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텔링으로 만나보는 이땅의 장대룡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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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대룡 장군 무덤(부인 합장묘). 아래가 개남의 묘, 옆이 말무덤프롤로그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역주한 중국정사 조선조 4편에 순치(順治) 2년(1645년, 인조23) 5월, 임경업의 별장(別將) 장대룡(張大龍)이란 자가 궁중에 잠입하여 폭역(暴逆)을 감행하다 체포되어 육시(戮屍)로 벌하고 조선에 이를 힐책하다'고 기록되어 있고 그 외 울진장씨세보, 군지, 월계동사, 향토사 연구지, 병자호란 등 관련 기록들을 토대로 비교하였다. 책자마다 연표가 다르고 내용도 다르게 표현되어 있어 중국정사 기록 외는 모두 1639년에 거사를 하고 장사를 지낸 것으로 되어 있어 추후 정확한 검토가 요구된다.일단 연표는 중국정사의 편년을 따르기로 하고 내용은 비교 분석 하여 가능한 사실을 유추 이야기화 하였다. 말하자면 미약하나마 스토리텔링의 전초작업으로 다루어 보았다.
스토리텔링은 이러한 문화유산 외에도 지금 워낙 광범위하게 확산되고 있는 추세다. 게임과 디지털 영화, 드라마, 애니메이션, 마케팅 등에서 실제 스토리를 쓰는 경우도 있고 전설, 신화 등에 나오는 스토리를 차용하는 경우도 많이 있다.
문화유산이 어디 어디에 뭐가 있었다가 아니라 그것이 어떠한 연결고리로 이어져 오늘에 생생하게 다가올 수 있는가 하는 작업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시도는 앞으로 적극 진행되어야 한다. 장대룡장군과 관련된 스토리는 이러한 작업에 풍부한 소재를 주고 있는 지역의 중요한 문화자산으로 가치가 높다.
우리가 ‘병자호란'이나 ‘임진왜란'이라 부르고 있지만 대의 명분적인 냄새가 난다. 난(亂)이란 국내에서 일어난 것을 말하는데 병자호란과 임진왜란은 분명히 외국이 우리나라를 침략한 국가간의 전쟁이었다.
병자호란과 관련해서 주화파와 척화파의 주장들이 최근 들어 다시 조명되고 있다. 명분도 좋지만 실용을 택하자고 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물론 청나라가 수긍할 수 없는 요구조건을 해온 것은 사실이지만, 정묘호란을 겪었으면 위정자들이 백성을 위해 국제정세 등을 정확히 읽고 국익을 위한 최선의 노력이 필요했다.
그러나 결과는 힘없는 백성의 처참한 고통만 있었다. 장대룡장군을 척화니 주화니 보는 것은 난센스다. 그는 비참하게 짓밟힌 조국과 그가 배운 성리학적 명분에 의해 실천으로 움직인 충의로운 지역 선비정신의 표상이다.
병자호란과 이 땅의 선비들
1627년 후금(後金)의 조선에 대한 제1차 침입(정묘호란) 때, 조선과 후금은 형제지국의 맹약을 하고 양국관계가 일단락된 지 9년, 청(淸)이라 국호를 바꾼 그들은 1636년 병자년 12월 초에 조선을 침략하였다. 그 춥던 그해 모진 겨울의 시작이었다.조정에서는 급히 종묘사직의 신주(神主)와 세자비, 원손(元孫), 봉림대군(鳳林大君), 인평대군(麟坪大君)을 비롯한 종실(宗室) 등을 강화로 피난하게 하였다.
12월 14일 밤 인조도 강화로 피난하려 하였으나 이미 청나라 군에 의해 길이 막혀, 소현세자(昭顯世子)와 백관을 거느리고 남한산성으로 피하였다. 인조는 훈련대장 신경진(申景?) 등에게 성을 굳게 지킬 것을 명하고, 8도에 근왕병(勤王兵)을 모집하도록 격문(檄文)을 발하였으며, 명나라에 급사(急使)를 보내어 지원을 청하였다.
그러나 16일 청나라 선봉군이 남한산성을 포위하였고, 1637년 1월 1일 태종이 도착하여 남한산성 아래 탄천(炭川)에 20만 청나라 군을 집결시켜 성은 완전히 고립되었다. 성내에는 군사 1만 3천명이 절약해야 겨우 50일 정도 지탱할 수 있는 식량이 있었고, 의병과 명나라 원병은 기대할 수 없었다. 또한 성 밖에는 청나라 군이 무고한 백성들을 죽이고 노략질하기를 일삼으며, 어미는 납치해 놓고 그 아이들은 추운 길바닥에 버려 거의 굶어죽고 얼어 죽었다. 초가집에 얹은 지붕과 가마니를 풀어서 말먹이로 먹이고, 먹을 것이 없어 굶어 죽는 말을 잡아 먹었다.
특히 병자년은 혹독한 추위가 오래 계속되어, 노숙(露宿)하던 장수·군사들은 추위와 굶주림에 기진하여 병들고 얼어 죽는 자가 늘어났다. 이러한 상황에서 성내에서는 최명길(崔鳴吉) 등 주화파(主和派)와 김상헌(金相憲) 등 주전파(主戰派) 사이에 논쟁이 거듭되다가, 강화론이 우세하여 마침내 성문을 열고 항복하기로 하였다. 청나라 태종은 조선의 항복을 받아들이는 조건으로, 우선 인조가 친히 성 밖으로 나와 항복하되, 양국 관계를 악화시킨 주모자 2, 3명을 잡아 인도할 것을 요구하였다.
때마침 강화도가 적에게 함락된 소식을 들어, 어쩔 수 없이 최명길 등을 적진에 보내어 항복조건을 교섭하게 하였다.
1월 30일 인조는 세자, 수행원 등을 거느리고 성문을 나와 삼전도(三田渡)에 설치된 수항단(受降壇)에서 청태종에게 굴욕적 항례(降禮)인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항복의식을 치렀다.청나라는 맹약(盟約)에 따라 소현세자, 빈궁(嬪宮), 봉림대군(훗날 효종) 등을 인질로 하고, 척화의 주모자 홍익한, 윤집(尹集), 오달제(吳達濟) 등 삼학사를 잡아 2월 15일 철군하기 시작하였다. 이로써 조선은 완전히 명나라와 관계를 끊고 청나라에 복속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관계는 1895년 청·일전쟁에서 청나라가 일본에 패한 후 체결된 시모노세키 조약으로 끝이 났다.
병자호란 후 청과 군신관계를 맺게 된 조선은 매년마다 많은 수의 조공물을 청에 바치게 되었다. 특히 납치와 살육으로 인한 전후에는 수많은 고아들의 문제와, 수만에 이르는(어느 기록에는 50만) 납치당한 이들의 속환(贖還)문제가 대두되었다. 특히 청나라 군은 납치한 양민을 전리품으로 보고, 속가(贖價)를 많이 받을 수 있는 종실, 양반의 부녀를 되도록 많이 잡아가려 하였으나, 대부분 잡혀간 이들은 속가를 마련할 수 없는 가난한 사람들이었다.
여기에 순절(殉節)하지 못하고 살아 돌아온 것은 조상에 대해 죄가 된다 하여, 속환 사녀(士女)의 이혼문제와 가족으로부터 버림받은 ‘환향녀(還鄕女)’라 부른 여인들 중 자결하는 자가 속출 사회·정치문제로 대두하였다.
이 문제를 제기한 최명길의 상소에 인조는 곧 대동강, 한강, 낙동강, 금강, 섬진강, 영산강 등을 회절강으로 삼아 환향녀들이 회절하는 정성으로 심신을 깨끗이 씻고 귀가하도록 했고, 만일 회절한 환향녀를 거부하는 집안은 엄벌로 다스린다는 웃지 못할 일도 있었다. 이후 "환향녀" 는 소리 나는 대로 "화냥년"으로 변했다.
이처럼 참담한 사회적 문제도 문제려니와 자신들에게 조공을 하던 오랑캐에게 반대로 조공관계를 맺는 속국이 된 사실에 조선인들은 정신적 충격을 받았다. 이후 이러한 영향으로 북벌론이 제기되었으며 박씨전, 임경업전과 같은 문학 작품으로 탄생되기도 한다.
특히 청나라를 여전히 오랑캐라고 생각하던 조선의 선비들로서는 정신적 혼란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 울진 부근에서만 살펴보아도 병자호란의 울분을 참지 못한 흔적들이 보인다. 비단 이러한 행동이 어디 울진에서만 있었겠는가.
근남면 행곡리 주천대에서 후학을 양성하던 임만휴(任萬休, 1601~1673)는 그의 나이 36세 되던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서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들어가서 포위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이현영과 협력하여 승군 등 3백여명을 모집 인솔하고 달려가던 중 원주에 이르러 강화가 체결되었다는 소식을 접하자 의병을 풀고 울진으로 돌아왔다.
또 대해 황응청(大海 黃應淸, 1524-1605)의 행장을 쓴 석계 이시명(石溪 李時明, 1590-1674)은 그의 부친이 대해의 문인인 운악 이함(雲嶽 李涵, 1554-1632)의 아들로, 바로 유명한 정부인 장씨의 부군이며 경당 장흥효의사위이다. 그는 병자호란 이후 나라가 수모를 당하자 이를 분개한 나머지 영양 수비로 옮겨 모옥(茅屋, 띳집)을 짓고 산간 벽처에 은거하며 생애를 보냈다.
또 기성 사람 김응선은 아우 응남과 함께 약 1백여명을 이끌고 병자호란 때 청나라 군대를 무찌르기 위하여 서울로 진군하다가 도중에 인조대왕이 청태종에게 항복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하루 종일 통곡하다가 의병을 풀어 고향으로 돌려보내고, ‘나라위해 한목숨 바치려고 했었는데 살아서 돌아가니 면목이 없구나’라는 시 한 수를 짓고 고향에 돌아와 어느 누구와도 만나지 않고 지내다가 자취를 감추었다고 한다.
아! 장대룡
1645년 울진 호월리로 장대룡 장군의 말이 돌아왔다.
울진장씨 대동보에 울진장씨 시관조 말익의 19세손으로 기록돼 있는 장대룡장군
건장한 불영사 스님 개남을 데리고 분기탱천한 심정을 품고 청나라 심양으로 떠났다가 개남 편으로 돌아온 것은 속옷과 그가 타던 말이었는데 사건의 전말은 이러했다.장대룡(張大龍)은 울진읍 호월리(무월동) 사람으로 울진 장씨 시관조(始貫祖) 말익(末翼)의 19세 손으로 운명처럼 임진왜란이 일어난 해 1592년 5월 3일에 태어났다. 성품이 강직하고 기골이 장대하며 체력이 걸출한 사람이었다.
그가 태어났을 때 산성(山城) 아래에 있는 연못 속에서 용마(龍馬)가 뛰어나와 울부짖으며 돌아다니자 그의 집에서 이 용마를 붙잡아 길러, 그는 자연스레 이 용마를 타고 무예를 닦을 수 있었다. 사람들이 그가 말을 훈련시키던 곳이라 하여 무월동(舞月洞)의 마평(馬坪)이라 불러 오늘에 이른다.
이렇게 문무를 익히던 그는 1618년 (광해군 10년)에 알성무과(謁聖武科)에 장원급제하여 훈련원 판관(訓練院 判官)에 임명되어 삼척포 첨사(三陟浦 儉使)가 되었고, 나중에는 국토의 중요한 지역을 지키는 종2품의 방어사 벼슬로 경흥 방어사(鏡興 防禦使)와 안주 방어사(安州防禦使)가 되었다. 이때가 바로 임경업 장군의 별장으로 근무할 당시다. 백마산성에서 임경업의 수하로 청의 침략을 막고자 하였으나 청은 이곳을 피해 곧 바로 서울로 진격해버리고,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피신하여 저항하였지만 굴욕적 항복을 하고 만다.
피폐해진 나라와 선비의 자존에 상처를 입은 그는 벼슬을 버리고 고향에 돌아와 분통하고 참담한 심정을 가누면서 울분의 나날을 보낸다. 무인으로서의 용단과 선비의 자존감으로 불타오르던 그는 드디어 청나라 황제를 암살할 계획을 세운다. 평소 알고 지내던 노지심 같은 장사가 불영사(佛影寺)에 있었는데 그의 이름은 개남(介南)이었다. 말잡이로 삼은 그와 함께 가슴 가득 비장함을 품고 멀고도 먼 청나라 수도 심양(瀋陽)으로 떠난다.
나라의 원수를 갚겠다고 승복(僧服)으로 변장하고 소매 속에 쇠방망이를 숨겨 길을 떠났다. 압록강을 건너 기나긴 여정으로 심양을 찾아간 그의 마음은 조금도 흔들림이 없이 결연하였다.
예상한 바이지만 삼엄한 경계로 황제 암살이 봉착에 처하자 조선의 뜻을 너희 오랑캐 나라에 전하리라 마음먹고 기회를 봐서 궁중 화약고에 불을 지를 계획을 한다. 거사 전 그는 속옷을 벗어 개남(介南)에게 주면서 “나는 살아 돌아갈 수 없으니 그대는 불꽃이 공중에 솟구쳐 오르는 것이 확인되면 곧장 집으로 달려가서 이 옷을 전하여 나의 죽음을 알리라”하였다. 성(城) 안에는 불꽃이 하늘을 찔렀고 황색구름(黃雲) 기둥이 서쪽에서 동쪽으로 흘렀고 그도 그 속에서 장렬한 최후를 맞는다.
유언대로 개남은 그의 옷을 갖고 본국으로 돌아오면서 몇 번이고 ‘장군님 오십니까’하고 눈물로 물으니, ‘간다’하고 공중(空中)에서 응답하더니 압록강을 건너자 불러도 대답이 없었다(招魂返馬問將軍靈歸則空中應聲不絶, 渡鴨綠江無聲).
고향 호월리 무월동에 시신(屍身) 대신 돌아온 의관(衣冠)을 보자 동네 주민 모두 눈물바다를 이루었다. 울진읍 정림리 동쪽 사리곡(獅狸谷)에 있는 부인(夫人) 영양 남씨(英陽南氏)와 합봉(合封) 하였다. 장사 때에는 여러 고을 수령(守令)들이 모두 모였으며 장례가 끝나자 말(馬)이 슬피 울다가 죽으니 그의 묘 옆에 묻었다. 그 뒤 개남(介南)이 죽자 스님이었지만 지역 선비들의 주장으로 다비를 하지 않고 장군의 묘 밑에 묻었는데 사람들은 개남총(介南塚)이라 불렀다.
장대룡장군 무덤을 안내해준 장규형씨. 그는 어릴적부터 벌초를 하며 이곳을 올랐다고 한다.
지금은 연로하여 가파른 길을 힘겹게 오르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