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화(10회) 경징이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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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경궁 전경. 인조가 청나라에 항복의 예를 마치고 46일 만에 환궁했을 즈음, 도성 안에서 살아남은 이는 어린이와 노인들뿐이었다.
한양도성은 청군의 노략질로 종로와 광통교 일대에 있던 집은 모두 파괴되었고, 도성 안의 많은 마을이 약탈과 방화로 아수라장이 되어, 임진왜란 후에 시도하고 있던 도성 정비 또한 수포가 되고 말았다.
한편, 조선 조정에서는 청나라에 잡혀간 조선인 포로들을 돌려보내 줄 것을 계속 요청했다. 그러나 그때마다 청나라에서는 잡혀 온 포로는 청군 병사 개인의 재산이라고 일축하곤 했다. 그래서 만약 포로를 돌려받으려면 몸값을 내야 한다는 답만 보내왔다.
조선인들 가운데 간혹 가족을 찾아 선양으로 가서 어렵게 몸값을 내고 다시 돌아오는 예도 있었다. 그러나 천신만고 끝에 이들을 구출하여 고향으로 돌아왔다고 해도 기혼 여성의 경우, ‘환향녀(還鄕女)’라는 낙인이 찍혀 가문에서 받아들이는 것을 거부하는 일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났다. 결국 이는 병자호란 후의 사회적인 문제로 세상을 시끄럽게 만드는 원인의 하나가 되었다.
병자호란은 우리 역사에 씻을 수 없는 깊은 치욕과 상처를 남겼다. 죄 없는 수많은 백성이 죽임을 당한 것은 물론,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수많은 이가 청나라 군대에 포로로 잡혀 만주로 끌려갔다.
청나라 군사들에게 포로로 잡힌 조선의 백성은 그들에게는 ‘돈’이 되는 전리품이었다. 이들을 구하기 위해서는 ‘속가(贖價)’라고 하는 몸값을 내야 했다. 속가는 부르는 게 값이었다.
청나라 군사들은 이미 전쟁 전부터 조선의 사대부 가문은 물론 일반 백성들까지 가족에 대하여 저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끈끈한 유대관계로 맺어져 있음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전쟁 후에는 포로로 잡힌 가족을 구출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 노력하리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가는 곳마다 경쟁적으로 포로로 잡기 위해 왕가의 종실이나 양반가는 물론 일반 백성에 이르기까지 장정과 부녀자를 가리지 않고 앞다퉈 잡아가려 했다.
병자호란을 시대적 배경으로 만든 영화 ‘최종병기 활’(2011)에서도 당시 포로로 잡혀 끌려가는 백성들이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고초를 겪는 장면들이 많이 나온다.
만주로 끌려가는 멀고도 험한 길. 그렇게 걷고 또 걷다가 지쳐 쓰러져 숨이 끊어진 시신이 들판에 아무렇게 나뒹굴어도 누구 하나 수습해서 묻어주지 않았다. 물론 포로들도 그렇게 할 수 없었다. 다만 모든 걸 체념한 채 눈물로 그 비참한 장면을 견딜 수 있을 뿐이었다.
여러 사서(史書)와 개인이 남긴 문집(文集)에서는 ‘포개진 시신(屍身)들 사이로 젖먹이들이 죽은 어미의 젖을 찾아 기어다니며 울고 있다.’라는 등의 처참한 표현도 자주 나오는 이유이다. 모두 이 땅에서 그렇게 이름 없이 사라져간 덧없는 죽음들이었다.
영화에서 가장 가슴 아픈 장면은 그렇게 끌려가던 백성들이 평안도 의주(義州) 땅을 지나 압록강이 이르렀을 때, 이제는 다시 돌아올 수도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고향 산천을 돌아보고 엎드려 절하며 처절하게 울부짖는 모습이었다.
이들의 처참한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날도 압록강은 그렇게 무심하게 흐르고 있었다.
병자호란이 끝나고 2년이 지난 1639년, 인조는 전국에 민정을 살필 목적으로 암행어사를 파견했다. 전란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이지만, 조정에서는 흉흉한 민심을 가라앉힐 대책을 마련해야만 했다.
암행어사(暗行御史)는 조선시대만 존재했던 전근대 비밀 감찰원(監察員)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관직은 공식적인 행정체계로는 잡아낼 수 없는 부정부패를 탐지하고 그 지방의 문제를 확인하여 왕에게 직접 보고하도록 하는 역할을 하는 관료였다.
이들이 필요했던 이유는 고려의 어사대(御史臺)나 조선의 사헌부(司憲府)가 거리상의 문제로 지방 관료들을 감찰하는데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암행어사는 법률상 존재하지 않는 관직이었다. 『경국대전(經國大典)』을 포함하여 조선시대에 편찬된 어떤 법전에도 암행어사에 대해 공식적으로 정의하고 규정한 법령은 없다.
이들은 과거 시험에 합격하고 왕에게 직함을 받았기에 관리였지만, 법률상으로는 존재하지 않는 관리였으므로 그들의 신분은 법률상으로만 보면 대단히 애매한 존재였다. 즉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자면, 국가원수의 직속이면서도 비정규직인 공무원인 셈이었다.
이들은 공개적으로 활동하지 않고 비밀리에 움직였기 때문에 관복을 입지 않았다. 그리고 부패한 현장이나 관리를 적발해도 직접적으로 공권력을 동원하지도 않았다.
일반적으로 파견하는 어사는 특정 지방에 변고가 있을 때 왕이 직접 당사자를 불러 은밀하게 임무를 주고 명령을 내린다. 그러므로 암행어사는 모두 비밀에 부쳐져서 은밀하게 시찰하기 때문에 집안의 가족들도 모르는 일이었다.
당연히 ‘암행어사’는 아무나 뽑히는 게 아니었다. 대체로 실무 경험은 있으나 아직 이름이 널려지지 않고 인맥이 넓지 않으며 비리의 우려가 없는 젊은 시종신(侍從臣) 중에서 선발했다. 즉, 학식이 높고 일머리가 좋아서 1차 진급한 소장파 중간관리자들이 그 대상이었다.
이것도 꼭 법적으로 정해진 건 아니라서 나이가 꽤 있는 신하들이 가기도 하고 상황마다 각각 다르게 적용되었다. 대체로 평균 30대~40대 초반 나이에 이른 자들이 왕명을 받아 암행어사로 나갔다. 암행어사가 본격적으로 파견이 잦아지는 것은 인조 시기부터다.
1897년 청나라 사신들의 숙소로 사용되던 남별궁이 부서지고 그 자리(현재의 조선호텔)에 원구단이 세워졌다. 환궁우는 원구단의 부속건물로 태조의 신위가 봉안된 곳이다.
이때 평안도에도 암행어사를 파견했는데 이시매(李時楳)라는 인물이었다. 당시 그의 나이 36세였다. 그는 조선 2대 왕이었던 정종(定宗)의 4 왕자인 선성군(宣城君) 이무생(李茂生)의 5세손으로 종실 신분이었다.
당시 전국적으로 저잣거리에서는 조정에서 파견한 암행어사가 민정을 살피러 각 지방으로 내려오고 있다는 소문이 돌고 있었다. 그가 평양을 지나 의주부(義州府)로 들어섰을 때의 일이다.
병자호란 직전에 의주부윤(義州府尹)이었던 인물은 임경업(林慶業)이었다. 당시 의주성(義州城)은 병력과 보급, 성벽 보수 등 방어 준비가 거의 안 된 상태였다.
그는 의주부윤으로 부임하자마자 의주성(義州城)을 대대적으로 수축하고 봉수(烽燧) 체계를 점검하며 군사력을 확충했다. 그리고 압록강 변의 주요 군사시설인 백마산성(白馬山城)을 대대적으로 수축하여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고 있었다.
청 태종은 조선 침략을 염두에 두고 여러 경로를 통해 조선의 국경 상황을 탐지하면서 임경업의 활동상을 파악하고 있었다. 그는 청군이 압록강을 건널 때 백마산성의 임경업을 묶어두는 전략을 실행에 옮겼고, 결국 임경업의 방어 전략을 무력화시키는 데에 성공하였다.
1635년에 임경업의 후임으로 나덕헌(羅德憲)이라는 인물이 의주부윤에 임명되었다. 그가 언제까지 의주부윤으로 재직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그는 이시매가 암행어사로 파견되었던 1636년에는 선양에 파견된 사신단의 일원으로서 선양으로 들어간 것으로 확인된다. 그러므로 이시매가 의주부로 암행어사로 파견되었던 1639년 당시 의주부윤이 누구인지는 기록이 없어 확인할 수는 없다.
이시매는 의주부에서 관청에서 준비한 자료 외에도 민심을 파악하기 위해 저잣거리를 돌곤 했다.
저잣거리에서 본 백성들의 생활상은 참담했다. 전쟁이 끝난 지 2년이 흘렀지만, 전쟁 당시에 입은 피해가 복구되지 않았으므로 백성들의 삶은 나아질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더구나 갈수록 정착하는 사람들보다 고향을 등지고 유랑하는 사람들이 더 늘어나고 있었다. 백성들로서는 생계조차 불투명한 데다가 나라에 내야 할 무거운 세금을 감당하지 못하는 것이 주요 이유였다.
묘향산을 비롯한 산간지방에는 살기 위해 모여드는 사람들이 산채(山寨)를 만들어 자립하는가 하면, 심지어는 당초의 목적과는 달리 이곳이 산적의 소굴로 변해가는 곳이 늘어나기까지 했다.
어느날 오후의 일이었다.
그날도 그는 저잣거리를 돌며 백성들의 상황을 살피고 의주부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한 어린 소녀가 그가 돌아오는 길에 갑자기 소리치며 뛰어들었다. 그가 탄 말이 놀라 앞발을 드는 바람에 그는 하마터면 말 위에서 떨어질 뻔했다.
하인들이 얼른 달려가 몽둥이를 들어 위협하며 소녀를 길가로 끌어냈다. 소녀는 장정들에게 질질 끌려가면서도 계속 말 위에 타고 있는 이시매에게 손을 내밀어 구해달라며 뭔가 알아들을 수 없는 고함을 질렀다.
사실 어느 지역을 가든 암행하다 보면, 자신의 신분도 이미 드러나 있어서 가끔 길 한가운데에서 행차를 막고 억울함을 호소하는 백성들이 있었다. 그래서 이시매도 이런 일이 흔하게 일어나므로 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면서 말에서 내렸다.
“거. 참 시끄럽구나. 좀 살살 다루거라. 아직 어리지 않느냐. 뭐 좀 먹을 걸 줘서 보내거라.”
그는 어린 소녀가 먹을 것을 구하는 행동일 것으로 생각하고 아래 사람들에게 지시했다.
그때 나이 든 사람이 헐레벌떡 달려와 앞으로 나서며 허리를 굽혔다. 그는 호위 장정들에게 질질 끌려가는 어린 소녀를 막아서며 장정들과 이시매를 향해 연신 허리를 숙이고 두 손을 모아 빌며 용서를 빌었다.
“아이고. 아닙니다. 이 어린 것이 아무것도 모르고 한양에서 선비가 왔다고 하면 아무나 붙잡고 이럽니다. 철이 없어서 그런 것이니 부디 용서하십시오.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단속하겠습니다. 용서하십시오. 용서…”
주위가 시끄러워지자, 순식간에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이시매는 얼른 이 상황을 정리하고 빠져나가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그가 장정들을 제지하며 앞으로 나섰다.
“너는 누구고, 이 아이는 또 누구냐?”
“예. 저는 이곳 장마당에서 점포를 운영하며 먹고사는 사람이고, 이 아이는 제 집에서 일하는 노비이옵니다.”
“노비라…. 알겠다. 앞으로는 이런 일이 없도록 잘 단속하거라.”“아… 예예. 잘 알겠습니다요. 앞으로 다시는…”
나이 든 중년인은 두 손 모아 고맙다고 인사를 하고 얼른 어린 소녀에게 다가가 그녀를 잡아 일으켜 세우려고 했다.
순간, 이시매가 중년인을 제지하며 소녀에게 다가갔다. 그는 순간 뭔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느낌을 받았다. 소녀는 눈물이 가득 고인 눈으로 이시매를 애처롭게 올려보았다. 그는 장정들에게 말했다.
“여봐라. 이 어린 소녀에게 먹을 것을 좀 나눠주거라.”
수행하던 자들이 일제히 가지고 있던 보따리를 풀었다. 그러자 주변에서 지켜보던 백성들이 먹을 것을 달라고 우르르 몰려들었다.
“아닙니다. 나으리. 소녀는… 소녀는… 먹을 것을 달라는 게 아닙니다. 제 말을 좀 들어달라는 겁니다. 제발 제 말씀을 한번 들어주소서, 육은재 나으리.”
이시매가 몸을 돌려 현장을 벗어나려는데 어린 소녀가 울부짖으며 소리치는 말에 순간 흠칫 놀라 걸음을 멈추었다.
마패(馬牌). 마패에 새겨진 말의 수에 따라 역에서 빌려 탈 수 있는 말의 수가 달라진다.
10마리는 왕의 전용, 영의정은 7마리, 암행어사는 2~5마리로 암행어사가 출도할 때 증표로 사용했다.
그는 몸을 돌려 놀란 눈으로 소녀를 바라보았다. 중년인은 손으로 그녀의 입을 틀어막고 있었다. 그는 얼른 소녀에게 다가갔다. 그러자 놀란 중년인이 그녀를 잡고 있던 손을 한걸음 뒤로 물러섰다.
“너… 너… 방금 뭐라 불렀느냐? 네가 나를 아느냐?”
“예. 나으리. 육은재(六隱齋) 대감 나으리.”
이시매가 다시 다가와 자세를 낮추었다. 어린 소녀는 중년인에게 잡혔던 손을 뿌리치고 그 앞에 무릎을 꿇고 다소곳한 자세로 두 손을 모았다. 한눈에 봐도 제법 법도를 익힌 몸에 밴 몸짓임을 알 수 있었다.
“방금 네가… 나를 일러 육은재 대감이라 불렀느냐?”
“예. 나으리.”
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나지막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잡혔던 손목이 아팠던지 손목을 여러 번 쓰다듬었다.
“나를 어찌 아느냐? 어디서 들었느냐? 너는 누구냐?”
이시매는 너무 놀라 그녀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소녀가 입은 옷은 많이 해져 군데군데 기운 곳이 많았다. 소녀의 얼굴이 창백했지만 어딘지 기품이 있어 보였다. 자세히 뜯어보니 어딘가 낯이 익은듯했다.
어린 소녀가 고개를 들어 그를 한번 쳐다보고는 다시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소녀의 아비는 미촌(美村) 윤(尹) 선(宣)자, 거(擧)자 이옵니다. 조부는 팔송(八松) 윤(尹) 황(煌)자 이옵니다.”
“뭐라? 네가 그러면 노서(魯西)의 여식이더냐? 오오… 이런.”
노서는 윤선거의 또 다른 호(號)였다. 그녀는 말을 하면서 저고리를 들어 올려 허리에 차고 있던 띠를 풀었다. 그리고 바닥에 놓고 띠를 풀자, 둘둘 말아놓은 한지로 만든 작은 책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어린 소녀는 조심스럽게 책자를 두 손으로 들어 머리 위로 올려 이시매에게 공손하게 올렸다.
“여기에 제 신분을 확인할 수 있는 우리 윤씨(尹氏) 가문의 보첩(譜牒)이 있사옵니다.”
동헌에서 재판을 주관하는 고을 수령
이시매(李時楳, 1603~1667)의 자는 자화(子和), 호는 육은재(六隱齋)다. 그의 아버지 이춘영(李春英)은 당대의 문인으로 이름이 높았던 송강 정철과 사제관계였다. 그는 시(詩)에 대한 높은 비평적 안목과 뛰어난 작가적 역량을 가진 시인으로 호평받는 문인이었다.
이춘영은 학문적으로 당대의 석학이었던 우계(牛溪) 성혼(成渾)의 애제자였는데, 성혼의 외손자가 바로 이 어린 소녀가 자기 부친이라고 주장하는 윤선거였다.
논산 명재고택 전경
사실 그는 평소 윤증(尹拯)의 부친 윤선거(尹宣擧, 1610~1669)와 친분이 두터운 사이로, 병자호란이 터지기 전까지는 자주 그의 집을 찾아 교분을 쌓아오고 있었다.
병자호란이 끝나도 다시 조정으로 돌아온 그는 윤선거의 집을 여러 번 드나들며 안부를 확인하곤 했었다. 그 과정에서 윤선거로부터 그의 부인이 목을 매 자결하고 하나뿐인 여식도 청군에게 포로로 끌려가 생사를 알 수 없다는 이야기를 들어서 그 가슴 아픈 집안 사정을 잘 알고 있었다.
전쟁이 일어나기 전, 소녀와 어린 윤증은 이시매가 부친을 만나기 위해 자기 집을 드나들 때마다 부친 곁에서 그에게 인사를 드렸기 때문에 그의 이름과 호, 알굴을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이시매는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면서 그녀가 공손하게 두 손으로 받쳐 올리는 보첩을 받아 들었다.
손바닥 두 개를 포개놓은 듯한 크기의 보첩을 받아 첫 장을 펼쳐본 그는 너무 놀랐다. 내용은 차치하고 윤선거의 필체가 틀림없었다. 그는 벅찬 가슴을 진정할 수 없어서 보첩을 다시 덮고 소녀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
“고개를 들어보거라.”
그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하자 소녀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벌써 저잣거리 장마당 골목에는 사람들이 빽빽하게 들어차 있었다. 모여든 사람들은 모두 숨을 죽이고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녀는 손가락으로 소녀의 턱을 받쳐 들고 이리저리 자세하게 뜯어 보았다. 그러고 보니 어린 소녀의 눈매가 그의 부친과 많이 닮았다고 느꼈다. 그는 하늘을 향해 눈을 감았다.
“오오… 이런 일이 있다니. 세상에 이런 일이 다 있다니…. 네가 실로 그때 미촌이 강화도에서 잃어버렸다던 그 여식이로구나!”
그는 하늘을 우러러 장탄식했다. 지켜보던 사람들 사이에 탄성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주변은 금방 웅성거리면서 분주해졌다.
그는 갑자기 어수선한 주위를 둘러보고 정신을 차렸다. 주변에는 너무 많은 사람이 몰려들어 이 기막힌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군중 숲에서는 탄식과 함께 박수 소리도 터져 나오는 등 왁자지껄하여 상대방이 말하는 소리도 잘 안 들릴 지경이었다.
“안 되겠다. 자리를 옮겨야겠다. 여봐라. 이 소녀를 말에 태우거라. 부중(府中)으로 들어간다. 길을 열어라.”
호위 장정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이시매는 어린 소녀를 안심시키고 말에 태웠다. 어사 대열은 다시 위용을 갖추고 얼마 떨어지지 않은 거리에 있는 의주부로 향했다.
의주부로 돌아온 이시매는 어린 소녀를 데리고 대청으로 들어와 앉히고 마실 것을 내 오도록 했다. 그는 우선 그녀의 신분이 정확한 지 그 여부를 파악하는 것이 가장 시급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당시는 전쟁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기라서 자기 신분을 명문가의 식솔이라고 사칭하는 일도 많았다. 그러므로 그런 의심스러운 일에 대해 사실 여부를 확인하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절차이기도 했다.
그는 소녀가 준 보첩을 다시 조심스럽게 펼쳤다. 어린 소녀는 잔뜩 긴장한 채 그를 바라보았다.
“글을 아느냐?”
윤선거의 여식이라면 마땅히 글을 알아야 할 것이다. 그녀는 그를 똑바로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소녀. 부친께 글을 조금 익혔사옵니다.”
“그러냐? 그러면 선대(先代)부터 네 가문에 대해 아는 대로 설명해 보거라. 고조부 함자는 어찌 되느냐?”
조선시대 양반 가문에서는 어릴 때부터 보학(譜學)에 대한 교육을 매우 중시하고 있었다. 그래서 자기의 계보를 남에게 자랑하는 것이 일상화되기까지 했고 그런 행위는 흉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양반가의 자녀들은 족보를 외우는 것을 통과의례로 여기고 있었다. 오늘날 성장하면서 족보를 본 적이 없는 사람이 더 많아진 탓에 우리로서는 가문과 계보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만드는 일이기도 하다.
그는 보첩에 적힌 내용에 대해 그녀가 대답하는 내용을 들으면서 하나하나 확인해 가며 묻고 또 물었다. 그녀는 조금도 막힘이 없었다. 자신의 계보를 훤히 꿰고 있었고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해서도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이 강화도에 피난 생활하던 일과 강화부성이 함락되던 날 어머니가 목을 매고 자결하던 일을 바로 조금 전에 일어난 일처럼 자세하게 설명해 주었다.
그리고 두 살 어린 동생이 헤어질 때 혹시라도 나중에 자신의 신분을 확인해 줄 수 있는 유일한 증표라면서 자기가 허리에 두르고 있던 보첩을 풀어 누이인 자신에게 준 일도 말했다.
그녀는 중간중간에 목이 메여 말을 잇지 못하고 흐느꼈다.
“네 나이 올해 몇이더냐?”
“소녀의 나이, 올해 열두 살 이옵니다.”
이시매는 그녀의 밀을 들으면서 자기의 눈과 귀를 의심했다. 열두 살에 불과한 어린 소녀가 이토록 총명하다니, 그는 너무 기뻐 흥분을 감출 수 없었다.
어린 소녀는 성균관 유생 윤선거의 딸이 틀림없었다. 조부는 바로 1년 전에 돌아가신 사간원 대사간 윤황이었다.
그녀는 조부가 돌아가신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있다가 이시매로부터 조부께서 지난해에 돌아가셨다는 말을 듣고는 마치 졸도라도 하듯이 모로 쓰러졌다. 깜짝 놀란 시녀가 황급히 달려와 그녀를 끌어안았다.
잠시 후, 정신을 가다듬은 소녀는 한없이 흐느꼈다. 어린 시절 얼마나 자신을 이뻐하셨던 분이던가. 아침저녁으로 할아버지 무릎에 앉아 재롱을 부리며 놀던 일을 떠올리며 그녀는 울고 또 울었다.
사실 그녀는 강화도에서 동생 윤증과 헤어져 청군에 끌려 이곳 의주까지 왔었다. 청군은 의주부에서 대열을 재정비한 다음, 포로들을 끌고 곧바로 압록강을 건넜다.
그녀는 압록강을 건너기 직전에 청군이 의주부의 저잣거리에서 포로 일부를 팔 때, 그녀를 사겠다는 상인에게 팔렸다.
나이가 10살밖에 되지 않아 너무 어려서 노동력 면에서는 아직 값을 제대로 매기기에 어려웠으므로 청군으로서도 굳이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그 후에도 그녀는 몇 번에 걸쳐 이리저리 팔리면서 주인이 여러 번 바뀌었다.
그녀는 어린 나이임에도 양반가의 여식으로서 언젠가는 반드시 신분을 되찾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선비나 유생들을 만날 때마다 보첩을 꺼내 보이며 하소연했다.
특히 장이 서는 날이면 하루도 빠지지 않고 장마당에 나가 선비 행세를 하는 사람이나, 간혹 ‘한양’이라는 말을 입에 올리는 사람이 있으면 사람을 가리지 않고 붙잡고 매달리듯 하면서 사정을 호소하곤 했었다.
그러나 아무도 어린 소녀의 말을 믿어주지 않았고, 시간이 흐르면서 전쟁통에 머리가 좀 이상해진 아이라는 취급을 받고 있었다.
그러다가 2년이 지난 후인 1639년, 왕명을 받은 이시매가 어사(御史)로 의주에 파견되어 부임하면서 비로소 행운이 따라준 것이다.
저잣거리에서 암행어사로 온 분이 아버지의 친구인 이시매라는 것을 알고 그녀는 그를 만나기 위해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저잣거리에서 이시매에게 품에 고이 간직했던 보첩을 보여줄 기회를 얻은 것이다.
허리에 차고 있던 수건을 풀어서 족보를 기록한 소첩(小帖)을 꺼내 주며 “누이는 여자이니, 불행하게 서로 헤어지게 되면 이것으로 징표를 삼으시오.”라며 신신당부했던 8살 어린 나이였던 동생 윤증의 행동이, 결국 이런 행운을 가져온 것이니 이 어찌 감탄할 일이 아니겠는가.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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