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만난 산해(山海)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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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지사로 널리 알려져 있는 고(故) 산해 전영경(山海 田永璟, 1897-1979) 선생의 유집발간 기사를 본지 2008년 5월호에 소개한 바 있다. 필자는 산해 선생이 어떤 분이었는지 궁금하여 선생과 만났던 지역사람들을 몇 분 직접 만나 증언을 들어보기로 했다. 선생은 일제 강점기인 1919년 원산 장날에 3.1만세 운동을 하다 체포되어 3개월 동안의 옥고를 치르고 울진으로 돌아와 조국광복을 위해 독립운동을 전개하였으며, 여러 번 투옥되기도 한다.광복 후에는 건국사업과 지역 사회 발전에 전심전력한다. 백운 주진수(白雲 朱鎭洙) 선생의 기념비 건립과 실록 발간(1959년) 사업 및 국오(菊塢) 황만영(黃萬英) 선생의 기념비 건립 사업 등을 주도했고, 제동학교와 울진중학교, 울진문화원 설립에도 깊이 참여했으며 1971년도에는 울진군지를 발간하는 등 지역사회에 크나큰 족적을 남겼다. 1982년 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의 서훈을 받았다. -편집자 주-
1. 프롤로그
내가 만난 산해 선생의 제목에 부합하려면 선생을 직접 만나거나 같이 활동한 사람이 있어야 했다. 그러나 산해 선생과 동시대를 함께 했던 많은 분들은 이미 고인이 되어, 작은 만남이라도 있는 분을 찾아 이야기를 들을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생존하고 계신 분들도 적었고, 고령인데다 선생과는 나이 차가 심해 그 직접적인 만남이나 활동 등의 기억은 대체로 적었다. 그러나 비록 작은 편린들이지만 생생한 육성의 기억이라 매우 소중하다고 생각하였다.
인터뷰 내용은 선생과 관련된 부분만이라고 했지만 대상자의 당시 정황이나 약간의 본인 이력 부분을 가감 없이 그대로 싣는다. 왜냐하면 선생의 당시 행적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소재를 제공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들의 이야기에서 시대적 배경이나 사회상을 알 수 있으며, 영화 세트장 같은 당시 분위기를 만들어 선생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다고 판단했다.
인터뷰 글은 개인의 기억에 의존한 것으로 사건의 진위를 정확히 판단하기는 어려운 문제가 있다. 더구나 하루 전의 기억도 함께 있었던 사람마다 조금씩 달리 말하는 것을 우리는 흔히 경험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체적으로 거짓을 말할 특별한 이유도 없고, 지난 역사적 사실은 어느 정도 맞는다고 봐야 한다.
예를 들어 남대천 부근에 울진시장이 있었다든지, 근화여관이 어디 부근에 있었고, 무슨 단체가 있었고, 언제 인민군이 물러가고 한 것은 우리 모두 알 수 있는 엄연한 사실이다. 돌아보면 아, 그때 그런 일이 있었구나! 하면서 공감도 될 것이다. 시대를 달리 산 필자는 생소하고, 새로운 사실도 많이 알 수 있었다.
각각의 증언은 대체적으로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 물었다. 첫째 산해선생과 직접적으로 대면했거나, 밀접한 연관이 있는 부분, 둘째 산해선생은 어떠한 일을 한 분인가? 셋째 산해 선생은 어떤 분으로 생각하느냐? 이었다. 선생을 만난 몇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보기로 한다.
2. 내가 만난 산해선생-김재윤, 남재창, 남종술, 임무승, 전진술(가나다 순)
▶김재윤 : 1927년 생, 울진읍 거주, 전 울진고등학교 교장『유물론적 사관을 가진 사람이다. 말하자면 좌파적 사상을 가진 것 같다. 해방직후 특히 인재양성에 상당한 관심을 가져 지역의 학교 교육으로 표출되었다. 내가 교장이 된 후 인사를 가서 학교 특강을 요청한 적이 있다. 선생님께 담뱃값이라도 만들어 드리려고 했다. 후학 양성에 좋은 말씀을 부탁했다. 제동학교 건학 이념에 선생의 사상이 잘 반영되어 있다.
상당히 다정다감한 분으로 기억한다. 나이 든 사람, 젊은 사람을 안 가리고 시원하게 말씀을 하셨다. 울진중고등학교를 만들 때 야산을 깎았는데, 다리를 절면서 리어카를 직접 끌던 모습이 생생하다.』
『산해선생이 살았던 곳은 672번지인데 우리 뒷집이다. 3.1 운동 때 원산 살다가 혼자 오셨는데 처음에 울진 어디에 살았는지 모른다. 아들이 가마이에서 태어났는데 나와 한동갑으로 학교를 같이 다녔다.
처음 울진에서 산해선생은 남재천씨와 함께 울진 읍내 종로서점 자리에서 인쇄업을 같이 하였다. 어릴 때부터 선생을 보며 자랐고, 돌아가실 때까지 보았다. 누구에게나 인사를 하는 자상한 분이었다. 남로당 결성식 때 주동은 산해선생이 했다. 당시 순경을 까마구(까만 복장), 형사를 세파트(누른색 옷)라 불렀다.
내가 보기에 공산주의자인데 온건파이다. 6.25사변 때 울진군인민위원회 부위원장을 했다. 위원장은 사계의 최모씨가 했다. 선생은 당시 공산당들이 가구 등의 우익 재산을 몰수해서 농협울진군지회(금융조합)창고에 갖다 놓았는데 시내 사람들이 그것을 훔쳐갔다. 그러자 선생이 내무서(인민경찰)에게 “왜 우익들의 재산을 안 지키고 도난당하느냐?” 하자, 그 때부터 재산을 지키기 시작해서 우익이 들어 왔을 때 다시 찾아갈 수 있었다. 이는 선생의 공이다. 국군이 올라오고 선생이 1군 사령부 특무대에 체포되어 유치장에 들어가게 되자 임경필(일정 때 도의원)씨가 진정서를 만들어 석방을 요구했다. “공산주의자는 공산주의자인데 온건파로서 6.25때 우익 요원들의 재산을 보호해줬으며 많은 우익 사람들을 살렸다. 그러니 이 사람이 무슨 죄가 있느냐? 사상만 좌익일 뿐이다.”고 진정서를 냈다.
6. 25 당시 나는 경찰이었기에 군수 관사에 있는 인민군 정치보위부에 끌려가 처형당할 위기에 처해졌다. 아버지가 보위부장실에서 선생을 만나 부탁을 했다. 선생은 인민군에게 “이 사람이 경찰에 근무하는 것은 밥 먹기 위해 들어갔지, 사상이 그런 것은 아니다. 내가 이 사람을 보증한다.” 하시면서 나를 구명하였다. 나 이외에도 지역의 많은 목숨을 살렸다.
6.25사변 때 울진의 우익은 그 분을 은인으로 생각해야 한다. 인민군이 나와 우익요원 직접 죽인 것은 잘 없고, 인민군이 죽창으로 찔러 죽였다고 했는데 나는 잘 모른다. 우익에 의한 부역행위로 많이 죽었다. 기골에서 20~30명, 아군이 수복해서 경찰에 구금했다가 죽변등대에서 20여명 총살한 것을 나는 안다.
선생은 여운형 선생과 옥중생활을 같이 한 것으로 안다. 여운형 선생이 중앙에 올라와 일을 같이 하자는 편지가 2번 왔다.
울진중·종고 건립 때 독립운동가라고 해서 군민전체가 따랐다. 각 부락에서 대소사가 있으면 선생을 불렀다. 생활은 풍족하지 못했지만 부고가 오면 한 군데도 안 빠지고 다녔다. 특이한 것은 문객들과의 얘기를 조각조각 적어왔다.
나는 선생의 임종을 지켜봤다. 갑자기 많이 아프다기에 가보았더니 숨을 쉬다가 벌떡 일어났다가, 또 한 번 일어나시더니 임종하셨다. 선생은 돌아가실 때까지 술, 담배를 안했으며, 밥 1그릇을 다 비웠다. 평생 농구화와 늘 한복을 즐겨 입었는데 가끔 양복도 입었다. 작대기 지팡이를 자전거에 달고 다녔는데, 나는 학교 오갈 때 선생의 자전거 뒤에 타기도 했다. 선생의 자제 중에서 내가 보기에 둘째 아들 만술이가 천재다. 울진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졸업까지 장학금을 받고 졸업했다. 친구인 큰아들은 삼척 부평에 있는 22사단에 갔다가 생사를 알 수 없게 되었다.
평소 말을 잘 안하셨지만 인간적으로 호인이셨다. 나에게 한 번은 이런 말씀을 하셨다. “어디 많이 모인 장소에 가도 아는 척 하지 말라. 찬성, 반대가 있으면 그 얘기를 들어보고 찬성파든 반대파든 많은 쪽에 동조를 하라.” 어찌 보면 기회주의자 같은 말이지만 대중의 마음을 읽어야 된다는 뜻이라고 했다. 말하자면 대중 리더 방법은 민주적이어야 한다. “대중의 책임자가 되면 대중의 여론이 강한 쪽에 서라. 그렇지 않으면 적이 많아진다.” 사상은 온건한 공산주의자요 민족주의자라 볼 수 있다.』
울진읍 고성리에 위치한 고(故) 산해 선생의 생가▶남종술 : 1919년 무오생(91세), 울진읍 51-13
『죽변에서 살면서 제동학교 졸업하고 고바야시란 일본인이 운영하던 회조점(回漕店-해운업자와 하송인(荷送人) 사이에 있어서 화물 운송에 관한 일을 그 영업으로 하는 상점)에서 밥을 해주거나, 물건을 우차에 싣는 일을 거들거나 하면서 1년 정도 있었다. 당시 울진의 물건 대부분은 부산에서 왔는데 그곳에서 일본가는 여권을 끊어줬다. 그 때가 16살 쯤 되었다. 일본에 가서는 여관에서 심부름하면서 3년간 미쯔이 가(三井家)에서 세운 삼정중학(야간학교)을 다니고 평호(平户) 가부시끼(주식회사)에 들어가서 라사(양복) 만드는데 근무하였다. 귀국 후 서울에서 3년 정도 더 근무하다가 고향으로 내려왔다.
당시는 중학교 졸업장만 있으면 공무원을 할 수 있었다. 군에 근무하다가 해방되고 대한민국 촉성회에 가입했다. 위원장에 죽포장 전영직(독립운동가 허영백 비서 역임), 부위원장에 울진의 주진철(금융조합, 부기에 능숙)과 온정의 김수근(울진군수 역임)씨가 맡았다.
당시 울진에는 좌익이 75%가 넘었다. 나는 낮에만 활동하고 밤에는 짚이나 보릿짚개리 속에서 잤는데 몇 달을 집에서 자본적이 없을 때도 있었다. 남로당 결성식 때 먼발치에서 산해선생을 뵈었다. 그러니까 나는 우익진영에서 일하고 선생은 좌익진영의 수장 격으로 일한 셈이니 사상적으로는 멀고도 멀었다. 그런 선생과 본격적으로 심부름을 하기 시작한 것이 6. 25 전쟁이 끝나고 백운 주진수선생 비를 건립할 때부터다. 사실 같이 일했다는 것은 무리이고, ‘그저 심부름했다’ 하는 것이 맞다. 주진철 선생이 나를 많이 도와주었는데, 초기에 우익진영은 주진철씨가 실제로 일을 많이 하였다. 교육청에서 돈을 내어 할 적에 내가 우익 골수였는데도 선생 말을 잘 들어서인지, 지역에서 원활하게 일을 진행하려면 나 같은 우익활동가의 도움이 필요했는지 아무튼 갖은 심부름을 하게 되었다.
선생을 더욱 존경하게 된 계기가 있는데 바로 국오 황만영 선생 비를 세울 때였다. 남쪽 위원장은 천석꾼이었던 안용훈씨가 맡아 후포 삼율에 김병두씨와 했고, 북쪽에는 면장을 지낸 최익선씨가 일을 하였다. 비문을 만들기 위해 글 깨나 아는 지역 유지 73명이 근화여관(지금의 삼화당약국 자리)에 모였다. 모인 73명이 아는데 까지 써서 1주일 뒤에 근화여관에서 다시 만나자고 했다. 윤호규씨가 제일 선비라 이분 것이 통과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산해 선생 빼고 내노라하는 유지들이 모두 모였다. 선생이 오지 않아 회의가 시작 되지 않았다. 그 때 C라는 사람이 “영경이가 자전거나 고치는데 알면 움메나 안다고 그다 맡기노?” 그 말을 하는데 마침 선생이 도착해 마루에 앉아 작업화를 벗고 있었다. 나는 밖에서 참석한 사람들의 신발을 정리하고 있었다. 선생은 늘 작업화를 신고 다녔는데, 새양말 한 번 신고 다니는 것을 못 봤다. 떨어지면 광목 쪼가리 허연 거 가지고 직접 꼬메 신고 다녔다. 신발을 벗고 방에 들어가 20~30분 걸려가면서 모인 73명에게 모두 큰절을 하고는 “인제 내 밖에서 신발을 벗다 보니, 영경이가 모 움메나 아냐? 자전차나 고치고 하면서 그리 큰소리치던데, 그래 당신이 그래 많이 알면 최익한 선생 돌아가신 날짜를 아느냐?”라고 물었다. C가 말하길 “내가 우째 아냐? 사촌들이 알지” 했더니, “자네 삼촌은 세계가 아는 분인데 조카된 사람이 삼촌의 기일을 모르면서 많이 안다 합니까?” 그 후로는 그분이 울진에 발길을 끊다시피 했다. 이어 73명의 글을 몽천에 살던 윤호규씨가 일일이 낭독하였다. 그런데 그곳에 모인 모두가 우리 지은 것은 연도도 좀 안 맞고 하니 산해선생의 글을 채택하자고 만장일치로 의결하였다. 지금 국오선생 비문이 그렇게 탄생된 것이다. 그 후로 선생을 더욱 존경하게 되었다.
또 선생의 심부름을 한 일이 있었는데, 1977년에 문공부와 원호청에서 일정 시 독립운동투사에 대해 개인별로 당시 공판 판결등본을 첨부하여 소정의 양식서류를 제출하여 국가에서 보상할 근거 자료로 삼는 일이 있었다. 선생이 돌아가기 2년 전이다. “신문에 보고 알았는데, 여비를 모다 줄 테니 일제시 감옥 갔던 사람의 판결기록을 복사해서 가져오게. 내일 근화여관으로 사람들이 모인다네.”하고 말씀했다.
200여명이 근화여관에 모였다. 선생이 “그 움메나 가 왔는지 모르지만 판결문을 찾으러 가야 할 테니 가온 돈은 모두 내 놓으세요.” 그러자 신기하게도 돈이 막 나오데요. 돈은 당시에 삼만원이 모아졌는데, 나에게 만 오천 원을 주었다. 이것을 가지고 서울대법원에 가면 된다고 했다. 처음에 나는 집안 사정도 있고, 이래저래 고사를 했다. 그러나 “남공이 아니면 갈 사람이 없다. 남공의 사돈이 대법원에 있으니, 딴 사람은 못 들어가도 남공이 가면 들어갈 수 있다.” 고 단호히 말씀을 하는데 방법이 없었다. 또 “가보고 부족하면 남은 돈을 보내주겠다”고도 했다.
대단한 것이, 나도 몰랐는데 사돈(맏며느리의 7촌 아재로, 기성면 정명리의 안용준)이 대법원 서기관으로 근무하고 있다고 했으며 전화번호까지 주었다는 사실이다. 또 서울 가기 전에 강릉에 들러 조순 판사를 만나고 가라고 미리 기별을 해두었다는 사실이다. 그렇게 서울대법원에 가서 안용준 서기관을 만났다. 판결기록문은 아주 얇은 종이로 모아진 두꺼운 책이라 빠른 시간 내에 찾는다는 것은 불가능 했다. 서기관이 이런 것을 찾아주는 전문가로 강모란 사람을 추천해주었다. 일금 삼천 원의 수고비를 주고 찾아낸 것이 12명이었다. 기억나는 사람이 산해, 김병두, 황상봉, 박경성, 죽헌, 삼사이다. 그 서류를 찾는 전문가 강모란 사람이 책장을 넘기는데 얼마나 잘 하는지 ‘팔재데!(아주 능숙하게 하는 사람을 이렇게 부르기도 한다)’. 울진에 돌아와 선생에게 전했다. 삼율에 살고 있는 김병두씨는 나를 보고 자꾸 울고, 황상봉씨는 거지처럼 살고 있었다.
울진군지를 만들 때도 선생의 심부름을 몇 차례 한 적이 있다. “남공 같은 이가 이것을 꼭 알아놔야 하네.” 하면서 군지 만드는 중요성을 내게 깨우쳐 주기도 했다. 해서 남산 도서관까지 가서 자료를 열람하기도 했다.
돌아보면 울진에서 선생만한 분을 내가 뵌 적이 있을까 싶다. 예를 들어 그분이 오면 모든 공사가 정리되었는데, 선생이 하신 말씀이 생각난다. “사람이 하는데, 사람이 못하면 누가 하냐?”던. 목소리는 언제나 가만가만 하였고, 인간적으로 참 따뜻한 사람이었다. 다친 다리로 자전거를 타고 다녔지만, 꼬맹이가 인사를 해도 언제나 자전거에서 내려 인사를 받았다. 손자에게도 경어를 쓰고, 아침과 저녁을 굶어도 태가 안 났다. 김일규 군수 때 군지 만들면서 군수가 말하길 “누구도 이분 본을 볼 수 없다.”고 칭찬했다. 집에 가보면 밥해 먹을 나무가 없어도 걱정을 하지 않았는데, 그렇게도 처연할 수가 없었다. 모든 기록을 해두었던 두루마리가 큰 것이 있어, 늘 그곳에다 대소사를 기록해두었다. 지금은 없어졌는지 그것을 본 적이 없어 안타깝다.』
울진읍 고성리 소재 산해 선생의 묘소▶임무승 : 1924년 계해생, 울진읍 읍내리
『산해선생을 해방 후 처음 알게 되었는데, 나는 군청 공무원을 22세에 시작하여 20년간 근무하였다. 선생은 울진 중고등학교를 지을 때 총감독하였다. 매일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우리 집 옆으로 자전거를 타고 지나다녔다. 누굴 만나도 자전거에서 내려 인사를 받고 하였다. 집에 올 때도 있는데 나를 ‘임공’ 이렇게 불렀다. 무승아! 이렇게 부른 적이 없었다.
6.25사변 때 인민위원장을 했지만 국군이 왔을 때 왜 인민위원장 했냐는 말 없었다. 나는 6.25(당시 26세)를 당하여 포항, 경주, 언양까지 피난을 갔다. 공무원이었기 때문에 피난 갈 수 밖에 없었다. 자기 보존 서류는 자기가 처리했다. 땅을 파고 서류를 묻어 두고 갔다가, 수복되어서 파냈다.
선생은 연설할 때 쓸데없는 말을 하지 않았다. 연설도 잘하였다. 울진의 대소사 일들이 잘 기록되어 있는 두루마리가 있었는데 현재는 없다. 말을 내놔두면 반드시 결론을 짓는다. 반드시 실천을 한다. 우스개를 하지 않는다. 평소에 의지가 꿋꿋해서 한 번 결심하면 그만두는 법이 없다. 의리가 있는 사람이다. 신중하다. 우리는 말을 아무렇게나 하지만, 그분은 함부로 말을 하지 않고, 물을 때 집안 어른들의 안부를 꼭 묻는다. 인사를 그냥 안 받고 진지하게 받았다. 심지가 굳건한 모습으로 보인다. 누구든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엄정함이 있다. 대한민국 어디 내놔도 기품이 서려있다.
점심을 싸서 자전거 뒤에 달고 다녔다. 선생 집에 방문하면 물이라도 한 그릇 주지 그냥 보내지 않았다. 부인은 본 적이 없고 아들들은 본 적이 있다. 해방 후 남로당 결성식 때 당시 경찰서장은 기관총을 대기시켜 놓고 불상사에 대비했다. 다행히 아무 충돌 없이 대회를 치렀다. 소나무가 여러 개 있었는데 황새가 똥 싸서 죽었다. 선생은 좌익에도 우익에도 나쁜 인상을 주지 않았다.』
▶전진술 : 84세, 죽변면 화성2리(감대)
『경술국치(1910)를 당하여 36년간을 왜정 밑에서 살다가 해방이 되고, 좌·우익이 활동하던 시절에 남로당 결성식을 월변 백사장(당시 울진장터)에서 했다. 소나무 숲에 황새가 똥 싸던 곳이었다. 근남에 윤석효, 행곡의 최연덕, 북면의 전병전 등이 책임자로 활동했다. 산해선생이 임시의장을 맡았다. 동네마다 조직적으로 동원했는데 공산당원에 의해 동원된 것이다. 이것이 나중에 자유당 정부가 서고 빨갱이로 몰렸다. “36년간을 고생했으니 지금부터는 우리 대동단결하고 독립하여 대한민국의 깃발을 날리자!”고 선생이 호소했던 기억이 난다.
그 후 6.25사변 때 공산군이 물러가고 아군이 올라왔을 때 울진 형무소에 선생이 감금되었다. “그 어른은 빨리 석방 시켜야 된다”고 주민들이 요구하여 석방되었다. 헌병 C·I隊들이 집에 못 간다고 하자, 경찰서에서 증명해주어 집으로 갈 수 있었다.
가을에 10월 제사를 볼 때 가끔씩 뵈었는데, 사회문제나 과거 고생했던 얘기를 해주었다. 행곡에 최연덕이란 사람이 있었는데 아주 잘생겼다. 그렇게 잘생긴 사람은 울진에 없었다. 얼마나 잘생겼는지 그 사람이 나오면 시내가 훤하였다. 독립운동을 하다가 6.25 당시 행불이 되었는데, 말이 어눌했다. 윤석효씨도 공산당 활동 같이 하다가 역시 6.25 당시 행불되었다.
선생이 한 말 중에 또 생각나는 것이 있다. “왜놈 밑에 속국이 돼서는 안 된다. 원통하다. 힘으로도 말로도 안 된다.” 나는 죽변국민학교에서 군사교육을 1년 받고 함경도 길주로 갔는데 2주 만에 돌아왔다. 묵호에서 배로 원산까지 가서 그곳에서 기차로 길주를 갔다. 돌이켜 보면 선생은 언제나 예의 바르고 정정당당하였다. 손님이 왔다가 가면 낮은데서 인사하고 방에 들어오면 다시 절을 했던 모습이 선하다.
죽변 뒷당 집안 어른인 죽포장 전영직 선생으로부터 구학을 배운 것으로 안다.』
3. 에필로그몇 사람을 만나봤지만 선생에 대한 기억은 한결 같았다. 그리고 어느 누구도 선생에 대해 이의를 달지 않음을 느낄 수 있었다. 미루어 짐작할 수 있지 않겠는가. 김재윤씨의 경우 산해선생으로부터 받았다는 엽서 한 장을 선생이 내게 직접 보냈다면서 고이고이 간직하고 있는 것을 자랑스레 보여주었다.
어려운 일제강점기를 온몸으로 조국 독립을 위해 사셨으며, 좌·우익이 첨예하게 대립했던 민족적 비극기를 맞았지만 대인의 풍모를 잃지 않았다.
우리 흔히 보지 않았던가. 좌우익의 이념대결로 얼마나 많은 이들이 피를 흘렸으며 아픔을 겪었는가를. 그 시절 이념의 극한 대립을 주장했던 인사는 많았지만 양쪽을 아울렀고, 좌나 우로부터 존경을 받았던 인물이 우리나라 근대사에 몇이나 있었던가. 아직도 끝나지 않은 이념논쟁을 보면 안타까운 마음과 함께 더욱 그러하다는 생각이 든다. 극단의 시절에도 존경을 받을 수 있었던 그의 도량이나 인품에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굴원(屈原)이 지은 어부사(漁父辭)에 “성인불응체어물(聖人不凝滯於物 而能與世推移)”이라. 즉, 성인은 사물에 얽매이거나 막히지 않고 능히 세상을 따라 옮기어 나간다고 했다. 또 도연명(陶淵明)이 지은 오류선생전(五柳先生傳)에서 “증불린증거류(曾不吝情去留)”라. 즉, 가고 머무름에 미련을 두지 않는다고 했는데, 바로 선생을 두고 한 말이 아닌가.
민족과 국가를 생각하는 큰 뜻을 가졌던 사람. 선비의 차가운 절개를 지녔지만 만인에게 따스한 맘을 나누었던 사람. 진정 우리가 찾고자 하는 지도자의 모습이 아닐까 싶다.
이 땅에 다시 또 그런 사람 만나길 기원해 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