오릅니다. 정규 제동중학교를 졸업한 후배들은 우리를 그저 학원 선배라고 부르지만, 우리에게 그 시절은 배움의 길을 찾아 어렵게 걸었던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2년 전에는 학원 4회 동창 네 명이 마린CC에서 함께 운동하며 옛이야기를 나누었고, 제동중학교 4회 졸업생 열 명 남짓은 지금도 분기마다 서울에서 만나 서로 안부를 묻고 있습니다. 동창 가운데는 은행 본사에서 자금을 관리하며 부를 일군 친구도 있고, 중학 동창끼리 인연을 맺어 오순도순 살아가는 친구도 있습니다.
걸어온 길은 서로 달랐지만, 함께 공부하고 웃고 고민했던 시절의 정은 세월이 흘러도 쉽게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젊은 날 가난과 싸우며 앞날을 걱정하던 시간도 이제는 돌아보면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았습니다.
세월은 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빠르게 흘러갔습니다. 천 리를 달리던 말도 세월 앞에서는 마구간에 머물러야 하지만, 마음만은 아직도 천 리를 달리고 있는 듯합니다. 이제는 지나온 길을 돌아보며 함께해 준 사람들에게 감사할 뿐입니다.
저를 도와주고 이끌어 주신 모든 분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그분들도 지금 어디에서든 건강하고 평안하게 지내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이 글을 읽어주신 모든 분께도 고마운 마음을 전합니다. 부디 건강을 잘 돌보시고, 남은 날들이 평안하고 행복하시기를 바랍니다. 부족한 글이나마 제 삶의 한 자락을 함께 돌아보아 주셔서 고맙습니다. (2026년 9월 중순).
- 이세윤 프로필 -
· 근남면 구산1리 출생 / 현재 서울 거주
· 1967년 노음초등학교 제28회 졸업
· 1970년 제동중학원 제4회 졸업
· 1971년 고입검정고시 합격
· 1975년 울진농고 임과 23회 졸업
· 1977년 출입국관리직 9급 공채 합격
· 1982년 한국방송통신대학 법학과 졸업
· 1997년 북경정법대 민법 석사과정 수료
· 1994년-97년 중국정법대학교 해외연수
· 1997년 사무관 승진, 중국심양영사관 영사 근무
· 2006년 서기관 승진, 중국한국대사관 1등서기관겸 영사
· 2012년 외교안보연구원 연수
· 2015년-2016년 부이사관 승진
· 인천출입국외국인청장 / 수원출입국외국인청장 역임
‘제동중학원 출신 이세윤 씨 추억’ 특집을 마련하며
/ 김진문(울진교육사 집필위원장)
울진교육 발전을 위해 힘써 온 울진교육청(교육장 이종철)은 2026년 상반기부터 2027년 하반기까지 울진교육 발자취를 정리하는 울진교육사 편찬사업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필자는 집필위원장을 맡아 여러 선생님과 함께 집필 방향을 정하고 자료를 모으며 원고를 쓰고 있습니다.
집필 항목 가운데 제동중학교 관련 자료와 졸업생을 찾던 중 이세윤 씨(이하 후배)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이름이 낯설지 않아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뜻밖에도 고향 후배였습니다. 근남면 구산1리 뒷뜰에서 태어나 노음국민학교와 제동중학원을 다녔고, 울진농업고등학교를 졸업한 후배였습니다.
그런데 이야기를 나눌수록 또 하나의 반가운 인연이 드러났습니다. 필자가 울진농업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고향 집에서 재수하던 시절, 지금 근남면사무소 앞 도로변에는 근남문화관이 있었습니다. 그곳에 마련된 등대학교 야간반에서 이세윤 씨와 1년 남짓 함께 공부했던 것입니다. 그는 농고 재학생이었고, 필자는 재수생이었습니다.
이번에 반세기가 훌쩍 지난 뒤, 울진교육사 항목에서 제동학교와 등대학교 관련 자료를 찾다가 다시 이어진 것입니다. 이 만남은 제동중학교와 울진 교육사를 되짚어 보는 데에도 뜻깊은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번 이세윤 후배와 대화를 하면서 53년 전 등대학교에 대한 필자 기억이 더 또렷해져 몇 자 기록하고자 합니다.
제동중학원과 등대학교, 배움에 목말랐던 농촌 학생들
당시 근남면 수산리 솔밭, 지금의 왕피천공원 자리에는 육군 연대가 주둔하고 있었다. 부대에서는 대학을 나온 군인들을 강사로 뽑아 지역 학생들을 위한 대민교육으로 등대학교가 운영되었다.
근남면 노음리에 있던 제동중학원조차 다니지 못했던 농촌 학생들에게 등대학교는 소중한 배움의 기회였다. 정규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한 이세윤 후배 역시 제동중학원에서 중학과정을 공부하였다고 한다. 당시 제동중학원은 정규 학교와 달리 교육환경이 넉넉하지 않았으며, 학생들은 상급학교에 진학하려면 중학교 검정고시에 합격하여야 했다. 등대학교 학생도 마찬가지였다.
제동중학원과 등대학교가 운영된 정확한 시기는 아직 확인되지 않았으나, 두 교육기관이 일정 기간 함께 운영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교육 여건이 어려웠던 시절, 배움에 목말랐던 농촌 학생들은 제동중학원과 등대학교 문을 두드리며 학업의 꿈을 이어갔다.
이러한 지역의 교육 열망과 노력은 정규 학교 설립으로 이어졌다. 이후 정부 인가를 받은 울진 최초의 사립 제동중학교가 1974년 개교하였다. 학교가 들어선 곳은 지금의 근남면 노음리 복지센터 자리이다. 이는 정규 학교에 다니기 어려웠던 농촌 학생들에게 새로운 배움의 길을 열어 준 지역 교육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등대학교와 야간반 재수생들
등대학교에는 대입 재수생을 위한 야간반도 있었다. 필자 역시 여러 사정으로 대학진학을 포기하고 공직시험을 준비하던 때였지만, 영어와 수학을 다시 공부하기 위해 야간반에 나갔습니다. 울진농업고등학교 재학생과 재수생을 합쳐 열 명 남짓한 학생들이 함께 공부했다. 그 가운데 이세윤 후배도 있었다. 참고로 필자 기억으로 등대학교 야간반에서 공부했던 학생명단은 다음과 같다. 재수생은 임문홍,김성용,이위영,김선오,이근재,남계동,남하중,김진문이며, 재학생은 이종교,이종호,주응영,이세윤이다. 이들은 공직 등에서 일하다 지금은 퇴직하여 인생 제2막을 살고 있다.
당시 실업계인 농업고등학교를 나온 재수생들에게 인문계 고등학교에서 배우던 영어와 수학은 결코 만만한 과목이 아니었다. 어찌 보면 핑계처럼 들릴 수도 있지만, 당시 실업계 고등학교 교육과정 자체가 대학진학을 준비하기에는 불리한 여건이었다. 실업계 교육은 실업 과목과 인문과목 수업 시간이 대략 7대 3으로 배정되어 인문과목을 충분히 배울 수 없었다. 인문과목을 맡을 교사가 부족해 과학교사가 수학을 가르치기도 했다.
더구나 학원에 다니자면 도시로 나가야 하기에 집안 형편도 되지 않았다. 대학에 진학이나 공무원 시험에 응시하자면 독학밖에 없었다. 결국, 참고서를 붙들고 혼자 공부하는 수밖에 없었다. 같은 대학입시를 치르면서도 농업고등학교 학생들은 인문계 학생들과는 출발선부터 다른 현실에 놓여 있었다.
그런 우리에게 등대학교 야간반에 개설한 영어, 수학 강의는 큰 힘이 되어 주었다. 강사는 수산 군부대에 복무 중인 서울대학교와 연세대학교 출신 군인들이었다. 우리는 그들의 도움을 받으며 부족한 공부를 메워 갔다. 돈을 내고 학원에 다닐 형편이 못 되었던 농촌 학생들에게 그들의 무료 강의는 가뭄 끝에 만난 단비와 같았다. 지금도 생각하면 너무 고맙습니다.
기억과 자료 제공을 하다
이세윤 후배는 제동학원에서 중학과정을 마친 뒤 울진농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공직에 들어갔다고 한다. 오랜 공직생활 끝에 출입국 관련 기관의 책임자를 지냈으며, 중국에서 10여 년 동안 근무하면서 현지 대학원에서 공부하기도 하였다.
그런 후배와 53년 만에 다시 만나 제동학원과 등대학교 시절 이야기를 나누니 감회가 남달랐다. 한때 같은 교실에서 책을 펴고 영어와 수학을 공부하던 학생이 긴 세월 동안 자신의 삶을 개척해 온 이야기를 들으니 더욱 뜻깊었다.
무엇보다 이세윤 후배가 보내온 졸업 사진 자료는 울진교육사를 집필하는 데 귀중한 자료가 되었다. 사진첩에는 당시 제동학원의 교사와 학생들 모습은 물론, 학교 관계자들의 모습도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당시 교장이었던 이시백 선생님과 제동학교 모습도 볼 수 있었으며, 행곡리 출신으로 일제강점기 제동학교를 졸업한 장성업 선생의 사진도 있었다. 동명목재를 경영하여 성공한 기업가로, 울진 최초 사립 제동중학교를 설립·운영한 재단이사장이었다.
사진 속에서 다시 만난 장소택 선생
사진첩에서 뜻밖에도 장소택 선생 젊은 시절 모습을 다시 만났다. 행곡리 출신인 그는 이미 고인이 되었지만, 필자에게는 여전히 깊은 인상과 추억으로 남아 있는 분이다.
1990년대 중반 국회의원 선거 무렵 그의 사무실을 찾아간 적이 있었다. 사무실에는 호랑이 그림이 걸려 있었는데, 평소 호랑이 그림을 즐겨 그린다고 하였다. 그때 그는 자신이 쓴 묵필 한 점을 나에게 건네주었다. 자전적 소설 『갈대꽃』은 언제, 어디서 구했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그가 쓴 책과 묵필 작품을 지금도 가지고 있다.
그런 고향 선배를 사진 속에서 다시 만나니 반가움도 있었지만 마음도 짠하였다. 그는 시골 학생들을 가르치던 교사 시절 모습 그대로였다. 소박하고 자애로운 인상과 함께 교실에 걸린 급훈이 눈길을 끌었다.
‘친향토(親鄕土), 친자연(親自然), 친근로(親勤勞)’
고향을 사랑하고 자연을 가까이하며 부지런히 일하자는 뜻으로 읽혔다. 학생들에게 향토 사랑과 자연 존중, 근면한 생활을 가르치고자 했던 그의 교육관이 담긴 글귀였다.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사진 한 장과 급훈은 그가 교단에서 품었던 교육의 뜻을 다시금 되새기게 하였다.
학생 참여를 이끈 앞선 수업
이세윤 후배 증언에 따르면, 장소택 선생님은 사회과 수업에서 모의 형사재판 역할극을 하였다고 한다. 학생들이 판사와 피고인, 변호사, 검사, 서기 등의 역할을 맡아 재판 과정을 직접 진행하는 수업이었다.
오늘날 학교 현장에는 학생 참여를 이끄는 역할극 등 여러 수업 방법이 널리 자리 잡았지만, 당시 농촌 학교에서 이러한 수업을 펼쳤다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학생들이 각자 재판 당사자의 역할을 맡아 법과 사회를 이해하고, 스스로 생각하며 수업에 참여하도록 한 점에서 앞선 수업 방법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이처럼 이세윤 후배가 보내온 사진첩은 단순한 졸업 사진을 넘어 당시 제동학원의 교실 풍경과 교사들의 교육 활동, 학생들의 배움터를 살펴볼 수 있는 귀중한 교육사 자료가 되었다. 특히 사진 속 장소택 선배의 모습과 급훈, 수업에 관한 제자의 증언은 문헌만으로는 알기 어려운 당시 교육 현장을 생생하게 되살려 주었다. 반세기를 지나 다시 만난 제자 기억과 사진자료가 필자에게는 울진교육사를 새롭게 기록하는데 더없이 좋은 계기가 되었다.
한 사람 기억에서 울진교육사를 찾다
이번 자료를 계기로 필자는 제동중학교 역사를 그 뿌리부터 다시 살펴보고 있다. 일제강점기 울진청년회가 마련한 울진강습소에서 출발하여 제동학교, 제동중학원, 제동실업학교, 사립제동중학교를 거쳐 2007년 2월 폐교에 이르기까지, 제동중학교가 걸어온 발자취를 되짚어 보고자 한다. 비록 학교는 문을 닫았지만, 벽지 울진의 중등교육 발전에 이바지한 공로와 그 역사적 의미만큼은 기억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과정에 가장 중요한 것은 문헌만 아니다. 당시 학생들 기억과 사진, 졸업장, 성적표, 교과서, 학급사진 같은 작은 자료 하나하나가 학교 역사를 복원하는 귀중한 단서가 된다. 이세윤 후배가 보내온 사진첩도 바로 그런 자료 가운데 하나이다.
제동중학원 시절을 회고한 이세윤 후배는 공직생활 중 중국에서 10여 년을 근무하였으며, 그곳에서도 현지 중국 정법대학교 대학원 석사과정을 이수하였다고 한다. 어려운 여건에서도 배움을 멈추지 않았고, 맡은 직무에도 성실하게 최선을 다하여 수원출입국외국인청장을 지낸 뒤 공직에서 물러났다.
그래서일까요. 필자가 세간에서 들은 바로는 이세윤 후배와 형 이세중 씨를 비롯한 집안 자녀들도 부모가 어려운 형편 속에서도 배움에 힘썼던 뜻을 이어받은 듯 여러 자녀가 사법고시 합격 등을 거쳐 법조계에서 활동하고 있다고 한다. 집안에서 이어진 배움에 대한 열정과 성실함이 후대에도 이어지고 있는 셈이다. 이번 제동학원 관련 자료와 구술을 기꺼이 제공해 준 이세윤 후배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합니다.
울진교육사를 새롭게 기록하기 위해
울진교육사 편찬을 위한 소중한 자료와 제보를 기다립니다
울진교육사는 몇 사람의 기록만으로 완성할 수 없습니다. 지역민과 출향인, 전·현직 교원 여러분의 기억과 자료가 모여야 울진교육사를 온전하게 기록할 수 있습니다.
졸업앨범과 옛 학교 사진, 학교 문서, 교육활동 자료, 학창 시절의 추억 등 가지고 계신 소중한 자료와 이야기를 제보해주시면, 내용을 확인하여 가치 있는 자료를 채택, 울진교육사 편찬에 활용하겠습니다.
지역민과 출향인, 전·현직 교원 여러분의 많은 관심과 적극적인 제보를 부탁드립니다.
(연락처:010-2533-9889 김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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