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이 있는 산문 63] 선열들의 항일투쟁, 그 길을 걷다 (6)

기사입력 2026.06.16 1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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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얼빈역 이도백하행 열차


이제 신흥무관학교로 가는 여정도 중반에 접어들고 있다. 제2일(10월 26일)은 하얼빈역에서 고속열차로 오후 3시 37분 출발, 4시간 걸리는 열차 여행으로 이도백하에 오후 7시 40분쯤 도착한다. 숙박은 이도왕조온천 호텔이다. 

제3일(10월 27일, 월) 백두산 천지 등정 → 통화 이동(버스 4시간)→ 통화시의 라툰모건호텔에서 숙박한다. 이도백하는 백두산을 오르는 여행객이 대부분 거쳐 가는 작은 산골 도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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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속열차 차창으로 본 만주벌판의 해질무렵, 오른쪽 위로 들판에 마을이 보인다.

 

‘만주벌판의 저녁 노을’

하얼빈역을 출발한 고속열차는 네 시간을 달려 이도백하로 향했다. 차창 밖으로 펼쳐진 만주벌판은 끝이 보이지 않는 대평원, 서쪽 하늘이 내려앉는 황혼의 들녘이었다. 가을걷이가 거의 끝난 들에는 마른 콩밭과 옥수수밭이 바람에 스치며 엷은 먼지를 일으키고, 드문드문 보이는 마을의 지붕들이 노을빛 속에 잠겨 있었다.


농촌에서 자란 나에게 그 풍경은 낯설지 않았다. 농사를 짓자면 저 지평선 끝까지 걸어가다가 하루해가 다 저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불과 반세기 전, 농기구도 기술도 변변치 않던 시절, 이 드넓은 벌판에서 농민들은 얼마나 많은 땀을 흘렸을까.

오늘날, 이 대평원은 중국의 곡창지대가 되었다. 여기에서 생산되는 농산물인 콩과 옥수수는 중국 곡물량의 약 5∼60%를 차지한단다. 

 

우리를 싣고 달리는 고속열차는 그 비옥한 들판을 가르며 달리고, 나는 석양에 물든 평원을 바라보며 이곳의 지난 세월과 인간 땀방울이 빚어낸 풍요를 생각했다. 황혼빛 평야는 고요했지만, 그 속에는 수많은 생명과 세월의 숨결이 깊이 깃들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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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당 들머리 풍경과 이도백하에서 훈민정음서문 일부 간판이 달린 식당에서 저녁을 먹다

 

 

백두산 천지! 기상 악화로 출입 통제

옛 만주의 깊은 산맥을 따라 백두산으로 향하다 보면, 길 끝에서 문득 한 산간 도시를 만나게 된다. 이도백하(二道白河). 오늘날 중국 지린성 연변조선족자치주 안투현에 속한 작은 마을이지만, 사람들은 이곳을 흔히 ‘백두산으로 들어가는 마지막 관문’이라 부른다. 백두산 북파로 오르는 길목에 자리한 까닭에, 천지를 향하는 여행객들은 대부분 이곳에서 하루쯤 숨을 고른다.


도시 곁으로는 백두산에서 흘러내린 물줄기가 송화강 상류를 이루며 굽이쳐 흐른다. 이도백하라는 이름 또한 두 갈래 백하의 물줄기가 만나는 데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강물은 흰 안개를 품은 채 숲 사이를 흐르고, 사방에는 침엽수와 자작나무 숲이 끝없이 이어진다. 겨울이면 눈 덮인 산골 마을로 잠기고, 여름이면 안개 어린 계곡과 숲길이 신비로운 풍경을 빚어낸다.

 

우리도 그날 이도백하의 한 호텔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밤공기는 서늘했고, 거리에는 백두산을 오르려는 여행객들의 발걸음이 조용히 오갔다. 작은 도시였지만 어딘가 오래된 국경의 기억과 만주의 시간이 스며 있는 듯했다. 그래서인지 이도백하는 단순한 관광지라기보다, 백두산을 품은 마지막 마을, 그리고 천지로 가기 전 잠시 숨을 고르게 하는 깊은 산중의 쉼터처럼 느껴졌다.

 

이튿날 아침, 호텔 식당에서 뷔페를 먹고, 짐을 챙겨 나오자, 뜻밖의 소식이 전해졌다. 기상악화로 끝내 백두산 등정은 출입 통제란다. 주최 측의 백두산 출입 통제와 일정 변경 소식에 답사단 한 분이 허탈한 웃음 끝에 말했다.


“독도에 들어가려면 3대가 덕을 쌓아야 한다더니, 백두산도 그런가 봅니다. 아무에게나 제 모습을 허락하지 않는군요.”

내리는 눈과 거센 바람 등 좋지 않은 날씨로 천지를 눈앞에 두고서 발길을 돌려야 했다. 그 아쉬움은 다음에 또 올 수 있을까. 기약 없는 물음만 가슴에 남긴 채, 끝내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백두산은 오래도록 미련처럼 마음에 남았다.


그날 우리는 주최 측에서 긴급 마련한 오전 프로그램으로 수상 보트 타기와 백두산 홍보 영상관람 일정으로 발길을 돌렸다. 수상 보트 타기는 인근 산골 냇가를 이용하여 늦가을 풍광을 즐기는 프로그램이었다. 별로 풍광이라 할 수 없는 곳이지만 시간 죽이기 활용인 것이다. 

 

보트 하나에 두 사람씩 타고서 수심 50~60cm 남짓한 얕은 물길을 따라 외짝 노 하나로 조심스레 저어 내려갔다. 노를 젓지 않아도 물살에 몸이 실려 내려갔고, 바위와 울창한 나무숲 사이를 스치는 맑은 냇물의 소리가 귀를 간지럽혔다. 초겨울 같은 산골 찬바람 속에서 약 30분간 이어진 물길은 짧았지만, 그래도 숲속에서 가을 풍광 즐긴 셈이다.

 

보트 타기가 끝나고 버스로 이동해 우리는 백두산 천지 일대를 보여주는 관광 홍보 시뮬레이션 영상관으로 향했다. 중국에서 백두산을 ‘장백산(長白山)’이라 한단다. 

우리는 특수 색안경을 끼고 움직이는 의자에 앉았다. 그러곤 두 손을 앞쪽 지지대를 잡았다. 드디어 불이 꺼지며 의자가 움직이며 앞으로 나아갔다. 고화질 4D 시뮬레이션 영상이었다. 곧바로 우리를 곧바로 백두산의 그 장엄한 풍광 속으로 빨아들였다. 


깊고 깊은 골짜기의 아름다운 숲과 계곡을 지나, 마침내 백두산 천지의 장관이 눈앞에 펼쳐졌다. 의자가 진동하고, 차가운 바람이 얼굴을 스치며, 마치 우리가 백두산 천지 위를 아득히 날아오르는 듯한 아찔한 기분을 선사했다! 


약 25분간의 시뮬레이션 체험이 끝났을 때, 우리는 스크린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백두산 이제 다 보았네!” 

“정말 짜릿하고 실감 나는 경험이었다”

실제로 백두산을 등정 경험을 가진 분도 말씀하시며 영상이 대단하다 했다. 글쎄다, 아무래도 백문이불여일견(百聞而不如一見)이라고 아무래도 내 발로 백두산 천지를 올라 장엄한 그 광경을 보아야 하지 않을까 하노라!

영상을 보고 난 뒤에도 마음 한구석이 개운하지 않았다. 중국은 이 영상물을 통해 백두산을 자신들이 주장하는 이름인 장백산(長白山)이라 강조, 이곳을 찾은 여행객들에게 백두산이 예로부터 중국 영토였다는 인식을 자연스럽게 심어 주려는 듯하다. 더 나아가 이런 시각에서 고구려가 지배했던 광활한 영토와 역사를 이른바 ‘동북공정’이라는 틀 안에 묶어 두고, 고구려 역시 중국 역사 일부라는 사실을 강조하려는 숨은 의도가 엿보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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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산에 오른 시물레이션 주인공(좌), 백두산 간접체험 3d시뮬레이션 광경(우)


북방의 칼과 꺾인 별!

나는 『백두산』이라고 하면 역사에서 배운 조선조 남이장군이 남긴 북정시)가 생각난다.


白頭山石磨刀盡

豆滿江水飮馬無

男兒二十未平國

後世誰稱大丈夫


『백두산 돌은 칼을 갈아 닳아 없애고/ 두만강 물은 말을 먹여 다 마르게 하리라./ 사내가 스무 살이 되도록 나라를 평정하지 못한다면/ 후세 누가 대장부라 하겠는가.』


이 시에는 북방 변경을 지키려는 젊은 무장의 기개와 나라를 위한 결의가 담겨 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이 장대한 기상은 뒷날 그의 삶을 무너뜨리는 비극의 빌미가 되었다.

남이는 조선 왕실과 가까운 인척이었다. 그의 할머니인 정선공주는 태종의 딸이자 세종의 누이였다. 그 누이의 아들이 남빈이고, 남빈의 아들이 남이였다. 세종에게 남이는 외손자뻘이었다. 이러한 왕실 혈연관계에서 남이는 어려서부터 주목받았고, 뛰어난 무예와 지략까지 갖추어 젊은 나이에 두각을 나타냈다. 특히 세조 때 이시애 난을 평정하며 큰 공을 세웠고, 스물일곱 나이에 오늘날 국방부 장관격인 병조판서에까지 올랐다. 당시에도 아주 벼락같은 출세였다.


하지만 지나치게 빠른 출세와 성공은 곧 조정 대신들의 시기와 경계심을 불러왔다. 특히 유자광은 남이 명성과 군권을 두려워하며 끊임없이 그를 모함하였다. 

유자광은 북정시에 담긴 『미평국(未平國)』이라는 표현을 문제 삼아, 이를 『나라를 아직 얻지 못했다』는 뜻으로 왜곡해 남이를 역모 혐의로 몰아갔다. 

 

 

여기에 한명회·노사신 등 훈구대신들의 정치적 견제 또한 겹치면서 남이는 충분한 변론 기회조차 얻지 못한 채 스물여덟 젊은 나이로 처형되었다. 예종 즉위년(1468년)이었다.

북방을 지키던 한 젊은 장수의 충정은 권력 다툼 속에서 그의 시는 나라를 위한 결의가 아니라 역모로 둔갑하였다. 이 유자광의 남이 역모 밀고 사건은 조선 정치사에서 대표 권력형 모함 사건 가운데 하나로 남아 있다.


이러한 역사 현상은 오늘날에도 낯설지 않다. 현대 정치사에서도 권력과 이해관계에 따라 사건이 왜곡되거나, 여론 조작과 허위 정보가 난무하며, 정치 목적을 위해 특정 인물을 표적으로 삼는 일들이 되풀이해 왔다. 해방 뒤에도 여러 정치 조작 사건과 권력기관의 무리한 수사, 일부 언론의 왜곡 보도 역시 본질로는 유자광과 일부 세력이 남이를 제거하기 위해 북정시 내용을 뒤틀어 이용했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요즈음 국회에서 벌어지는 일부 정치검사의 거짓 증언과 사건조작으로 한때 권세를 얻을 수 있을지 몰라도 국민의 역사 인식과 상식 앞에서는 끝내 그 진실여부가 드러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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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산정계비<출처: 나무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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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산정계비를 둘러싼 청국과 조선의 논란 위치


두산정계비와 국경선

필자는 여기서 백두산정계비에 대하여 간략히 언급하고자 한다. 백두산정계비란 조선 후기 조선과 청나라가 백두산 일대 국경을 정하기 위해 세운 경계비이다. 이는 단순한 비석 하나의 문제가 아니라, 조선과 청나라 사이의 국경을 둘러싼 영토 인식에 대한 중요한 사료이기 때문이다.

 

백두산과 그 일대는 오랫동안 우리 역사와 생활, 그리고 기억 속에 자리해 온 공간이었다. 더욱이 정계비에 새겨진 강 이름과 경계 해석을 둘러싼 논란은 이후 간도 문제와도 이어져, 동북아 역사 인식에 적지 않은 영향을 남겼다. 따라서 백두산정계비를 살펴본다는 것은 우리 역사 속 영토 의식과 외교적 대응, 그리고 역사 기록 의미를 함께 되새기는 일이라 할 수 있다.


병자호란 이후 압록강·두만강 주변의 경계가 분명하지 않아 인삼 채취, 사냥, 이주 과정에서 양국 주민의 충돌이 잦아졌다. 청나라는 만주를 발상지로 여겨 봉금 지역으로 삼았으나, 국경이 모호해 조-청 양국 간의 분쟁이 계속되었다. 

 

양국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위해 1712년(숙종 38년) 청나라의 목극등과 조선 관리들이 백두산을 공동 조사한 뒤 천지 남쪽 장군봉 부근에 정계비를 세웠다. 그런데 문제는 백두산정계비에 새겨진 『서위압록 동위토문(西爲鴨綠 東爲土門)』이라는 글귀 해석이었다. 여기에서 청나라는 토문강을 오늘날의 두만강이라고 해석(토문강=두만강)하여 두만강 이북의 간도 지역 모두를 청의 영토라고 주장하였다.


반면 조선은 토문강과 두만강은 서로 다른 강이라고 보았다. 조선 측은 정계비에 기록된 토문강이 두만강 본류가 아니라 백두산에서 발원하여 송화강 수계로 이어지는 별개의 물줄기라고 해석하였다. 

 

특히 조선 후기와 대한제국 시기 관리들과 학자들은 토문강을 송화강 상류의 지류로 보아, 그 남쪽의 간도 지역은 역사적으로 조선인의 생활 터전이며 조선의 영토라고 주장하였다.

이 같은 해석 차이는 단순한 지명 논쟁을 넘어 국경 문제로 이어졌다. 19세기 후반 함경도 농민들을 중심으로 조선인들이 간도 지역에 대거 이주하면서 영유권 갈등은 더욱 커졌고, 이후 조선과 청나라 사이의 중요한 외교 현안으로 발전하였다.


1909년 이 국경 문제를 역이용한 간악한 일제는 간도협약에서 청나라의 간도 영유권을 인정하는 대신 만주 철도 이권을 얻었다. 하지만 대한제국은 일제의 보호국 상태여서 협상에 참여하지 못하였다. 일제와 청국이 조선을 제쳐두고 그들의 이권을 챙긴 것이다. 결국, 간도는 중국 영토로 편입되었다. 

그러나 국내에서 항일 무장투쟁이 소강상태가 되자 오히려 백두산 일대와 만주는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대첩 같은 독립군 활동의 근거지가 되었다.


광복 이후에는 북한과 중국이 1962년 조중변계조약을 체결하여 오늘날 국경선을 확정하였다. 현재 백두산 천지는 북한과 중국이 나누어 관할하고 있다고 한다. 백두산정계비와 간도 문제는 국경 분쟁을 넘어, 조선의 국력 약화와 일본 제국주의 침략 속에서 주권을 상실해 간 근대사 현실을 보여 주는 역사 사례로 평가되고 있다. 

 

오늘날, 백두산 천지에 그어진 국경 문제에서 한국은 협정 당사자와 실효 지배국이 아니다. 중국은 1712년 정계비와 1909년 간도협약을 근거로 현 국경이 정당하다고 주장하고 있다고 한다. 역사적으로 볼 때 한 시대의 국력 약화가 국경 문제를 갈랐던 것이다. 그렇게 넘어간 광활한 고토(古土)는 언제 회복할 것인가? 하지만 현재 국경을 되돌릴 현실 가능성은 아주 낮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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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현석 장편소설 범도/문학동네


홍범도 장군 논란 

나는 최근 방현석 작가가 쓴 소설 『범도』를 읽었다. 항일독립무장투쟁가 홍범도 장군 일대기로 이 소설에는 백두산과 만주 일대에서 그 활약상이 전개되고 있다. 

 

윤석열 정부 시기인 2023년 육군사관학교 교정의 홍범도 장군 흉상 이전 추진은 큰 사회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당시 국방부와 여권은 홍범도의 소련 공산당 가입 이력을 들어 『육사 정체성과 맞지 않는다』며 독립기념관 등으로의 이전 필요성을 주장했고, 일부 언론에서는 『여권이 철거가 아닌 이전이라는 입장을 밝혔다』고 보도했다. 

 

반면 광복회와 일부 역사학계, 시민단체, 야권 등은 봉오동 전투 영웅인 홍범도를 오늘날 이념 기준으로 재단하는 것은 항일독립투쟁 역사를 훼손하는 처사라고 비판했다. 그 뒤 논란이 커지자 육사는 2025년 결국, 흉상을 교내에 두는 것으로 결정하였다. 홍 장군의 흉상은 문재인 정부 때인 2018년 3월 지청천·이범석·김좌진 장군, 이회영 선생 등 다른 4명의 독립운동가 흉상과 함께 육군사관학교 충무관 앞에 설치됐다.


우리는 이러한 논쟁을 바라보며 참으로 안타까움을 느낀다. 일제강점기 조선 독립을 위해 목숨 바쳐 싸운 선열의 삶을 오늘의 이념 잣대로만 재단하는 것은 역사에 대한 온당한 태도라 보기 어렵다. 

1945년 해방 이전 항일투쟁에 나섰던 인물들의 공적은 우선 그 자체로 평가받아야 한다. 해방 이후 격동 시대 속에서 각자가 선택한 정치와 이념의 길은 또 다른 역사 맥락에서 바라볼 문제다. 


홍범도 장군 역시 당시 소련(현 러시아)에 남아 공산당에 가입한 이력이 있으나, 동시에 봉오동 전투를 승리로 이끈 대표 독립투사라는 사실 또한 부정할 수 없다. 그런 점에서 오랫동안 독립투쟁 영웅으로 존경받아 온 인물을 하루아침에 배척하려는 움직임은 많은 국민에게 역사 왜곡과 정치적 편 가르기로 비칠 수밖에 없다. 

 

필자는 최근 출간된 소설 《범도》를 통해 독자들이 홍범도 장군의 삶과 치열했던 항일투쟁 역사를 다시 한번 깊이 되새겨 보기를 권하고 싶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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