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진대게의 뿌리를 찾아서

기사입력 2006.07.25 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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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진대게의 뿌리를 찾아서

 

 1.옛부터 먹거리가 풍부한 울진

 울진군의 역사적으로 본 지리적 환경과 자연적 환경 속에서 울창한 산, 맑은 천(川), 청정바다가 둘러 싸여 있는 곳으로서 울릉도와 가까우며, 경북문화와 강원문화가 공존 하는 곳이다. 그리고 산과 바다와 천혜의 자연적 혜택을 많이 받은 곳이다. 물산도 풍부하여서 각종 산에서 나는 약제 , 나물, 종실류, 강에서 나는 민물고기, 바다에서 나는 싱싱한 해산물이 울진의 특산물이 되고 있다.

 

 고문헌에 등장하는 토산물과 진공식품으로 「신증동국여지승람」의 잣, 오미자, 굴, 송이버섯, 석이버섯, 인삼, 복령, 당귀, 송 어, 은어, 황어, 연어, 대구, 도루묵, 방어, 광어, 고등어, 적어, 복어, 꽃게, 홍합, 해삼, 미역, 김. 「여지도서」의 잣, 오미자, 굴, 송이버섯, 석이버섯, 인삼, 복령, 당귀, 도라지, 모과, 송어, 은어, 황어, 문어, 연어, 대구, 도루묵, 방어, 광어, 고등어, 적어, 복어, 꽃게, 홍합, 해삼, 생복, 상어, 평해지역의 자해(紫蟹). 「도문대작」의 자두가 울진지역의 특산물로 기록 되고있다.

 

 이러한 음식재료의 기반 아래서 울진대게축제가 해마다 5년간 꾸준히 열리고 있다. 대게는 토속성을 가진 어종으로서 울진 관광상품으로 그 역할을 하고 있다. 울진 대게가 가지는 문화적가치, 민속적가치는 타지역 보다 풍부하다. 즉 대게의 유교적 가치와 대장금에서 궁중음식으로서의 문화적 가치는 물론 향토음식으로서 전국적인 인정을 받고 있다.

 

2.풍부한 민속적 가치

 울진대게의 민속적 가치는 타지역 보다 풍부하다. 특히 대전지역의 탄옹 권시 선생가와 동춘당 송준길 선생가의 유교의 전통 음식으로 오랜 세월동안 사용되어 오고 있다. 민속적가치는 직산 기줄당기기와 어업요와 범벅타령에서 전승되어 온지 이미 오래 되었다. 이러한 민속적인 가치는 울진지방의 아주 특별한 향토색이 짙은 민속중의 하나이다. 하나의 민속이 형성되는 과정은 최소한 3세대 이상 흘러가야 만이 비로소 토착화가 되기 때문이다.

 

 울진대게의 역사적 근거를 찾기위해서 고문헌을 통하여 얻는 길 밖에 없다. 그러나 이러한 일들은 하늘에 별을 따는 것 보다 어렵다. 예를 들면 고령 지산동 고분군의 유적 발굴 보고서 500쪽에 바닷게의 집게 2개를 찾기 위해서 회원들과 고령까지 가야 하는 어려움이 있었다. 울진대게의 지방 명물로서 가치는 어디에 있는 것 인지. 왜, 무엇 때문에 대게 축제를 하는지 아직 정체성 확립이 제대로 된 문헌이 없는 상태로 5년동안 축제만 줄기차게 하고 있다. 대게를 연구하다가 보면 웃지 못할 일들이 자주 생긴다.

 

 이웃 『영덕 대게 백서』에는 통계 자료를 왜곡하여 울진보다 많이 생산을 한다고 우기질 않나, 그리고 왕실에 대게 진상을 했다고 영덕군은 야단 법석이지만 막상 자료확인을 하여 보면 울진도 아니고 영덕도 아닌 「진상등록(進上謄錄)」에서 확인된 것으로, 경기도 관찰사가 진상한 기록을 보고 아연 실색을 금할 수가 없다. 그리고 빵게가 궁중 음식의 메뉴에 등장하는 것을 보면 빵게가 언제 어떤식으로 진상되었는지 알 수 없다.    누가 진상을 많이 하였는가? 이것이 문제가 아니고 어느쪽이 대게에 대한 지방의 향토적, 민속적, 문화적 가치를 가지고 있느냐? 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 지방의 고유한 문화적 가치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지방의 축제는 그 지방의 민속에 근거를 두고 하기 때문이다.

 

3.향토음식 기(게)범벅을 아시나요

 울진대게의 민속적 가치는 어디에 두고 있을까? 울진의 민요중에 「범벅타령」이란 것이 있다. 그 중에 ꡒ4월에는 게 범벅ꡓ 이란 구절이 나온다. 그것도 4월이다. 이 사월은 춘궁기인 보리고개다. 이 때쯤은 먹을 양식이 없어서 봄나물로 끼니를 때울 때다. 필자는 울진대게의 가치를 게 범벅에다 두고 싶다.

 

 그 이유는 대게는 민중의 먹거리란 점, 어로 생산의 원동력이 된다는 점, 경제적 기반이 확립된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이러한 민중의 민요는 최소한 3세대는 지나야 토착화되는 것인 만큼 오랜 세월 동안 허기를 달래면서, 구비전승 되었기 때문에 삶의 애환이 깃들어 있다. 그리고 울진대게를 가지고 범벅을 만들었기 때문에 향토음식으로 가치가 있다. 그물당기기의 민요에는 어부들의 삶의 애환이 깃들어 있다. 그리고 질박하고 끈질긴 어업요가 있다.

 

「그물당기기」는 배 위에서 일을 하면서 부르는 뱃노래의 일종이다. ꡒ열렸네 열렸네 대추가 열렸네ꡓ ꡒ댕게보세 댕게보세 어야디야 어야디야 이 거물을 댕게 이 거물을 댕게보자. 에야디야ꡓ 대게가 그물에 잡힌 모습을 보고 그물을 당길 때에 부르는 노래다. 이 어업요 또한 생산적 기반 구축에 밑바탕을 둔 것이기 때문에 어로 생산에 있어서 중요한 노래다. 어로작업은 육지와 전혀 다른 성격을 띄고 있고 모질게 힘이 요구되는 집단적 노동을 강요하기 때문에 일을 할때 흥을 돋구면서 피로를 잊기 위한 일심동체의 힘이 요구 될 때, 생산성 향상을 위해 부르는 노래다. 이러한 민요는 해촌의 문화이자 풍요한 삶을 이끈 원초적 힘이 되었다.

 

 그리고 어린이들이 바닷가의 바위 틈에 쪼그리고 있는 「게」를 잡기위해 부르는 동요가 있다

ꡒ게야 게야 밥먹어라 게야 게야 밥먹어라ꡓ. 한여름 게가 입에 거품을 물고 있는 모양을 보고 밥을 먹으라고 게를 놀리는 대목이다. 이 얼마나 천진난만한 노래인가 이 속에 어린이들의 정서와 상상력을 키운다는 것을 생각하면 성장기에 동요가 정서 안정에 많은 도움을 준다.

 

4.기줄당기기는 풍요와 다산 상징

 울진대게축제의 핵심은 기(蟹引)줄당기기인데(기줄은 「게」줄이다. 지방방언 현상에 따라 「게」가 「기」로 음훈변화하기 때문에 기줄이라 한다), 주최측의 이해부족으로 엉뚱한 줄당기기를 하고 있다. 대게축제의 전체 평가는 이 기(蟹引)줄당기기 하나를 보고 판가름 할 수 있는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도 말이다.  

 

 우리나라에서 기줄당기기를 행하고 있는 곳은 울진, 삼척, 밀양, 성주 4곳 뿐이다. 삼척지방의 기줄당기기(蟹引)의 특성은 줄이 아주 큰 것이 특징이고 게는 특성상 옆으로나 뒤로 움직이게 되고 몸줄 옆으로 달린 꼬리줄이 게의 몸체 및 게다리와 닮은 점을 형용하여 부른 이름이다. 삼척지방의 지방민들이 게껍질이 바람병에 좋고, 기껍질을 사용하여 일종의 부적대신 처마밑이나 문 위에 부착하여 잡귀를 쫓는다고 한다. 강릉 해안지방의 풍속으로 「기(게)껍질 달아매기」는 최철이(영동민속지)씨가  지방의 풍속임을 기록하고 있다. 밀양과 성주도 기(게)줄당기기는 게잡이 영역 확보와 다산과 풍요를 기원하는 것으로 전하여지고있다.

 

5.게줄당기기, 대게축제 통해 특화시켜야     

울진대게, 향토 문화 민속적 가치 풍부

울진지방의 직산 기줄당기기는 편을 갈라서 여성들만이 행한다. 단체가 하지 않는다. 1:1로 게줄을 당기는 데이기는 사람이 계속한다. 줄 모양은 씨름 할 때 샅바처럼 생긴 끈을 양쪽을 묶어서 목에다 걸고 사타구니 밑으로 뒤로 통하게 하고 상대방도 이와 같은 조건으로 줄을 목에다 건다.

 여성이란 점에서 본다면 보기가 좋지는 않지만 전국 줄당기기 중 에서 가장 특이하다는 점에서 민속적 측면에서 본다면 가장 울진적 요소를 가지고 있어서 관중들의 시선을 끈다는 점에서 가치가 있다.

 

 그러나 근래에 와서 울진 게줄당기기가 주최 측에서 변형된 아주 이상한 줄당기기를 행하고 있다. 이러한 행위는 울진의 민속적 기반을 하루아침에 무너지게 하는 행위이다. 타지방에서는 없는 것도 만들어서 하는데 있는 것도 제대로 하지 못 한다면 문제가 분명히 있다. 지금 이라도 늦지 않다고 생각한다.    

 

6.떼배는 동해안 전통 배

 울진의 떼배에 대한 기록은 후포의 망사정(望사亭)의 시에서도 나타나고, 울진을 선사(仙사)라 한 지명에서도 자주 나타난다. 울진대게 축제때 떼배노젓기(일명 후포의 놀싸움) 대회는 울진 해양문화의 원초적인 일면을 보여주고 있다. 관광객들의 시선을 끄는 훌륭한 볼꺼리로 자리매김을 하고있다.

 

 가장 역동적이면서 바닷가의 비린내가 풍기는 삶의 현장같은 생동감 넘치는 느낌을 준다. 동해안에서 전통적인 배는 모두 사라졌다. 떼배가 울진 고포 등지에 남아있으나 그형식도 과거의 형식과 많이 달라졌다. 동해안에서 특징적인 배는 역시 떼배다. 전통적인 배가 사라진 조건에서 떼배는 매우 중요한 역사적 자료다. 이 떼배의 가치는 해촌사람들의 끈질긴 삶을 영위한 가장 원시적 어로수단이기 때문에 울진의 해양문화사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다. 어쩌면 이 떼배를 타고 대게 잡이를 하지 않았을까 생각도 해 본다.

 

7.영등할머니도 대게를 좋아했다

 「영등할머니와 게」에 대한 동해안 지역의 세시풍속이 있다. 울진지역에 영등고리라는 것이 있다. 이것은 정월 보름을 지나고 출항해서 첫 어획을 한 고기를 영등고리에 걸어 놓는 풍속을 말한다. 여기에는 대게가 영등고리에 다른 고기와 나란히 걸린다. 영등고리와 관계되는 향토음식의 재료가 있다. 이것을 우리는 해각포(蟹脚脯)라 부른다.해각포는 게를 반쪽으로 갈라서 게딱지는 먹고 게다리만을 짚으로 엮어서 말린 것을  말한다. 이것도 영등 할머니를 위한 것이고 제상에오른다. 그리고 영등할머니를 위한 제사를 지내기 위하여 이때부터 제물을 준비한다.

 

8.허균, 이산해 울진박달게 기록    

 

9.2월 영등할매에게 해각포 바쳐

 영등할머니는 원래 심술이 많아 제물이 많아야 벌을 주지 않는다고 믿고 있기 때문에 메를 지으려고 나락을 널어서 말리는데 참새가 와서 이 나락을 쪼아 먹다가 죽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영등날에는 풍신인 영등 할머니가 ꡒ바닷게를 좋아하여 게를 사다 먹는다(이창식)ꡓ고 말하고 게에 종이를 하나 걸어 놓고 제사를 지낸다.

 2월 영등달 초하루날이면 예전에는 동네에서 풍물을 치면서 걸립을 다니며 놀기도 하였다. 2월 스무날이면 영등할머니가 올라 가는 날인데 이것을 「영등 막는다」고 한다.

 그래서 음식을 차려놓고 그 해의 풍년, 풍어를 빌며 무사히 올라가기를 빈 후 음복하고 남은 음식은 모두 소각한다. 또한 액연을 띄워 보내기도 한다.

 

10.가야시대부터 바닷게를 먹었다

 바닷게가 국내 최초로 고령의 지산동32호 고분군에서 해각(蟹脚) 게다리 2개가 발굴되어 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모으고 있다. 갑각류가 가야시대(BC.400년)에 부장품으로 쓰였다는 점은 동해안 지역의 고대 음식문화와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음식문화는 그 시대의 문화가 1차적으로 반영되기 때문에 가장 기본적인 문화의 척도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바닷게의 집게다리가 고분군 속의 접시에 담겨져 있었다. 게(蟹)가 왕실의 부장품으로 사용 되었다는 것은 바닷게가 오랜세월 동안 가야인들의 먹거리로 사용되어 왔음을 입증해 주고 있는 것이다. 바닷게가 가야시대 부장품의 연구는 물론 사국시대(4國時代)의 음식재료를 연구하는데 가장 중요한 자료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고령지역은 해안지방과 내륙지방을 잇는 수로의 요충지에 있기 때문에 타지역의 교역품을 연구하는 데도 상당한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

 

11.발해시대에도 대게를 잡았다

 발해(698-926)는 일본과 동해안으로 한선을 이용하여 동해안의 험난한 바다 물길을 통하여 일본에 사신을 보냈다. 최초로 동해안의 항로를 개척한 한선은 조선기술의 극치를 이룬 조선대국의 쾌거로 그 역사적 의미는 크다고 하겠다. 그때까지 어느나라도 동해안을 통해 침략한 사실이 없기 때문이다. 일본도 임진란때 항해기술과 조선기술이 없었기 때문에 동해안 상륙을 하지 못한 것이다.

 발해는 어업의 발달로 고기잡이 도구가 개량되어 어업의 생산성을 올렸다. 그리고 숭어, 문어, 대게, 고래 등 다양한 어종을 잡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발해는 일본과 외교관계를 중요시하여 무역을 활발히 전개하였는데 무역규모도 커서 한 번에 수백명이 오가기도 하였다.

 

12.대게와 궁중음식의 역사적 배경

 궁중요리에 대게가 언제부터 사용되었을까? 조선왕조 궁중의 일 상식은 오랫동안 비밀에 묻혀 바깥 사회에 알려지지 않았다. 조선이 망하고 나서 일반에게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이와 같이 조선왕조의 궁중음식은 상궁이나 숙수들의 입이나 손을 통해 알려졌으나 이것은 한말 이후의 것으로 이것만으로는 조선왕조의 궁중음식 재료, 요리법, 식사의례의 전모와 변천의 역사를 정확히 알 수 없다.

 

 우리나라 최초로 대게를 이용한 궁중 음식은 해각(蟹脚)이다. 대게가 궁중음식에 처음 사용 된 것은 1795년 정조19년 윤2월9일 이다. 정조(正祖)는 재위기간(1777-1800) 중 아버지 사도세자(思悼世子.1735-1762)의 탄신일을 전후하여 1월말에서 2월초에 모두 12번 묘소를 찾았다.

 을묘년(乙卯年, 1795)의 원행(園行)은 사도세자와 그의 부인인 혜경궁 홍씨(惠慶宮洪氏)의 갑년(回甲)이 되는 해로, 정조는 어머님을 모시고 아버지 묘소에 전배(展拜)하고 어머님의 탄신 일주갑 기념을 축하하는 진찬례를 수원에서 베풀었다. 그때의 배경과 절차에 대하여 기록한 것이 원행을 묘정리이궤(園幸乙卯整理儀軌)이다. 1795년 윤 2월9일부터 16일까지 8일간 화성에 묵으면서 나날이 먹은 궁중음식 기록 중에 대게가 진상된 기록이 있다. 2월9일 혜궁 석수라상(夕水라床)에 대게(生蟹)구이(灸)가 진찬되고, 대전 군주(임금) 석수라상에 똑같은 대게구이가

 

13.올랐다. 이것이 우리나라 최초의 대게 궁중요리 기록이다.

 진상된 궁중음식의 종류는 생해(生蟹)구이, 해각(蟹脚)구이이다. 이것이 「원행을묘정리의궤」에 있다. 이밖에 1719-1902년의 「궁중연회식의궤」에도 독특한 궁중요리가 있다. 이것을 열구자탕 이라부른다. 육지에서 생산된 것과 바다와 하늘에서 난 것을 모두 사용하고 그 중에서 빵게(대게 암놈) 알이 사용되었다. 우리는 대게만 진상되었다고 알고 있지만 빵게도 진상되어 알을 이용한 궁중음식 기록을 보면 그 때 당시 빵게의 알이 궁중에서도 상당히 인기가 있었다는 것에 놀라지 않을 수없다. 이 열구자탕은 1827년부터1902년까지 즐겨왔고, 무려 42가지의 재료가 들어 갔다. 입을 즐겁게 한다고 열구자탕 이라고 하며 신선로를 사용한 것으로 사료된다. 이밖에도 해란전(蟹卵煎), 생해전(生蟹煎)도 이시대에 진상된 궁중요리들이다. 일반요리서에도 대게에 대한기록이 있다. 시의전서(19세기말 작자 미상)의 게탕, 게찜, 간납, 게포(해각포). 산림경제의(1643-1715) 조해법(槽蟹法), 염탕해법(鹽湯蟹法), 주해법(酒蟹法), 초장해법(醋醬蟹法)이 소개되고 있다.

 

14.대게와 만기요람

 왕실에 매달 6,640 마리의 대게가 진상 되었다. 1808년 순조 때 서영보와 심상규가 만든 총 11권의 만기요람은 일반신민(一般臣民)이 보는 책이 아니라, 통치자인 국왕이 보는 책으로 만들어 졌다. 만기요람 재용편에 대게(生蟹)가 진상된 숫자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것이 있다. 대전(大殿), 중궁전(中宮殿), 왕대비전(王大妃殿), 혜경궁(惠慶宮), 가순궁(嘉順宮)에 다달이 정한 예에 의하여 바치는 것이 있다. 이것을 월령이라 한다.

 

 6,640마리는 1년 간 진상된 숫자가 아니라 한달에 사용되는 숫자다. 생게(生蟹) 1마리의 값은 8푼이다. 쌀(1되에 2푼)로 환산하면 13,280되(升)가 된다. 한달에 쌀 85가마니를 먹어 치우는 어마어마 한 숫자다. 대게의 사용처와 숫자는 자세하게 나와 있지만 생산지는 어딘지 알수 없으나 교통이 불편한 지방의 대게와 교통이 편리한 지역의 쌀을 바꾸어서 진상 하지 않았을까? 하는 필자의 생각이다.

 진상등록에 보면 경기도 관찰사가 대게를 진상한 기록을 최근 확인 한 바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경상도 지방보다는 강원도 지방이 유리한 조건을 가지고 있다고 본다. 그리고 울진지역이 가장 유력시 된다고 본인은 믿어 의심치 않는다.

 

15.대게의 유교적 가치

 탄옹 선생의 제사때 대게 간남이 진설 되었다. 대전(大田)지역의 탄옹(炭翁)권시 종가와 은진송씨가(恩津宋氏)의 동춘당 송준길(宋俊吉1606-1672)가에 전승되는 전통 향토음식이 있다. 현재가 과거와 미래를 연결 해 주듯이 과거의 문화 또한 현재와 미래를 이어주는 중요한 고리역활을 한다.

 

 과거없는 현재는 없으며, 현재없는 미래는 없다. 사람이 그 조상의 뿌리를 찾고 뿌리를 찾으면 조상에게 제사를 올리는 행위는 우리나라의 전통적 유교문화의 계승 중의 하나이다. 향토음식도 예외는 아니다. 과거 꾸준히 먹어왔던 음식을 대를 이어 발전시키고 미래를 위해 발전계승 시키는 것은 음식문화에 역사성을 부여 해 주는 중요한 행위 이다. 어떤 특정지역의 역사성 있는 음식문화 그것을 향토음식이라고 단정 할 수는 없지만 중요한 한 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틀림이 없다. 이 향토문화가 단절된 사회는 기타 다른 문화도 단절된 사회라고 말 할 수 있다. 모든 문화 가운데 먹는 행위 즉 식욕을 수반하면서 어릴 때부터 특정한 입맛에 익숙해져 살아 온 인간의 음식문화는 보수성과 함께 전통성을 다른 어떤 문화보다도 농도 짙게 간직하고 있다. 그런 음식문화를 동춘당과 탄옹선생가에서 전해 오는 사례를 통하여 알 수 있다.

 

 탄옹 선생가의 묘사의절(墓祀儀節) 시제의 진설도에 간남(肝南)이라는 전통음식 용어가 있는데 지금까지 간남이 어떠한 형태의 음식인지 명확히 알려지지 않고 있다. 간남이란 한자어를 우리말로 읽는 과정에서 「간납」이라고도 하여 시의전서(是議全書)에는 제물(祭物)로서의 간납을 설명하고 있으나 정확한 조리법과 음식명이 기재되지 않았으므로 파악이 불가능하다고 한다. 탄옹선생가의 묘사절의 시제의 진설도에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좌간남이 어남(漁南)으로 게전(蟹煎)과 홍합전이 진설되고 있다. 그리고 궁중음식인 열구자탕이 동춘당 송준길 선생가의 요리서인 「주식시의(酒食是儀)」와 「우음저방(禹飮著方)」에 기록되어 있는 점과 안동김씨가의 김창집 선생가의 요리서인 「주식방문」에도 열구자탕이 소개되고 있음은 이 때부터 이미  궁중음식이 지방호족에게 알려지기 시작한 향토음식문화의 초기도입 단계로 보고 있다.  

 

16.정조대왕, 이덕무에게 대게 하사

 정조대왕이 이덕무(李德懋)1744-1793)에게 신축년(41살) 8월에 날게(生蟹) 8마리 임인년(42살)에 10마리 무신년(49살) 9월에 10마리를 하사했다. 정조의 스승으로서 아버지가 사도세자였기 때문에 이덕무와의 관계는 사제간의 정을 넘어서 아버지 없는 서러움을 극복하면서 왕으로 성장하는데 많은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 그리고 왕위 계승에 하자 없는 인물로 키운 공에 보답하여 정조 자신이 왕이 된 후에 각별히 모신 분이다. 대게는 기록상으로 보면 정조 임금때에 궁중음식으로 진상되었다는 기록외에는 별다른 기록이 없다. 이덕무가 받은 하사품이 날게(생게)로 기록된 점과 이것도 8~9월 여름이란 점을 고려하면 얼음을 이용한 장거리 수송이 시도 된 것으로 사료된다. 그리고 이 때에 대게가 대단히 인기가 있은 걸로 생각된다.

 

17.이산해와 울진대게

 울진의 박달게는  크기는 강아지만하고 다리가 큰 대나무만 하였다. 아계(鵝溪) 이산해(李山海)는 1592년 평해에 유배를 와서 「아계유고」에 천여편의 시를 남겼다. 그 중에 480여수가 기성록에 수록되어 있다. 아계의 기문중에 울진대게와 관련 된 것이 있다. 그는 「해빈단호기」란 기문에 사동에서 금음의 지경리까지 11개 마을 이름을 기록한 지명 중에 해진(蟹津)이라고 표기한 마을 이름이 있다. 이 마을이 지금의 거일 2리((일명 기(게)알))를 지칭하고 있다. 신라때 부터 형성된 이 마을은 오실산 형국이 기 (게)알 같이 생겼다고 해서 부르는 이름이다.

 

 이산해가 기록한 해진은 우리나라에서 바다의 해산물을 이름을 따서 기록 하였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두고자 한다. 우리나라의 지명 중에서 방어진(방魚津)이란 지명이 있다. 이곳은 방어가 많이 생산된다고 해서 붙어진 이름이다. 그러나 이 방어는 독이 많이 있어 진상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나 해진은 이산해가 게가 많이 생산되는 곳이라고 하여 해진이라 했다. 이 게(蟹)의 크기에 대하여 허균의 「도문대작」의 성소부부고 26권에 ꡒ크기가 강아지만하며 다리가 큰 대나무만 하다. 맛이 달고 포를 만들어 먹어도 좋다ꡓ고 했다. 이런 것을 보고 울진사람들은 「박달기」라고 하고 박달기가 아니면 잡질 않는다고 했다. 허균의 기록을 보면 울진의 박달기가 얼마나 큰지를 짐작을 할수 있다.

 

 이것 뿐만 아니다. 아계유고의 「전가잡영」이란 시(詩)에 자해란 시어(詩語)가 있다. ꡒ벼 베기 할 때에 자해(紫蟹)가 살찐다ꡓ고 쓰여 있다. 제주도에서는 가을에 말이 살찐다고 하지만, 울진에서는 ꡒ가을에 기가 살찐다ꡓ는 새로운 말이 생겼다는 것이다. 이 말은 뒤집어 생각해 보면 아계 자신이 게 맛을 은근히 바라고 살이 찐 게를 기다리고 있는 듯하다. 그리고 해포(蟹浦)란 시가 있다. 이 시는 거일리 오서산(烏栖山) 절벽아래서 동계거사와 밤을 지새우며 타락한 아계의 정신을 일깨워 주는 것을 시로 쓴 것이다. 이 시를 보면 거일리에서 밤을 지새운 것으로 되어 있으나, 우리가 정녕 아쉬운 것은 이 해진의 특산물인 박달게 맛에 대하여 언급이 없는 것이 못내 아쉬울 뿐이다.

 

글. 후포역사연구회 정돌만 회장,  자료제공 후포역사연구회 신진철 부회장 

[후포역사연구회 정돌만 회장, 자료제공 신진철 부회장 기자 uljin@uljin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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